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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3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미카 7,14-15.18-20
복 음 :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하느님의 기쁨
-하느님을 닮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순복음교회라는 교회도 있듯이 오늘 복음이야말로 복음 중의 복음, 순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지만 이보다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라 함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지 너무나 잘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순복음 이야기의 중심은 자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라는 것이며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으라는 것입니다.
하여 강론 제목도 ‘하느님의 기쁨-하느님을 닮아 하느님 자녀답게 살자’-로 정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양면을 지닌 죄인들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례 받은 우리를 일컬어 ‘하느님의 자녀’라 부릅니다.
매일 평생, 하루에도 수없이 마음을 다해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에 이어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입니다.
또 같은 루가복음에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이 물음이라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답입니다.
필생의 평생과제가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비의 여정’인지요.
이보다 더 중요한 과제는 없을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들입니다. 세상에 죄인인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하느님 관심의 초점은 ‘무죄한 의인’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은 그대로 죄인인 우리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양면성입니다.
외관상 작은 아들이 큰 죄인 같지만 깊이 속을 들여다보며 큰 아들 역시 큰 죄인입니다.
자바하신 하느님 아버지는 절대로 발본색원 죄를 추궁하지 않습니다.
무능하다 싶을 정도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자비는 자유입니다. 인격은 자유입니다.
강요하거나 강제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고 배려하시는
인격적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십니다.
참으로 너그러우시고 자비하시며, 무한히 참고 기다리시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작은 아들의 청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무책임할 정도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작은 아들이 타락한 중에도 회개의 촉발점이 된 것은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의 추억이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떠난 인간의 자유가, 방종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환상의 비극인지
처절히 깨달아 제정신이 든 작은 아들입니다.
완전히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존엄한 품위를 상실한 작은 아들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출구’는 열려있습니다.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돌아가는 회개입니다.
마침내 절망의 나락에서 구원의 빛처럼 작은 아들의 칠흑 같은 어둠의 내면을 밝힌
자비하신 아버지의 추억이었고 이어지는 회개입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 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감동적인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자기를 발견했을 때 참된 겸손입니다.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회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시오.
과거 아버지로부터 받은 따뜻한 사랑의 추억이 있었기에 이런 작은 아들의 회개입니다.
정말 누군가로부터 진정 사랑받은 추억이 있으면 결코 자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추억으로 회개하여 일어나 살아갈 것입니다.
작은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환대의 사랑이 감동적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 이러합니다.
오매불망 작은 아들의 귀환을 기다렸던 아버지임이 분명합니다.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는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울었다는 묘사는 없지만 대성통곡 기쁨의 울음을 울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아버지는 죄를 뉘우쳐 회개하는 작은 아들에게 일체의 추궁이나 꾸짖음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며 잔치를 명하십니다.
회개한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환대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기쁨입니다.
잃었던 아들을 찾음으로 하느님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바 오직 회개 하나뿐입니다.
회개하여 빈 손, 맨 몸으로 와도 그 자체가 하느님께는 최고의 기쁨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도 부족할 것이 없는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회개한 죄인 빼놓고는 하느님께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작은 아들 같은 죄인인 사람들에게 참 좋은 회개의 표징이 되는 말씀입니다.
거지같은 삶에서 회개를 통해 아버지를 만남으로 왕자 같은 존엄한 품위를 회복한 작은 아들입니다.
이런 분위기로 미사잔치에 참여하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지요.
끊임없이 회개한 죄인들을 위해 축제의 미사잔치를 마련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입니다.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작은 아들들입니다.
하느님 자녀로서의 존엄한 품위를 상실하고 왕자가 아닌 거지처럼 살아가는
죄인인 작은 아들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아버지의 집인 천국을 바로 옆에 놔두고 지옥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인 작은 아들들 말입니다.
큰 아들 역시 죄인이요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거리상으로 가장 아버지와 멀리 떨어져 있던 작은 아들이 내적으로는 가장 가까이 있었던 반면,
거리상으로 가장 아버지와 가까이 있었던 큰 아들은 내적으로는 가장 멀리 있었음이 참 역설적입니다.
아버지의 자녀로서 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종처럼 살았던 참 자존감 약한 큰 아들이었습니다.
작은 아들을 환대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크게 삐진
큰 아들의 옹졸하고 편협한 적나라한 내면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큰 아들의 항의와 더불어 격렬한 추궁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이 또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생각 없이, 종처럼, 완벽주의자로 살아온 큰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자비를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함께 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에서 멀리 있었습니다.
