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그림 갤러리
여류화가 나혜석 [1896~1948 ]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은 수원의 명문가 딸로 태어나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했으며
또한 우리나라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서 유화를 공부한 화가이다.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큰대문 참판댁」의 4남매 중 셋째로 부유한 개명관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신학문을 공부한 두 오빠 나홍석, 나경석과 아버지 나기정의 권유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에 유학했다.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뜻에 반하여 학업을 중단하여 1년 간 스스로 돈을 벌어 학교를 마친 그녀는 서울로 돌아와
처음으로 개인전시회를 열어 사람들에게 유화가 무엇인지를 알리는 데 힘썼고 초창기 「이른 아침」(早朝)과 같은 목판화로
민중의 삶을 표현하기도 했으며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여러차례 특선과 입선을 하기도한 재능있는 화가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서양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일본유학생, 우리나라 최초의 이혼녀,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 여행한 여성.
그녀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이처럼 정월 나혜석은 우리나라 근대화 시기의 대표적인 신여성이라고 해도 잘못된 표현이 아니다.
무엇이든지 몸소 실천해 보여주었고,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으로서 나타내어 사람들의 자각을 촉구했다.
김일엽 등 다른 신여성들처럼 여성들의 교육을 강조했으며, 초기에는 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닌 페미니즘을 내세우다가
점차 남녀성평등을 통한 자유연애, 개방 결혼과 독신주의 등을 주장하며 급진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작품 활동을 통해서 많은 여성들의 자각을 일깨웠으며 여성 운동과 그에 따른 편견을 바꾸는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혼을 한후 그는 화실에서 일어난 화재로 그림을 모두 잃게 되고 또한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신경쇠약과 반신불수의 몸이 된 나혜석은 자기만의 방을 갖지 못한 채 수덕사 등 여러 사찰을 떠돌아 다녔고,
해방 후에는 서울의 청운양로원에 맡겨졌으나 그는 걸핏하면 몰래 빠져 나왔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짐을 쌀 때면 늘 기운이 솟아 오른다고 했던 나혜석은 어느 날 양로원을 나선 뒤 종적이 묘연해졌다.
그리고 1948년 12월 10일 서울의 시립 자제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아무도 모르게 눈을 감았고
그의 무덤은 어디 에도 남아 있지 않다.
자화상-나혜석
1922년 농촌풍경
1924년 만주 봉천풍경
1927년 파리풍경
1928년 블란서 마을풍경
1928년 스페인 국경
1933년 인천풍경
1935년 화령전 작약
1935년 별장
1935년 다솔사
정월 나혜석(晶月 羅蕙錫.1896~1948)의 예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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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左: 나혜석 부부/ 右: 유럽 일주 당시(1927~29)의 나혜석과 남편 김우영)
빠리에 체류하고 있는 고암 이응로 선생의 부인 박인경 여사와
차 한잔을 나누며 들은 이야기 한 토막.
"이화여고 졸업반 때였어요. 안양으로 스케치를 나갔다가 친척이 하던 양로원엘 들렀지요.
할머니들이 돌팍에 앉아 해를 쪼이고 있는데 저만치 홀로 앉아 있던 40대 여인 한 분을 가리키며 친척이 일러 주셨어요. "저분이 나혜석 씨야."
다가가 인사를 드리자 스케치북을 좀 보여 달라면서, "눈부신 나이로구나" 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어린 내 눈에는 알 수 없는 기품이 서려 있는 그분이 더 눈부셔 보였어요.
그날 나 여사는 냄새 나고 어두운 방 한쪽에서 원고를 찾아내 와서는
손이 떨려 글을 더 못 쓰니 원고 정리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빠리 생활을 기록한 글들이었지요. 훗날 빠리에서 생활하면서 문득 그 글들이 떠오르곤 했답니다."
아직도 조선 왕조의 잔영(殘影)이 서려 있는 수원.
정조 사후 한 세기 만에 수원에서는 증조부가 조선왕조 호조참판을 지낸 왕족 같은 명가(名家)에서
조선 예원(藝園)의 여왕인 나혜석(羅蕙錫.1896~1946)이 태어난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뼈저린 슬픔을 당해야 했던 내력마저 닮아 있다.
그녀에 대해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서 나혜석의 이름이다.
아직 조선이 캄캄하던 1910년대에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하고 유럽을 여행하며 필명을 날렸던 화려한 명성의 그 나혜석만을 기억한다.
구시대적 권위와 인습과 도덕률에 저항하며 실의와 고독 속에 삶의 종장(終章)을 맞았던
또 다른 나혜석에는 무심하거나 무지하다.
증조부가 호조참판을, 부친이 용인 군수를 지낸 명가에서 태어난 조선 예원(藝園)의 여왕 나혜석.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그녀의 첫 개인전(1921년 3월, 경성일보사 안의 내청각)이 몰고온 경이로운 폭발력을
<매일신보>는 이렇게 전한다. "... 여성 서양화가로 우리 조선에 유일무이한 나혜석 씨의 양화 전람회는...
인산 인해를 이루도록 대성황이었으며... 제2일에는 더욱 많아 3시까지의 관람자가 무려 4, 5천 명에 달하였더라..."
