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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난취(一散難聚)
한번 흩어지면 모이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나라의 큰일을 하려면 민심을 얻는 것이 먼저다. 인심이 함께하면 안 될 일이 없고, 제멋대로 가늠하면 될 일도 망치고 만다는 말이다.
一 : 한 일(一/0)
散 : 흩을 산(攵/8)
難 : 어려울 난(隹/11)
聚 : 모을 취(耳/8)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큰일을 하는 사람은 인심을 근본으로 삼는다(立大事者 以人心爲本)"는 장강대하(長江大河)의 글이다.
서두가 이렇게 시작한다.
若知夫所以立大事乎.
큰일을 세우는 방법 아는가?
匪因威武, 匪賴堅利.
위엄과 무력으로 해선 안 되고, 갑옷과 병장기에 기대도 안 된다네.
與衆則成, 自用則墜.
백성과 함께하면 이루어지고, 제 힘 믿고 처리하면 실패한다네.
惟其本在此而不在彼, 初不出於人心.
근본은 여기 있고 저기에 있잖으니, 애초에 인심을 벗어나지 않아야지.
自其莫愚者而言之, 可以利誘, 可以威臨.
어리석은 사람 두고 얘기하자면, 이익을 가지고 꾈 수도 있고, 위엄으로 임하여 누를 수도 있다네.
自其莫神者而論之, 足以立事, 足以僨國.
신령스러운 사람으로 논해본다면, 일을 세워 성취할 수도 있지만, 나라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법.
나라의 큰일을 하려면 민심을 얻는 것이 먼저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무력으로 겁박한다고 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인심이 함께하면 안 될 일이 없고, 제멋대로 가늠하면 될 일도 망치고 만다.
말이 다시 이어진다.
人惟邦本, 本固邦寧.
사람이 나라의 근본이거니, 근본이 단단해야 나라가 편하다네.
順則事立, 逆則亂生.
순리에 따르면 일을 이루고, 거스르면 난리가 생겨난다네.
顧乃不然, 則人離心士解體, 勇者㥘憤者弭.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백성 마음 떠나고 사졸들은 맥 풀리며, 용자는 겁을 먹고 성내던 이 입 다무네.
不蹙額相告曰, 吾王之忘讐忍恥, 夫何使人心至於此.
다들 이마 찡그리며 서로 고해 하는 말이 우리 임금 원수 잊고 부끄러움 참다가, 어이 인심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는가?
衆一散而難聚, 心已離而難合.
무리 한번 흩어지면 모이기가 어렵고, 마음 한번 떠나가면 합쳐지기 어렵다네.
水覆無再收之期, 甌缺無重完之日.
물 엎으면 다시 담을 기약이 아예 없고, 깨진 사발 온전해질 날이 없는 법.
此所謂庇焉而縱尋斧焉, 鮮不離披而摧折.
그늘 싫다 함부로 도끼 찾다가, 시들해져 죽는다는 그 말과 같네.
則僵仆顚躋之不暇, 尙何望立大事而成大業也哉.
얼마 못 가 엎어지고 자빠질 테니, 큰일 세워 큰 사업을 어이 이루랴.
그늘이 싫다고 자꾸 도끼질로 찍어내면 끝내 나무는 시들어 죽고 만다.
◼ 민심을 얻는 리더
성공한 리더와 실패한 리더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아마도 많은 이야기들이 오갈 수 있을 것이다. 인재를 기용하는 용인(用人)의 문제, 리더의 통치 철학과 비전의 문제, 리더의 과거 행적과 자질의 문제, 리더의 기질과 성품의 문제, 리더의 지적 수준과 통찰력의 문제…
대체로 이런 것들이 지적되어 나올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것들 중에서도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민심을 읽고 그것을 얼마나 정확하게 정책에 반영했는가 하는 문제다.
민심은 여론과 직통한다. 여론은 분위기적 요소도 없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다수의 민심을 반영한 여론은 대세라는 점이다. 민심의 흐름과 통치자의 정책에 대한 반응이 여론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역대로 민심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고 했고,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말도 나온 것이다.
마음껏 말하게 하라
민심은 무엇인가? 민심을 어떻게 아는가? 백성들의 입을 통해 알 수 있다. 백성들이 입이 곧 민심이다. 백성들의 입을 잘 쳐다보면 백성들의 마음을 알 수 있고, 그 마음을 잘 헤아려 정책에 반영하는 것이 좋은 정치다. 민심을 얻는 리더가 성공할 확률이 높다.
반면 민심을 거스르는 리더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민심, 즉 백성의 입을 막으려는 리더는 실패는 물론 최악의 리더로 평가될 가능성이 크다. 역사가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사마천은 민심을 거스르고 백성들의 입을 막으려다 실패한 최악의 통치자들을 '사기'의 여러 곳에서 소개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900년 전 주(周) 왕조의 여왕(厲王)은 포악하고 사치하고 교만한 통치자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의 비방이 끊이질 않았다. 이를 견디지 못한 여왕은 이웃 위(衛) 나라의 무당을 불러다 자신을 비방하는 백성들을 감시하게 하고, 무당의 보고에 언급된 백성들은 잡아다 죽였다.
그러자 비방의 목소리는 점차 잦아들었다. 기고만장한 여왕은 더욱 더 엄하게 백성들의 입을 단속했고, 백성들은 내놓고 왕을 비방하지는 못한 채 어쩌다 길에서 만나면 눈짓으로 마음을 교환했다.
자신을 비방하는 백성들의 입에 재갈을 확실하게 물렸다고 생각한 여왕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조정 대신 소공(召公)에게 비방이 완전히 사라졌다며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이에 소공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충고했는데, '사기'의 이 대목은 정말이지 통치와 민심의 관계를 무엇보다 실감나게 묘사한 명문으로 꼽힌다.
소공의 충고
그것은 억지로 말을 못하게 막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일입니다. 물이 막혔다 터지면 큰 피해를 주듯이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물을 다스리는 자는 물길을 열어서 물이 흘러가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그들이 말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중략)
백성에게 입이 있는 것은 대지에 산과 강이 있어서 그곳에서 재물 등이 나오는 것과 같고, 대지에 평야며 습지며 옥토가 있어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이 마음껏 말하도록 하면 정치를 잘하고 못하고가 다 반영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좋은 일은 밀고 나가고 잘못된 일을 방지하는 것은 대지에서 재물과 먹고 입을 것을 생산하는 것 같습니다.