아우를 ‘저 아들’이라 부르며 거리를 둡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는 이토록 큽니다.
아버지의 자녀로서 아버지의 자비를 닮아야 할 우리의 평생과제를 다시 상기하게 됩니다.
일체의 화냄이나 실망감 없이 자비하신 아버지답게
큰 아들에게 호소하시는 무력해 보이기까지 한 자비하신 아버지의 대응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저 아들’에서 ‘저 아우’로 형제임을 환기시키는 아버지입니다.
회개하여 하느님의 기쁨에 참여하라는 큰 아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제 공은 큰 아들에게 넘겨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큰 아들의 반응이 없습니다만
아마 회개하여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작은 아들, 큰 아들 같은 죄인인 우리들에게 주어진 평생과제는 끊임없는 회개로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것 하나가 하느님이 바라시는바 유일한 소망이자 기쁨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바로 미카 예언자처럼 하느님께 보살펴 달라고,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자애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저희를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회개하여 당신 기쁨의 미사잔치에 참석한 작은 아들, 큰 아들 같은 죄인인
우리 모두에게 한량없는 은혜를 베푸시어 날로 자비하신 당신을 닮아 당신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내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내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은총과 자비의 관을 씌워 주시는 분, 주님을!”(시편104,3-4).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친구들과 가끔 당구를 치곤합니다.
그런데 당구를 치다보면 어느 순간,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상대방에게 대신 치라고 할 수 없으니 아무렇게 힘껏 칩니다.
재미있는 것은 포기하고 힘껏 질렀는데 실수로 그 길이 없는 상황을 풀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았던 길이 아니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의미로 인사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실수나 실패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사실 진리로 가는 길은 다양합니다.
따라서 틀리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것이 진짜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토마스 에디슨은 1,000번의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 1,000가지를 발견한 것이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제가 많은 글을 쓰고 있지만, 원고를 작성할 때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단번에 쭉 써내려갈까요?
아닙니다. 수많은 첨삭이라는 실패를 통해서 겨우 제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실패는 강한 의지를 이끌어내기도 하고 또 반대로 의지를 내려놓게도 만듭니다.
한 길을 끈질기게 갈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하고, 반대로 변화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투지를 더욱 더 불태우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반대로 가지고 있던 지혜까지 상실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실패를 통해 현실을 깨닫게 하기도 하고, 반대로 현실을 어둡게 만드는 것이 실패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아닐까요?
모두가 실패할 가능성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또한 계속해서 실패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사느냐에 따라 지금의 모습이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탕자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작은아들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아버지가 바로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란 이렇게 다시 돌아오는 사람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무한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작은아들의 모습입니다.
작은아들 스스로 말하듯이 분명히 하늘과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습니다. 실패의 순간입니다.
이때 작은아들은 “다 틀렸다.”라고 말하면서 실패에 그냥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유일한 희망이라 할 수 있는 아버지께로 향할 것을 다짐하고, 실제로 찾아가서 용서를 청합니다.
이렇게 실패에 머무르지 않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과연 어떨까요?
그 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언제나 우리를 힘껏 안아주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어머니와 두 아들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갔습니다.
어머니는 책을 읽고 있었고, 아이들은 그림책을 읽었습니다.
아이들이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했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다녀오라고 하면서 계속 책을 읽었습니다. 아이들이 심심하다고 하였을 때입니다.
어머니는 탁자 위에 신문을 깔고 아이들의 운동화를 벗어서 끈을 다시 매보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신발의 끈을 풀었고, 다시 매면서 집중력을 키웠고, 손의 근육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내릴 때입니다. 어머니는 신문지를 치웠고, 탁자를 깨끗이 닦았습니다.
늘 책을 가까이 하는 어머니를 본 아이들은 책을 가까이 할 것입니다.
앉은 자리를 깨끗이 정리하는 어머니를 본 아이들은 주변을 잘 정리할 것입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해야 할 길을 보여주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합니다.
첫째 시간은 공간과 함께 우리의 존재를 가능하게 합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우리는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시간은 변화와 움직임을 가능하게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꽃이 피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이 자라납니다.
셋째 시간은 흐름과 역사의 토대가 됩니다.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인식을 갖게 됩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과학 기술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넷째 시간은 우리의 추억과 우리 기억의 창고가 됩니다.
이 창고 안에 우리는 의미, 가치, 보람, 사랑, 기쁨, 슬픔을 담아냅니다.
다른 시간들은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지만
의미와 가치, 보람과 추억, 기쁨과 슬픔의 시간은 오직 인간만이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커다란 축복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그 시간의 창고에 우리는 무엇을 담아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러분은 누가 주인공인 것 같습니까?
