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모임-시 (정약용)
살구꽃이 피면 모이세/ 복숭아꽃이 처음피면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모이고/
초가을 서늘할 때 서지에 /연꽃구경을 위해 모이고/가을이 깊어져 국화가 피면 모이고/
흰눈이 내리면 다시 만나고/ 연말에 매화가 피면 모두 모이세/
-다산이 주도했던 열다섯벗들과 만든 죽란시사에서
-정기모임 일곱번이지만 비정기 모임도 자주 있었다.
누가 아들을 낳으면 자릴 마련하고, 벼슬이 높아지면 축하의 자리를
회원 중 누가 수령, 과거 급제를 하면 잔리를 벌였다.
-북과 벼루, 안주와 농익은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시를 지었다.
아! 진정 아름다운 모임이다. 강진에 유배되어 갔을 때 후진을 양성하며 그의 학문을
널리 전할 때라니 진정 훌륭하시도다.
여함이여! 겨울냇물건너듯이 유함이여!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다
1801년(순조 1)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탄압을 받고 있을 때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형제들도 끌려가 몽둥이찜질을 받았다. 특히 형 약전과 약종이 주요 인물로 지목되어 그에게 집중적으로 심문을 퍼부었다. 형관(刑官)들은 오고간 편지에 나타난 괴수가 형 약종이 아니냐고 물었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상(堂上, 당시의 심문 담당관)이 그 편지를 보았다면 알 것이 아니오? 위로는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아래로는 형을 증언할 수 없소이다. 나는 오늘 죽음이 있을 뿐이오. ······ 동생으로서 형을 증언할 수는 없소.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정조년조
위증을 하면 임금을 속여서 불충이 되고 사실대로 말하면 형을 고발하는 불륜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두고 세상 사람들은 불충불륜에서 벗어나지도 않고 결코 거짓도 아닌 명답이라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형 약종이 죽고 매부 이승훈도 죽었으나 그는 살아남아 강진에서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오랜 귀양살이 중에 《목민심서》,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 많은 저술을 남겨 이 땅의 첫손 꼽히는 개혁사상가가 되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갈라지는 양수리 위쪽 마재는 정씨들의 세거지였다. 이 마을 목사의 막내아들이 바로 우리의 위대한 스승이요 세계적인 학자인 정약용이다. 정약용이 태어날 즈음에는 비교적 나라가 평온했다. 비록 때때로 흉년이 들고 역질이 돌았지만 영조의 탕평책으로 당쟁이 그리 심하지 않았고 외침도 별로 없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났으니 그의 생애가 평탄했을 법도 하고 또 뛰어난 재주와 인품을 지녔으니 출셋길이 탄탄했을 법도 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점칠 수 없는 법이다. 상식과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세 형들 밑에서 여러 지식을 넓혔고 좀 더 자라서는 강 건너 양평에 사는 권철신에게 가서 학문을 익혔다.
그리고 광주에 사는 이가환에게서 학문의 깊이를 다지기도 했다. 권철신이나 이가환은 모두 당시의 쟁쟁한 실학자들이었고 성호 이익의 제자들이었다. 정약용은 이들에게서 성호학(星湖學)에 접근해 이익의 실학적 사상을 사숙하기 시작했다. 정약용의 실학정신은 이익을 사숙함으로써 단초를 열어가게 되었다.
소년시절에는 아버지 정재원이 지방수령으로 다니자 아버지를 따라 진주지방에서 살기도 했는데, 이때부터 지방행정을 몸소 겪었다. 스무 살 때 과거에 합격해 성균관의 유생이 되었다. 정조는 성균관의 유생들에게 늘 시험을 보였는데 이때 그에게 《중용》을 내려주고 이를 강의하게 했다. 정약용은 임금 앞에서 막힘없이 강의했고 정조는 크게 감탄했다. 호학의 군주 정조는 이때 정약용을 앞으로 중용하리라고 마음먹었다.
