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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넬료 한 사람을 위하여
행 10:1-8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 설 교 >
고넬료 이야기
대구성서아카데미 / 행 10:1-48
의심의 해석학
일반적으로 ‘의심’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만 근본적으로는 무조건적인 ‘믿음’보다 훨씬 창조적이다. 여성신학자들도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 구조화한 가부장제도와 성차별을 의심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인 생명의 심층을 새롭게 밝혀내려고 한다. 이미 앞서 니체와 맑스와 프로이트 역시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기독교의 교리를 의심함으로써 세계의 역사를 생명 지향적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성서 해석학은 기본적으로 ‘의심의 해석학’이다. 성서를 의심해야만 하는 이유는 성서 자체가 그만큼 허술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읽는 독자와의 사이에 시공간적인 틈이 심각할 뿐만 아니라 성서가 담지하고 있는 진리의 지평들이 늘 새롭게 변화한다는 데에 있다.
오늘 분문을 이런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자. 오늘 누가가 보도하고 있는 고르넬리오 사건은 역사적 사실이었을까? 대개의 기독교 신자들은 ‘두말하면 잔소리!’ 식으로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우리가 이런 사건을 역사적 사실로 믿는 이유는 성서 일반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성서에 기록된 것이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따라서 모두 역사적 사건이라고 단정하는 이런 태도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죽은 문자로 떨어지게 하고,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절대규범으로 자리 잡게 하는 첩경이다.
그렇다면 고르넬리오 사건은 누가가 만들어낸 ‘허구’라는 말일까? 일단 오늘 본문에 묘사된 내용이 역사적으로 그대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 이유는 앞으로 조금씩 밝혀지겠지만, 우선 한 가지만 짚는다면 헤로데 아그리빠 1세의 영토가 된 44년 이전에는 가이사랴에 로마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다는 게 그 근거이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 백부장 이야기가 완전히 날조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앞장의 공부에서 ‘다비타 쿰’이 예수가 말씀하신 ‘탈리다 쿰’과 연관이 있다고 했듯이, 본분의 고르넬리오는 예수에게 자기의 종을 고쳐달라고 했던 가퍼나움의 백인대장(눅 7:2-10) 전승과 연관이 있다. 즉 누가는 자신이 수집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전승과 설화를 중심으로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이 한편으로는 사실에 가까운 것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저자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편집된 것도 있다는 말이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성서가 그렇게 신빙성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불안해 할 것이다. 그런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대개는 ‘축자영감설’로 도피한다. 성서가 전하고 있는 것은 그대로 믿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는 그런 주장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긴 하지만, 그건 결국 성서의 영적 심층을 간과한 채 인간학으로 떨어진다는 점에서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르넬리오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 원칙적으로 말한다면 본문을 우선 최대한 철저하게 ‘역사비평’의 방식으로 분석한 다음에, 그것의 신학적 토대를, 또는 집필 목적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런 작업에서 얻어진 결과를 오늘 우리의 삶에 근거해서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진리, 혹은 하나님의 세계에 좀더 새롭게, 깊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고르넬리오의 환상
누가는 앞서 리따의 애네아와 요빠의 다비타 전승을 소개한 다음에 이제 이방인 선교 역사에서 일종의 신기원(epoch)이라 할 고르넬리오 이야기를 소개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 군대의 한 책임자인 백인대장 고르넬리오라 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다. 그는 유대교인이건, 유대 기독교인이건 모두가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종교적이고, 경건하고, 자선을 많이 베푸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게 천사가 나타난다는 건 그 당시에 있을만한 일이었다.
성서에 기록된 천사의 출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현상들이 고대사회에서는 그렇게 별난 게 아니었다. 우리의 눈에 초자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우리와 전혀 다른 ‘코드’로 세상을 해석하던 고대인들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말이다. 그들의 그 코드라는 게 오늘 현대물리학적인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는 우리의 코드에 비해서 확실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예컨대 유령과 요정들이 현실세계로 들어오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나 비현실과 현실이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미야자키의 작품 세계를 우리가 근거가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오늘 우리의 세계 인식도 역시 절대적인 게 아니라 1억년 후에는 우리가 지금 2천년 전의 사람들의 세계를 신화로 생각하듯이 전혀 다르게 평가될 것이다. 따라서 천사 이야기를 읽는 우리들은 고대인들이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려했는가 하는 점을 파악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 천사 이야기는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와 마찬가지로 어떤 영적인 실체를 의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영적인 실체는 단순한 느낌이나 신비한 사건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존재였다. 여기서 대화는 영적인 인식의 심화과정이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영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그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도 역시 영적일 수밖에 없다.
베드로의 환상
고르넬리오의 심부름꾼들이 요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기도하기 위해서 옥상에 올라갔다가 이상한 환상을 본다. 누가의 설명에 의하면 그 시간이 바로 점심 때(12시)였기 때문인지 베드로는 먹을거리의 환상을 보았다. 유대인들이 먹지 말아야 할 짐승들이 담긴 보자기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그걸 먹으라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가 거절하자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15절)는 말이 다시 들렸다. 이런 말이 세 번 오간 다음에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고 베드로는 정신을 차렸다.
초기 기독교의 상황을 약간만이라도 알고 있는 독자라고 한다면 이 베드로의 환상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특히 바로 앞에 배치된 고르넬리오의 환상과 상응함으로써 이 베드로의 환상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이 철폐된다는 의미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누가가 무슨 이유로 바로 이 대목에서 베드로를 등장시켰는지 단정적으로 언급할 수는 없지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함께 음식을 먹고 며칠 동안 머물었다는 이 엄청난 사건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베드로 밖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더구나 누가가 사도행전을 집필할 때의 교회 상황이 이제 어느 정도 베드로의 수위권이 확보되기 시작할 때였기 때문에 이제 베드로에 의해서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생각이 있었는지 모른다.
베드로와 고르넬리오의 만남
베드로는 고르넬리오가 보낸 사람, 그리고 요빠의 몇몇 신자들과 함께 50km떨어진 가이사랴로 갔다. 그곳에서 베드로는 고르넬리오 문중 사람들에게 설교한다(34-43). 이 설교의 내용은 이미 앞에서 몇 번 나온 초기 기독교의 전형적인 케리그마에 속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설교의 서론에 속하는 베드로의 입을 빌린 누가의 생각이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34,25절).
이 설교에서 우리가 한번 짚어볼만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누가는 예수의 부활 현현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증인으로 미리 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41). 부활현현은 누구에게나 인식될 수 있는 자연과학적 사건이라기보다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난 의미 있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활현현이 사도들의 심리적 현상에 불과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부활은 단순하고 객관적인 사실로서의 사건이 아닐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마음에 의해서 만들어진 어떤 실존적인 확신에 불과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명백하지만 앞으로도 여전히 해명되어야 할 어떤 궁극적 생명사건이다.
베드로의 설교가 끝난 다음에 성령이 청중들에게 내렸다. 그것은 곧 방언이라는 현상으로 타나났는데, 베드로와 함께 내려온 유대 기독교인들은 그 현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 현상이 여기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누가는 무슨 생각으로 이방인들에게까지 방언을 통해서 성령이 내렸다고 말하는 것일까? 이런 장면에서도 우리는 성서읽기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모든 걸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성서를 읽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이 텍스트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지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비록 힘든 작업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텍스트가 가리키는 그 근원적인 사태를 추적해야만 한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
우리는 고르넬리오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나 역사적 근거를 갖고 있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앞에서 44년 이전에는 로마 군대가 가이사랴에 주둔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비록 시기는 좀 늦더라도 베드로가 고르넬리오라는 로마 백인대장을 전도한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누가는 그런 전승들의 연대기적 정확성을 별로 고려하지 않은 채 어떤 신학적 의도를 전하기 위해서 사도행전의 전반부에 배치한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신학적 의도는 그 당시 초기 기독교가 전혀 원하지 않았던 이방인 선교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이었다.
이게 도대체 어쨌다는 말인가? 그 당시 누가로서는 최선이었겠지만, 사람이 실제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사안들을 무조건 하나님의 지시였다고 미루는 태도는 썩 바람직한 건 아니다. 요즘도 우리가 자주 목도하는 것처럼 기도하는 중에 교회당을 건축하라거나, 선교사를 파송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주장은 신앙적인 것 같이 보여도 별로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뜻으로 치장하지 말고, 자신의 판단이 하나님의 뜻에 어울리도록 합리적이고 영적인 인식능력을 키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가정과 교회
김태복목사 / 행 10:1-11
다음 달부터는 가정의 달입니다. 오늘 시대처럼 가정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때도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많은 가정들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점점 부유할수록 가정의 기반이 튼튼해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풍요에 따라 오히려 가정이 더 약화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행복은 물질의 풍요에 따라 상승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모든 면에서 가장 부강했던 미국은 서서히 기울고 있는 이유도 바로 가정들이 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한 때 베스트셀러였던 ‘메가트렌즈(Megatrends)’라는 책을 보면 미래는 정보의 시대로써 사회가 급격히 변화해 나갈 때에 세 가지 상처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첫째, 전통적인 가치관, 즉 도덕적인 가치관이 상실하게 되는 것이요, 둘째, 가정과 교회가 기관화되어 전통적인 가정의 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는 것이요, 셋째, 합법적인 지도자들의 권위가 상실된다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위기는 “가정의 상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지적대로 미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미국의 부부의 3분지 1정도가 이혼하거나 더 악화되어서 부부들의 반이 이혼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제일 악영향을 받는 것은 그 자녀들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불화한 부모 밑에서 성장하거나 새 아빠, 혹은 새엄마 밑에서 성장하면서 그 고통을 잊기 위해서 마약에 손을 대거나 검은 문화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러한 현상들은 멀리 미국의 일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미국을 그냥 닮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갑자기 물질적으로 잘 살게된 결과, 밝은 면보다는 어두운 면이 더 강하게 나타나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번 봄 노회에서 노회장인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님은 개회설교에서 한국사회가 세계 앞에 가장 나쁜 면에서 1위되는 것들을 소개하였는데 너무나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은 15세 이상이 일인당 연간 술을 14.4리터 소비합니다. 슬로베니아가 15,15리터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에서 두 번째 ‘술고래’가 한국입니다. 그러나 슬로베니아는 순한 술을 많이 마시는데 ‘독한 술’은 한국이 단연 으뜸입니다. 독주 소비량이 11.9리터로 OECD 국가 중에 최고입니다. 한국인들을 보십시오. 이제는 어른이고 청소년들이고, 부녀자들이고 마구 마시어 댑니다.
기분 좋아 마시고, 화가 나서 마시고, 만났다고 마시고, 헤어진다고 마시고, 밤에 마시고, 아침에 해장술 마시고, 이래저래 마실 일이 많아서 탈입니다. 한국 40대 남성 사망률 세계 1위, 40, 50대 남성 자살률이 여자의 3.3배로 세계 1위입니다. 한국 여성 세계 1위 부문은 성형수술이 17%로 세계 1위, 제왕절개 39.6%로 세계 1위, 여성흡연자 1일 흡연량 24.8개피로 세계 1위이요, 전업 주부율이 58%로 세계 1위, 공주병 환자수가 세계 1위입니다.
