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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강: 앙티 로고스의 기호들 :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배움과 기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이하 찾기)의 통일성을 이루는 것은 기억이나 추억이 아니다.
<찾기>에서 본질적인 것은 마들렌 과자나 포석들 안에 있다(19쪽).
기억이 찾기의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수단은 아니다.
또 지나간 시간은 시간의 한 구조로서 작용하지만,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구조는 아니다.
프루스트에게서 마르탱빌르의 종탑이나 뱅퇴이유의 소악절은 어떤 추억도 어떤 과거의 소생도 일어나게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이것들은 언제나 마를렌 과자나 베니스의 포석들보다는 우월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들렌과 포석들은 기억에 의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여전히 <물질적 펼침>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21-2쪽).
이 책은 어떤 배움의 이야기이다.
더 정확히는 한 작가의 배움의 과정의 이야기이다(22쪽).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기호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배워나가는 대상이지 추상적인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배운다는 것은 우선 어떤 물질, 어떤 대상, 어떤 존재를 마치 그것들이 해독하고 해설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23쪽).
메제글리즈쪽과 게르망트쪽은 추억의 원천들이라기보다는 배움의 원료들이자 배움의 선들이다.
그것은 수련의 두 측면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어떤 순간에 어떤 사항에 대해서 모른다.
그는 나중에야 그것에 대해 배우게 되며 또 주인공은 어떤 잘못된 생각, 헛된 기대속에 있지만 마침내
거기에서 벗어나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실망과 깨달음의 운동이 생겨나며 이는 찾기 전체에 리듬을 불어넣어준다.
배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기호들과 관계한다.
프루스트의 작품은 기호들을 배워 나가는 과정 위에 놓여져 있다.
2. <찾기>에서 기호들의 유형
1) 사교계의 기호:
이 기호들 자체는 정말로 동질적이지 않다.
어떤 동일한 순간에도 계급뿐 아니라, 근본적인 정신적 혈족을 따라서 서로 차별화된다.
이내 기호들은 변화하고 응결되거나 다른 기호들과 대체된다.
사교계의 기호는 어떤 행위나 생각을 대체한 것으로 나타나며 다른 어떤 것, 즉 외재적 의미나 관념적
내용을 가리키지 않는다.
사교계의 기호는 행위의 관점과 사유의 관점으로 볼 때 의미가 달라진다.
행위의 관점으로 본다면 사교계는 기만적이고 잔혹한 것이며 사유의 관점으로 본다면 어리석은 것이다
(베르뒤랭 부인의 집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으며 베르뒤랭 부인은 전혀 웃지 않는다.
하지만 코타르는 자신이 뭔가 재미있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기호를 만들어 내고 베르뒤랭 부인이 자신이
웃고 있다는 기호를 만들어 낸다.
또한 코타르가 완벽한 기호를 방출하면 베르뒤랭 부인은 뒤지지 않기 위해 자기 입장을 나타내기에 적당
한 몸짓을 찾는다.
게르망트 부인은 냉혹하며 생각은 빈약하지만 그녀는 항상 매력적인 기호들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그들과 더불어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들에게 기호를
만들어 준다.
사교계의 기호는 어떤 것을 지시하지 않고 그것을 대체하며, 자기가 가진 의미들이 효력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사교계의 기호는 어떤 것을 지시하지 않고 그것을 대체하며, 자기가 가진 의미들이 효력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이러한 기호는 사유로써 행위를 앞지르며 행위로 사유를 무화시키고, 이런것이면 충분하다고 공언하게
되는데 이 기호의 상투적인 면모와 공허함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상투적이고 공허하다해서 이 기호들이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배움의 과정이 이 기호들을 거치지 않는다면 배움은 불완전할것이고 심지어 불가능하기조차 할 것이다.
또한 기호들은 텅비어 있지만 이 공허함은 기호들이 의례적인 완벽성을 갖추도록 해준다.
이 의례적 완벽성이란 사교계말고는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형식주의이다.
사교계의 기호들은 신경질적인 흥분을 줄 따름이다.
2) 사랑의 기호:
샤를뤼스와 쥐피앙의 만남은 독자들을 가장 놀라게 하는 기호들의 교환에 이끌어 들인다
(『소돔과 고모라』시작 부분에서 ‘나’는 샤를뤼스와 쥐피앙이 서로가 내뿜는 기호를 통해 서로 동성
연애자임을 알아보고 곧바로 성 행위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개별화시키는 것이다(그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 즉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이 기호들에 민감해지는 것이며 이 기호들로부터 배움을 얻는 것이다.
