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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지역 | 서울 > 중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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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청계천로 274 |
시장 유형 | 상설시장 |
형성 시기 | 1962년(개설) |
시장 현황 | 점포 수 1,338, 면적 8,078m2 |
특산물 | 의류 |
같은 지역 다른 시장 | 광장시장, 동대문종합시장, 제일평화시장 |
주변 볼거리 | 청계천, 덕수궁 |
전화번호 | 평화시장 상인회 02-2265-3531~2 |
사이트 URL | http://pyounghwa.com/ |
평화시장은 한국전쟁 때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시장으로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아 시장의 이름을 지었다. 청계천 주변에 정착한 이들은 생계를 위해 재봉틀로 미군들의 군복이나 담요, 구호물자 등으로 옷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장이 형성되었고, 청계천시장으로 불리다가 평화시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평화시장은 청계천 복개 공사와 여러 차례의 화재 등을 겪으면서도 1962년 3층짜리 건물을 짓고, 정식으로 시장을 개설했다. 평화시장은 기존의 맞춤옷에서 기성복으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과 합섬섬유의 발전에 힘입어 옷을 만들어냈고, 큰 인기를 끌면서 한때 인근 시장들과 함께 한국 기성복의 70%를 생산할 정도로 의류 산업을 선도했다.
이러한 평화시장의 성장으로 청계천 천변과 동대문 일대에 의류를 생산, 판매하는 여러 시장들이 들어섰고 1990년대에는 밀리오레를 비롯한 대형 패션몰이 곳곳에 들어서 오늘날 동대문패션타운이라는 거대한 의류 시장을 형성했다. 동대문패션타운은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많은 젊은이들을 비롯한 시민과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다.
처음에 평화시장을 세운 상인들 중에는 한국전쟁 때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60% 정도로 그 수가 많았다. 이들은 조국이 평화 통일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아서 시장 이름을 ‘평화시장’으로 지었다.
1945년에 맞이한 해방은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고 기쁨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혼란과 무질서가 공존했다. 그리고 삶의 설계와 준비가 이루어지기 전에 일어난 1950년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이후 강제로 외국에 끌려갔던 동포들이 고향을 찾아 귀환하고, 전쟁을 피해 많은 피란민들이 떠돌았다. 이들은 주거와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찾아왔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즈음해서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던 많은 사람들은 허가받지 않은 시장이나 길가에 좌판을 펼쳤다. 서울의 도로변 곳곳에 노점을 하는 상인들이 급격하게 늘어나서 ‘도시의 노점화’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서울의 경우 노점이 펼쳐진 곳은 주로 기존에 있던 큰 시장 주변이나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상가 또는 기차역, 호텔 주변이었다. 특히 노점이 많았던 곳은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성동시장 등 규모가 큰 시장의 주변이었다.
노점상들은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팔았다. 대개는 일상에서 자주 쓰는 성냥 같은 생활용품과, 노점이 펼쳐진 지역에 따라 조금 달라졌지만 헌 옷이나 액세서리를 팔기도 했다.
노점은 말 그대로 노점이었다. 과거 보부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보따리를 펼쳐놓고 팔거나 이동이 용이한 손수레를 이용하기도 했다. 노점상들은 인도는 물론, 차도까지 침범해 물건을 팔았기 때문에 사람들과 자동차의 통행에 크게 방해가 되었다.
이러한 노점상들 때문에 길을 통행하는 보행자와 자동차뿐만 아니라 시장의 상인들로부터도 불만이 터져 나왔다. 세금을 내고 영업하는 시장 상인들과 그렇지 않은 노점상들은 결국 경쟁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사정 때문에 불량배들이 시장 주변에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보호비라는 명목으로 노점상들로부터 돈을 걷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정부나 시 당국은 종종 경찰을 동원해 노점을 단속하고 철거했다. 1946년 4월에는 경찰이 노점 단속을 벌여 이틀 동안 150여 명을 붙잡아 시말서를 쓰게 하고, 상품을 압수했다. 그러나 노점상들은 달리 생계 수단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심하게 단속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노점상들도 단속이 뜨면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가 단속이 끝나면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단속으로 노점이 철거되어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었다. 1955년 7월에는 가족을 두고 홀로 북쪽에서 내려온 어느 노점상이 단속에 항의하며 을지로4가에서 자신의 몸과 손수레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래도 단속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1958년 청량리경찰서는 밤 12시부터 새벽 5시까지 청량리에서 홍릉 사이에 있던 200여 개의 노점 점포를 완전히 철거했다.