아들을 사랑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 돌아온 아들에게 잘못을 묻지 않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을 했고, 아버지의 집이 하느님 나라임을 알지 못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잘해 주시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큰 아들이 있습니다.
지난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용서를 청하던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큰 아들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것은 무관심입니다.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것들에 대한 외면입니다.
그것은 잘못한 이들에게 용서와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단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태도입니다.
아버지는 하느님 나라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집을 나간 둘째 아들들 생각하였습니다.
그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몸은 비록 하느님 나라에 있었어도 마음은 둘째 아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것이 관심이며, 그것이 사랑입니다.
첫째 아들의 마음으로 사는 것은 몸은 천국에 있다 해도 천국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멀리 떨어진 특별한 공간이 아닙니다.
천국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억울한 사람, 정의를 위해서 투신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고, 평화를 이야기하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죽어서 눕힌 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아버지께 가는 길이기에 그토록 아름답습니다.
그것도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치고 통탄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베드로와 가리옷 유다가 다 같이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반하고서 울음으로 통탄해 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돌아와 구원의 길을 갔고 유다는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파멸의 길을 간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이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없고서야 어떻게 진정한 회개라 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마치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아들은 이렇게 가산을 탕진할 줄을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고 희망하고 있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를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말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오늘, 아버지께서는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십니다.
이처럼, 회개는 죄에 때한 깨달음에서 온다기보다,
오히려 ‘사랑에 대한 까달음’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회개란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것이며,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하여, 회개는 단순한 죄책이나 자책이 아닌, 그분의 사랑에로의 귀환이요,
그분께 대한 기쁨과 찬미, 탄성의 노래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다시 시작하는
생명의 힘찬 봄입니다.
한 번도
제대로 아버지께로
돌아간 적이 없는
얄팍한 저의 신앙을
아프게 반성합니다.
작은 아들의 발걸음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다시 보게 됩니다.
다시 일어나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거기서부터
새로운 삶은 시작됩니다.
우리를 위한
아버지의 사랑을
뜨겁게 만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아파하시고
우리 때문에 기뻐하시는
변함없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를 통해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시간 또한
다시 시작하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진실한 것은
아버지께로 가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하루에도 수백 번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아버지 사랑으로
되돌아갈 때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됩니다.
아픔을 치유하는
사랑 가득한
아버지의 기다림입니다.
그 어떤 절망도
아버지의 사랑 앞에서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됨을 믿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이
아버지를 향하고
아버지와 함께하는
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아버지 안에
작은 아들
큰 아들
모두
회개의 잔치가 됩니다.
천국과 지옥, 그리고 자유
전삼용 요셉 신부
천국은 죄가 없는 곳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죄는 우리에게 자유가 있어서 짓는 것이기에, 천국에서는 자유가 없어지기 때문에,
즉 하나만 선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와를 유혹했던 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뱀이 없어진다는 말은 선택권이 없어진다는 말인데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주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자유’입니다.
내 안의 뱀은 절대 죽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옥이 자유가 없는 곳이고, 천국은 자유가 완전해지는 곳입니다.
이번 주에 어머니와 찜질방에 갔습니다.
함께 처음으로 들어간 곳이 들어갈 때부터 숨이 막히는 한증막입니다.
들어가자마자 땀이 나왔습니다.
제가 나가려고 하는데 어머니가 누가 더 늦게 나가나 시합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저도 자존심이 발동을 하였습니다.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끝까지 참았습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어머니께서 먼저 “난 당뇨가 있어서...”라고 하시며 슬그머니 나가셨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아, 나가고 싶으면서도 나가지 못하는 곳이 지옥이구나!’였습니다.
자존심이란 놈이 나가고 싶을 때 나갈 수 있는 자유를 빼앗은 것입니다.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인데, 지옥은 자신의 자아에게 자유를 완전히 빼앗겨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인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그곳이 천국입니다.
결국 자유가 있기에 지옥도 생기고 천국도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자존심이 너무 강하여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서
한증막에 갇혀 고통을 영원히 당해야 한다면 그 곳이 바로 지옥인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님까지 팔아먹었다고 해서 완전한 자유를 가졌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도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자아와 세상의 힘에 굴복당해 자유를 잃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나중에 자기를 이용했던 사람들에게 돈을 집어던지기는 하지만,
여전히 성모님 앞에서 무릎 꿇고 죄의 용서를 빌 수 있는 자유는 없었던 사람인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데 자존심 때문에,
두렵고 창피해서 무릎을 꿇을 수 없다면 유다와 같은 처지에 있는 것이고
자유를 빼앗겨 지옥에 가까이 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사실 제목이 잘못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비의 아버지도 아닙니다.
