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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0) 삶의 완성, 곧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기준은 그리스도
우리가 다른 이들의 안녕과 권리를 깊이 존중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참된 자유는 요원한 그 무엇이 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은 개인을 위해 좋은 것 전체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것입니다. 공동선이란 모든 사람에게 존중심을 갖고 가장 불행하고 비천한 이들의 필요에 효과적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생명(삶)은 나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나’가 생명(생명 전체)에 관련된 것이다. 이에 관해 일리아 델리오(Ilia Delio, OSF) 수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원자로 전락시켜 버리고 제도 교회 안에 가두어 버린다면, 그리스도는 문화와 종교의 다양성을 지닌 이 복잡한 세상에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되어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교 정신도 그렇거니와 구원 자체도 개인이나 개별적인 문제가 절대 아니다. 토마스 머튼은 구원이라는 것이 개인(individual)으로부터 인격(person)을 구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다르게는 사랑의 경험을 통해 개인을 인격체(personhood)로 이끌어 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느님 안에 살아 있는 인격체(human person)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 혹은 누구인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과 자신, 다른 이들, 그리고 세상과 관계 안에서 누구인가에 기초를 둔 것이다.”
15. 프란치스코 영성에 있어서 성경과 복음 대안적 삶 제3의 길
① 삶의 전적인 기준이자 삶 전체가 된 복음!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복음이 어떤 의미였었는지를 엿보고자 한다면 중세에 있어 성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당시에는 복음이라는 것이 과학적, 신학적 지식을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그때에는 대학은 물론이고 초등학교에서조차도 성경을 기본 교재로 사용하여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데까지 사용했었다. 성경 안에 모든 사실과 질문 가능한 것들에 대한 답이 들어있다고 생각했었다. 이 때문에 성경에 대한 신비적이고도 경외의 분위기가 생겨나 평신도들은 성경을 접하기 힘들었다.
프란치스코 역시도 평신도였으므로 성경을 접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비록 중세 교회가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어도 성경 사용을 제한하고 있었다. 특히 발도파나 알비파 이단 그룹들 때문에 이런 제한은 강화되었다. 그리고 비록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교회가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필사본 성경의 엄청난 가격 때문에 극소수의 평신도들만이 성경을 읽을 수 있었고, 언어적인 제한 때문에도 평신도들이 성경을 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프란치스코가 성경의 내용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에서의 공부와 예술 작품들, 그리고 전례를 통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치스코는 참으로 실질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성경을 그저 지적으로 알고자 하지 않았고 오히려 매일의 삶에서 성경의 메시지를 적용해갔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 번 듣거나 접한 성경 내용을 마치 아들 예수에 관한 일들을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한 동정녀처럼 새기고 또 새겼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실제 삶의 사건 하나하나를 성경 내용들, 특히 복음서의 내용들과 연결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는 대부분의 성경 내용을 꿰차고 있었으며 이렇게 간직한 성경의 모든 내용을 우리 삶에 구체화하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결하였다고 한다.
