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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래는 기대로 알고, 과거는 기억으로 안다는 것 아닙니까? <시간>의 원조가 구석기 시대 사람도 아닌 아우구스티누스였다니 의외입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시간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 묻지 않으면 알 것 같고, 누가 물으면 설명할 수 없다.” 곰곰 생각해보면 맞는 말입니다. 시간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 시간을 알고 있는데, 정작 시간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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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지원금 10만원 받겠다고 아침부터 농협에 다녀왔습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첫 손님인 모양입니다. “오늘 같은 우중충한 날씨가 너무 좋아요.” “난 해 뜨는 날이 더 좋던데.” 참 까칠합니다. 그냥 “나도” 하면 될 것을. 예공! 네 카톡에 메모하듯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네 공부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네 <시간>을 슬쩍 들여다보고 싶어서다. 하루 10시간 공부는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세계다. 공부는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자기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조직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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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 스태프가 왔고, 우리 숍 에이스 Yoouje는 아토피 때문에 휴가를 냈다. 병원도 두 번이나 데려갔지만 그런 병이 어디 쉽게 낫겠느냐. 살아간다는 건 몸 하나만으로도 참 버거운 일이다. 집에 오는 길, 약국 유리창이 유난히 반짝였습니다. 내 또래 국장이 운영하는 곳인데, 가끔 딸 같은 아가씨가 알바를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어요. 이 동네는 라이센스 하나로 온 가족이 먹고사는구나. 니 엄마도 치위생사 말고 약국을 했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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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늘 지나간 가능성들을 뒤늦게 돌아보게 만듭니다. ‘틸란드시아’라는 식물을 아니? 원산지가 태국인데 뿌리가 없습니다. 오직 몸통만 매달려 살아갑니다. 죽을까 봐 시도 때도 없이 분무를 해주고 있는데, 보다 보니 꼭 현대인 같습니다. 과거의 뿌리는 약해지고 미래는 불안한데, 현재라는 몸통 하나 붙들고 겨우 버티는 존재 말입니다. 밤에는 재혁이가 빵집 알바를 마치고 빵을 한가득 가져왔습니다. 12시간 일당 20만원. 고급 인력이 빵집 알바를 한다고 투덜거려도 밉지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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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는 빵은 육개장집에 나눠줬더니 좋아라합니다. 결국 인간은 거창한 철학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나눔과 피곤과 생계와 추억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모두 현재를 산다고 말하는데, 사실 현재만 사는 인간은 거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20년 전 상처를 오늘처럼 끌어안고 살고, 어떤 사람은 오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힙니다. 그래서 칸트는 <시간>을 인간 인식의 형식이라 했고,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 자체가 <시간성>이라고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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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시계 속 <시간>이 아니라 기억과 기대 속 <시간>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반면 아이작 뉴턴은 세상에 아무 변화가 없어도 <시간>은 흐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그것을 무너뜨렸습니다. <시간>은 관찰자와 운동과 세계를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은 인간 없이 설명되기 어렵습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말조차 인간이 만든 개념이니까요. 정신분석학은 또 말합니다. 인간의 기억은 끊임없이 왜곡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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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시간>”이 아니라 “해석된 <시간>” 속에서 삽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란 시계의 숫자가 아니라, 존재의 떨림에 가깝다고 봅니다. 노년은 특히 그렇습니다. 젊을 때는 미래로 달려가느라 바빴다면, 이제는 추억을 꺼내 보며 자기 삶의 포트폴리오를 정리하게 됩니다. 내가 왜 아직도 드라마를 다시 보고, 골목 풍경을 기억하고, 오래된 대사를 곱씹고, 새벽마다 글을 쓰는지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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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저장하려는 게 아닙니다. 내 존재를 <시간> 속에서 의미화하려는 것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생성의 <시간>을 말했고, 하이데거는 존재는 <시간> 없이 해명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시간>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 <시간>을 해석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대인은 계절마다 축제를 열며 <시간>을 영원의 현재로 붙들어두려 했습니다. 예배 역시 그런 의미였겠지요. 그러나 현대인은 <시간>을 의미화하지 못한 채 시간에 치여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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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의식하지 못하면 삶의 의미도 흐려집니다. 상처 없는 인간도 없습니다. 그러니 삶은 결국 스토리여야 합니다. 어떤 <시간>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는가. 무엇을 잊지 못했고, 무엇을 아직 기대하고 있는가. 미래는 기대로 오고, 과거는 기억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인간은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시간성> 속에서 늙어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
