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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성(무에타이)킥복싱MMA(의정부민락점,미아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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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찬란한 무에타이의 역사.....
태성 (의정부,미아) 총관장 박종덕 추천 0 조회 94 11.03.31 01: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무에타이 역사

 

태국은 메콩강이 태국영토의 중앙평원을 가로 질러 북에서 남으로 흘러 내리면서 비옥한토지를 가꾸어 왔다. 태국은 13세기말 맨그라이 왕이 메콩강 북단의 치앙마이를 수도로 삼아 라나왕조를 세움으로서 역사에 등장하였다.그후 16세기에는 인도 차이나반도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 가운데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한편 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식민통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유일하게 5천년 이상 독립을 유지한 나라로서 국민들은 강한 독립심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는 중세시대 부터 전해 내려오는 태국 전통 무술인 무에타이가 한몫을 하게 되었으며, 현대의 무에타이는 태국 국민의 열광속에 국가적스포츠로서 자리를 잡고 있다.


무에타이는 중세시대부터 맨손기술과 활, 검, 창등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군사 무술에서 부터 시작 되었으며, 무기와 병행해서 주먹,다리,무릎,팔꿈치,어깨 심지어는 엉덩이를 이용한 맨손 격투로서 발전되어 왔으며, 1560년경부터는 당대의 유명한 태국의 국왕나레수완이 미얀마 (버마)와의 전쟁을 통해 군사훈련 목적의 무술로 발전 되어진 무술이며 스포츠라 할수있다. 시암(태국의고대명칭) 제국의 국왕이었던 그는 무에타이로 훈련된 군사를 앞세워 미얀마를 점령할수 있었으며, 미얀마 점령 후 돌아온 나레수완국왕과 그의 병사들은 태국국민의 영웅이 되었으며, 무에타이는 태국 국민의 무술이며 스포츠로서 귀족과 평민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무에타이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태국 문화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며, 무에타이의 고대경기 방식은 대마 라고 불리는 것으로 붕대를 만들어 손에 감고 유리조각을 갈아서 아교에 묻혀 붕대에 바른체 경기를 하면서 그들의 용맹성과 위용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이 위험한 경기 방식은 약 50년 전부터 정규 복싱 글러브를 도입함으로 해서 사각의 링 위에서의 경기방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오늘날무에타이는 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자기방어 무술이며, 심지어 여성들 조차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무에타이를 수련 하고 있으며, 무에타이를 수련함으로 인해서 강한 의지와 지능뿐 아니라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할수 있는 호신 무술이며, 단순한 투기가 아닌 신과 왕을 경외하는 특이한 정신이 깃든 무술이자 스포츠로 발전되어 왔으며, 과거에는 목숨을 걸고 경기를 할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특별한 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근대에 와서는 고대 무에타이경기 방식을 수정하여 많은 사람들이 무에타이 경기에 참가할수 있도록 경기 방식을 수정하게 되었고,경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항상 태국 전통 음악 ( 4가지 악기로 이루어짐 )에 맞추어 와이크루( 일종의 태국의 전통 춤에 무에타이 기술을 가미 )라는 의식으로 자신을 지도해준 스승과 부모에 감사드리고, 머리에 몽콘과 팔에는 프락치앗 이라는 띠를 착용하여 자신이 경기에 이길수 있고 다치지 않도록 기원한후 , 3분 5라운드 1분휴식의 경기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사용되는 기술은 주먹기술과 팔굽,무릎,발을 사용 하게 되며 여기에 무릎과 팔굽에 가장많은 점수를 얻게되며, 특히 목잡기 기술은 무에타이 만의 톡특한 기술로, 무에타이의 목잡기는 타무술에서는 볼수없는 무에타이만의 기술이며, 그 내용은 상대의 힘을 이용하여 공격과 방어를, 그리고 팔굽과 무릎공격을 자유 자제로 하게 되는데, 이 목잡기 기술은 무에타이 기술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말할수도 있으며, 근접한 상태에서의 자기호신에는 무에타이의 목잡기 기술에 버금 갈 만한 무술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때문에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매우 과격한 무술이며 특정한 사람만이 배울수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무에타이의 기술들을 하나하나를 배워보게 되면 그렇치 않다는 것을 알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에타이가 2천년 이상을 전해 내려오면서 인간이 본능적으로 행하는 신체를 이용한 공격과 방어를 과학적으로 체계화 되었기에, 남녀노소 누구나 자신의 신체에 맞게 수련할수 있으며, 쉽고 빠르게 체득하고 배울 수 있는 무술이 무에타이가 아닌가 생각한다. 과거의 무에타이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수련되어진 군사무술로 시작 되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온 국민이 함께하는 스포츠로서 발전 되어질 수 있었던 것은 누구나가 쉽게 무에타이를 수련하고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며, 대중속에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보여주는 람무에 ( 무에타이의 한종류: 현재 링위에서 경기를 하는 방식) 많이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무에타이는 고대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수련되었던 무술의 정신이 퇴색해 지면서, 고대에 수련 되어 졌던 람무에의 특이한 기술 (머리,엉덩이,어깨를 이용해 공격과 방어를 하는기술)과 무기술(창,방패,봉,검등 )과 명상법, 호흡법등 많은 기술 들이 많이 퇴색해 지고 있었기 때문에 태국 정부에서는 무에타이의 숨겨진 많은 기술들을 복원 하여 I.A.M.T.F (International Amateur Muay Thai Federation-국제아마추어무에타이연맹) 이라는 단체를 통해 전세계 70여 가맹국에 보급 하고 있으며, W.M.T.C(World Muay Thai Council - 세계무에타이평의회)에서는 무에타이 프로 / 아마츄어 경기를 관장하고 있다. I.A.M.T.F는 아시안게임, 아시아 선수권대회, 세계선수권대회등 아마츄어시합을 개최 하고 있으며, W.M.T.C는 태국에 자체경기장을 가지고 매일 프로경기를 개최하고 있으며, 월드컵대회, 킹스컵대회등 아마츄어 시합을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는 킥복싱, 격투기 등이 무에타이와 같은 무술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외형적인 주먹과 발착기 기술은 비슷할지 모르나, 무에타이만의 정신 그리고 철학과 역사는 전혀 다른 무술이며, 킥복싱은 일본인이 태국의 무에타이를 본떠 만든 일본에서 생성된 무술이며,국내에는 1964년 광주시 (현 광주광역시)에서 킹투기라는 명칭으로 창안된 이후 1966년 일본인 킥복싱 회장과의 회담에서 킹투기라는 용어대신 킥복싱라 용어로 통일하기로 합의 하고, 현재의 킥복싱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현재에 와서는 킥복싱과 무에타이는 같은 역사와 기술을 가진 무술이라 말하고들 있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또한 격투기는 1970년경 현 대한격투기협회 회장님으로 계신 김귀진씨에 의해 국내에서 발생된 실전 무술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8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무에타이가 정식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고, 홍콩의 스타TV에 무에타이 경기가 정규적으로 방송 됨으로 인해서 손기술과 발기술이 비슷한 킥복싱이나 격투기가 무에타이로 오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외형적인 것이 비슷하다고해서 그속에 담고있는 무에타이만의 정신과 체계화 되고 과학적인 무에타이만의 독특한 기술이 유사 무술과 똑같을 수는 없을 것이며, 무에타이의 종주국인 태국에서도킥복싱은 무에타이가 아니다 말하고 있으며, 무에타이 시합에 킥복싱등 무에타이 이외의 로고나 글이 새겨진 복장을 착용하면 국제시합에 제제를 가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남서쪽으로 비행기를 타고 5시간쯤 날아가면'따뜻한 미소의 나라'로 불리우는 타이에 도착한다. 타이인들은 이방인들을 부드러운 미소로 맞이한다.이들의 인자한 미소 뒤엔 강함이 넘치며 용맹스러운 무술인 '무에타이'라는 하나의 문화가 깊이 뿌리박혀있다.  그 무에타이는 타이라는 나라가 5천 년 이상 외세의 지배를 단 한 번도 받지않게끔 도와준 애국무술이다.