화장품 사용빈도가 세계 1위, 그 외에도 살인과 성범죄가 세계 4위, 5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2배라고 합니다. 갑자기 세계 11번째로 수출을 많이 하는 나라가 되는 것은 신나는 일이지만, 졸부(猝富)의 모습처럼 세계 앞에 너무나 추한 모습을 보이는 한국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인 1,000만이 넘는 나라가 도덕적인 면에서 이처럼 비틀거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창피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한국사회도 무엇보다도 문제가 많은 가정들이 깨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002년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의 이혼율이 47%를 넘어서 이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이혼율이 높은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혼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부들이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최근 서울 리서치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중산층 부부의 경우 70퍼센트 가까운 아내가 다시 태어나면 지금의 남편과 다시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고, 주부의 53퍼센트가 이혼을 생각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우리 부부들이나 부모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힘써야 할 때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귀한 곳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가정이요, 또 하나는 교회입니다. 가정은 육의 안식처요, 교회는 영의 안식처입니다. 우리 육신이 평화와 기쁨, 행복을 누리게 하는 곳이 가정이라면 영이 평화와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가정은 부모나 부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라면 교회는 영적인 아버지 하나님과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 아내 되는 성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서 가장 그리워지는 곳이 바로 육신의 안식처인 가정이요, 또한 영의 안식처인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가정과 좋은 교회 속에 사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옛말에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있는데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만사가 형통된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우리의 교회가 화목하고 늘 사랑과 은혜가 넘치면 우리의 영도 살찌어지고 기쁨이 충만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말하면 <교회만사성>이란 새로운 신조어(新造語)를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이 불화하면 만사가 불행해지는 것처럼, 교인들끼리 서로 불화함으로 다투기 일 수이면 모든 교인들의 영은 기쁨과 평안을 잃어버리고 사업도 안 되고 자녀들도 신앙적으로 삐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어떻게 안식의 장소, 은혜의 장소로 만들 것인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1.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오늘 본문 10장은 사도행전 중에서 선교의 큰 전환점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1장부터 9장까지는 초대 교회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해 왔으나 10장에 와서는 이방인 전도를 위해서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강권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의 인물인 고넬료는 가이샤라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당시 가이샤랴라는 곳은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어서 그 경비를 위해서 로마의 정규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군대의 편제는 한 개의 군단이 6천 명이고 한 군단을 600명씩 10대로 나누었고 그 한 대는 100명씩 나누어 그 지휘관을 백부장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중대장쯤 되는 직위로 그 권한은 막강했던 것 같습니다. 고넬료는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그 지역에 사는 부자들이나 업자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부정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었습니다.
또는 주변에 있는 음란업소로부터 무상으로 환대를 받으면서 얼마든지 음란을 즐길 수도 있고, 여자 노예들을 마음대로 성적으로 농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어떤 경로로 믿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믿는 날부터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혼자만 믿은 것이 아니라, 온 집안 식구들과 믿었고 심지어는 그의 부하들 중에도 경건한 신자가 있었다는 것을 볼 때에, 아마, 고넬료는 자기 가족과 권속들과 부하들을 중심해서 가정 교회를 만들어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렸던 것 같습니다.
고넬료는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으로 유대교에 개종하지는 않았으나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경건’이란 헬라어로 ‘유세베스’로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태도를 말합니다. 경건의 생활은 곧 거룩한 삶,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과 구별된 삶을 말합니다. 그렇지 못한 신앙은 맛 잃은 소금과 같은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란 겉으로 말이나 행동이나 태도가 경건의 모양이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자기는 이미 하나님이 십자가의 피 값으로 사신 줄 알고 그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성별된 삶이 필요합니다.
겉으로만 경건한 척하고 속으로는 그렇지 못한 자를 야고보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자’라고 혹평했습니다.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에 영적인 큰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성별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들이 주님의 뜻대로 경건한 모습으로 운영될 때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임하게 되며 우리 가정들도 육신의 욕심에서 생겨지는 온갖 증오심, 시기심, 불쾌한 감정, 더러운 정욕들을 과감히 끊어 버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복이 강하게 임하는 줄 믿는 것입니다. 근대 역사 중에 아주 대조적인 두 어머니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분은 히틀러의 어머니이고 한 분은 무디의 어머니입니다. 히틀러의 어머니는 그의 남편이 장사 일로 집을 비운 사이에 부도덕하게 이웃에 사는 유태인 남자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속담대로 어느 날은 어린 히틀러에게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발각되었습니다.
어린 히틀러는 마음에 얼마나 유태인과 여자를 미워했는지 그 증오심이 타올랐습니다. 나중에는 점점 자라서 유태인을 600만을 학살하고도 그 증오심을 지우지를 못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악해지면 이처럼 잔인해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무디의 어머니 벹시 여사는 남편이 9남매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나는 불행 속에서도 조금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내라고 할 때에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내 두 팔에 아직 힘이 남아 있는 한 결코 고아원에 보낼 수가 없다. 어머니만큼 자식을 생각하고 기도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말하면서 주일날이면 도시락을 싸가지고 교회에 모두 데려갈 정도로 철저히 신앙적으로 키운 결과 미국과 영국을 뒤흔든 세계적인 부흥사가 그 홀어머니 밑에서 양육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여, 여러분이 언제나 경건한 삶을 살므로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넘치는 역사를 만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고넬료는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고넬료는 군대 장교로서 대단히 바쁜 몸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9시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환상과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제 9시란 지금의 시간으로는 오후 3시를 가리킵니다. 유대인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합니다. 오전 9시, 정오 12시, 오후 3시에 기도합니다. 아마, 고넬료도 유대인의 기도 관습대로 이처럼 세 번씩 기도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그 가정에 임하게 되고, 그 바쁜 베드로를 강권적으로 역사 하사 고넬료의 가정교회에 와서 부흥 집회를 인도하게 하시고 성령의 강한 체험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가 은혜와 능력을 받으려면 기도에 항상 힘써야 합니다. 기도는 하늘의 신령한 것을 가져다주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가정에서 하늘을 향해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가정 위로 하늘 문이 열리고 신령한 복들이 비둘기처럼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를 드릴 때 노아의 방주처럼 하늘을 향한 창이 열리고 신령한 것들이 만나와 메추라기처럼 내리어 그곳에 모이는 심령들이 영적으로 배부름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가정과 교회는 마치 하늘을 향한 창문이 막힌 것 같아서 하나님이 신령한 것을 주시려 해도 주실 수가 없으며, 대신 세상으로 향한 문을 통해서 온갖 세상의 더러운 것들이 밀려 들어와 어둡고 냄새나게 하며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가정이든지 기도하는 한 사람만 있어도 큰 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고넬료 한 사람의 기도가 그 가정 위에 신령한 복으로 넘치게 했으며 온 가이샤라 지방까지 큰 영향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식구들 중에 비록 연노하신 할머니라도 기도하는 분이 있다면 정말로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더욱이나 몇몇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가정은 대단히 복이 넘치는 가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자기가 어릴 때의 가정 분위기를 표현하기를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오막살이 통나무집 구석구석에 깔려 있는 것 같았다. 집안뿐이 아니다. 들에서 일할 때나 내가 성장하여 가게에 나가 일할 때나 어머니의 기도소리는 언제나 내 주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기도하는 어머니를 가진 자녀들이야 말로 정말 복된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가정과 교회는 기도하는 식구나 교인이 별로 없는 곳입니다.
그러한 가정과 교회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어둠의 자식이 되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한 소년이 체포되어 교도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목사님께 찾아와서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아이의 잘못은 내 탓입니다. 우리가 이 시내로 이사 오기 전에는 저는 아침과 정오, 그리고 밤중에 꼭 내 아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와서 부터는 온갖 일에 바빠서 영적인 생활을 소홀히 함으로 기도하는 일에 소홀히 했습니다. 우리 아이는 내가 기도하지 않은 탓에 이렇게 되었습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느 엄마는 과거에는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던 사람이 자녀의 교육비를 위해서 직장을 다닌다고 저녁 늦게 퇴근하노라고 너무 지쳐서 기도하지 못합니다. 위험합니다. 차라리 직장을 그만두어서 과외는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도는 절대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 여러분이여, 교우 여러분들이여, 시대가 악합니다. 도처에 아이들을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유혹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일수록 더욱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3.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고넬료는 경건하기만 하고 사랑이 별로 없는 빡빡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동시에 불우한 사람들에게 구제에 힘쓰는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로마 군인은 잔인하기로 유명합니다. 하물며 로마 장교야 오랜 전투 속에서 전쟁을 많이 치르면서 얼마나 잔인해졌겠습니까? 아마, 많은 로마 장교들이 식민지의 백성들을 잔인하게 통치하면서 많은 것을 착취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똑같은 장교면서도 착취하거나 뇌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당하는 백성들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었으니 더욱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 가정이 영육 간에 복이 넘치었던 것입니다.
(1) 고넬료는 가정을 사랑으로 다스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에게는 많은 식구들과 본문에 ‘하인들’이라는 말도 나오는 것을 볼 때 식솔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그의 부대도 사랑으로 다스렸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부하들 중에도 감화를 받아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가정을 사랑으로 가득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가정이 좋은 이유는 사랑이 넘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너나없이 흉허물을 들추어내고 비평, 질시할지라도 가정은 서로의 결점, 서로의 실수를 감싸주는 곳입니다. 아무리 천치 같은 자식이라도 가정은 더 감싸주고 보살펴 주고 있습니다. 장형일 씨는 ‘이상적인 가정’은 다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①복잡한 세상에서 긴장하면서 살던 식구들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가정. ②신경질이 많고 거칠게 살던 식구들이 위로 받고 응석을 부릴 수 있는 시기 질투가 없는 가정.>
<③사업에 실패하고 용기를 상실할 경우 격려와 용기를 주는 가정. ④밖에서 실패하거나 잘못했을 때 용서하고 위로하며 반성의 기회를 주는 가정. ⑤찡그린 얼굴 없이 사랑과 미소가 가득한 얼굴로 생활하는 가정. ⑥식구들끼리 모여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정답게 노래하며 기쁨을 나누는 가정. ⑦하나님 앞에 하루 한 번 가정 기도회를 갖고 하나님과 의논하며 사는 가정. ⑧주일에 온 가족이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가정>이라고 했습니다.
잠언 17:1절에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한 것이 육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제 아무리 수백 평의 집에서 날마다 고기 잔치를 하며 산다 해도 언제나 싸우는 가정보다 비록 오막살이에서 가난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웃고 노래하고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가정이 바로 천국이요, 그런 가정에 행복의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국민일보 이지현 기자가 쓴 「가정행복지수 높이는 66가지 지혜」라는 책에는 이런 간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서울 동자동에 사는 이모 주부는 평소 자신의 신앙생활을 핍박하지 않았지만, ‘교회 가자.’는 말만 나오면 대단히 공격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신앙적인 본을 보이지 못한 결과인 줄 알고 어느 날부터 자기의 자존심을 버리고 남편이 시키는 일을 자상하게 대하듯 해주고 가정을 아주 사랑이 넘치고 평안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어느 주일날 아침, 남편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분 만나러가지.”라면서 싱긋 웃더랍니다. 이 주부는 고백하기를 “그 동안 남편을 존경하지 못한 나의 행동이 남편의 신앙결심을 더디게 만들었다는 깨달았다.”고 하면서 “불신남편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아내가 생활 속에서 섬기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2)고넬료는 밖으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구제를 얼마나 많이 베풀었는지 본문에 “네 기도와 구제가 상달되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기도가 상달되었다.’는 말은 이해가 되어도 ‘구제가 상달되었다’는 말은 너무나 생소합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하나님이 감동하실 만큼 구제에 많이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제를 많이 해도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야 더 많은 구제를 할 수 있는 물질을 주시게 하시는 것입니다. 눅6:38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사는 자에게는 지금도 하나님은 약속대로 시행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남에게 대접하고 구제하다 보면 부지중에 천사에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언제나 명심해야 합니다. 지난 화요일 아침에 다소 황당한 일을 당해 보았습니다.
