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 1일, 사도세자가 비극적 죽음을 맞은 지 237년 만에 그의 묘지문이 세상에 공개됐다. 묘지문이란 죽은 자의 행적을 기록한 글로 보통 무덤에 함께 매장된다. 사도세자 묘지문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둘 것을 명령해 끝내 파국으로 몰아간 아버지 영조가 임오화변이 일어난 지 불과 2달 뒤 직접 썼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사도세자의 묘지는 1796년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배봉산에서 지금의 경기도 화성 현릉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그 당시 수습되지 않았던 묘지석을 1968년에 발견했다. 묘지석 오른쪽에는 ‘사도세자 묘지’라고 쓰여 있고, 왼쪽에는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등으로 순서가 매겨져 있다. 지문은 장마다 약간의 변화는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8행 15자를 기본으로 했다.
“훈유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어제지문으로 시작하는 제1장의 내용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어제’는 임금, 즉 영조가 직접 썼다는 뜻이다. 첫 번째 부분은 세자의 탄생과 유년기의 총명함을 기리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영조는 사도세자가 태어나 영특했고 장성해서는 문리가 통달하여 성군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성인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방종을 일삼아 계도하려고 했으나 제멋대로 소인들과 어울려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마음을 통제치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락하였더라.” 제2장에서는 고인의 덕과 위업을 기리는 내용 대신 세자의 비행과 방탕함에 대해 고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영조는 예부터 무도한 인군은 많았지만, 세자 때에 이와 같이 무도한 경우는 듣지 못했다고 탄식한다. 세자를 뒤주에 가둔 이유가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밝히는 부분이다. 그러면서 사도세자를 두고 아들을 뒤주 속에서 죽게 해 세상에 없던 일을 아비에게 행하게 했다며 통곡했다. 그리고 그 잘못은 제대로 가르쳐서 이끌지 못한 아버지인 자신에게 돌렸다.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가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제3장의 내용은 이 묘지문의 절정이다. 사도세자가 숨진 임오화변의 간략한 전말과 아버지인 자신의 비통함을 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조는 “강서원(왕세손의 교육을 맡았던 관청으로 뒤주를 놓아뒀던 곳)에서 여러 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어찌 종묘와 사직을 위한 것이겠는가? 백성을 위한 것이겠는가?”라고 언급해 자신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것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진실로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째에 이르러 네가 죽었다는 망극한 비보를 들었노라. 너는 무슨 마음으로 칠순의 아비에게 이런 지경을 만나게 한단 말인가”라고 적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아들 사도세자에 대한 깊은 탄식과 회한의 심정을 절절하게 드러냈다.
“사도는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서운함을 갖지 말지어다.” 마지막 제4장에서는 약간 차분해진 문체로 다시 돌아와 아버지로서 자식인 세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내용을 담았다. 영조는 이 장에서 국가와 왕실의 문장을 작성하는 신하에게 묘지문을 대신 짓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입으로 불러 받아 적게 했다고 밝혔다. 통상적으로 어제지문이라 할지라도 신하가 대신 쓰는 경우가 많았다. 사도세자 묘지문의 경우 영조가 죽은 사도세자를 애도하며 직접 지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같은 내용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영조는 이는 30년 가까운 부자지간의 은의를 밝힌 것이라고 적었다. 영조는 세자에게 이 지문으로 부왕인 자신에게 섭섭한 마음이 없기를 바란다고도 덧붙였다. 아울러 영조는 세자의 죽음에 대해 뉘우치는 마음으로 같은 해 7월 세자에게 ‘사도’의 시호를 내려, 이후 ‘사도세자’라 불리게 했다.
옮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