사랑은 무언의 해석에서 태어나고 자라난다.
사랑받는 존재는 하나의 기호, 하나의 영혼으로 나타나며 이 존재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가능 세계를
표현한다.
우리는 애인 속에 있는 미지의 세계들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상대가 내뿜는 기호들을 해석해 낼 재간이
없다.
이런 세계에서는 우리는 우선 그저 다른 것들 사이에 섞여 있는 한 대상일 뿐이다.
애인은 우리에게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기호들을 보내 준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호들은 우리가 참여할 수 없는 세계들을 표현하는 기호들이기도 하다.
사랑의 법칙은 주관적이며 주관적 질투는 사랑보다 더 깊고 또 사랑의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즉 질투는 기호를 파악하고 해석할 때 사랑보다도 더 멀리 나아간다는 것이다.
질투는 사랑의 목적지이며 사랑의 최종 도달점이다.
애인의 거짓말은 사랑의 상형 문자이다.
사랑의 기호를 해석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거짓말의 해석자이다.
객관적으로 양성간의 사랑은 동성간의 사랑보다 덜 근본적이다.
남녀 두 성은 동성애 속에서 그들의 진실을 찾아낸다.
양성 간의 사랑이란 그저 두 성이 제각기 가지고 있는 각각의 목적을 은폐하기 위한 허울일 뿐이다.
전적으로 사랑의 세계는 거짓말을 드러내는 기호들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감추어진 기호들로 나아간다.
3) 인상 혹은 감각적 성질의 기호:
어떤 감각적 성질은 우리에게 야릇한 기쁨을 주는 동시에 일종의 명령을 전해 준다.
인상 혹은 감각은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펼쳐져서 형태가 드러난다(마들렌, 종탑, 나무들, 포석,
풀 먹인 냅킨의 빳빳함, 숟가락 소리, 물소리).
이러한 기호를 찾기 위한 사유 작업이 지나가면 숨겨진 대상에서 기호의 의미가 나타난다(마들렌이
콩브레를, 종탑들이 소녀들을 포석들이 베니스를 건네주는 식으로).
해석의 노력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의아하지만 프루스트가 새로운 해석의 단계, 궁극적 단계를 겨냥하고
있음을 짐작해야 한다.
프루스트의 소설 기술의 가장 놀라운 특징은 몇 개의 거대한 장면들에 부여하는 중요성이다.
이 거대 장면들은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동력의 시작점으로 장면묘사인 동시에 미묘한 극적사건(그러나
무수한 디테일들에 의하여 은폐되곤 하는)이 전개되는 공간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방대한 페이지들(이 속에서 정말 시간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은 어머니
와의 저녁 입맞춤, 질베르트와의 조우, 노르푸아와의 만찬 혹은 베르고트와의 식사 같은 주요장면 외에,
6개의 거대한 사교계 장면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 각 장면은 화자의 삶에 있어서 불과 몇 시간동안에 해당하지만 장면마다 무려 150여 페이지에 달하는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 장면들이란 바로『게르망트 쪽』에서 (1) 빌파리지 부인의 마티네, (2) 게르망트 공작부인댁의 만찬,
『소돔과 고모라』에서 (3)게르망트 대공 부인집의 만찬, 『갇힌 여인』에서 (5)파리의 베르뒤렝 부인
집의 야회, 그리고 끝으로『되찾은 시간』의 (6)게르망트 대공 댁의 마티네를 말한다.
4) 예술의 기호들:
왜 예술의 기호는 다른 기호들보다 우월하다.
그것은 다른 기호들은 모두 물질적이기 때문이다(69쪽).
예술의 기호들만이 비물질적이다.
확실히 뱅퇴이유의 소악절은 물질적인 피아노와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온다.
악절은 아마도 물질적으로 분석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비슷한 다섯 음 가운데 두 개가 다시 반복된다는 식 말이다(69쪽).
그러나 사정은 플라톤에서와 마친가지이다. 플
라톤에서 3+2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음조는 완전히 정신적인 하나의 실재물을 덮고 있는 <음향
이라는 외관>이다.
반면 피아노는 이와는 본성상 완전히 다른 건반으로 이루어진 공간적 이미지로서 공간 속에서 위치할
뿐이다.
“연주하는 사람들이 소악절을 연주하고 있다기보다 오히려 소악절의 강요에 의해서 소악절의 모습을
나타내는 데 필요한 의식을 거행하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스완>, 347쪽).
이런 점에서 볼 때 소악절의 인상 자체가 비물질적이다.
