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요한칼럼(28)] 기적중지론적 칼뱅주의가 왜 교회를 망하게 하는가?
- 교회성장 요소를 오히려 배척하기 때문이다- -천방지축 정이철, 드디어 퇴출되나? 나라가 시끄럽기 짝이 없다.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키려는 자유우파와 공산주의를 이루려는 종북좌파와의 이념전쟁으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망했는데도 종북좌파들은 공산주의가 주는 상상 속의 이상향을 버리지 못해 안달이다.
나라 못지 않게 한국 교회는 아직도 기적중지론(은사중지론)과 기적계속론(은사지속론)의 교리 전쟁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한동안 좀 조용한가 했더니 몇 년 전부터 영적 종북좌파이자 주사파라 할 수 있는 정이철 무리들이 당을 이루어 골수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자인 서철원교(敎)의 맹신자가 되어 한국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이철 무리의 글들을 보면 '기적중지론적 칼뱅주의'(이후 '기중칼')가 가장 성경적이고 초자연적 은사를 강조하는 '은사주의'는 모두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왜 그렇게 잘난 기중칼은 숫적으로 쪼그라들고 왜 은사주의는 계속 성장하는가 이다. 하나님 나라는 확장하는 것이 아니고 쪼그라드는 것인가? 왜 그렇게 잘난 기중칼이 개신교 대국인 미국에서 점유율 0.5%로 쪼그라들었는가 이다. 왜 개신교 대국인 미국의 개신교 신자 1억 명 중에서 기중칼을 고수하는 교인은 52만 명에 불과한가? 교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종북좌파처럼 기중칼과 정이철 무리는 이런 사실과 통계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도 안 되는 ‘사상’과 ‘교리’만 주장하고 있다. 참고 자료 : [신학검증 (17)] 패잔병 ‘정이철파’의 처절한 발악. 「글로리아타임스」. 2017.11.4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32 [신학검증(16)] 게임은 끝났다 Game Is Over!-하나님을 대적한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의 처참한 몰락. 「글로리아타임스」. 2017.10.30.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30
[신학검증(15)] ‘칼뱅주의 기적중지론'의 처참한 몰락-자동차 시대에 마차 시대 논리에 목숨 거는 사람들. 「글로리아타임스」. 2017.10.25.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28
한국의 교단들도 겉으로는 교리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교세가 답보상태거나 감소하는 것을 제일 곤혹스러워 한다. 지금 각 교단은 개(個) 교회가 보고하는 교인 수로 전체 교세를 집계하지만 신빙성 여부가 의문이다. 어느 교단에서 교인 수 대로 개교회의 상회비를 받겠다고 했더니 보고한 교인 수가 확 줄었다고 한다. 다른 교단도 비슷할 것이다. 정이철 무리가 주장하는 기중칼 교세는 왜 몰락하고 그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은사주의 교회는 성장 일로에 있는가? 기중칼이 비판하는 그것이 바로 교회 성장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첫째, 기중칼은 성령의 초자연적 능력을 부인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기적을 통해 이루신 일들이 깔려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 10 재앙으로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 것, 성령의 권능이 사사들에게 임하여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신 것,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를 통한 기적으로 악한 왕들을 쳐부수신 것,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면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신 예수님, 성령 충만을 받아 기적을 행하면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친 사도들…. 그런데 기중칼은 이런 기록을 담은 성경이 완성되었으므로 기적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황당한 주장을 한다.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기적을 행하면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쳤는데 오늘날의 신자는 성경만 있으면 된다고? 그러니까 교회가 망하는 것이다. 성경의 인물들이 기적을 행한 것이 교회 시대 신자의 모델이 아니고 성경 기록을 위한 계시적 사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은 기적의 능력을 구하거나 행하지도 않으니 교세가 쪼그라드는 것이다.
초자연적 은사는 정찰무기(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예언, 영분별, 방언 통변)와 공방무기(믿음, 신유, 방언, 능력행함)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 여인의 과거를 알아맞히어 복음에 마음 문을 열게 하고 엘리사가 아람왕의 비밀을 멀리서도 알아맞히듯, 초자연적 은사는 은밀하게 역사하는 죄와 마귀의 실체를 드러내고 처방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이다. 비은사자들은 초자연적 은사의 이런 유익을 알기나 하는가?
