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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감사,감사,또 감사(레23장42-44, 요14장27, 골3장12-15)
< 추수감사 주일 설교>
I. 시작하는 말
Karl Hilty라는 분이 ‘잠 안 오는 밤을 위하여’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힐티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감사의 마음이 일어날 때 마음에서는 엔돌핀이 분비됩니다. 엔돌핀은 노화를 방지해 줍니다. 一笑 一少 一怒一老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한 번 웃으면 또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노하면 또 한 번 늙어진다는 말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웃음이 나옵니다.
여러분, 오늘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여러분들의 영혼이 젊어지고 여러분의 육신도 또 한 번 젊어지시기를 원합니다.
원래 추수감사절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영국에서 신대륙 아메리카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첫 농사를 짓고 하나님께 드린 감사예배에서 유래됐습니다. 그러나 그 추수감사절이 미국에서 공식 국경일로 제정 공포된 것은 1863년 에브라임 링컨 대통령 때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공포하고, 이 날은 모든 국민이 일손을 멈추고 교회로 모여 일년 동안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예배하는 날로 선포했습니다. 그때는 남북전쟁이 한창 치열했을 때였습니다. 전쟁의 아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우선됐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바로 이것이 미국을 복 받은 나라로 만든 능력인 줄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추수감사절은 지금부터 3000년 전 모세 때에 이미 선포됐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이 바라보이는 광야에서 이스
라엘 백성들에게 고별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초막절을 공포했습니다. ‘너희는 칠일 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居할찌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단지 풍년을 주신 것에 대해서만 감사며 기뻐하는 게 아닙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나와서 초막을 짓고 그 속에서 칠 일 동안 생활하면서 조상들의 광야생활을 직접 몸으로 겪으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광야의 칠일 동안의 생활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이 없습니다. 먹을 것도 없습니다. 낮에는 무지하게 뜨겁고 밤에는 도 엄청 춥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모래에 뒤덮입니다. 아이들은 집으로 가자고 졸라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힘들고 어려운 일주일을 참고 견디면서 아이들에게 조상들의 광야생활 40년의 역사를 가르칩니다. ‘조상들의 광야 40년, 먹을 양식이 없고 마실 물이 없는 광야에서의 40년,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나로 먹여주시고 바위틈에서 생수가 나게 하셨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면서 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셨단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이 이렇게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있단다’
‘그러므로 얘들아, 하나님 여호와께 감사하라.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시란다’
이렇게 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드리는 감사, 그런 감사가 형식적인 것이 되겠습니까? 정말로 감격하고 감동돼서 드리는 감사, 정성을 다해서 드리는 감사제사가 된 줄 믿습니다!
II. 살아 있는 추수감사 예배
체험을 통한 감사는 바로 살아 있는 감사입니다. 몸소 겪어 봤으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감동되고 감격해서 드리는 추수감사 예배는 그래서 은혜가 됩니다.
여러분, 이 시간 이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면서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감사하느냐?’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내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막연하게 ‘일년 동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그냥 도매 껌으로 넘겨서야 되겠습니까?
어떤 분이 추수감사절을 맞아서 지난 일년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 하나 쓰기 시작했답니다. 기억을 더듬으면서 백 다섯 가지의 감사를 쓰고 나니까 더 이상 쓸 것이 생각나지 않더라며 한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난 일년 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어찌 백 다섯 가지만 되겠습니까 만은 그 백 다섯 가지나 기억해 낸 그 분도 대단하신 분입니다. 단 열 가지도 기억하기가 힘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많다보니까 그만 셀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드리는 이 추수감사 예배가 여러분들이 정말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지난 일년 동안의 인생을 되돌아보며 진정으로 감사의 마음이 될 때 여러분들의 앞으로의 인생이 더욱 더 복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크게 세 가지를 추려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갑사를 드립니다.
