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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056. [역경의 열매] 노경남 (1-13) 웅변을 통해 선교 향한 비전에 눈 뜨다
내가 태어난 곳은 전남 장흥군 안양면이다. 유교적인 전통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농촌마을이었기 때문에 교회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런 전형적인 씨족 마을이었다. 복음을 접하기 어려웠지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세계로 인도해 주셨다.
부모님은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온 분들이었다. 아버지는 향교 지도자로 장흥 유림의 장을 지내실 정도로 유교 전통과 문화를 강조하셨다. 그렇지만 부모님은 열린 생각과 눈높이 사상을 소유하셨다. 미군 부대에서 군복무를 하셔서 그런지 아버지는 우리 5남매에게 자율과 책임을 가르치셨다. 매사에 긍정적일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사고도 심어 주셨다.
1970년대 초반이었던 것 같다. 우리 아랫집의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후 재혼한 안주인이 들어왔는데 그분이 독실한 믿음을 갖고 계셨다. 교회는 멀리 면소재지에 있었지만 그분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교회를 다니셨다. 어린 나이의 나는 그분을 통해 복음을 듣게 되었다. 아주머니는 교회가 멀지만 철저한 신앙인인지라 어린 자녀를 데리고 다니셨다. 나와 내 동생은 그분을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됐다. 그렇게 신앙생활이 시작됐다.
무슨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도부터 하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생활은 원래 저렇게 하는 구나’ 하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다. 주일 아침, 나는 아침식사를 하면서 TV에서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님을 보게 됐다. 지금이야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엔 지상파 정규 방송에서 조 목사님의 설교방송이 나왔다.
조 목사님의 표정과 말씀에서 나온 영적인 힘은 어린 나에게 큰 도전이 됐다. ‘나도 크면 저 목사님처럼 TV에서 설교할 정도로 유명한 지도자가 될 거야.’ 그때부터 기회가 닿는 대로 성공한 사람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반장과 회장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남들 앞에 설 기회도 많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한 웅변은 말하는 데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전교생 앞에 설 기회가 자주 있었는데 그때마다 군중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어린 시절 웅변을 경험한 것은 행운이었다. 교사, 학생, 학부모 앞에서 기독교 대안학교인 굿뉴스사관학교의 운영 철학을 분명하게 소개하는 말하기 훈련을 일찌감치 받았기 때문이다. 말하기 능력은 리더십 발휘에도 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탁월한 웅변은 우리 학교의 운영철학 중 하나다. 굿뉴스사관학교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생까지 전교생이 반드시 스피치 콘테스트라는 것을 거친다. 이것은 여러 사람 앞에서 한국말과 영어로 다양한 주제를 발표할 뿐만 아니라 꿈과 비전을 펼치는 멋진 무대이다. 학교에서 영어토론 교육을 일찌감치 시작한 것도 어린 시절부터 웅변과 토론의 중요성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안양중학교를 졸업하고 장흥여고에 진학한 나는 자연스레 읍내에 있는 장흥읍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장흥읍교회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꿈을 보다 구체화하는 못자리판과 같은 역할을 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 [역경의 열매] 노경남 (1) 웅변을 통해 선교 향한 비전에 눈 뜨다
* [역경의 열매] 노경남 (2) 고교시절 새벽기도 참석하려 자취생활
* [역경의 열매] 노경남 (3) 신학교 입학 반대에 가출, 친척집 전전
* [역경의 열매] 노경남 (4) 복음 거부하던 남자를 평생 동역자로
* [역경의 열매] 노경남 (5) 교육이 복음 전파의 최선임을 깨달아
* [역경의 열매] 노경남 (6) 기도와 치료로 아들의 고개를 고치다
* [역경의 열매] 노경남 (7) 사업 부도난 다음날에도 전도나서
* [역경의 열매] 노경남 (8) 강남서 기독 영어학원 ‘무모한 도전’
* [역경의 열매] 노경남 (9) ‘말씀+영어’ 통한 학원강의 큰 호응
* [역경의 열매] 노경남 (10) “부흥 만큼 기독 지도자 양성 급선무”
* [역경의 열매] 노경남 (11) 인생의 위기에서 ‘산 진리’를 배우다
* [역경의 열매] 노경남 (12) “잘못된 성품은 고치는데 오래 걸려”
* [역경의 열매] 노경남 (13·끝) “亞 학생도 유치해 기독 리더로 키울 것
◇약력=1966년 전남 장흥 출생, 숭실대학교 교육대학원, 카이스트 S+ 컨버전스AMP과정 졸업, 수도학원 부원장·정한학원 원장 역임, 부천 굿뉴스사관학교 교장, 재단법인 새생명교육재단 이사장. 저서 ‘축복의 혁명 태아부터’ ‘조이 조이(Joy Joy) 학습법’ 등
***[역경의 열매] 노경남 (2) 고교시절 새벽기도 참석하려 자취생활
1980년대 장흥읍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은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정이 대단했다. ‘계명회’라는 이름 아래 모인 교회 학생회 멤버들은 장흥고, 장흥여고 학생회 임원과 흥사단 아카데미 임원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계명회가 주도하는 교회 행사에는 예배당이 비좁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고 많은 학생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나는 주일예배부터 시작해 수요일 밤 예배까지 빠짐없이 출석했다. 그만큼 말씀에 목말라 있었고 성령의 존재에 갈급해 있었다. 예배에서 체험한 은혜의 말씀은 혼자 간직하지 않고 고등학교에서 열심히 전파했다. 쉬는 시간마다 교실을 돌아다니며 전도를 했고, 복음 전파를 위해 1, 2학년 때는 학년대표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글로 예수를 전하고 싶은 열망에 학교 교지 편집장도 맡았다. 예수에 미쳤다고 꾸지람을 치는 선생님도 계셨다.