겨우 한다는 말이 '성경 기록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기적은 필요 없다. 성경만으로 충분하다', '은사 가진 자들이 교만하고 말썽만 부린다'며 자족해 있는 동안 전세계적으로 기중칼 교회는 몰락하고 은사적 교회는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까 아직도 우물 안에 갇혀서 기중칼이 정통 신학이라고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기중칼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기중칼은 이성을 강조하고 감정을 무시하다. 이후 계몽주의와 이성주의의 영향을 받아 이런 성향은 더욱 굳어졌다. 그래서 체험 보다는 교리를 강조한다. 물론 바로 교리도 필요하다.
그러나 바른 감정이 없는 바른 교리는 머리만 크게 하고 지적 교만만 부추겨서 바른 교리 대로 살고 행동하는 동기 부여가 빈약하다. 변화와 행동 없는 샌님만 양산한다. 반대편을 두르려 잡는 변증은 발달했지만 정작 자신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영적 동력은 약하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성령은 우리의 '지성'과 '의지'를 조명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우리에게 적용시킨다고 말했다. 감정에 대한 언급은 없다. 칼뱅은 ‘감정’을 정서가 아니라 ‘변덕’이라 이해했다. 이후 후계자들도 이런 주장을 착실히 전수해왔다. 더군다나 이성주의, 계몽주의가 꽃을 피우던 당시 뛰어난 논증가인 프란시스 튜레틴, B.B. 워필드, 찰스 핫지 등이 개혁신학의 뼈대를 형성했다. 그래서 기중칼은 ‘부흥 보다는 교리’, ‘감정이나 체험보다 이성이나 논리’를 앞세운다. 이성주의, 계몽주의 시대에는 이런 주장이 통했다. 그러나 제 1,2차 대전을 겪으면서 이성을 한껏 치켜세우던 서구 철학은 몰락했다. 이성이 뛰어난 인간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 이성에 대한 회의의 수준을 넘어 패닉(공포) 상태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런데 성령사역 대적자들은 아직도 수백 년 전 이성시대에 정립된 신학으로 현대의 성령운동을 난도질하고 있다. 시대착오라도 유분수지. 또한 감정이나 정서가 풍부하지 않으면 이성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성주의, 계몽주의 시대에도 감정을 중시하는 주장이 있었지만 무시되거나 등한시 되었다. 강준만은 『감정 독재』에서 ‘이성은 기껏해야 감정의 졸(卒)이거나 호위 무사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강준만은 분노,슬픔,두려움,즐거움,사랑,놀람,혐오, 부끄러움 등 8명의 가족과 그밖의 여러 식객을 거느리고 있는 감정은 한마디로 말해 ‘행동하려는 충동’ 이라고 말한다. 행동하려는 경향성이 모든 감정에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캐나다 신경학자 도널드 칸(Donald Caine)은 “이성은 결론을 낳지만 감정은 행동을 낳는다”고 말했다. 성경을 보면, 종교 지도자나 대적자들이 표면적으로는 교리적 이유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시기와 분노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고 사도들을 핍박한 것을 알 수 있다. 미운 털이 박히면 교리나 논리는 겉치레에 불과하다. “17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마 27:17-18).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행 5:1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가 가득하여 외쳐 이르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니”(행 19:28).
마틴 로이드 존스(Martin Lloyd-Jones) 는 "이 말씀을 믿으시오"라고 만 하면 그 말씀을 실제로 체험하고 확신하는 것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주장한다. 로이드 존스는 아무것도 '느끼지'(felt) 못하는 것은 ‘지적인 동의’에 불과한 것이지 믿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두려워하여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경고했다. 하워드 라이스(Howard Rice)도 『개혁주의 영성』(Reformed Spirituality)에서 비슷한 견해를 제시한다. "자신을 칼뱅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다수의 칼뱅의 추종자들은 바른 교리의 공식에 대한 동의로서의 믿음과 신뢰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력한 감정적인 반응으로서의 믿음을 분리시킨 잘못이 있다. 믿음에 의한 구원으로 알려진 것이 자주 (교리적으로) 바른 믿음에 대한 가르침으로 왜곡되어 온 결과 신자들의 생활은 바른 교리에 대한 동의로 전락되고 말았다. 우리 개혁주의자들은 일단의 명제에 대한 합의나 동의로서의 믿음보다는 설득으로서의 믿음, 헌신으로서의 믿음, 내적인 증거나 확신으로서의 믿음의 중요성을 재발견하도록 부름 받았다. 그러한 재발견으로 인해 우리는 또한 감정과 사고의 균형을 이루어 '느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성으로 인도될 수 있다."