총회역사위원회 주최로 교회사편찬세미나가 있어서 설교 차 전남 광주를 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일행과 함께 KTX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나이 많은 걸인이 제 옆에 있는 장신대 교수님에게 “아침 좀 먹게 천원만 달라.”고 했습니다. 교수님이 “잔돈이 없다.”고 거절의 뜻을 나타내서 “제가 드리지요.”하고 천원을 주었더니 저를 얼마나 축복하는지, “하나님의 크신 복이 가정과 사업, 자녀들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교수님은 듣기가 민망했는지, “그렇다면 저도 드리지요.”라고 하자, 냉정하게 “아닙니다. 이미 기회는 지나갔습니다.”라면서 단호한 모습으로 돌아서는 것이었습니다. 거지라도 아주 당당했습니다. 그 때 ‘만약에 나마져 거절했다면 얼마나 속으로 비판했을까?’라는 생각에 마음이 섬직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거지가 천사라고는 볼 수 없으나, 만약에 우리 문 앞이나 교회 앞에 오는 분들 중에 천사가 없다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이여,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가장 귀한 곳인 가정과 교회를 지키기 위해 대단히 힘쓸 때인 줄 아시고 (1)항상 경건한 삶을 사는 가정과 교회 (2)항상 기도에 힘쓰는 가정과 교회 (3)사랑이 넘치는 가정과 교회가 되도록 힘쓰므로 더 크신 은혜와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행 10장 1~33절 / 김 조목사
온 땅이여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지어다(시33:8) 성경에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176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경외”라는 말은 공경하며 두려워함, 공손히 섬기며 두려워함이라고 했는데 여기 두려워함이란 겁에 질려있는 공포가 아니라 지극히 존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건을 의미합니다. 세계 모든 거민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망령되이 행하여 멸망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되어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복을 다 받아 누리는 자 되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이방인 고넬료와 가정에 주신 복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며 은혜 받고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제목하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복음이 유다와 사마리아를 지나 이방세계(땅끝)로 확장되어가는 선교에 획기적인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당시에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 총독의 직속 군대의 장교로 백부장이었습니다. 그가 유대교로 개종은 하지 아니했으나 온 집안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던 자로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환상을 보여 베드로를 청하게 하시고(1-8절) 또한 베드로 사도에게도 환상을 보이사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시니 네가 속되다 말라는 것을 듣고 고넬료가 보낸 종들을 따라 고넬료 가정에 초청받아 왔던 것입니다.(9-33) 하나님을 경외한 고넬료의 신앙과 인격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이방선교에 선두주자로 성령 충만하게 쓰셨던 것이 참으로 엄청난 복입니다. 기왕에 하나님의 자녀되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더욱 인정과 복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지 살펴봅니다.
1. 모범적인 신앙의 가정을 이룬 사람입니다. (1-2절)
그가 경건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었다는 것으로 그의 직책이 지배자의 위치인데 피지배국에 종교를 갖는다는 것이 민족적 의식에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자기만 아니라 온 집안 식구로 더불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과 더욱이 24절에 일가와 가까운 친구까지 다 모아 베드로 사도의 말씀 듣고자 하였으니 그의 신앙 인격이 가정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외부의 모습은 위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약점과 강점을 알 수 있는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받기는 더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가족에게 인정 받아 모범적인 신앙 가정 이루었습니다. “주 예수 믿으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가족 돌아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니라”(딤전5:8) 하셨습니다. 두렵습니다. 내가 먼저 신앙의 본을 보여 가족, 친지, 친구 구원해야 합니다. 내 자녀들 신앙위해 얼마나 관심 갖고 노력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온 집안을 구원하게 하는 신앙의 가정 이루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2-4절)
제 9시는 오후 3시로 유대인들이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안해도 되는 이방인이지만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던 사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었고 실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니 모든 다 하나님께 고하였고 하나님과 통하여 교제하게 되니 하나님이 알아주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살아드리게 된 고넬료는 분명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성도들이여!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신다면 나의 사랑을 고백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항상 기도하는 삶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기를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마7:8-9, 요15:7) 특정하게 정해놓고 기도하시고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를 생활화하는 자 되어 하나님의 응답 받고 복 받는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3. 백성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입니다. (2,4,22절)
피지배자에게서 칭찬을 받는다는 것이 쉽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온 백성에게 베푸는 구제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유대인에게도 칭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그대로 이웃에게 나타낸 것으로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잠11:25) 하셨으니 구제를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식구들끼리 없을 때 밥 한 그릇을 나누어 먹는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조금 나누는 것이니 남들에게 알려서 칭찬받으려 하지 말고 합시다.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 하셨습니다. 수제민 돕는다, 고아원, 양로원 찾는다고 일시적 행사 되지 말고 지속적인 사랑 나눔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인정받는 복된 성도되시기 원합니다.
4.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5-8, 28-29절)
욥바에 베드로를 청하라는 지시에 사람을 선택하여 보내는 순종과 당시 유대인은 신7:3,4을 확대 또는 잘못 해석하여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죄악시했고 심지어 이방인이 만든 물건이나 식품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여길 때인데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러 오는 것은 당시에 전통적 관습법으로는 파격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지시이기에 베드로 사도도 순종한 것입니다. 성도들이여! 내 형편, 사정, 습관, 방법, 생각까지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는 순종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순종하기가 좀 불편하고 불이익을 당할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복을 받게 하십니다. 복 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에 결과를 하나님이 해주시는 것이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당연히 말씀에 순종하여 복 받으시기 원합니다.
말씀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지극히 공경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고넬료를 통해 이방인 선교의 첫 문이 열려졌고 오순절에 유대인에게 임하였던 성령 충만이 임하였던 고넬료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니 온 가족, 친지, 친구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였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였으며 많은 백성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구제를 많이 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하나님의 경외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복 받는 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넬료 한 사람
행 10장 1~5절 / 변한규목사
한 미국인 선교사의 사역보고서입니다. 일본에 건너가서 40년 동안을 선교했는데 전도실적은 겨우 한 사람 뿐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자기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어 세례를 받은 사람이 겨우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은 그 선교사에게 실패한 선교사라고 낙인을 찍고 비웃기조차 했습니다. 더더구나 그 한사람은 자기가 데리고 있는 가정주부였습니다. 그러나 임무를 마치고 고국에 돌아갈 무렵엔 그 가정주부의 아들이 일본신학교 학장이 되어 수많은 목회자들을 길러내고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를 실패했다고 비웃던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난 후에 실패한 선교사가 아니고 성공한 선교사구나 하면서 찬사의 박수를 보내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 사람 찾기 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모두 모두 한 사람 전도하셨습니까? 시간마다 물으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꼭 한 사람 전도해서 미국 선교사 이야기에서처럼 실패한 전도자가 아니라 성공한 전도자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넬료 한 사람”,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본문을 보니 고넬료 한 사람이 참으로 중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은 가정에서 예수 믿는 한 사람이 가족복음화를 이룰 수 있고 한 사람 고넬료 때문에 가정적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남편 고넬료 때문에 그 아내가 예수 믿고 현숙한 부인 됐습니다. 아버지 고넬료 때문에 아들 딸들이 예수 믿고 모범생들이 됐습니다. 가장인 고넬료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 등 온 가족이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한 사람이 이만큼 소중합니다. 이러한 축복이 교회를 섬기는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보십시다. “하루는 제구시쯤”(3절)이라 했습니다. 고넬료가 제9시쯤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기도입니다. 고넬료가 무엇을 위해서 기도했습니까? 고넬료 가정에 경건이 있었습니다. 경외도 있었습니다. 구제도 있었습니다. 기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 한 가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기도할 적에 아마 이렇게 했을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말씀을 주옵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듣겠나이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을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여 줄 주의 종을 보내주소서.”
때문에 제9시 기도시간에 천사가 고넬료 가정에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넬료야 부르고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설교자 베드로를 청하라. 어쩌면 꼭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모릅니다. 만사에 때가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습니다. 부임할 때가 있고 퇴임할 때가 있습니다. 부족한 종에게도 때가 있는지라 우리 모두는 후임 담임목사를 청빙하려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실 고넬료가정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가정 같은 교회요, 교회 같은 가정이 고넬료 가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본문에서 후임 목자를 찾는 우리 자세가 어떠해야 할까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이 부흥하고 교회가 부흥하려면 불가불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증거할 종을 모셔야 합니다. 어떠한 자세를 하나님의 종을 청빙해야 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가정이 부흥하고 교회가 부흥합니까?
