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 섬의 중심지인 크노소스와 파이스토스 및 말리아에는 넓은 직사각형의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궁전들이 세워졌는데
이들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건축된 것 같다.
당시에 쓰인 문자 중 처음 발견된 것은 BC 2000년경의 것으로
크레타에서 발견되었다. 이 문자는 동물이나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림문자와 상형문자 이다
크레타에서는 상형문자와 더불어 이것을 좀더 단순하게 도안한 선문자(線文字)도 사용되고 있었다.
후기(BC 1700~1450경)에는 좀더 발달한 선문자가 크레타 섬의 여러 지역에서 쓰였다.
이것은 BC 15세기말부터 크레타 섬과 본토에서 널리 쓰인
변형 선문자(선문자 B)와 구별하기 위해 선문자 A라고 부른다
크노소스 점토판에는 인사(人事) 문제와 동물, 직물, 무기,
저장된 보물, 종교적 제물 등에 관한 처리 내용이 써 있다.
BC 18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갈 무렵 크레타 섬에는 여러 가지 재난이 일어났다. 크노소스와 말리아의 궁전이 손상되었고 다른 중심지들은 화재로 파괴되었다. 그 원인은 자연 재해나 내란, 또는 본토에 사는 그리스인의 침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재난이 일어난 뒤에도 200~300년 동안 에게 해 지역의 청동기문명은 가장 발전했고, 이 시기에 크레타 문명도 절정에 이르렀다.
궁전들은 전보다 더욱 웅장하고 화려하게 복구되었으며 긴 직사각형의 안뜰을 둘러싸고 수많은 방들이 세워졌다. 그 궁전들은 대부분 2층이나 3층이었고 크노소스에는 자그마치 5층짜리 궁전도 있었던 것 같다.
파이스토스에 있는 아름다운 제례용 계단은 궁전 구내에 제례의식을 위한 구역이 따로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제식을 위한 방의 회반죽을 칠한 벽은 화려한 색깔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 그림에는 대부분 정교한 옷차림을 한 여신이 그려져 있고 여신 배경에는 신성한 춤이나 황소 뛰어넘기 같은 의식 장면이 나타나 있다.
황소 뛰어넘기는 종교나 마술에 근거한 행위였던 것 같다.
이 그림들의 크기는 실물 크기에서부터 세로 길이 5cm밖에
안되는 작은 것까지 다양하다.
벽화는 크레타 예술가들이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룬 예술 분야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단편(斷片)밖에 남아 있지 않다.
꽃병·도장·장신구 따위를 만드는 소규모 예술의 수준은 고고학적 유물에 더욱 잘 나타나 있다.
BC 1600년부터 BC 15세기말까지 절정에 이르렀던 크레타 문명은 또 한차례의 잇따른 재난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BC 1500년경 테라 섬의 화산이 폭발해 주변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다. 크노소스는 이 화산 분화에 앞서서, 또는 분화와 함께 잇따라 일어난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크레타 섬 북부 해안의 마을들은 지진으로 인한 해일이 덮친 것 같다. 후세의 그리이스 전설에 나오는 데우칼리온의 대홍수이야기는 이 무렵 역시 본토 해안을 덮친 해일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화산이 폭발한 뒤에도 크레타 섬은 BC 15세기 중엽까지 비교적 번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BC 15세기 중엽 크레타 섬의 중부와 남부에 있는 많은 주요 도시들이 화재로 불타버렸고 그후는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폐허에 집을 다시 짓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 존재했던 사회 질서가 완전히 허물어진 것을 의미한다. 폐허가 된 궁터에서 금붙이나 은붙이가 거의 발견되지 않은 사실로 보아 크레타 섬의 많은 궁전과 집들은 화재로 파괴되기 전에 이미 약탈당한 듯하다.
이 섬을 약탈한 사람들은 아마 본토에서 건너온 정복자들이었을 것이다. 이 정복자들은 애초에 크레타 섬에서 배웠던 관료제도를
크레타 섬에 다시 강요했을 가능성이 있다.
BC 14세기와 13세기의 국가는 왕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1명의 군사지도자와 전차장교들이 이끄는 군대를 두었다.
도시는 지방관리들을 우두머리로 하는 계급사회였다.
개인주택의 유적이 궁전이 있는 중심지와 궁전이 없는 시골에서
모두 발견되었고, 미케네의 집들을 비롯한 일부 개인주택은 선문자 B로 쓴 주택 등기문서를 가지고 있었다.
중심지와 중심지를 잇는 도로망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갖추어져 있었다.
BC 15세기부터 본토의 그리스인들이 동쪽을 탐험하기 시작해
동부의 많은 전초기지에 살던 크레타 이주민들을 대신했다.
히타이트인들은 그리스인들의 작전과 침입을 뚜렷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리스인들을 아히와야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것은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아카이오스(아카이아)족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유명한 트로이 전쟁은 청동기시대 전체에 걸친 일련의 관계와
갈등이 집약된 것인지도 모른다.
에게 청동기시대의 종교
청동기시대에 에게 해 지역에서 숭배한 으뜸 신은
분명 여신이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문헌에 '말'이나 '곡식'을 뜻하는
형용사를 수반한 여신에 대한 언급이 있다.
본토의 궁전에는 여신에게 바칠 선물을 들고 행진하는 장면이
대부분 그려져 있다.
크레타 섬에서 발견된 점토여신상은
보통 BC 15~12세기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문헌을 보면 제우스와 포세이돈·아테나·
아르테미스·아레스·헤르메스 및 디오니소스를 비롯한
그리스 후기의 많은 신들이 이 무렵에 이미 자리를 잡았고,
단순히 우상 그 자체보다는 훨씬 면밀하게 공들여 만든 구체적인 신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청동기시대 말기가 언어 자체뿐 아니라 종교와 제식에서도 뒤이은 그리이스 시대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시대에는 죽음의 세계에 관해 2가지 생각이 존재했다.
각각 크레타와 미케네의 전통을 대표하는 이 2가지 생각은 끝내
융합하지 않았으며 별개의 노래와 이야기 속에
따로따로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