마들렌은 우리를 콩브레로 보내고, 포석은 우리를 베니스로 보낸다.
확실히 현재와 과거의 두 인상은 완전히 동일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역시 그것들은 물질적으로 두 가지 인상이다.
그 결과 기호의 펼침은 기억이 개입할 때마다 다시금 물질적인 어떤 것을 포함하게 된다.
프루스트는 그를 짓누르는 필연성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한다.
이는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을 연상시키거나 다른 것을 상상하도록 만드는 데 있어서의 필연성이다.
그러나 어떤 것에서 그와 유사한 것으로 이어지는 이런 진행이 예술에서 얼마나 중요하든지 간에 이것이
예술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다.
우리가 한 기호의 의미를 어떤 다른 사물에서 찾는 한, 물질이 여전히 조금은 남아서 정신에 거역한다.
반대로 예술은 우리에게 참된 통일성을 가능케 해준다.
하나의 비물질적인 기호와 하나의 완전히 정신적인 의미와의 통일 말이다.
본질이 예술 작품 안에 드러나는 한, 본질이란 정확하게 이와 같은 기호와 의미의 합일을 일컫는다.
본질들 혹은 이데아들 --소악절의 기호들 각각이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것들이다(<스완>, 329).
이 본질들 혹은 이데아들이 소악절에 실재적인 현존을 부여해 준다.
이는 소악절을 작곡한다기보다는 재생하거나 구현하고 있는 악기나 소리와는 상관없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기호들은 아직은 물질적인 기호들이다.
그 기호들의 의미는 늘 다른 물질적인 사물 속에 감싸여 있으며 완벽하게 정신적인 것은 아니다.
바로 여기에 삶에 대한 예술의 우월성이 있는 것이다. (71쪽).
예술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그 본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차이,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차이이다.
존재를 구성하고 우리가 그 존재에 대해 사유하고 이혜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차이이다.
이런 이유로 본질을 드러내 주는 예술만이 우리가 헛되이 삶 속에서 찾으려했던 것, 즉 <삶에서 여행에서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한 다양성>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절대적인 궁극적인 차이란 무엇인가?
언제든 외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두 사물 혹은 두 대상 사이의 경험적 차이는 아니다.
본질이란 주체의 중심에 있는 어떤 최종적인 성질의 현존으로서 주체 속에 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프루
스트는 말했다.
이는 본질에 대한 가장 근접한 해명이다.
여기서 본질은 내재적 차이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 속에 들어있는 칠적인 차이, 예술이 없었더
라면 영원히 각자의 비밀로 남게 되었을 차이>이다(72쪽).
예술은 질료의 진정한 변환이다.
본질, 다시 말해, 근원적인 세계의 성질을 굴절시키기 위해, 예술 속에서 질료는 정신화되고 물리적 환경
들은 비물질화된다.
그리고 물질을 이렇게 다루는 일은 오로지 문젤르 통해 이루어진다(80쪽).
그러므로 예술은 절대적인 특권을 지닌다.
이 특권은 몇가지 방식으로 표현된다.
1) 예술의 질료들은 정신화되고 환경들은 비물질화된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은 기호들의 세계이지만, 이 기호들은 비물질적이어서 적어도 예술가의 눈과 귀에는
물투명한 점이라곤 전혀없다.
2) 이 기호들의 의미는 하나의 본질, 이 기호들의 모든 능력 속에서 확립되는 본질,
3) 기호와 의미, 본질과 변화한 물질은 완벽한 합치 속에서 뒤섞이고 통일된다.
기호는 문체같고, 의미는 본질적인 것인데 이들 양자는 동일하다.
이런 것이 예술작품의 특성이다(84쪽).
3. 앙띠 로고스
보편적 로고스는 친구들 사이의 대화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는 전체화의 취향, 철학자들의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진리, 학자들의 사유 방식, 문인들의 신중하게 짜여진 예술 작품,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상의 규약적인 상징 등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것이다.
로고스는 한 가지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 면모가 제아무리 감춰져있다고 해도, 바로 그 면모 때문에 지성은 항상 <앞서>온다. 그 면모란 바로 변증법의 요술이다.
『찾기』는 일련의 대립들 위에 축조되어 있다.
그 대립들은 관찰과 감성, 철학과 사유, 반영과 번역이다. 프루스트는 우리의 모든 능력들의 조화로운 사용인 논리적 용법 혹은 결합적 용법에다 비논리적 용법 혹은 분할적 용법을 대립시킨다.