무에타이의 기원은 찾아보기힘들다.

중국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동양무술의 원조로 불리우는 중국의 무술류에서 무에타이역시 흘러나갔다는 주장을 하지만 타이인들은 중국무술이 무에타이에서 흘러나갔다는 반대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어느쪽의 주장도 어떠한 근거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중국 이외에 타이와 근접한 캄보디아와 미얀마에서도 무에타이의 종주국은 서로 자신들의 나라임을 주장하고있다.

캄보디아 측의 주장에 의하면 무에타이는 9~15세기경 크메르문명에 의해 전파된 것이며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인 앙코르왓의 벽화에 무에타이를 표현한 많은 그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지에 대한 것은 알 수 없으며 타이 측은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또한, 미얀마측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타이보다 이른 기원전 300년경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미얀마측이 1세기경 태국으로 불교를 전파하는 과정에서 반도복싱이라 불리우는 버마복싱과 비슷한 격투술이 태국으로 유입되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으며`현재 미얀마의'버마복싱과 무에타이의 유사한점을 근거로 타이의 무에타이 역사는 미얀마의 버마복싱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하고있다.

하지만 타이측은.미얀마에 사람이 살기시작한 것은 기원 전후로 알려져 있을뿐 역사에 관한 기록도 문자의 부재와 사료의 부족으로 인해 10세기 이전의 미얀마의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있음을 증거로 강력히 부인하고있다. 또한 타이불교의 유입을 6세기경 스리랑카로부터 유입되었다고 주장하며 미얀마의 버마복싱과는 별개임을 주장한다. 수많은 전쟁을 치른 타이는 무에타이에 관한 정확한 자료를 보존하지 못하였으며 이로하여금 무에타이의 역사는 미스테리로서 남아있을뿐이다.