새벽예배에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새벽 첫차는 오전 5시30분에나 있었다. 머리를 짜낸 게 읍내에서 자취를 하는 거였다. “아버지, 제가 차멀미를 많이 하는 것 아시죠? 통학하는 데 너무 고통스러워요. 읍내에 방을 하나 구해주세요.” “그게 무슨 소리냐. 버스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인데 집을 떠나 생고생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절대 안 된다. 그것도 여자가.”
거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졸라대 읍내에서 자취를 해야 한다고 우겼다. “할머니 할아버지, 간곡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학교를 다니는데 멀미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요. 아버지를 설득해 주세요. 예?”
결국 아버지는 하늘같은 조부모님의 말씀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자취방을 얻고 처음 나간 새벽기도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강물 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강림 함이라/ 정결한 맘 영원하도록 주의 거처 되겠네/ 주님 주시는 참된 평화가 내 맘속에 넘치네/ 주의 말씀에 거센 풍랑도 잠잠하게 되도다.”(새찬송가 182장)
그때부터 새벽예배는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시간으로 자리 잡았다. 세례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84년 11월 추수감사주일 장흥읍교회에서 받았다. 그때 함께 세례를 받았던 김순희는 지금 필리핀 선교사로 남편과 함께 활동 중이다.
세례를 베풀어주신 박종욱 목사님은 세례문답 때 이런 당부를 하셨다. “평생 십일조 생활을 지키겠다는 믿음으로 살거라. 이제부턴 하늘나라 시민이 되었으므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단다.” “예, 알겠습니다. 목사님,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84년 계명회 11기 선교부장을 맡아 학생들만이 참여하는 철야기도회를 가졌다. 그때의 기도경험은 지금도 응답받는 기도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매주 토요일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친구들을 교회로 데리고 와 복음을 전했다. 같은 해 장흥 지역 흥사단 아카데미 회장도 맡았다.
믿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전도와 기도에 모든 시간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신학공부를 결심했다.
“아버지, 대학 진학과 관련해 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래, 정치나 법을 전공할 계획이지?” “저, 신학을 전공하고 싶습니다.” “뭐! 예수쟁이가 된 것도 못마땅한데 신학까지 한다고! 아예 호적을 파서 나가거라.” “아버지, 하나님은 제 인생의 전부예요.” “어이구, 종교는 취미생활로 갖는 게다. 너처럼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미쳐 사는 것처럼 어리석은 놈은 없다. 집안에서 말썽부리지 말고 어서 집에서 나가거라!”
***[역경의 열매] 노경남 (3) 신학교 입학 반대에 가출, 친척집 전전
아버지의 불호령에도 신학교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평소 화 한 번 안 내시던 아버지의 성난 모습에 놀라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할아버지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고, 하나님이 없다면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겠구나”고 하셨다.
교회가 없던 우리 마을에 1990년경 동산교회가 세워졌다. 씨족 마을에 교회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온 마을 주민들이 똘똘 뭉쳤다. “우리 마을에는 절대 교회를 세울 수 없으니 당장 나가시오!” 동네 사람들은 교회에서 나눠 준 쟁반을 모두 걷어 교회 마당에 갖다 놓을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할아버지는 “예수에 미쳐 있는 우리 손녀도 어디선가 이런 구박을 받고 있을 것”이라며 3일간 교회 부흥회에 참석해 목사님을 위로해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 개척 후 어려울 때마다 큰 힘이 되셨다.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믿고 술과 담배도 끊으시고 7년간 신앙생활을 하시다 98년 90세의 연세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나의 20대는 교회 장의자에서 기도하며 자는 날이 더 많을 만큼 전도와 기도에 전념했다. 그때 하나님은 내 삶의 전부였고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었다.
86년 나는 집을 나와 고모댁과 삼촌 집을 전전했다. 나중엔 친구 집에 들어가 87년 주경야독하며 자립하게 됐다. 고등학교 때 경시대회에 나갈 정도로 수학을 잘했기 때문에 밥벌이 수단이 됐다. 낮에는 학원 수학 강사로 일했고, 밤에는 부천에 위치한 한남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신학교 공부가 끝나면 교회에 가서 청년들과 함께 새벽까지 기도하고 토요일과 주일이면 북을 치며 온 동네 어린이들을 전도했다.
신학교 1학년이던 87년 12월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께서 상경하셨다. “여기 있다.” 신문지에 쌓인 묵직한 물건을 내려놓았다. 등록금이었다. 그렇게 반대하시던 아버지셨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었다. 그게 자식을 향한 부모 마음임을 알 수 있었다.
전철과 버스에서 전도를 했다. 남는 시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어느 날 부천역에 있는 로얄백화점 앞에서 전도를 하는데 술 취한 아저씨가 욕설을 퍼부었다. “너 예수 봤어? 너도 못 본 예수를 믿으라고 하냐 말이지. 이 XX년아. 앞으론 이런 짓 하지 말라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안절부절 못했다. 예수 믿으라고 외칠 때는 들은 척도 않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성령님, 함께해주세요. 지혜를 주세요.’ 간절히 기도한 후 담대하게 외쳤다.
“아저씨, 그렇게 말씀은 하시지만 떨리시죠? 솔직히 하나님이 아저씨 사랑하는 걸 아시기에 두려우실 겁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따지고 방해하는 이런 분까지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뒤 집에 돌아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너도 못 본 예수를 믿으라고 하냐”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어느 날 밤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주님은 나를 넓고 넓은 바다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천국의 아버지 집으로 인도해야 할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데 더욱 힘썼다. 그때 전도했던 수많은 사람 중에 훗날 남편이 될 사람이 있었다.
***[역경의 열매] 노경남 (4) 복음 거부하던 남자를 평생 동역자로
남편을 만난 것은 1987년이다. 밤에는 신학교를 다니고 낮에는 돈을 벌기 위해 제약회사에서 근무했다. 점심만 되면 식당과 사무실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 대다수 직원들은 나를 예수쟁이로 불렀다.
