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金井山)의 금정산성 안에 자리하고 있는 국청사(國淸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 소속의 사찰
정확하게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금정산은 부산의 시작이며 끝이다. 그리 크지 않은 산세지만 곳곳에 울창한 숲과 골이 이루어져 있고 14개나 되는 약수터에서는 항시 맑은 물이 샘솟아 올라 부산시민들의 모태가 되는 산이기도 하다. 화강암의 풍화가 격렬했던 탓인지 곳곳에 기암절벽이 절묘하고, 크고 작은 금정의 봉우리들이 능선을 따라 연결된 곳에는 넓은 분지를 형성해 자리한 금정산성 마을이 있다.
산성마을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축조된 금정산성안 촌락으로 해발 8백10m의 산 정상에 서서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이 이곳에 왜 국내 최대규모의 산성을 쌓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서쪽으로 낙동강 하류 대저 땅과 북의 양산지계까지 내려다 보이고 동으로 수영강과 회동저수지, 온천천, 동래읍성지역 등이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탓에 왜구의 움직임을 소상히 알 수 있었으니 금정산성과 마을의 역사와 전설은 곧 호국의 이념으로 점철돼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 금정산성 안에 세 개의 신라고찰이 있는데 국청사, 미륵사, 정수암이 그것이며 모두 전통사찰로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또 북문을 벗어나 3km 아래에는 범어사와 원효암을 비롯한 여러 부속암자가 자리하고 있으니 호국명산에 호국도량의 존재는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국청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로 조선 숙종 29년, 금정산성 축조와 함께 중수하여 적을 막고 지키어 나라를 청정히 보호하므로 이름을 국청사(國淸寺)라 칭하고 순조 26년의 중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판에 '숙종 29년(1703년)금정산성 중성을 쌓은 후 적을 막고 지키어 나라를 보호하니 그 이름을 국청사라 칭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국난을 극복하는데 앞장서온 호국도량으로서 그 역사 또한 깊다. 무엇보다 이 사찰에는 당시의 승병장이 사용했던 `금정산성승장인(金井山城僧長印)'이란 철제인이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으로 승군의 사령부가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정발장군과 송상현부사, 윤흥신 장군, 승장 만홍(萬弘)스님, 정안(定安)스님, 성관(性寬)스님, 관찰(寬札)스님 등 등 수백명의 신위가 모셔져 제사를 봉행해 왔다'는 국청사지(國淸寺誌)의 기록에 미루어 의승군이 주둔한 호국도량으로서 그리고 그분들의 천도제가 봉행되어 온 지장도량으로서 그 정통성을 이어온 사찰이라 할 수 있겠다.
국청사지에 의하면 금정산성 성내 사찰인 국청사와 인근의 해월사는 임진왜란 당시 산성을 방어한 호국사찰로서 승병들의 주둔지였다고 한다. 또한 ‘숙종 39년(1713년) 판결사 이정신(전 동래부사)의 건의에 따라 동래 양산 기장의 각 사찰에 승대(僧隊)를 조직하여 유사시 금정산성 방위를 맡게 했으며, 평상시에도 산성안에 있는 국청사 해월사의 승려 1백여명과 범어사 승려 3백명으로 수첩(守堞)하여...’라고 하여 당시의 금정산성 국청사에 대한 호국사찰로서의 위치를 알 수 있다.
1703년 금정산성을 축조한 직후에 중창한 국청사와 해월사는 산성 승군작대(僧軍作隊)의 승영으로 기능하였던 곳이었다. 그렇다고 볼 때 이 곳 국청사는 임진왜란 당시 산성을 지키는 승병장이 거주하여 전략기지의 역할을 한 승군작대의 사령부가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지며 당시 승병장이 사용했던 ‘금정산성승장인(金井山城僧長印)’이라는 철제인이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뜻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리고 국청사와 운명을 함께 했던, 등성이 하나 넘어 자리한 해월사는 주춧돌 흔적만 남겨놓은 채 사라져 버려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金井山'과 '國淸寺'라는 두 개의 편액이 걸려 있는 일주문은 신성한 사찰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있는 문이다. 또한 기둥이 일직선상에 한줄로 되어 있다는 뜻으로 일심(一心)을 상징한다.
일주문을 지나면 연못을 먼저 만나게 된다. 200평 가량 되는 이 연못 가운데는 삼층석탑이 서 있는데 1982년 조성된 호국 지장보살본원 삼층석탑이다. 이 삼층석탑은 하층 기단부에는 용들이 보주를 희롱하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고, 상층 기단에는 12지상을 사방으로 배치하였으며, 탑신부 1층 동서남북 사면에는 관음, 지장, 허공장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이 석탑은 곧 지장본원 삼층석탑을 통하여 구천을 헤매는 영가들을 용에 태워 극락세계로 천도하기 위한 것이다.
