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엿장수 가위의 작은 기적
가위
어느 집에 가도 가위는 있다.
그리고 동양이든 서양이든 옛날 무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유물 중 하나가 바로 그 가위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가위는 삼국 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가위의 이미지는 결코 긍정적인 것이 못 된다. 인간의 명줄을 자르는 죽음의 여신이 손에 들고 있는 것도 가위이고, 삼손의 머리칼을 자른 델릴라의 그것도 다름 아닌 가위였다.
가위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무엇을 자르기 위해 고안된 도구이기 때문에 자연히 악역 노롯을 해올 수밖에 없었다.
바늘, 실, 가위로 이루어지는 반짇고리의 세계에서도 가위는 이질적인 존재로 늘 소외되어왔다. 정다운 부부처럼 떼놓을 수 없는 인간관계를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라고 표현한 속담이 있듯이 바늘과 실은 늘 붙어 다닌다.
가위와는 반대로 바늘과 실은 해진 것을 꿰매고 끊긴 것을 봉합한다. 더구나 실은 면면히 이어져가는 연속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돌잡이에서 돌상에 놓인 실타래를 집으면 부모는 아이가 장수할 것이라 믿고 좋아한다.
그에 비해서 가위는 이어져 있는 것을 자르고 함께 있는 것을 베어낸다. 분단, 단절 그리고 제거의 힘으로 작용한다.
특히 가위는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글이나 영화를 검열하는 것을 흔히 '가위질'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가위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한편 서양에서는 남의 글을 훔치는 표절을 가위에 비유하고 있다. 남의 글을 가위질로 도려내어 자기 글에다 붙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엉터리 문사는 펜이 아니라 가위로 글을 쓴다. 그래서 19세기 알렉상드르 뒤마가 연극을 상연했을 때 그의 라이벌들은 꽃다발 대신 커다란 가위를 선물했다고 한다(그 가위를 받아든 뒤마는 객석을 향해 "이 가위를 드릴 테니 어디 한번 이런 작품을 써보시지요"라고 역습해서 박수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생김새까지도 x 자를 닮아서 우리는 보통 틀린 것을 가위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처럼 용도도 생김새도 다 같이 사랑받지 못한 가위의 이미지를 역전시켜 그 일탈의 시적 효과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한국의 엿장수 가위다. 우선 그 생김새를 보면 끝이 무디고 날이 어긋나 아무것도 잘라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야말로 가위에서 가위의 기능을 가위질해버린 것이 엿장수 가위다. 엿장수 가위는 자르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는 음향효과에 그 기능을 두었기 때문이다.
절단 작용을 청각 작용으로 전환시킨 순간 가위는 악역에서 정겨운 주역으로 바뀌게 된다. 모양도 이미 X 표가 아니다. 검고 순박한 모양새의 무딘 솟조각은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것을 결합하는 융합의 상징물로 보인다. 실제로 엿장수 가위 소리는 마을 아이들을 모이게 하는 마력을 지닌다.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것처럼 엿장수 가위 소리에는 아이들이 따라다닌다. 그래서 엿장수 아저씨의 가위 소리는 늘 현실을 넘어선 꿈결 속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그 가위는 무엇이 잘리는 공포, 프로이트가 말하는 거세 콤플렉스의 불안이 아니라 오히려 듬백 덤을 주는 훈훈한 인정을 느끼게 한다.
우리 문화 박물지 중에서
이어령 지음
첫댓글 와우 엿장수 가위 나왔네욤. 전 보자기 글이 최고였어요.
놓치지 않을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