째, 금년 농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금년 농사, 어떻습니까? 풍년은 아닙니다만 흉년도 아닙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지난봄, 여름 가을까지의 기상여건은 아주 유별했습니다. 계속된 비로 햇볕을 받지 못해서 농작물이 영글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태풍피해가 또 대단했습니다. 기상 여건으로 봐서는 흉년이 뻔했습니다. 그렇잖아도 경제가 바닥을 쳐 온 백성들이 죽겠다고 하는 판에 흉년이 돼 보세요? 이 나라 이 백성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울면서 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너무 교만했습니다. 이 백성들, 참으로 어처구니없이 교만했습니다.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셨습니다. 흉년을 면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이것부터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밥상 앞에서 참으로, 진정으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농사를 짓는 분들의 입장에서 추수감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도시에 사는 분들은 농민들의 고마움을 너무 모릅니다. 쌀 한 톨 생산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농촌진흥청 조사에 따르면 농부가 살 한 톨을 얻기 위해서 같은 논두렁을 아흔 여덟 번을 걷는답니다. 여러분들이 흘리는 쌀 한 톨, 밥 알 하나 하나에 농총에서 수고하시는 우리 이웃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습니다. 어찌 소홀히 다룰 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농부가 아흔 여덟 번이 아니라 9천 800번을 걸으면서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려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해 주시지 않으면 단 한 톨의 쌀도 만들 수 없는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어찌 농작물 농사만이 농사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삶이 다 농사 아닙니까?
▶가정을 돌보는 것도 가정 농사요,
▶자식을 키우는 것도 자식 농사요,
▶돈 버는 것도 사업 농사입니다.
▶지난 1년 동안의 모든 일들이 다 농사짓는 일이었습니다.
금년 일년 농사, 우리의 범사, 물론 힘들고 어려운 때도 있었습니다. 언제나 순풍에 돛단배만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어려움이 계속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지난 일 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마땅합니다. 복이 따로 있습니까? 여기까지 살아온 게 다 복입니다. 주신 복을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앞으로 주실 복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둘째, 추수감사절을 통해 봄을 봅니다.
여러분, 매년 추수 추수감사절이 단지 농사 풍년에만 묶여 있으면 살아 있는 감사가 되지 못합니다. 받은 복에 대해서만 감사하면 소망이 없습니다. 추수는 이미 끝났습니다. 추수가 끝난 논밭은 지금 썰렁할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물결 뒤치며 어디든지 태양 빛에 향기 진동하다’며 풍년을 찬양합니다.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 때는 왜 우리가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지켜야 하느냐고 못마땅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한 때는 한국 교회의 추수감사절은 추석명절을 전후해서 드려야 한다고 주장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미국에서 몇 년 살면서 새로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미국의 들녘도 우리처럼 썰렁합니다. 미국의 동부와 북부는 우리와 기온이 거의 비슷합니다. 이맘때쯤이면 가을걷이는 이미 다 끝났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때에 추수감사절을 제정 공포한 이유는 추수너머 저쪽을 보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지 않았겠느냐고 생각됩니다.
추수감사절은 단지 농작물에 대한 감사절이 아닙니다.
지난 일들에 대한 감사만이 아닙니다.
앞으로의 소망에 대한 감사가 곁들여져 있습니다.
신명기 16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칠 일 동안 초막절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면서 ‘여호와께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아직은 복을 받은 것이 아니지만 복 주실 것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받은 복에 대한 감사만이 아니고 복 받을 것을 소망하며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 저 너머의 광야에서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봤습니다.
여러분, 지금 들녘은 썰렁합니다. 그러나 이 추수감사절을 통해 그 썰렁한 들녘 속에 나타나 계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체험하자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지금 들녘은 황폐하고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꽁꽁 얼어붙을 겁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서 숨을 쉬고 있습니다. 봄이 되면 다시 싹이 나고 여름이 되면 다시 풍성해지고 가을이 되면 다시 탐스러운 열매로 가득할 겁니다.