연못과 석탑을 조성한 데에는 나름대로의 배경이 있다. 국청사에 전해오는 전설 - 오늘의 산성마을이 폐허로 버려져 있을 때였다. 경남 양산군 철마면(현재 기장군)에 살던 힘이 좋기로 소문난 김 장사가 이곳에 들어와 마을을 일구었다. 그는 한꺼번에 수십명의 장정들을 상대로 힘 겨루기 시합을 벌이기도 했고, 혼자서 팥 한 섬을 김해에서 지고 오기도 했다. 더구나 그는 호랑이가 뒤에서 잡아당겨도 꼼짝달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천하의 김 장사도 처음 국청사 자리에 거주지를 마련했다가 국청사에는 언제부턴가 법당에서 염불을 하면 전쟁 중 죽어간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날짐승 울음소리가 나서 도저히 기도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창봉스님과 주지 혜성스님이 그들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하여 맑은 약수가 샘솟는 연못을 확장하고 한가운데 지장보살본원 삼층석탑을 세우고 자연석으로 연못을 아름답게 조경하였던 것이다. 지장보살본원 삼층탑을 세우고 떠도는 넋들을 극락세계로 천도한 이후부터는 청정한 기도도량이 됐다 전해지고 있다. 석탑을 조성한 이후 신기하게도 그 신음소리와 울음소리가 그쳤고 영령들의 원혼을 달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와 함께 다른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이 연못 남쪽에는 약수 우물이 솟았는데, 위에는 더운 약수가 밑에는 찬 약수가 나왔다는 영험한 우물이라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는 전설이 지금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지장보살본원 삼층석탑을 조성한 경위와 시주자의 명단 등을 기록한 비.
동래부사 정현덕 영세불망비가 지장보상입상 옆에 서 있는데, 이 비석은 본래 국청사의 중건과 선정을 행한 동래부사 정현덕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1872년 국청사에 주석하던 명신(明信), 평윤(平允) 스님에 의해 국청사 입구에 세워졌다. 정현덕은 1867년(고종 4년)에 부임해 6년여 동안 동래읍성 수축과 군사조련 등 유사시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했다. 또한 일본을 견제하며 호국의 얼이 서린 국청사에 토지를 희사하고 사찰을 중건한데는 남다른 호국의지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또한 그는 조선 말기의 문장가, 서예가, 외교가로서도 이름이 높았다. 이치영이 글씨를 쓴 이 영세불망비의 크기는 높이 103cm, 너비 39cm, 두께 14cm이다. 비석 앞면에는‘부사정공현덕영세불망비(府使鄭公顯德永世不忘碑)’라 음각 되어 있고 좌우편에 4언시가 남아 있다. 相鄕趾美(상향지미) 重建佛宇(중건불우) 逢海宣恩(봉해선은) 廣置寺屯(광치사둔) - 동래고을에 아름다운 미풍전통을 이어받아 불교사찰을 중건하고, 동래에 은혜를 베풀어 사찰에 많은 땅을 희사하였다.
대웅전은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1990년에 조성됐다. 대웅이란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하는데서 유래된 부처님의 덕호이며, 大雄殿(대웅전)이란 천지간의 대웅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셔 놓은 집이란 뜻이다.
대웅전 안의 불단에는 조선시대 후기에 봉안한 것으로 전해지는 석가모니 삼존불 좌상과 후불탱을 비롯하여 근래에 들어 조성한 지장탱과 신중탱 등이 있다. 특히 화려한 누각과 지붕 모양으로 만든 보궁형의 닫집이 삼존불 위에 설치되어 부처님을 영성이 충만한 신비스러운 존재로 승화시키며 더욱 엄숙하게 만드는 분위기이다. 보물 제434호인 범어사 대웅전을 그대로 본뜬 것이라 한다
삼성각 정면과 측면 각 1칸, 팔작지붕에 익공계 공포를 하고 있다. 1987년 조성되었으며 법당안에는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이 봉안되어 있다.
금고(金鼓)는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93호 "국청사소장강희5년명금고(國淸寺 所藏 康熙五年銘 金鼓)"이다. 전면에는 당좌부와 함께 간략화 된 연당초문(蓮唐草文)이 양각으로 시문된 문양대가 있다. 금고의 후면 내부 가장자리 양쪽으로 주조처와 조성연대를 새긴 후 그 내부에 시주질(施主秩)과 화주질(化主秩)을 양각으로 압출하였으며, 측면에도 사내질(寺內秩)과 시주질(施主秩)의 명문을 점각하고 있다. 1666년에 조성된 국청사 금고는 1862년에 조성된 부산시 문화재자료 제5호인 동치원년명 범어사 금고보다 규모가 조금 작지만 조선후기 금고로서는 조성시기가 상당히 이른 편에 속한다.
또한 범어사 금고와 부산시 문화재자료 제37호인 선암사 금고가 아무런 조식(彫飾)이 없는데 반해 국청사 금고의 세부 조각의장은 뛰어난 편이다. 따라서 국청사 금고는 조선후기 금고의 선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명문을 통해 제작처, 조성년대, 제작자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부산지역에서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른 금고에 속하는 등 문화재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