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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5.주일설교말씀. 히브리서8:1~13절. 새언약에 대하여
제목 : 새 언약
할렐루야! 오늘도 말씀을 사모하여 새생명교회로 발걸음을 옮긴 성도들에게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하심이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이 새 언약을 바라고 믿고 또 선택하는 일입니다. 이런 까닭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연약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사랑과 약속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변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선택에 우리의 신앙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생각해 보고 싶은 첫 번째 주제는 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바로 지금까지 앞장에서 이야기했던 이야기의 주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바로 우리 앞에 있다는 이 현실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저자가 계속해서 이야기해온 주제입니다. 예수님을 지금 계속해서 설명해 오십니다.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가장 아름다운 뛰어난 이름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영원하신 분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으신 그분에 대한 설명을 쭉 해오면서 그분이 지금 우리 앞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앞에 있으면 우리는 도피할 수도, 회피할 수도, 변명할 수도 없습니다.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 이제는 결단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뛰어나고 찬란하며 시작도 없고 끝이 없으며 영원한 대제사장 예수였습니다. 이 예수는 하나님께서 약속보다 더 큰 맹서로 우리들에게 세워 주셨고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 주셨던 분입니다.
7장 26절에서는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분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십니다. 그분이 지금 여러분 앞에 와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오늘 첫 번째 주제 말씀입니다.
① 하늘 보좌 우편의 예수님
신앙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고 이 예수를 만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그 예수를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그와 더불어 먹고 마시고 사귀고 교제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마음속에 지금 여러분과 함께 교제하며 계시고 있는지 이 첫 번째 질문을 통해서 우리는 함께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성경은 우리 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 가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승리하셔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시고 그분은 승천하셨습니다. 승천하셔서 땅의 보좌가 아니라 하늘의 보좌에서 하나님의 위엄의 면류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는 분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왜 이처럼 능력이 없는 줄 아십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이 시시해서 그렇습니다. 시시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은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시시한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부 예수님을 시시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 미움을 극복할 수 없는 그런 분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한 까닭에 예수님은 미움을 극복할 수 없는 분입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까닭에 예수님을 사랑의 능력이 없는 분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내가 불신앙 속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② 섬기는 예수님
두 번째 2절에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참 장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봉사하시는 분이라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돌로 만든 건물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같은 성전이 아니라 구속받은 그리스도의 몸인 성소, 하나님의 집인 성소를 말하고 있습니다. 참 장막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주님의 특성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딜레마도 있습니다.
그처럼 높으신 분이 하나님의 위엄의 보좌의 오른편의 영광가운데서 승리로 거하시는 그 영광의 주님이 어떻게 봉사할 수가 있을 까요? 어떻게 그분이 지금도 우리를 섬길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개념은 상반된 개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는 이 높은 영광과 동시에 사람을 섬기는 봉사하는 이 두 개념이 동시에 섞여져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참 신앙의 정신과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일수록, 하나님의 영광의 지위에 오른 자일수록 그는 겸손하게 봉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가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의 몸으로 오셨을 때 말구유에 오셨고 가장 비참한 처지에 오셨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줄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두 개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영광의 지위는 곧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③ 제물이 되신 예수님
세 번째 3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또 하나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바로 그분은 예물과 제물을 드리시는 분이십니다. 이 예물을 gift 로, 제물은 sacrifice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으로 오셨을 때 봉사하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몸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릴뿐만 아니라 자기의 몸을 희생 재물로 바치게 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고 십자가에 죽은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이었습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세상에 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삶의 목표가 뚜렷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등을 느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좀 더 오래 잘 살아보겠다는 것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죽을 결심이 되어 있는 사람은 위대한 삶을 살게 되며 죽을 지점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단번에 완전하게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고 우리의 삶을 땅을 위해 살지 않게 하고 영원을 위해 살게 하며 우리의 삶을 나를 위해 살게 아니하며 희생하며 순교하고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고상하게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 전반전 부분에서 우리가 보면 예수님은 최고의 영광의 자리인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높은 지위까지 그 영광까지 우리를 이끌어 주시며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천국 백성까지 높은 지위까지 이끌어 주신 반면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통해서 봉사하게 합니다.
이웃을 봉사하게 하며 섬기게 하며 죽도록 충성하게 만드시면서 마지막에 자기의 몸을 예물과 제물로 바친 사건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참 희생과 순교의 삶이 자기의 몸을 찢어서, 죽여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에 모형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2.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
두 번째 주제는 6절에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우리 앞에 첫 번째 있다는 사실과 함께 두 번째 그러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냐 하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이 절은 중요하기 때문에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그렇습니다. 6절의 말씀처럼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중보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의 주인공이십니다. 여기에서 그분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구약의 제사직보다도 더 뛰어나고 아름다운 직분을 가졌다는 말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구약이 줄 수 없는 더 아름답고 귀하고 더 뛰어난 좋은 언약을 보증을 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특별히 언약, 약속이라는 단어를 쓸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쓴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구약이 약속이라고 말한다면 신약은 하나의 성취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한 마디로 말하면 계약 관계입니다. 언약관계입니다. 약속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는 약속에서부터 출발했고 그 약속은 성취하는데서 완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약속의 좀 더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약속의 배후에는 언제나 배신이라는 것이 뒤에 깔려있습니다. 현대인의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치명적인 경험은 배신의 경험입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도 한 두 번쯤은 다 배신을 경험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분명히 약속을 했는데 그 약속이 일방적 파기로 말미암아 그리고 어떤 조건의 충족이 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 약속에 대한 배신을 겪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과 인간의 약속이 이런 것이라면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런 순데케적인 약속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염려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혹시 변하면 어떻게할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시겠다고 해 놓고 만약에 안 붙잡아 주시면 어떻게 할까? 또 내가 하나님을 철저히 믿겠다고 해 놓고 내가 파기해 버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래도 하나님은 나를 붙들어 주시는 것일까? 아니면 그 약속은 깨지는 것일까? 내가 어떤 날 마귀의 시험에 빠져서 하나님을 버렸을 때는 그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비록 내가 그 약속을 파기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시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찾고야 마십니다. 내 백성을 하나님은 반드시 모으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언약의 깊은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은혜를 받고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 약속의 언약에 기초해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언약의 주인공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 언약의 완성자는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예레미야 31장에서 말한 새언약의 성취자로서 오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누구든지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며 그에게는 생명을 주시며 그에게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유업으로 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가 살던지 죽던지 병들던지 건강하던지 하나님의 이 은혜의 사슬에서 이 약속의 사슬에서 헤어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언약, 새언약의 중심 개념입니다.