다음해에 그는 형수의 초상을 치르고 한강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들어오면서 이벽에게서 처음으로 서학에 관한 말과 서양의 과학지식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그는 수표교 옆에 사는 이벽의 집에서 많은 서양서적을 접하고 상당한 과학지식을 쌓기도 했다.
정약용은 1789년(정조 13) 마침내 알성시에 급제해 첫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등의 언관이 되어 임금에게 여러 정책을 상주하고 간언을 하는 소임을 맡았다. 정조는 젊고 재기발랄한 정약용을 측근에 두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을 구했다.
정조는 원통하게 죽은 아버지(사도세자)를 찾아 매년 몇 차례에 걸쳐 수원의 능행길에 올랐는데 이때 한강에는 배다리가 놓였다. 정약용은 이 배다리 설치를 맡게 되었고 이 일을 훌륭히 해냈다. 이어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수원성을 쌓을 적에 설계도와 기구를 만드는 일 또한 그가 맡았다. 그는 일꾼들이 무거운 돌을 힘겹게 지고 올리는 것을 보고 기구의 발명에 골몰했다. 또한 기하학적 방법으로 성의 거리, 높이 따위를 측량해 가장 튼튼하고 단단한 성을 쌓기 위해 연구했다. 마침내 그는 거중기와 활차(滑車, 도르래), 고륜(鼓輪, 바퀴달린 달구지) 따위를 발명해 성의 역사에 써먹었다.
정조는 성을 둘러보고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거중기를 써서 돈 4만 냥을 절약했구나.”
이때부터 그에 대한 정조의 신임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를 암행어사로 보내기도 하고, 규장각 학사나 승지 등을 맡기면서 늘 옆에 두었다. 이때 전해지는 말로는 정조는 영의정인 채제공의 뒤를 이을 인물로 장년층의 이가환, 청년층의 정약용을 꼽고 있었다고 한다. 참으로 그 임금에 그 신하가 만난 것이리라.
그러나 그의 탄탄한 앞길을 가로막는 세력들이 있었다. 1791년은 정약용이 정조를 만난 지 9년째로 접어든 해였다. 진산의 천주교도 윤지충이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은 사실이 탄로나 서학에 대한 옥사가 일어났다. 목만중, 이기경 등이 이 기회를 이용해 서학의 강독에 참석하고 서학을 받드는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을 몰아 잡으려 했다. 정약용이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은 후 첫 번째 맞는 시련이었다.
그는 문초를 받을 때 서학의 책을 읽었음을 솔직히 시인했으나, 서학을 믿지 않았음을 밝혔다. 정약용은 무사했지만 그를 몰아내려던 이기경이 도리어 경원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럴 즈음 아버지가 죽어 그는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3년의 복상을 치렀다. 그리고 조정에 나와 참의의 벼슬에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사단이 일어났다.
1794년에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잠입해 포교활동을 벌이자, 목만중은 또다시 정약용 일파를 걸고 들었다. 두 번째 시련인 셈이다. 정조는 반대파를 완전히 꺾어 누를 수 없음을 알고 정약용을 금정찰방(金井察訪)이라는 한직으로 내보냈다. 그는 천주교도가 많은 홍주 아래 한 고을의 찰방으로 가서, 천주교도들을 잘 효유해 조정의 금령을 어기지 말고 제사를 잘 받들라고 권고했다. 몇 달 뒤 그는 다시 임금 옆으로 불려와 승지의 벼슬을 받았다.
이 무렵 정조는 백성의 수탈을 일삼는 관리의 부정을 막으려 무척 고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령들에게 그 방책을 올리게 했다. 이때 정조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 정약용을 곡산부사로 보냈다. 곡산은 민란이 자주 일어나는 고을이었다. 그는 부임 이후 조세와 부역을 공평히 하고 옥사를 너그럽게 다스렸다. 명 목민관으로 이름을 처음 떨치게 되었다.
정조는 특히 그에게 황해도 일대 수령들의 부정과 선정을 가려 올리라는 밀지를 내리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정조는 또다시 그에게 승지, 형조참의 등을 주어 곁에 있게 했다. 그러나 그가 외직에 있는 동안에도 그에 대한 모략은 끊이지 않았다.
