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너머 산촌 마을
松鶴 김시종
창 너머 산촌에는 기와집이 옹기종기 산자락을 적시고 있는 것을 본다.
산촌의 마을은 배산 입수가 좋고 양지바른 곳에 일가 친족이 집성촌을 이루며 오순도순 사는 곳을 볼 수 있다. 마을 뒤편 산에는 대나무가 무성하다. 뒤쪽에 대나무를 심어둔 것은 선비들의 곧은 정신을 옆 볼 수 있고, 한편으로는 지진에 대한 대비책이 아닌 가 싶기도 하였다.
옛 선인들은 풍수지리학을 중요시했었다. 입지 조건이 좋은 곳을 찾아 마을을 조성하고 생활을 영위한 가 싶었다. 마을을 중심으로 백호가 발달하면 재물이 태산을 이루고, 청룡이 줄기차게 뻗으면 자손이 입신출세한다고 했다. 건너편에는 안산이 있고, 산기슭에는 맑은 물이 흘러들어오는 입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산수가 수려하고 경관(景觀)이 아름다운 강변에는 운치 있는 정자를 볼 수 있다. 정자에는 옛 선비들이 도포를 걸치고 시조창을 노래하며 풍류를 즐긴 흔적이 눈에 선하기도 해진다.
집성촌은 대개 입지가 좋은 금계 포란 형의 형태에 마을이 형성되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조상을 숭배하고 혈통과 가문이 좋은 자손이 과거에 급제한 후 정승 판서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이 같은 이야기는 전설이 아닌 실화가 많이 있다. 그래서 풍수지리학은 미신이 아니고 과학적 근거를 두고 하는 이야기라고 하였다.
한국인은 음택을 선호하고 일본인은 양택을 좋아한다고 했다. 사대부 출신 문중의 안방이나 사랑채에는 봉창이 없다. 다만 대청마루에는 뒷문은 있다. 불천지위(不遷之位)제사를 모실 때는 사랑채 대청마루에서 종손을 중심으로 자손들이 함께 정중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신위를 모시고 참배한다.
통상 종택은 마을 중심에 있다. 주산에서 내려오는 지기(地氣)가 살아 움직이는 원기가 모이는 곳에 종택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건축물 구조는 미음 자형의 구조를 갖추고 있음을 본다.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고 우측에는 적은 행낭 채가 있으며 건너편에는 곡간 채가 있다. 안쪽에는 내실이 있는 안채로 구성된 것을 본다. 밖에서는 내실을 볼 수 없도록 건축된 특징이 있다. 그만큼 한 집안에 종부의 자리가 위엄을 갖추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농촌은 일손 부족으로 다문화 가정이 있겠지만, 그래도 오랜 전통을 지닌 아름다운 마을은 문향이 우러나고 전통을 살리기 위한 문화 체험 마을로 가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통마을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과 선조가 하사한 물품이 문화재 또는 국가 보물로 지정된 것이 있다. 오백 수십 년이 지난 유품을 구경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유품 관리를 위해 국가에서 유품 전시관을 만들어 관리하는 마을이 개실 마을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의 단면을 알기 위해 젊은이들의 학습 체험을 위해 현장 실습을 대대적으로 하는 것도 오늘날의 실정이다.
문향이 깃든 문충세가(文忠世家)마을도 요사이는 글 읽은 소리 대신 도시 소시민의 체험 학습장으로 분주한 날을 보내며 돈벌이도 잘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아름다운 개실 마을은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 1동에 있다. 개실 마을은 정부로부터 수차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되어 많은 상금도 받았고, 국가로부터 마을 가꾸기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눈여겨볼 것도 많다, 연자방아, 물레방아, 그네뛰기, 활쏘기, 뗏목 타기, 딸기 따기, 도적 굴, 종택(문화재), 도연재(문화재), 선비들의 글방, 유품 전시관, 엿 만들기, 화살촉 던지기, 포석정, 선죽교, 소 싸움장 등 다양한 체험 학습이 되고 있다.
개실 마을이 아름다운 마을로 선정된 배경에는 무오사화를 당한 점필재(佔畢齋) 金宗直선생의 종택과 一善 김씨의 집성촌으로 영남사림 학파의 조종(祖宗)이며 거유(巨儒)이시다. 선생의 제자 중 현재까지 문과에 급제자는 48명이다. 그중 장원 급제한 제자가 13명이나 된다.
15세기 후반 이들은 성종 시대를 이끌며 조선의 유교 문명을 완성하였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는 평을 받고 있다. 제자 중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은 도학을 얻었고, 홍유순(洪裕孫)과 남효온(南孝溫)은 절개를 이어갔고, 김일손(金馹孫), 조위(曺偉)는 문장을 얻어 갔다.
학문을 닦아 문묘(文廟)에 배향된 김굉필, 정여창은 절의를 지켜고, 생육신으로 추증된 김시습, 남효온은 문장과 정치로 이름을 떨친 조위, 김일손 등이 모두 선생의 제자들인 것이다. 동방 오현의 제자로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직 등도 선생의 제자들이다.
선생은 사후 6년이 지난 후 억울한 부관참시를 당했으나 1689년(숙종15년)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1709년(숙종35년)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받고 복권되었다. 역사를 바르게 세우려 한 올곧은 선비에게 내리는 당연한 역사적 평가였다. 조선 유학의 정맥이며 사람의 조종(祖宗)이신 선생의 유택은 현재 한 뫼산 동록에 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부관참시 후 한 뫼산 자락에 이장하자, 여산 대호(如山大虎)가 날마다 무덤 옆에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가 선생의 묘지 옆에 죽어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양지바른 곳에 장사를 지내 주었더니, 그 뒤로 이 마을에는 도둑이 들지 않았다고 한다.
후손들은 이 의호총(義虎塚)에 ‘인망호폐(人亡虎斃)’라는 비(碑)를 세우고 지금도 의관을 바로 하여 예(禮)를 다하고 있다.
문단 약력
雅號:松鶴,「영남문학」신인문학상 수필 등단,
*제 50주년 민족 통일문화제전 대구광역시협의회 회장상 수상. 한국경찰문학회 유공 포창.
*수필과 지성동인, 영남문학 대외협력 이사, 대구문인협회, 대구수필가협이사, 이후문학동인, *국제 펜 한국본부 대구지역위원, 文登伊 구락부 (역), 한국경찰문학회 대구, 경북지회장.
*시집:「봄의 지열」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했습니다.
감사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