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걷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정호승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에서
소크라테스도 국가를 신성시
했고,
알렉산더 대왕도 국가를
신성시 했다.
나폴레옹도 국가를 신성시
했고,
예수도 국가를 신성시
했다.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민족은 야만의 민족에 지나지 않으며,
국제 사회에서 그 어떠한
발언권도 없는 민족에 지나지 않는다.
가정,
단체,
직장,
종교,
군대,
정부 등은 국가의
하부조직이며,
이 국가의 조직으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의 형벌 중의 최고의 형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할린으로,
멕시코로,
중앙아시아로,
하와이로,
남양군도로 사랑하는
조국을 잃어버리고 떠돌아 다녀야만 했던 조선인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오늘날의 쿠르드족이나
아랍과 아프리카의 난민들이 그것을 말해준다.
공동체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평화가 없는 사람이며,
그 모든 위협 앞에서 그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는 사람을 뜻한다.
사나운 비바람이 몰아치면
먹고 사는 것도 힘들어 지고,
병이 들거나 사지를
절단당했어도 그 어떠한 사람도 도와주지를 않는다.
사나운 맹수와 외부의 적
앞에 노출되었어도 별다른 방법이 없고,
온갖 천재지변을 당했어도
그 어떠한 대책도 없다.
하지만,
그러나 공동체 사회
안에서도 소외되어 있는 인간들이 있으며,
이 소외된 인간들이
외로움이라는 질병을 앓게 된다.
부모형제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날이면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면서도 군중 속의 외로움을 앓게 된다.
아무도 그와 함께 할 수
없고,
아무도 그의
슬픔,
불안,
고통,
고독,
외로움에 동참해줄 수가
없다.
외로움은 현대인의
본질이며,
우울증 이전의
질병이다.
‘나도 내가
아니다’라는 자아 상실이 ‘너도 네가 아니다’라는 인간성의 상실로
이어지고,
마침내,
급기야는 어떤
염세주의자들처럼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게 되고 있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는 외로움의 꽃이며,
그 외로움의 아름다움을
옹호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요정중의 요정인 에코의
사랑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나르시소스,
물에 비친 자기 자신의
얼굴만을 바라보다가 죽어간 나르시소스,
이 나르시소스가 그토록
아름다운 수선화로 피어났던 것이다.
수선화는 나르시소스의
꽃이며,
외로움의
꽃이다.
자기애와 외로움은 무서운
짝패이며,
하나님도,
새들도,
산
그림자도,
종소리도,
그 외로움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이것이 [수선화에게]를 쓴 정호승 시인의
전언이며,
이 세상에 대한 삶의
찬가인 것이다.
시인은 외로움의 꽃을
피우지만,
자본가는 외로움을 가지고
약탈을 한다.
오늘날의 자본가는 이렇게
말한다.
호랑이로부터 겸손을 배우고,
사자로부터 정직을
배우고,
여우로부터 지혜를
배운다.
클레오파트라로부터 정절을
배우고,
악어로부터 돈 버는 법을
배우고,
모기로부터 타인의 피를
빨아먹는 법을 배운다.
외로우니까 지혜를 배우고,
외로우니까 지혜를 가지고
사기를 쳐야 한다.
울지마라.
외로우면 빼앗고 강탈하고 무차별적으로 목을 졸라
죽여라!
하나님도 외로우니까 물과 불로 장난을 치지
않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