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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방이든 동방이든 유럽의 중세 세계는 기독교 신앙에 의해 이룩되었고 유지되었다. 당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아래 있는 세상과 사람보다 더 복된 것은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하나님을 동경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중세는 수도원 운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대였다. 수도사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도 이 세상에서보다는 수도원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관상하는 일이 더 고상하고 거룩한 영성을 개발하는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치 중세 세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도원적 세계와도 같았다.
이러한 수도원주의는 기독교 신앙을 “이 세상에서 멀어질수록 더 우수한 것”이라는 명제를 양산했다. 기독교 신앙의 공간적 분리운동은 오랫동안 중세인들을 만족시켰다. 그래서 중세의 개혁운동은 대부분 수도원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세상으로부터 공간적으로 분리된 중세의 수도원은 이 세상보다는 저 세상 즉 신앙의 현재성보다는 미래성에 훨씬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이러한 중세의 공간적 이탈 신앙은 “부패한 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조장했다. 즉 거룩한 신앙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부터 도피한 수도원의 “따로 공동체”는 중세 사람들에게 천국을 상징하는 역할을 넘어서 때론 천국의 관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중세의 수도원들은 모두 도시나 마을로부터 멀리 떨어진 인적이 드물고 한적한 곳에 위치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잘못이다. 중세 수도원들은 대부분 마을 가까운 곳 혹은 도시 안에 세워졌다. 그것들은 공간적으로 세상 혹은 사회 속에 있었지만 스스로를 세상과 사회의 일부가 아닌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그것은 불가시적인 거룩함을 위한 게토(getto)를 지향하는 것이었으나, 실로 가시적 수도(修道)를 위한 공간적 게토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중세 수도원이 지향한 공간적인 “외적 거룩함”을 인정받을 수는 있었으나, 그들의 “내면적 거룩함”은 의심받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가난 즉 무소유를 통한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유재산이 없는 수도사들은 가난했으나, 수도원은 공적 보조뿐만 아니라, 사적인 기부로 인해 부유했다. 그리고 그 부의 일차적인 수혜자들은 다름 아닌 수도사들이었다. 수도사들은 형식적으로는 가난했으나 실제로는 부자였다. 수도원의 부는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라는 수도원 계명을 파괴하는 주범이 되었다. 그것은 기도를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것으로, 노동을 단순히 고상한 정신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수도사들은 두 길 사이 즉 “거룩함에 대한 순수한 동경과 추구”와 “세상적인 필요와 본능적 욕구” 사이를 오가며 이중적인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이중적 삶을 수도원 밖의 사람들이 인식하면서부터 수도원적인 거룩함은 “외식” 이상의 것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다. 그 때 수도원이 추구한 거룩한 영성은 단지 공간적 분리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중세 후기에 수도원 밖의 사람들은 더 이상 수도원에 속한 사람들을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중세 수도원이 추구한 탈세속화의 종국적 비극이다.
게토화된 수도원 안에 살면서 세상적인 것보다는 거룩한 것을 추구한 수도사들의 신앙과 삶 사이의 괴리는 세상 속에 살면서 거룩한 것보다는 세상적인 것에 더 비중을 두었던 일반인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었다. 중세 수도원의 게토화는 단지 세상으로부터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도회들 사이에도 일어났다. 서로 다른 수도회들 사이에는 비교우위 심리와 적대감이 팽배했다. 시기와 질투와 비난이 난무했다. 한마디로 중세 수도원들은 집단 이기주의의 온상이었다. 수도사들이 수도원에서 습득한 모든 지식은 그들이 속한 집단을 다른 집단과 분리시키고 그 정당성을 옹호하는 집단 이기주의의 중요한 변호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이 비단 중세 수도원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수도원 제도를 모판으로 삼은 모든 중세 성당들에서도 예외 없이 일어난 일이다. 한 도시와 마을에서 독재의 전횡을 휘둘렀던 실체는 교황이 아니라 그 교구의 대성당이었고 그 대성당의 수석사제인 대주교였다. 오늘날 다수 교회와 다수 교회 담임목사가 실로 중세 대성당과 대주교와 너무나도 닮아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소수 교회와 소수 교회 목사들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편견에 불과한 것일까?
기독교의 거룩성과 세속성 사이의 갈등은 중세 수도원의 영성 운동을 통해 극복된 것이 아니라 더욱 심화되었을 뿐이다. 그들은 모든 세속적인 외양을 경멸함으로써 “구별된 거룩”을 추구했으나, 가장 세속적인 속성인 “내적 교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것은 그들의 이중적인 외적 삶을 가능케 하고 유지시키는 내적 이중성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교회는 외적인 구호와 내적인 욕구가 서로 다른 야누스의 모습이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와 같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에 대한 무지가 자신을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완전히 제거해버린다는 사실보다 더 큰 비극은 없을 것이다. 이 비극이 바로 한국교회의 비극이요, 한국교회에 속한 우리 모두의 비극이다.
2.