여러분, 그래서 지금 썰렁한 들녘을 바라보면서 겨울 저 너머의 봄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자는 말씀입니다. 지금의 은혜에만 감사하는 게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으로 감사하는 겁니다. 이게 소망입니다. 비록 지금 들녘은 썰렁해도, 지금의 내 형편이 겨울의 들녘처럼 꽁꽁 얼어 붙어지만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에 다시 녹아질 줄 믿습니다. 이제 봄이 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봄을 주십니다. 꽁꽁 얼어붙은 땅은 녹고 그 속에서 새싹이 솟아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며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어느 탄광에서 갱이 무너졌습니다. 구조대가 와서 구조를 하지만 상황이 아주 나빴습니다. 구조작업이 자꾸 지연됩니다. 갱 속에서 이제는 숨쉬기도 힘들어졌습니다. 거기에 갇힌 사람들이 두부류로 나뉘어 졌습니다. 왜 이렇게 구조가 더디냐고 고래 고래 소리치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상황 속에서도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며칠 만에 마침내 구조대가 갱 속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불평했던 사람들은 이미 다 죽어 있었지만 기도하던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숨을 쉬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절망적인 상황 저 너머를 바라보며 오히려 감사하는 사람의 생명은 깁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은 생명이 깁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명도 영원할 줄 믿습니다! 영원한 생명, 그 생명을 바라보며 소망하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요, 그 기쁨에서 맛보는 평안입니다. 세상 이치로 보면 황폐한 들녘, 꽁꽁 얼어붙은 들녘에는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소망도 없습니다. 그래서 절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봅니다.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을 느낍니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느낍니다. 지금 당장은 참 힘듭니다. 죽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으니까 이 고통 속에서도 봄을 기다립니다.
봄은 소망입니다.
그 봄이 믿음 안에서 보입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서도 웃음이 나옵니다. 고통 속에서도 감사가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끝났다고 단정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골고다 너머 저 넓은 온 세상을 바라보셨습니다. 오 세상을 향해 그 보혈을 쏟으셨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의 생명, 갈보리 십자가에서 쏟으신 보혈로 온 세상에서 우리 주님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평안입니다. 평안!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통해 썰렁한 들녘 너머의 참 평안을 바라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 안에 있는 영원한 평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셋째, 추수감사절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여러분, 금년에는 무엇을 추수하셨습니까?
영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무엇을 거둬들였습니까?
믿음도 좋고 소망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믿음과 그 소망 안에 사랑이 없다면 그 믿음은 병든 믿음이요 소망도 헛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감사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입니다.
추수감사절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겁니다.
추수감사 예배에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야 합니다.
추수감사예배에 아무리 우리의 감사가 풍성하고 기쁨이 넘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다면 감사도 거짓이요 기쁨도 헛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은 주님의 계명입니다. 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할 지상 명령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이니까 이제부터라도 지키면 됩니다. 지금까지 지키지 못한 것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이제부터 지키면 됩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
여러분, 추수감사절, 이 예배를 통해 사랑의 추수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부부는 그렇지 못한 부부보다 7년을 더 오래 산다는 연구보고가 있습니다.
사랑은 생명을 연장시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는 오래 오래 삽니다. ‘
여러분,
사랑에는 반드시 열매가 달립니다.
사랑의 열매는 용서입니다.
용서 없는 사랑은 쭉정이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반드시 용서가 달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추수감사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사랑을 추수하고 용서를 추수해야 합니다. 여러분,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주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이 감사추수감사절을 통해 내 마음 속에 꽉 차 있던 미움이 싹 녹아지기 원합니다. 증오가 확 풀려지기 원합니다.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러하라’고 했습니다. 용서할 때 평강이 됩니다. 용서할 때 감사가 되고 용서할 때 찬양이 되는 줄 믿습니다!
어떤 여 집사님이 설교를 열심히 들으면서 속으로 한 숨을 쉽니다. ‘좋은 말씀이죠. 용서해야죠? 그렇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라야죠? 그 여 집사님에게 남편은 남편이 아니라 원쑤였습니다. 원쑤! 허구 헌 날 매일 술 마시고 자정이 돼서야 집에 들어오는 데, 도대체 어떻게 집은 찾아왔는지, 집까지 와서는 문 앞에 쓰러져 있습니다. 매일 밤 이렇게 쓰러진 남편을 끌어다가 침대에다가 누입니다. 집사님은 그런 남편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습니다. 집사님은 그래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려고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러나 기도는 나오지 않고, 신세 한탄만 나오고, 자신의 처지가 처량해서 울화가 치밀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원망스런 기도를 합다. "하니님, 왜 나를 저런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서 이 고생을 하게 하십니까?"
그날도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교회 갈 때에 자고 있던 남편이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도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오늘 목사님 설교를 들은터라
’그래 그래도 감사한 마음을 갖자. 감사하며 살자‘
마음으로 연상 감사, 감사하면서 점심을 차려줬습니다.