무릇 백성들이 속으로 생각하여 입으로 말하는 것은 속으로 많이 생각한 다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입을 막겠다면 찬성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중국 오서 중의 하나인 서경(書經)에 나오는 말이다. "하늘은 모든 일을 귀 밝게 듣고, 눈 밝게 본다. 백성의 소리는 하늘의 소리이고 민심은 천심(天心)이라 하늘에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마키아벨리는 "제대로 된 국가라면 먼저 국민의 지지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가 민심을 얻고자 한다면 이 말부터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민심이란 백성의 뜻, 곧 여론이다. 민심은 천심이라 하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는 민심을 잃은 무능한 정부는 퇴출당한다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민본주의를 최초로 제기한 이는 맹자였다. 그는 국가의 구성요건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가 백성, 둘째가 사직, 마지막이 임금이라고 했다. 천하를 얻는 방법은 민심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의 요순(堯舜)이 추앙받는 까닭도 민본주의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 선거와 민심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은 세상의 많은 지도자들이 가슴깊이 새겨야 할 교훈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큰 바위 얼굴이 바라보이는 마을에 어니스트는 언젠가 저 얼굴을 닮은 훌륭한 사람이 나타날 거라는 전설을 믿고, 그런 사람을 기다린다. 가끔 도회지에서 돈을 많이 번 누가 또는 권력이나 명성이 높은 이들이 나타나 그이라고 하여 달려가 보았으나 아니었다.
평생을 갈구하며 진실하고 겸손하게 자란 어니스트가 장년이 되었을 때 바로 그 얼굴이 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가리켜 그라고 해도, 어니스트는 자기는 아니라며 다시 그분을 기다리러 간다.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을 뽑았다. 어떤 지도자가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지도자일까? 국민을 아끼고 자기가 작은 자임을 느끼는 어니스트처럼 겸손한 자가 바로 그일 것이다.
선거는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의 가장 핵심적인 제도이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 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며 국민주권을 표방하고 있다.
선거는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로 국민은 선거를 통해 정치에 직접 참여 할 수 있다. 오늘 날 선거제도는 보통, 직접, 평등, 비밀선거로 자유선거를 표방하고 있다.
맹자는 "천하를 얻는 방법이 있으니, 그곳 백성을 얻으면 천하를 얻게 되는데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그 백성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민심을 얻지 못하고서는 그 어떤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지도자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뜻이다.
돗자리 짜던 유비가 촉나라를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항상 백성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유비는 조조에게 매번 전쟁에서 패해 도망하는 길에도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는 법"이라며 백성을 먼저 챙겼고, 그런 유비 곁으로 백성들은 점점 더 모여들었다. 맹자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또 하나의 교훈인 셈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목민관은 백성들이 있는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때론 고의로 악의적인 여론도 만들어지기에 자신에게만 유리한 여론이 아니라 공명정대한 민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목민관의 열린 귀가 이렇게 주요할진데, 하물며 국회의원에게는 제대로 된 민심의 청취가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민초들은 '나 홀로' 지도자는 원치 않는다. 매일 백성과 함께 고뇌하는 지도자를 원하고 있다. 유비의 모습처럼 전쟁에서 패배해 나눠줄 것이 없더라도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따뜻한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의 고전 '예기(禮記)'라는 책을 보면 공자가 태산 옆을 지나갈 때 한 여인이 무덤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공자가 그 연유를 묻자 여인은 대답했다. "우리는 이 산골에서 살고 있는 사람인데 처음에는 시아버님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고, 다음에는 내 남편이 그랬고, 오늘은 내 아들이 호환을 당했다고 했다. 이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공자가 "그렇다면 왜 진작 다른 곳으로 이사 가지 않았는가?"고 묻자, 그 여인은 "비록 호랑이 때문에 무서운 곳이기는 하나 가혹한 정치가 없는 곳이기에 주저앉았다"고 했다. 공자는 돌아와 제자들에게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일렀다.
약자가 살 수 없는 사회는 마침내 강자도 멸망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행복한 삶을 보장 받기 위해서는 약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선거가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한국경제를 살리고 민심을 하늘처럼 생각하고 국민이 부여한 입법기관인 국회의원직을 잘 수행해야 할 것이다.
〇 민심은 곧 천심
맹자(孟子) 만장(萬章) 편에 나오는 말이다. "하늘에서 보는 것이 우리 백성으로부터 보며 하늘의 들음이 우리 백성으로부터 듣는다." 지금 식으로 고치면 하늘에서 보고 듣는 것이 모두 국민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곧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선거는 끝났다. 이래저래 말이 많았지만 뚜껑은 열렸고 민심이 공개되었다. 명암이 엇갈린 상태에서 각자 여러 상념들이 많겠지만 긍정하든 부정하든 그게 민심이다. 천심이다. 투표율이 낮은 것조차 국민의 마음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공히 겸허하게 반성하라는 강력한 무관심이다.
민심을 어기고 잘 되는 것은 없다. 일시적으로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민심을 저버린 대가는 혹독하게 돌아가게 되어 있다. 똑똑한 정치 평론가의 뛰어난 분석보다 민심이 우선한다. 어리석은 것 같으면서도 영악한 게 민심이다.
상식을 어기는 정치, 그것은 상식이 그들을 솎아내기 마련이다.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여겨도 국민이, 하늘이 용납하지 않으면 설 수 없다. 말로 섬길 것이 아니라 몸으로 진정성을 보일 때 국민들은 그들의 말도 믿게 됨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천심, 곧 하늘 마음을 받들 자들은 백성들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 지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그들이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가려운 곳은 어딘지 면밀히 살펴야 한다. 성장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분배 또한 절실함을 깨우쳐야 한다. 국민이 잘 살지 못하는 국가의 부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왜군이 한양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한성부와 장예원이 먼저 불탔다. 두 군데 모두 노예 문서가 있는 곳이었다. 아마 평소라도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들은 열 번, 백번 불사르고 싶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전쟁을 빌미로 평소의 생각을 실천했을 뿐이다. 민심을 파악하는 일, 천심을 얻는 지름길이다.
◼ 성공한 국왕들 정조 : 민심 확보책
동양사회에서 국가 정책은 하늘을 대신해서 수행하는 것이란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하늘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곧 민심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의 생각이 명백히 틀렸다고 생각할 때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백성들을 설득하고 백성들에게 구체적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다. 이런 토대 위에서 국가 권력이 정당성을 획득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조(正祖)가 화성 신도시를 착공한 재위 18년(1794)은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살아 있었다면 환갑을 맞는 해였다. 또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지 400년 되는 해이기도 했다. 정조는 늦어도 사도세자가 칠순을 맞는 갑자년(1804)에 완공할 계획으로 착공 전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10년의 건설 기간을 잡은 셈이었다.
정약용(丁若鏞)의 연보인 사암(俟菴)선생 연보에 따르면 정조는 재위 16년 부친상으로 시묘살이를 하는 정약용에게 '수원성제(水原城制)', 즉 화성 설계안을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정약용이 과거 한강 주교(舟橋; 배다리) 설계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것을 기억한 것이다.
