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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무 시인 창작담] 시인으로 산다는 것
1. 나는 왜 시인이 되었나
나도 가끔 나에 대해 스스로 궁금할 때가 있다. 그 중 하나, 왜 내가 시인이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대부분 시인 작가들이 거쳐 오게 마련인 문학 청년기를 나는 경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내가 등단 시기를 즈음하여 어떤 뚜렷한 목적이나 목표 의식을 가지고 문학에 전념해 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거짓말처럼 우연하게 문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그 우연은 이제 내게 필연의 운명이 되어버렸으니 우연치고는 너무 고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너무 일방적으로 이렇게만 말한다면 문학(시) 쪽에서 서운해 할 수도 있겠다. 문단 말석에 부끄럽고도 볼품없는 이름 석 자나마 올려놓은 덕에 구차스럽긴 해도 호구를 연명해가고 있으니 어느 모로 보나 나는 문학에 상당한 빚을 져오고 있는 셈이니 말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만 해도, 아니 대학에 입학 후 상당 기간 동안에도 나는 문학에 대해 도통 관심이 없었고 그런 만큼 자연 그에 대한 배경지식도 전무했다. 애오라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허울만 그럴 듯한 가문이 몇 대 째 내리물림하고 있는 가난의 천형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일념뿐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내가 계절 학기 복학을 앞두고 있었을 때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어머니는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평소 내색을 하지 않으셨던 관계로 식구들 중 누구도 그 병세를 눈치 채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구차한 변명일 뿐 사실이 아니다. 제 궁한 처지들에만 골몰하느라 식구들이 알고도 모르는 척 나 몰라라 하는 동안 악화일로 하던 어머니의 지병은, 계속되는 장마에 수위를 넘은 수압이 가까스로 견인하던 저수지의 제방을 일시에 무너뜨리듯 어머니를 쓰러뜨린 것으로 봐야 옳기 때문이다. 절대적 가난이라는 핑계 뒤에 숨어서 어머니의 죽음을 방치한 면이 없지 않은 식구들로서는 평생 면키 어려운 죄의식을 느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나날은 술에 의존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정도이셨다. 그 때 아버지 나이 쉰다섯, 지금의 내 나이였다. 그렁그렁 수심이 가득한 눈에 뒷산 앞산이나 담고 사시는 무능한 아비가 싫어 나는 담 바깥으로만 싸돌아다녔다. 통학이 가능한 거리였지만, 고향인 부여를 떠나 대전에 와서 보냈다. 주말이 되어도 방학이 되어도 가급적 핑계를 대고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 때 내가 주로 어울려 지내던 이들이 대전과 충청남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던, 무크지(비정기 간행물) '삶의 문학' 동인들이었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취향이나 관심 때문에 그들과 친연하게 지냈던 것은 아니었다. 의지할 사람들이 필요했다. 사실 내막은 이러했다. 대학 2학년 재학 중일 때 나는 복학생들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기보다는 그들을 잘 따랐는데 이들 중 일부가 졸업과 동시에 예의 동인지 구성원이 되었고 나는 이들과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나중에( ( 군 제대 후 복학과 함께) 그들 무리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동인들 중에는 이미 '창작과 비평'과 '실천문학' 등을 통해 등단한 이도 있었지만 대개는 등단 전의 홍역을 한참 앓아대던 문학청년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내 선배들이기도 했다. 동인들 중 내 나이가 제일 어렸던 것이다. 나는 아직 학생 신분이었고 그들은 이미 졸업을 마친 사회인이었다. 정세가 급류처럼 요동치던 시절이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세상을 보는 안목과 세계를 읽는 태도 등을 익혔다. 그들은 내 생애 가장 뜨거운 나이의 외우이자, 스승들이었다.
내가 최초로 문자로 남긴 시는, 대학 교지에 실린 <엄니>라는 시다. 어머니를 종산에 묻고 돌아온 그날 흩뿌리던 진눈깨비가 그치고, 희뿌연 달빛이 하얀 문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얼룩덜룩한 벽면에 알 수 없는 상형문자를 그려내던 삼경, 나는 잠든 식구들 몰래 일어나 방구석 저 홀로 외롭게 틀어박힌 앉은뱅이 밥상 위에 놓인 부의록을 끌어다 빈 페이지를 열고 그 위에 시편들 썼다. 시가 그 어떤 귀띔도 없이 불쑥, 내 몸속으로 찾아온 것이다.