생산관리를 맡고 있던 남편은 복음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여기 주먹 보이죠?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나는 이 주먹만 믿습니다.” “음장호씨, 예수 믿으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천국의 기쁨을 누려보시는 게 어때요? 성경에선 예수 믿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끈질기게 복음을 전하니 그도 지쳤던 것 같다. “좋습니다. 딱 한 번만 교회에 가 볼 테니 앞으론 예수의 예자도 꺼내지 마세요. 알겠죠?” “예.” 그렇게 부천 동산교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토요일 청년 예배에 한 번만 오기로 약속돼 있었다. “저기, 내일이 주일인데 한 번만 더 와 주시면 안 돼요?” 간청을 했다. 결국 남편은 동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청년 회장까지 맡게 됐다.
나는 제약회사를 그만두고 88년 1월부터 부평북부교회 교육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때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홀로 있는 내가 무척 걱정이 되셨던 것 같다. “경남아, 아비다. 네가 걱정돼 도저히 안 되겠다. 네가 일한다는 교회인지 뭔지 한번 가보자. 네가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람도 한번 만나보고.” 전남 장흥에서 올라온 아버지는 한눈에 남편을 만족스러워하셨다. “네가 말하던 청년이 저 친구냐? 싹싹하고 성실해 보이는 게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아버지는 그 길로 남편의 고향인 충북 괴산으로 내려가 어르신을 만났다. 그리고 남편이 다녔던 고등학교까지 찾아가 담임선생님을 만나고 생활기록부까지 확인했다. “대대장을 맡았고 교육감상까지 받았다고 하더라, 이 정도 사람이면 되겠다.”
91년 3월 9일 결혼식 날이 됐다. 그날 아침 나는 남편에게 황당한 선포를 해 버렸다. “내일이 주일이라 유치부 설교를 해야 하거든요.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주중엔 꼭 나가야 할 전도활동도 있어요. 신혼여행을 나중에 가면 안 될까요?” 그 당시 우리 부부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도 아니었다. 남편은 마지못해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아무래도 나는 예수님 신부하고 결혼한 것 같아.” 신혼여행은 결혼 20주년이 되는 올해 가기로 했는데 기독교 대안학교를 운영하다 보니 아직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주례는 부천 심곡제일교회 박신환 목사님이 맡아 주셨다. 아버지는 목사님이 주례를 하시는 것을 못마땅해 하셨다. 모두가 비신자인 친척들을 앉혀 놓고 목사님이 주례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례사 도중에 ‘주례가 너무 길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남편의 꿈은 학교를 운영하며 학생들에게 세계 선교의 비전을 주는 것이다. 결혼 후 지금까지 많은 시간을 주님께 드리며 사는데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함께해 주는 남편이 있어 지금의 모든 것이 가능했다.
선교와 전도를 하다 보니 우리 집은 늘 전도 대상자로 만원이다. 매주 토요일은 집을 개방해 알파 코스를 운영하기 때문에 더욱 바쁘다. 그런데도 기쁘게 손님을 맞이해 주는 남편을 보면 힘이 난다. 부부가 상대방의 꿈을 이루어 주고자 섬길 때 갑절로 복음의 능력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역경의 열매] 노경남 (5) 교육이 복음 전파의 최선임을 깨달아
1991년 3월 결혼 후 우리 부부는 부천 심곡제일교회에 정착했다. 나는 유치부장을 맡았으며,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만 되면 전도팀을 이끌고 부천역으로 향했다.
나는 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드리고 전도현장, 수학학원, 과외 가정집을 순서대로 오가며 바쁜 하루를 보냈다. 서울 목동 학원가에서 수학 강사로, 개인과외교사를 하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가장 큰 성과는 돈보다 교육이 복음전파에 가장 좋은 접촉점 역할을 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건 부모와의 전화통화 때 여실히 드러났다.
“○○네 집이죠? 교회 유치부장 노경남입니다.” “아, 우리 아이 지금 학원 갔는데요.” “그럼 ○○가 이번 주 교회에 꼭 올 수 있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주 교회에서 달란트 잔치를….” “저기, 바쁜데 다음에 전화주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지만 학원 수학교사 입장에서 전화를 하면 부모들의 반응은 180도 달라졌다. “학원 수학교사 노경남입니다.” “아,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식사 중인데 전화를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전화 드릴게요.” “아이고, 아닙니다. 식사는 나중에 해도 괜찮습니다. 요즘 우리 ○○가 수업을 잘 받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부분을 보강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 그러지 말고 제가 지금 선생님께 찾아갈게요.” “지금은 시간이 안 되고 주일예배 후에나 가능한데요.” “그럼 제가 내일 교회로 가겠습니다.”
그때는 정말 바쁜 일과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 새벽부터 밤까지 교회 일이라면 우선적으로 달려 나갔던 것 같다. ‘몸이 으스러질지라도 하나님의 일에는 무조건 최고의 것으로 최선을 다 한다’는 게 내 신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늘 나에게 감사하고 행복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92년 1월이었다. 임신을 하고 산부인과를 찾았는데 의사선생님이 자궁근종으로 태아가 자랄 환경이 되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산모가 위험하면 최악의 경우 태아를 유산시켜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런 경우는 장애아가 태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가슴이 철썩 내려앉았다. 우리 부부는 주님께 매달리기로 했다. “여보,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잖아요. 이제 우리 의사선생님께 의존하기보다 하나님께 매달리기로 해요.” 남편은 나와 함께 새벽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다.
몇 개월 후 의사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맞이했다. “이제는 됐습니다. 아기집은 있지만 아기가 성장하지 않아 걱정했는데 마음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오, 할렐루야!”