정약용은 중국의 윤경(尹耕)이 지은 보약(堡約)과 유성룡이 지은 성설(城設)을 참고해 성설(城設)을 작성해 올렸다. 정약용의 성설은 성의 크기에 대한 분수(分數), 길을 만드는 치도(治道), 성에 해자를 두르는 호참(壕塹) 등 여덟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설계도였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것은 '화성 건설과 관련해 단 한 명의 억울한 백성도 없게 하겠다'는 정조의 뜻에 따라 백성들의 강제 부역(賦役) 대신 임금 노동으로 건설하기로 한 점이다.
정조는 또 정약용에게 궁중에 비장한 도서집성(圖書集成)과 기기도설(奇器圖說) 를 내려 주면서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기계장치에 대해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도서집성은 청나라 강희제 때 만든 백과사전이고, 기기도설은 스위스 출신의 선교사요 과학자인 요하네스 테렌츠(J. Terrenz)가 지은 책으로 물리학의 원리와 도르래를 이용해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리는 각종 기계 장치에 관한 책이었다. 정약용이 기중기, 즉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 기중기 설계도)을 만든 것은 이처럼 정조의 구체적인 지시와 자료 제공에 의한 것이었다.
정조는 화성 착공 1년 전(1793)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위를 장용영이란 하나의 군영으로 확대했다. 노론에서 장용영 강화에 의구심을 품자 정조는 "내가 장용영을 설치한 것은 직위(直衛; 호위기구)를 중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생각지 못하는 사변에 대비하려는 것도 아니다(일득록 7권)"고 방어에 나섰다.
노론은 겉으로는 예산 부족을 핑계로 장용영 강화에 반대했지만 그 속셈은 국왕의 무력 강화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규장각 각신 정민시(鄭民始)에게 "장용영에 들어가는 한 해 비용은 저것을 줄여 이것을 마련한 것으로서 당연히 지출해야 할 비용이 아니면 따로 요리해서 경상비용 밖에서 마련한 것이니 돈 한 푼이나 쌀 한 톨도 애당초 경상비용에서 가져다 쓴 것이 없다(일득록 8)"고 설득하기도 했다.
정조가 "어공(御供; 임금에게 바치는 것)에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부터 스스로 줄이고 없애 조금씩 자금을 고생해서 마련했다"고 말한 것처럼 왕실 경비를 아껴 예산을 마련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정조가 "내가 장용영을 세운 것은 단순한 뜻이 아니라 우러러 선대의 지업(志業)을 이어받아 후대에 규범을 끼쳐 주려는 뜻이 또한 그 사이에 깃들여 있다"고 말한 것처럼 후대에 모범이 되는 조선의 최정예 군대로 육성하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장용영은 훗날 정조가 죽은 지 2년 만에 심환지로 대표되는 노론 벽파에 의해 철폐되고 만다.
장용영을 하나의 군영으로 확대한 정조는 안심하고 화성 건설의 첫 삽을 떠도 된다고 여겼다. 재위 17년(1794) 12월 정조는 영중추부사 채제공과 비변사 당상(堂上) 등을 불러 이 문제를 최종 논의했다.
정조는 "수원(水原)의 성 쌓는 역사를 나는 10년 정도면 완공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만일 적당한 사람이 감독한다면 어찌 꼭 10년이나 끌겠는가"며 "경영은 또 적임자를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정조는 화성 축조에 백성들의 강제 부역도 금지하면서 정부 예산도 전용하지 않겠다는 상반된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정조는 내탕금과 금위영와 어영청의 정번군(停番軍)이 납부하는 자금으로 재원을 마련하기로 했다.
금위영과 어영청 소속의 번상군(番上軍) 중 돈을 납부하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이들이 정번군이었다. 이 돈을 화성 축조 자금으로 사용하면 정부 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훈련대장 조심태가 정번군이 납부하는 돈이 연간 2만여 냥으로 10년이면 25만 냥이 될 것이라고 보고하자 정조는 "40만, 50만 냥 정도면 넉넉히 준공할 수 있겠는가?"고 물었다.
채제공이 "30만 냥이면 충분히 경영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고 답하자 조심태는 "30만 냥을 가지고는 부족할 듯합니다"고 정조의 면전에서 반박했다.
그러나 채제공은 정조가 적임자를 천거하라고 말하자 "훈련대장 외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습니다"고 방금 자신의 견해를 반박한 조심태를 천거했다. 조심태가 사도세자 묘를 이장하고 이장지의 백성들을 새 고을로 이주시키는 데 한치의 착오도 없이 완성했다는 이유였다.
정조는 채제공에게 "이 일은 사체가 중대하여 대신이 총괄해서 살피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일은 경 외에는 적임자가 없다"면서 성역(城役)을 총괄하게 했다.
화성은 '정조의 기획, 채제공 총괄, 조심태 실행'이란 3박자의 조화로 건설된 신도시였다. 화성은 사도세자 묘 이장이라는 정치적 성격의 도시였지만 정조는 그런 정치적 틀을 뛰어넘을 수 있는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반대론을 잠재웠다.
정조는 재위 18년(1794) 새해 첫날을 사도세자의 사당인 창덕궁 경모궁(景慕宮)에서 맞이했다. 한 해의 마지막 밤을 경모궁에서 재숙(齋宿)하며 새우고 새해 첫 행사로 사도세자에게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후 사도세자의 신령이 가호하기를 기원하며 화성 건설을 기공했던 것이다.
그달 초에는 직접 현륭원으로 가서 성묘했는데 정조실록은 "상이 간장이 끊어질 듯 흐느껴 울었다"고 전하고 있다. 현륭원 제단 앞에 설치된 사도세자의 진영(眞影; 초상화) 앞에서 몸을 땅바닥에 던지고 통곡하며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쥐고 뜯다가 손톱이 상할 지경이었고 급기야 정신을 잃고 말았다.
겨우 현륭원 참배를 마친 정조는 높은 곳에 올라 팔달산 밑 신도시 터를 바라보면서, "이곳은 본디 허허벌판으로 인가가 겨우 5, 6호였는데 지금은 1000여 호나 되는 민가가 즐비하게 찼구나. 몇 년이 안 되어 어느덧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으니 지리(地理)의 흥성함이 그 시기가 있는 모양이다"고 말했다.
정조는 화성 신도시를 모두의 축복 속에 완공하는 것이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신도시를 건설하는 데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먼저 철거당하는 백성들의 문제가 있었다. 정조는 "깃발을 꽂아놓은 곳을 보니 성 쌓을 범위를 대략 알겠으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인가를 철거하자는 의논은 좋은 계책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정조는 "이 성을 쌓는 것은 억만 년의 유구한 대계를 위해서이니 인화(人和)가 가장 귀중하다… 이미 건축한 집을 어찌 성역(城役) 때문에 철거할 수 있겠는가"고 철거에 반대했다.