미국 제1차 영적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인 조나선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기독교 감정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 감정론』(On Religious Affections)에서 "진정한 종교는 상당 부분 감정으로 구성된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종교적인 감정이란 그리스도 안의 사랑, 기쁨, 소망,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죄를 미워하는 마음 등을 말한다. 그는 물론 진정한 종교는 감정 이상의 것이지만 감정이 없는 진정한 종교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교리적인 지식과 사변만 있고 감정이 없는 사람은 종교라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다"고 그는 단언했다. 현대는 우뇌시대, 감성시대, 영성시대이다. 오늘날 전통적 교회는 이성과 교리에 치중하고 감성과 정서를 제대로 개발하지 못한 결과 머리와 귀는 크고, 가슴은 차고, 손과 발은 마비된 기형신자들을 속출하고 있다. 감성과 초자연적 체험이 풍부한 은사운동은 현대인들의 이러한 요구를 잘 채워준다. 왜 현대인들이 불교, 명상, 뉴에이지, 요가에 탐닉하는가? 학력이 높은 그들에게 논리적이고 따지고 분석하는 것은 더 이상 매력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이런 것들은 책 몇 권만 보거나 인터넷을 검색하면 된다. 평신도들도 주석성경을 보고 원어로 성경을 보는 시대이다. 그들은 이제 느끼고 참여하고, 인간의 이성이 주지 못하는 초자연적 체험을 사모한다. 성령운동은 이러한 현대인의 욕구를 잘 채워준다. 이전의 성령 운동에는 못 배운 자, 못 가진 자들이 많이 모여들었지만 요즈음에는 지식인들이나 가진 자들이 많이 모여든다. 당연한 현상이다. 참고 자료 : [종교적감정①] 이성은 고상하고 감정은 저급한가?-감정은 저급한 것이 아니라 이성, 의지와 함께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 값진 선물이다. 「글로리아타임스」. 2015.6.26.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163
셋째, 기중칼은 영적 전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신자의 신앙생활 자체가 전쟁이다. 죄와의 전쟁이고 마귀와의 전쟁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 전쟁은 마귀와의 전쟁이라는 좁은 의미로 사용한다. 오순절교회와 은사주의 교회가 성장하고 칼뱅주의 기적중지론 교회가 몰락하는 이유는 영적 전쟁에 대한 이해 차이 때문이다. 은사주의는 개인 축사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기중칼은 개인 축사 마저 외면하거나 부인한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마귀를 대적하면 된다’(약 4:7; 벧전 5:8-9)고 한다. 어떻게 대적하느냐고 물으면 겸손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6-7). 물론 맞는 말이지만 지극히 협소하고 편파적인 견해다. 마귀는 죄를 타고 역사한다(요일 3:8). 마귀는 우상숭배, 분노, 두려움, 탐욕, 음욕, 교만 등의 죄를 타고 역사한다. 신자들 중에서도 이런 죄에서 완전히 자유한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신자라도 죄를 지으면 마귀의 공격을 받는다. 사람이 우상숭배 하고 온갖 죄를 짓다가 예수를 영접한다고 해서 금방 마귀의 공격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신분적으로 새 사람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과 실제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요즈음에는 스마트폰과 인터넷을 통해 폭력적, 선정적, 엽기적(마귀적) 콘텐츠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신자라도 귀신 들린 사람들이 많다. 고(故) 옥한음 목사도 이 문제로 고심했고, 보수 장로교의 중견 목사 한 명은 자기 교회 청년들 중에도 귀신들린 사람이 많아서 자기도 축사 관련 서적 20군 정도를 구입하여 기도원에서 읽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필자의 『대적을 바로 알자』(절판)가 많이 도움이 되었다고 전화가 왔었다. 그런데 기중칼은 이런 문제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다. 필자가 『대적을 바로 알자』 책을 쓰기 위해 참고 서적 100여권 정도를 보았지만 개혁주의 입장에서 의미 있게 쓴 책은 단 3 권이다. 프레드릭 리히의 『사탄의 세력을 이렇게 추방하라』, 데이비드 폴리슨의 『성경이 말하는 영적전쟁』및 존 맥아더의 『어떻게 적을 대적할 것인가』(가칭)(How to Meet the Enemy)이다. 그런데 모두가 기중칼이라 축사 자체를 부인한다. 한 마디로 축사를 부인하기 위해 쓴 책들이다. 반면에, 한글 번역판은 물론 영어로 쓴 축사 관련 서적의 절대 다수는 세대주의자나 은사주의자들의 책이다. 유명한 메릴 엉거, 클린턴 아놀드, 도날드 기, 할 린지, 에드 머피, C 프레드 디카슨, 닐 앤더슨 등 축사를 전공으로 한 상담학자들이 많다. 이들은 할 일이 없어서 축사 관련 책을 쓰고 축사를 하는가? 세대주의나 은사주의 성도들에게만 축사가 필요하고 기중칼 신자들에게는 축사가 필요 없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마귀의 세력들은 교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죄 짓는 여부를 본다. 기중칼이라도 포르노에 심취하거나 분노와 시기와 탐욕이 심하면 마귀가 공격한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우리 중에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면 그런 죄를 타고 마귀가 공격한 명분은 충분하다. 물론 꾸준한 신앙생활을 하면 심하게 귀신들리는 사례는 드물겠지만 요즈음처럼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에 무방비로 노출되면 신자라도 여러 방면으로 귀신의 공격을 받는다. 그런데 기중칼은 이런 문제에 대한 대안이 있는가? 대안 제시는커녕 오히려 이원론이라고 비판만 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 대로 죄와 싸우고 축사하고 영적 전쟁하는 것이 이원론인가? 성경을 제대로 보라.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6-17).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0).