이 무렵 목만중, 이기경 일파의 사주를 받은 조화진이 “이가환, 정약용 등이 서학을 받들면서 역적을 모의한다”는 상변서를 올렸다. 정약용은 더 이상 반대파들의 모략을 견디기 어려워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바로 정약용의 마지막 벼슬길이었다.
어느 여름날 밤, 정약용이 달을 마주하고 앉았을 적에 사립문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임금이 보낸 심부름꾼이 한서선(漢書選) 열 책을 내밀었다.
“다섯 권은 집 안에 보관하시고, 다섯 권은 제목을 써서 올리라는 성상의 당부이옵니다.”
정약용은 임금의 선물을 받고 감격해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서 정조의 승하 소식을 들었다. 이제 용은 물을 잃었고 매는 죽지가 부러진 셈이다. 결국 정조와 어우러져 뒤뚱거리는 왕국을 바로잡아보려는 그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그의 성격을 한번 살펴보자. 천재가 흔히 갖기 쉬운 결점은 속단과 경솔함이다. 한번 일을 추진할 적에는 재빠르지만 일이 막히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천재는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봐주지 않고 지나치게 잘난 체하는 결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정약용은 분명 천재였다. 그런데도 그에게서는 이러한 결점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자부심이 강하고 자존에 차 있었지만 결코 싸움에 끼어들거나 남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는 당쟁에 빠지지 않았다. 비록 남인의 가계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조상이 당쟁의 중심인물이 되지 않았음을 자랑스러워했고, 아들에게도 그런 일에 가담하지 말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그는 문벌 · 당색의 타파를 열렬히 주장했고 인재의 고른 등용을 역설했다. 시파로 지목된 자신을 몰아내려는 벽파에 대해서도 비난을 퍼붓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소외되었을 적에는 감싸주기도 했다.
그를 늘 못살게 굴던 이기경이 경원으로 유배되었을 적에 그의 동료들은 통쾌히 여겼다. 그러나 정약용은 “아니다. 우리의 재앙이 시작되는 조짐이다”라고 했다. 길게 내다본 판단이었다. 그리고 늘 이기경의 집에 찾아가 그의 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기경의 어머니 상사에는 있는 돈을 다 털어 1천 냥이라는 많은 부조를 내기도 했다. 그리고 아무도 이기경을 상대하지 않자 그에게 남몰래 접근해 다정한 말을 나누기도 했다. 이것은 적을 동지로 만드는 정약용의 국량이요 지도자의 자질일 것이다.
그가 곡산부사로 부임할 무렵, 곡산의 민심이 흉흉해 민란의 조짐이 팽배해 있었다. 그때 곡산에는 이계심이라는 백성이 수령의 부정에 항의해 1천여 명을 데리고 관가에 들어와 따지고 들었다. 이에 관에서 잡아가두려고 하자 사람들은 이계심을 에워싸고 관에 대항하다가 달아났다. 정약용이 부임하는 길에 이계심이 길가에 엎드려 있다가 민막(民) 10여 조목을 올렸다. 이에 수종들이 이계심을 잡아가두자고 청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관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었으니 관을 범한 것이 아니다. 이 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관에서 천금으로 사들여야 마땅하다.
그는 이계심을 풀어주고 이계심의 민막 내용대로 문제를 해결했다. 적어도 한 고을의 민막은 말끔히 씻어주었다. 보통의 경우처럼 이계심을 징계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민란이 일어나고 수령인 정약용은 낙직했을 것이다. 이것은 물론 훌륭한 목민관의 면모이나, 달리 풀이를 하면 앞날을 내다보는 넓은 국량에서 나타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대체로 왕조시대의 목민관은 왕권을 대행한다. 따라서 목민관은 오늘날의 군수 같은 행정 책임자와는 권한이나 역할이 사뭇 달랐다. 목민관은 일반 행정 뿐만 아니라 군정[軍政, 부목(府牧) 이상] · 조세 · 경찰 · 사법 일부까지도 왕을 대신해 집행했다. 그래서 수령은 부임하기에 앞서 농상을 잘 관리하고 호구를 늘리고 학교를 일으키고 군정을 잘 다스리며 부역을 고르게 하고 송사를 간략히 하고 부정부패를 없애는 등 수령들이 지켜야 할 칠사를 외워야 했다.
