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심한 배려와 정성
기억 속 한 장면을 끄집어내 봅니다.
저녁 식사 후 거실에 가족이 모여 앉아 TV를 보면, 어머니께서는 사과를 깎아주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두터운 과육 부분은 접시에 놓아 가족들이 먹게 하고 당신께서는 귀퉁이를 살살 베어서 잡수셨습니다.
자꾸 귀퉁이만 드시던 어머니께 접시에 놓은 것을 잡수시라고 말씀 드리면,
“응, 알았어.”라고 얼버무리셨지요.
물론 과육 부분을 잡수시긴 했지만, 귀퉁이 부분을 더 많이 드셨습니다.
그러면 철딱서니 없는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사과의 귀퉁이만 좋아하시는구나!
어머니는 귀퉁이만 드셔도 돼!’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이러한 착각이 얼마나 난센스인지 아실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말씀을 통해 사람이 서로 합당한 사랑을 베풀기를 요청하십니다.
한데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무에 대해 말씀을 건네시는 듯하니 마음이 무거울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합당한 사랑’에 대해 다른 각도로 성찰해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 합당한 사랑을 드리는 것은 무엇일까?
무조건 희생을 해 드리는 것이 전부일까?
삶의 여러 즐거움을 꺾어버리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면 충분할까?’
여기서 잠시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주님께 무엇을 바라는가요?
대개 우리는 주님께 양보를 요청합니다.
이러이러해서 이러한 연유로 못 하니 봐달라고 말이죠.
또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니
이러한 것쯤은 눈감아주실 거라는 태도가 주를 이룰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행동에서 천 걸음을 가자는 요구에 그대로 응하시듯 수많은 것을 양보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성 어린 봉헌을 한다면 우리가 무한한 양보를 요청 할 때보다
더 기뻐하신다는 사실도 분명합니다.
하나 예를 들어보지요.
우리가 미사에 참례할 때 단지 시간을 내는 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기도하며 마음을 준비하고 외모를 단정히 하고 성당으로 향하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우리의 봉헌은 더 정성이 깃듭니다.
이를 맞이하는 주님의 표정은 어떠할까요?
우리는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양보를 얻습니다.
이는 ‘자비’의 작은 부분 중 하나이겠습니다.
한데 이 호의만 계속 받는다면, 우리는 어느새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겠지요.
사과의 귀퉁이만 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귀퉁이만 드셔도 된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하느님께는 이렇게 해도 된다며 하느님은 그 모든 것을 허락하는 분이라고 말이지요.
사랑으로 받은 것에는 사랑으로 응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인 주님의 양보에는
우리 역시 주님을 향한 사랑인 기도와 희생, 봉헌으로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 우리가 드릴 수 있는 합당한 선물인 세심한 배려와 정성이라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이시기에 격의 없이 대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시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는 어버이이시고 온 누리의 임금이라는 사실, 이 모두를 아울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마주할 때 보다 더 세심히 배려해 드릴 수 있고
이를 통해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자유롭게 만나며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영환 아브라함 신부 군종교구
연중 제13주일 (교황 주일) 주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