미래는기대로, 과거는 기억으로 알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시간의 원조가 구석기 시대 아우구티누스(어거스틴, 354-430)이었다니 뜻밖입니다. 예주의 공부, 더 정확히는 예주의 사유가 궁금합니다. 하루 10시간의 공부는 그 자체로 어마어나한 가치입니다. 정부에서 주는 지원금 받겠다고(10만) 일어나자마자 농협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꿀을 보았어요. 진짜일까? 가짜일까? 식당에 도착했어요. 낌새가 내가 첫 손님인 모양이에요. "오늘 같은(우중충한) 날씨가 너무 좋아요!(난 해뜨는 날이 더 좋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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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하기는... 그냥 "나도"하면 될 것을. 예공! 무슨 상황인고 하니 네 카톡으로 매모장을 대신 쓰면 일상을 공유할 수 있을까 싶어서 네 어그리 없이 기록하고 있다. 목표는 네 공부에 방해하지 않고 너의 공간에 침투하려는 거야. 어제 새 스태프가 왔고 우리 숍 에이스 Yoouje(태국, 40세, 싱글맘)가 아토피 때문에 휴가를 냈구나. 아비가 병원에 두 번이나 데리고 가서 진로를 받았는데 아토피가 어디 쉽게 치료되는 병이 아니잖냐...불쌍한 년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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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홈하는 길에 보니 약국 유리창이 광택이 나더구나. 내 또래 국장이 운영하는 약국인데 종종 딸일지 싶은 아가씨가 알바를 할 때도 있어요. 이 동네는 라이센스 하나로 온 가족이 먹고 사는 거 보면서 니 엄마도 치위생사가 아닌 약국을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차성(박대영 아내)이도 약국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sk 점방에 들려 동영상 업로드 방법을 물어보니 다음에서 지원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하더라. 어쩐지...예공! 들었지? 괜히 시간 낭비 하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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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란드시아'라는 이 발칙한 식물을 아니? 원산지가 태국인데 뿌리가 없어요. 밑도 끝도 없다고...야자수 껍질 머리-가짜 잎사귀, 오직 몸통만 실체야. 죽을까봐 불안해서 시도 때도 없이 분무를 해주고 있어요. 어제 밤 늦게 재혁이가 빵집 알바를 다녀오면서 빵을 한가득 가져다주는 바람에 졸지에 빵부자가 됐구나. 고급 인력이 20일째 빵집 알바를 한다녀서 투덜투덜 대는데 밉지가 않구나. 알바 일당 20만원(12시간)은 거금이 아닙니까? "내타냐후 체포"를 검토해보라는 대통령을 리스펙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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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든 반수생이든 리더는 <대>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최승호 노조위원장 잘 생겼네요. 예주야! 넌 어때? 처치 곤란한 빵을 육계장 집에 갔다줬더니 좋아라합니다. 나이스 나눔. 아우구스누스의 시간론, 칸트의 감각 내적 기관의 시간,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실존론적 시간으로서의 시간성, 들뢰즈의 다중적 자아로써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시간론, 그리고 물리학자의 시간과 2026년 5월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시간은 어떻게 연결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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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시간에 대한 물음에 완벽하게 답한 학자는 없어요. 시간은 실체가 아님에는 동의하지만 시간이란 인간이 질문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시간에 대해 탐구하고 질문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론>에선 시간을 "아무도 묻지 않음"이라고 답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알고 있지만 시간에 대해 답을 쉽게 하지 못하지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고 규정할 수도 없으니까요. 해서 절대 무의 공간에서는 시간에 대해 이야기가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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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해체하며 상대성 이론의 아인슈타인 마저 시공간을 빛의 속도로 관찰할 수 있는 관찰자가 아니라면 역시 관찰이 불가능합니다. 시간에 대한 원초적 질문이 없다면 시간은 개념화 되지 못합니다. 다양한 물체가 전제하지 않는 한 시간은 나타나지 않아요. 이는 어쩌면 인간만을 위한 단어일 수 있지 않을까. 불츠만의 엔트로피를 이야기 하더라도, 빅뱅을 이야기 하더라도, 시간만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 점에 한해 물리학은 철학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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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기대로, 과거는 기억으로...그러나 우리가 현재라고 하는 순간, 과거로 돌아가버리는 시간론은 물리학의 개념보다는 철학의 시간 개념으로 사유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인간의 인식이 우주적 시간을 통제한다고 보는 것이 과학 발전에 기여했고 기여할 것입니다. 그 이전 라이프니츠는 "시간은 인간의 생각의 산물이다"고 했는데 칸트(시간은 인간의 인식 감각의 내적 형식이다) 와 같이 간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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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뉴턴은 이 세계의 다양한 만물의 변화가 없어도 시간은 흐른다고 했다는 군요.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 시간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의하여 박살이 났어요, 빛의 속도로 변화하고 시공간은 끊임 없이 바귀는 관찰자의 존재가 중요해진 것입니다. 이렇듯 시간은 세계가 전제 되어야만 합니다. 또한 시간은 인간에게 있어 완전히 다르게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과거-현재-미래의 개념 또한 인간이 만들었으니까요.