단지 근대 무에타이의 기원은 타이의 오래된 군사무술 지도서인 '유타삿'이라는 책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 책에는 창과 칼, 전쟁용 도끼,방패,'마이속'이라 불리우는 'ㅓ'모양의 몽둥이 등을 이용한 전투 방법이 나와 있으며 전장에서 무기를 잃었을경우 백병전으로 싸울수있는 맨속격투술이 수록되어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이 쓰이기 전부터 '타이' 라는 나라는 주변들국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침략을 받았으며 무에타이를 이용하여 수없이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타이 고고학자들의 말을 인용한 타이무술 전문가들의 말에 의하면 무에타이는 이미2,000년전부터 존재하여 왔다고한다.

그렇다면 무에타이는 무엇인가?


'무워이보란'(무워이=싸움,보란=고대) 현재의 무에타이와는 달리 '무워이보란'(무워이=싸움,보란=고대)이라 불리우는 고대의 무에타이는 일반적인 무술이 아니었다. 고대의 '무워이보란'은 전장에서 적을 살해하기위한 살상기술 이었을뿐이다. 그 고대의 '무워이보란'이 시간이 흐름에따라 변하고 변하여 현재와 같은 스포츠 방식을 갖는 무에타이가 된것이다. 그러한 이유때문에 무에타이는 타 무술과는 달리 어떠한 형식도 없으며 특별한 이름도 없는것이다.

 '무워이타이'라는 말은 단지 '태국싸움'을 뜻한다. 무워이(muay)=싸움 , 타이(thai)=태국 이렇듯 '무에타이'라는 말은 간단한 의미이지만 그 내면에는 수많은 방법의 싸움이 있다. 무에타이는 우리가 흔히알고있는 링위에서 두선수가 벌이는 촉무워이 외에도 창,칼,봉,방패,마이속('ㅓ'형 무기) 을 사용하는 '깝비깝봉'이있다. '깝비깝봉'이라는 말은 창과 칼을 의미하며 무기술을 뜻한다. 또한 시합이 아닌 촉무워이라는 무규칙방식의 싸움역시 '무에타이'이다. 하지만 경기화되고 체계화된 '촉무워이'덕분에 그외의 무에타이는 전수되지못하고 퇴색되어가고있다.

이렇듯 '무에타이'라고 불리우는 현재의 무에타이는 극히 일부분일뿐이다. '유리가루를 붙인다음' 현재의 무에타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것은 1917년 1차대전 부터였다. 당시 태국은 연합국으로 전세계의 전장에 태국의 용감한 군인들을 파병하였고 태국의 군인들은 무에타이를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 무에타이는 가죽과 대마로 주먹을 감싸고 유리가루를 붙인다음 신체의 모든 부분을 이용하여 상대방이 항복하는 순간까지 진행하는 고대'촉무워이' 방식의 경기였다.

그후 1930년경 국제적 시선과 선수들의 안전을 위하여 현재와 같은 경기방식인 글러브(노암)를 착용하는 '촉무워이'를 갖추게되었고 이처럼 현대화된 경기방식은 태국전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1942년 2차대전 당시 태국은 주권과 독립을 인정받는 조건으로 일본과 공수동맹을 체결,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그리하여 2차대전 내내 타이에는 수많은 일본군들이 주둔하였고 무에타이를 목격한 일본인들은 무에타이의 우수성에 감탄을 하게된다.

무에타이의 우수성에 감탄한 일본인들은 무에타이를 자신들의 나라로 가져가게 되었고 일본인들에 의해서 가라데와 접목한 무에타이는 일본의 새로운 무술인 '킥복싱'의 원류가 되기도했다. 무에타이의 강함이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면서 무에타이와 겨루고자 하는 전 세계의 각 무술인들이 태국을 찾았고 그때마다 무에타이는 승리로서 무에타이의 강함을 뽐내었다.전세계를 떠돌며 각 무술인들과 많은 대결을 펼친 극진가라데 창시자인 최영의 선생님의 회고록엔 무에타이와의 대결을 다룬 얘기가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당시 타이의 무에타이 선수인'블랙코브라'와의 대전이 무척이나 힘든 대결이었다고 회고한바 있다.

후기

전세계를 떠돌며 그많은 무술인들과 사투를 벌이며 수많은 승리를 했던 최영의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힘들어했던 '블랙코브라'라는 타이의 선수는 실존여부 조차 알수없는 선수일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80kg에 육박했을 최영의 선생님과 대결을 할수있을 정도의 중량급 태국선수는 없었다는것이다.당시기록에 의하면 룸피니 스타디움의 가장높은 체급은 페더급(57.15kg)이었다. 무에타이는 타무술인들로 부터 최강의 무술이라고 불리운다. 이는 무에타이 스스로의 주장도 아니며 어느누구도 부정하지못하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렇듯 무에타이의 드높은 위용은 누구도 넘보지 못할것이며 영원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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