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거이(白居易)-자오야제(慈烏夜啼)(까마귀 밤에 울다)
慈烏失其母(자오실기모) 까마귀 그 어미를 잃고서
啞啞吐哀音(아아토애음) 까악까악 슬피 운다
晝夜不飛去(주야불비거) 낮이나 밤이나 날아가지 않고
經年守故林(경년수고림) 해가 가도록 어미새와 지낸 옛 둥지를 지키고 있다
夜夜夜半啼(야야야반제) 매일 밤 한밤중이 되도록 울어
聞者爲霑襟(문자위점금) 듣는 사람 옷깃을 적시게 한다
聲中如告訴(성중여고소) 울음소리 이렇게 호소하는 듯
未盡反哺心(미진반포심) 효도를 다하지 못하였어요
百鳥豈無母(백조기무모) 새들 중 어찌 어미새가 없겠냐마는
爾獨哀怨深(이독애원심) 너만 홀로 그 슬픔이 깊고 깊구나
應是母慈重(응시모자중) 모름지기 어미새의 사랑이 깊었기에
使爾悲不任(사이비불임) 너를 너무도 슬프게 하였구나
昔有吳起者(석유오기자) 옛날에 오기라는 사람은
母歿喪不臨(모몰상불임) 모친상을 당하고도 가보지 않았다
嗟哉斯徒輩(차재사도배) 아아,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其心不如禽(기심불여금) 그 마음씨가 새만도 못하구나
慈烏復慈烏(자오부자오) 효도의 새 까마귀야 까마귀야
鳥中之曾參(조중지증삼) 너야말로 새들 가운데 증삼이라 할만 하구나
*백거이[白居易, 772~ 846, 자는 낙천(樂天),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는 당나라 중기의 위대한 시인이자 중국 고대문학사 전반에서도 일류에 속하는 대시인으로 대여섯 살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아홉 살 때는 이미 음운이 복잡한 율시(律詩)를 쓸 줄 알았다고 하며, 주요 저서로는 “장한가(長恨歌)”, “비파행(琵琶行)”등이 있습니다.
*참고로 백거이는 이백(李白)이 죽은 지 10년, 두보(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났고, 같은 시대의 한유(韓愈)와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병칭되었습니다.
*백거이는 평생을 관리로 살아오면서 딱 4년간의 좌천 생활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순탄하게 승진하였는데, 그는 56세 이후부터 정쟁의 회오리에 말려들지 않고 명철보신明哲保身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였고, 백거이는 이런 삶을 스스로 중은中隱이라 명명하고 반관반은半官半隱 생활을 추구하였으며, 그리하여 중책과 요직에 임명되는 것을 마다하고 지방관리나 낙양 파견 근무를 주로 하였으며, 한직에 있기에 격무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나머지 시간은 친구들과 산수 유람을 하고 음풍농월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향유하였고, 그런 자신을 풍월노인風月老人이라 칭하였다 합니다.
*백거이는 나이 73세 되는 해에 사재를 털어서 마을 주민들의 목숨을 종종 앗아갔던 험난한 팔절탄八節灘(낙양 용문산 부근에 있는 여울로 워낙 물길이 좁고 험난하여 이곳을 지나던 배나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한 곳) 확장 공사를 벌이는데, 좁은 팔절탄을 파고 확장하여 암초를 제거하고 험난한 물살을 잔잔하게 만들었는데, 그 감회를 읊은 시가 ‘개용문팔절석탄(開龍門八節石灘)’입니다.
*위 시는 위 시는 문학비평가이신 김희보님의 “중국의 명시”에 실려 있는 것을 옮겨본 것인데, 시인이 향리에서 모친상으로 복을 입고 있을 때 지은 것으로 명리에 집착하여 효도를 잊어버린 세상 풍조를 풍자한 작품이라 하고, 원래 풍자성이 백거이 시의 한 본질이라 합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의 가객(歌客) 박효관이 지은 시조가 한 편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뉘라서 까마귀를 검고 흉타 하돗던고.
반포보은(反哺報恩)이 그 아니 아름다운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퍼하노라.”
*형식 : 오언고시(五言古詩)
*慈烏(자오) : 까마귀의 일종, 어미새가 쌔끼를 60일 동안 양육하면 새끼는 자란 뒤 60일 동안 먹이를 날라 어미새를 봉양한다 함
啞啞(아아) : 까마귀의 우는 소리의 형용
經年(경년) : 오랜 세월이 지나도
故林(고림) : 어미새와 함께 살아온 숲
霑襟(점금) : 눈물로 옷깃을 적심
反哺(반포) : 먹이를 입에서 입으로 옮겨 먹이다. 효도를 가리킴
豈(기) : 어찌…할 것인가
應是(응시) 반드시 …임에 틀림없다
任(임) : 참는다
吳起(오기) : 전국시대 초기 병법의 대가. 위(衛)나라 사람으로 대략 기원전 440년에 태어나 기원전 381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일찍이 노(魯)·위(魏)·초(楚)에서 벼슬하면서 많은 공을 세우고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뜻을 세워 나라를 떠날 때 재상이 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맹세했다. 증자에게 배웠는데 어머니가 별세했다는 말을 듣고도 맹세대로 집에 돌아가지 않아 스승인 증자에게 파문당하였고, 제나라의 침공을 받은 노나라가 그의 아내가 제나라 사람인 것을 트집 잡아 등용을 망설이자 아내를 죽여 제나라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릴 정도로 비정했다고 함. ‘오자병법’을 남겼는데, 오자병법은 전한 초기에 “사마양저병법”, 손자병법과 함께 3대 병서로 널리 통용되었다 함
嗟哉(차재) : 탄식소리
曾參(증삼) : 춘추시대 공자孔子의 제자로 이름난 효자였으며 증자曾子로 높여 부름
첫댓글 효심을 노래한 시인듯 합니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그 뿌리가 없다면
부귀영화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너무도 좋은 말씀을 댓글로 달아주시어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