성경은 신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싸우고 마귀와 싸우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이게 이원론인가? 이원론이란 세력이 팽팽한 선악의 두 세력이 싸우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영적 전쟁은 하나님이 이기신 전쟁을 신자들이 마무리 하는 전쟁이다. 그렇다고 해서 희생이 적은 것은 아니다. 2차 대전 당시,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독일군의 기선을 제압했다. 그러나 이후 전개된 11개월 가량의 전투에서 나치 독일이 필사적으로 대항하는 바람에 엄청난 희생자를 내었다. 마귀와의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다. 마귀는 하나님의 허용 하에 행동하지만 여전이 신자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존재다. 마귀는 하나님의 허용 하에 욥의 전 재산을 파괴하고, 자녀들을 죽이고, 욥 자신에게는 악창을 주어 괴롭혔다. 마귀가 하나님의 허용 하에 우리에게 끼칠 수 있는 재앙이 이 정도다. 그런데 마귀는 하나님의 허용 하에 행동하므로 염려하거나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할 것인가? 기중칼은 마귀의 공격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은사주의는 사역의 현장에서 마귀가 신자들의 죄를 타고 온갖 재앙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축사한다. 성경에서 예수님이나 사도들이 한 대로 하니까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성훈련에 무관심하다
영성훈련에 관심을 갖기는커녕 정이철 같은 영적 주사파는 ‘영성’이란 단어 갖고 시비를 걸면서 영성훈련을 비판한다. 불교와 힌두교 및 뉴에이지운동의 명상기도가 왜 선진국에서 인기를 끄는가? 초자연적 체험과 마음의 평강, 창의력 제고 및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명상(관상)은 이에 더하여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교제를 도와준다. 이 세상의 문화나 문명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세상과 마귀가 이런 것을 먼저 취하여 오남용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영혼(전도명령)은 물론 타락한 문화를 회복하기 위해 오셨다(문화명령).
하나님의 특별은혜는 일반은혜의 방법과 도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악보에 하나님 찬양 가사를 넣으면 찬송가이고 부처 찬양 가사를 넣으면 찬불가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기독교 기도이고 부처 이름으로 하면 불교 기도다. 선행조차 예수 이름으로 하면 상급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도구와 형식이 아니라 내용과 의도가 성경적이냐 아니냐를 가름한다.
그런데 정이철 같은 극단적 기중칼은 이런 기초 지식도 모른다. 그러니까 방언은 귀신의 옹알거림, 예언은 점 치는 것, 관상기도는 불건전한 신비주의, 신자의 황홀체험은 쿤탈리니 요가 같은 것이고, 통상적으로 하는 중보기도를 천주교의 마리아 중보기도라고 착각한다. 영적 무식이 하나님의 좋은 것을 막고 있다.
결국, 기중칼은 초자연적 은사 부인, 사람을 행동케 하는 감정 경시, 하나님의 사역을 집요하게 대적하는 마귀와 귀신들에 대한 인식과 대적 방법 무지, 인간에게 보편적인 관상기도와 황홀 체험에 대한 욕구를 부인하니 있던 신자도 떠나고 새 신자가 더 이상 오지도 않는 것이다.