점심때가 지나서 아침을 먹은 남편은 오후에 또 잡니다. 그래도 군소리 않고, 저녁 8시쯤 저녁을 지어서 또 기쁜 얼굴로 감사 찬양을 하며 정성스럽게 대접하였습니다. 남편이 좀 이상하다는 듯이 힐끗 힐끗 쳐다봅니다. 전하고는 전혀 다르니깐요.
’이 여자가 왜 이래?‘.
하지만 다음 날 월요일, 남편은 역시 또 취해서 12시가 넘어서야 들어와서 쓰러졌습니다. 집사님은 화가 불끈 치밀어 올라 왔지만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나서 꾹 참고 ’그래 오늘은 남편을 위해서 정말 감사 기도 좀 해 보자‘ 하지만 뭐 감사할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죠? 그래도 그저 감사하다고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을 기도하니까 성령님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셨습니다.
마음이 감동되니까 순간적으로 생각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 ’지금 술 냄새를 풍기면서 코를 골고 자고 있는 남편이라도 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낫지 않느냐‘
▶ ’저렇게 취해 있어도 용케도 집까지는 찾아와서는 문간 앞에서 쓰러져 주는 것도 고맙지 않느냐‘
▶ ’그리고 토요일은 술을 더 많이 마시고 와서 주일날 아침 늦게 까지 잠을 자고 있으니까 집 잘 봐줘서 교회가기 좋지 않으냐‘ 등등의 생각이 마음속에서 솟구쳐 나옵니다.
그래서 집사님은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편은 아내가 손을 잡고 기도하는 소리에 잠이 깨었는데, 눈을 뜰 수도 없고 일어날 수도 없습니다. 양심에 가책도 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눈을 감고 자는 척하고 있는 데, 아내는 처음에는 이런 남편도 감사하다고 기도를 하더니, 그 다음부터는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술에 취해 오다가 하수구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간염 걸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다른 동료들과 실수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오래 오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를 하다가 찬송을 하고, 찬송을 하다가 기도를 하는데, 울면서 기도하는 것도 같고, 신이 나서 웃으면서 찬송을 하는 것도 같았습니다.
남편도 도무지 그대로 자는 척 할 수가 없어서 견디다 못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 지금 우는 거여, 웃는 거야?
남편이 감동된 겁니다. 나 같은 술 꾼, 그래도 이렇게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은 내 아내 뿐이구나! 아내의 기도를 듣고 충격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이제 술 그만 먹고 다음주부터 교회에 나갈게’ 할렐루야!
(보너스)
50이 넘은 여류작가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분에게는 그 아들이 전부였습니다. 오직 그 아들 하나를 바라보면서 삽니다. 그런데 군대 갈 나이가 돼서 신체검사를 받는데 이상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진단결과 암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여류작가는 참으로 강인한 사람이었지만 병든 아들 앞에서는 한 어머니였습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매 달리 수 있는 길은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뿐이었습니다.
어미보다 먼저 가려는 자식을 품에 안고 절규했습니다.
‘왜 먼저 데려가시려고 합니까? 하나님, 말씀 좀 해보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십니다. 대답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죽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장사지내고 난 뒤 아주 귀중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구나.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주장하신다. 하나님이 바로 내 생명의 주인이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천국이 정망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됐습니다. 아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먼저 갔을 뿐이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간증의 소설로 썼습니다. 그 여류작가가 누구냐 하면 ‘주여 한 말씀만 하옵소서’의 작가 박완서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능력입니다. 기도는 힘입니다. 감사를 통해 예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III. 맺는 말
여러분, 추수감사 주일은 우리 가운데서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주일입니다.
참된 감사는 생각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어떻게 생각되느냐?
그래서 영어의 Think와 Thank는 어원이 같은 말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감사가 나오지 못합니다.
유명한 명상록 팡새는 파스칼이 길을 가다가 다리에서 떨어져 엄청난 아픔을 당할 때 쓴 겁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친구와 함께 가다가 그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은 것으로 보고 한 순간 생명을 깨달아 법학도의 길을 버리고 주님의 일에 몸 바쳤습니다. 요한 웨슬러는 자기 집에 불이 났을 때 그 불 속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못해 불같은 주의 종이 됐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의 질이 달라집니다. 썩어 없어질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압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생각하고, 내게 주실 것을 생각할 때 그저 감사, 감사, 또 감사, 감사뿐인 줄 믿습니다.
설교: 박영우목사 (광주안디옥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