삼가 생각건대, 우리는 정해진 국경을 지키며 각기 모기 눈썹 같은 둥지를 보전하고, 정벌의 명령을 받으면 바로 달팽이 뿔 안의 난리 같은 전쟁을 일으킨다. 내부의 혼란을 복구하고자 할 때에는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고, 외적의 침입을 막을 때에는 적절한 군사력으로 대응한다. 생각건대, 우리들은 모두 기어 다니는 미물(微物)이니, 너희 진영(陣營)에 대해서는 본래 조금의 원한도 없다. 큰 종류는 마의(馬蟻)라 하고 작은 종류는 의양(蟻蛘)이라 하지만 본래가 다 한뿌리이고, 겨울에는 양지에서 지내고 여름에는 음지에서 지내는데 도처에 국경이 접해 있다. “개미는 수시로 흙을 나르는 일을 익혀 간다 [蛾子時術之]”라는 말이 있는데 내 아이를 먼저 사랑하고 나서 남의 아이를 사랑하는 뜻을 취한 것이며, ‘왕개미가 서로 도와준다 [蚍蜉相援]’는 비유가 있는데 남의 우환을 걱정하여 기꺼이 도와주러 달려간다는 말이다. 우리 사이에 혹여 양고기의 누린내를 다투는 자잘한 일로 시비를 따진다면 그 순간 개밋둑을 공유하던 화평이 깨지고야 말 것이다. 가을을 모르는 씽씽매미의 일생처럼 우리의 생애가 그 얼마란 말인가. 머리가 셀 때까지 서로 칼자루를 잡고 대치해서는 결코 안될 일이다. 개구리와 두꺼비가 서로 누가 더 큰가를 따지게 되면 결국 한집안끼리 창을 잡고 싸우고 마는 것이다. 짐짓 저마다 잘났다고 자처해도 결국엔 자벌레가 키를 재듯 별 차이가 없으며, 비록 근거 없는 말이 난무해도 그건 쇠파리 같은 소인들의 참소일 뿐이다.
그렇지만 꿈틀대는 너희 무리가 점점 간교한 생각을 쌓아 가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대나무로 엮은 뗏목을 강제로 점유한 걸 보면 너희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고, 곡식을 공물(貢物)로 바치는 일을 빠트린 걸 보면 소국(小國)이 대국(大國) 섬기기를 부끄러워함이다. 우리가 사신(使臣)을 보냈는데 너희는 잡아 가두어 버렸으며, 또한 도적질을 함부로 하여 주관(朱冠)을 훔쳐서는 다시 팔아 넘겼다. 마지막에는 둑을 허물려는 음흉한 잔꾀를 부렸고, 나무를 흔들어 대려는 미친 계책을 서슴없이 꾸몄다. 간사한 좀벌레들이 계속 생겨나서는 끝없는 욕심을 채우고 있으며, 독을 가진 전갈 같은 자들이 몰래 독을 쏘아서는 명분 없는 전쟁을 먼저 일으키고 말았다. 동류의 악독한 벌 떼는 상류(上流)의 중요한 땅을 핑계로 거들고 나섰고, 암암리에 이르러 온 파리매들은 홰나무 가지 아래 개미구멍을 엿보고 서 있다.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도는 맷돌 위를 기는 너희 개미 떼가 차츰 우리 성(城)을 위협하는 적군이 될 줄을. 이로 인해 종사(宗社)는 어지럼증을 앓듯 혼란해졌으니 군주의 걱정을 함께할 자가 그 누구겠는가. 기내(畿內) 고을은 모래알 같은 군사들이 죽을까 걱정이 대단하나 백성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막부(幕府)는 멀리 변방을 지키는 군사들을 철수시키고, 장수들은 갑자기 내린 출정의 부절(符節)을 받았다. 경보(警報)를 듣고 칼을 드니 메뚜기들이 기세를 올리듯 사기가 진작되었고, 북문(北門)으로 출정할 때 임금이 장수의 수레를 밀어 주니 서캐와 이가 서로 달래 주듯 두려운 마음이 위로되었다. 전력을 다해 격전의 날을 기다리면서는 등에가 저보다 큰 이[蝨]를 격파하듯 군사들의 용맹에 의지했고, 전쟁을 위한 작전 전략을 다듬을 때는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챌 때의 임기응변을 연구했다. 묘당(廟堂)에 대해서는 신기한 계책을 자문하였고 민호(民戶)에 대해서는 일일이 모두 군적(軍籍)을 조사했다.