첫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2절).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경건할 수 있고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고 믿음이 있어야 많이 구제할 수 있고 믿음이 있어야 기도할 수 있지 않습니까? 고넬료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입니까? 본문에서 순종과 겸허는 고넬료의 미덕입니다. 그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첫째 순종의 믿음입니다. 고넬료가 기도하다가 환상 중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욥바에 있는 시몬 베드로에게 사람을 보내어 집으로 청하라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순종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입니까?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의 어부입니다. 반대로 고넬료는 군대의 고급 장성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사람인데 고넬료는 유대를 식민지로 통치하는 로마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부락무식한 천민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학문과 사회적 권세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넬료는 천사의 말인지라 순종을 한 것입니다. 고넬료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입니까? 두 번째는 겸허의 믿음입니다. 고넬료는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그러니까 백 명을 거느린 군대 장교입니다. 게다가 통치권을 가진 로마의 관리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베드로를 만났을 적에 어찌 했습니까?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행 10:25-26).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상사가 하사에게 절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주인이 종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비록 신분이 식민지 백성이지만 고넬료는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에게 베드로를 하나님의 종으로 존대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모두에게 이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2절). 기도가 무엇입니까? 위기를 뚫고 나아가는 창문과 같습니다. 위기를 만났을 때 뚫고 나아갈 길은 열린 창문뿐입니다. 기도는 환난의 때, 기쁨으로 부를 수 있는 찬송과도 같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클클하고 냉랭할 때 찬송을 부르면 심령이 위로를 받고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않습니까? ♬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 그런데 고넬료는 언제 기도했습니까? 환난의 때만 기도한 것 아닙니다. 고통당할 때만 기도한 것 아닙니다. 본문에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항상 기도가 무엇입니까? 쉬지 않고 기도했다는 말이요, 기도를 호흡처럼 하고 기도를 양식 먹듯 했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처럼 기도를 쉬지 아니했다는 말이요, 눅 18장의 한 과부처럼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아니했다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14대 담임목사를 청빙하려고 할 때에 무엇이 앞장서야 합니까? 방법이 아닙니다. 수단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기도가 앞장서야 합니다. 얼마만큼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지난주간에는 청빙위원들을 중심하여 온 장로님들이 한 주간동안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온 집으로 더불어”(2절), 기도할 때에 온 성도들이 더불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할렐루야 아멘 할렐루야 아멘 기도하자 우리 마음 합하여 ♬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기도를 통하여 은혜를 체험하고 기도를 통하여 능력을 얻고, 기도를 통하여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성도와 목회자의 관계도 그것이 능력되고 축복이 되려고 하면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기도시간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났습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기도하다가 옥중에 갇힌 베드로가 철문을 뚫고 석방되었습니다. 기도는 모든 것이 없는데서 모든 것을 있게 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창고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창고입니다. 기도 있는 가정에는 마귀가 틈타지 못합니다. 기도 있는 가정에는 야곱이 받은 은총이 있고, 아브라함이 만난 여호와이레 하나님이 계식 때문입니다. 고넬료 가정은 에녹처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기도가 있었고, 자녀의 기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가정, 가정에게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가 있는 가정에 말씀이 있고, 찬송이 있고, 성령이 충만합니다. 때문에 복된 가정이 저절로 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가정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5절). 고넬료에게 학벌이 있었습니다. 고넬료에게 권세가 있었습니다. 한 가지 말씀이 없는지라 그래서 이를 위해서 기도했고, 그리고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천사가 전하여준 말씀이 바로 본문 5절입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벌써부터 베드로를 정해놓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청빙문제는 사람의 어떤 노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되 결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청함을 받은 베드로의 설교의 제1성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34절).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겉모양을 중시하지 아니하고 대신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경건의 모양을 외면하시고, 경건의 능력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사울, 사울”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사울이 아니라 다윗이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다윗을 향하여 말했습니다. “내 마음에 합한 자라.”주의 종을 청빙할 때에 내 마음에 합한 사람보다 주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모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청할 때에 혼자서만 말씀을 들으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고넬료는 먼저 전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아마 한 사람, 한 사람, 맨투맨전도를 했을 것입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24절). 일가친척,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전도했습니다. 친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모아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 사람 찾기 운동에 실패는 없다는 긍지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청함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에 어떤 말씀을 전했습니까?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입을 열어 축복의 말씀을 하늘에서 내리는 소낙비처럼 내렸습니다.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구원을 주시는 예수입니다. 38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 부어 보내심을 받은 자다, 38절 예수님은 눌린 자에게 자유와 병든 자에게 고침이 되신다, 39절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40절 예수님은 우리의 의롭다 함을 위하여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39절 우리 모두는 이러한 예수님을 위한 증인이로다. 베드로는 다른 말씀을 전하지 아니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지 아니했습니다. 오직 예수만 전했습니다. 주의 종이라고 다 복음만 전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많은 교회들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시내 어떤 교회에는 청함을 받은 후임 때문에 교회가 쪼개져서 지금도 진통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자유주의 아닌, 보수주의 교회로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칼빈주의, 정통신학으로 다져진 교회입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정규오 원로목사님이 그렇게 목회하셨고, 심히 부족한 종도 지금까지 그렇게 목회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당회는 꼭 한 가지 결의한 것 있습니다. 비록 작지만 우리 교단 안에서 후임자를 청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할 일이 있습니다. 청빙위원들과 저와 뜻이 하나가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시내 어떤 교회 사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와 장로들의 뜻이 교회가 양분된 교회가 있지 아니합니까? 선장이 여럿이면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법입니다. 물론 어려움이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습니다. 바닷가에 거닐다보면 갈매기가 내 머리위에 오물을 쏟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매기를 보고 불평하는 사람 없습니다. 말없이 그것을 얼굴에서 오물을 닦아내고 그리고 감사하지 아니하지 아니합니까? 물은 낮은 데로 흐르고 은혜는 겸손한 자에게 임합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 함께 뽕나무위에서 내려오십시다. 삭개오는 학벌, 문벌, 재벌이라는 뽕나무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뽕나무 위에서 재롱을 부리면서 교회를 비판하고 목회자를 메스로 도려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뽕나무에서 내려왔을 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비난 받는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었지 않습니까? “온 집으로 더불어”(2절),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남편과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남편, 어느 남편이 부정을 피웁니까? 어느 통계가 밝혔는데, 하나님을 믿는 남편, 30%가 부정을 피우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남편 97%가 부정을 더 피운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도박을 하는 남편이 있습니까? 외박을 자주 하는 남편이 있습니까? 아내를 구타하는 남편이 있습니까?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다가 어찌 될 것입니까? 그 결말이 어찌 될 것입니까?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믿지 아니합니까? 때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깨닫지 못합니까? 우선 지옥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죽지 아니하고 백년 살 줄로 착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죽으면 인생이 죽음으로 끝장이 아니다고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인생의 종국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가던지, 지옥으로 가던지 해야 합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결과는 비참입니다. 고인 물에 독균이 득실거리는 것을 아는 사람이면 누가 그 오물을 마시겠습니까? 왜 죄를 범합니까? 그것이 달콤하구나 라고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는 안델센 동화집에서 나오는 마치 분홍신과도 같습니다. 보면 볼수록 신음직 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으면 미쳐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분홍신입니다.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결과는 비참인 것입니다.
요나가 탄 배가 마치 우리의 가정 같습니다. 사실 풍랑 없는 가정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일어난 풍랑입니까? 요나 때문입니다. 요나가 누구입니까? 우리 모두가 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요나는 남편일수 있습니다. 아내일수 있습니다. 자녀일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일수 있습니다. 장로일수 있습니다. 권사, 집사, 평신도 나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 가정에 풍랑이 생긴 것은 요나 때문입니다. 요-나 문제입니다. 손을 다같이 드십시오. 가슴에 대십시오. 따라서 하십시오. “요 나”, 요 나가 문제입니다. 요나는 드디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풍랑의 원인이 자기 때문인 것을 알았습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욘 1:12). 풍랑이 그쳤습니다. 순풍에 돛 단 배가 되었습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우리 함께 요나가 되어야 합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요 나의 죄를 참회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요 나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자녀는 자녀들대로 요 나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는 목사대로, 장로는 장로대로, 집사는 집사대로, 권사는 권사대로, 성도는 성도대로 나를 바다에 던지소서 그래야 풍랑이 잔잔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래야 그 배가 목적지에 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내게 주신 말씀으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될 줄 합니다. 우리의 자세는 겸허한 자세여야 합니다. 청함을 받고 왔던 베드로를 만났을 때에 고넬료의 자세를 또 한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치 천사처럼 베드로를 대했습니다. 꾸벅 절을 했습니다. 고넬료는 백부장이고 고넬료는 권세가 있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그랬을 때에 베드로의 말이 무엇입니까? 나도 사람이다. 주의 종도 사람입니다. 허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 같은 사역자가 있어야 합니다. 고넬료와 같은 동역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 종은 잘 할 수 있도록 돕는 협력자가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기도가 응답받고 어떻게 모세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있었습니까? 아론 있었기 때문이요, 훌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들이 아론처럼, 훌처럼 겸허해서 주의 종을 잘 섬기는 동역자가 되어질 때에 온 교회는 만세반석 위에 서게 될 것이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줄로 믿어 마지않습니다. 가정 같은 교회입니다. 교회 같은 가정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온 성도들에게 충만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행복한 가정
행 10장 1~6절 / 고흥식목사
모든 인류 문화는 가정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최초의 기관은 가정입니다. 인간의 모든 꿈을 키우는 곳도 가정입니다. 가정 없이 공부하고, 재물을 모으고, 오락하고, 취미 생활하는 것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파괴 목표물은 가정입니다. 사탄이 가장 집중적으로 파괴하려는 곳이 가정입니다. 그러면 가정이 언제 파괴될까요? 죄가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이 파괴됩니다. 술과, 도박, 그 밖의 악한 행동들을 사탄이 이용해서 가정을 파괴시키면 결국 나라가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이 죄에서 승리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모든 마귀를 멸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승리케 하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이 지구상에 가장 단단한 가정이 있다면 가정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유대인 가정입니다. 유대인은 13살이 되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성경말씀대로 살 것을 서약합니다. 그리고 아침이면 아버지들은 자녀에게 성경을 교육시키고, 기도해 줍니다. 주일이면 아버지가 자녀의 머리에 안수하고, 예배드리러 갑니다. 유대인 학교에는 필히 하루에 한번씩 기도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가 맑은 오전 시간에는 오직 성경만 교육시킵니다. 정통 유대인 어린이는 모두 새벽 예배에 참석시킵니다. 그리고 집집마다 문설주에 신 6:4-9절 말씀을 쉐마(hear all israel)라고 해서 붙여 놓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찌니라 (신 6:4-9)"
"The Lord is one.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strength."
미국의 유대인들도 그 성경 구절을 목표로 살고 있습니다. 학교 최고 인기 있고, 권위 있는 사람은 랍비입니다. 그리고 성경 점수를 최고 학점으로 여깁니다. 성경점수가 합격이 안되면 졸업이 안됩니다. 이렇게 교육받은 유대인들 중에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 심리학자 프로이드, 정치가 키신저, 재벌가 록펠러와 영화배우 채플린, 음악가 쇼팽, 맨델스죤, 쥬라기 공원의 저자인 스필버그 등이 있습니다. 교육의 아버지인 페스탈로찌는 “이 세상 기쁨 중 가장 큰 기쁨은 가정의 웃음이다."라고 했습니다. 가정에는 돈이나 가구, 비싼 가전제품보다 웃음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앞집과 뒷집 두 집이 있었습니다. 앞집에 시어머니가 솥에 쌀을 안치고 새로 맞은 며느리에게 불을 피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험이 없는 며느리는 계속 불을 피우다가 결국 밥은 타고 솥까지 깨지고 말았습니다. 겁에 질린 며느리가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들어와서 “내가 물을 적게 부었구나 걱정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또 시아버지가 들어와서 “내가 나무를 너무 많이 해 가지고 왔구나 내 책임이다”고 말했습니다. 신랑도 들어와서 “내가 물을 너무 적게 길어왔구려 내 잘못이오 심려하지 마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양조장을 하는 뒷집에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시어머니가 술밥을 솥에 잔뜩 넣고 새 며느리에게 불을 피우라고 했습니다. 역시 경험이 없는 며느리는 계속 불을 지피다가 술밥도 타고, 솥도 깨졌습니다. 그러자 시어머니가 들어와서 욕을 하면서 “도대체 너는 시집 오기 전에 뭘 배웠니? 솥이 100개라도 모자라겠구나”라고 말하자, 며느리가 “제가 일부러 그랬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을 들은 시아버지가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시어머니에게 턱 들고 대드느냐?”며 말하자 또 며느리는 “사람이 말도 못하고 살아야 합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신랑이 따귀를 때리며 말합니다. “어디서 굴러먹던 개 뼉다귀야” 며느리는 악을 쓰면서 “날 죽이라”며 소리 지르고, 신랑은 손을 휘두르고 신부를 두들겨 때립니다.
이렇게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화평한 가정이 되기도 하고, 아수라장 같은 가정이 되기도 합니다.
본문의 말씀 사도행전 10장은 고넬료의 가정에 대해서 나옵니다. 고넬료는 이스라엘 가이사랴 지방에 파견 나온 로마의 고급 군대장교입니다. 어떻게 그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 되었을까요?