이렇게 정부와 시 당국은 노점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고, 그래서 나온 정책이 노점의 양성화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평화시장이었다. 평화시장은 청계천 천변에 자리를 잡고 있던 노점상들을 모아 세운 시장이었다.
해방 이후 외국에서 돌아온 갈 곳 없는 많은 사람들이 남산 기슭의 해방촌과 청계천 천변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해방촌이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해방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붙은 이름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고 노점상이 많아지면서 1949년에는 청계천의 북쪽에 있는 창신동에 청계천시장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장이 개설되었다.
여기에 한국전쟁 이후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과 피란민이 얽혀서 청계천으로 모여들었다. 청계천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무허가 건물과 노점이 천변을 따라 늘어서 있고, 여기에서 나오는 생활하수와 쓰레기로 인해 지저분하고, 악취를 풍겼다. 게다가 청계천은 서울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 문제도 발생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구호물자나 미군 부대에서 나온 군복과 담요 등을 활용해 옷을 만들어 팔았다. 이렇게 청계천에 노점으로 이루어진 시장을 처음에는 지역의 이름을 따서 청계천시장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청계천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60%가 북쪽에서 월남한 사람들이었기에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시장의 이름을 평화시장이라고 붙였다.
한편 평화시장은 당시 무허가 시장이었기 때문에 시달림을 많이 받았다. 1958년부터 중부경찰서의 경찰들은 점포 하나당 2만 원씩 뇌물을 받고, 명절 때마다 돈을 받아갔다. 고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크고 작은 화재가 평화시장을 괴롭혔다. 1957년 11월에 불이 나서 40채의 점포를 태웠고, 1959년 1월에도 132채의 점포를 불태우고 진화되었다.
이렇게 안팎의 악재에도 꿋꿋하게 버티던 평화시장에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1958년에 시작된 청계천 복개 공사였다. 이 공사는 광교에서 청계5가에 이르는 곳에 있던 노점을 모두 철거한 상태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평화시장 또한 위태로웠다.
하지만 평화시장의 상인들은 집단적으로 대응에 나섰고, 서울시는 청계천 부근의 도로 폭을 50m에서 70m로 넓히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리고 확장된 20m로 확보된 약 3,306m2의 부지를 시장터를 제공하기로 제안했다. 그 대가로 상인들은 20m를 확장하는 공사 비용을 대고, 매년 시청에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주변에 전통과 규모를 갖춘 동대문시장이 있고, 이미 많은 비용을 들여 건립한 중부시장이 있다는 점을 들어 평화시장을 살릴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평화시장 상인들은 평화시장재건위원회를 조직해 정계에 조직적으로 로비를 했고, 1960년 3월 15일에 실시한 이른바 3·15부정선거에 자금을 추렴해서 지원했다. 이 일로 인해 평화시장재건위원장은 부정선거 자금을 제공한 죄로 구속되었고 평화시장에 부지를 제공하려던 시장 또한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런저런 난관 속에서도 평화시장은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1962년에 3층짜리 건물을 세우고, 정식으로 시장 허가를 받아 평화시장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면적이 9,425m2인 철근콘크리트 3층 건물에는 730개의 점포가 입주했다. 시장 개설자는 평화상가주식회사였다.
평화시장의 주력 사업은 의류였다. 그래서 2~3층에는 봉제공장이 위치하고, 1층에는 위층 공장들에서 만든 옷을 파는 매장으로 구성되었다.
이 사업은 시대에 맞물려 크게 성공했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옷감을 사서 옷을 집에서 직접 만들어 입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양복점이나 양장점에서 맞춰 입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평화시장에서 기성복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평화시장이 옷을 만들어 파는 시장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북쪽에서 내려올 때 재봉틀을 소중하게 싸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고, 그것으로 군복이나 담요 등을 이용해 옷을 만들어 팔던 경험이 있었다.