결합적 + 논리적 용법에서는 지성이 우리가 가진 다른 능력들보다 앞서 오면서 이 능력들 모두를 조화롭게
<전체 정신>이라는 헛초점fiction에 수렴시킨다.
반면 결합적 + 분할적 용법에서는 우리 능력들 전체를 동시에 [조화롭게] 사용할 수 없다.
또한 이 용법에서 지성은 늘 뒤쳐져서 온다(사랑은 우정에, 무언의 해석은 대화에, 저주받은 유태인적 동성
애는 그리스적 동성애에, 이름들은 단어들에 대립된다).
함축적 기호와 감싸여진 의미는 분명한 의미에 대립된다.
함축 된 것이나 복합된 것 속에서 우리에게 진리를 찾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진리의 존재이다.
각자 자기 영역에서 로고스에 집착하는『찾기』의 세 사람의 조연급 인물들로는 우정에 불타는 지식인
생루, 언제나 외교계의 규약적인 의미들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노르프, 권위있는 과학적 담론이라는
차가운 가면으로 자신의 소심함을 감추는 코타르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 로고스의 파산을 드러내 보인다(이들이 침묵적이며 파편적이고 깊이
숨어있는 기호들과의 친교를 통해서만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전쟁의 로고스, 정치의 로고스, 외과 의학의 로고스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전체로 통합될 수 없는 분야들과 파편들 속에 감싸인 암호 체계가 있을 뿐이다
(코타르의 불확실한 증후들을 해석하는 천재적 능력// 노르프는 분명한 의미들을 사용하지만 이 분명한
의미들 밑에서 실상 그는 단지 기호들만을 복원시키고 또 동원한다(p.160 각주 10번 참고)// 생루는 전쟁
의 기술이 기호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에 달려 있다고 설명한다.
이질적인 요소들 혹은 적군을 속이는 임무를 띤 거짓 기호들이 감싸고 있는 언제나 파편적인 기호들,
애매한 기호들을 꿰뚫어보는 능력 말이다).
여기저기서 프루스트는 기호들과 징후들의 세계 - 속성들의 세계, 파토스의 세계 - 로고스의 세계, 상형
문자와 표의 문자의 세계 - 분석적 표현의 세계, 표음 문자 - 이성적 사유의 세계를 대립시킨다.
끊임없이 거부되는 것은 그리스에서 물려받은 거대한 테마들이다(친구[우정] philos, 지식sophia, 대화
dialogue, 로고스 logos, 표음(表音, phoné) 등). 기호들의 세계는 다섯 개의 관점을 통해 동시적으로
로고스에 대립된다.
(1) 세계 안에서 기호들의 분할하는 부분들의 형태
(2) 기호들의 드러내는 법의 본성
(3) 기호들의 자극하는 능력들의 용법
(4) 기호들에서 생기는 통일성의 유형
(5) 기호들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언어의 구조.
프루스트에게 플라톤적인 면모는 있지만 하나의 명백한 차이가 있다.
플라톤식의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감각적 관계들 혹은 감각적 성질들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찾기』에서의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감각적 성질들의 생성, 성질들 상호간의 뒤섞임,
<성질들간의 대립의 가변성> 등은 <영혼의 상태> 안에 새겨지는 것이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본질은 일종의 상위의 <관점>이다.
이 관점은 세계의 탄생과 한 세계의 고유한 특성을 동시에 일컫는, 환원 불가능한 관점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본질이 영혼의 상태를 넘어서듯 관점이 개인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관점은 개인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개별화의 원리이다.
바로 이 점이 프루스트적인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의 독창성이다.
이는 더 이상 플라톤의 방식처럼 세계의 상태에서 출발해서, 인식하게 된 객관성들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객관성에 관한 모든 문제도 문학 특유의 어떤 방법에 따라서 그 위상이 바뀐다.
질서를 주는 것이라고 여겨졌던 본질들이나 이데아들에서뿐만 아니라, 질서를 재생산하는 것으로 여겨
졌던 세계의 상태들 속에서도 질서는 무너졌다.
세계는 부스러기와 혼돈이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이 주관적 연상에서 원초적인 관점
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객관성은 이제 예술 작품속 에서만 가능하게 되었다.
오로지 작품의 기표적인 형식적 구조 속에서만, 다시 말해 문체 속에만 있다. 창조하는 것은 회상하는 것
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회상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옳다.
우선적으로 사유 속에서 사유 활동을 창조하는 것이다.
사유하는 것, 그것은 사유거리를 주는 것이다.
회상해 내는 것, 그것은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추억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너무 물질적인 추억의 정신적 등가물을 창조하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나타는 기억>을 현실적으로 실현된 창조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문체이다.