정약용이 곡산부에서 첫 번째 한 일은 면포를 바치는 사람이 보는 앞에서 직접 면포를 헤아려 받았다. 그리고 면포를 재는 자가 규격보다도 두 치나 긴 것을 알아내고 곧 규격에 맞는 치수로 고쳤다.
어느 해에는 곡산 면포 값이 뛰자 관전(官錢) 2천 냥을 내 값싼 평양 등지에서 면포를 사들여 공납하고, 사온 면포 값만 백성들에게서 거두어들였다. 백성들은 이때 집집마다 송아지 한 마리 값이 저절로 굴러들어왔다. 어찌 면포의 일만일까. 모든 잘못을 바로잡고 민산(民産)에 힘쓴 탓으로 곡산은 물산이 적은 고을인데도 3년 만에 백성의 살림살이가 윤택해지고 곡산 관아의 재정은 튼튼해졌다. 이것은 그의 목민철학을 위한 첫 실험이었다.
그는 누구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린 적 없다. 다만 남들이 자신을 헐뜯으면 자명하는 상소를 올렸을 뿐이다. 이런 그의 성격 또는 처세방법은 18년이라는 긴 귀양살이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정조가 죽은 뒤 벽파들은 남인 시파를 신서파(信西派)로 몰아붙여 정약용의 집안은 거의 멸문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가 비록 관인대도의 도량을 보였으나,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권력투쟁 앞에서는 한낱 쓸모없는 수단에 불과했다.
정조의 상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 했다. 이것은 《도덕경(道德經)》의 한 대목인 “여(與)함이여,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유(猶)함이여, 너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조심조심 세상을 살아가자는 것이다. 어쩌면 정약용은 이미 폭풍이 몰아칠 정치의 기상도를 알아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조심스러움 또한 쓸모없는 처세술이 되고 말았다.
1801년 신유박해에서 셋째 형 약종은 옥사했고 그는 둘째 형 약전과 함께 기나긴 귀양살이를 떠났다. 반대파들은 그도 죽일 것을 모의했으나 일부 동료들의 노력으로 귀양에 그쳤다. 강진 일대에서 지낸 그의 귀양살이는 단조롭기 짝이 없었다. 그는 그곳 주변의 선비들과 어울려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겼고, 경세학과 목민학의 정리에 골몰했다. 그러면서 결코 정치 이야기나 조정 이야기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안동 김씨의 문벌정치가 굳어진 조정에서 언제 그에게 엉뚱한 굴레를 씌워 사약을 내릴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정약용은 이 지방 농민들의 참상을 날카롭게 관찰했다. 그리고 암담한 농민의 참상을 몸소 겪고 보았다. 관리의 부정, 조정의 부패와 무능, 민생의 간고(艱苦) 등을 시로 읊기도 하고 책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수령의 부정을 막기 위해 쓴 《목민심서》, 치도의 방책을 제시한 《경세유표》, 공정한 형벌을 위한 《흠흠신서》 그리고 나라를 살찌울 경제관계의 저술들이다. 특히 《목민심서》는 자신이 곡산부사로 있던 때의 경험과 강진의 농촌현실을 겪으면서 쓴 것으로, 불후의 명저로 꼽힌다.