한 사람의 전시회에 4, 5천 명이 몰렸다. 요즘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그녀는 외교관 김우영과 결혼하여 1927년 구라파 여행길에 오름으로써 또 한번 세인의 뜨거운 관심을 받는다.
이때 그녀의 나이 32세. 당시의 유럽이나 미국은 조선인에겐 풍편(風便)으로나 듣던 피안이었다.
영국 유학을 하고 돌아오는 청년 장택상을 조선 총독이 마중 나갔다는 시절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식민지 조선 여성으로서는 선택 받은 신데렐라였다. 장장 16개월에 걸친 구미 여행은 벅찬 흥분과 감동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미술관과 박물관, 화랑을 들러 서구 미술의 흐름을 숨가쁘게 체험하고 1933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구미유기(歐美遊記)>라는 글로 월간지 <삼천리>에 집중적으로 연재한다.
빠리에서 그녀는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기운을 엿보았으며, 여성의 당당한 실존과 자유를 보았다.
밤 늦도록 카페에서 삶과 미술을 이야기하며 그녀는 거기서 다른 세상을 보았다.
그러나 미술을 전공하고 돌아오더라도 변변한 화랑 하나 없던 경성을 생각하면 우울하기만 했다.
예술가라고는 했지만 며느리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가사와 육아 문제 등에 있어서 그녀라고 별다른 면책이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남편 김우영만 귀국하고 그녀는 1년 동안 빠리에 남아 아내도 어머니도 아닌 화가 나혜석의 삶을 영위한다.
이 기간이야말로 완전히 화가 나혜석 자신만을 위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빠리에 홀로 남은 그녀는 몇몇 연구소와 작가의 아틀리에를 드나들며 20세기 미술의 새로운 기운을 호흡하는데
특히 야수파 계열의 격정적이고 활달한 필치가 그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꿈같은 빠리 체류 동안 중추원 참의 출신에 언론사 사장을 지낸 당대의 명사 최린과의 염문으로 생애의 분수령을 가르게 된다.
여성의 버선목만 보아도 허벅지를 보았다고 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를 향한 어제까지의 박수가 비난으로, 선망이 저주로 바뀌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여류화가 나혜석>의 글을 쓴 이명온이라는 사람은 이 사건에 대해 "누구의 과오도 아니며 원죄다."라고 역설한다.
이방인 특히 이방 예술가를 정신없이 취하게 만들어버리는 빠리의 분위기가 감성 여린 그녀에게는 덫이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 그녀는 원치 않는 이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삼천리>지에 저 유명한 "이혼백서"를 쓴다.
그와 함께 사회적 지탄의 화살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재기를 위한 전시를 준비하여
마침내 100여 점이 넘는 작품으로 최후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싸늘한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급격하게 황폐해 갔고, 붓을 놓아버린 채 수덕사, 마곡사, 해인사 등지에 전전하며
정처 없는 유랑의 길에 오른다. 언젠가는 수덕사 견성암으로 승려가 다 된 여류작가 김일엽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때 남편과 아이들은 대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어미 노릇을 못했다는 자괴감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안고 먼 발치에서 하교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곤 했다.
그런 날 밤이면 송림의 바람 소리마저 어머니를 부르는 아이들의 소리로 들려 화들짝 놀라 일어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이미 육신은 무너져가고 죽음의 그림자는 서서히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해 겨울 밤, 산사와 양로원을 떠돌던 반신불수의 그녀는
마지막으로 옛 화우 이승만의 집에 들렀다. 거의 폐인의 행색이었다.
그녀는 몰라보게 피폐해 있었다. 육신의 마비와 함께 정신분열증 증세까지 앓고 있었으며 손은 떨고 있었다.
오만하던 미의 여왕의 모습은 간 곳 없었다. 그녀는 심하게 떨리는 손을 감추며 입술을 달싹여 뭐라고 중얼거렸다.
"자식들이... 자식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어."
마른 볼 위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그 2년 후 그녀는 행려병자가 되어 용산의 한 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홀로 숨을 거둔다.
"사 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하지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느니라" 고 절규했던 나혜석.
자신의 예술과 사랑에 오만하도록 당당했던 그 조선 예원의 꽃은
죽음을 지켜본 사람도,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사람도 없이 "관보"의 사망자 광고란에 그렇게 한 줄로 남았다.
그러고는 끝이었다. 나혜석의 모든 것은 신화처럼 묻혀버렸다.
불과 50년 세월의 안팎에서 모든 것이 지워져 버렸다. 그녀의 생가 터인 수원 "나 참판댁"도 그녀가 잠들어 있는 묘지도 불명이다.
심지어 문화관광부에서 예술가들의 생가 터나 묘지에 세우기 위해 마련한 표석지마저도 수년 동안 수원시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다.
*-김병종의 화첩기행에서-
출처: 옹달샘과 표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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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수선화
첫댓글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군요..
말년이 좋아야 하는데..
안타까운 삶을 마감한 나 혜석.
그래도 이름만은 영원하리~~
나 혜석씨에 대해 상세한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