이렇게 간절한 기도가 있었으니 우리는 분명 모세처럼 준수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출산 이후 또다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출산 후 두 달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언니, 아무래도 아기가 이상해요. 고개를 양쪽으로 돌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뭐? 아니, 정말 그러네. 여보, 빨리 이리 와서 성환이 좀 보세요.”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니 정말 아기가 고개를 돌리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거룩한 ‘성’에 빛날 ‘환’자를 써서 거룩하고 빛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바랐던 아들이지만 그런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내 신체 중 한 부분을 떼 내서라도 고치고 싶었다. 눈물이 나지만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성환이를 다른 가정에 주시지 않고 저희 가정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역경의 열매] 노경남 (6) 기도와 치료로 아들의 고개를 고치다
아들 성환이의 턱은 오른쪽 목 부위와 붙어 있을 만큼 기울어져 있었다. 다들 장애로 남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밤에 2시간씩 번갈아 가며 잠든 아이를 위해 기도했다. 잠재의식 치료법이라는 것도 병행했다. 평상시 아이의 고개를 돌리려면 통증을 크게 느껴 손도 못 댔지만 일단 수면에 들어가면 그 통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때 치료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오른쪽으로 굳어버린 고개를 조금씩 돌리고자 받침대로 성경을 사용했다. 신기하게도 6개월부터 턱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10개월 만에 성환이의 고개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경험 때문에 우리 굿뉴스사관학교는 장애우 학교인 참빛학교 등과 자매결연을 했다. 학생들은 장애인음악회 등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국제장애인 문화교류협회 행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장애우를 특별한 달란트를 지닌 소중한 사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성환이의 상태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던 93년 5월이었다. 멀쩡하시던 시아버지가 정말 참혹한 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결혼하자마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전도하기 위해 한 달에 두 번씩은 꼭 반찬을 싸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충북 괴산을 향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시아버지는 시댁에 내려갈 때마다 똑같은 말씀을 하셨다. “아가야, 난 군 복무시절 교회에 다녔고 세례까지 받았단다. 다음에 믿을 테니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자꾸나.”
결국 시아버지는 예수님을 모른 채 차디찬 시신으로 병풍 뒤에 누워 계셨다. 전도에 모든 것을 걸고 살던 나에게 예수를 믿지 않고 갑작스레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다. 망자를 앞에 두고 벌이는 술과 도박판, 곡소리…. 예수 믿지 않고 돌아가신 분을 기리는 장례식이 그렇게 암울할 수 없었다. 희망이라곤 눈 씻고 찾아 볼 수 없었다. 정말 지옥이 딴 데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시 가족들은 액운을 물리쳐야 한다며 굿을 해야 한다고 했다. 시어머니도 그럴 생각인 것 같았다. ‘시집 잘못 왔다고 한탄만 할 게 아니라 집안에 자리잡은 악한 영의 정체를 뿌리째 뽑아내야겠다.’
“어머니, 굿을 하려면 저와 인연을 끊으셔야 합니다. 당장 짐을 싸서 저희 집으로 올라가시죠.”
시어머니만이라도 예수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남편이 장남이 아님에도 내가 먼저 나서서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선포해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부천으로 모시고 올라왔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10년 단위로 3단계 장기 기도전략을 세웠다. 아들에게 축복의 명문 가문을 물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큼지막하게 써서 다음과 같이 벽에 붙여 놓았다.
‘1단계: 2003년까지 한국의 20% 안에 들어가는 명문 가문을 만든다. 2단계: 2013년까지 세계 복음화를 위해 세계 20% 안에 들어가는 명문 가문을 만든다. 3단계: 2023년까지 하나님과 만찬석을 함께할 준비된 신부들을 모아 예수님을 준비하는 가문이 된다.’
이렇게 축복의 가문이 되기 위한 장기적인 기도에 들어간 지 벌써 18년이 돼 간다. 그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돼 가고 있다. 시어머니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가족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이다. 예수를 믿지 않던 도련님은 우리 집에 올라와서 예수로 삶의 목표를 발견하고 사시에 합격했으며, 성환이는 호주에서 명문학교에 재학 중이다.
***[역경의 열매] 노경남 (7) 사업 부도난 다음날에도 전도나서
1993년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난이 또 닥쳤다. 당시 남편은 제약회사를 그만두고 건강식품 사업에 뛰어든 상태였다. 신선초 녹즙을 만들어 공급하는 업체였는데 상품명은 ‘샬롬 신선초’였다. 나는 녹즙회사의 아침조회가 끝나면 전도팀을 이끌고 부천역으로 향했다. 사업 운영에 적잖은 돈이 필요해 전도 후에는 학원 강사와 개인 과외로 돈을 보탰다.
초창기 사업이 무척 잘되다 보니 남편은 친정아버지와 오빠, 고모, 시누이의 돈까지 빌려 사업을 확장시켰다. 욕심이 지나쳤을까. 95년 남편은 전혀 모르던 녹즙기계 제조업체까지 손을 댔다. 은행 부채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96년 부도가 났다. 수중에는 단칸방 하나 얻을 돈도 없었다.
돈을 빌린 주변 친지들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우리가 사업에 실패하고 낙심하고 있을 때 친정아버지는 위로의 말씀을 해주셨다. “너희가 거기서 그만뒀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기반이라도 있었던 것이다. 만약 IMF사태 때 무너졌으면 재기의 발판마저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때 망한 게 너희에겐 복이다.”
감사한 것은 환경과 상관없이 내 안에서 평안이 유지되었고 기쁨과 감사가 넘쳤다는 것이다. 나는 부도가 난 다음날에도 전도를 나갔다. 전도대원들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막막했다. 너무 힘이 드니 체념밖에 나올 게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죽기밖에 더하겠어. 죽으면 천국 가잖아. 죽어도 승리하는 건데.’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망해도 천국’이란 생각이 들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밀려와 더욱 열심히 전도했다. 어느 날 부천역에서 전도하면서 무릎 꿇고 한없이 솟구치는 울분의 기도를 한 적도 있다.
