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추석날 보름달이 뜨면 정말로 기분이 좋아지는가? (2)
내가 추석 당일 날 저녁 “무슨 급한 볼 일이 있는 사람처럼” 내려왔다고 말했지만, 아무 볼 일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나는 간단하게 행장을 챙긴 후 주차장에 내려가 자동차에 싣고,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쳐넣었다. 지역은 ‘경상북도’로 지정을 하고 지명은 ‘춘양역’으로 했다. 그러나 나는 내비게이션이 시키는 대로 가지 않고 익산-장수 고속도로를 탔다. 함양 인터체인지까지 가서 광주-대구 고속도로를 이용할 참이었다. 많이 둘러가는 이 길을 택한 것은, 정상적인 길로 가면 추석 귀경객들에게 섞여 엄청난 정체를 감수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귀경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나는 일종의 귀성객이었다. 춘양은 내가 태어난 곳이니까. 물론, 지금 그곳에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을 보고 싶었기에 4시간 반이나 운전하여 그곳에 갔던 것일까?
마을 입새에서 현대식 카페 ‘봄볕’ -- 즉 춘양(春陽) -- 이 보였다. 마을 외곽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정자 ‘한수정(寒水亭)’은 그대로 있었다. 이 정자는 (아마도) 근래에 수리, 복원된 것이다. 내가 이곳에 살던 옛날 옛적에는 정자 건물은 거의 무너질 듯한 모습이었고 연못은, 부영양화(富榮養化)라고 하나, 녹조현상이라고 하나, 하여간 짙은 녹색에 걸죽한 모습이었으며 정자 둘레에는 철조망이 처져있었다. 나는 철조망의 바깥에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서 약간의 공포감을 느끼곤 하였다. 아주 어렸으니까. 나는 대, 여섯 살 때까지만 춘양에서 살았다. 춘양역 입구에 있는 작은 가게 역시 아직 존속하고 있었다. 한때 나는 이 가게에서 북어포와 백화수복을 사곤하였는데, 그 때마다 가게 주인에게 “혹시 도스코를 아시나요?”라고 묻고 싶었다. 옛날 옛적에 그 근처에 도스코네 점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스코는 당시 스무살 정도 된 처녀 아이였는데, 나를 많이 업어주었다고 한다.
월포댁(月浦宅)네 집도 그 작은 가게 혹은 도스코네 점방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내 조모는 정기적으로 월포댁에게 가서 치성을 드렸다. 치성을 드리는 행사의 클라이막스라고 보아야 하겠는데, 의식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면 월포댁은 소지(燒紙)라고 하여, 소원을 적은 종이를 태워서 날리곤 하였다. 그것이 훨훨 잘 날아가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 조모는 무속이나 민속에 많이 경도된 분이었다. 내가 체하면, 바가지에 내가 먹은 음식을 종류별로 모조리 담고는 — 정확히 어떤 음식에 체했는지를 딱 집어낼 수는 없는 거니까 —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참이나 중얼거리신 후, 나로 하여금 그 바가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침을 세 번 뱉게 하셨다. 그 때 바가지 위에는 식칼이 올려져 있었는데, 식칼도 무섭고 음식 냄새도 역했지만, 어린아이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하였다.
할머니는 추석날 저녁이면 달 보고 소원을 빌라고 시키셨을 것이고 어린 나는 시키는 대로 하였을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기억이 나는 것은, 머리가 굵어지면서 사춘기가 다가왔을 때쯤의 일이 아닌가 싶은데, 달님에게 빌라는 할머니의 지시를 거부한 일이다. 그 뒤로도 해마다 할머니는 당신이 몸소 시범을 보이시면서 나에게 그 지시를 하였지만 나는 그 때마다 거부하였다.