1. 신앙 성공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2)”
그의 가정은 신앙생활이 철저하고 잘된 집안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는 설명이 없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귀족이나 고급장교는 이스라엘 처녀를 아내로 삼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사회가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신앙에 성공했습니다. 고넬료는 경건(godliness)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는 뜻입니다. 구별된 가정으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만 취하고, 끊을 것은 끊고, 지킬 것은 지켰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위해서는 버릴 것은 버리고, 끊을 것은 끊어야 합니다. 술과 담배, 도박, 마약, 지나친 오락을 버려야 합니다. 고넬료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섬기고, 구제하고, 기도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이런 가정이 복된 가정입니다.
어느 가정에 아버지는 무실론, 어머니는 보살, 남편은 천주교, 아내는 기독교, 딸은 여호와 증인, 아들은 안식교로 종교 얘기만 하면 콩가루가 됩니다. 아무리 종교의 자유가 있다해도 과연 그것이 행복할까요? 한 집안에서 한 하나님, 한 성경으로, 받은 은혜를 간증하며 사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어느 가정에 노모가 일생동안 불교신자였습니다. 사찰에 자기 가족 이름을 불적에 올렸는데 예수님을 믿는 며느리와 6살 된 손자까지 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습니다. 식사 때가 되면 6살 손자가 할머니에게 기도하자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 아들까지 예수님을 믿게 됐습니다. 아들과 며느리가 최선을 다해서 어머니께 효성을 다합니다. 가정 분위기가 점차 예수님을 믿는 분위기가 됩니다. 어느 날 극적인 사건이 생겼습니다. 노모가 아들과 며느리를 불러놓고, “너희가 다 예수를 믿는데 나 혼자 절에 다닐 수 없구나 나도 종교를 바꿔야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찰에 전화해서 우리 가족 모두 예수 믿고, 나도 더 이상 건강이 나빠 절에 갈 수 없으니 불적에서 빼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노모도 교회에 나오게 됐습니다. 이것이 가정의 행복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에 자유가 있고, 신앙은 개성이고, 멋대로 하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할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뻔히 지옥 가는 줄 알면서도 신앙의 자유대로 멋대로 하라고 한다면 절대로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소망은 행복입니다. 돈이 많다고, 집이 크다고, 지식이 많다고 행복합니까? 그렇게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었던 유명한 소설가 헤밍웨이는 결국 호화스런 별장에서 권총으로 자살하고 맙니다. 그것이 행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기 있는 영화배우이자, 세계적인 스타인 마를린 먼로는 케네디 대통령과도 가까이 지냈지만 의문의 자살을 합니다. 아름다움도 행복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일본의 노벨 평화상을 받은 <설극>의 저자인 유명한 지식인인 야스나리도 음독 자살했습니다. 사람은 가진 것, 배운 것, 먹을 것,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고급 제품일수록 고장이 나면 만든 곳에서 AS를 받아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하나님의 디자인품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우리나 가정은 하나님께 맡겨야 하나님이 행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영국의 제임스 왕이 나라를 통치할 때 괴롭고 복잡한 심정을 달래느라 민정사찰 겸 시골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물레방아가 도는 시골집을 가고 있는데, 은은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노부부가 노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보니 물레방아를 찧으면서 노부부가 은혜스런 노래를 합니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 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크신 은혜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 하여도 이 세상의 권세자들 날 부러워해 성령충만 받은 것을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제임스 왕이 찬송하는 노부부를 보니, 천국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엇 때문에 기쁘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성경은 읽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살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제임스 왕이 성경책을 읽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70명의 언어학자를 동원시켜서 수많은 연구비를 투입해서 신약성경에 있는 헬라말로 돼 있는 성경, 구약성경에 있는 히브리말과 아람어로 돼 있는 성경을 다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만든 성경이 King James Version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흠정역 개역판입니다. 가장 원문에 가깝게 번역한 성경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전 영국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섬겨서 행복한 가정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본래 영국은 해적나라였습니다. 무자비하게 사람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았던 무례한 해적나라가 말씀대로 살아서 신사나라가 됐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행복은 주님 안에 살 때 주어집니다.
2. 은혜 사모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24)”
고넬료는 환상 중에 베드로를 청하라는 천사의 계시를 받고, 즉시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모셔 오도록 했습니다.(7)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25)”
고넬료는 아마 고급관사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집도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입니다. 고넬료는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고급 장교인데, 베드로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점령당한 속국의 백성일 뿐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면서 맞이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종이기에 은혜를 사모하는 모습, 여기에 행복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기다렸습니다. 은혜도 함께 받을 때 더 커집니다. 은혜 받은 사람끼리는 대화가 통하고, 뜻이 통하지만, 은혜 받지 못한 사람과는 동문서답이 될 때가 많습니다.
봄과 가을이 되면, 가정 심방을 가는데, 자녀들과 부인은 교회를 나오는데 남편은 집안청소를 도와주고, 목사님이 오기 전에 빠져나가거나, 안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침 방에 있는 남편에게 예배 후에 가서 손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쑥스러워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남편도 예수님을 믿게 되어 그 가정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강압적으로 손 붙잡고 기도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참 늦었을텐데”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온 가족이 모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복된 가정이 됩니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 17:1)”
이스라엘 가정에서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 후에 떡을 나눕니다. 그래서 식탁의 장소가 신앙의 장소입니다. 민족언어는 그 민족문화를 표현합니다. 우리 나라는 밥 많이 먹으라는 등의 먹는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부모 자식간에도 “샬롬(평화)”이라고 인사합니다. 구약성경에 샬롬이 350번이나 나옵니다. 인사할 때 샬롬이라고 했는데 인사를 받지 않는 사람을 도적으로 봤습니다.
나팔꽃이 쇠기둥을 감고 올라갈 때는 태풍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 약한 담장이 줄기도 벽에 붙어서 올라갈 때는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찢어지기 쉬운 스티커도 아파트 철문 앞에 붙으면 찢어지지 않습니다. 깨어지기 쉽고, 약한 가정이라도 주님께 붙어 있으면 찢어지거나 망가지지 않습니다. 은혜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온 가족이 모두 은혜 속에 살아야 합니다.
예진이와 예찬이 어머니에게 고등학교 동창들이 와서 목걸이 자랑, 진주 자랑, 다이아몬드 자랑을 합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 손에는 18K반지 하나만 끼워져 있습니다. 예진이와 예찬이가 그 어머니를 보며 부끄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이 어머니에게 “너는 자랑할 것이 없냐?”고 묻자, “나는 아주 귀중한 보석이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깜짝 놀라며 엄마가 숨겨 놓은 보석이 있나 생각할 때 엄마가 두 아이를 꼭 안으면서 “나에게 최고의 보석은 하나님이 주신 예진이와 예찬이지”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두 아이의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엄마가 최고라고 느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속에 살아야 행복합니다. 우리 가정에 큰 자랑이요, 행복은 하나님의 큰사랑 받고, 소망 있는 자녀를 만드는 것입니다.
3. 성령 체험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44-47)”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34)”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니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38)”
이 은혜의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이 그들 가정에 임했습니다. 가족 식구가 다 방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신령한 은혜체험과, 은사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영락교회성도는 금요철야기도, 부흥성회, 특별집회를 통해 늘 신령한 은혜와 은사를 받고, 체험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은혜의 말씀을 듣고, 찬송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시간에 성령을 체험하게 됩니다. 신앙 생활에 신령한 체험과 은혜체험을 못하면, 잘못하면 비난하거나, 부정, 공격하기가 쉽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 함께 성령을 받아야 가정이 행복합니다. 그러면 왜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그것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온유와 절제니(갈 5:22-23)”
온 가족이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없어집니다. 식어진 사랑이 회복되고 잃어버린 생의 기쁨이 회복됩니다. 그리고 증오와 갈등, 다툼이 화평으로 변하고 조급함과 다혈질이 인내와 화해로 바뀝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성령을 체험하고 충만히 받아야 합니까? 이 성령충만을 받으면 어떤 말로도 변화지 못했던 남편이 바뀌어지고, 조급하고 답답했던 아내가 바뀌어지고, 자녀가 바뀌어집니다. 그래서 다 성령체험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일 때 나쁜 쪽으로 변하는 것은 악령의 역사입니다. 그 모임 자리가 비난을 하고 나쁜 말을 하는 것은 악한 영이 역사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모임자리가 좋은 쪽으로 변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좋은 것은 강제성이 있어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는 6명은 잃고 13자녀를 기르면서 한 살 때 매가 무서운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소리내서 울지 않도록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자기고집을 부리지 않고,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요즘 인기 있는 자녀 교육 책이 “자녀에게 매를 대는 자녀가 잘된다”입니다. 성도도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은 꺾어야 합니다. 영국의 퀘이커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체험을 하면 이런 변화가 생긴다 입술에는 진리를, 음성에는 기도를, 눈에는 긍휼을, 손에는 봉사를, 행위에는 정직을, 마음에는 사랑을 갖게 된다”
우리 모두 가정마다 성령충만한 모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탈무드란 책에 보면 “어리석은 사람은 자녀들에게 재산을 남기고, 양식 있는 사람은 자녀들에게 지식을 남기고, 지혜 있는 사람은 자녀들에게 신앙을 남긴다” 그 어느 날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나 어머니는, 나 아버지는 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노라고 자식에게 자신있게 고백하려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가정에서 영원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교회에서 큰 헌신하며 살았다고 유언을 남길 수 있는 귀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왜 성령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마치 엑스레이와 같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내 속에 하나님의 영이 샅샅이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다 고쳐주십니다. 절망과. 낙심 중에 있는 성도도 성령충만을 받으면 회복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하나님께서 태초에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함께 먹고 자고 동거합니다. 그러나 한 지붕 밑에 있는 가족도 성격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개성도 다릅니다. 동거는 하지만 하나가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표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한 하나님, 한 성경, 한 영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사탄의 가정, 성령의 가정
행 10장 1~6절 / 김홍도목사
저는 엊그제 충격적인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몇 일 전 40대 남자가 여학생 둘을 안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자살했는데, 그 사람이 네팔의 선교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가 복음은 전하지 않고 이슬람교에 깊이 심취해 있었고, ‘칼리’라고 하는 여신을 숭배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속에 마귀가 가득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마귀는 우리에게 불신을 주고, 불안과 공포를 주다가 자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 것은 마귀가 주는 불안과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 권사님 아들이 마귀에게 사로잡혀 옷을 다 벗고 미쳐서 날뛰었습니다. 그 원인은, 대학교 다닐 때 R.O.T.C. 훈련을 다 받고 막 장교로 임관하려던 참에 그 친족 중에 적색분자가 있다고 임관을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울분과 고민과 불안을 참지 못해서 완전히 미쳐버렸던 것입니다. 옷을 다 벗고 동산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며 누구든지 가까이 오면 돌로 쳐죽인다고 위협했습니다. 온 동네 사람이 그 동산 주위에 모여서 구경만 하고 있으니까 그의 노모가 가까이 다가갔는데, 어머니도 못 알아보고 둘러 메치고 발꿈치로 엄마 눈을 밟고 비벼대니까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그 때에 저는 예배당 안에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떤 교인이 와서 큰일났다고 그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총각 전도사 때인데 큰일이 났습니다. 가면 돌에 맞아 죽겠고, 그렇다고 숨어있을 수도 없어서 준비기도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한 말씀을 외우며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달라고 기도하며 그 청년에게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가까이 가자 귀신들린 청년이 무릎을 착 꿇더니 손을 싹싹 비비며 “아이구, 하나님, 제발 살려주십시오”하며 비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청년을 꽉 붙드니까 그제서야 밧줄, 전기줄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와서 묶어가지고 기도원으로 갔다가 몇 달 후에 나아서 내려온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온 동네 사람들 앞에서 주의 종의 권위를 세워주시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마귀의 존재를 몰랐더라면 나는 목회도 못했을 것이고 마귀한테 속아서 자살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습니다. 사람은 영물 즉 영적 존재이므로 사탄의 영 즉 마귀의 영의 지배를 받느냐, 하나님의 영 즉 예수의 영이신 성령의 지배를 받느냐에 따라 행, 불행이 결정되고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따라서 가정도 마귀의 영의 지배를 받는 가정과 예수의 영 성령의 지배를 받는 가정 두 가지 가정으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고 가장 크게 관심을 가지신 두 조직체가 있는데 하나는 교회요, 다른 하나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끊임없이 가정과 교회를 공격하고 파괴하려고 듭니다. 마귀가 역사 하는 가정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불행합니다.