“하나님! 제가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주님이 주실 것이 커서 제가 준비한 그릇을 버려야 한다면 지금 완전히 버리게 하시옵소서.” 삶의 환경은 어려운데 갈수록 영접자들이 많아졌고 전도가 나의 사명임을 더욱 깨닫게 됐다. 교회에서 1개 구역을 맡겨주면 2구역, 3구역으로 늘어갔고 주일학교 학생도 점점 불어났다.
학원에서는 본격적으로 계획을 세워 전도를 하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교회에서 전도팀과 함께 부천역 전도를 하고 오후 2시부터는 학원에서 학생과 학부모들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학원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전도를 해도 된다’는 조항을 꼭 넣었기 때문에 전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목요일 저녁과 토요일 저녁에도 부천역에 나가 전도팀과 전도에 매진했다.
하지만 남편의 불평은 갈수록 늘어갔다. “주님만을 위해 살았는데 하나님이 우리집을 왜 이렇게 어렵게 만드시는 거냐”는 것이었다. 예수 믿기 전 가진 쓴뿌리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술에 손을 대고 가정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부부관계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혼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극단을 달렸다. 99년 우리 부부를 붙잡아 준 것은 아들 성환이다. 환경이 어렵다 보니 아이에게 천국 비밀과 복음 사역의 중요성에 대해 더 많이 교육을 했다.
“엄마, 오늘은 집에 일찍 오세요. 꼭 보여드릴 게 있어요.” 아이가 내 손을 붙잡고 이끈 곳은 TV 앞이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인생대역전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엄마, 이 사람들 좀 보세요. 우리보다 더 힘들고 어려웠는데 참고 견디니까 좋은 일이 생겼어요. 우리집도 그렇게 될 수 있겠죠?” 나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아이의 손을 붙잡고 기도했다. 기도를 마치고 나서 바로 바깥으로 뛰어나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역경의 열매] 노경남 (8) 강남서 기독 영어학원 ‘무모한 도전’
“어른이 변하면 가문이 변하지만 아이들이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이것은 1992년부터 부천 심곡제일교회 유치부장을 맡으면서 자주 외쳤던 말이다. 나의 꿈은 아이들이 게임보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교사들을 앉혀놓고 이런 말을 했다.
“저의 꿈은 교회에 오는 것이 아이들에게 취미이고 특기인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말씀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기대하며 오늘도 ‘선생님이 널 사랑해’라고 말해줍시다.”
교회학교는 시간이 지날수록 크게 부흥했고 많은 어린이들이 몰려들었다. 토요일이면 전 교사들이 모여 기도회를 갖고, 학교 앞 전도를 했다. 오후 2시30분부터 찬양과 영어예배를 드렸고 3시30분부터는 축구 영어 드럼 수화 피아노 찬양 풍선아트 바이올린 등 동아리 활동을 했다. 교사들은 동아리 활동이 끝난 후 기도회를 갖고 주일예배를 준비했다. 예배와 찬양 담당자들은 주일 오전 6시부터 준비했다.
이렇게 정성을 다하다 보니 예배가 끝나도 집에 가기 싫어하는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생겨났다. “교회가 학교였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이처럼 행복한 주일학교가 된 데는 전적으로 매주 전도와 기도를 쉬지 않는 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그맨 박수홍씨도 우리 교회의 주일학교가 부흥할 수 있도록 ‘퀴즈대잔치’ ‘친구 초청 잔치’ 등의 행사를 진행하면서 도움을 줬다.
이때 주일학교 부흥의 전도비결과 관리, 간단한 영어설교를 가미한 영어찬양 주일예배, 성품교육을 통한 학부모 전도, 명문가 운동 등은 타 교회에도 전수시켰다. 나는 2004년까지 교회학교 일을 맡다가 당진 동일교회에서 3년간 주일학교 부흥을 위해 헌신했다.
2000년 1월부터 학원 강의와 과외가 끝나면 교회로 가서 자정기도와 새벽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다음세대에 대한 교육과 교회학교 부흥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당시 이런 기도를 드렸다.
“주님, 세상의 문화는 거대한 기획과 제작비로 어린이와 청소년의 넋을 빼앗고 있습니다. 가수가 음반을 판매하기 위해 1억원이 넘는 제작비로 뮤직비디오를 찍어 홍보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교회 교육현장에서는 창조자 하나님을 알리는 데 얼마나 인색한지 모릅니다. 엄청난 속도로 변화되고 있는 세상을 헤쳐가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분별력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덕성을 갖춘 행복한 아이들로 키우게 해 주십시오.”
당시 수도학원 부원장으로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본토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이 자꾸 마음에 와 닿았다. 영어로 복음을 전하는 학원을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8월 수동기도원에서 작정기도를 하는데 성령의 강한 역사가 일어났다.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내가 너의 길을 형통케 하리라. 너를 통해 세계만방에 복음을 전하게 하리라.” 응답을 받고 학원 강사와 과외로 번 돈으로 무작정 서울 개포동에 400㎡(약 120평)짜리 사무실을 계약했다.
사실 유명 학원 간 ‘별들의 전쟁’이 벌어지는 강남 한복판에서 기독교 전문 영어학원을 설립한다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나 다름없었다. 주변 사람들은 큰 손해를 입을 것이라며 만류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노경남 (9) ‘말씀+영어’ 통한 학원강의 큰 호응
‘세상만물을 창조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영어를 만든 분도 하나님이신데 당연히 영어를 익히는 데 하나님을 아는 것보다 더 빠른 길은 없다.’ 나의 생각은 확고했다. 2001년 10월 학원 공사를 마치고 ‘성경으로 가르치는 영어학원’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학생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두 명의 학생이 왔지만 200명이 온 것처럼 최선을 다해 가르쳤다. 모든 수업은 영어 찬양과 직접 제작한 성경 이야기 책, 워크북 등을 사용했다. 학부모님들의 반응은 생각보다 좋았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아이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에 등록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자, 어린이 여러분 심장, 마음이라는 영어단어 ‘Heart’는 ‘He’(그)와 ‘art’(작품)가 합쳐진 것으로 이해하세요. 집, 가정을 뜻하는 ‘House’는 ‘Holy’(거룩)와 ‘use’(사용하다)가 합쳐진 것이고요. 감사하다(Thank)라는 단어는 ‘think’(생각하다)라는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생각(think)의 중심에 내(I)가 아닌 아담(Adam)을 창조한 하나님을 생각할 때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단어에 성경 이야기를 입혀서 복음을 전했다. 성경 영어를 배우다 보면 그 대상이 결국 하나님이므로 찬양도 하고 기도도 드렸다.