지극히 불행한 시대와 불우한 개인의 전기적 생애가 미학의 형식을 불러들인다고 말한 이는 헝가리 태생의 문예사상가 게오르크 루가치였다. 나는 이 진술에 기대어, 궁색하고도 지리멸렬하게 전개시켜온 내 시문학의 기원과 배경과 이력을 감히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80년대 중반 내가 시에 입문하고 시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문학에 대한 각별한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내 개인의 특수한 환경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요컨대 내가 시를 찾아나선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불쑥, 넝마의 생활 속으로 시가 얼굴을 내밀어왔던 것이다. 이 말을 너무 거창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오해가 없기 바란다. 내가 무슨 시대의 운명을 타고난 시인이었다, 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나의 경우 환경과 시의 만남은 어떤 의지의 작용에서가 아니라 우연처럼 도래했다는 것 즉 불행하고 불우한 개인의 특수한 환경이 자연스럽게 시를 불러들였다는 정도로 이해해 주길 바란다.
2. 나는 이렇게 시를 쓴다
오세영 시인은 최근 자신이 펴낸 책 '시 쓰기의 발견'(서정시학 2013년 2월 간행)에서 ‘시 쓰기에 대한 몇 가지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인이 어떻게 해서 한편의 시를 쓰게 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률적인 해답을 내릴 수 없다. 각자의 개성, 지성, 취향, 처해진 상황, 문학적 감성, 시 창작 관습 등이 한데 어우러져 복합적으로 이루어내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무엇이든 구체적 시 쓰기는 나름의 동기 부여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어떤 시인은 갑자기 시를 쓰고 싶어서 시를 쓴다. 어떤 시인은 잡지사의 원고 청탁을 받고 시를 써야겠다는 의무감에서 시를 쓴다. 또 어떤 시인은 아름다운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시를 쓴다. 그러나 그 어떤 것이든 시작 동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는 갑자기 시를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쓰는 경우요, 다른 하나는 의식적으로 시를 써야겠다는 목적에서 시를 쓰는 경우이다.....그러나 그 쓰여진 결과를 놓고 볼 때 어떤 특정한 방식만이 우수한 작품을 빚는다고 말할 수는 물론 없다. 어자피 창작이란 이론만으로 되지는 않는 것이다.”
여기에 더 붙일 말이 달리 없다. 다만 내 경우는 두 경우가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젊어서는 그냥 쓰고 싶은 충동에 휩쓸려 시를 쓰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인지 서랍에는 미리 써놓은 작품들이 발표를 기다리며 늘 대기 중이었다. 물론 발표 지면이 지금보다 훨씬 더 적었던 탓도 있었지만 도대체가 식을 줄을 몰랐던 열정이 가져다 준 결과이기도 했다. 아주 드물기는 했지만 여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시를 쓴 적도 있었다. 또 술을 마시다 우연처럼 시를 건지기도 하였다. 연애의 씁쓸한 뒤끝이 쓰디 쓴 회한의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열정은 소진되고 자연 그에 따라 의무감에 쫓겨 시를 써야 하는 경우가 더 많아지고 있다. 불행하게도 잡지사의 청탁이 있고서야 시를 생각하는 날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현실이 슬프고 안타깝다. 절제를 모르는 열정 때문에 충동에 휩싸여 시를 썼던 시절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한밤중 잠을 청하다가도 갑자기 찾아온 시마 때문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책상에 앉아 꼬박 날밤을 새우던, 아름다운 소모의 시절은 다시 오지 않으리라.
나는 이십대 후반의 잠깐 동안을 빼놓고는 정규직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한때는 출판사에서, 또 한때는 서울 목동과 노량진 일대의 몇몇 유명한 입시 학원에서, 서른 후반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여러 대학을 전전해왔고, 또 전전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내 시편들 중 상당수가 길 위에서 써진 것들이다. 버스와 기차 속에서 전동차 안에서 나는 틈을 내어 책을 읽었고 차창 밖 스쳐 지나는 풍경들을 일별하다 도둑처럼 불쑥 찾아온 시상을 메모해두었다가 집으로 돌아와 갈무리하여 구성하고, 재구성하고 정리하였다.