그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본 농민의 생활은 부사로 있을 때에 바라보던 농민의 생활과 너무나 판이했다. 보는 감각도 달랐거니와 농촌의 사정 또한 곡산과 강진은 너무나 달랐다. 강진지방은 삼남의 쌀을 서울로 실어 나르는 조운의 중심지였고, 관리의 수탈이 가장 질기게 행해지던 곳이었다. 그러니 그의 고향 마재에서는 볼 수 없던 사정들이 여기서는 동구 거리만 걸어보아도 눈에 들어왔다. 그가 강진에 오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기민시(飢民詩)를 쓴 적이 있다. 몇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마른 목은 길쭉해 따오기 모양이요
병든 살갗 주름져 닭살 같구나
우물은 있다마는 새벽 물 긷지 않고
땔감은 있다마는 저녁밥 짓지 못해
관가의 돈 궤짝 남이 볼까 쉬쉬하니
우리 굶게 한 건 이 때문이 아니더냐
관가 마구간에 살찐 저 말은
진실로 우리의 피와 살이네
- 송재소 옮김, 《다산시선》
이것은 백성의 굶주림과 관가의 부정을 고발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 강렬하지는 않다.
그가 강진에 있을 적에는 양물을 잘라낸 남편을 둔 지어미의 한탄을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제로 이렇게 노래했다.
달려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려 해도
범 같은 문지기 버티어 있고
이정(里正)이 호통해 단벌 소만 끌려갔네
남편 문득 칼을 갈아 방 안으로 뛰어들자
붉은 피 자리에 낭자하구나
스스로 한탄하네, ‘아이 낳은 죄로구나’
말 · 돼지 거세함도 가엾다 이르는데
하물며 뒤를 잇는 사람에 있어서랴
- 송재소 옮김, 《다산시선》
이는 죽은 시아버지와 갓난아이까지 군적에 올라 있는 것을 본 지아비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현실이었다. 이것은 결코 허구가 아니었다. 이런 의식세계에서 산 정약용은 관리들을 이리와 승냥이로 빗대는 〈시랑(豺狼)〉이라는 시를 썼다. 여기서는 몇 구절만 인용해본다.
장독에는 소금 한 줌 남지 않고
뒤주에는 쌀 한 톨 없노라
큰 솥 작은 솥 다 앗아가고
숟가락 젓가락 다 훔쳐갔네
자식 이미 팔려 가고
내 아낸들 누가 사랴
내 가죽 다 벗기고
뼈마저 부수려나
부모여, 사또여
고기 먹고 쌀밥 먹고
사랑방에 기생 두어
연꽃같이 곱구나
- 송재소 옮김, 《다산시선》
이 시에서 부모는 친부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벼슬아치를 말한다. 옛적의 벼슬아치는 부모로 비유되었다. 그런데 관리의 부정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정약용은 감상과 한탄에 젖어만 있기에는 너무나 논리적인 이론가였다. 그리고 비록 유배지에 있었으나 백세(百世)의 경세가였다. 그리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나라의 폐정을 뜯어고치고, 백성의 참상을 구제하기 위해 방책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관제, 전제 등 모든 국가제도에 대한 개혁방안을 쓰고 있었다. 바로 《경세유표》였다. 이것을 중단하고 좀 더 직접적인 현실 문제를 타개해야겠다는 의지에서 1817년 《목민심서》의 집필로 붓을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붓을 댄 지 1년 만에 완성했다. 그러나 집필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어릴 적에 지방의 수령이 된 아버지를 따라 옮겨 살면서 수령의 몸가짐과 농촌의 실정을 보았고, 그의 고향인 양주, 광주 일대의 농촌 사정도 익히 알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암행어사로 전국을 돌아다닌 적도 있었고, 금정찰방과 곡산부사로 직접 백성들의 일을 맡아본 적도 있었다. 또한 장기와 강진의 유배생활에서 얻은 산지식도 있었다. 그야말로 평생 노심초사하던 일을 문자로 드러낸 것이다.
