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 (제16회 / 이명자)
이반이었다.
나는 이반과 약속한 적이 없었다. 제발 믿어 달라. 나는
헤랄드에 다시 오게 된 것을 정말이지 나 혼자서 순수하게 자축하기 위해서 학교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그러나가 언제나 골칫덩어리였다. 별들이
빛나는 이 가을밤 은은한 달빛아래서 하얗게 빛나는 설탕가루(코케인의 은어)를 보는 순간 나는 그만 몸과 마음과 정신까지 헤 까닥 돌아버렸던 것이다. 신성한
학교에서 앞으로 온갖 나쁜 짓을 행하려는 전초전이었다. 나는 이반이 내민 코케인을 콧속으로 들이마시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짜릿한 흥분이 옴 몸으로 퍼져나가는 걸, 음미했다. “기막히지? 내가 이걸 구하느라고 걸어서 왕복 두 시간이 걸리는 시골길을 다녀오지 않았겠어. 나 대단하지.” 이반의
목소리가 밤하늘을 향해 퍼져나갔다. 입만 열면 자기자랑에 정신을 못 차리는 이반이었지만, 그때만큼은 이반이 좋아 죽을 지경이었다. 그토록 좋은 코케인은 처음이었다. 코로 들이마시자마자 너울너울 춤추는 무엇인가가 얼마나 황홀했던지 말이지. “쉿, 조용히 해. 네 목소리가 너무 크단 말이야.” 나는
그나마 속 다르게 방어전을 펴며 주위에 신경을 썼다. 주위는 낮인지 밤인지도 분간 못 하는 식물인간처럼
온 누리가 검은 정적에 잠겨있는데도 말이지. 그러나 쥐도 새도 모르게 발각되면 어떡해? 나는 아직 솜에 스며드는 물처럼 티내지 않고 ‘즐기자 나의 환상’ 을 갈구하는 중인걸! “겁
내지마. 아직도 다들 떠들어 대고 있을 테니까.” “너
정말 대단하다. 이렇게 대단한 것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너는
정말 대단해. 어디서 구한 것이니?” 나는
이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설탕 가루에 또 한 번 코를 들이박고 빨아대며 한껏 이반을 치켜세워 주었다. “그
얼굴 껍질 두꺼워 징그럽다고 네가 말했던 그 백인남자 말이야. 그 남자는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고 학교
주변을 배회하던 팔뚝에 독수리 문신을 잔뜩 세긴 흑인 남자를 만났어. 그의 거처까지 따라갔었지.” “뭐라고? 너 혼자서 말이야?” “아니지. 내가 위험한 짓은 손수하지 않는다는 거 너 알잖아. 공화국을 세웠으니
비서들도 있을 거 아냐. 내게 맡기라고 했잖아” 그랬다. 이반은 주말마다 나타나던 마약 판매상과는 대면을 일절 하지 않았다. 마약상이
오는 것을 지켜보다가 스티브와 제임스를 번갈아 가며 내보내 자신이 원하는 마약을 사게 했다. 나는 그런
이반이 괘씸했고 아니꼽고 상종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반은 달랐다. 내가 뭐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라나 뭐라나 하면서 내게 가져다 바치는 것도 여러 가지였다. 지금도 나는 공짜로 이반의 비싼 코케인을 걸신들린 사람처럼 흡입하지 않았는가 말이지. 이반이 돈이 많아 좋기는 했다. “이반의
돈이여 영원할지어다.” 내가
이반의 돈을 찬양했다. “내
돈이여 영원할지어다.” 이반도
낄낄거렸다. 우리는 낄낄거리다 허물어진 몸가짐으로 구름 위를 걸으며 각자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아침이
밝았다. 고등학교 일학년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영문학 시간이었다. 영문학수업을 받는 명단에 분명히 이반도 끼어있었다. 모두 열두 명이었는데
이반이 보이지 않았다.