한 가정에 마귀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한 사람만 있어도 그 가정은 평안치 못하고 불화와 근심이 떠나지 않고 또 사탄이 공격하면 불행과 사고와 재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당대의 의인이며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이었지만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공격하기 시작할 때,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이 불에 타 없어지고 도적 맞아 다 없어졌습니다. 욥이 그래도 하나님을 원망 불평하지 않자 이번에는 욥의 열 남매가 맏형의 집에서 잔치 음식을 먹을 때 대풍이 불어 집 네 모퉁이를 치자 폭삭 무너지면서 열 남매가 다 깔려 죽었습니다. 그래도 욥이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자 이번에는 욥의 온 몸에 문둥병과 같은 악창이 나서 피고름이 흐르고 구더기가 우굴거렸습니다. 욥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참으니 사탄이 항복하고 도망갔고, 하나님은 그 전보다 배나 축복을 해 주었습니다.
욥의 기사를 보더라도 사탄이 재산을 다 빼앗고 잔인하게 열 식구를 다 죽게 하고, 욥에게 질병으로 고통을 갖다 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침범을 막고 식구들 중에 마귀에게 끌려가는 일이 없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가정이 사탄의 지배를 받지 말고 하나님의 영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성령 충만한 가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탄 마귀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하고 성령은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1. 마귀는 어떤 존재인가
천상세계에 세 천사장이 있는데, 미가엘이라는 군대(천군)장관이 있고, 서기장관이라고도 하고 소식 정보의 책임을 진 가브리엘이 있고, 루시퍼라고 하는 친위대장, 즉 경호실장이 있었습니다. 이 세 천사장 중에 루시퍼(계명성)가 가장 높은 천사장이었습니다. 루시퍼 천사장이 자기 위치에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고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다가 하늘에서 쫓겨났고, 그의 부하들 반역에 가담했던 천사들도 저주를 받아 마귀 혹은 귀신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 14장 12-14절에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탄 마귀의 기원입니다(에스겔 28장 13-17절). 오늘날 마귀는 우리에게 교만을 집어넣어 타락시키고 멸망케 합니다.
이 마귀는 지?정?의의 인격을 가졌고 능력과 권세가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는 이길 수가 없고 큰 주권과 위엄을 가졌습니다(유다서 1장 9절). 예수님은 마귀를 세상의 왕(요한복음 14장 30절)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① 도적질하고 죽이는 살인자입니다
마귀는 한 마디로 잔인한 놈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고 영생을 주시는 분인데 반하여 마귀는 도적질하고 살인하는 잔인한 놈입니다. 욥의 열 식구를 비참하게 죽인 것도 사탄의 짓이고, 요사이 총기를 난사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자기도 자살하고 남까지 자살하게 하는 것도 마귀의 역사입니다. 마귀 집혔다가 나은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보면 “쥐약 먹어라. 쥐약 먹어라”하기도 하고, “기차 길에 누워 죽어라”하는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600만 명을 독가스로 잔인하게 죽인 것이나 스탈린, 모택동 등이 수 천 만 명씩 죽인 것도 사탄의 역사입니다. KAL기를 폭파해 죽이고 지금도 처참하게 죽이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악행은 마귀의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귀는 거짓말장이요 살인자”(요한복음 8장 44절)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말세가 되어서 사탄의 영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② 마귀는 범죄케 합니다
사탄이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도 짓게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도적질하고 술 먹고 담배 먹고 음란한 죄를 짓고 도박하는, 이 모든 죄를 짓는 사람은 마귀에게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들이 이혼하는 것도 가정을 파괴하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즉시 회개하고 예수의 피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으로 무장해야 됩니다.
③ 잘못된 견해를 갖게 합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했는데 마귀는 “하나님이 너도 눈이 밝아져서 자기처럼 될까봐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 했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진리를 곡해하게 만들고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그 중에 이 세상 신(마귀)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했습니다. 요사이 이단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다 미혹케 하는 귀신에게 속아서 넘어가는 것입니다.
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해하고 곡해하게 만들어서 분쟁을 일으키고 원수가 되게 해서 가정이나 교회를 파괴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홧김에 일시적인 감정으로 어떤 일을 판단하거나 결정지으면 안됩니다.
④ 마귀는 거짓말을 하게 합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마귀의 특성은 살인자, 잔인함이요, 거짓말쟁이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거짓말을 제것처럼 진짜처럼 합니다. 항상 진실하고 정직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미워하시고 저주하신 까닭은 외식하는 것 때문입니다.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속에는 마귀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이단 신학은 성경에 배치되는 거짓말이요, 마귀의 사상입니다. 이단 신학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파괴하는 가장 큰 사탄의 도구입니다.
⑤ 질병을 일으킵니다
마귀는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고 하신 말씀과 같이 사람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건강을 도적질하여 질병을 일으키고 생명까지 도적질하여 죽이는 일을 합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마귀에 눌려 병든 자를 고쳐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11절에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했는데, 예수께서 안수하시고 고쳐 주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외에 “벙어리가 되게 하는 귀신”, “귀머거리 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 고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잠 못 자고, 불안, 공포에 떠는 것, 쓸데없는 생각으로 고민하는 것, 죽고 싶은 생각 등은 다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탄”이란 말은 “사타나스”, 헬라어로 “대적자, 반역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와 목사를 대적하고 부모를 대적하고 반항하는 것도 마귀의 역사입니다. “마귀”란 “디아볼라스”라고 하는데 “중상자, 비방자”란 뜻입니다. 영어도 “애큐저”(accuser)라고도 하는데 목사나 교회를 트집을 잡아 비방하고 고발하며 중상모략 하는 일을 합니다. 계시록 12장에 “밤낮 참소 하던 자”가 쫓겨났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영어로 “아포스테이트”(Apostate)라고도 하는데, “변절자, 배신자, 배교자”란 뜻입니다. 가룟 유다에게 마귀가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어서 배신하게 만들고, 그 후에는 자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마귀가 어느 교인한테 들어가면 한동안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자신도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2. 성령은 어떤 분인가
가정이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사탄이 침범치 못하고 식구들이 몸과 마음이 안전하고 건강해 질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사탄의 영, 악령과는 반대입니다. “거룩한 영”이며,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입니다. 하나님을 모신다든가, 예수님을 모신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신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6장 8절에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죄를 안 짓게 됩니다. 성령은 지?정?의(Knowledge, Emotion, Will)의 인격을 가진 분입니다.
① 성령은 거듭나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사람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는 두 번 태어난다는 뜻이고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육신이고 영혼은 영이기 때문에, 죄로 죽었던 영혼이 예수를 믿고 영접함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이나 남편이나 부모가 다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거듭날 수가 없습니다.
② 성령은 기도하게 합니다
마귀는 기도를 못하게 방해하지만, 성령은 기도하게 하는 기도의 영입니다. 로마서 8장 27절에 “.....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 하심이니라”고 했고, 8장 26절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 충만하려면 그 집에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기도를 쉬지 않으면 끊임없이 성령이 역사 하면서 마귀가 침범하지 못합니다. 교회도 성령 충만한 교회는 기도 충만한 교회입니다.
③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영이라면 성령은 진리의 영이며 진리를 깨닫게 하고 진실하게 만듭니다. 요한복음 16장 13절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하셨고, 요한복음 14장 17절에는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받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9-10절에 보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④ 성령은 위로의 영입니다
성령을 “보혜사”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위로자”(Comforter)라는 뜻입니다. 세상이 위로하지 못하는 슬픔과 아픔과 상처를 성령께서는 위로해 주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6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하셨고,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상처받고 슬픔을 당하고 고통을 당해도 주님께 내어놓고 기도하면 성령께서 오셔서 위로해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정들이 늘 기도에 힘쓰고 예배에 충실하며 말씀을 가까이 할 때 평안한 가정, 복된 가정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는 사람
행 10장 1~6절 / 최응희목사
저는 우리 교회 22명의 성도들과 함께 지난 9일 동안 성지순례를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야말로 순례였습니다.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지치는 여정도 없지 않았지만, 그것이 순례이기에 모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성지순례는 관광이 아닙니다. 멋진 풍경이나, 맛있는 음식이나, 재미있는 놀이를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순례단들에게 말했습니다. 역사나 예술품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순례의 길은 '생각하는 것만큼 느낀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관광하는 마음으로 보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더운 날씨에 회색빛 건물들과 풀한포기 없는 땅덩어리들과 one달라를 외치는 아이들의 소리밖에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순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순례는 생각하면서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담으면서 그곳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의 어떤 것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2,000년을 뛰어넘어 거기 예수님의 발자국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시간을 뛰어넘는 눈과 귀를 가지고 보고 듣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례입니다. 관광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볼 것이 없습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2008년의 거기 있는 것들과 오늘의 소리를 듣기 때문입니다.
이번 순례단은 아주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기도하고, 2,000년의 세월을 넘어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찬양을 부르며,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광야와 사막을 거닐으며 출애굽의 백성들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앉아 엘리야의 마음도 담아보았습니다. 새벽 무수한 별빛 쏟아지는 시내산을 올라 그곳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울며 울며 그 골고다를 올랐고, 엘리야의 불제단에서 함께 뜨겁게 기도하는 감격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그 보고싶었던 갈릴리에서 배를 타고 성만찬을 하며 가슴이 뜨거워졌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은혜는 함께 했던 성도들의 맑은 영혼, 사모하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비록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믿음으로 마음을 나누었던 모든 성도들의 기도 때문인 줄 믿습니다. 지난 주일 교회를 지키며 기도 가운데 함께 하셨던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고넬료라는 로마군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유대 총독부가 있는 가이사랴에 주둔하는 로마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오늘 날로 말하면 대대장이나 중대장 쯤 되는 장교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성령을 받고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아 첫 번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믿음의 행위들을 기쁘게 받으시고 기억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이 어떠하였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기억하시며 그에게 그렇게 큰 복을 내리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그의 경건을 기억하셨습니다.
본문에서 고넬료를 소개하는 첫구절은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2절)라는 구절입니다. '경건'이라는 말은 쉽게 말하면 '믿음이 깊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며 무릎꿇는 믿음이 경건입니다.
