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 11,25-29; 야고 5,1-6; 마르 9,38-43.45.47-48
+ 오소서, 성령님
너무나 뜨거웠던 9월 더위 견디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정말로 가을이 온 것 같은데요, 벌써 9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놀랍게도 2024년이 93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충격적이시지요? 이제 1/4밖에 남지 않은 올해의 열매를 잘 거두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이번 주일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입니다. 오늘날 많은 분들이 이주민으로 살고 계십니다. 우리 본당의 많은 가족들도 외국에서 이민자로 살고 계시고, 제 동생도 외국에 살고 있는데요, 우리 가족이 이주민으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신 이주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한편, 우리나라에 난민은 많지 않은데요, 법무부 통계에 의하면 2023년 난민 신청은 18,838건이 있었는데, 101명만 난민인정을 받았습니다. 지난 10년간 우리나라에서 난민인정을 받은 사람은 1,439명이라고 하는데요, 전 세계 난민의 수가 6,850만 명(2018년 현재)임을 감안해 볼 때, 무척 적은 수입니다. 2018년 현재 난민인정을 가장 많이 한 나라는 독일로, 18년간 69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다 합니다. 한편, OECD 국가 중 우리나라보다 난민 인정률이 낮은 나라는 이스라엘과 일본뿐이라고 합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나라를 빼앗긴 난민들이 세운 정부였음을,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가 그 망명정부를 계승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또한 아기 예수님, 성모님, 성요셉께서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하셨던 난민이셨음을 묵상할 때, 우리에게 난민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필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제1독서는 민수기의 말씀인데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을 듣다가 지친 모세가 하느님께 하소연하자, 하느님께서는 천막 주위에 둘러선 일흔 명의 원로에게 영을 내리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명단에는 있었지만 천막에는 나가지 않은 엘닷과 메닷 두 사람도 진영에서 예언을 하자,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그들을 말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야훼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야훼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합니다.
모세의 이 바람은 사도행전(2장)에서 이루어지는데요, 성령 강림 때에 사도들, 그리고 사도들과 함께 있던 사람들이 성령으로 가득 차 여러 언어로 말하고, 사람들은 성령의 힘으로 그 언어를 알아 듣게 됩니다. 성령의 힘으로 쓰인 성경을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을 때, 그리고 성령께서 주재하시는 이 전례에 참례할 때, 우리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여호수아가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하는데요,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여기서 요한의 말이, “그가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가 아니라,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냈다면, 그 힘은 마귀를 쫓아내는 유일한 힘의 주인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비롯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 쪽 사람이 아니어서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막지마라”고 하시며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몇몇 유다인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령을 쫓아내려 시도하지만 실패합니다.(사도 19,13-16) 믿음 없이 다만 예수님의 이름만 이용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복음에서 누군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냈다면, 그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다만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을 뿐입니다.
지난주에 공지 말씀드린 대로 오는 10월 12일, 은구비공원에서 열리는 노은 한마음 문화제에 우리 성당이 부스를 하나 맡게 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봉사해 주시는 여러 교우들과 함께 행사 참여를 준비하면서 제게는,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2013년, 교황 선출 선거가 치러지기 직전에, 추기경님들의 모임에서 한 분씩 연설을 하셨는데, 그때 베르골리오 추기경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교회가 자신의 목소리에만 집중하며 신학적 자기도취에 빠져있습니다. 자신 안에서, 자신에 의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세속적 교회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복음적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차기 교황은, 교회가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자 추기경님들은 ‘당신이 하시라’면서 베르골리오 추기경님께 표를 던지셨고, 이분은 266대 교황님으로 선출되셨습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저는 교황님의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추기경님들이 알아듣고 지지하셨기에, 그분을 우리 교황님으로 맞이하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그들이 천막 주위에 있었느냐 없었느냐’를 따지는 여호수아와, ‘그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말렸다’고 말하는 요한을 나무라시는 모세와 예수님의 말씀이, 교황님의 연설 안에서 들려오는 듯 합니다.
교황님은 취임하신 해인 2013년 반포하신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거리로 나갑시다. 저는 폐쇄적이고 자신만의 안전에 매달리는 편안함 때문에 병든 교회보다, 거리로 나가 다치고, 상처 입고, 더러워진 교회를 더 원합니다.”
11년 전, 우리에게 너무나 충격으로 다가왔던 이 말씀이 얼마나 실행되고 있는지 반성하여 봅니다. 과연 우리는 그만큼 용감하게 거리로 나갔던가요? 우리는 더욱 세상과 대화하고 소통하고, 사회의 복음화와 생태적 회심을 위해 세상과 연대해야겠습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 역시 오늘날 우리 시대에 해주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야고보서는 부자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부자로 살았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요? 많은 부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 제국에 충성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당대에 부자로 살고 있다는 것은 권력과 결탁하여 살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력을 이용해서 더 많은 땅을 사들였고,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지 않고 가로채 더욱 재산을 늘렸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헤로데입니다. 그는 당대 왕족을 형성하고 있던 마카베오의 후손, 하스몬가의 땅을 빼앗고 가족들을 죽인 다음, 그 재산을 자기 식구와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러한 부자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발하며 “믿음에 실천이 없다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개인적 신심이 사회적 헌신과 참여로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너무나 나 자신과 내 가족을 위해서만 국한되어 있다면, 오늘 이주민을 위해, 난민들을 위해, 우리나라를 위해, 전쟁 중에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레바논의 수많은 시민과 청소년, 어린이들을 위해 우리의 기도를 확장해야겠습니다.
교황님의 복음의 기쁨의 한 구절을 인용해 드립니다.
“쇄신과 변화 때문에 ‘길을 잃을까봐’ 걱정하지 말고, 잘못된 안도감을 주는 구조 안에, 가혹하게 남을 판단하게 만드는 규율들 안에, 그리고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습관들 안에 갇혀 있는 것을 더 두려워합시다.”
제이콥 드 위트(1695-1754), 70인의 원로를 임명하는 모세
출처: Eldad and Medad Successfully Challenge Moses’ Control over Prophecy - TheTora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