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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렵혀진 교회를 저는 좋아합니다. 자기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 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우리의 양심을 괴롭히는 무엇인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수많은 형제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친교에서 위로와 빛을 받지 못하고 힘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 49항 |
교회가 세상일에 관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하느님께서 세상에 관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당신 보시기에 좋도록(창세 1,31)창조하셨고,
이 세상이 당신 창조의 목적과 다르게 흘러갈 때마다 의인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 하시고
마침내 당신 아드님을 보내심으로써 세상에 결정적으로 개입하셨습니다.
이제 이 예수님의 일을 이어서 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교회 안에서만’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하여 ‘세상 안에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문제 때문에 교회 내에서 건전한 토론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복음의 빛이 비추어지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교리서는 주님의 기도를 해설하면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인간의 소명은,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에 투신하기 위해 창조주께 받은 힘과 수단을 유용하게 활용해야 하는 의무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한다.”(2820항)고 말합니다.
세상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과 멀어지려 할 때, ‘우리만 구원 받겠다’며 세상 문제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두 가지의 세상을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 주신 세상’(요한 3,16)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요한 1,10)입니다.
같은 세상이지만 우리의 태도에 따라 두 가지 모습을 지닙니다.
‘하느님의 작품인 세상’인가 하면,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려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소명은 두 번째 모습의 세상에서 박해를 받으면서도 이 세상이 첫 번째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천주교회는 초대교회 때에도,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에도
‘우상’을 강요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평등’을 싫어했던 권력가들에 의해 박해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은 신앙과 세상과의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갈등의 한복판에 서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임을 자처하면서도 불의한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박해를 각오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과거에만 적용시키려 합니다.
일부 언론들은 가톨릭교회가 정치적 사안에 관여함으로써 신자들이 떠나고 있다고 거짓 보도를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교회 전체가 탄압에 맞서 정치의 목소리를 내었던 1970-80년대에 입교자 수가 가장 급격히 늘어났을 뿐 아니라
지금도 교회의 정의로운 발언과 행동 때문에 입교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가 신자수를 늘리기 위해 사회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국민들이 이를 계기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고, 교회는 이 일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한복판에서 하느님 나라의 오심을 거스르는 부정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참된 정의와 공정을 선포하는 일은
포기할 수 없는 교회 본연의 임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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