최근에는 산책길에서 시상을 주로 구하고 있다. 이 버릇은 7년 전 여의도에 살 때 생긴 것인데 아마도 나는 이 버릇을 평생 버리지 못할 것 같다. 현재의 거처인 마포로 이사 오기 전 여의도에서 내리 6년을 살았다. 아시다시피 여의도는 한강을 옆구리에 끼고 형성된 지역이다. 이 지역적 특성이 내게 산책의 일상을 선물로 가져다주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매일 조석으로 시간을 내어 한강 변을 거닐었다. 한강 변을 거니는 이유가 꼭이 건강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무서운 적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걷는 일에 열중하였다. 외로움은 때로 독약과도 같아서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외로움을 잘못 다스리면 사람은 얼마든지 추해지거나 망가질 수 있는 것이다. 내 한때의 위대한 스승이었던 분이, 하찮고 사소한 외로움 때문에 아프게 걸어온 자신의 일관된 평생을 스스로 부정한 일을 목도한 이후 나는 걷는 일에 더욱 의미와 가치를 두게 되었다. 걷다 보면 내 몸 안에 내재한 감정의 불순물들이 시나브로 빠져나가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또 나는 걸으면서 지금까지 깜냥 것 살아온 내 과거와 해후하기도 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점쳐보기도 한다. 걸으면서 길가 수염처럼 돋아난 풀과 도열한 나무들과 서해를 향해 완만하게 걸어가는 강물이며 자주 형상을 바꾸는, 하늘 정원의 구름들을 보고 오가는 행인들의 각기 다른 몸짓들과 표정들을 읽기도 한다. 이렇게 걷다보면 불쑥 충동처럼 혹은 신의 선물처럼 몸 안에 내재한 시 이전의 어떤 감정 덩어리가 몸 밖으로 갑작스레 튀어나올 때가 있다. 나의 외면으로 행여나 그가 토라져 달아날까봐 어르고 달래며 조심조심 신주 다루듯 모시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속에 간직해놓는다. 청탁이 오면 나는 예의 모셔온 그들을 끄집어내어 조탁을 가한 후 시의 옷을 입힌다. 이렇게 태어난 것들이 근래의 내 시편들이다.
3. 나의 삶 나의 시(시인으로서 꿈꾸는 세상)
나는 80년대에 문학을 시작한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한 시대 패러다임의 자장 속에 산다. 나 또한 예외일 수 없다. 80년대의 패러다임이 오랫동안 나를 관장해왔다. 물론 지금은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그 시대의 패러다임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걸어왔지만 속내는 여전히 그 시대의 기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80년대는 거대 담론의 시대였다. 문학예술의 저울추가 한 쪽으로 불균형하게 기운 시대였다. 그 시절에는 굵직굵직한 주제와 소재들을 즐겨 다루었다. 예컨대 ‘계급’ 이니 ‘민족’이니 ‘민중’이니 ‘통일’이니 하는 따위가 문학의 주요 담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90년대 초 사회주의가 연쇄적으로 붕괴됨에 따라 거대 담론에 대한 회의가 대두하게 되었고 이를 초월 극복하고자 하는 여러 미시 담론들이 각축하듯 무성하게 전개되었다. 예컨대 서양의 근대 계몽 이성 담론이 해체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담론인 포스트모더니즘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른바 모더니즘을 초월 내지 극복하고자 나타난 페미니즘, 생태주의, 탈 역사주의, 에코 페미니즘 등이 바로 그것이다.
시문학도 이런 흐름과 변화에서 비켜갈 수 없었다. 지난 연대에 주를 이루었던 노동시, 통일시, 농민시, 전위 실험시 대신에 도시시, 생태시, 여성시, 일상시, 정신시, 선시 등속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80년대의 적자로서 나도 한때 주제넘게 거창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시가 사회 변혁을 주도할 수 있다는 맹신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러한 이념의 추종자로서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방면에서의 구조적 모순에 처한 현실에 메스를 가하여만 하며, 한 시대 구성원으로서 시인은 마땅히 현실 변혁에 적극적으로 투신해야 한다는, 틀에 박힌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암울했던 당대의 현실이 감수성 예민한 시인 작가들에게 그러한 당위로서의 의무감을 압박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그가 최소한의 시민의식과 윤리의식을 지닌 이라면 광기와 야만으로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지난 연대를 어떻게 과연 수수방관하며 보낼 수 있었겠는가. 문학인이 사회 변혁에 앞장 서는 일은 당시의 정황으로서는 어쩌면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수준과 범위 안에서 그 일에 찬동하고 참여하였다. 하지만 세월은 우리의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문학이 사회 변혁의 무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나는 지난 연대처럼 문학이 사회적 변혁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어리석은 맹목의 계몽주의자도 아니다. 하지만 문학이 자신들만의 자폐의 성 안에 갇혀 자신들만을 위한 축제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시대는 너무 많은 분열로 넘쳐 나고 있다. 남과 북의 오랜 반목과 대립에서 연유된 갈등과 분열의 양상은 이후 남남 갈등으로 번져, 갈수록 그것을 심화시키고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갈등과 분열이 사회 구성원에게 내면화되어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지역 간의 갈등, 자본과 노동 간의 갈등, 이념 간의 갈등, 남녀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 거기에 최근에는 새롭게 생긴 강남과 강북 간의 갈등까지 더해져 난마처럼 얽혀 어지러운 형세를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편 가르기가 만연해 있는 오늘의 현실을 문학인이라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갈등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갈등은 때로 새로운 에너지를 창출하고 삶과 생에 동력을 실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은 시인의 지적처럼 우리의 경우 갈등에 굳은살이 생겼다는 점이 문제다. 활력이 아닌 갈등의 경화는 결코 사회적 생산을 이룰 수가 없다.
