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반박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논거 중에, 기독교가 국내의 사회복지와 근대화에 절대적으로 기여해 왔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근대화'에 관련된 문제 중 가장 설득력을 갖는 것 중 하나가 여성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 나라 여성들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는데 기독교의 남녀 평등 사상이 들어오면서 해방되었으며, 지금도 기독교 국가인 서구 선진국의 여성들이 이슬람교나 유교 국가의 여성들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비기독교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보입니다. 종교를 막론하고 한국 여성들 사이에 '예수쟁이에게 시집 가면 제사음식 준비 안하고 편할 것이다'라는 말이 통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 교회에서 나타나는 성 불평등 현상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유교의 악영향일 뿐'이라고 어물쩡 넘어가는 것이 쉽게 허용되곤 합니다.
실제 기독교인들이 절대시하는 바이블에서 여성에 관한 규범들을 살펴보면, 기독교는 전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독립적이며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 시대의 율법일 뿐이며 은유로 해석해야 한다'고 발빠르게 변명하는 구약 시대의 가히 엽기적인 수준의 여성 혐오적인 구절들은 넘어가 준다고 치더라도, 신약의 사도 바울의 가르침들은 지금까지도 전세계의 이른바 '정통' 교회법에 적용되면서 기독교 신자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여성들을 종속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발언권과 활동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흔히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그러한 전근대적인 규범을 반대하고 '불평등을 넘어선 조화'를 주장하곤 하지만,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디모데전서 2장 11~12절] 등의 바이블의 주요 구절에서도 나타나듯이 바이블을 '무오한 신의 가르침'으로 전제하는 기독교의 교리 자체가 이미 근본적으로 여성의 종속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발언을 쉽사리 하지 못하게 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엄청난 쪽수(!)와 서구 선진국의 사례를 근거로 한 일반인들의 오해 때문에 잘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지요.
TV에서 자주 방영되는 90년 초 미국 영화 '솔로몬의 딸'(Not without my daughter)은 70년대 호메이니 회교혁명 직후의 광기어린 이란에서 극적으로 탈출하는 미국 여성의 실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는 끔찍한 구타와 여성이 독립적인 활동을 전혀 할 수 없는 회교국가의 사회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기독교 국가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영화이지요.
회교 근본주의 국가들의 성차별이 과장되었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뻥칠 생각은 없습니다. 올해에 베니스 영화제에서 가장 높은 상인 금사자상을 받은 이란 영화도 감옥에서 출소해서 혼자 집에 갈 수조차 없는 이란 여성 문제의 부조리에 대해 인정하고 있으니까요. 회교 근본주의 독재 정권이 집권한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더욱 심각한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선진국에서 별 문제가 나타나는 것 같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현실 기독교가 회교 근본주의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성차별과는 무관하며, 있더라도 유교 등의 다른 사상이나 다른 사회 부조리의 탓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불과합니다.
흔히 여성 문제에 있어 동양의 비기독교 국가보다 훨씬 앞서 있다고 인식되고 있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의 경우, 매우 최근까지 기독교 윤리를 근거로 여성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이 존속되어 왔습니다. 이란에서 70년대 회교혁명 이후 여성이 자조권이 인정되지 않는 것에 대해 문제삼는다면, 유럽에서도 6~70년대까지 남성의 허락 없이는 여성 혼자서 재산을 처분하는 것이 제한되는 악법이 있었습니다. 아일랜드의 경우, 90년대에야 의회 투표에서 간발의 차이로 이혼이 법적으로 인정되기 시작했지요. 근본주의 천주교 국가인 아일랜드에서는 최근에 강간으로 임신되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을 기도할 정도였던 여고생에게 법정에서 '불법 낙태를 시도할 위험이 있다'며 여행을 금지하고 집에 가두는 반인륜적인 처분을 내리고, 사회 단체의 반발에 대해 '그녀가 자살할 확률보다는 아기가 죽을 확률이 높다'고 일축했던 황당한 사례도 있었는데, 물론 아기의 생명에 대한 애착보다는 근본주의 기독교 사상에 집착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 한국어로 번역된 독일 여성학의 고전 '아주 작은 차이'에 소개된 독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 사례를 살펴보면 20여년 전의 독일의 상황이 동양의 가부장제가 우세한 국가들의 상황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책없이 낙태한 여성을 감옥에 집어넣는 것만으로 미혼모 문제를 땜빵하려는 발상의 악법은 모든 기독교국가에 보편적으로 존재해왔고, 여성단체의 반발을 견제하고 지금까지도 부분적이나마 이 법을 존속시켜 온 것은 전적으로 '태아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으면 지옥간다'는 것을 최우선적으로 걱정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도 미국 기독교계에서는 여성의 사회진출을 반대하고 여성의 역할은 가정에 있어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사고를 세뇌시키는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른바 서구 기독교 국가의 성평등 확립은 기독교 사상보다 그것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과정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근본주의의 악법에 대한 유럽 여성들의 저항과 신체 자유권의 적극적인 선언은 기독교 윤리에 어긋나는 미친 짓이라는 공격에 시달려 왔으며, 60년대 후반이 지나서 파격적으로 정비되었던 여성관련 각종 법제의 발전은 유럽이 기독교 윤리의 족쇄에서 벗어나고 젊은이들이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68년 이후와 대체로 일치합니다.
보편적으로 인간의 본능을 비현실적으로 억압하는 종교의 도그마는 이중적인 규범과 불평등을 낳아 왔습니다. 서구 선진국들이 중동 국가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은 것은 회교 도그마 대신 기독교 도그마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전시 상황에 빠지지 않고 개방사회가 형성되면서 여성의 노동력과 발언권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노예제가 붕괴된 것이 기독교인들의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노예를 통제하는 시스템 자체가 산업화 과정에서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국가라서 여성의 처우가 좋다는 주장은 선진국들이 기독교 국가라서 야훼의 은혜를 받아서 잘 산다는 논리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는 망발인 셈입니다.
이번에 호산나넷에서 전례가 없는 '크리스천 여성 잡지'를 만들겠다며 '레베카 프로젝트'라는 모토를 내걸고 공모주를 모집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잡지 '레베카' 제작진들은 바이블에 기록된 여성들과 현재 기독교를 믿는 여성들은 타종교의 여성들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규정되어 있고 축복받은 존재라는 자긍심이 강한데, 바이블에 나타난 한심한 수준의 여성관과 지금도 서구 선진국에서 여성의 사회권을 막는 보수 기독교인들의 작태를 볼 때 전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교도의 피를 정화하겠다'는 모토를 내세우며 자행되었던, 코소보의 이른바 '강간캠프'에서 기독교를 믿는 민족의 군인들이 이슬람교를 믿는 민족의 여성들을 학대했던 사건을 접하면서도 '그 군인들에 대한 원한 때문에 기독교를 싫어할까봐'부터 걱정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휴머니즘을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