부분들 각각이 전체를 미리 결정하고, 전체가 부분들을 결정하는 유기적인 총체로서의 예술 작품 — 이런
진부한 예술론(예술 작품에 대한 변증법적 개념)을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발견하려고 애써 봐야 헛수고다.
전체와의 <융합>없이 효과를 발휘한다. 단편들 각각은 서로 다른 조화에 의존하거나 아무런 조화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혹은 문체라는 조화 이외에는 다른 어떤 조화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이 단편들 모두들 서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게 하고, 최종적인 조각들을 그러모으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
우회가 필요하다.
그래서 작품은 앙띠 로고스적인 문체의 굴곡들과 고리들 속에서 그렇게나 많은 우회를 거듭하는 것이다.
4. 찾기의 층위들
조각 난 우주에서는 조각들 모두를 한데 뭉치는 로고스는 없다(앙띠 로고스).
그러므로 조각들을 하나의 전체에 합체하는 법도 없으며, 되찾거나 만들어 내야 할 전체도 없다.
그러나 법이 하나 있기는 하다(법의 본성, 기능, 법이 여타의 다른 것과 맺고있는 관계는 변했다).
그리스 세계에서는 로고스가 일차적, 법은 이차적인 힘이다.
법 혹은 법들은 부분들을 지배하고 부분들을 서로 맞추고 서로 근접시켜, 부분들로 상대적인 <최선 mieux
relatif>을 이룰 뿐이다.
선이 취하는 양상들을 규정해 주는 한에서만 법은 가치를 지닌다.
현대의 앙띠 로고스적 정신은 법을 제일로 내세우는 급진적 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이제 파편들은 전체화될 수도 없고 전체화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이루어야 할 전체가 사라진 파편들의 세계를 지배하는 법이 제일의 힘으로 부상한다.
법은 더 이상 선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히려 법이 말하는 것이 선이 되었다.
그 바람에 법은 무시무시한 통일성을 얻는다.
법의 이 무시무시한 통일성은 진정 텅 비어 있으며 오로지 형식일 뿐이다.
우리는 형벌을 받기 전에는 법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죄를 지어야만 우리는 법에 복종할 수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유죄를 통해서만 법의 요구에 응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은 오로지 분할되어 있는 부분들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법은 이 부분들을 더욱 분할하며 신체들을 해체해 그 팔 다리를 떼어내기 때문이다.
요컨대 법은 인식할 수 없는 것인데, 형벌을 받는 우리의 신체에 가장 무자비한 처벌을 집행함으로서만
인식된다.
프루스트의 이론은 여러 개의 층위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단히 복잡하다.
<첫번째 층위>에서는 전체 이성간의 사랑이 대조되고 반복된다.
<두 번째 층위>에서는 이 전체 그 자체가 두 개의 계열, 즉 소돔과 고모라의 계열로 갈라진다.
소돔의 계열은 아직은 더 은닉되어 있는, 사랑하는 남자의 비밀을 지니고 있다.
이 두 번째 층위의 지배자는 죄와 유죄성의 이념이다.
그러나 이 두 번째 층위가 가장 심층적인 층위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두 번째 층위는 그 자체가 통계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죄성은 사회적인 것으로서 체험된다. <세 번째 층위>는 성의 횡단(혹은 성전환) transse
xual이다.
이 세 번째 층위는 전체만큼이나 개인도 넘어선다.
성의 횡단이란, 개인 속에서 두 가지 성이라는 두 파편의 공존, 서로 소통하지 못하는 <부분적 대상들>의
공존을 가리키는 말이다.
질투는 기호들에 대한 독특한 망상이다. 프루스트에게서 질투와 동성애 사이의 근본적인 연관성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오로지 여자의 관점, 방식을 규정하는 여자의 관점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이 세계들 속에 <놓여>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시에 이 세계들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관찰된 사물로서만, 그것도 상위의 관점으로부터 배제된 채 주목받지
못하고 어쩌다가 겨우 눈에 띄는 사물로서만 이 세계들 속에 속하기 때문이다.
5. 세 가지 기계
어떤 것을 <기계>라고 규정할 때 이는 우선 그 어떤 것의 의미가 문제가 아니라 사용이 문제라는 점을
함축한다.
기계의 기계성을 규정하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용법이다.
‘어떻게 그것은 작동하는가?’.
