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나오는 인류 최초의 살인은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돌로 쳐서 죽인 사건입니다. 살인의 동기는 동생 아벨을 시기질투한 형 가인의 열등감입니다. 형이든 동생이든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 모두에게는 비교심리가 있습니다. 이 점에 착안하여 황순원은 <가인의 후예>라는 소설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비교 심리는 자기 내면에 열등감과 우월감을 만들어 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열등감와 우월감을 이용하여 돈을 벌기도 합니다. 명품 핸드백이 바로 그 심리를 이용하는 대표적인 예시입니다. 열등감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분발심을 갖게 하여 자기를 더 높은 곳으로 성장시킵니다. 그러나 이 열등감이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자기를 학대하거나 비교 대상이 되는 상대방을 가해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모든 이웃을 부정적으로 바라봅니다. 열등감이 강한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히틀러 같은 천하에 없는 악인이 되고 “갑질” 중에서도 비교할 수 없는 “갑질”을 하는 아주 사악한 인간이 됩니다.
열등감의 트라우마를 자기 스스로 씻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자유인이 됩니다. 이 글은 우리 내면에 잠재해 있는 열등감을 이해하고 그걸 독자 스스로 털어 내는데 일조 하고자 쓴 글입니다.
대한민국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치열하게 써우는 이유도 북한 권력집단의 영혼이 <가인의 후예> 곧 열등감의 포로가 되어 그 트라우마가 깊이 자리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에 상처가 갚은 인간에게 권력을 맡기면 온 국민과 나라가 거덜나게 됩니다.
이글을 읽은 독자님들만이라도 자기 영혼을 장악하고 있는 트라우마를 쌋어 낸다면 글 쓴 보람으로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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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에게
일생을 따라다니며 나를 괴롭혀온 그대에게 오늘은 작심하고 그대의 실체를 밝히고자 한다. 그대는 늘 친구인 듯 내 귀에다 그대의 붉은 입술을 대고 속삭였지만 그대는 내 친구가 아니라 세상 모든 독의 근원이다. 그대는 전갈의 독에다가 비상을 섞은 것 보다 더 강한 독이자 미움, 시기, 질투와 같은 모든 부정적인 인간마음의 뿌리다.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상대를 향해서는 결코 그대의 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 앞에서는 더욱 더 거룩한 천사의 모습으로 그대를 나타낸다.
당신은 늘 친구, 동료, 가족, 형제, 친척, 이웃과 같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때로는 당신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존재들을 향해서 그대를 드러낸다. 무심중에 있다가 당신이 뿜어 낸 연기를 한 모금 들이켜고 나면 정신이 하나도 없어지고 마음이 흥분되어서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모르는 지경에 빠지게 된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경우가 어디 한 두 번이었겠는가. 나는 그대가 그 지독한 독을 품어 낼 때마다 그대를 변호할, 그대를 합리화시킬 적절한 단어를 찾아 주었다.
그래도 그대는 그대의 독을 중화시키기는커녕 더욱더 당당하게 그대의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이제는 지쳤다. 당신은 무슨 이유로 내게로 와서, 성공한 친구가 밥을 한 끼 사는 일에 까지 잘 대접 받았다며 입으로는 감사하면서도 속에서는 빈정거림이 일도록 만드는가? 지인이 상을 받거나 영전하는 것을 보면 왜 축하하는 마음 뒤에서 배가 아픈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가? 왜 그대는 사랑, 이해, 협력, 관용, 거룩과 같은 내 성스러운 특질을 미워하며 시기, 질투, 배신, 복수와 같은 악마적인 특질을 발산하게 하는가? 그래서 내 거룩한 성을 스스로 허물게 하는가? 길 위에 떨어진 돌멩이 하나도 그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것인데 도대체 당신이란 존재의 당위성은 무엇인가?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빗물이 흐르는 창을 통해 어둠을 응시하듯 나는 아주 오래 전에 내가 그대를 처음 본 그날을 응시한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 앞서 달려가는 계집아이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 넘어뜨리면서까지 1등을 하려던 이제는 이름마저 잊힌 친구를 기억 할 것이다. 그대는 그 어린 친구에게 왜 그런 짓을 하도록 시켰는가? 그대보다 더 빨리 달렸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계집아이를 따라 잡을 수가 없어서 그리한 것인가? 그대의 목적은 그대가 잘 달리는데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그 누구도 그대를 앞서 달리지 못하도록 하려는데 있었던 것인가? 독의 근원인 당신에게 진정으로 물어 본다. 그대여, 그대가 낳은 또 다른 시기와 질투와 배신의 독 앞에서는 그 어떤 사랑도, 이해도, 관용도 오히려 그게 성스럽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더 크게 그대의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마는 이런 모순의 지옥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벗어 날 수가 있는가?