3. 새언약의 특징들
세 번째, 성경은 계속해서 그렇다면 이 새언약의 특성은 무엇일까 하는 문제입니다. 다섯 가지로 이 언약의 특성을 7절에서부터 13절에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이 언약의 특성 새언약의 특성 곧 예수 그리스도의 특성인데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그 다음에 8장 8절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하면서 예레미야 31장의 내용을 다시 쓰고 있습니다. 새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구약의 언약과 다르다라는 얘기입니다. 새언약은 이렇게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아니다, 그러나 구약의 율법은 아니다. 이 말을 잘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 히브리서 저자가 8절에서 예레미야 말씀을 인용합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에서 3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예언을 해 주시는데 새언약을 예언해 주십니다. 지금 너희들은 남북이 갈라질 것이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갈라질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통일이 될 것이다. 그때 내가 이 새언약으로 통일 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새 일을 행할 것이다. 이사야서는 새 일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예레미야는 새 언약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새언약의 개념은 히브리서 저자가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개념이요,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그것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미 주신 하나님의 역사의 종말에 이루어질 예수의 완성을 주신 것입니다.
새언약의 두 번째는 8절입니다. “…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언약을 세우리라.” 새언약은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을 내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언약의 말씀에는 이 두 집이 새언약으로 묶여질 것이라고 하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새언약은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한쪽 부분만을 위한 진리가 아니라 전체를 위한 진리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9장에서 11장 사이에 보면 복음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 복음이 어디로 갔습니까? 이방인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까지 왔습니까? 우리까지 왔습니다. 우리가 이방족속입니다. 우리까지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은 아직도 이방인 속에 계속해서 강력하게 역사를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역사가 끝이 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복음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언약은 하나의 종결을 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 새언약의 특성은 유다 와 이스라엘 양 집을 통괄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9절입니다. 세 번째 이 새언약은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 하였습니다. 이 새언약은 출애굽 할 때 모세를 통해서 준 율법과 같지 아니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구약의 언약은 조건적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순종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순종을 안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왔던 것입니다. 그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돌보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새언약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의 율법과 같지 않습니다. 신약은 은혜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당신백성들을 불러모으시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찾으시며 마지막까지 반드시 구원하신다고 하는 이 구원의 은혜의 약속이 바로 언약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가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배신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불신보다는 하나님의 찾으시는 손길이 더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여러분을 구원하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여러분을 삼키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계속해서 선교의 대 행진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순종하지 아니한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스톱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옮길 뿐인 것입니다.
반드시 그분은 당신의 역사를 새언약의 역사를 반드시 이루시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10절입니다. 네 번째 새언약의 특성이 나타납니다.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율법은 돌판에 새겼으며 사람들의 의식 속에 새겨졌습니다. 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오게 되었습니다. 할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체에 심었었습니다. 그러나 이 새언약은 그렇게 돌판이나 육체에 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생각과 마음에 심어 주신다고 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예배는 이 산에서도 아니고 저 산에서도 아니라 참 진정한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엄청난 집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건물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건물에다 하나님의 뜻을 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다가 하나님의 뜻을 두시며 언약을 성취시키십니다. 그러나 이 건물을 통해서 더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외적인 조건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며 내적인데 있으며 의식이 문제가 아니라 진실이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11절에 이 다섯 번째 새언약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11절.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들을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여러분! 이 새언약은 인종과 국적과 신분의 고하를 초월한다고 하는 이 놀라운 사실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이 새언약이 바리새인과 전통 유대인뿐만 아니라 바리새인과 전통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토착인들이나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안에 이 모든 문제를 다 통괄을 했습니다. 누구에게만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는 구원을 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황인이나 유식한 사람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문제삼지 않으시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주의 이름 안에 모였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이름을 온 천하에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는 파벌이 있으면 안됩니다. 높낮이가 있으면 안됩니다. 어떤 세력이 존재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은 새언약의 모습과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누구든지 받아들일 것이며 교회는 누구든지 와서 예배드리며 구원을 받아야 할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 결론 맺도록하겠습니다
이제 12절에 새언약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치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율법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새언약은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시편에 보면 누가 행복한 자입니까? 허물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움을 받는 자는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새언약은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죄를 다시 기억치 않는데 그 본질적 특성이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볼 수 없는 사랑과 용서와 긍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보여 졌던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했고 그리고 선한 노력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기만 하면 은혜의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되며 하나님의 은혜의 새언약의 관계 속에 여러분이 보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언약의 은총이요, 이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그냥 단순히 믿는 다는 말을 의미하지 않고 바로 이러한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서부터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며 용서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이 긍휼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새언약에 기초해서 다시는 흔들리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새 언약으로 오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놀랍고 크고 변함 없고 진실한 것인지를 깨닫고 안심합니다. 이제 주 앞에 나옵니다. 더 죽도록 주님을 위해 충성하게 하시고 섬기게 하시고 주의 복음을 전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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