바로 아버지와 동생을 받아들일 수 없는 형입니다.
오늘 비유를 들어주신 이유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어울리는 예수님을 못마땅해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동생보다 더 자유롭지 못한 큰 형과 같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더 자유로울 수 있도록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과 제 나름대로는 가장 일치하는 영화가 있다면 저는 전도연씨 주연의 ‘밀양’을 꼽겠습니다.
밀양의 이신애는 오늘의 맏아들을 보여줍니다. 즉 자아에 묶여서 자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에게는 애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밀양이라는 시골에 와서까지 남들에게 꿀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과시하고 돈이 많은 것처럼, 땅에 투자하겠다는 식으로 계속 떠들고 다닙니다.
여기서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 자신의 열등감을 돈으로 치장하는 자아가 강한 여자임을 보여줍니다.
그만큼 솔직할 수 있는 자유를 잃은 것입니다.
신애가 노래방에서 놀다가 늦게 들어간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유괴범이 아들을 살리고 싶으면 돈을 달라고 전화를 합니다.
온갖 있는 척을 다 했지만 신애의 통장엔 870만 원 정도 뿐이었고,
유괴범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 없었던 신애는 싸늘한 아들의 시체를 보아야 했습니다.
신애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범인을 용서하겠다고 결심하고, 범인을 찾아갑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힘겹게 ‘주님의 사랑으로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는 신애 앞에서
범인은 너무나 평안한 모습으로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용서해주셔서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범인 때문에
신애는 분노하고 화를 참지 못하고 실신합니다.
이 모습이 오늘 복음의 큰 아들의 모습입니다.
죄만 짓고 돌아온 놈도 싫지만, 일만 죽도록 한 자신보다 실컷 죄만 지은 죄인을
단숨에 받아주는 하느님이 더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에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바로 지옥이고 자유를 빼앗겼다는 뜻입니다.
그리고는 그런 고통이 너무도 커서 자살을 시도하게 되고,
이 모습은 유다와 너무도 닮은 모습입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제일 두려워합니다.
신애도 손목을 긋고는 죽음이 다다르자 죽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살려달라며 거리로 나갑니다.
한증막에서 자존심이란 것이 나가고 싶어도 나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바로 자유를 빼앗긴 지옥인 것입니다.
저도 키가 작은 열등감 때문에 키 큰 여자를 좋아하지 않지만,
또 사귀게 되면 키가 큰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또 좋아하면 이내 키 작은 사람을 찾게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게 되는 것은 자유를 빼앗겼다는 것인데, 사실 열등감도 교만입니다.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처와 열등감과 같은 트라우마가 새겨지는 곳이 내 자아입니다.
이 자아가 나의 자유를 빼앗고 지옥으로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EBS 다큐 프라임에서 했던 ‘모성쇼크’에서 부모에게 받은 대로 하게 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 엄마는 아들이 미워죽을 지경입니다.
머리를 쥐어박고 소리 지르고 무시해버립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이러는 자신이 더 밉습니다.
알고 보니 그녀의 어머니가 오래 전에 그녀의 오빠만 좋아하고 자신은 구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도 오빠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고, 아들에게서 오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지옥에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한 어머니는 자신이 어렸을 때 자신의 어머니에게
“네가 너무 울어서 네 동생이 장애아로 태어났다.”는 말에 너무 큰 상처를 받아서,
자신의 자녀가 우는 것을 보아주지 못합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내 안에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맏아들도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더 영광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는 자존심을
혹은 자아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해성사를 볼 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입으로 고백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자신의 자아가 죽어서 죄를 용서받기도 이전에 이미 자유로워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순교복자 수도원의 창립정신은 “면형무아(麵形無我)”입니다.
즉 예수님이 빵의 형태가 되시기 위해서(麵形) 자아를 없애셨듯이(無我),
우리도 세상에 생명의 빵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나를 구속하는 것은 내 안의 상처, 혹은 내 자아 안에 새겨진 상처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자아를 부서 버려 면형무아가 되지 않으면 영원히 그 트라우마 때문에
자유로운 인생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그 상처를 긁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강하면 상처는 또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을 수 있는 놈을 없애는 것이 상책입니다.
저는 저 자신을 마구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의 주인을 예수, 마리아, 요셉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저의 자아는 그 마구간의 동물들과 같습니다. 새로운 주인에게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참 성전이 되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