아까 말한 한수정이 막 끝나는 곳에 세탁소가 있었다. 여전히 옛날옛적, 60년이 더 된 옛날옛적 이야기이다. 나는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할머니와 친구분들의 이야기를 잠결에 듣곤 하였다. 대부분이 과부인 이 할머니들은 저승 꿈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 세상 떠난 남편이 나타나 다리 저쪽에서 자꾸 자기를 부르더라거나, 역시 세상 떠난 남편이 나타나 하얀 강아지를 건네 주더라거나 하는 식이다 — 싫증이 나면, 이웃집 아들이나 며느리의 흉을 보기 시작한다. 이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 세탁소집 아들이다. 이 사람은 자기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할머니라고 — 아마 자기 아이들이 그렇게 부르니까 그러지 않았나 싶지만 — 부른단다. 그것만 보아도 이 녀석이 천하에 불효자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춘양역에 도착한 것은 한낮이 다된 시간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화장실을 이용한 후 잠시 쉬었다. 옛날 옛적, 달리 갈 곳이 없는 춘양 사람들은 여름 저녁이면 역전 광장에 나와 부채질을 하면서 앉아있다가 들어가곤 하였다. 그 기억이 있어서 그랬는지, 나는 춘양에 올 때마다 역에 들렀다. 조부 산소에 성묘를 하기 위해 아버지와 같이 내려왔을 때도 그렇게 하곤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다음 다음 해 — 2012년도 -- 인가, 혼자서 조부 산소에 성묘를 왔을 때의 일이다. 나는 화장실에 들른 후, 목 운동을 하면서 역 주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연륜 있는 포풀라 나무도 쳐다보았고 역 광장에 세워진 봉화군 관광 안내 지도도 들여다보았으며 춘양역의 상징물인 듯한 커다란 백호상(白虎像)도 살펴보았다. 그 때 약간 떨어진 곳에 놓여있는 나무 벤치에 어떤 노인 한 분이 하얗게 홀로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아버지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아버지, 아버지는 돌아가셨잖아요? 나는 따지듯 혼잣말을 했지만, 다시 봐도 아버지였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곳에 다가가려면 그곳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역광장으로 나간 후 역사 정문으로 들어가 개찰구를 지나야 했다. 나는 얼어붙은 발걸음으로 개찰구를 나가서 겁먹은 눈으로 그 벤치를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이 맘 때의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 뿐,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후 나는 성묘를 갈 때마다 두려운 마음으로 그 벤치를 찾았지만, 아버지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이번에 보니, 그 벤치는 치워져 있었다.
추석날 보름달이 둥글게 떴는데도 나만 홀로 명절 기분을 내지 못하는 것은, 내가 주변 사람들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산 사람들하고건, 죽은 사람들하고건 말이다. 조모건, 부친이건, 그 분들 생전에 내가 잘못을 많이 했다. 후회가 많이 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산 사람들에게 또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후회할 일을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먼저 죽으면 나는 살아서 후회하겠지만, 내가 먼저 죽으면 나는 죽어서 후회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죽건, 한 쪽이 죽으면,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계속)
첫댓글 나는 추석날 보름달이 뜨면 정말로 기분이 좋아진다 이번 추석에도 아파트 창문에서 고개를 빼고 처다보았건만 안타깝게도 추석 보름달을 못 보고 말았다 그렇다고 기분을 상해하지는 않았다 보름달이 뜨기는 떠었으니까.. 근데 추석날 보름달을 보면 왜 기분이 좋아질까? 추석이 아니라도 밤하늘에 둥근달이 떠 있으면 무언가를 소망해 보고픈 심정이 드니 왜 그런 것 일까..여튼 나는 해보다 달이 좋다. 고로 나는 낮보다 밤이 좋다 ㅎ
후회는 무슨.... 그런 느낌이 있으면, 지금부터 잘하면 되지.... 3편 기다립니다 ㅎㅎ
조 교수님은 생각이 많으신 분이고 그것들을 이렇게 글로 나타내니 공감가는 부분도 있고 나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나도 부모님께 잘못한 일들이 다수 있고 살아 있는 사람들과 관계도 그러합니다.
살아 계신 분 께는 사과할 수 있으니 돌아가신분 들께는 마음으로만 사과하면 된다고 봅니다
그분들이 아직도 섭섭해 하시고 계시다면 그분들도 많이 불편하시겠지요. 어쨋든 나는 조교수님보다
훨씬 가볍게 생각하고 덮어두곤 잊고 살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