들뢰즈의 앙띠 오이디푸스 자체가 욕망이란 기계의 합법적 사용을 규정하려는 시도, 비합법적 사용을
폭로하려는 시도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p. 226 각주 2번).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자기의 작품을 읽지 말고 그 작품을 이용해서 우리 자신을 읽어보라고 충동한다.
그가 이런 충고를 하는 것은 『찾기』속에 소나타나 칠중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찾기』자체가 바로
소나타나 칠중주이며 희극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찾기』]가 기계인가?
그것은 기계로서 이해된 예술작품은 본질적으로 생산자, 어떤 진리들의 생산자이기 때문이다.
프루스트는 로고스적 진리, 지성을 앞에 내세우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미리 전제한 사유형태를 거부한다.
<순수 지성이 형성한 관념들은 ‘논리적[로고스적]’ 진리, 가능한 진리밖에 가지지 못한다.
이 관념들은 임의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우리 지성에 의해 씌어진 문자가 아니라, 사물의 형상이라는 문자로 씌여진 책이 우리의 유일한 책이다.
우리가 만들어 낸 관념들이 ‘논리적으로[로고스적으로]’ 옳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 관념들이 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되찾은 시간, Ⅲ, 880).
덧붙여, 창조적 상상력이라고 해서 발견하고 관찰하는 지성보다 더 우월한 가치를 지니는 것도 아니다.
『찾기』는 바로 모색 중인 진리의 생산이다.
진리는 아직 없다.
그러나 진리의 영역들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생산의 영역들이다.
또한 진리를 되찾은 시간의 진리와 잃어버린 시간의 진리 두 가지로 구별하는 것은 충분한 구별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대한 궁극적 체계화는 진리의 영역을 세 가지로 구별하기 때문이다.
①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과 본질들로 정의됨.
② 예술 및 예술 작품에 관여하지만 이 자체로 완전하지 않아 사고계의 기호 혹은 사랑의 기호에 의존하는
여러 가지 즐거움과 고통이 들어있다.
③ <보편적인> 변질, 죽음과 죽음의 관념, 대재앙의 생산(노쇠, 병, 죽음의 기호들)을 통해 정의됨.
두 번째 영역의 진리는 다른 영역에서 첫 번째 영역의 진리에 대해 일종의 대리자, <상반된> 증거의 역할을 한다.
이런 방식으로 두 번째 영역의 진리가 첫 번째 진리를 보좌하거나 <메워주는 것>이다.
세 번째 진리들은 첫 번째 영역의 진리들에 <끼워 넣어지고>, 또 첫 번째 영역의 진리들을 <견고하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첫 번째와 세 번째라는 생산의 이 두 영역 사이에서 <극복되어야> 할 진정한 <반론>을 첫 번째 진리에게 제기한다(이 경우들은 텍스트에서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
첫 번째 종류의 기계는 <부분적 대상들>의 생산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유형의 기계는 공명(共鳴)들 혹은 공명의 효과들을 생산한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비자발적 기억이 일으키는 효과들이다.
공명은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공명이 생산하는 것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본질, 정신적 등가물이다.
왜냐하면 그 이전엔 전혀 본 적이 없고 주관적인 연상의 사슬과도 상관이 없는 것이 바로 [공명을 통해
나타난] 콩브레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영역은 전면적인 변질과 죽음의 영역이다.
6. 문체
생산의 영역, 진실의 영역들, 기계들 가운에 어떤 것도 전체화하는 기능을 떠맡고 있지 않다. 본
질적인 것은『찾기』의 부분들은 조각 난 채이며 파편화되어 있지만 <이 부분들에게 부족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프루스트는 자기 작품을 대성당이나 한 벌의 드레스에 비유하곤 하는데 이는 고귀한 전체성으로서의
로고스를 작품의 준거로 삼으려는 의도가 아니라, 반대로 미완성, 꿰맨 자국, 기워댄 천 조각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문체는 결코 인간에게 속하지 않고 언제나 본질(비문체)에 속한다.
다시 말해 문체는 절대로 하나의 관점에서 생기지 않는다.
문체는 한 동일한 문장 속에서 무한한 계열을 이루며 공존하는 관점들로 만들어지며, 이 관점들을 따라
대상은 해체되거나 서로 공명하고 또 확장된다.
그러므로 통일성을 보장해주는 것은 문체가 아니며, 기실 문체는 자기의 통일성을 다른 곳에서 취해야 한다.
