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답사보고서
<선비의 정신을 배우고 오다: 수당고택과 추사고택을 다녀와서>
역사학과 20142950 최지수
예산 답사보고서 마지막.hwp
나는 예산이 고향인 지인을 통하여 그 곳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어오며 꼭 한번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던 중에 5월 28일에 예산을 방문한다는 당일 답사일정을 보고, 바로 신청을 하게 되었다. 사실 예산하면 덕산면 덕숭산에 있는 사찰인 수덕사가 유명하여 그곳에 방문할 것 같았지만, 이번 답사의 테마는 그와 달리 양반들의 고택을 방문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평소에 잘 알지 못했던 곳에 들른다는 것과, 뛰어난 선비의 고택에 방문한다는 것에 대해 설레며 친구들과 함께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를 타고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수당 이남규 선생의 고택’이었다. 이 곳은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임이 명시되어있는 것을 봐서, 굉장히 대단한 분이 사셨던 곳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士可殺 不可辱’이란 말은 누구나 한번 쯤 들어봤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라는 명언을 실천하신 분이 바로 이남규 선생이셨다. 이 분은 이 지역에서 조선 말기에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우셨으며, 독립운동을 하신 위대한 분이셨다. 또한 많은 일제의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힘쓰시다가 일제의 칼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이남규’라는 분의 업적을 모르고 살아왔을 뻔 했는데, 현재 조국의 소중함도 모르고, 위대한 조상들의 업적을 뒤로 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이분을 알게 된 점이 너무 감사했다.
우리는 고택에 들르기 전에 먼저 수당기념관에 들렀는데, 원래 우리학교에 교수님이시던 분이 직접 이 곳을 지키시고 계셔서 감사하게도 이 곳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이곳을 방문하면서 ‘조상들이 역사와 조상에 대한 소중함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이남규 선생에 대한 유물들이 이렇게 전시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우리 조상들 중에도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계실 수 있는데, 그 후손들이 그런 자료를 모으거나 전시실을 세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남규선생의 자손들은 계속해서 이 곳을 지키며 보존하고 있기에, 선생의 업적이 잊혀지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의 후손들에게도 존경스러운 마음이 생기기도 하였다. 또한 이에 앞서 이남규 선생이 후손들에게 뚜렷한 역사관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에, 수당가에 이충구를 비롯해 이장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국가에 훈장을 받는 애국자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기념관 안에는 이남규 선생의 일기부터, 유묵을 모아놓은 책과, 수당잡고, 수당집, 벼루에서 호패까지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또한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이해 할 수 있도록, 연표와 자세한 설명들이 벽에 나열되어있으며, 동영상을 볼 수 있는 공간까지 잘 마련이 되어있었다. 또한 ‘수당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어, 이 집안이 얼마나 훌륭한 애국자 집안이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남규 선생은 문과에 급제하고 목민관에 길로 들어섰을때도, 백성을 위해 힘썼던 사람이며, 안동관찰사로 부임했을 때는 안동의 의병들까지도 그를 반겼을 정도라고 한다. 그는 주요 중앙직책을 거치며 궁내부 특진관까지 역임하는 큰 역할을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의 신임을 얻은 사람이었다. 그는 관직에 올라서 일본이 침략을 하려는 것이 눈에 보일 때마다 상소를 올리며 애국의 의지를 분명히하기도 하였으며,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탈 속에서 홍주의병을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이런 그는 어떤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아 일제에게 눈엣가시였기 때문에 결국 일본군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렇게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운 이남규 선생과, 그의 뒤를 따른 장남 이충구의 얼이 계속 해서 남아있게 되어, 이후에 국내외로 독립활동을 전개하던 손자 이승복까지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나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후에 증손자 이장원은 6.25전쟁 당시 해병장교로서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한 호국정신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사실까지 확인하며, 수당가의 얼은 우리 민족 모두가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념관에서 나오면 바로 선생의 고택과 사랑채를 볼 수 있다. 이날에 날씨가 매우 더웠는데 지붕을 높게 지어서, 바람이 잘 들어 모든 학생들이 시원하게 교수님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 고택의 구조는 신기한 면이 많았는데,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층을 만들어놓았고, 또한 사람들이 잘 수 있도록 문도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사랑채가 안채보다 더 앞으로 나와서 여성이 남성보다 우위적인 면모를 볼 수도 있었는데, 정확한 사실은 모르지만 다른 일반적인 안채와 사랑채 구조와는 달라서 신기했었다. 이 곳에 있다 보니 며칠 푹 자고가고 싶을 정도로 산도 아름답고 공기도 좋고 바람도 선선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심 속에서 벗어나 이곳으로 오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지기도 했다.
수당고택에서 떠나와 간단히 메기매운탕과 막걸리를 마셨다. 메기를 먹어본 적도 없고, 막걸리도 즐겨먹는 편이 아니었는데, 이날 답사가 너무 재밌어서인지, 밥도 맛있고 술도 너무 맛있었다.
이어서 들른 곳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택’이다. 이곳에서도 고택에 방문하기 전에 먼저 기념관에 들러서 자유롭게 관람을 하였다. 이곳은 수당기념관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동영상실도 크게 마련되어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글씨로 특히 유명한데, 그의 글씨는 지금봐도 우아하고 명필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는 붓글씨를 잘쓰기 위해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끊임없이 수련했다고 한다. 그는 이외에도 학문에도 힘을 썼는데, 박제가로 인해 북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청나라 고증학도 습득하며 1816년 <실사구시설 實事求是設>을 정리하기도 하였다. 그는 급제를 한 후에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학문과 서예, 그림에 몰두를 했다. 예술가들이 극한의 고통에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듯이 그도 그런 상황 속에서 아름다운 작품들을 완성시켰고, 그의 추사체는 제주도 유배당시 완성되었다. 앞에서 수당 이남규 선생은 우리나라를 위해 싸웠던 선비였다면, 추사 김정희 선생은 학문과 서예에 끊임없이 힘쓴 요즘의 '엘리트 코스' 선비라고 생각이 되었다. 요즘 학생들은 억지로 공부하고 학문에 관심을 온전히 주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런 점에서 추사를 본받아 좀 더 학문과 글에 학생들이 관심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기념관에서 나와 좀 걷다보면 추사고택이 나온다. 고택주변도 아름답고 넓어서, 마치 서양에 궁전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고택이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고택 안에는 추사의 자취가 남은 곳인 만큼, 많은 글들이 붙여져 있었다. 교수님이 감탄을 하시면서 몇 개의 글에 대한 해석을 해주셨는데, 어쩜 같은 사람인데 추사는 그런 깊은 생각을 하였으며, 그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을 지녔을지 감탄하게 되었다. 또한 그의 고택과 사랑채도 매우 아름다웠고, 햇볕도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하여 학생들이 좋은 관람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두 개의 고택에 다녀오면서, 수당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애국심을 가질 것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고, 추사를 통하여 학문에 대해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예산에 이런 선비들의 고택이 있었다는 것을 모른 체 살아왔다는 것이 죄송할 정도로 귀중한 시간이었으며, 앞으로는 많은 고택에 찾아다니며 우리 선비들의 정신을 본받아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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