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이나 이사 다녀 순서 뒤죽박죽 원하는 앨범 찾는 몇 시간 걸려
설 연휴 맘먹고 레코드판 정돈 한 장 한장에 지나온 세월 흔적
영어식 듀엣가수名 추방 시절도 팀 이름 온통 영어로...격세지감
지금이야 CD 시절도 지나고, MP3파일로 스마트폰에 음악을 저장해 놓고,
그것마저도 번거로워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듣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LP 레코드판을 재킷에서 꺼내 물수건으로 음반의 먼지를 닦고
턴테이블에 올려 트랙을 찾아 바늘을 조심스레 내리는 과정을 거쳐야
겨우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이윽고 음악이 들리기 시작하면 재킷의 그림을 보거나 눈을 감고 음악에 빠져들어갔는데
그건 마치 물을 끓이고 찻잔에 차를 넣고 끓인 물을 부어 찻물을 우리고 뜨거운 차를 식혀 가며
향을 맡고, 이윽고 한 모금 차를 마시는 것처럼 순서대로 진행하는 과정이었고,
음악을 듣기 위해 그런 기다림은 당연했다.
처음에 CD가 나왔을 때, 아날로그 소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메마른 디지털화한 음악 소리가 싫었다.
그런데 플레이어에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 간편함에 점점 익숙해져서
몇 년 뒤에는 나도 당연하게 CD로 음악을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LP 레코드와 CD가 공존하더니 점점 LP의 생산이 줄어들어
벌써 오래전부터 한국에 LP레코드를 만들 기술자도, 기계도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지경이 되었다.
커다란 음반 재킷을 잔뜩 진열해 놓고 가게 밖으로 내놓은 스피커에서 인기곡(가게 주인의 취향)을 크게 틀어서
지나가던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던 레코드 가게들도 모두 사라졌다.
LP를 내고 싶으면 외국에 주문해서 만들어 와야 하는 것도 그렇지만,
가정에서 턴테이블이 사라진지 오래여서 어차피 시대는 CD 시대일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젠 CD도 귀찮아서 MP3 파일로 음악이 소비되는 시대까지 왔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예전부터 모아오던 손때 묻은 LP들을 차마 버리지 못해,
몇 년 전 이사 온 집 거실 벽면에 오래된 종이 냄새를 풍기며 레코드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가나다순과 영문 알파벳순으로 분류해서 마치 도서관 서가처럼 찰대로 정리해 놓았는데,
몇 번 이사를 다니다 보니 순서가 섞여버렸고, 레코드판을 정리하는 것도 게을러지다 보니
이제는 어쩌다 원하는 앨범을 찾으려면 시간이 많이 걸려서 점점 더 레코드판과 멀어졌다.
그래서 설 연휴 동안 무얼할까 생각하다가 큰맘 먹고 오래 손대지 못했던 LP레코드판을 순서대로 정리했다.
옛 LP를 분류해서 정리하다 보니 한장 한 장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다.
1973년 겨울에 제1차 석유파동이 나서 레코드판을 찍는 플라스틱 비닐의 수급이 불안정해졌다.
새로 음반을 내야 할 음악은 계속 만들어지는데 재료인 비닐을 구하기가 힘든 시기였다.
결국 임시방편으로 미처 팔리지 않고 창고에 쌓여 있던 음반들을 다시 녹이고,
고물상을 뒤져 가져온 오래된 음반까지 녹여서 그걸로 새 레코드 판을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재생 재료로 판을 찍어서 그 시기 몇 달 동안 나온 LP레코드들에 잡음이 조금 많았다.
내 첫 앨범이 나온 시기가 마침 그때였는데, 초판이 다 팔리고 나서
새로 찍은 재판 앨범의 음질이 훨씬 좋아서(같은 음원으로 만들었는데도) 오랫동안 그 이유가 궁금했던 기억이 있다.
한편 그 기간 전에 나와서 팔리지 않고 있던 음반들을 재활용하기 위해 다시 수거하는 바람에
그 시절에 나온 음반을 구하기 힘든 이유도 석유파동이 원인이었다.
주로 영어로 이름을 지어 사용하고 있던 그룹사운드와 듀엣 가수들 이름을
어느 날 갑자기 한글 이름으로 바꿔야 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1970년대 중반에 국민 주체 의식을 살리고자 외래어 추방운동이 시작되었고, 식품업체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나중에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언어에 이르기까지 외래어를 없애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 축구의 경우
골키퍼는 문지기, 사이드라인은 옆줄, 드로잉은 던지기, 코너킥은 모서리차기 등 용어를 한글로 바꾸기 시작했다.
갑자기 바뀐 용어에 익숙하지 않아 꽤나 신경 쓰이던 시절이었다.
외래어 추방 운동은 학교, 작업장 등 사회 각 분야로 퍼져나가더니 드디어 음악 현장까지 파급되었다.
1970년대 후반, 그룹사운드와 듀엣들도 그떄까지 상요하던 이름을 한글로 바꿔야 했다.
외국어로 된 이름으로는 방송 출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TV 출연 정도가 아니아, 라디오 방송에서도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레코드판을 틀어주지 않았다.
결국, 활동을 계속하려면, 어니언스는 '양파들', 라나 에 로스포는 '개구리와 두꺼비', 바니걸스는 '토끼소녀'로 바꾸고,
투 에이스는 '금과 은'으로 바꾸는 등 많은 그룹이 이름을 바꿨고,
대학가요제로 알려지기 시작한 대학생 그룹들도 이름을 바꿔야했다.
제1회 해변가요제(1978)에서 알려진 항공대 그룹 런웨이(RUNWAY)는 다음 해에 앨범을 내면서 '활주로'로 이름을 바꿨고,
휘버스는 '열정들'이라고 횄다가 계속 이름을 바꾸기도 했는데,
그 시절에 라디오를 들으면서 바뀐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어이없어하던 기억이 난다.
팀 이름이나 개인의 별명마저 온통 영어로 만들어서 사용하는,
요즘 노래하는 친구들은 그렇게 영어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시절이 있었다는 걸 이해할까?
심지어 노래 가사의 많은 부분을 억지 영어로 부르는 요즘 노래들을 듣고 있자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한구석에서 외래어 추방 운동을 주장해도 LP 시대가 지나고 CD 시대도 지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이 바뀌었다.
이정선 서울종합예술실용학과 교수 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