이 책은 그의 위민사상의 정수이다. 책의 이름을 《목민심서》라 했는데, 목민은 ‘백성을 살찌운다’는 뜻이요, 심서는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귀양살이 하는 한낱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군자의 학(學)은 수신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이다. ······ 요즈음 백성 다스리는 목민관들은 이익을 좇는 데에만 얼이 빠져 있고 목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찌들고 병들어 줄줄이 진구렁으로 떨어져 죽는데도 이자들은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제 몸만 살찌우고 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이런 정신에서 씌어진 이 책은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편의 이름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부임편(赴任篇)〉, ② 〈율기편(律己篇)〉, ③ 〈봉공편(奉公篇)〉, ④ 〈애민편(愛民篇)〉, ⑤ 〈이전편(吏典篇)〉, ⑥ 〈호전편(戶典篇)〉, ⑦ 〈예전편(禮典篇)〉, ⑧ 〈병전편(兵典篇)〉, ⑨ 〈형전편(刑典篇)〉, ⑩ 〈공전편(工典篇)〉, ⑪ 〈진황편(賑荒篇)〉, ⑫ 〈해관편(解官篇)〉이다.
앞의 4편은 총론으로 수령들의 몸가짐과 기본 태도, 그 다음 6편은 각론으로 실무, 마지막 2편은 주민 복지와 수령이 물러갈 때의 몸가짐 등을 밝힌 것이다. 각 편은 다시 6조로 세분되어 있어서 모두 72조로 엮었다. 한 마디로 일목요연하다. 이 책을 엮고 난 뒤 그는 “한 백성이라도 그 혜택 입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마음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애민사상에 대한 고심참담을 엿볼 수 있다.
이러는 중에 1812년 서북에서 홍경래를 중심으로 농민봉기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이곳 선비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권유하기도 하고 후원하기도 했다. 이것은 농민 편에 서 있는 그로서는 이율배반의 모습이다. 그러나 어쩌면 언제 민란의 음모자로 몰아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에 대비한 위장술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이 의병제의는 불발로 그쳤다.
18년이라는 세월을 이렇게 지낼 적에 조정에서는 그의 동료들과 아들의 건의로 해배(解配)가 논의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몇몇 사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가 암행어사로 경기감사 서용보의 부정을 캐낸 일이 있었는데, 이에 감정을 품은 서용보 등이 계속 반대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1818년 이웃 고을에 귀양 와 있던 옛 동료 김이교가 해배되어 길을 떠나기 전에 그를 찾아왔다. 하룻밤을 둘이 지내며 정담을 나누었다. 김이교는 당시 세도가 김조순의 일가붙이였다. 김이교는 정약용이 무슨 부탁 말이 있을 것을 기다렸으나 동구 밖 10여 리를 따라 나와 전송하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김이교는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나에게 부탁할 말 없소?”
이에 정약용은 김이교의 부채를 잡아당겨 시를 써주었는데 그 끝 구절이 이러했다.
대나무 몇 가닥에
새벽달 걸릴 적에
고향이 그리워서
눈물이 줄줄이 맺히오
김이교는 이 부채를 들고 어느 날 김조순을 찾아갔다. 김조순은 김이교가 한껏 펼쳐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를 빼앗아 글귀를 읽어보았다.
“이것은 정 모의 글귀로구나.”
김조순은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김조순의 주선으로 그는 긴 유배에서 풀려났다. 만약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불평이나 터뜨리며 정담이나 설왕설래했더라면 온전했을까?
그가 고향 집에 돌아왔을 적에 서용보 또한 벼슬자리에서 떨어져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정약용은 묵은 감정을 씻고 그에게 사람을 보내 간곡하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이후 그는 책을 읽고 저술에 몰두하면서 틈틈이 주변의 산천경개 구경으로 나날을 보냈다. 벼슬할 뜻은 물론 없었으며 정담을 입에 담지도 않았다. 그즈음 조정에서는 그에게 벼슬을 다시 주려고 논의를 벌였다. 그러나 벼슬살이를 다시 하던 서용보가 결단코 반대를 거듭해 실현되지 못했다.