백성들의 강제 부역 대신 임금 노동을 택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여기에는 강제노동이 점차 임금노동으로 전환되는 사회 변화를 내다보고 이런 변화를 선도하려는 뜻도 담겨 있었다.
그러나 부역금지와 전면적인 임금노동제를 이상에 치우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채제공까지도 정조 18년(1794) 5월 "화성 성역(城役)은 국가의 대사"라며 "백성들과 승군(僧軍)들을 며칠 동안 성역에 부역시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듯합니다"고 백성과 승려들의 부역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조는 "본부의 성역에 기어코 한 명의 백성도 노역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내가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고 반대했다. 정조는 화성 성역을 통해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할 생각이었다.
이뿐만 아니라 정조는 무더운 여름에 일꾼들이 쓰러질 것을 걱정해 어의(御醫)들과 상의해 '더위를 씻는 알약'인 척서단(滌暑丹) 4000정을 만들어 현장에 내려 보냈다. 속이 타거나 더위를 먹은 증세에 1정 또는 반 정을 정화수에 타서 마시면 기력을 회복시켜 준다는 약이었다.
그럼에도 가뭄이 계속되자 정조는 7월 "일찍이 옛사람들이 오행(五行)에 부연시키는 말을 보면 '많은 백성을 수고롭게 부려서 성읍을 일으키면 양기(陽氣)가 성하기 때문에 가물이 든다'고 했다"면서 공사를 일시 중지시켰다. 정조의 이런 구도자(求道者)적인 국정수행 자세에 반대론은 수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신도시 건설이란 거대한 역사에 단 한 명의 백성의 원망도 없게 하면서, 가뭄까지 하늘의 조짐으로 스스로를 경계하는 국왕을 향해 반대론을 펼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정조에게 국정은 지극한 신앙의 실천 그것이었다.
◼ 오자병법 제1편 도국(부국강병)
吳子兵法
고대 중국의 병법서이자, 무경칠서 중의 하나이다. 손자병법과 함께 무경칠서의 양대산맥으로 불린 병법서로, 흔히 손자병법과 하나로 묶어 손오병법(孫吳兵法)이라 칭했다.
저자는 손자를 비롯하여 춘추전국시대의 저명한 병법가 중 한 명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던 76전 무패의 오기(吳起)이다. 저서인 '오자병법'은 원래는 48편이었다 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6편뿐이다.
현재 전해지는 '오자병법'의 내용은 위나라 문후와 무후와의 대화 내용을 담은 것이다. 내용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13편의 손자병법에 비해 다수 유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서 예문지에 따르면 오자병법은 48편이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같이 등재된 손자병법이 전부 82편이라고 하는데, 오자병법 48편(혹은 68편)와 손자 13편을 포함하여 기록된 것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현재는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현재 오자병법은 현재 도국, 요적, 치병, 논장, 응변, 여사 등의 6편만 남아있을 뿐이다.
오자병법은 손자병법과 달리(적어도 현재 남아있는 6편으로 미루어 볼 때) 전략과 같은 거대 담론보다는 구체적인 용병술과 그 방법론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내용은 위 문후나 무후와 오기의 대화 내용들이다. 문후나 무후가 묻고, 이에 오기가 대답하여 이 대답에 의해 생겨난 의문이나 곤란한 상황을 왕이 물으면, 오기가 입에 기름 바른 듯이 대답한다.
이들 내용에 따르면 무경칠서 대부분이 그러하듯 전략, 전술 뿐만 아니라 치국강병을 함께 논했으며, 유실된 부분에서는 권모술수나 계략 등을 함께 논하지 않았을까 추측되고 있다.
吳子兵法 圖國 第一
● 吳起儒服, 以兵機見魏文侯. 文侯曰: 寡人不好軍旅之事.
오기가 유생(儒生) 차림으로 병법을 진언코자 위문후(魏文侯)를 배알하였다. 그런데 문후가 "과인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소." 하고 너스레를 떨자,
起曰: 臣以見占隱, 以往察來. 主君何言與心違.
오기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드러나는 현상을 보면 뒤에 숨겨진 것을 짐작할 수 있고, 과거를 미루어 미래를 살필 수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어찌 속뜻과 다른 말씀을 하십니까?
今君四時使斬離皮革, 掩以朱漆, 畫以丹靑, 爍以犀象. 冬日衣之則不溫, 夏日衣之則不涼.
지금 주군께서는 사철 내내 짐승의 가죽에 옻칠을 하고 채색을 입히며 문양을 그려 넣게 하고 계십니다. 이런 갑옷은 겨울에 입어도 따뜻하지 않고, 여름에도 시원하지 않습니다.
爲長戟二丈四尺, 短戟一丈二尺, 革車奄戶, 縵輪籠轂. 觀之於目則不麗, 乘之以田則不輕. 不識主君安用此也.
또 2장 7척이나 되는 긴 창과 1장 2척의 단창을 만들고, 수레에 가죽을 씌우고 튼튼한 바퀴를 달게 하고 계십니다. 이런 창과 전차는 보기에 아름답지도 않을 뿐더러, 사냥하기에도 그리 적합하지 않습니다. 저는 주군께서 이런 것들을 어디에 쓰려고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若以備進戰退守, 而不求能用者, 譬猶伏雞之搏狸, 乳犬之犯虎, 雖有鬪心, 隨之死矣.
그러나 만약 공격하고 방어할 만한 군사력을 충분히 갖췄다 하더라도 이를 운용할 인재가 없다면, 이는 마치 알을 품은 닭이 너구리와 싸우고, 새끼 달린 어미 개가 호랑이에게 덤비지만, 이들이 투지가 있더라도 결국 잡아먹히고 마는 경우와 같게 될 것입니다.
昔承桑氏之君, 修德廢武, 以滅其國; 有扈氏之君, 恃衆好勇, 以喪其社稷.
옛날 승상씨(承桑氏)는 덕만 닦고 군사력을 소홀히 하다가 망국의 화를 입었으며, 유호씨(有扈氏)는 군사력만 믿고 전쟁을 일삼다가 사직을 잃고 말았습니다.
明主鑒茲, 必內修文德, 外治武備.
그러므로 영명한 군주는 이러한 사실을 거울 삼아 안으로 문덕(文德)을 닦고 밖으로 무비(武備)에 힘쓰는 것입니다.
故當敵而不進, 無逮於義矣; 僵屍而哀之, 無逮於仁矣.
군주로서 적의 침략을 받고도 나아가 싸우지 않는 것은 의롭다(義) 할 수 없으며, 전쟁에 패하고 나서 죽은 병사의 시신을 보고 슬퍼하는 것은 어질다(仁) 할 수 없습니다."