천방지축 정이철, 드디어 퇴출되나? 예장 합동 교단이 정이철에 대해 칼을 빼들었다. 오순절 성령운동을 가짜 방언 운동으로 폄하하고 타 교단 목회자는 물론 예장 합동 소속의 신학자나 중견목회자의 성령사역에 대해서 무차별적으로 독침을 놓은 정이철의 신학적 이단 사상을 지난 4월20일 합동 이대위에서 신속하게 조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정이철 목사 신학사상 문제 이대위서 신속하게 다루기로~".「기독신문」 2018.4.20.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037) 정이철 무리인 고경태(목사)는 정이철을 변호하지만 정이철이 저지른 죗값이 워낙 커서 그냥 지나갈 것 같지는 않다. 정이철은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예장 합동 이대위에서 김요한의『지렁이의 기도』 같은 것을 문제 삼을 것으로 은근히 기대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정작 자기가 신학검증 대상이 된 것이다(고경태, “정이철 목사와 근본주의 개혁주의자 칼 맥킨 타이어.”(「바른믿음」. 2018. 4.21.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153 정이철은 “자신에게서 신학적인 비판을 받은 교갱(예장 합동 교회갱신협의회)의 여러 목회자들과 총신의 교수가 합동의 개혁신학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연구의 기회를 주는 차원에서 진지하게 신학적인 반론을 펼쳐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면서 꼬리를 내리는데, 그런 사람이 아래와 같은 삼류 주간지 수준의 선동적이고 모욕적인 표현을 밥 먹듯이 하나? 비겁하게 굴지 말고 자신 있으면 소신 있게 정정당당하게 대응하라. 왜 꼬리를 내리나? 정이철이 독침을 놓은 예장 합동 관련 신학자나 목회자를 날짜 순으로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찬수 목사와 송태근 목사의 이적행위는 누가 다스리나?”(2018.4.17). -“송태근 목사님, 합동의 개혁신학을 파괴하지 마십시오!”(2018.4.14). -“권순웅 목사(예장합동 서기)에게 계시론 관련 사이비성 분명히 있어 보인다”(2018.4.3). -“박용규 교수(총신 대 교수)의 아주사 부흥 강의는 총신 죽이는 산당신학”(2018.3.29). -“(전 총신대 교수) 권성수 교수의 성령론에 오순절 신학 사이비성 농후”(2018.3.6). -“(김요한 목사의) [지렁이 의 기도]는 神이 되는 [붉은 龍의 呪文]이다”(이창모. 2018.3.5). -“성령 불세례, 방언기도하는 순결한 신부 총신대 김남준 교수”(2018.2.28). -“김세윤 교수(전 총신대신대원장)의 성경을 허무는 이단적 구원론을 심판하라”(2018.1.15). -“김세윤 교수도 거짓 직통계시 운동을 지지하는 신학자인가?”(2017.12.2). -“(대전 새로남교회 오정호 목사의) 개혁주의 교단 합동의 정체성이 복음주의로 기울어진다”(2018.1.4).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은 사랑의 교회의 중보자가 되고 싶은가?”(2017.11.22). -“오정현 목사, 기름부음이 있는 찬양으로 공간이동?”(2017.5.23). -“(부산 수영로교회 원로목사 정필도의) 과연 그 뜨거운 체험은 접신인가? 성령세례인가?”(2016.7.12). -“(김성곤 목사의) 두날개는 거짓방언으로 크게 미혹했어”(2015.4.22). -“두날개는 성령세례 짝퉁 하나님을 전파했어”(2015.3.28). -“두날개는 신사도운동과 함께 탄생했어”(2015.3.6).
정이철은 이처럼 이적행위, 사이비성, 산당신학, 이단적 구원론, 거짓방언, 짝퉁 하나님 등의 표현을 해놓고 '이단적'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고 변명한다. 이런 표현들 자체가 모두 이단적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정이철의 독침을 맞은 대부분이 예장 합동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중견 신학자나 목회자들이다. 정이철이 이들을 조롱하고 모욕하고 폄하하고 건드려 놓았으니 신학 문제는 물론 괘씸죄에 걸려서도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다. 차제에 예장 합동은 한국 교계에 백해무익하게 구정물만 일으키는 정이철 미꾸라지를 제명하여 한국 교계를 정화시켜주기를 바란다. 한국 장로교회에 드리는 제안
기중칼은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성행한 계몽주의와 이성주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시대를 따라 다르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무관심하고 문화 상황의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니까 세력이 쪼그라드는 것이다.
