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움과의 이별을 통해 우러나온 삶에 대한 조용한 반성
- 허영자론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어떤 학문이거나 어떤 철학도 ‘인간’을 떠나 존재할 수 없을 것이고, 시창작 역시 ‘인간의 삶’을 전제로 해서 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삶에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단순한 사조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적 필연성이라는 항구적인 의미에서 시작의 의미는 날로 고조되고 있다고 하겠다. 직관적 창작태도는 인간의 내면성을 강조한다. 시의 창조적인 작품화는 모든 삶의 필연적인 표현이다. 인간 삶의 매 순간은 자신의 표현을 통한 자기의 창조다. 다시 말하면 삶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일 수 없는 모든 현실을 포괄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것이 참다운 삶의 핵심적인 사상을 이루고 있다. 위대한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창조하는 것이며,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은 창조를 평가한다는 의미다.
니체는 창조되어질 수 있는 작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행위에서 오는 창조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창조자가 자신의 창조적 행위에서 삶의 상승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즉 초월함을 성취시킨다는 그 사실에 전후무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개개인의 인간에게 무엇보다도 내적인 과정이 중요하다. 허영자 시 <은발>이 보여주는 강한 매력은 무엇일까. 시인은 인간의 삶과 그 삶의 표현이라는 관계를 보다 주의 깊게 분석함으로써 삶의 시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특히 시적 삶은 자기표현에 있으며, 자기표현으로써 비로소 형식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창조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Ⅱ.
시인은 삶의 창조적 업적을 가장 유효적절하게 표현함으로써 자기 인식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사람이다. 본질적 의미에서 자기를 관찰함으로써 자기 삶에 관한 표현을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 속에서 삶은 형성되고, 자기 인식이 증대되는 것이다. 시는 지식이 밝혀내지 못하는 심원한 깊이까지 파고들어 삶을 고양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이 다름 아닌 창조적인 것이다. 체험의 심연 속에 깊숙이 내재하는 것을 다 드러나게 하고, 엄밀하게 말해서 무의식적인 것에서 나오는 그것이 삶에서 보이지 않았던 무엇을 창조해낸다고 할 수 있다.
표현적 삶을 이행함으로써 삶의 위대한 체험을 더욱 보충할 수 있고 확장할 수 있으며, 인식 가능성에 대한 일종의 비판작업으로서 삶을 파악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기술이며 진실을 담아야 하는 유익한 기술인 고로 시인은 자신의 철학에 생명을 불어넣어 자기 사상의 실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볼 수 있겠다. 시는 생활을 철학적인 차원으로까지 고양시키는 작업이다. 시인은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세계 속에서 어떠한 방법으로든 자신을 반성적으로 성찰해서 자기를 발견하고 또 더 나은 자신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가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시적 화자는 이 시를 통해서 인간의 자아실현을 돕고, 물질화되고 소외된 세계를 인간미가 넘치는 세계로 변혁시키고자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시 <은발>은 시인과 시인을 위요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해석에서 출발한다. 세계란 사물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건까지 포함한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세계라고 하는 텍스트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말이다. ‘은발’에는 삶의 프로세스가 담겨 있는데, 시의 제목에는 생의 후반기가 흐르고 있다. 이 시는 연륜에 대한 해석이 해석으로 끝나지 않고, 그 내용이 구체적 형체를 갖추는 단계까지 올라간 까닭으로 감동을 주는 한 편의 시가 완성된 것이다.
머리카락에
은발 늘어가니
은의 무게만큼
나,
고개를 숙이리
- <은발> 전문
이렇게 짧은 시가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유는 뭘까. 가벼운 은발을 무거운 금속의 은으로 전이시킨 전략적 의미화 때문이다. 이와 같은 방식의 언술 양상은 이미지가 전달하는 미적 감각을 극대화한다. 그리하여 이미지는 단순히 장면을 재현하는 차원을 넘어 지배적인 정황dominant impression을 제시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은의 무게만큼 고개를 숙이리’라는 언명은 미적 인식의 측면에서 미적 형상화가 지배적인 인상과 정황을 통해 우리의 미적 사유를 자극한다. 시인이 대상의 이미지를 구체적 비유로 제시, 연상과 상상의 통로를 거쳐 메시지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것은 미적 인식과 관련하여 다른 시와 확연한 차이를 지닌다.
시의 문학적 성취는 전이와 치환, 변용에서 나온다. 짧은 한 줄의 시가 주는 어마어마한 이미지의 힘은 감각화된 시적 화자의 생에 대한 성숙한 성찰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은발의 무게로 고개 숙이리’라는 정황 안에 담긴 시인의 성찰이 환기하는 인생에 대한 깊은 반추가 가슴을 파고들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시인의 ‘고개 숙임’이 보다 선명하게 우리의 미의식 안으로 잠입하게 된다. 이 시 한 줄의 짧은 언술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환기하는 미적 인식을 제시하며 우리를 반성적 성찰에 들게 하는 것이다.
‘은의 무게’라는 이미지를 통해 지배적인 인상을 드러내며 감각화된 세계를 보여주는 이 시의 쾌미는 ‘낯설게 하기’에 있다. 좋은 시는 비유와 상징을 통해 제재에 내재한 기의의 세계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미지라는 기표 안에 기의를 감추게 되는 형상화는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 시는 이 과정을 거치고 있다. 따라서 해석과 형상화는 시가 갖추어야 하는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라 하겠다. 은발을 금속 ‘은’에 비유하지 않았더라면 이 시의 문학적 성과는 많은 부분 성취되지 못했을 것이다. 시에서 형상화는 절대적이다. 비유는 기적을 낳는다. 예술적 시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허영자의 시에서 우리는 전이 미학의 멋과 맛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Ⅲ.
따라서 감상하는 입장에서 독자들은 단순히 비유의 함축성을 해독하는 데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표현이 만들어 내는 시로서의 미감美感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노년의 인생이란 강렬하고 뚜렷한 무엇이 아니라 연륜과 여유 속에서 무거움과의 이별을 통해 우러나온 삶에 대한 조용한 반성이다. 4.19이후 살아 있다는 것이 부끄러워 한동안 땅만 내려다보고 다녔다는 시인의 말씀이 은의 무게와 오버랩되는 건 왜일까. 이 지점에서 이 시가 갖는 문학으로서 수행하는 예술적 기능을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