여러분, 경건의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비록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느라, 믿음 다 잊어먹고 살았다 해도, 교회에 와서만이라도 경건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예배 때만이라도 경건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경건--하나님께 진심으로 무릎을 꿇는 믿음입니다. 비록 세상에서 바삐 사느라 말씀 잊어먹고 속되게 살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예배에서 만이라도 경건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온 마음을 다해서 예배 드리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믿음 다 놓치고 살다가, 예배마저도 허둥지둥 와서 대충 찬송하고 딴 생각하며 기도하다가 무심하게 말씀 듣고 간다고 하면 어디서 경건을 회복하며, 어디서 믿음을 회복하겠습니까!
경건이 있어야 믿음이 성장합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며 무릎꿇는 경건이 있어야 믿음이 upgrade 됩니다. 이번 성지순례단은 아마도 자신의 믿음이 upgrade되는 경험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성지를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여러 번의 감동과 눈물과 무릎꿇는 뜨거운 기도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경건입니다. 경건--하나님 앞에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며 진심으로 무릎을 꿇는 믿음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이었지만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10:24의 말씀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초청을 받아 갔을 때의 그 집 분위기와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튿날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하나님 앞에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며 그 앞에 무릎꿇어 기다리는 믿음-- 그것이 고넬료의 믿음이요, 바로 경건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고넬료의 경건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특별히 기억하시고 사랑과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깊은 영성을 기억하셨습니다.
고넬료를 소개하는 두 번째 구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2절)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가 환상 중에 나타나서 말씀할 때에도 이르기를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4절) 하였습니다.
고넬료는 거친 생활을 하는 로마의 군인이었음에도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환상을 볼만큼 영적인 생활에 힘을 기울인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이웃을 돌아보는 구제에 힘쓰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아주 건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통 영성이라고 하면 기도만을 생각합니다. 기도 열심히 하는 것을 영성이 깊다고 말합니다. 물론 영성의 첫 번째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깊은 영성은 기도와 함께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와 구제' 그것이 영성의 두 기둥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영성입니다.
우리 안디옥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깊고 건강한 영성의 믿음을 주시기 축원합니다. 우리 안디옥 성도들에게 뜨거운 기도의 믿음과 함께, 모두 물질적으로 풍성한 복을 받아서 더 베풀고 나눌 수 있는 깊은 영성, 건강한 영성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번에 순례단은 두 나라 이집트와 이스라엘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가외로 느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우리나라가 정말 잘 사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거리도 깨끗하고, 화장실 깨끗하고, 귀찮게 하는 사람들 없고, 얼마나 잘 사는 나라요, 복을 받은 나라인지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지금까지는 받고, 채우는 데서 축복의 개념을 가졌었지만, 이제는 받는데서보다 나누는 데서 기쁨을 얻고, 채우는 데서 만족을 얻기 보다 주는 데서 삶의 참 만족을 얻는 바른 축복의 개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만족이 없고, 공허하고, 허무한가? 끝없는 욕망에 끌려 살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계속 채우려고 하면 결국 채우지 못한 채, 공허만 깊어질 것입니다. 오히려 참 복된 사람은 사명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날마다의 삶 속에서 잡초처럼 무성해지는 욕망을 뽑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자신을 드리는 삶--그것이 사명의 삶입니다. 그런 삶 속에는 공허가 없습니다. 열매가 있습니다. 기쁨, 감사, 만족, 풍성함이 열매로 맺혀집니다. 이런 삶이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고넬료는 그렇게 기도와 함께 나눔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기억하신 것입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기도는 믿음생활의 대표요, 구제는 실천의 대표입니다. 고넬료는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믿음대로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와 구제를 받으시고 기억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 큰 축복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경외의 믿음을 기억하셨습니다.
'경외'는 너무 거룩하여 그 앞에 두렵고 떨림을 느끼는 마음입니다. 믿음은 경외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 앞에 순종하는 믿음이 되고, 적어도 교회에 나와서 겸손히 무릎을 꿇는 것이요, 진실함과 사모함으로 예배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대충대충의 믿음, 아무렇게나 드리는 예배는 다 하나님 경외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경외의 믿음으로 늘 하나님께 무릎꿇어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경외의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더 좋은 믿음과 말씀과 은혜를 주시기로 마음먹으셨습니다. 그래서 환상 중에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그곳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하라' 그래서 고넬료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욥바에 있는 베드로 사도를 청하게 되었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를 향해 출발하는 시간에 베드로는 정오 기도시간이 되어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큰 보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속에는 유대인들 부정하게 여겨 먹을 수 없는 각종 짐승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제가 전혀 먹은 적이 없습니다.' 소리가 들리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일이 3번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것이 무엇일까하고 생각하는 중에 밖에서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여 고넬료가 본 환상을 소개하며 가이사랴로 함께 가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때야 이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욥바에서 35km나 떨어져 있는 가이사랴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고넬료의 경건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10:25의 말씀을 보면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인간 베드로에게 절함이겠습니까? 베드로를 보내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고넬료는 점령군 로마의 장교였습니다. 그런데 피지배민족의 어부출신 베드로에게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한다'는 것은 그의 하나님 경외의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므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다니 즉시 보내고, 하나님의 일이기에 충성을 다하는 믿음 - 그것이 진실된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고넬료에게서 이런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경외의 믿음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경외의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경외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믿음, 그래서 기쁘게 복을 내리시는 믿음, 그 믿음이 여러분의 믿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건강한 그리스도인
행 10장 1~6절 / 이정익목사
그리스도인은 무엇 보다 건강한 신앙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건강함”, 얼마나 좋은 단어입니까. “정신의 건강”, 정신이 맑고 깨끗한 신앙인의 삶, 얼마나 축복입니까. 마음도 건강해야 합니다. 또 생각도 건강해야 하고 건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건강입니다. 좋은 생각, 좋은 마음, 좋은 정신도 중요하지만 건강한 믿음은 더 중요합니다. 믿음이 건강하면 완성된 삶을 살고 균형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렇게 정신도 마음도 생각도 믿음도 건강한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고넬료라는 사람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기독교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제 이방사회로 확산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제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이방사회로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열두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느라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들로서는 이제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복음이 세계화 하는데 로마라는 걸림돌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를 통하지 않고는 세계화 될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교회의 구성원 90%가 유대인입니다. 당시 유대인은 로마를 전복하고 해방을 갈구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점이 로마인들에게 미움과 증오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누군가는 이 장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복음이 로마로 전파되는 과정에 교량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때 고넬료가 등장합니다. 이 고넬료를 하나님이 예비하셨습니다. 고넬료는 누구입니까. 고넬료는 사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의 지휘관이었고 로마총독 직속 백부장이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에서 100km떨어진 북서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사마리아는 역대 로마총독들이 아주 중요시 하던 교통 요충지였고 군사전략 기지였습니다. 그곳에 주둔한 로마군의 지휘관이 백부장 고넬료였습니다. 이 사람이 로마인이면서도 이미 회심한 사람입니다. 아주 철저하게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되라고 했는데 로마를 전도하는데 다리 놓을 적임자가 고넬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미리 이때를 위해서 준비시켜 놓으신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아주 건강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정신도 마음도 생각도 삶도 역할도 아주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이 건강한 신앙인이 되려면 몇 가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고넬료가 그 점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한해를 살아가는 동안 여러분들이 이렇게 건강한 신앙인으로 살았으면 합니다.
1. 자신 사랑
고넬료는 자기 자신을 아주 잘 가꾸고 관리하고 사랑한 사람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잘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군인 이었고 이방인이었음에도 누구보다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인이었습니다. 자기 뿐 아니고 온 가족을 이미 복음화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자기에 충실한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입니다. 나 없는 천국, 나없는 부활, 무슨 소용입니까. 성경은 “한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내 생명 내 영혼이 그렇게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얼마나 축복입니까. 그것도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믿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자기 뿐 아니고 본문을 보면 온 가족 모두를 복음화 시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알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미국 과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이라는 사람이 미국교회협의회 사무총장 캠벨목사에게 “어떻게 당신같이 똑똑한 사람이 예수를 믿는가”하고 의아해 하였습니다. 그러자 캠벨목사가 “어떻게 당신같이 똑똑한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는가”하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깊이 믿는 것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복음서에서 유독 칭찬받은 사람이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하나는 수로보니게 여인이고 또 하나는 본문에 나와 있는 백부장입니다. 이 두 사람은 따지는 믿음이 아니고 전적인 믿음으로 칭찬받은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따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스펄전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신앙이 아니고 절대 믿음의 신앙을 갖는 일이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계산하지 않는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오늘 대부분은 계산하며 따지며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도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그런데 내 믿음이 깊고 든든하고 계산하지 않고 믿는 믿음은 더 큰 은혜입니다. 고넬료의 믿음이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자신을 정말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2. 하나님 사랑
고넬료는 자기만 사랑한 것이 아니고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는 날마다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인가 기도하는데 환상이 보였습니다. 환상 속에서 베드로를 청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청하여 온 집안사람 모두가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하나님도 고넬료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그 삶이 무게가 있고 깊이가 있고 은혜가 있고 삶의 중심이 하나님 중심이 되게 됩니다.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자리를 잡으시면 모든 삶의 중심과 판단과 우선순위가 일사분란하게 잡힙니다. 그런 삶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레오 날도 다빈치에게 42세 된 밀라노의 로드비치 공이 예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가 왔습니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서 완성한 후 친구에게 평가를 부탁했습니다. 친구가 그 그림을 보더니 감탄을 했습니다. “좌우에 제자들을 배치한 것이 좋고 무엇보다도 손에든 은잔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붓으로 그림을 지워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친구가 왜 아깝게 그림을 지워버리느냐고 하자 “이 그림은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잔이 중심이라니 실패작”이라면서 지워버렸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 살아가면서 솔직히 이렇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나는 얼마나 중심이 분명한가, 나는 과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신앙인의 삶은 예수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은잔이 중심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예수는 액세서리로 전락하고 맙니다.
청교도들이 1620년 미국 땅으로 건너갑니다. 거기서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은 곳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가장 먼저 교회를 건축했다고 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이곳까지 왔는데 그들은 목적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학교를 건축했습니다. 2세들을 교육하고 키워야 미래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은 맨 나중에 지으면서 유념한 점은 창문을 열면 교회가 보이도록 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길을 닦을 때는 모든 길이 교회로 통하게 닦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음의 중심을 잡고 살아갔으니 그들과 그 후손들이 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고넬료는 그 삶이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온 가족이 하나님 중심의 믿음을 가지고 살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방인이고 군인이고 로마군의 점령군 장교였는데 이렇게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군인을 사랑하였습니다.
3. 이웃 사랑
고넬료는 하나님만 사랑한 것이 아니고 백성도 사랑하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자기민족이 아니고 지금 지배하고 있는 국민을 사랑하여 구제를 많이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을 때 이 땅에 와 있던 일본군 고위 장교가 우리민족을 사랑하였다는 말이 없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신 것입니다. 신앙인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소극적으로는 이웃에게 예의를 지켜야 하고 상처 주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일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중보사역도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성경을 보면 대표적인 중보기도가 몇 번 나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입니다. 조카 롯이 소돔에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소돔을 심판하실 것을 알고 몇 번씩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의인 열 명이 있는데도 그 성을 멸망하시면 안 된다고 얼마나 늘어지면서 중보기도를 했습니까. 그것이 대표적인 중보기도입니다. 물론 조카가 염려되어서도 그랬지만 그 성에 의인 몇 명이라도 심판받지 않게 하려고 몸부림을 친 것입니다. 그것이 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태도입니다.