그대 제발 내게서 떠나가 다오. 아직도 내게 붙어서 무엇을 얻어먹을게 있다는 것인가? 식어가는 9월의 태양을 보았는가? 내 잘 달리던 다리도 이제는 기운이 빠져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의자를 찾는다네. 그대가 그렇게 부러워할 존재도 아니라네. 그대 이제 그만 나를 좀 놓아주면 아니 되겠는가? 머지않아 세상 모든 것을 잠재울 겨울이 올 것인데 일생을 나를 따라 다니며 괴롭힌 그대까지 품어서 잠들게 할 수 있도록 그대 이제 그만 나를 놓아주면 아니 되겠는가?
그대는 내가 내 손으로 나의 라퀴엠을 쓸 때까지 나를 괴롭힐 것인가? 그렇겠군. 그 곡에다가 그대의 이름을 붙이면 나에게는 진혼곡이지만 그대에게는 개선 행진곡이 될 수도 있겠군. 그렇게라도 한번 나를 이겨보고 싶다면 아주 오래 전에 내가 그대를 처음 본 그날처럼 나는 내 머리끄덩이를 그대에게 맡길 것이니 그대 소원을 한번 풀어나 보시게나. 이는 평생을 나를 따라 다니며 단 한 번도 나를 이겨 본적이 없는 그대에게 베푸는 내 마지막 우정이라네.(201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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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하는 가인의 후예
고교시절, 이웃한 효성여고 강당 앞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모조 조각품이 있었다. 벌거벗은 한 청년이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서 무지의 껍질을 깨기 위해 고뇌하고 있는 모습. 지식이란 무엇이며, 지성이란 무엇인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자 하며,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다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깊은 고뇌에 빠져 있는 조각품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생각」이란 진리를 읽어 내는 데에는 불혹을 넘기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고뇌를 두려워하는 지성은 겉멋만 부리고, 사색이 없는 이성은 눈뜬장님에 불과하며,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되는 길은 오직 사유(思惟)라는 진리를 이제 사 깨우친 것이다.
오늘도 신문 사회면에는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에게 주어야 할 수재의연금품을 착복하고, 국가의 조세권을 남용하여 대선자금을 모았으며, 가난이 죄가 되어 보험금을 위해 열 살 난 어린 아들의 손가락을 자르고 천형(天刑)을 받게 된 남의 이야기들로만 가득하다. 그런데 그들을 향하여 분노의 돌을 던지고 있는 생각 없는 군상들 속에는 내 모습도 보인다.
성경 창세기 3.4장은 인간 타락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여기서 신은 인간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 첫 번째 질문은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숨어버린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두 번째 질문은 아우를 죽인 형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가인의 후예들인 우리 마음에서 마성(魔性)을 몰아내고 신성(神性)을 회복하려면 우리는 늘 나 자신과 내 이웃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묻고 있는 이 근원적인 물음에 답해야 한다.
돌을 던지기에 앞서 내가 있는 곳, 네가 있는 곳, 그리고 우리 모두가 있어야 할 곳에 대해 좀 더 고뇌해 보자.(영남일보 문화산책 1998년 10월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