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이후 한때 신과 같은 반열에 있었던 러시아 황실 가족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볼셰비키들에 의해 끌려다녔다. 1918년 7월 그 가족들과 일부 시종,전의들은 에카테린부르그라는 도시에 있었다. 짜르를 구출하려는 백군들의 공세가 강화되던 17일 새벽 몇 명의 총을 든 남자들이 짜르의 가족들을 깨워 지하실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맨먼저 짜르에게 총을 쏘았고 황후와 네 딸 그리고 짜르가 금쪽같이 여기던 황태자,전의,시종들 모두에게 총탄 세례가 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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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의 종말은 참혹했다. 사형 집행자들은 인근 광산에 시신들을 묻기 전에 황산을 끼얹어 누구인지 못알아볼 정도로 훼손했다. 러시아 근대화의 기수 표트르 대제 여걸 에카테리나 여제 , 나폴레옹을 파멸시킨 알렉산드르를 배출한 로마노프 왕조는 300년의 역사를 뒤로 한 채 그 조상의 이름을 딴 도시 인근의 폐광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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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몇 년 후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본인이 짜르 니콜라이 2세의 막내딸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하는 여인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자신이 죽음의 지하실에서 살아남은 황자와 황녀라고 우기는 이들은 많았다. 혈액형도 다른 주제에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혈우병 환자 중 하나였던 러시아 최후의 황태자를 참칭한 사기꾼도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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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처음에는 안나 차이코프스키라는 이름을 썼고 그 뒤 미국으로 가서는 안나 앤더슨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산 그녀는 달랐다. 황실 안에서 일어났던 내밀한 이야기들을 알고 있었고 황실 어른의 비밀 해외 순방도 증언했다. 문제의 황실 어른은 그를 부인했지만 그 수행원이 안나가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녀의 몸에 있는 상처는 어릴 적 마차 문에 난 상처 부위와 같다고 왕년의 하녀가 증언했다. 황제 가족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한 전의의 딸도 그녀가 아나스타샤라고 인정했다. 현장에서 실신해 있다가 볼셰비키 병사 차이코프스키의 구원을 받아 살아났다는 그녀의 몸에는 개머리판에 찍힌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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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진짜 아나스타샤라고 굳건히 믿는 그룹이 형성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선봉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나스타샤라고 굳건히 믿었다. 젊어서는 자신을 의심하는 러시아 귀족과 유럽 왕족들의 비난에 열렬히 항변했고 늙어서 요양원에 있을 때에도 가끔 나는 아나스타샤 공주라고 부르짖으며 발작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러시아 황실의 유력한 인물들과 또 혈연관계로 얽혀 있는 유럽의 왕족들 대부분은 그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도 구구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녀가 러시아 말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나스타샤는 당연히 러시아말을 했고 영어도 유창했으나 독일말은 서툴렀다고 했는데 안나는 러시아 억양의 독일어를 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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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앤더슨은 끝내 아나스타샤 공주로 죽었다. 그 묘비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그러나 에카테린부르그에서 황실 가족들의 유해가 발굴되고 DNA검사라는 과학의 진검승부가 들어가면서 20세기를 흘러내린 미스테리 하나가 해결된다. 처음의 발굴 때에는 황제 가족들의 유해 중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안나 앤더슨의 말이 맞아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자 안나의 지지자가 많았던 미국에서는 환호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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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작 안나의 DNA 검사 결과는 러시아 황족과 아주 거리가 멀었다. 1920년대 실종된 폴란드 여공이라는 주장이 나왔지만 어떤 미국인들은 아나스타샤의 유해가 없는 것이 분명한 증거라며 러시아인들이 검사 결과를 조작한다고 우겼다. 그러나 이후 두 구의 유해가 더 발견된다. 두 남녀의 자식으로 추정되는 5명의 유해가 에카테린부르그에서 모두 발굴된 것이다. 아나스타샤는 처음 발굴된 시신 가운데 하나로 밝혀진다. 결국 1918년 7월 17일 에카테린부르그에서 황실 가족 중 목숨을 건진 이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미스테리는 남는다. 안나는 어디서 그토록 내밀한 황실의 정보를 얻었으며 그녀는 왜 자신이 아나스타샤라고 우기게 되었을까. 그리고 가장 의문스러운 점.... 수십 년 동안 어떻게 그 허위를 진실로 삼을 수 있었으며 정신이 온전치 않은 상황에서도 자신과 남들을 속일 수 있었을까. .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혀를 차는데 옆자리에 있던 아내가 한 마디를 했다. "타진요 몰라? 사람들은 진실을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걸 믿는다구."
첫댓글 니콜라이 2세와 그의 아내는 그렇다쳐도 정치논리에 희생될 뿐인 아이들이 불쌍할 뿐이죠.
ㅠㅠ
쯧 그러니까 지존의 자리에 있을때 좀 잘할 것이지.
사실 별로 동정은 안가네요. 저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정치 못해서 앗아간 목숨은 수만배가 넘으므로.
황제도 총알 한발이면 죽일수 있다는 증명이 중요하지요...