於是文侯身自布席, 夫人捧觴, 醮吳起於廟, 立爲大將, 守西河.
이 말을 들은 문후는 친히 자리를 마련하고 자기 부인에게 술을 따르게 하였으며, 종묘(宗廟)로 가서 오기에게 술잔을 올려 고하게 한 뒤, 대장군으로 삼아 서하(西河)를 지키도록 하였다.
與諸侯大戰七十六, 全勝六十四, 餘則鈞解, 闢土四面, 拓地千里, 皆起之功也.
이후 위나라는 제후들과 76회의 큰 싸움을 벌여 64회의 대승을 거두고 나머지는 무승부를 이루면서 사방으로 천리나 영토를 확장하였으니, 이는 모두 오기의 공이었다.
● 吳子曰: 昔之圖國家者, 必先敎百姓而親萬民.
오자(吳子)가 말하였다. "옛날 나라를 잘 다스렸던 군주들은 반드시 먼저 백성을 교화하고 만민과 친화를 이루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것은 인화(人和)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有四不和. 不和於國, 不可以出軍; 不和於軍, 不可以出陳; 不和於陳, 不可以進戰; 不和於戰, 不可以決勝.
군주가 각별히 유념해야 할 불화(不和)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나라가 하나로 결속되어 있지 않으면 군대를 출진시켜서는 안됩니다. 둘째, 군(軍)이 하나로 뭉쳐있지 않으면 부대를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셋째, 진영(陳營)이 단합되어 있지 않으면 나아가 싸우게 해서는 안됩니다. 넷째, 전투에 임하여 일사불란하지 않으면 결전을 해서는 안됩니다.
是以有道之主, 將用其民, 先和而造大事. 不敢信其私謀, 必告於祖廟, 啓於元龜, 參之天時, 吉乃後擧. 民知君之愛其命, 惜其死.
이 때문에 영명한 군주는 반드시 나라의 화합을 이루고 나서 국가대사를 도모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혹시 군주 자신의 생각이 잘못일지 몰라 반드시 종묘에 고한 다음, 거북점을 치고 천시를 살펴 길조로 나타나야만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은 군주가 자신들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희생을 아까워한다고 믿게 됩니다.
若此之至, 而與之臨難, 則士以進死爲榮, 退生爲辱矣.
이와 같이 된 후에 군주가 전쟁에 임한다면 병사들은 용감히 싸우다 죽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물러나 살아 남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 吳子曰: 夫道者, 所以反本復始; 義者, 所以行事立功; 謀者, 所以違害就利; 要者, 所以保業守成.
오자(吳子)가 말하였다. "무릇 도(道)란 근본으로 돌아가 시작하는 것이요, 의(義)는 마땅한 일을 실행하여 성취하는 것이며, 모(謀)란 해악을 막고 이로움에 나아가는 것이요, 요(要)는 업적을 보전하고 성과를 지키는 것입니다.
若行不合道, 擧不合義, 而處大居貴, 患必及之.
만약 어느 지도자의 행위가 도에 합당하지 않고, 그 조치가 의에 부합하지 않으면서 지위만 높게 있으면 반드시 재앙이 그에 미치게 됩니다.
是以聖人綏之以道, 理之以義, 動之以禮, 撫之以仁. 此四德者, 修之則興, 廢之則衰.
그러므로 성인은 도(道)를 지켜 만민을 평안케 하고, 의(義)로써 매사를 처리하며, 예(禮)에 따라 행동하고, 인(仁)으로 포용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의 덕을 잘 닦으면 나라가 흥성하고, 이를 소홀히 하면 나라가 쇠망하였습니다.
故成湯討桀而夏民喜悅, 周武伐紂而殷人不非. 擧順天人, 故能然矣.
따라서 옛날 은(殷)나라 탕왕(湯王)이 폭군인 하(夏)나라 걸왕(傑王)을 쳤을 때 하(夏)나라 백성들은 오히려 기뻐했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쳤을 때 은(殷)나라 백성들은 이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거사는 바로 하늘과 민심에 순응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吳子曰: 凡制國治軍, 必敎之以禮, 勵之以義, 使有恥也.
오자(吳子)는 이렇게 말하였다. "무릇 국가를 잘 다듬고 군사력을 기르려면 반드시 예(禮)를 가르치고 의(義)를 고취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해야 합니다.
夫人有恥, 在大足以戰, 在小足以守矣. 然戰勝易, 守勝難.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알게 되면 크게는 적을 향해 공격하기에 충분하고, 작게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싸워서 이기기는 쉬워도 이를 지키기는 어렵습니다.
故曰; 天下戰國, 五勝者禍, 四勝者弊, 三勝者霸, 二勝者王, 一勝者帝. 是以數勝得天下者稀, 以亡者衆.
그러므로 천하가 어지러울 때 다섯 번을 싸워 이긴 나라는 결국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요, 네 번만에 이긴 나라는 피폐해질 것이며, 세 번만에 이긴 나라는 패자(覇者)가 되고, 두 번만에 이긴 나라는 왕(王)이 될 것이며, 한 번에 쳐 이긴 나라는 황제(皇帝)가 되리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여러 번 이겨서 천하를 손에 넣은 자는 드물고, 망한 자가 오히려 많습니다."
● 吳子曰: 凡兵之所起者有五. 一曰爭名, 二曰爭利, 三曰積惡, 四曰內亂, 五曰因饑.
오자(吳子)가 말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에는 다섯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명분을 다투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익을 다투기 때문이며, 셋째는 증오심이 쌓였기 때문이고, 넷째는 나라 안이 어지럽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나라에 기근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其名又有五. 一曰義兵, 二曰强兵, 三曰剛兵, 四曰暴兵, 五曰逆兵.
또한 전쟁에 임하는 군대에는 의병(義兵), 강병(强兵), 강병(剛兵), 폭병(暴兵), 역병(逆兵)의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禁暴救亂曰義, 恃衆以伐曰强, 因怒興師曰剛, 棄禮貪利曰暴, 國亂人疲, 擧事動衆曰逆.
폭정을 물리치고 혼란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군대를 '의병(義兵)'이라 하고, 군사력만 믿고 정벌에 나선 군대를 '강병(强兵)'이라 하며, 분노로 인해 일으킨 군대를 '강병(剛兵)'이라 하고, 도의를 저버리고 이익을 탐해 나선 군대를 '폭병(暴兵)'이라 하며,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이 신음하고 있는데도 동원한 군대를 '역병(逆兵)'이라 합니다.
五者之數, 各有其道. 義必以禮服, 强必以謙服, 剛必以辭服, 暴必以詐服, 逆必以權服.