이는 그가 우리 삶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육화하시어 삶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도 겪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경을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성경의 내용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그의 삶의 기준점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한 번은 그가 병중에 있을 때 성경을 읽어주겠다던 어떤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묵상을 하고 마음에 되새겨 보기에 충분할 만큼 이미 성경의 많은 부분을 나의 것으로 삼았습니다. 아들이여, 나는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비참하게 달리신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복음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더 나아가서는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에”(요한 14,6) 우리 삶의 구체적인 상황들 하나하나에 기준이 되는 분이셨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삶의 완성, 즉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기준은 바로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지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살 것을 요청했던 것은 우리 교회의 편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듯한 인상을 주는 편협한 의미의 선교와는 전적으로 달리 사람들에게 참다운 행복의 현실을 알려주고 이를 살아가게끔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체험한 하느님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삶의 완성, 곧 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기준은 바로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1) 복음적 삶이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과 체험 나눔
프란치스코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지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살 것을 요청했던 것은 우리 교회의 편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듯한 인상을 주는 편협한 의미의 선교와는 전적으로 달리 사람들에게 참다운 행복의 현실을 알려주고 이를 살아가게끔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체험한 하느님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그리스도인들은 나름대로 하느님의 말씀, 특히 복음의 말씀이 분명히 행복을 가져다주는 그야말로 복음(福音), 즉 ‘기쁜 소식’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복음을 삶으로 살아가기가 그렇게도 힘든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는 특별한 해설이 없어도 복음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를 해설해주시는 분이 영으로 바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는 복음에 대한 강론을 듣거나 강론을 할 때는 이를 감동적으로 설명하고, 참으로 감동적으로 이해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하고 생각하고 말한 바를 삶으로 젖어들게 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렇게 설명한다면 좀 무리일까? 복음 말씀은 모두가 사실 어떤 한 가지 상황 혹은 몇 가지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데도 그 한 가지에만 적용하거나 아예 그것이 적용되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폭을 좁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은 사람들의 가진 바를 나누는 힘이 그러한 하느님의 표징을 드러나게 했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 사람들은 가슴 깊이 공감하면서도 그러한 나눔에 자기식의 한계나 제한을 둔다. 즉 ‘이런 사람들에게까지만’, 혹은 ‘이 정도까지만’ 등등의 제한을 두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참된 나눔이 불가능해지거나 아예 나눔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인간도 한 가지 상황에 완전하게는 적합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인간은 한계성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한 가지를 알아들으면 그것이 모든 삶에 적용되는 지침이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복음의 말씀 하나가 모두가 되었고 그 모두가 그 하나로 집약될 수 있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선이 드러나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해석했다. 예를 들어, 프란치스코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죄로 인해 스스로가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던 삶을 용서해주고 치유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프란치스코에게는 하느님이 우리의 죄와 어둠마저도 우리 구원을 위해 활용하시는 분으로 이해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그에게는 어떤 것도 복음을 살아가는 데 제약이 되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복음이 그리스도의 인격으로서 자기 삶에 깊이 들어설 수 있었다. 자기 삶에 깊숙이 들어선 그 복음의 인격에 힘입어 또 다른 그리스도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어느 한 부분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복음 전체를 받아들여 삶 속에 젖어들게 하였던 사람이다. 이를 통해 그는 하느님 나라의 체험, 즉 참 기쁨을 체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삶(Vita Evangelica)’이 지닌 핵심은 어떤 특수한 사도직이나 물리적 공동 현존(기도와 일 모두)을 첫 자리에 두는 삶이 아닌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교회의 수도생활과 관련한 문헌들을 보면 수도생활의 형태를 크게 두 가지, 즉 ‘수도승적 삶(Vita Monastica)’과 ‘활동 사도직 삶(Vita Apostolica)’으로 분류하는데, 엄격하게 말한다면 프란치스코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시를 받아 시작한 삶은 이 두 가지 수도생활의 형태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그래서 비록 교회가 수도생활의 형태로 명시하지 않는 삶이긴 하지만 우리 프란치스칸들은 프란치스칸 삶의 형태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과 그 만남의 내면적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복음적 삶’이라고 말한다.
이 ‘복음적 삶’의 토대에는 본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불어 또 다른 그리스도로의 인격으로 창조되었지만, 우리의 연약함과 죄로 기울어지려는 경향과 그 죄 때문에 지금은 왜곡된 우리의 인격을 또 다른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되돌려야 할 과제가 들어있다. 이 왜곡은 어떤 물리적인 왜곡이라기보다는 우리의 ‘바라봄’의 왜곡이므로 이를 회복하려면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의 눈으로 하느님의 선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과 다른 인격체들을 바라보려고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수양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인격의 원형인 그리스도께 은총을 청하며 수양을 해가면서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다른 이들과 다른 존재들이 결국은 하나로 연결된 존재의 위대한 사슬의 부분들이요 전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2)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 바라봄이 곧 복음적 삶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봄, 즉 관상은 우리 마음 안에 ‘동정(同情, compassion)’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다. 결국, 하느님을 참으로 관상하고 세상을 참으로 관상하는 일은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 이 관상을 통해 우리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천부적 일치를 이루고 있으며, 또한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 특히 인간 존재들과 떼어낼 수 없는 사랑의 연결성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언급해 드린 ‘interface’, 곧 ‘얼굴을 서로 교환하는 것’, 혹은 ‘두 개체나 두 사람이 공통의 얼굴을 지니는 곳(혹은 지니는 것)’이다.