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의 과거에 대한 기억이 왜곡 됨을 지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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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시간성+정신분석학의 시간성을 합하면 인간의 삶의 시간성이 보여짐이고 어쩌면 이것이 들뢰즈의 시간성일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인간이 현재를 살아갈 수 없음의 뜻에선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가 포함된 현재를 산다고 할 수 있다고 보면 어떨까요? 아무리 현재가 그 순간마다 형성된다하더라도, 어떠한 기억에 의해 매 순간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나 현재를 살아가지 못하고 과거를 언제나 현재로 소환시키는 사람은 현재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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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야망에 빠지는 사람은 과거와 현재를 미래에 내던질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삶에서만 이 시간 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르크스도 유토피아의 계급 없는 사회를 미래에 상정하여 현재를 희생시켰고, 이러한 미래의 희망 역시 가시적인 신의 나라와 같은 미래를 상정하고 과거와 현재를 그곳에 희생시킨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현존재)의 시간성은 결코 과거-현재-미래가 다 따로 있듯, 이 역시 인간만이 탐구, 기억, 망각, 기대하는 인간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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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칸트-하이데거의 관점에서는 들뢰즈의 시간성과 다중적 자아로써 인간 무의식의 세계에도 들어와 있다고 보여집니다. 에예공! 삶은 희노애락을 수반한다. 때론 해결하지 못한 과거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아직 이루지 못한 미래를 끊임없이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온전한 현재를 사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시간을 사는 게 아니라, 시간성을 살아가는 것이 현재이고, 현제는 엄연히 과거와 미래가 공존한다. 기억으로 기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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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희 시 중에 "연모하는 사람이 있다면...올 가을 님이 옴을. 이 길고 긴 밤을 가두어 님온 밤 풀어내겠다"에는 이러한 시간성이 들어있다...님과 헤어지고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보내지 못했더라면...이 역시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를 회피하고 있구나. 인간의 시간성은 우주적 시간과는 다른 인공 구조물적 시계의 시간이 아닐까. 체험과 경험의 시간은 인간마다 다른 법입니다. 매일매일 체험과 추억을 회상하며 사는 나는 이재용도 이재명도 부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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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은 추억을 벗 삼아 포트폴리오를 완성해 가는 것이 아닐까. 니체가 말했듯 우리 인간은 변화하는 이 세계의 생성의 시간, 존재를 각인시킵니다. 이를 하이데거 식으로보면 존재를 시간화시키고 이를 의미화 하는 것입니다. 존재의 의미는 시간 없이 해명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시간에 의해 의미화 되고, 실존적 결단에 의해 그 시간을 의미화 시키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대게 우리는 일상의 번잡함에 따라 시간화 되는 시간 속에서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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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느 순간 내 실존의 본래성을 깨닫고 나의 존재와 시간을 의미화 시키면서 살아갑니다. 시간은 삶에서 존재 의미로 드러납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시간이 있음이란 삶의 의미와 연관지어 볼 수 있습니다. 키에로 케고르적 관점에선 연인이 떠나며 자신이 죽음에 이르는 병까지 이러한 연인의 부재에 절망하듯 연인의 부재를 당한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입니다. 시간은 자기가 없이는 시간 또한 없는 법, 인간의 시간은 각자 다르게 관측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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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조차도 고통에 괴로워하지만 때로 세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됨입니다. 고대인의 시간과 현대인의 시간이 다르듯 고대인의 시간이 현대인에게 해롭지 않음은 푸른 녹지의 지저귐, 가을이 들고 황금 들판이 반기면 축제를 열고 영원의 시간을 새깁니다. 이처럼 시간을 영원한 현재로 남기는 것이 종교적 축제 의례입니다. 예배라 함은 신에 대한 무사관으로 진입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이러한 시간의 부족이 만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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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시간을 의미화 하는 것 보다 <시간>에 치어 살아가는 것 아닐까. 이 또한 현대인이 고대인보다 나은 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시간>은 죽음과도 공유합니다. 하이데거가 그랬듯 죽음에 대한 의식 없이는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신분석학적으로 크고 작은 상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삶은 스토리이어야합니다. 어떤 <시간>을 존재로서 각인 됐는지...니체의 시간성, 영원회귀의 변화 속, 과거의 무한과 미래의 무한의 연결, 나는 그 사이 현재와 이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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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시간>을 돌아보지 못하는 자기이해 없이, 어느 누구도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의 <시간>에 빠져서 정작 자신의 <시간>을 보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못하고, 어쩌면 어깨 위의 먼지를 모지 못하는 현대인의 만연한 풍조가 아닐지.
2026.5.24.sun.악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