이러한 다섯가지 군대에는 각각 대처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의병(義兵)에게는 반드시 예(禮)로써 대처해야 하고, 강병(强兵)에게는 겸양의 자세로 임해야 하며, 강병(剛兵)에게는 설득을 해야 하고, 폭병(暴兵)에게는 속임수로 응수하며, 역병(逆兵)에게는 권모술수를 써서 대적해야 합니다."
● 武侯問曰: 願聞治兵, 料人, 固國之道.
무후(武侯)가 물었다. "군대를 육성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나라를 튼튼히 하는 방법에 관해 의견을 듣고 싶소."
起對曰: 古之明王, 必謹君臣之禮, 飾上下之儀, 安集吏民, 順俗而敎, 簡募良材, 以備不虞.
그러자 오기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옛날의 명군들은 반드시 군신(君臣)간의 예의와 상하간의 법도를 세우고, 관리와 백성들이 저마다 자기 직분에 충실하도록 하였으며, 풍습에 따라 올바르게 가르치고, 훌륭한 인대를 가려 뽑아 부족함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昔齊桓募士五萬, 以霸諸侯; 晉文召爲前行四萬, 以獲其志; 秦繆置陷陳三萬, 以服鄰敵. 故强國之君, 必料其民.
옛날 제환공(齊桓公)은 5만의 군사로 패자(覇者)가 되었고, 진문공(晉文公)은 4만의 전위대로 자신의 뜻을 달성하였으며, 진목공(秦穆公)은 3만의 특공대로 주변 적대국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이처럼 강국의 군주들은 자기 백성들의 특성을 잘 헤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民有膽勇氣力者, 聚爲一卒; 樂以進戰效力, 以顯其忠勇者, 聚爲一卒; 能踰高超遠, 輕足善走者, 聚爲一卒; 王臣失位而欲見功於上者, 聚爲一卒; 棄城去守, 欲除其醜者, 聚爲一卒.
주군께서는 백성들 가운데 담력과 기백이 있는 자들로 한 부대[卒]를 편성하고, 기꺼이 전쟁터로 달려가 자신의 용맹과 충성심을 보이려고 하는 자들로 또 한 부대를 편성하며, 높은 곳을 잘 뛰어넘고 발이 빨라 잘 달릴 수 있는 자들로 다시 한 부대를 편성하고, 관직에 있다가 과실로 쫓겨나 다시 공명을 얻고자 하는 자들로 한 부대를 편성하며, 전에 지키던 성을 버리고 달아나 그 불명예를 씻고자 하는 자들로 한 부대를 편성하십시오.
此五者, 軍之練銳也. 有此三千人, 內出可以決圍, 外入可以屠城矣.
이렇게 편성한 다섯 부대는 그야말로 군의 정예입니다. 이러한 정예들로 3천 명만 있으면 어떠한 포위망도 돌파할 수 있으며,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 武侯問曰: 願聞陳必定, 守必固, 戰必勝之道.
무후(武侯)가 이렇게 물었다. "진을 치면 반드시 안정되고, 수비에 들어가면 반드시 견고하며,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방법에 대해 듣고 싶소."
起對曰: 立見且可, 豈直聞乎.
그러자 오기(吳起)가 대답하였다. "바로 보여 드릴수도 있는데 듣기만 하시겠습니까?
君能使賢者居上, 不肖者處下, 則陳已定矣. 民安其田宅, 親其有司, 則守已固矣. 百姓皆是吾君而非鄰國, 則戰已勝矣.
주군께서 유능한 자를 위에 앉히고, 무능한 자를 아래에 두실 수만 있다면 진지는 안정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마음 놓고 생업에 종사하며 관리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한다면 방어태세는 견고해 집니다. 또 백성들이 군주를 옳다 여기고 적국을 나쁘다 여기게 할 수만 있다면 전쟁은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 武侯嘗謀事, 群臣莫能及, 罷朝而有喜色.
하루는 무후(武侯)가 군신들과 국사를 논의하는데 신하들의 생각이 모두 자기보다 못하였으므로, 조회가 끝나자 무후는 희색이 만연하였다.
起進曰: 昔楚莊王嘗謀事, 群臣莫能及. 罷朝而有憂色. 申公問曰; 君有憂色, 何也.
이를 보고 오기(吳起)는 곧 이렇게 진언하였다. "옛날 초장왕(楚莊王)이 국사를 논의하는데 신하들 모두가 왕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조회가 끝난 후 장왕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지라 신공(申公)이란 사람이 '주군께서는 어두운 기색을 하고 계시는데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曰; 寡人聞之, 世不絶聖, 國不乏賢, 能得其師者王, 能得其友者霸. 今寡人不才, 而群臣莫及者, 楚國其殆矣.
이에 장왕이 말하기를, '과인이 듣기로 세상에는 성현이 끊이는 법이 없고, 나라에는 인재가 모자라지 않는 법이니 이런 사람을 스승으로 얻으면 천하의 왕(王)이 될 수 있고, 벗으로 삼으면 패자(覇者)가 될 수 있다고 하였소. 그런데 지금 과인이 불민한데도 신하들 모두가 나보다 못하니 우리 초나라의 앞날이 정말 암담하오' 라고 했습니다.
此楚莊王之所憂, 而君說之, 臣竊懼矣.
이처럼 초나라 장왕이 근심했던 일을 군주께서는 도리어 즐거워 하시니 저는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於是武侯有慚色.