이 깨달음이 우리를 하늘나라의 현실에서 살아가게끔 해주고,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서로 간의 단절과 생태계와 지구 전체의 위기를 극복해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자각이고 의식이다. 그리고 복음적 삶이 우리의 대안적 삶이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보와 보수, 투쟁 아니면 도망, 옳음과 그름 등과 같은 이원적 논리가 첫째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자기 비움과 이 비움을 통한 서로 간의 연결이 그 중심에 있게 된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하느님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공동체, 즉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곳이다. 이 관상과 서로 간 사랑의 바라봄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께서 선제권을 갖고 계신 우리에 대한 사랑의 응시를 알아차려야 하고, 이 응시의 흐름이 우리 존재를 통해 하느님과 다른 존재들에게 흘러나가도록 ‘나’라는 수로를 잘 비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우선하는 일은 하느님 사랑의 바라봄의 흐름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를 우리는 잘 해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무한한 사랑과 용서의 자모적이고 자부적인 하느님 이미지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닌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매튜 폭스(Matthew Fox)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동정은 어디에나 있다. 동정은 세상의 가장 풍요로운 에너지의 원천이다. 세상이 지구촌이 된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동정이 더 필요하다. 이는 이타주의나 철학 혹은 신학의 구현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만 최근의 인류 역사에서 제대로 탐구되지 않고 건드려지지도 않았으며 심지어는 사람들이 바라지도 않는 에너지의 원천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동정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요원하게 느껴진다. 그 옛날 동굴에 거주하던 인간들이 동정 대신 폭력의 경향이 그 무엇이건 간에 산업화 사회의 맹공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동정이 없어진 상황은 이제 세상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이런 동정의 부재 상황을 묵인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인간이 이 우주의 다른 모든 피조물처럼 동정심이 가득한 피조물이라는 창조된 세상과 인간 본성의 충만함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인격체는 적어도 잠재적으로라도 동정적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동정의 부재로 인해 모두 희생자가 되었다. 몇몇 사람이나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희생자이고 더러는 아닌 그런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희생자가 되었고, 동정의 결핍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함께 우리의 인간성을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응시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부정적 에너지와 감정은 점차로 자리를 잃고 녹아내려 사라져버릴 것이다. 「나환우 프란치스코(Francis the Leper)」에서 저자들(Joanne Schatzlein, OSF, RN, MA와 Daniel P. Sulmasy, MD, Ph.D.)은 프란치스코가 나환우였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며, 심지어는 프란치스코의 몸에 생긴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이 나병의 상처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한다. 물론 이 저자들의 이러한 주장이 교회의 신비 전통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허무맹랑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또 그 주장이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매우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머레이 보도 신부(Fr. Murray Bodo, OFM)는 이 책의 서문에서 “만일 프란치스코가 자신이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피던 나환우들에게서 병을 얻어 그들과 같은 나환우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무한한 사랑의 대상인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그리스도와의 극적인 동일화가 이루어진 것이고, 그 자체로 하느님의 신비에 참여한 것”이라는 역설한다. 그러면서 그는 “몰로카이 섬에서 자신이 사랑으로 보살피던 나환우들과 같이 나환우가 되어 삶을 마감한 다미안이 성인으로 추앙을 받는 이유도 바로 그의 자기 비움의 사랑이 하느님의 은총이요 신비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우리는 매일 강력한 자기 비움의 역설적 메시지를 계속해서 선포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죄 많은 우리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취하실 정도로 터무니없이 겸손하게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우리 구원과 완성의 시작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비천한 모습과 같아지시는 구세주보다는 우리의 원수들을 물리쳐주시는 위대한 장군 메시아를 더 선호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3) “하느님을 닮아 서로의 어머니가 되어 줍시다”
하느님의 동정심(compassion)은 생각이나 이상으로 그저 내면 안에 조용히 머물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같은 마음을 품으시는 대상인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취하는 행동으로 명확하고 실질적으로 표현되는 실재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신 궁극의 목적은 우리를 당신 생명의 영원한 복과 그 영광으로 끌어올리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 시작은 밑으로 내려가는 여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엄연한 진리가 존재한다.