시인으로서 시인에게 주문하고 싶은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갈등과 분열로 갈가리 찢겨진 불모의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그것에 주의하고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러한 관심과 표명이 불화와 불신과 불통을 해결하는 첫걸음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이, 시가 여전히 그런 역할에 일정 부분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전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시인으로서 내가 꿈꾸는 세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들 삶에 최소한의 안전망이 구축된 세상, 사회적 약자가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자유롭게 발언하고 호소할 수 있는 세상, 서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극단의 대결의식에서 벗어나 평화 속에서 민족이 공존하고 공생할 수 있는 길을 도모하는 국가적 분위기, 계층과 지역과 세대와 남녀 간의 불통이 해소된 세상, 이념의 차이로 편 가르기를 하지 않는 세상, 차별이 없는 세상, 실패한 가장과 청소년을 자살로 내몰지 않는 세상,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없는 세상, 일등만 기억하지 않는 세상, 사교육비 부담으로 결혼을 기피하지 않는 세상, 어느 정치인이 내세운 슬로건처럼 ‘저녁이 있는 삶’, 취직 퇴직 걱정이 없는 세상......희망 사항을 열거하지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시가 무엇이건대 이상 열거한, 이 엄청난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감당하자는 게 아니다. 하지만 시가, 시인이 이러한 일들에 작으나마 관심을 표명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김수영은 그의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모기만한 목소리가 38선을 뚫는다.”라고 말했다. 좌절하기에 앞서 모기만한 목소리가 모이고 모여 태산을 이룬다면 38선을 뚫는 일이 가능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지 않은가. 김수영 시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아도 그의 시와 산문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드문 것 같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나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지진아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계몽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4. 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지금의 생각(시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개인적 의미)
누구나 자신의 걸어온 생을 되돌아보면 감회가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올해로 내 나이 쉰여섯이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나이다 보니 살아갈 앞날보다는 지나온 날들을 더 자주 돌아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회한 서린 추억들이 맨얼굴을 내밀어 온다. 그 중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내 생을 다녀간 그 많은 인연들을 잘 갈무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늘의 나는 저절로 생겨난 것도 아니고 혼자 만들어 온 것도 아니다. 나를 다녀간 그들이 아니었던들 오늘의 내가 과연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이른바 한때 주소가 길었던 상경 파였다. 예전에는 주소가 길면 대개가 가난했다. 자기 집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남의 집에 얹혀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마포로 이사 온 지 일 년이 좀 지났는데 다시 거처를 옮겨야 한다. 서울에 살림을 부리고 난 뒤 이번까지 합해서 도합 열두 번 째 이사다. 하지만 이번엔 남의 집이 아니다. 정규직인 아내가 빚을 얻어 덜컥 일을 저질렀다. 서울로 올라온 지 삼십 년 만에 비로소 내 집이 생긴 것이다. 참으로 긴 시간 먼 길을 걸어온 셈이다. 이 길을 나는 시와 함께 걸어왔다. 만약 시가 없었더라면 나는 도중에 주저앉았을는지 모른다. 매번 시는, 내가 지친 기색일 때 가장 먼저 달려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지금 나는 시인으로서의 내 삶이 그리 싫지 않다. 알량하나마 문단의 말석에 이름 석 자를 올린 덕에 호구를 마련해나갈 수 있게 해준 것이 시였기 때문이다. 또 시가 지리멸렬한 내 생애에 있어 일시적이긴 하지만 구원을 가져다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내 시가 내 손을 떠나 거리에 나갔을 때 누군가의 눈에 밟혀 그에게 작으나마 위안을 주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는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듣고 행복과 자부를 느끼기도 했다.
神은 과거나 미래에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거처는 현재의, 일상 속에 있다. 또, 신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고 우리 몸속에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하루, 하루의 삶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생활은 촛불이다. 언제든 꺼질 수 있는 것이다. 촛불이 타오른다. 촛불은 타오르는 동안만 촛불이다.
무언가에 쫓겨 늘 바지런히 앞만 보고 걷다가 무심코 뒤돌아보면 거기 詩가 땀에 젖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날들이 많았다. 그런 시가 안쓰러워 떨쳐내지 못하고 조강지처인 양 여직 품어 다니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그새 주름이 자글자글 그녀(詩)도 나처럼 늙어가고 있다. 이제 걸음의 속도를 늦춰 늘 숨차 하는 그녀와 나란히 보폭을 함께 하리라.지상의 낙지 족들인 담쟁이들은 등로에 충실할 뿐 등정을 고집하지 않는다. 매순간 오르는 일이 아프고 아름다운 결실이므로 그들은 꿈의 실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아간다. 시지푸스의 후예들인 그들을 닮고 싶다. 나날이 결실인 삶을 살아가련다. 오늘 하루 열심히 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제물로 바치지 않으리라. 살며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