그러자 무후의 얼굴에 무안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 一(한 일)은 ❶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❷상형문자로 一자는 '하나'나 '첫째', '오로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一자는 막대기를 옆으로 눕혀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막대기 하나를 눕혀 숫자 '하나'라 했고 두 개는 '둘'이라는 식으로 표기를 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그래서 一자는 숫자 '하나'를 뜻하지만 하나만 있는 것은 유일한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오로지'나 '모든'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一자가 부수로 지정된 글자들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모양자만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一(일)은 (1)하나 (2)한-의 뜻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나, 일 ②첫째, 첫번째 ③오로지 ④온, 전, 모든 ⑤하나의, 한결같은 ⑥다른, 또 하나의 ⑦잠시(暫時), 한번 ⑧좀, 약간(若干) ⑨만일(萬一) ⑩혹시(或時) ⑪어느 ⑫같다, 동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전체의 한 부분을 일부(一部), 한 모양이나 같은 모양을 일반(一般), 한번이나 우선 또는 잠깐을 일단(一旦),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고정(一定), 어긋남이 없이 한결같게 서로 맞음을 일치(一致), 어느 지역의 전부를 일대(一帶), 한데 묶음이나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괄(一括), 모든 것 또는 온갖 것을 일체(一切), 한 종류나 어떤 종류를 일종(一種), 한집안이나 한가족을 일가(一家), 하나로 연계된 것을 일련(一連), 모조리 쓸어버림이나 죄다 없애 버림을 일소(一掃),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란 뜻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뜻으로 조그만 자극에도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상태를 이르는 말을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를 맞추어 떨어뜨린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을 해서 두 가지 이익을 얻음을 이르는 말을 일석이조(一石二鳥), 한 번 들어 둘을 얻음 또는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일거양득(一擧兩得), 한 사람을 벌주어 백 사람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한 가지 죄와 또는 한 사람을 벌줌으로써 여러 사람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킴을 일컫는 말을 일벌백계(一罰百戒), 한 조각의 붉은 마음이란 뜻으로 한결같은 참된 정성과 변치 않는 참된 마음을 일컫는 말을 일편단심(一片丹心), 한 글자도 알지 못함을 이르는 말을 일자무식(一字無識), 한꺼번에 많은 돈을 얻는다는 뜻으로 노력함이 없이 벼락부자가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을 일확천금(一攫千金), 한 번 돌아보고도 성을 기울게 한다는 뜻으로 요염한 여자 곧 절세의 미인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일고경성(一顧傾城), 옷의 띠와 같은 물이라는 뜻으로 좁은 강이나 해협 또는 그와 같은 강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접해 있음을 이르는 말을 일의대수(一衣帶水), 밥 지을 동안의 꿈이라는 뜻으로 세상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취지몽(一炊之夢), 화살 하나로 수리 두 마리를 떨어 뜨린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로 두 가지 이득을 취함을 이르는 말을 일전쌍조(一箭雙鵰), 한 오라기의 실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질서나 체계 따위가 잘 잡혀 있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사불란(一絲不亂), 하루가 천 년 같다는 뜻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함을 이르는 말을 일일천추(一日千秋), 그물을 한번 쳐서 물고기를 모조리 잡는다는 뜻으로 한꺼번에 죄다 잡는다는 말을 일망타진(一網打盡), 생각과 성질과 처지 등이 어느 면에서 한 가지로 서로 통함이나 서로 비슷함을 일컫는 말을 일맥상통(一脈相通), 한 번 던져서 하늘이냐 땅이냐를 결정한다는 뜻으로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으로 승부를 겨룸을 일컫는 말을 일척건곤(一擲乾坤), 강물이 쏟아져 단번에 천리를 간다는 뜻으로 조금도 거침없이 빨리 진행됨 또는 문장이나 글이 명쾌함을 일컫는 말을 일사천리(一瀉千里), 하나로써 그것을 꿰뚫었다는 뜻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음 또는 막힘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감을 일컫는 말을 일이관지(一以貫之), 기쁜 일과 슬픈 일이 번갈아 일어남이나 한편 기쁘고 한편 슬픔을 일컫는 말을 일희일비(一喜一悲), 한 입으로 두 말을 한다는 뜻으로 말을 이랬다 저랬다 함을 이르는 말을 일구이언(一口二言) 등에 쓰인다.
▶️ 散(흩을 산)은 ❶회의문자로 㪔(산; 산산히 흩다, 분산시키다)과 月(월; 肉, 고기)을 더하여 토막고기, 나중에 흩어지다, 흩어지게 하다의 뜻에도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散자는 '흩어지다'나 '헤어지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散자는 㪔(흩어지다 산)자와 ⺼(육달 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㪔자는 몽둥이로 '마'를 두드려 펴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흩어지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본래 '흩어지다'라는 뜻은 㪔자가 먼저 쓰였었다. 소전에서는 여기에 肉자가 더해진 散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고기를 두드려 연하게 만든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제사 때 올리는 산적(散炙)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散자는 이렇게 고기를 다지는 모습에서 '흩어지다'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지만 흩어진다는 것은 헤어짐을 연상시켰기 때문에 후에 '헤어지다'라는 뜻도 파생되었다. 그래서 散(산)은 ①흩다(한데 모였던 것을 따로따로 떨어지게 하다), 흩뜨리다 ②한가(閑暇)롭다, 볼일이 없다 ③흩어지다, 헤어지다 ④내치다, 풀어 놓다 ⑤달아나다, 도망가다 ⑥절룩거리다 ⑦비틀거리다, 절룩거리다 ⑧나누어 주다, 부여(附與)하다 ⑨나누어지다, 분파(分派)하다 ⑩뒤범벅되다, 뒤섞여 혼잡하다 ⑪쓸모 없다 ⑫천(賤)하다, 속되다 ⑬어둡다, 밝지 아니하다 ⑭엉성하다, 소략하다 ⑮겨를, 여가(餘暇) ⑯산문 ⑰가루약 ⑱거문고 가락 ⑲문체(文體)의 이름 ⑳술잔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흩어질 만(漫), 풀 해(解),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거둘 렴(斂), 모일 회(會), 모을 취(聚), 모을 집(集)이다. 용례로는 글자의 수나 운율의 제한이 없이 자유롭게 기술하는 보통의 문장을 산문(散文), 바람을 쐬기 위하여 이리저리 거닒을 산보(散步), 가벼운 기분으로 바람을 쐬며 이리저리 거닒을 산책(散策), 여기저기 흩어져 있음을 산재(散在), 흩어져 어지러움을 산란(散亂), 어수선하여 걷잡을 수 없음을 산만(散漫), 모여 있지 않고 여럿으로 흩어짐을 산개(散開), 때때로 여기저기서 일어남을 산발(散發), 머리를 풀어 엉클어 뜨림 또는 그 머리 모양을 산발(散髮), 흩어져 없어짐을 산일(散佚), 흩어져서 따로 떨어짐을 산락(散落), 퍼져 흩어짐으로 어떤 물질 속에 다른 물질이 점차 섞여 들어가는 현상을 확산(擴散), 안개가 걷힘으로 안개가 걷히는 것처럼 흔적없이 사라짐을 무산(霧散), 따로따로 흩어짐이나 흩어지게 함을 분산(分散), 일이 없어 한가함을 한산(閑散), 떨어져 흩어짐이나 헤어짐을 이산(離散), 밖으로 퍼져서 흩어짐을 발산(發散), 모음과 흩어지게 함 또는 모여듦과 흩어짐을 집산(集散), 증발하여 흩어져 없어짐을 증산(蒸散), 놀라서 마음이 어수선 함을 경산(驚散), 탐탁지 않게 여기어 헤어짐을 소산(疏散), 세상 일을 잊어버리고 자연 속에서 한가하게 즐긴다는 말을 산려소요(散慮逍遙),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말을 산재각처(散在各處), 바람이 불어 우박이 이리 저리 흩어진다는 뜻으로 엉망으로 깨어져 흩어져 버린다는 말을 풍비박산(風飛雹散), 넋이 날아가고 넋이 흩어지다라는 뜻으로 몹시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말을 혼비백산(魂飛魄散), 이리저리 흩어져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말을 지리분산(支離分散), 구름이나 안개가 걷힐 때처럼 산산이 흩어져 흔적도 없이 됨을 이르는 말을 운소무산(雲消霧散), 헤어졌다가 모였다가 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이합집산(離合集散), 구름처럼 모이고 안개처럼 흩어진다는 뜻으로 별안간 많은 것이 모이고 흩어진다는 말을 운집무산(雲集霧散) 등에 쓰인다.
