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시다.
사람은 지난날에 꾼꾼 아름답고 행복한 꿈들을 지금 당장에 실현해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요한계시록 22:13) 하시면서 사람들이 현실에서의 부강과 안일보다 하나님이 태초에 주어진 사명과 본분을 기억해 그에 관한 열매를 맺도록 하십니다. 즉 현실에서 누리고 취하는 부강과 안일보다 하나님이 태초에 주어진 본분을 기억해 결실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의 삶, 곧 현실에서 갖는 부강과 안일에 치중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께 처음 받은 사명과 본분에 충실하여 합당한 결실을 맺느냐 하는 선택에 따라 사람이 사람일 수도 있고 또 사람이 사람이 아닌 짐승일 수도 있다는 것을 천하만민은 깨달아야 합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요한계시록 1:8) 하심 같이,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지만, 전에도 계셨고 장차는 자신이 태초부터 만든 모든 것들에게 준 사명과 본분에 충실하여 열매 맺는 자들과 또 본분을 망각하고 주어진 생명으로 쾌락하기에 급급한 쭉정이들을 심판하십니다. 이럴 때에 어떤 이는 "왜 하나님은 처음과 끝만 소중히 여기시고 중간(현실)을 무시해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이지 않았습니까? 중도에 가끔 나타나 상황 설명을 하였더라면 우리가 결코 하나님이 없다고 우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관리소홀을 잘못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불신 죄인이 되었다고 항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들 중 어느 누가 처음과 끝을 약속하지 않고 일을 시키는 자가 있느냐? 매사에 처음과 끝은 약속으로 되었고 중간에 속한 현실은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일하지 않았느냐?" 하시면서 저들의 편협한 말을 무시해 내칩니다. 무릇 처음이라고 하는 것은 시작이요 계획이요 씨앗과도 같으며, 나중이라고 하는 것은 완공이고 완성이며 결실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처음과 나중 사이에 있는 중간 단계에 속한 자재나 일꾼이나 시간(과정)들은 반드시 처음에 작정된 일이 나중에 완성될 것을 염두에 두고 현실에 임하여야지, 그렇지 못하고 자신들의 짧은 소견으로 현실에만 급급하게 되면 반드시 처음과 나중을 계획하고 완성하시는 분의 일들을 거역하고 방해하게 됩니다.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무화과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단것, 나의 아름다운 실과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나무들이 또 포도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의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사사기 9:8~15)
위의 예화(例話)에 나오는 나무들 중에 처음과 끝을 항상 인식하고 현실을 살아가는 정직하고 지혜롭고 소신있고 충효로운 나무들이 바로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입니다. 그러나 처음과 끝에 별무관심인 가시나무만이 중간 단계의 현실을 위해 일확천금의 성공자가 되려 합니다. 땅과 식물들을 관할하는 지주(地主)가 오실 때에는 처음과 나중을 무시하고 현실에만 치중한 가시나무과에 속한 모든 식물들은 뿌리채 뽑혀 맹렬한 불꽃 속으로 던져 집니다. 처음 받은 사명에 충실하여 열매로 보답할 뜻과 마음과 생각이 전무한 가시나무 같은 김일성 일가들과 그 추종 세력들만이 현실에서 제왕이 되려 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인간들은 사람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려는 생각과 마음은 없고, 오직 가시나무 같이 모든 이웃들에게 해악만 끼치는 죽음과 고통의 삶을 사는 거짓된 자들입니다.
인생의 처음은 자신의 근본을 뜻합니다. 즉 자신이 누구의 뜻에 의해 태어나 어떤 결실을 맺어야만 심고 뿌린 자로부터 보상받는냐 하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 갑니다. 그리고 처음 받은 사명에 충실하여 최종 결산의 날에 잘하였다고 칭찬받는 것이 정직하고 지혜롭고 소신있고 충효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로 태어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이 같은 지침을 생명처럼 사수해 지켜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누가복음 14:28~30) 하심 같이, 사람의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 바로 일은 시작하고 완성하지 못할 때입니다.
처음을 의식하고 그에 준하는 일로 현실을 살아가는 자에게만 최종 승리의 영광이 주어질 뿐, 처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오직 태어난 중간 시간대에 자신의 진로와 삶의 목적을 새롭게 바꾸어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가시나무 같은 존재들로서 주어진 현실에서 교주가 되고 제왕이 되는 일에 주력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기득권자들이 처음과 나중을 무시하고 오직 주어진 현실 속에서 짐승 같은 자들의 망동에 놀아나는 꼴들을 보십시오. 이들 짐승 같은 자들의 망동에 놀아나는 자들은 매사에 처음과 나중을 망각하고 지금 당장 누가 실세가 되어 천하를 좌우하느냐 하는 일에만 진력합니다. 하나님(조상님)도 처음이요 부모님도 처음이요 국가도 처음이요 중요한데, 악인들은 이 모든 처음 것들을 무시하고 오직 멸망할 짐승들처럼 중도에 딴 마음을 먹고 천방지축하려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처음과 나중을 위한 삶이었기 때문에 주어진 현실이 그 무엇이든 아랑곳 하지 않고 모두 소화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정직하고 지혜롭고 소신있고 충효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그 같은 일을 본받아 예수님이 받은 것과 같은 일들을 자신들도 받아 감당토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신앙인들은 처음과 나중을 중요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언행은 버리고, 사단에 의해 새롭게 조성된 신학의 믿음으로 중간 단계인 현실에서의 성공을 위해 가시나무의 행실을 본받아 죄인된 뭇 사람들의 뜻에 요동치는 소신없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들이 처음을 생각하였더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언행만이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음을 깨닫고, 중간 단계에서 발생된 거짓된 믿음, 곧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신학의 믿음으로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음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 생전에 확인할 수 없는 세상의 모든 전후 사실(진실)들, 곧 출생하기 이전의 일들과 살다가 죽는 사후의 일들은 그것을 계획해 진행하고 완성하실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만 인식해 갖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즉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자신들이 모태에서 조성되었된 사실(진실)들은 모두다 육신의 육감(肉感)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진실들이기 때문에 이런 일들은 오직 부모권에 속한 분들의 말씀을 믿음으로만 인식하여야 할 일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근거로해 현실을 살아가야만 비로소 합당한 보상을 장차 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처음 일들과 나중 일들만 육신의 육감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에 이것은 믿음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이사야 6:1~3) 하심 같이, 주를 호위한 천사 스랍들이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처음되는 날개 둘로는 머리를 가리었고 다른 날개 둘로는 나중되는 발을 가리었고 나머지 중간 날개 두 개로만 현실이 되어 날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즉 저들도 처음과 나중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가리고, 오직 중간 단계에 있는 현실만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육신의 육감으로 볼 수 없는 처음과 나중 일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인식해 알고, 중간 단계의 현실은 다만 처음과 나중을 잇는 교량 역할만 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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