횡단성은 한 풍경에 대해 여러 관점들을 단일화하지 않고도, 횡단성 자신의 고유한 차원에 의거해 그 차원
안에서 관점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
『찾기』의 인물들, 사건들, 부분들이 점유하고 있는 차원들에 덧붙여지는 보충적인 차원은 시간의 차원
으로서, 그 인물들, 사건들, 부분들이 공간 속에서 점유하는 차원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러나 이 시간의 차원은 관점들이 서로 침투하게끔 하고, 이제껏 막혀 있던 관들을 소통하게 한다.
시간은 부분들을 전체화하지 않으면서 이 부분들<의> 전체일 수 있고, 부분들을 단일화하지 않으면서 이
부분들 모두<의> 통일성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 1장 :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기호들의 세계
사교계의 기호들:
사회란 차단된 저마다의 계급으로 구성되어 각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부모가 차지하고 있는 계급에 속하고
예외적인 경력이나 뜻하지 않은 결혼 같은 요행에 부딪치지 않는 한, 그 계급에서 벗어나 상위 계급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부친되는 스완씨는 증권거래소의 직원이었다. 따라서 아들되는 스완은 납세자 일람표 안에서 있어서처럼,
소득에 따라 재산이 여러모로 변동하는 계급에 일평생 속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부친이 어떠한 곳에 출입했는지 알고 있다.
따라서 아들이 어떠한 곳에 출입하는지, 어떠한 사람들과 교제하는 신분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 친지가 있다면, 마땅히 젊은이들과의 교제였고, 그 가정의 옛 친지들, 예를 들어
우리 집 사람들과의 교제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눈감아주었던 것은 양친을 여읜 후에도 계속해서 충실하게
우리 집을 찾아온 그 정의 때문이었다. (중략)
그의 양친과 동등한 지위에 있는 증권거래서 직원의 아들들과 스완 사이에 사회적 계수라는 것을 매겨
본다면, 그 계수가 다른 것보다 좀 낮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매우 담백한 태도를 취하는 스완, 지금은 어느 옛 가옥에 머무르면서 그곳에 그의 수집품을
쌓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스완>,23-5쪽).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야회복차림 그대로 온 것을 사과하면서 스완이 파리에 있는 우리를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스완이 돌아가자 프랑수와즈가 마차몰이꾼으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 스완이 어느 대공부인의
댁에서 저녁식사를 했다고 말하자, “그래, 청등홍가의 대공부인 집에서겠지!”하고 대고모는 어깨를 으쓱
올리며 편물에서 눈도 쳐들지 않고, 노골적인 비꼼을 나타내며 대답하였다(28쪽).
또 할머니의 여동생이 노래를 부르는 저녁이면, 대고모는 스완에게 피아노도 치게 하고 악보도 넘기게
했는데, 다른 곳에서는 그토록 인기 있는 이 인물을 다루기를 싸구려 물건 주물러 대는 조심마저도 없이
수집용 골동품을 갖고 노는 순진한 어린애처럼 함부로 다루었다.
그 당시 많은 클럽의 회원들에게 알려졌던 스완이라는 인물은 대고모가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 스완과는
틀림없이 천지의 차이가 있었으며, 대고모가 생각하는 스완이란 저녁 무렵 콩브레의 작은 뜰 안에 방물이
달랑달랑 두 번 망설이는 듯 계속 울리자, 마중 나간 할머니의 뒤를 따라 어둠을 배경삼아 드러나며,
목소리를 듣고서야 누군지 알게 되는 그러한 인물을 스완네 집안에 대한 기본 개념으로 윤색하고 생기를
부여하는 스완이었다(29쪽).
마치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닽은 시대의 온갖 초상화가 같은 색조로 한 가족인듯 나란히 걸려있는 미술관
과 같기나 한 것 처럼 - 이 최초의 스완은 언제나 한가롭고, 큰 마로니에나 나무딸기 바구니나 사철쑥의
새순 냄새를 풍기는 스완이었다(30쪽),
사랑의 기호:
애인이 미지의 환락을 맛보려 하고 있는, 그 가까이 갈 수 없는 동시에 지옥 속 같은 시간에 뜻하지 않은
틈이 나 그곳으로 우리는 뚫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 가까이 갈 수 없는 시간을 일각일각 구성하고 있던 순간의 하나가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른 순간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이 순간, 애인이 거기에 얽혀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만큼 더
중대한 한순간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 순간을 마음속에 그리며 그것을 자기 것으로 갖는다.
거기에 참여한다.
아니 그 한순간이야말로 우리가 거의 창조한 것이다(47쪽).
감정, 감각의 기호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계단 위쪽으로 나 있는 현관의 창살문을 열었다.