뭐 차르와 황후는 워낙 개판을 쳐놨으니....저래 당해도 별 동정심이 않가지만 자식들은 흠 불쌍하죵
가짜공주 서프라이즈에서 봤었는데 막대한 재산때문에 저런건지
러시아 혼란시대때도 가짜 디미트리 사건이 있지 않았나요? 비슷한 맥락의 사건인듯.
차르부부야 뿌린대로 거둔 것이니 일말의 동정도 필요없죠.
하지만 애들은 불쌍하죠.
로마노프라는 가문 자체로 보면 뿌린대로 거둔 것이지만, 애들 개개인으로 보면 뭔가 특별히 한 것도 없는데 살해당한 것이니.
물론 태어나서 혁명이 터질 때까지 신민들의 고혈로 잘 먹고 잘 살지 않았느냐고 하면 할 말 없겠지만,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자란 것이 본인 잘못은 아니니.
아이들의 운명에는 동정이 가지만, 결국 그게 군주제에서 "왕"자리 먹은 집단의 숙명이기도 해서요. 결코 정당화가 되는 것은 아니고 분명 범죄라면 범죄이지만, 그래도 다른 측면에서는 "황통을 이을 핏줄"이 남아 있었다면 대체 백군이 어디까지 날뛰었을지...
게다가 위에 장비님이 말한 바와 같이 니콜라이 2세는 결코 "불행한 시대의 불운한 군주"가 아니죠. 보통 혁명으로 망한 나라 군주들에게 뭔가 동정론이 쏟아지는 경우가 많은데, 니콜라이 2세도, 프랑스의 루이 16세도 혁명의 시대에 있어서 결코 "죄없는 방관자"는 아니었거든요.
@kweassa 니콜라이 2세는 그렇다 쳐도 루이 16세도 그런가요? 프랑스혁명은 루이 14세 말기부터 15세 까지 똥싸논 결과 아닌가요;;
@Dar타냥 루이 16세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뭐, 그 입장에서는 당연한거지만서도) 반혁명적이었고, 자신이 처한 상황과 위험을 모르고 화를 자초한 점이 많아요.
최초에 혁명의 열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을 시점만 해도 프랑스 국민의 심성은 아직 "국왕"의 존재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고, 실제로 뛸르리 궁에 민중이 난입했을 때 혁명의 상징인 삼색모를 쓴 국왕이 발코니에 나타난 것만 보고 민중이 국왕에 대한 열화와 같은 환호를 보냈거든요. 삼부회가 다시 열리고 '온건한 방식'으로 부르주아지가 개혁을 주도하려고 했던 시점까지 국왕은 협상의 대상이고 나라의 한 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는데, 이게 협상 과정 내내 깽판을 부리고 고집을
@Dar타냥 부리면서 점차 온건한 부르주아지들에게도 "이 자식 안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이라는 염증을 불러일으키게 되었고, 이후 연달아 정치적 오판에 최악의 선택을 거듭하면서 국민적 여론 최악으로 떨어지더니, 바렌느 도주 시도가 걸리면서 마침내 국민 전체가 "국왕? 이젠 필요 없어, ㅅㅂ 죽여버려" 라는 정서를 품게 되었고요.
'피의 일요일' 사건 전까지는 러시아 대중이 항의와 시위를 벌이면서도 "아버지 차르시여, 젭라 우리 좀 도와주세요..."라고 하다가, 결국 학살극으로 끝나면서, "이젠 ㅅㅂ 전쟁이다, 너 죽고 나 죽자"라고 변하게 된 것과 유사하죠.
@Dar타냥 "그게 과연 죽을만큼 큰 죄였냐?"라고 묻는다면 거기에 대해서 고민해볼만 하지만, 반면 "루이 16세는 혁명에 있어서 불운한 방관자였나?"라고 묻는다면 그건 확실히 아닙니다. 그는 대혁명 속의 분명한 '당사자'였고, 그의 죽음은 결국 그의 무수한 실책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나라의 "왕"인데 방관자거나 꼭두각시였을 수가 없죠.
아이들 개인들만 보자면 불쌍하지만 전체 러시아를 생각하면 처형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죠. 한명이라도 왕의 핏줄이 살아남았다면 백군의 구심점이 되었을 것이고, 이는 적백내전의 장기화를 의미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노프 왕가를 구금하고 있던 도시로 백군이 몰려오고 도시가 백군에 함락당하기 직전에 처형한 점과 만약 그들이 살아서 백군에게 넘어가고 그로 인해 더 많은 인명이 피해를 볼수 있음을 고려하면.. 처형은 필요악이 아니었을까하는 조심스런 의견 (더 좋은 것은 그냥 이송하여 구금하는 것이지만 애초에 전시이고 그게 힘든상황이었으니깐 처형한 거 아닐까요)
사실 이 처형은 로마노프 황제가 아무리 개색히이고 사형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도 정식 재판을 거치지 않은 즉결처형이므로 로마노프 황제에 대해서만 처형이 이루어졌더라도 이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죠. 따라서 애초에 누구는 처형당할만한 사람이고 아니고라는 관점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닌듯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