1960년대 한국 경제가 부흥하기 시작하고, 옷을 만들어 입기보다 사서 입게 되면서 기성복은 말 그대로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호황을 누릴 때는 만드는 즉시 팔릴 정도였다. 명절 때가 되면 많은 상인들이 옷을 사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이처럼 평화시장이 호황을 누리자 통일상가와 동화시장이 의류의 제작과 판매에 뛰어들었다. 통일상가는 1968년 10월 평화시장 동쪽 옆에 4층짜리 건물을 세웠고, 동화시장은 1969년 8월에 5층짜리 건물을 세웠다.
1970년에는 평화시장을 중심으로 통일상가와 동화시장이 함께 전국 기성복의 70%를 만들어냈다. 평화시장은 북한에서 가지고 내려온 재봉틀로 한국 사회의 의류 문화를 바꾸어놓은 셈이다.
평화시장의 비약적인 성공에는 몇 가지 요소가 있었다. 먼저 맞춤옷에서 기성복으로 변화한 시대의 흐름을 적절하게 올라탄 것이 주효했다. 두 번째는 과거에 비해 나일론, 폴리에스터, 아크릴 등을 비롯한 합성섬유가 발전하면서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노동자들의 고된 희생 덕분이었다.
평화시장의 화려한 성공 가도에는 어두운 이면도 존재했다. 평화시장이 활황을 누리던 시절, 노동자들은 바쁠 때면 하루 평균 14~15시간씩 일을 해야 했다. 잠을 쫓는 약을 먹으며 야간작업을 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한 노동 현장도 열악했다. 봉제공장의 천정이 1.5m에 불과해 일어나 설 수도 없을 만큼 낮았다. 그것은 원래 층높이가 3m였는데, 이를 나누어 2층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26.44m2(8평)의 좁은 공간에 32명이 사육장의 소처럼 몸을 붙이고 일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손에 쥐는 대가는 보잘 것이 없었다. 흔히 ‘시다’라고 부르는 견습생들은 미싱사와 재단사를 보조하며, 실이나 단추를 나르고 실밥을 뜯는 등 허드렛일을 했다. 당시 시다들의 평균 나이는 15세였다. 그리고 그들이 한 달에 받는 돈은 1,500원(1964년)으로 하루 50원 꼴이었다. 당시 귀한 음식이었던 자장면 가격이 15원, 커피 한 잔이 50원이었다.
1970년 평화시장을 상징하는 인물은 전태일이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피복 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진정서를 제출했지만 묵살 당했다. 그러자 근로기준법을 화형시키는 데모를 계획한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자, 자기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라고 외치다가 쓰러졌다. 1970년대 불길처럼 타오른 노동운동은 평화시장에서 일했던 전태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태일의 죽음을 뒤로 하고 1970년대 이후 한동안 평화시장이 주도하는 의류 산업은 내수가 끝없이 확장되고 수출까지 하게 되면서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근로자들의 노동 환경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당시 평화시장과 통일상가, 동화시장 등에는 적어도 550개의 공장이 있었고, 2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5년 청계피복노동조합의 조사에 따르면 2만 5,000명의 노동자가 일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73년 위의 노동자들 중 월 2회를 쉬는 사람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
1980년대에 이르면 평화시장과 인근의 통일상가나 동화시장의 봉제공장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동화시장의 경우 1982년에 250개였던 것이 1985년에는 57개로, 거의 200곳 정도가 줄어든 셈이다. 이는 의류 산업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 공장의 분산 때문이었다. 하청 관계가 확립되면서 의류 제작 시스템이 변화했고, 그 결과 공장이 분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공장의 분산은 크게 2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과거와 달리 노동자의 수급이 어려워졌고, 다른 하나는 수출 중심의 대기업들이 내수시장으로 눈을 돌리면서 평화시장의 의류 판매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평화시장은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재단 등 중요한 공정만 남기고, 나머지를 하청으로 넘기는 형태로 변화했다. 비용을 절감하고, 트렌드에 더 빨리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상황은 평화시장 주변의 풍경을 변화시켰다. 주택가였던 숭인동과 창신동, 충신동 일대가 평화시장에서 일을 받는 가내 하청의 밀집 지역으로 바뀐 것이다.