가톨릭 저술가로서 복음서의 말씀들을 새로운 우주론과 연결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주디 카나토(Judy Cannato)는 사람들에 대한 위대한 동정심이 예수님이 가지셨던 제일의 목표였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선포하신 하느님의 세계는 자애와 너그러움, 동정과 치유를 특징으로 하는 곳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그 누구도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 거룩하신 분의 사랑으로부터 배제된 이가 없었다. 부자건 가난한 이건, 남자건 여자건, 종이건 자유인이건, 그 누구도 이 사랑의 어우러짐에서 배제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외적인 것으로 인한 분열을 넘어 내면 깊숙한 동정의 문화로 모든 이를 초대하셨다. 동정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동정은 치유한다. 동정은 다친 곳을 고쳐주고 잃었던 것을 되찾아 준다. 동정은 소외되었던 이들이나 관계성 속에 들어서는 것을 꿈꿔보지도 못했던 이들을 모아들인다. 동정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서 끌어내 다른 이의 마음에 들어서게 해준다. 이렇게 해서 동정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신발을 벗어야 하고 경외심을 갖고 걸어야 하는 거룩한 곳에 우리를 있게 해준다. 동정은 유약함(vulnerability)에서 나오고, 친교와 일치로 승리를 거둔다.”(「Field of Compassion: How the New Cosmology Is Transforming Spiritual Life」 8)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초대하시는 새로운 대안적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신비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3의 길, 즉 대안적 삶이란 이미 성경 전통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인격을 통해 선포되고 있고, 여전히, 아니 영원히 우리를 그 세상으로 초대하고 있는 기쁜 소식이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가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시작한 삶이다. 이 삶은 기존의 어떤 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정과 관상, 인내와 순응의 영으로 가득 차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려는 우리의 적극적인 마음 자세와 삶에 의해 영원히 앞쪽으로 펼쳐지는 프로젝트이다.
②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감과 서로 간에 어머니가 되어 줌
프란치스코는 형제들에 서로 간에 진정한 형제애를 구현해야 함을 말하면서 동시에 형제애가 실현되는 근본 자세로서 어머니 성을 매우 강조하여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형제들은 각자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마음 놓고 서로 간에 드러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각자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따라 자기 형제를 사랑하고 기를 것입니다.”(「인준 받지 않은 수도 규칙」 9,10-11)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자상하게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인준 받은 수도 규칙」 6,7)
누구에게 어머니가 되어 준다는 것은 강하고 센 힘이 아니라 약하면서도 부드러운 사랑으로 자녀인 상대를 보호해주고 끌어안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의 부드럽고 끌어안는 사랑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약함을 취하면서까지 인간을 사랑하고 끌어안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아닐까?! 그리고 이런 속성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는 삶이고 또한 기도와 신심(헌신)의 영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노리치의 율리안나 성녀는 하느님을 어머니로 표현하곤 하였다. 하느님의 자기 내어줌을 통한 우리의 창조와 길러줌 그리고 우리를 당신 사랑 안에 다시 모아들이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어머니와 같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리안나 성녀가 말하듯이,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하느님의 속성이 어머니 같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들이 하느님의 본질을 닮은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좀 더 확장해서 얘기하자면 어머니들뿐 아니라 어머니의 속성을 지니신 하느님에게서 창조된 우리는 모두 어머니 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어머니로서의 하느님은 자신의 생명과 자녀들의 생명을 동일화하기에 자녀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고 길러주고 자녀들을 모두 당신 생명에 참여하게 하는 본질을 지니실 수밖에 없다. 프란치스코가 서로 어머니가 되어 줄 것을 형제들에게 부탁한 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서로를 그런 어머니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존중하며 서로를 하느님의 생명으로 이끌어 주라는 권고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 간에 필요한 것을 마음 놓고 드러내 보이라는 것은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다른 이들의 도움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으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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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64) 연약함 받아주시는 하느님의 자모적 사랑 체험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에는 창조와 완성의 근원이신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결합, 혹은 일치가 들어있다. 인간의 연약함과 부서지기 쉬움, 그리고 악으로 쉽게 기울어지는 경향은 인간을 스스로 불행으로 몰아가게 하는 요소이다. 