정약용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많은 저술을 남긴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흔히 그의 대표 저술을 1표 2서(一表二書)라고 말한다. 《경세유표》와 《흠흠신서》, 《목민심서》를 일컫는 말이다. 《경세유표》가 국가의 기본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내용인 반면, 《흠흠신서》는 인명을 중시해 원옥(寃獄)이 없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인권관계의 저술이요, 《목민심서》는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수령을 통해 민생의 고통을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19세기는 이 땅에 세도문벌정치가 들어선 시기이다. 몇몇 문벌가가 번갈아 정권을 잡고 마치 나무꾼이 작대기 휘두르듯이 나라와 민중을 몰아갔다. 이런 마당에 그들은 모두 벼슬을 차지했고 남은 찌꺼기조차 정당한 방법으로 인재를 수용하지 않고 벼슬을 팔아먹었다. 그 중에서도 지방관은 돈을 주고 산 벼슬의 값을 뽑으려고 민중을 갈취했다. 지방관은 2중 3중으로 매매되어 어느 수령이 부임해서 한창 부임잔치를 벌이는 중에 다음 수령이 부임해올 정도였다.
이리하여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수탈에 견디다 못한 민중은 처음에는 다른 곳으로 도망가거나 깊은 산 속에서 화전민이 되기도 했고 섬으로 들어가 어민이 되어 수탈의 손길을 벗어나려 했다. 그러다가 도둑이 되고 명화적 떼로 뭉쳐 부호의 재물이나 관물을 빼앗았다. 그리고 끝내는 곳곳에서 떼 지어 관권에 항거했다.
앞뒤로 이런 판국이었는데도 당시의 지배자들은 정약용의 개혁방안 따위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정약용은 결코 농민을 중심으로 한 민중이 그저 팔짱만 끼고 있다가 그대로 죽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목민심서》에 제시한 그의 방안을 써주기는커녕 읽어주지도 않는 현실이 통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회갑을 맞이해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적으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알아주는 자는 적고 비방하려 드는 자는 많으니, 만약 천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한 줌의 불쏘시개로 불태워버려도 좋다.
정약용이 열세 살 적에 나라 안에 천연두가 휩쓸었다. 한번 천연두가 휩쓸고 나면 살아남는 아이들이 적었고 더러 낫는다 해도 곰보가 되었다. 이럴 적에 나라의 대비책이라고는 피막(避幕)을 지어 환자를 격리하는 정도였다. 어린 정약용이 이 병에 걸렸으니 부모는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기도 광주 땅에 사는 이헌길이라는 의원의 손을 빌려 살아났다. 이헌길은 천연두가 10~20년 단위로 유행하는 것을 보고, 여러 관계 책들을 참고하고 임상을 통해 치료법을 찾아냈다.
정약용은 그의 생명을 구해준 이헌길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천연두가 휩쓸어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리하여 이헌길의 천연두 처방책인 《을미신전》을 구해보니 찾아보기가 매우 불편했다. 급한 마당에 하나하나 내용을 다 훑어볼 수가 없어 새로 항목을 만들고 그에 따라 처방을 제시했다.
땀이 날 적에, 기갈이 들 적에, 설사를 할 적에, 구토를 할 적에, 복통이 있을 때 어떻게 응급처방을 하라는 방법을 적은 것이다. 이 중에서 몇 가지 처방을 살펴보자.
진물이 생길 때는 닭고기 · 돼지고기 · 식초 · 매운 것을 먹지 말고, 닭고기를 잘못 먹으면 평생 피부가 좁쌀처럼 돋아나 닭고기 껍질과 같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돼지고기를 잘못 먹으면 해마다 천연두가 들었던 달이 되면 설사를 많이 하게 되고, 식초를 잘못 먹으면 해마다 천연두가 들었던 달이면 기침병이 도진다고 했다. 매운 것을 잘못 먹으면 나은 뒤에도 때때로 열이 난다고 했다. 물론 민간요법을 적어 놓은 것도 있다.
정약용은 이것을 모아 《마과회통(麻科會通)》이라는 책을 썼다. 이는 이헌길에게 은혜를 갚고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천연두는 자연 기운과 시대에 따라 처방이 달라지므로 이 책의 내용도 몇십 년이 지나면 처방을 바꿔야 한다고 썼다.