▶️ 難(어려울 난, 우거질 나)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새 추(隹; 새)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근; 난)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진흙 속에 빠진 새가 진흙에서 빠져 나오기 어렵다는 뜻이 합(合)하여 '어렵다'를 뜻한다. 본래 菫(근)과 鳥(조)를 결합한 글자 형태였으나 획수를 줄이기 위하여 難(난)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새의 이름을 가리켰다. ❷형성문자로 難자는 '어렵다'나 '꺼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難자는 堇(진흙 근)자와 隹(새 추)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堇자는 진흙 위에 사람이 올라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근, 난'으로의 발음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難자는 본래 새의 일종을 뜻하기 위해 만든 글자였다. 그러나 일찌감치 '어렵다'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새를 뜻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새의 일종을 뜻했던 글자가 왜 '어렵다'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일까? 혹시 너무도 잡기 어려웠던 새는 아니었을까? 가벼운 추측이기는 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래서 難(난, 나)은 (1)어떤 명사(名詞) 아래에 붙어서 어려운 형편이나 처지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어렵다 ②꺼리다 ③싫어하다 ④괴롭히다 ⑤물리치다 ⑥막다 ⑦힐난하다 ⑧나무라다 ⑨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⑩공경하다, 황공해하다 ⑪근심, 재앙(災殃) ⑫병란(兵亂), 난리(亂離) ⑬적, 원수(怨讐) 그리고 ⓐ우거지다(나) ⓑ굿하다(나) ⓒ어찌(나)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쓸 고(苦), 어려울 간(艱)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쉬울 이(易)이다. 용례에는 어려운 고비를 난국(難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난문(難問), 어려운 문제를 난제(難題), 전쟁이나 사고나 천재지변 따위를 당하여 살아 가기 어려운 처지에 빠진 백성을 난민(難民), 풀기가 어려움을 난해(難解), 일을 해 나가기가 어려움을 난관(難關), 무슨 일이 여러 가지 장애로 말미암아 순조롭게 진척되지 않음을 난항(難航), 꺼리거나 어려워하는 기색을 난색(難色), 어려움과 쉬움을 난이(難易), 견디어 내기 어려움을 난감(難堪), 바라기 어려움을 난망(難望), 처리하기 어려움을 난처(難處), 잊기 어렵거나 또는 잊지 못함을 난망(難忘), 어떤 사물의 해명하기 어려운 점을 난점(難點), 뭐라고 말하기 어려움을 난언(難言), 병을 고치기 어려움을 난치(難治), 이러니 저러니 옳으니 그르니 하며 시비를 따져 논하는 것을 논란(論難), 남의 잘못이나 흠 따위를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을 비난(非難), 경제적으로 몹시 어렵고 궁핍함을 곤란(困難), 뜻밖에 일어나는 불행한 일을 재난(災難), 힐문하여 비난함을 힐난(詰難), 괴로움과 어려움을 고난(苦難), 위험하고 어려움을 험난(險難), 공격하기 어려워 좀처럼 함락되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난공불락(難攻不落), 잊을 수 없는 은혜를 일컫는 말을 난망지은(難忘之恩),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누가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비슷함 또는 사물의 우열이 없다는 말로 곧 비슷하다는 말을 난형난제(難兄難弟), 마음과 몸이 고된 것을 참고 해나가는 수행을 일컫는 말을 난행고행(難行苦行), 어려운 가운데 더욱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난중지난(難中之難), 어려운 일은 반드시 쉬운 일에서 생겨난다는 말을 난사필작이(難事必作易), 어렵고 의심나는 것을 서로 묻고 대답함을 일컫는 말을 난의문답(難疑問答), 매우 얻기 어려운 물건을 일컫는 말을 난득지물(難得之物), 변명하기 어려운 사건을 일컫는 말을 난명지안(難明之案), 교화하기 어려운 어리석은 백성을 이르는 말을 난화지맹(難化之氓) 등에 쓰인다.
▶️ 聚(모을 취)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귀 이(耳; 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取(취)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聚(취)는 ①모으다, 모이다 ②거두어 들이다 ③갖추어지다 ④저축하다, 쌓다 ⑤함께 하다 ⑥무리(모여서 뭉친 한 동아리) ⑦마을, 동네 ⑧저축(貯蓄) ⑨줌(한 주먹으로 쥘 만한 분량) ⑩함께, 다같이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모을 모(募), 모일 총(叢), 둥글 단(團), 모일 준(寯), 모을 촬(撮), 모일 주(湊), 모일 회(會), 社모일 사(社), 모을 췌(萃), 모을 수(蒐), 모을 축(蓄), 모을 찬(纂), 모을 종(綜), 모을 집(緝), 모을 집(輯), 모을 집(集),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흩을 산(散)이다. 용례로는 모여서 합침 또는 한데 모아 합침을 취합(聚合), 모여들거나 모아들임을 취집(聚集), 군사들을 불러 모아 점명함을 취점(聚點), 굶주리는 백성들을 한 곳에 불러 모아 구제함을 취제(聚濟), 한 가족의 뫼를 한 군데 산에 몰아서 장사하는 일을 취골(聚骨), 군사나 인부들을 불러서 모음을 취군(聚軍), 사람들의)모임과 흩어짐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취산(聚散), 머리를 맞대고 가까이 모여 앉음을 취수(聚首), 장가를 듦이나 아내를 얻음을 취실(聚室), 몰려드는 구름을 취운(聚雲), 두 가지 이상의 형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결정형을 취형(聚形), 쌓여서 모임이나 쌓아 모음을 적취(積聚), 어떤 것을 구하여 일정한 곳에 모음을 구취(鳩聚), 한 집안 식구나 친한 사람들끼리 화목하게 한데 모임을 단취(團聚), 널리 구하여 모음을 모취(募聚), 군사를 징발하여 모음을 징취(徵聚), 군사를 훈련시키고 모아 들임을 훈취(訓聚), 생산하여 자재를 모아 저축함을 생취(生聚), 거두어 모음을 수취(收聚), 성곽을 완성하고 사람들을 모아서 거주하게 하던 일을 완취(完聚), 친구와 헤어진 지가 어느덧 십 년이나 지나감을 취산십춘(聚散十春), 모기가 떼지어 나는 소리가 뇌성을 이룬다는 취문성뢰(聚蚊成雷), 정신을 가다듬어 한군데에 모음을 취정회신(聚情會神)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