영어 찬양과 성경을 통해 영어를 배우다 보니 전도는 자연스럽게 됐다. 당시 불교신자였던 경기여고 선생님은 아들과 딸을 우리 학원에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님을 믿게 됐다. 그분은 2003년 장신대에서 열린 굿뉴스 사업설명회에 오셔서 간증까지 해 주시기도 했다. 심지어 증산교 교주의 증손자도 학원을 다녔다. 수강생 중의 70%는 비신자였으며, 수업 도중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영어교육을 활용해 복음을 전하는 게 탄력이 붙었다. 성경영어 교재를 유치부부터 중등부까지 재미있게 엮어가며 100종류의 교재를 만들었다.
교육은 마치 영적 전투와 같았다. 영어교육 시장에 일반인도 있지만 포교를 목적으로 한 이단들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다. 더 많은 기도의 동역자가 필요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많은 기도의 동역자들을 붙여주셨다.
2001년부터 수요 예배를 마치고 할렐루야교회 유아부실에서 중보기도 모임을 가졌다. 당시 총신대,장신대, 합신대, 기독신대 등에 재학 중인 전도사들로 구성된 라마나욧 중보기도 모임에서 기도제목을 나누고 다음세대와 교회학교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오후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매주 기도모임을 하면서 영적인 동역자들의 도움이 얼마나 큰지 실감했다. 전국에서 활동하는 교육전도사들의 갖가지 기도제목이 모였고 응답 받는 역사도 늘어났다. 매주 목요일이면 청계산으로 이동, 상도중앙교회 주일학교 교사들과 함께 산이 떠나가라 기도했다.
2002년부터는 ‘GNE 굿뉴스 영어’라는 이름으로 영어학원 프랜차이즈 사업을 출범시켰다. 전국 교회에 영어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보급해 온 교회영어연구원 박요섭 원장과 종로학원에서 학원컨설팅으로 경험을 축적한 정평기 본부장과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모두 학원가에서 15년 이상 일해 온 프로강사였다. 영어예배를 통해 주일학교 부흥운동까지 전개하면서 1년에 200일 이상은 세미나와 집회를 인도하러 다닌 것 같다. 2003년 6∼7월에는 영어 주일학교 교사강습회를 서울과 영남 지역에서 개최했다. 교사 강습회를 통해 도전을 받은 많은 교사들은 이메일과 편지를 보내왔다.
***[역경의 열매] 노경남 (10) “부흥 만큼 기독 지도자 양성 급선무”
내가 기독교 대안교육 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총신대 김의원 전 총장님 덕분이다. 나는 ‘영어주일학교 교사 양성을 위한 과정’을 2003년 3월부터 서울 사당동 총신대 사회교육원에서 진행했다. 그때 김 총장님은 나를 불러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 주셨다.
“나라의 미래는 교육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며 기독교 세계관을 지닌 아이들을 길러내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사명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행위(Doing)가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Being)가 먼저 이뤄질 수 있도록 돕는 교사를 양성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노 선생님이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해 주십시오.”
김 총장님은 지금도 굿뉴스사관학교가 매년 진행하고 있는 ‘굿뉴스 명문가 빕(VIP) 캠프’에 오셔서 하나님의 사람이 될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차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정복할 수 있는 5차원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획일화된 대량생산보다 다품종 소량생산 제품이 가치가 높은 세상입니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 정보화시대 학생 개개인의 소질에 맞는 다품종 소량생산 교육을 해야 합니다.”
김 총장님과 대화를 하면서 교회학교의 부흥도 중요하지만 시대를 이끌고 갈 기독교 지도자를 길러내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기독교 사관학교의 비전이 꿈틀거렸다. ‘하나님께서 기독교 사관생도를 길러내는 사명감을 주신다면 절대 순종해야겠다.’ 바른 인격과 신앙, 실력을 갖춘 지도자 양성의 터전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을 하니 이 나라의 미래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2003년 9월 그동안 학원 강사와 과외교사를 하면서 터득한 경험을 모아 ‘조이 조이(Joy Joy) 학습법’(요단출판사)이라는 책을 냈다. ‘Joy’는 먼저 주님을 위해(Jesus), 그 다음은 다른 사람을 위해(Others), 마지막으로 자신을 위해(Yourself) 살라는 의미가 있었다.
학생들은 수업 후 1시간이 지나면 교과 내용을 50%이상 잊어버리고 1개월이 지나면 배운 것의 대부분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시험이 닥치면 벼락치기를 하는 습관이 배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업이 끝난 직후 5분 내 복습을 하면 1개월간 지속되고, 1개월 후 복습을 하면 6개월간 기억이 지속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수험생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념을 이해하고 기억해 문제를 풀어내는 능력에 있다. 결국 ‘Joy Joy 학습법’은 수업내용을 잊어버리기 전에 형광펜과 색깔 볼펜을 활용해 중요 내용과 잘 모르는 내용, 틀린 문제를 구별해 복습하는 공부법이었다. 양손에 볼펜과 형광펜을 쥐고 중요 부분과 모르는 부분에 설명을 쓰거나 밑줄을 치게 함으로써 집중할 수 있게 했다.