이윽고 나는 어머니가 어머니의 방의 창문을 닫으려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소리 없이 복도로 나갔다. 심장이 너무도 세차게 두근거려 발이 앞으로 잘 나가지를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이미 불안의 고동이 아니고 두려움과 기쁨의 고통이었다.
나는 보았다.
나선계단으로 둘린 빈 곳에 비치는 엄마의 촛불 빛을, 다음에는 어머니 당신을, 나는 달려들었다.
첫 순간 어머니는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다음에 어머니는 성난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렇다 사실 어머니는 더 사소한 일로 며칠 동안 나에게 말을 건네지 않은 적도 있었다(53쪽).
엄마는 그날 밤을 나의 방에서 보냈다.
조금 전과 같은 과실을 범하고서는 집에서 내쫓김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에 양친은 나
에게 주었던 것이다.
착한 행실의 상으로 여태껏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나에 대한 아버지의 행위에는 이러한 은혜를 베풀 때조차도 거기에 뭔가 독단적인 영뚱한 것이 있었는데,
이는 아버지의 행위의 특징으로 보통 예정된 계획에서 나오는 것이라고하기보다 그때 그때의 형편에서
나온다고 하는 편이 타당하였다(56쪽).
지금 동일한 순간의 인력이 그처럼 멀리서 와서 자아의 깊은 밑바닥에 이 옛 순간을 유인하며, 움직이며,
일으키려 하였는데, 이 추억, 이 옛 순간은 과연 나의 맑은 의식의 표면까지 도달할 것인가?
나는 모른다.
이제 나는 아무 것도 안 느낀다.
추억이 멈추고 다시 가라 앉았나보다.
그것이 다시 한 번 어둠 속에서 다시 올라오리라는 것을 누가 알랴?
열 번이나 나는 다시 시작해 가라앉는 추억 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한다.
그때마다 온갖 어려운 소임, 중대한 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돌리게 하는 나태가 머리를 처들고 그런
따위는 그만두고 단지 수고 없이 되새기는 오늘의 권태나 내일의 욕망을 생각하면서 차라도 마시라고
권유한다.
그러자,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이 맛, 그것은 콩브레 시절의 주일날 아침(그날은 언제나 마사 시간 전에는 외출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레오니 고모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 고모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 꽃을 달인 물에 담근 후 내게 주던 그 마들렌의 작은 조각의 맛이었다.
여태까지 프티트 마들렌을 보고도 실제로 맛보았을 때까지는 아무 것도 회상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는 아마 그 후 과자 가게의 선반에서 몇 번이고 보고도 먹어 보지 않고 지내왔기 때문에, 드디어 그
심상이 콩브레 시절의 나날과 떨어져, 보다 가까운 다른 나날과 이어져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물의 형태 또한 --근엄하고도 숫저운 스커트 주름에 싸여 그토록 풍만하고 육감적인 과자의 작은 조가
비 같은 모양도-- 없어지거나 잠들어 버리게 하여 의식에 또다시 결부될 만한 팽창력을 잃고 만 것이다.
그러나 옛 과거에서 인간의 사망 후 사물의 파멸 후,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에도 홀로 냄새와 맛만은
보다 연약하게, 그만큼 보다 뿌리 깊게, 무형으로 집요하게, 충실하게, 오래 동안 변함없이 넋처럼 남아
있어, 추억의 거대한 건축을, 다른 온갖 것의 폐허 위에 환기하며, 기대하며, 희망하며, 거의 촉지 되지
않는 냄새와 맛의 이슬방울 위에 꿋꿋이 버티는 것이다(69쪽).
예술의 기호
엄마는 나의 침대 곁에 있었다.
가지고 온 것은 <프랑수아 르 상피>그 불그스름한 표지와 뜻 모를 제목은 이 책에 뚜렷한 개성과 신비스
러운 매력을 주고 있는 성싶었다.
나는 아직 본격적인 장편소설을 읽은 일이 없었다.
조르주 드 상드가 장편소설가의 전형이라고 남들이 말하는 걸 듣고는 있었다.
이런 것이 이미 <프랑수아 르 상피> 속에 뭐라고 형용 못할 감미로운 것이 있을 걸로 상상하게 하였다.
호기심 또는 감동을 북돋으려고 하는 서술법, 불안과 애수의 자아내는 어조 따위는 학식 있는 독자라면,
허다한 소설에 흔히 있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인데, --새로 보는 책을 비슷비슷한 것이 많은 한 개의 것
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 이외에 존재 이유를 갖지 않는 유일한 개성으로 생각하는 나에게는 -- 그것이
<프랑수아 르 상피>에 특유한 정수로부터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하나의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