종교개혁가들은 그와 같은 수도원적 영성의 독소와 맹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과감하게 수도원 제도를 반대했다. 따라서 수도원은 개신교 유산 목록에 기록될 수 없었다. 그런데 유형적인 수도원의 유산을 전혀 물려받을 수 없는 오늘날 한국개신교회는 이상하게도 마치 수도원의 유산을 물려받은 것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외형적으로 한국교회의 개신교 기도원이 바로 그와 같은 유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기도원은 한국개신교의 매우 독특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큰 교회들은 대부분 자체 기도원을 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기도원과 자매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의 기도원은 여러 가지 면으로 한국교회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아마도 개신교 영성 개발의 핵심 역할을 감당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른 부작용 역시 너무나도 많다. 중세 수도원들처럼 한국의 기도원들 역시 긍정적인 역할에도 불구하고 이원론에 근거한 탈세속화라는 심각한 부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속화를 걱정하거나 도무지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 고민거리를 해결하고 싶을 때 기도원을 찾아간다. 또한 기도하기 위해 홀로 교회를 찾거나 새벽을 깨우기도 한다. 거룩을 추구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경향은 오늘날 한국개신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한국교회는 최소한 세상이라는 장소보다 교회라는 장소가 좀더 거룩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들이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성도들을 종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 밖의 일은 “세상적인 일”이요, 교회 안의 일 즉 교회의 일만이 “거룩한 일”이라는 전제를 근거로 좀더 거룩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프로그램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예배당 건축”이라는 표현보다는 “성전건축”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경향 역시 이러한 장소적 거룩성을 은연중에 옹호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교회라는 이름의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 안달이 난 한국교회를 볼 때마다 마치 자신들의 이름을 들내기 위해 쌓기 시작한 “바벨탑”이나 중세의 대성당들이 연상되는 것은 까닭 없는 것인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새로운 건물을 건축할 때 문화적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교회=성전”이라는 형식을 탈피하고자 하지만, 그 시도는 단지 거룩한 장소의 유형적 개념만 제거한 것이지 그것의 무형적 개념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무형적 개념은 교회 프로그램을 통한 “우리 교인 만들기”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특별새벽기도운동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좀더 신랄하게 비판한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든 프로그램은, 그것이 신앙적인 것이든 문화적인 것이든, 사실 “우리 교회”의 차별화를 통해 자신의 집단을 비교우위에 놓으려는 집단 이기주의의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교회들 사이에 자발적인 화합이나 순수한 그리스도 중심의 연합을 찾아보기 힘들다. 큰 교회들이 멀리 있는 선교사들을 후원하고 타국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는 경쟁하듯 열심을 내지만 가난한 이웃 상가교회나 지하교회를 돌아보는 일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실정이다. 큰 교회는 이웃의 작은 교회를 무시하고 작은 교회는 이웃의 큰 교회를 비방한다.
비교심리와 경쟁심리는 큰 교회든 작은 교회든 동일하게 존재한다. 다만 그 표현 양상이 다를 뿐이다. 이웃 교회와의 공간적인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은 멀어지고 오히려 적대감만 커진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교회라고 하면서 그것도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면서 서로를 적대시할 수 있는가? 이러한 현상은 “우리 교회”(혹은 “우리 교단”)라는 집단이기주의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이러한 집단 이기주의의 기저에는 교회가 도시와 사회 속에 있지만 그것에 동화되거나 그곳에 침투하여 동화시키려고 하기 보다는 구별된 거룩한 집단으로 군림하고 싶은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교단과 교파, 심지어 이단종파를 불문하고 “거룩”의 개념을 장소적인 개념, 즉 “교회 정문 안의 요소”로 인식하고 있는 점은 공통적이다. 이러한 인식이 부지불식간에 “우리 교회”라는 개념과 만나 집단이기주의에 사로잡히게 한다. 즉 그 두 요소는 “우리 교회(교단)만 거룩한 교회”라는 등식을 쉽게 만들어 낸다. 그러나 어느 교회도 이러한 분석에 쉽게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다른 교회들도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교리적 구호에 불과한 것이지 실제 모습은 전혀 다르다. 실상은 심각한 집단이기주의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3.
교회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집단으로 인식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정당한 일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구별이 교회 자체의 거룩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거룩성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죄인들로 구성된 죄인공동체인 세상 속의 교회는 여전히 연약하다. 연약하기 때문에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한다.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어떤 특정 교단, 특히 거룩과 경건을 중시하는 보수 교단에 소속 되어 있다는 사실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는 것을 보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회, 즉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교회만이 참된 교회이다. 스스로 머리임을 자처하면서 아귀다툼하는 곳은 형식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일 수 있으나 세상의 빛이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참된 교회로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교회는 스스로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구별하는 “거룩한 공동체”로 만드는 일보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처럼 이 세상을 섬기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 속에서 희생하며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백성들을 그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시고 보호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시는 교회의 거룩함이란 외적인 일이나 장소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목적과 의도에 의해 구별되는 것이다. 세상은 겉모양과 결과 밖에는 볼 수 없기 때문에 그것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한다. 하지만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은 중심을 보실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외적인 것만으로 판단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문제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사라지고 대신에 외적인 결과주의에 사로잡혀 산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식으로 해석한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참된 믿음 즉 내면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믿음이다. 이것이야 말로 코람데오(Coram Deo)의 정신, 신행일치의 삶을 회복하는 길이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유익이나 “우리 교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거나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유익을 추구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을 외적인 조건으로 구별하고 구분하기 위해 분주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와 동행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열심을 다할 것이다.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면서도 스스로 자신을 거룩한 자로 구별하는 이중적인 인격으로 살기 보다는 그리스도의 유익을 추구하면서도 스스로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줄 아는 정직하고 겸손한 인격의 소유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 윗 글은 황대우 목사(개혁주의학술원 책임연구원)께서 뉴스앤조이에 기고부탁한 글을 이곳에도 옮겨놓은 글임을 밝힙니다.
첫댓글 '중세 수도원이 추구한 탈세속화의 종국적 비극'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그래도 탈세속화를 위한 노력이라도 있었군요 ... 누구나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형편에 좋은 교훈이 될것 같습니다. 무엇이 이런 역사적 평가를 받게 만들었는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