책 출간 이후 서울과 대전 울산 목포 제주 극동방송에서 공개강좌를 진행했다. 하지만 강좌를 진행하면서 금세 한계에 부닥치게 됐다. 학생과 학부모 모두 공부의 기술만 배우기 위해 몰려들었지 성품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이대론 안 되겠다. 영성과 인격, 실력을 갖춘 지도자를 길러내기 위해선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
영어주일학교 프로그램 보급과 Joy Joy 학습법 강연 등으로 1년에 250일 이상 외부 강연을 나갔다. 그렇게 동분서주하게 지내던 2005년 9월 내 인생의 최대 고비가 닥쳐왔다. 프렌차이즈 학원 교사 교육을 하던 중 부모와 함께 왔던 16개월 된 아이가 4층 난간에서 추락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노경남 (11) 인생의 위기에서 ‘산 진리’를 배우다
부모가 잠시 방심하고 있던 사이 계단에서 추락한 아이는 서울 중앙대병원 중환자실로 이송됐다. 한 달 동안 뇌와 복부에 7차례의 대수술을 진행했다. 죄책감이 컸다. ‘주님, 왜 이렇게 큰 어려움을 저에게 주신 겁니까.’ 묻고 또 물었다. 밤이 새도록 기도하고 나면 아침에 해결될 것 같은데 여전히 상황은 똑같았다. 더구나 아이의 엄마는 임신 7개월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 부부를 우리 집으로 데려와 보살폈다.
아이는 결국 1개월 만에 하늘나라로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을 보냈지만 아이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정지됐다. 마치 내가 죽은 것 같았다. 충격에서 벗어나는 데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나님의 비밀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죄책감에서 자유하십시오.” 김의원 전 총신대 총장님과 이영환 대전한밭제일교회 목사님의 적극적인 위로로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김 총장님은 나와 남편에게 집중적인 성경공부와 기도모임을 권했다. 2006년 4월 고난주간에 김 총장님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요한복음과 창세기, 출애굽기를 가르쳐 주셨다. “혼자 부흥회와 세미나를 다니며 교육 사업을 할 게 아니라 부부가 같이 진행하십시오.”
성경공부를 하면서 남편과 나는 새롭게 태어나는 기쁨을 누렸다. 삶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남편은 방황을 마치고 과거의 신앙을 되찾고자 열심을 내기 시작했다. 과거 사업실패로 소원했던 부부관계도 회복됐다. 위기 속에서 여호와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법을 배웠고 매일 삶 속에서 진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깨닫게 됐다.
4월 말 미국 LA에서 열린 오순절 100주년기념 아주사 부흥성회에 참석할 기회가 생겼다. 그곳에서 금식기도를 하면서 “세계적으로 쓰임 받는 나의 청지기, 지도자를 길러내라”는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을 받았다.
집회가 없을 때는 그 지역의 학교를 탐방했다. 락아카데미라는 흑인 학교를 방문했는데 교육철학은 탁월했지만 시설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우리 학교는 미국을 이끌고 갈 지도자를 육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운동장이 없는데 체육은 어디서 하죠?” “체육은 근처 체육관에서 하면 됩니다.”
그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학교를 하려면 큼지막한 운동장과 모든 시설을 완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운동장 없는 학교는 상상조차 않았던 것이다. ‘맞다! 수영은 수영장에 가서 하면 되고, 농구나 배구는 체육관에 가서 배우면 된다. 학교는 건물이 아니라 철학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어서 빨리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 고난과 연단을 극복할 수 있는 신앙의 힘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어야겠다.’
사고가 난 건물에서 계속 있을 수 없어 지금의 부천 상동 건물로 이전했다. 기독교 교육 콘텐츠는 탄탄했지만 돈도 사람도 없었다. 막막했다. 나는 울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나님, 저는 지금 깜깜한 터널에 있습니다. 하지만 희미한 빛 하나가 있는데 그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붙들고 열방에 비추겠습니다.”
정말 신기한 일은 기독교 교육으로 이 땅의 복음화에 힘써달라며 전혀 알지 못하던 많은 사람들이 돕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떤 분은 산삼을 들고 왔고 어떤 분은 학교식당을 마련해 주셨다. 실력과 인격을 갖춘 신실한 교사도 모였다. 드디어 2007년 3월 3일 굿뉴스사관학교를 개교하게 됐다. 신기한 것은 외부에 광고 한번 못했지만 42명의 학생들이 온 점이다.
***[역경의 열매] 노경남 (12) “잘못된 성품은 고치는데 오래 걸려”
2007년 개교 후 주변에서 많은 걱정을 했다. 수중에 교사들에게 밥 한끼 살 돈도 없으면서 덜컥 개교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난 걱정이 없었다. 이 시대를 이끌어갈 진정한 지도자를 길러내라는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 방법을 주실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굿뉴스사관학교는 지도자가 갖춰야 할 성품과 철저한 신앙훈련에 모든 교육 커리큘럼을 맞췄다. 리더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긍정적 사고와 올바른 언어습관 등 모든 삶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 속에서 바른 신앙과 바른 인격, 바른 실력이 나와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교사는 물론 학부모에게 성품을 무엇보다 강조했던 이유가 있다.
“공부를 먼저 하고 나중에 성품을 가르치려는 부모님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성적이 떨어지면 노력하면 다시 올릴 수 있지만 성품이 한번 잘못되면 그걸 고치는 데 몇 년, 수십 년, 아니 평생이 걸릴 수 있습니다.”