그의 말처럼 19세기 말 지석영이 종두법을 들여왔을 무렵에는 기존의 처방은 효용이 반으로 줄었다. 그러나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자연의 기운과 체질에 따라 처방을 낸 이런 의술은 오늘날 민간요법으로 전승되고 있고 그 요법의 과학성 역시 부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와 같이 정약용은 인문이나 개혁사상가만이 아니었다. 그의 사고는 대단히 과학적이었고 생활 또한 그러했다.
정약용은 술을 즐겼는데 술이 화기와 원기를 돕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자신이나 아들에게 ‘불급란(不及亂, 곤드레가 되도록 취하지 않는 것)’의 수준을 지키도록 했다. 이를테면 술을 약으로 본 것이다. 정약용의 이런 과학적 사고와 생활이 모진 고난 속에서도 그를 장수하게 만든 것이리라.
그는 실로 빛나는 업적을 세웠는데 거의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 만약 그에게 유배생활이 없었다면 이런 역사적 저술이 나왔을까? 그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적에는 가산이라고는 별로 남지 않았다. 그는 가난하지만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며 더욱 학문을 연마하면서 보신에 철저했다. 이제 늙은 그였지만 그의 정적들은 한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감시하고 있었다.
그는 일흔넷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비록 파란이 겹친 생애였지만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저술을 통해 남기고 평탄하게 생애를 마무리했다. 이를 고종명(考終命)이라 한다. 이 점에서 그는 행운을 얻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죽어서도 한동안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가 사후 1백여 년 뒤인 식민지시기에 저서를 출간할 수 있었다.
오늘날 그의 학문은 다산학(茶山學)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적 관심을 받고 있다. 다산연구소가 발족되어 그의 사상을 정리하고 선양사업을 줄기차게 벌이고 있다. 그리고 그의 고향 일대와 강진의 유배지에서는 그와 관련된 유물유적을 보전 · 전시하고 있는데, 순례단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름다운 만남-1 |
글쓴이 : 박석무 |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남녀 간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만남도 많았지만, 더욱 가치 있고 생산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학자들 사이의 뜨거운 학문논쟁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야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이었습니다. 7년 동안이나 계속하면서 이기(理氣)와 심성(心性)에 대한 철학적 논쟁으로 만났던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유명한 만남을 비롯하여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와의 우정과 학문논쟁의 긴긴 만남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만남이 많았습니다. 유배초기에 10세 연하의 혜장선사와의 만남도 시가 있고 학문이 있던 만남이었지만, 혜장이 40세로 일찍 세상을 떠난 바람에 5~6년의 짧은 만남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혜장의 빈자리를 메우기라도 하려는 듯이 혜장의 사후 4년째인 1814년 53세의 다산에게 10년 연하의 43세의 학자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 : 1772-1839)가 「다산초당」을 방문해 매우 뜻 깊은 만남이 이뤄집니다. 마침 아들이 강진의 이웃고을인 영암군수로 부임하자 그곳에 와서 생활하던 문산 이재의는 다산의 명성을 듣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짓고 싶어서 1814년 3월 4일 다산초당을 찾았습니다. 1818년 다산은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왔고, 서울에 살던 이재의는 두릉(斗陵)으로 다산을 찾으면서 우정과 학문토론의 만남을 계속했습니다. 1836년 다산은 세상을 떠났고 1838년에 다산의 부인 홍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까지 집안간의 내왕이 있었으니 그들의 만남은 그때까지 계속된 아름다운 만남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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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남양주는 남인의 땅으로 정약용 외 한음( 조선시대 31세로 최연소 대제학, 37세 우의정을 지냄) 이항복, 이준경이 있음. 다산은 아들에게 "근검" 두 글자를 유산으로 남기셨습니다.
크나----------------저는 아름다운 만남만이 ㅎㅎ
춘천과도 꽤 관련이 있는 분이지요.
조카가 춘천 샘밭으로 혼인하러 와서 따라왔다가 쓴 글도 있구요
아-그렇군요.몰랐습니다.ㅎ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무궁무진이래요. 저는 참외가 익으면 만나고 살구꽃이 피면 만나고 서지에 연꽃피면 만나자고 찾아보다가 욕심이 나서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