새날이 시작하는 꼭두새벽부터 학생의 본분을 망각하다니 나는 이반 때문에 겁을 잔뜩 집어먹었다. 영문학
선생은 헤랄드 사립학교가 세워지면서 장장 이십 년을 이곳에 뿌리를 박고 있었고 하얀 머리카락을 여자처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다니며 핀셋으로 집어내듯
학생들의 비리를 콕콕 집어내기로도 유명했다. 고약하기로도 유명했다. 잔소리
많기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아직 세상을 알지(영문학
선생에 비하면 말이지.) 못하는 학생들을 백 보나 앞서가서 학생들의 비리를 샅샅이 밝혀냈다. 내놓고 부르는 그의 별명은 그의 이름을 따서 황태자(선생의 이름은
찰스였고 영국의 황태자 찰스를 비유해 황태자라 불러주었다.)였지만 암암리에 떠도는 별명은 살쾡이였다. 이런 사정을 이반은 알고 있기나 한 것인지. 물론 알고도 남았을
것이다. 모르면 바보 과에 속할 테니까. 이반이 처음 헤랄드에
왔을 때는(이반은 팔 학년 초에 유학 왔다.) 떠듬거리는
영어로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성질은 무지하게 좋아서 자신의 의견이 틀렸든
말았든 누구에게나 먼저 손을 내밀었다. 이년 전 내 알량한 기억에 의하면, 천고마비의 계절 오곡이 무르익고 새털구름이 푸른 하늘을 수놓고 우리들의 몸도 무르익느라 왕성한 식욕으로 인해
볼이 터지도록 음식을 입안에 집어넣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아침나절 이반이 아직 헤랄드에 익숙해지기
전, 양치질도 하지 않은 이반은 아침 수업을 빼먹고 늦잠을 잤다가 이른 아침부터 기숙사를 점검하는 살쾡이에게
걸렸다. 그 뒤는 보나마나 뻔했다. 팔굽혀
펴기를 이십 번을 해야 했고 반성문을 써야 했고 줄기차게 쏟아져 나오는 잔소리를 무릎 꿇고 앉아 들어야 했다. 뒷날
이반이 살쾡이의 잔소리를 흉내 냈다. 야-너는 학생인가 규칙을
어지럽히는 불량배인가 너의 부모를 욕되게 하는 불효자식인가..... 인가 인 가 인가, 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반에게는 하나 더 인가, 가 붙었다. 너는
머나먼 나라에서 온 녀석이 이게 무슨 짓인가, 라고. 그러니
이반이 잊을 리가 있겠는가. 나도 그 기억을 하고 있는데 말이지. 이반이
살쾡이에게 걸리면 나도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이반은 마음이 좋아서 입도 좋았다. 아무 말이나 참지 못하고 주절대는 버릇이 있었으니까. 어젯밤 우린
코케인을 너무나 사랑했고 이반이 어젯밤의 일을 나불거리고 싶어 좀 쑤셔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지. 첫날이어서
학생들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지 살쾡이의 기숙사 방문은 없었다. “선생님
제가 가서 이반을 살펴보겠습니다.” 내 본성은
영문도 모를 일을 자처할 때가 있다. 그리고 아 차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선생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돌았다. 아니나 달라 선생은 자신의
두 손을 맞잡고 싹싹 비벼대더니. “너는
뭔가 알고 있지?” 살쾡이의
의문부호가 내 심장의 한복판을 치고 들어왔다. 나는 이 순간을 번개보다 더 빠르게 모면해야 했다. 그럴 리는 없지만 만에 하나 꼬투리가 잡혀 약물검사라도 하자고 덤벼든다면? 아찔한
순간이 되고 말 것이다. 이 순간을 잘 넘기지 못하면 나의 앞날은 가시밭길이 될 게 뻔했다. 이렇게 절실한 순간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두말할 것 없이 아직
내 몸속에서 미처 다 빠져나가지 못한 뒤끝이 살아있는 코케인의 잔재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이지. 그리고
당연히 내 앞날을 위하여, 였다. 나는 이반처럼 어느 것
하나 풍족한 게 없으니까. 하루, 하루 24시간 나를 쓰러뜨리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하는 긴장감. 나는
마약 때문에 내가 노심초사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약은 내게 필요한 것이었고 간수를 잘하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판에 이반이 행여라도 입을 잘못 놀려(이반에게는
횡설수설 대는 코케인의 나쁜 뒤풀이가 따라 다닌다.) 살쾡이에게 덜미라도 잡히는 날이면 골로 갈게 뻔, 하지 않겠는가. 서두르자. 살쾡이의
눈을 피해가도록. 이토록 신속한 판단은 수학의 귀재는 모른다. 거짓말의
귀재가 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 약물중독자들의 필수적인 것이다. “이반이
아침에 배가 아프다고 했었거든요.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화장실로 뛰어가는 걸 제가 보았어요.” 내 거짓말이여
빛을 발하라. 나는 기도했다.
기도의 응답은 내가 어느 하나님에게든 다가갈 수 있는 징검다리를 하나 놓아 주었다. 하나님이여, 항상 내 곁에 머무르소서. “오
분 안에 멀쩡한 이반을 데려오도록.” 명쾌한
살쾡이의 명령이 떨어졌다. 맙소사. 이반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야 했다. 오 분은 눈 한번 감았다 뜨면
사라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나는 물 한 컵을 이반의 얼굴에 끼얹었고 머리를 빗겨주었고 신발을
신겨주었고,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이반 너 두고 보자, 이를
갈았다. 이 멀쩡하고도 파렴치한 악당 때문에 앞으로 삼 년의 세월을 어이 견디어 낼까 걱정이 이만저만
앞서지 않았다. 시작부터 나를 땀 빼게 하니 말이지. 이반은
상황을 금방 눈치채고 천연덕스럽게 위기를 모면했다. “미안
매우 미안 선생님. 복통이 일어나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급작스러운 뉴스를 신속히 전해 드릴 방법이 없었고요.” “좋아
이제는 괜찮나. 가서 네 자리에 앉아라.” 이반은
입가에 실실 미소를 머금고 살쾡이에게 집중했다. 수업시간 내내 한눈팔지 않고 선생만을 바라보았으니까. 선생에게 자신은 나무랄 데 없는 선생의 제자라고 눈도장을 찍는 게 분명했다.
내 주위에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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