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은 산자나 죽은 자나 붙들 수가 없습니다. 하이데거 리스펙트! 누구든 예외 없이 인생의 마지막을 맞을 것입니다. 권력이 높은 자도, 대대로 먹고 살 만큼 큰 부를 쌓은 자도, 최고의 학위를 갖은 자도, 건강하고 힘 있는 자도, 다 생을 마쳐야 할 시간이 올 것입니다. 후회 없이 생을 마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마지막을 어떤 모습으로 마무리하고 싶은가? 창세기가 48장을 지나가는 동안 아브라함이 죽고 이삭이 죽고 오늘 야곱이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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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인생이지만 오늘 또 새로운 태양이 떴고 누가 이 숭고한 시작에 저항할 수 있을까요? 동양 철학의 최고봉을 주역으로, 서양철학의 으뜸을 <헤겔의 정신현상학>으로 본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광합성 산책이나 거래처에 들려 명품을 득템하는 것이 최근 루틴인데 얼마 전에 몽클레어 패딩 10.0, 탐브라운 화이트 바지 4.0 탐브라운 재킷 8.0에 득템을 하고 귀갓길에 우묵 사거리와 열무김치를 검은 봉투에 담아 들어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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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소유하는 것이다'라는 말 뜻을 아시나요? 17살에 아놀드 파마 양말이 1700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걸 알고 쌀을 팔아 소유한 철딱서니가 필자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 압니다. 등산에 미처 살 때는 몬츄라와 아크테릭스를 입었고, 기독교에 입문하고 관심 있는 책들과 강의 테이프 자료를 40년 동안 수집했어요. 60년 <사재기 철학>은 결국 <포트폴리오>가 되었습니다. 물론 주얼리나 자동차를 다 갖진 못했지만 기회가 온다면 수집할 생각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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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대상을 인식하는 학문'인 것처럼 人生도 아느냐 모르느냐가 관건인 것 같아요. 모르면 불안하고 겁이 나지요(군대, 교도소) 적어도 내가 몰라서 겁나는 건 없어요. 한 번 실험해 보시라. 실체를 인식하면 일단 혼돈이 사그라들 것입니다. 헤겔은 '이성'-'정신'의 완전한 실현을 목표로 <절대정신>이라는 목적론적 사고를 지향합니다. 그가 말하는 의식의 3단계는 감각(충동)-지각(보편성/개별성)-오성(힘)이며, 인식-지성-이성-영성의 패러다임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핵심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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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이 목사 안수를 거절한 날라리 신도인데도 그의 <정신 현상학>은 삼위일체 '성령'의 역할을 벤치마킹하고 있고, 전체 주의자라고 오해를 받는 그의 <절대정신>은 공동체 속에서의 연속성이란 맥락으로 봐야 오해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재를 도토리로 보지 말고 미래의 떡갈나무로 봐야 한다는 부분은 애벌레가 나방이 되는 부활의 본질과 똑같아서 실은 깜짝 놀랐어요, '정신 현상학'의 변증법적 운동성 <지양>이나 <타자와 부정성>의 개념이 흥미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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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와 샤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차이는 무엇일까?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흔들리고, 부정하고, 질문하고, 다시 생성되는 존재입니다. 헤겔(즉자/대자/종합)-하이데거(존재의 심연)-사르트르(네 인생은 네가 책임지라)-데리다(의미는 계속 미뤄진다) 그리고 '지향 사격'의 뜻은 '어떤 방향을 가늠해서 사격하는 방법'이 아닙니까? 지향은 ~로 향하려는 것, 지양은~를 멈추려는 것, 그래서 지금 헤겔의 <지양>이 뭐냐고? 어떤 것을 그 자체로는 부정(비판) 하면서 오히려 한층 더 높은 단계로 긍정하는 것, 모순 대립하는 일을 통일하여 현재의 상태보다 더욱 진보하는 일이 지양입니다. 에예공! 지양을 지향하라!
2.
죽음을 향해 가는데 왜 인간은 계속 배우고 수집하고 사유하는가? 내 삶의 실패와 흔들림은 단순한 낭비였는가, 아니면 더 깊은 존재로 넘어가기 위한 지양의 과정이었는가? 죽음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이상하게도 생의 기운으로 가득합니다. 아브라함도 죽고, 이삭도 죽고, 야곱도 죽었습니다. 창세기는 결국 죽음의 책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창세기는 “다음 세대”가 이어지는 책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죽지만 이야기는 계속되고, 태양은 다시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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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죽음은 단순한 끝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다시 묻게 만드는 철학적 사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글이 죽음의 엄숙함 속에서도 몽클레어 패딩과 탐브라운 바지, 우묵사가리와 열무김치 이야기로 미끄러진다는 점입니다. 얼핏 산만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관념만으로 살지 않습니다. 철학책을 읽다가도 명품을 구경하고, 존재를 사유하다가도 검은 봉투에 반찬을 담아 옵니다. 정신과 물질, 숭고와 생활이 한 몸처럼 뒤엉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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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사재기 철학은 결국 포트폴리오가 되었습니다.” 이 고백은 소비 자랑이 아닙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가 사랑한 것들을 축적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누군가는 돈을 모으고, 누군가는 권력을 모으고, 누군가는 책과 강의와 사유를 모읍니다. 삶은 결국 “무엇을 수집하며 살았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포트폴리오는 단순한 물건 목록이 아니라, 욕망과 세계관의 지도에 가깝습니다. 헤겔 철학을 “성령의 운동성”처럼 읽어내는 부분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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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헤겔을 딱딱한 전체주의 철학자로 오해하지만, 그의 핵심은 정지된 완성이 아니라 운동입니다. 감각→지각→오성→이성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정신은 계속 자기를 부정하고 넘어섭니다. 그것이 바로 “지양(Aufhebung)”입니다. 지양은 단순 폐기가 아닙니다. 부정하면서도, 보존하고,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비판적 사고이며 질문하는 사유로 보여집니다. 씨앗이 썩지 않으면 나무가 될 수 없듯, 인간도 자기 한계를 통과해야 새로운 단계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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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헤겔은 실패를 제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실패와 모순 자체를 정신 성장의 연료로 봤습니다. 이 지점에서 Martin Heidegger, Jean-Paul Sartre, Jacques Derrida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심연 앞에서 인간의 불안을 봤고, 사르트르는 “네 인생은 네가 책임져라”라고 밀어붙였으며, 데리다는 의미가 끝없이 미뤄진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닙니다. 흔들리며 생성되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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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 사격” 비유가 좋습니다. 인간은 완벽하게 맞히는 존재가 아니라, 방향을 가늠하며 계속 쏘아가는 존재입니다. “지양을 지향하라”는 선언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오늘의 나를 부정하면서도, 그 경험 자체를 버리지 않고 더 넓은 자기로 넘어가려는 실존적 태도입니다.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인간이 계속 배우고, 수집하고, 사랑하고, 철학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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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인간은 끝나기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끝을 향해 가면서도 계속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니면 무엇에 의해 “소유당하고” 있는가?
2026.5.23.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