칼뱅이 아무리 천재라도 자기 시대의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다. 당시 칼뱅의 최대 과제는 천주교와 급진파들이다. 그러나 이후의 교회 환경은 칼뱅의 예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변했다. 개혁주의자들이 늘 주장하는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명제에 충실했다면 이처럼 처참하게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IBM하면 떠오르는 것은 PC(Pernal Computer) 즉 개인용 컴퓨터다. 그러나 지금 IBM은 PC를 생산하지 않는다. 변하는 세상에 맞추기 위해 PC사업부를 매각하고 지금은 클라우드, 보안 등의 소프트웨어 회사로 변신하여 살아남고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변화는 세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마련이다. 한국의 장로교회가 버티는 것은 교단들이 겉으로는 은사사역을 비판하지만 안으로는 이런 사역들을 수용하는 교회들이 있으니까 그나마 지금의 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미국 장로교회들처럼 순수 칼뱅주의를 주창했다면 벌써 교세가 반 토막 이하가 되었을 것이다.
기중칼이 신학적으로 부인하는 방언, 축사 및 예언은 이미 상당수의 장로교단 교회에서도 하고 있는 사역이다. 기중칼도 신유는 어느 정도 수용한다. 그것도 기적이 아니라 기도의 응답으로 이해한다(약 5:14 참조).
예장 합동의 두날개선교회와 풍성한 교회, 예장 통합의 온누리교회는 오히려 순복음교회 보다 앞서고 있다. 예장 대신(백석)은 설립자인 장종현 총장이 은사와 음성듣기를 강조하고, 전광훈 증경총회장은 '유럽교회가 망한 것은 성령세례(회심 후 성령체험-필자 주)를 무시하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 이를 부인했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예장 대신의 이대위 위원장인 김정만은 골수 기중칼인 정이철과 교류하고 한국의 대표적 기중칼인 김재성(국제신대 교수)과 이승구(합신대 교수)를 불러 세미나를 개최했다. 교단 지도부와 이대위가 서로 엇박자 행동을 하고 있다. 예장 고신의 양결(부산생명수교회 담임목사)도 신사도적인 오중직임 컨퍼런스, 축사 및 예언사역을 수년 동안 정기적으로 해왔지만 예장 고신은 별로 개입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정이철이 설치는 미주 내 한인교회의 형편은 더 열악하다. 한인 교포 수가 제한되어 있고 어떤 운동이 한번 휩쓸면 올망졸망한 크기의 이민 교회들이 초토화 되기 때문에 정이철과 그 무리들이 목숨을 걸고 은사운동을 대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방법이 아니다. 교인 잃기 싫고 교회 성장 원하면 은사운동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왜 좋은 것 받아들이지 않고 나쁜 것에 목숨을 거는가? 그러고도 하나님의 사자라고 할 수 있는가? 소경이 소경을 이끌어 파멸로 인도하려는 것인가? 정이철 무리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제발 정신 차리기 바란다. 참고 자료 : 사역스케치 (01)] 예장 고신 내에 은사운동(?) 바람이 부나?-부산생명수교회 양결 목사의 공개적인 빈야드운동 및 신사도운동. 「글로리아타임스」. 2017.11.7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33 [사역스케치 (04)] 예장 대신(백석) 내의 은사 사역자들-부산영락교회, 청교도영성훈련원 및 그레이스 힐링교회. 「글로리아타임스」. 2017.11.7 http://www.thegloriatimes.org/news/articleView.html?idxno=343
*한국 장로교단에 교단발전위원회 설립을 제안한다 차제에 필자는 각 장로교단이 이대위(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를 상설기구로 운영하는 것 못지 않게 교단발전위원회(신학자+목회자+평신도로 구성)를 상설화하여 때를 따라 변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여 교단의 양적 성장과 질적 성숙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대위는 '우리는 옳으니까 방어만 하면 된다'는 칼뱅주의 전성시대의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대는 칼뱅주의 몰락시대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교단발전위원회를 통해 미국의 신칼뱅주의(주도자. 존 파이퍼. 웨인 그루뎀. 팀 켈러 등)나 오순절운동 및 은사운동을 긍정적으로 벤치마킹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교세도 쇠퇴하고 거룩과 성숙도 이루지 못하여 세상의 지탄을 받고 세상과 따로 놀다가 결국은 하류 종교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