우리 학교에 오면 첫 인사말이 “Hello? You are VIP(안녕하세요? 당신은 귀빈입니다)”이다. 모든 사람을 아브라함처럼 축복의 통로로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귀빈으로 생각하고 높여주는 거룩한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매일 아침 큐티와 찬양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12명의 교사와 42명의 학생들은 ‘우리가 다른 이유’와 “수업이 예배입니다”를 외치며 시작했다. ‘우리가 다른 이유’는 ‘첫째, 말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둘째, 자신의 소지품 정리정돈을 철저히 합니다. 셋째, 수업시간에 늦지 않습니다. 넷째, 만나는 친구들에게 먼저 반갑게 인사합니다’이다. 점심시간에는 성경말씀을 외워야 식사를 할 수 있게 했다. 특히 학교에서 중점적으로 훈련한 것은 스피치 콘테스트(Speech Contest)였다. 대중 앞에서 말하는 훈련을 해 자신감은 물론 리더로서 자신의 의견을 품위 있게 표현하는 훈련을 철저히 시켰다.
처음 우리학교에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로 제한했다. 입시학원에서 고등학생의 성품이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을 오랫동안 봐 왔기 때문에 고학년은 받지 않았다.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선 성품도 좋아야 했지만 공부를 위해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는 각서를 제출해야 했다. 진짜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 수업이 끝나면 배운 것을 바로 테스트하고 그날 배운 공부는 Joy Joy 학습법에 따라 귀가학습을 했다.
월 1회 학부모의 날인 ‘페어런츠 데이(Parents day)’를 정해 부모와 의사소통하는 수준을 넘어 신앙훈련까지 모색했다. 학부모 조사를 해봤는데 편부모 크리스천이 많았다. 육적으로 양 부모가 있었지만 영적으론 한쪽 부모만 있었던 것이다. 행복한 가정의 모델을 제시하고 명문가문을 이루는 교육을 했다. 매주 화요 어머니 기도회를 열고 기도의 기적도 체험했다.
이런 분위기다 보니 가정이 점차 변화됐고 믿지 않는 친지를 전도하기 위해 매주 토요일이면 우리 집에서 알파 코스를 개최했다. 자연스럽게 교회 설립 이야기가 나왔고 그해 7월 학교 내에 김의원 전 총신대 총장님을 모시고 ‘우리교회’를 개척하게 됐다.
8월에는 교사와 학생회 임원 등 17명이 태국과 캄보디아 선교에 나섰다. 학생들은 태권도 종이접기 연극 등을 통해 복음을 자연스럽게 전했다. 2008년과 2009년에는 몽골로 40여명의 교사와 학생이 선교를 떠났다. 2010년에는 미국과 멕시코 비전트립을 떠나 노방전도를 하고 고아원과 홈리스 사역에 동참했다.
***[역경의 열매] 노경남 (13·끝) “亞 학생도 유치해 기독 리더로 키울 것
개교 초기만 해도 대안학교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많이 바뀌었지만 4년 전만 해도 대안학교는 문제가 있거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이 다니는 그런 곳으로 인식돼 있었다.
그러나 바른 언어 습관과 성품·신앙 훈련은 하나님의 창조적 역사를 가져왔다. 서너 살 위의 형과 언니들이 어린 동생을 섬기고 사랑하는 빅 브러더(Big brother)·빅 시스터(Big sister) 제도, 부모의 영적 훈련장인 페어런츠 데이(Parents day), 학부모를 위한 알파코스는 그 효과가 컸다.
단적인 예로 주지 스님을 지낸 분의 자녀는 학교에서 세례를 받고 비전 트립을 다녀왔다. 학생뿐만 아니라 부모도 복음으로 변화된 역사가 일어났다. 비신자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알파코스를 통해 거식증에 걸린 아버지가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지금 그분의 건강은 많이 회복됐고 신앙생활도 잘하고 있다. 이렇듯 영혼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전도에 주력하니 사도행전 29장을 쓰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변화는 학생과 학부모에게만 일어난 게 아니다. 개교 당시 건물 5∼6층을 쓰던 학교는 4∼7층으로 규모가 확대됐다. 처음엔 12명의 교사와 42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교직원 47명과 학생 200여명으로 덩치가 커졌다. 지난 3월에는 화성 봉담 지구에 분교도 개교했다.
학교는 이 땅의 아버지들을 위한 효 정신을 되살리고자 영화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최근 개봉됐던 ‘회초리’는 굿뉴스사관학교가 수억원의 제작비를 투입하고 학생 40명이 출연해 만든 교육영화다. 영화에서 꼬마훈장 송이(진지희)가 간절하게 바라는 ‘어머니’는 인자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학교 고문을 맡고 계신 김의원 전 총신대 총장님은 다음 세대 지도자 육성이라는 학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나에게 늘 두 가지 포인트를 강조하신다. 그것은 신앙교육의 효율성과 3단계 교육과정의 중요성이다.
“교장 선생님, 아이들이 변하면 부모가 변하고 부모가 변하면 사회가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교육의 탁월성이자 효율성입니다. 신앙에 기초한 3단계 교육과정은 한 사람의 인생을 온전히 변화시켜 지도자로 세웁니다. 초등학생은 성품을 다듬어 좋은 친구를 사귀게 하고, 중학생은 극기 훈련을 통해 신체를 단련시켜야 합니다. 고등학생은 맞춤형 입시로 자신의 달란트를 세계에 펼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이런 체계적인 교육이 있을 때 학생이 민족과 세계에 쓰임 받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의 꿈은 이제 아시아 학생들을 지도자로 길러내 각 나라로 파송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고 기독교 세계관을 지닌 국제적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다. 중국 일본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등 미래 기독교 지도자가 될 아시아 학생을 유치해 한국 학생들과 함께 신앙교육을 시키고 싶다. 많은 학부모와 교회가 이 일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제2의, 제3의 굿뉴스사관학교가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세워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늘도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이렇게 당부한다. “기독교 명문 가정은 적어도 2∼3대가 지나야 만들어집니다. 교육은 말이 아닌 삶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앙교육을 배제한 채 선행학습과 단답식 교육을 진행하다 보면 지식 전달에 그치기 십상입니다. 당연히 명문 가정을 만들기 어렵습니다. 바른 신앙, 바른 인격, 앞선 실력으로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기독교 명문 가정을 만드는 데 주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