평화시장은 1990년대에 들어 사회주의 국가들과 교류가 생기면서 기존의 바이어 외에도 러시아를 비롯한 많은 나라의 상인들이 찾아와서 물건을 사 가기 시작했다. 동구권과 중동의 상인들도 찾아왔다. 이 무렵 평화시장 주변에는 통일상가와 동화시장 외에도 의류를 판매하는 시장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평화시장에 또 다시 위기가 찾아온 것은 IMF로 대변되는 1997년 경제위기 때였다. 대표적인 과잉 생산 품목인 의류는 이미 재고가 쌓여 있는 상태에서 소비자들의 소득 감소로 인한 판매 부진이 이어졌다.
한편 1990년대 후반부터 평화시장 주변에 프레야타운, 밀리오레, 두산타워 등 거대 패션몰들이 문을 열었다. 그 이후로도 디자이너클럽, 유어스 등 많은 패션몰이 개장했다. 새로운 형태의 패션몰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화제를 낳으며 발길을 끌었다.
2016년 현재 평화시장을 비롯해 38곳의 패션몰이 모여 있는 동대문패션타운은 관광특구로 지정되어 젊은이들부터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오늘날 밤이면 화려한 불빛을 반짝이는 동대문패션타운은 상당 부분 평화시장에 빚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랜 세월,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한국의 의류 산업을 견인해 왔기 때문이다.
평화시장은 지하철 1, 4호선 동대문역, 2, 4, 5호선 동대문운동장역에서 내리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또한 주위 도로에는 많은 버스들이 지나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평화시장 주변에는 거대 쇼핑몰인 두산타워, 밀리오레, 동대문 케레스타(옛 프레야타운) 등이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함께 이용하기 좋다.
평화시장은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에는 단체복, 작업복, 모자, 수영복 등 다양한 의류를 팔고 있으며 2~3층은 숙녀복 매장이 많다.
평화시장은 청계천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청계천이 복개, 복원되는 과정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았고 지금도 여전히 청계천 바로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청계천은 조선 초기에 도성 건립의 일환으로 개천을 정비하면서 둑을 쌓아 하천을 만든 것이다. 오늘날의 청계천의 모습은 영조 때 만들어진 것이다. 영조 때에 두 번의 정비 작업을 통해 개천의 폭을 넓히고 수로를 곧게 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관리를 소홀히 해 맑은 물이 흐른다는 의미의 청계가 무색할 정도로 오염되었다. 심지어 서울의 하수구라고 불릴 정도였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청계천은 해외에서 귀국한 사람들과 피란민들로 해서 슬럼화되었고, 도시 정비를 위해 1958년부터 복개가 시작되었다. 1971년 그 위를 지나는 청계천고가도로가 완공되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교통 혼잡과 환경 훼손이 제기되어 2005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청계천에는 흥미로운 골목이 하나 있다. 1959년부터 생겨나기 시작해서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헌책방 골목이 그것이다. 오늘날 과거처럼 붐비지는 않지만 여전히 지적인 호기심이 가득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보물창고와 같은 곳이다.
평화시장 주변에는 시장들이 몰려 있어 먹을거리가 매우 다양하다. 의류 시장의 특성상 야간에 고객들이 몰리기 때문에 야식 문화도 많이 발달해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 닭한마리골목이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골목으로 처음에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아니라 단순히 칼국수에 닭고기를 넣어 팔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 골목에는 닭칼국수라는 간판을 많이 볼 수 있다.
닭한마리는 큰 양푼에 닭과 육수를 붓고, 끓이는 음식이다. 닭이 읽으면 고기를 소스에 찍어 먹고, 다 먹고 나면 국물에 칼국수를 넣어 끓인다. 닭한마리골목은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소문이 나서 관광객들도 심심찮게 찾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