하지만 이것이 인간의 본질 전체에 속하는 한 부분임을 온전히 인정한다면 그 시점부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힘의 작용을 체험하게 된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이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지 간에 우리에게 당신 사랑의 손길을 뻗쳐주시는 분이시긴 하다. 하지만 떠오르는 해나 비를 우리가 피할 수 있음도 역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실 예수님께서 “원수마저도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하자면 은총을 있는 그대로 감지하고 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내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 현실의 약함 때문에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철저한 자기 인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생명과 아름다움, 통합과 완성으로 이끌어가는 주님 영의 현실을 인식하고 체험하며 따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프란치스코 영성의 핵심이며 이것은 주님 삶과 말씀으로 이루어진 ‘복음’의 실재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저 인간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약함과 깨어지기 쉬움 등과 한계들을 모두 받아들이신 것이다. 그분은 모든 이가 당신께로 온전히 되돌아가 그분의 신성에 완전히 결합할 가능성을 열어주셨다.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셔서 이런 엄청난 은총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셨다면 이 방식이야말로 인간 완성의 근본 원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인간의 연약한 현실이 본래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의 의지를 자기 것으로 해 남용한 까닭에 빚어진 왜곡된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이 왜곡된 인간의 현실이 우리의 본질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제2차적 본질을 분명히 직시할 때 우리 인간을 이 제2차적 본성에서 벗어나 제2의 아담인 그리스도에 일치시키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misericordia)와 사랑을 보게 된다.
‘suffering’은 본래 ‘받아들인다’ 혹은 ‘허용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르코 복음(8,5)과 루카 복음(9,48)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어린이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어머니가 자녀의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을 내어주고 길러주는 사랑이 진정한 의미에서 어머니의 사랑(‘suffering’)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받아들이시며 당신을 내어주시는 자모적 사랑이고, 하느님의 이런 받아들이시는 사랑의 모상을 각인 받은 우리 인간 존재의 본질 중심에는 이런 어머니의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가 자기 삶을 마감하며 쓴 유언에서 고백하고 있는 ‘몸과 마음의 쓴맛’이 단맛으로 변하는 데 필요했던 덕이 바로 ‘자비(misericordia)’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자비를 말하는 것이기에, “나는 그들 가운데서 자비를 베풀었습니다”를 “그분께서는 그들을 통해 당신의 자비를 내게 보여주셨습니다”로 바꾸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프란치스코가 “그들에게”라고 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서”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점에도 주의를 기울여 본다면 이렇게 바꾸는 것이 큰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비를 베푸는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고 자신과 나환우들 역시 그분 자비의 매개체이자 수혜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프란치스코는 그들을 통해 주님의 자비를 입어 회개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언젠가 이 유언의 어떤 영어 번역본에서 “그들에게서 떠나올 때”를 “그들을 온전히 알게 되었을 때”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렇다. 프란치스코는 나환우를 온전히 알게 되면서 자기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이고, 그것을 보았을 때 비로소 그는 역겨웠던 것을 단맛으로 느낄 수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그 나환우의 일그러진 외모를 통해 자신의 나환우성을 볼 수 있었던 것이고, 이를 치유해주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게 됐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깨달음이나 인식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금방 자신의 연약성을 철저히 인식하고서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다시 또 왜곡된 자기 모습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 또한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게 “늘 깨어 있으시오”(마태 25,13)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연약성을 순간순간 직시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깨어있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세가 아닐까 한다.
프란치스코는 죽기까지 자신의 약함을 직시하고자 하였고 여기서 자신을 변화시켜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체험하였다. 이를 통해 결국 그는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변모되었고, 또 다른 이들도 이 변모에 참여하게끔 계속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말하고자 하는 어머니 성의 본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