쇠똥구리가 쇠똥을 굴리는 걸 보고도 귀신조차 우리가 대포와 같은 가공할 무기를 지녔다고 의심하고, 잠자리가 빠르게 나는 걸 보고도 오랑캐들은 날랜 군사들이 전차를 탄 것인가 두려워할 정도다. 군사들이 갑옷을 입고 창을 들면 달리는 전차(戰車)를 오르내릴 정도로 날래고 무거운 빗장을 들어 올릴 만큼 힘세며, 군진(軍陣)을 펼치고 대오(隊伍)를 형성하면 다들 곰을 두들기고 표범을 때려잡을 만큼 용맹하다. 눈을 부릅뜬 두꺼비처럼 의분(義憤)을 지녔으니 누군들 몸을 바쳐 충성할 뜻이 없겠는가. 진디등에처럼 날랜 군사들로 습격해도 핏물로 절굿공이가 떠내려갈 만큼의 대첩을 거둘 수 있으리라. 적장을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놓아줄 지략이 있나니 너희 군영들을 진압하는 게 무엇이 어렵겠는가. 군진(軍陣)을 닫았다 열었다 하면 차례로 너희 유격대(遊擊隊)를 잠식할 수 있으리라.
그렇기는 해도 결국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물건이고 전쟁을 잘하는 자는 극형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 법이다. 이기고 개선(凱旋)하여 조무래기 적군들을 다 섬멸했다고 보고하는 것보다는 전쟁을 하지 않는 참된 무도(武道)정신으로 함께 평안하게 지내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이 격문을 보내어 지렁이같이 구불구불한 너희의 완고한 구멍을 열고자 하는 바이다. 군대를 온전히 하여 모두 회군(回軍)함으로써 장수들의 갑옷 안에 이가 스는 고생을 하지 말게 할 것이며, 국경을 보전하고 백성을 쉬게 함으로써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부역자들도 짐을 내려놓게 하여 허리에 구더기가 생기는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할 것이며, 사졸들도 서둘러 군장(軍裝)을 꾸려 돌아가서 야전(野戰)에서의 고생을 추억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되면 그게 오히려 뒷수습을 잘한 최상책이라고 말할 수 있고, 이웃 나라와 화평하게 지내는 좋은 계책이 되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호접진(胡蝶陣)과 팔문금쇄진(八門金鎖陣)을 펴고 거미줄 같은 그물망을 치고 사면(四面)을 철옹성처럼 막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의 노련한 지략의 주머니 속을 더듬어 저 하루살이를 쓸어버리듯 너희를 소탕할 것이며, 모두 용마채(舂磨寨)속에 몰아넣어 도롱뇽을 빻듯이 너희들을 모두 전멸시킬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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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에서 등장하는 곤충 및 동물 : 큰개미(마이), 작은개미(의양), 왕개미(비부) 개구리, 두꺼비, 자벌레, 좀벌레, 피래미, 서캐, 이(蝨), 쇠똥구리, 곰, 표범, 진디물, 지렁이, 구더기, 나비, 거미, 하루살이, 도롱뇽 등이다. 영국학자 다윈의 진화론과 러시아학자 크로포토킹의 부조론이 연상된다.
매천(최익현)이 살았던 조선말 일본의 국권침탈에 스스로 항거하면서 비장한 심정을 나타낸 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