또 모세의 중보기도도 나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 산 아래에서 타락한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춤추며 이제부터 이것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입맛추고 절하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며 이제는 더 이상 이 타락한 백성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진멸하시겠다고 할 때 모세가 눈물로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언제는 이 백성이 의로웠습니까, 이 백성이 의로워서 애굽에서 불러내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까, 타락된 것은 오늘이 아니고 예전부터 타락된 백성인데 여기까지 끌고 와서 죽이시면 애굽사람들이 뭐라 하겠으며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욕하겠습니까, 내 백성들을 용서하소서, 이 백성들을 용서하지 않고 여기서 죽이신다면 나도 내 백성과 함께 여기서 죽겠나이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를 거두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웃사랑이고 백성사랑이고 애국자입니다. 느헤미야의 민족을 위한 기도, 예수님의 인류와 영혼 사랑을 위한 기도, 에스더의 자기 민족을 위한 기도, 모두 이웃 사랑의 마음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의사 게리 해멀린이라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 예수를 위해서 바보가 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다짐하였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40평생을 나만을 위해 살았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보자, 그래서 나는 바보 같은 일을 벌이기를 시작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분이 바보같이 일을 벌인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사저를 털어서 방황하는 10대를 위한 센터를 건립하고 시간을 투자했고 둘째는 가난한 환경의 여인들과 아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소를 열었고 셋째는 더 많은 시간을 선교사역에 동참하다가 마침내는 병원 문을 닫고 의료선교사가 되어 하와이로 떠났습니다. 그는 처음 전도를 시작할 때는 혹시 그곳에 가서 죽지 않을까, 가난하지 않을까 걱정되었지만 얼마 후 두려움은 사라지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봉사하였다고 했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전 재산을 바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고넬료가 자기가 지배하고 있는 백성들을 사랑해서 많이 구제하였다고 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은 전도로, 구제로, 선교로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4. 나라사랑
고넬료는 사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군의 장교 백부장이었습니다. 그곳은 로마총독들이 중요시하고 있는 전략 지였고 교통 요충지였습니다. 그곳에 주둔한 군인의 지휘관이 고넬료입니다. 그는 하나님도 사랑하였고 가정도 사랑하였고 이웃도 사랑하였지만 나라도 사랑하였던 사람입니다. 군인처럼 나라 사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평생을 군에서 젊음을 바치고 살아온 사람은 국가가 알아주어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건강한 사람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할 때 신앙의 눈을 뜨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눈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사랑하고 사회성에 눈을 떠서 선교하게 되고 이국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진정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고 아주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1939년 젊은 목사 본 훼퍼가 뉴욕 항을 떠나 고국 독일로 향했습니다. 그때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출현하여 광분하여 유대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독일 교회는 침묵했고 오히려 히틀러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때 젊은 목사 본 훼퍼는 지금 잠자고 있는 고국을 잠에서 깨워야 한다고 많은 지인들이 지금 귀국하면 위험하니 가지 말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귀국했습니다. 그때 그는 일기장에서 고백하기를 “나의 장래에 대해 그동안 파도처럼 일던 몹시도 불안하던 마음이 이제야 잔잔해졌다, 이는 내가 갈 길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독일에 도착한 그는 독일 교회를 일깨우려 애를 썼고 히틀러의 죄상들을 비난하고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 제거작업에 동참하다가 어느 날 투옥되었습니다. 그때 미국을 위시하여 많은 세계의 신학자들이 탁월한 학문적 자질을 가진 그를 구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때 본 훼퍼 목사는 옥중에서 죽기 얼마 전에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 교장에게 편지를 마지막으로 보냈습니다. “나는 내가 독일에 돌아온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고 힘차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는 며칠 후 39세의 나이로 교수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목사가 그렇게 과격하게 반정부 운동을 펼칠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때 많은 독일의 목회자들은 침묵했습니다. 오히려 위협 때문이기도 히틀러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본 훼퍼 목사는 안전지대에 있었는데도 스스로 고국으로 돌아가 히틀러와 맞서 싸우다 제물이 되었습니다.
나는 누구보다 본 훼퍼 목사가 행복한 사람이었고 성공한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그 목사야 말로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한 목사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걸어간 길과 방향이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알고 있었고 무엇 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긍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진정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고 또 그 마음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고넬료는 군인이었지만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고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국민들을 사랑하는 큰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에 하나님을 알았고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였고 날마다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고넬료가 가진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나는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릇
행 10장 1~8절 / 이성우목사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그 일을 해 내기에 적당한 도구들을 필요로 합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그 일을 해 내기에 적당한 도구가 없을 경우에는 다른 도구를 대체해서 할 수 있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일의 능률도 떨어질뿐더러 그 일을 해 내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이 힘이 들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사람들은 그 분야 그 일에 맞는 연장이나 도구들, 기계나 설치물들을 연구해 내고 만들어 내서 활용하는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문명의 발달은 도구의 발달과 가장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인류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달시켜 준 하나의 도구를 꼽는다면 단연코 컴퓨터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컴퓨터 성능의 향상과 이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의 개발과 발달은 정말 놀라우리만큼의 인류 문명의 발달을 가져왔습니다.
특별히 인터넷의 보급과 활용으로 인한 우리 삶의 환경의 변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놀라운 발전을 가져온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이 좋은 도구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상상 외로 많은 피해를 끼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어떤 일과 관련해서 사람을 언급할 때 ‘그릇’ 에 비유해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특히 어떤 역할의 수행과 관련해서 누군가를 평가할 때, ‘누구 누구가 그만한 그릇이 되느니 안되느니’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 표현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사람의 존재 가치도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 것과 관련해서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볼 때,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어떤 역할을 제대로 수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표현과 관련해서 사도 바울도 디모데후서 2장에서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향해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권면하는 내용 가운데, 20절-21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사도 바울의 이러한 표현도 알고보면 주님께로부터 배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은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 사도, 즉 복음을 위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는 소명에 관한 내용인데, 그 가운데 15절-16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결국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꾼, 곧 새로운 시대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분명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충성된 종의 자세를 가지고 초지일관 헌신하며 충성한 사실을 그의 전도 여정을 기록하고 있는 서신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 바울의 부르심과 그의 회심 사건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일인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회심하여 변화되기 전 그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초대교회의 박해의 현장에 앞장서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권능에 의한 부르심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며 도무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의 구원이라고 하는 소원을 가슴에 품고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이 뜻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셨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께서는 이 인류 구원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서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승천 이후에 약속하신 대로 성령으로 이 역사의 무대에 찾아오심으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방법, 새로운 양상으로 활동을 시작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방법이 변화되어 가는 과정 중에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의 장벽을 넘어서서 땅 끝까지 전해져 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한 사람을 선택하셨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표현을 빌린다면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사도 바울을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헬라 철학의 본 고장인 길리기아 다소 출생으로 철학적인 사고 훈련이 되어 있었던 사람이며,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높은 학식을 가진 사람이었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이러한 조건들은 장차 복음을 들고 어디든지, 누구든지 찾아가서 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까닭에 그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릇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던 것이며, 하나님은 그를 특별한 방법으로 부르셔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서 증거되는 동안에는 베드로와 같은 그릇이 필요했지만 그 복음이 이방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가는 과정에서는 또 다른 그릇이 필요했던 것인데, 바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릇이 되어서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되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10장 1절-8절에 등장하는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은 또 다른 측면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쓰시고자 하나님께서 그릇으로 삼으신 사람이었으며, 그를 통해서 중요한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은 가이사랴 지방에 주둔해 있었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지배국 국민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자연스럽게 로마 사람으로서의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얕잡아 보며 무시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이상스럽게 그는 개종하여 약소국의 종교를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음을 본문 말씀은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을 믿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2절 말씀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믿음이 보통의 믿음이 아니라 아주 열심히 있고 분명한 믿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족 전체를 구원했다고 하는 것은 그의 믿음이 얼마나 열심있는 믿음이었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인 누가에 의해서 기록된 누가복음 7장 1절-10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는 치유 기적이 소개되고 있는데 아마도 그 백부장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넬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본문 2절을 보면 그는 ‘백성을 많이 구제하더니’라고 되어있는데, 누가복음 7장 5절에 의하면 그는 유대 민족을 사랑할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위해서 회당을 지어줄 만큼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고 거기에다가 자신의 종에게까지 사랑을 쏟을 줄 아는 사랑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종이 고침받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감동시켜 드렸던 사람이기도 했던 놀라운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백부장 고넬료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지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실천하며 살아감으로 자신의 믿음이 참된 것임을 삶을 통해서 증거하는 사람으로서 건강하고 균형잡힌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본문 말씀을 보면, 정해진 기도 시간에는 항상 기도하는 삶을 살았던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더 나아가서 자신이 기도한대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항상 깨어서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릇으로 준비되어 과정 가운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며, 그는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는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고 하는 점에서 그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릇이 되기에 아주 중요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과 사랑과 기도의 사람인 고넬료는 사도 바울과 함께 기독교의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이방 세계로 확산되어 나가는 선교 역사상 획기적인 계기를 만드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 가운데 특히 예수님의 지상대명령을 따라서 복음을 땅끝까지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의 가장 큰 장벽은 바로 로마제국의 장벽이었는데, 본문 이후에 기록되고 있는 고넬료와 사도 베드로와의 만남 사건은 이 장벽을 넘어서는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런 상황 가운데 있는 초대 교회의 복음의 역사의 새로운 물꼬를 여시기 위해서 고넬료라고 하는 한 사람에게 로마 군대의 백부장의 지위를 주셔서 그 시기에 그 곳에 주둔한 군대의 지휘관으로 그 곳에 있게 하심으로 믿음을 갖게 하셨고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 꼭 필요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으로서 쓰임을 받도록 섭리하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각 시대 마다, 그리고 각각의 변화되는 상황과 새롭게 주어지는 또 다른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서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일꾼들을 그릇으로 찾아내셔서 사용하심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 이 곳에서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시되 이 왜관감리교회가 획기적인 변화와 부흥의 역사를 이루어 감으로 이 지역 사회 안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구원의 역사를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그릇을 찾고 계심을 믿으시고 고넬료와 같이 믿음과 사랑과 기도와 순종의 사람이 되심으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릇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건강한 가정
행 10장 1~8절 / 이정익목사
이제 5월이 시작되었습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5월은 사람들이 다 좋아합니다. 만물이 솟아나고 꽃이 피고 삶이 충천하고 약동하는 계절이 5월입니다. 그래서 5월은 연중에서 가장 활발하고 소망적인 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5월은 가정의 달이기 때문에 더 정감이 넘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가정 주일을 맞이해서 성경에 나오는 가정 가운데서 추천할만한 가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 가정이 고넬료의 가정입니다. 이 고넬료의 가정을 보면 참 이상적이고 오늘 현대인들에게 아주 좋은 본이 되는 가정으로 추천할 수 있는 그런 가정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고넬료의 가정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고넬료는 당시 로마 군인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군인 중에서도 백부장이라고 하니까 하나의 관료라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관료, 군인하면 우선 떠오르는 생각이 좀 경직되어 있는 느낌부터 생각나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 나오는 고넬료라는 백부장은 참 본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고넬료는 아주 인간답고 자상한 인상을 풍겨주는 그런 사람입니다. 고넬료의 가정의 분위기를 보면 오늘 우리들의 가정에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가정에는 분위기가 참 중요합니다. 그 분위기가 가족들의 생각이나 의식이나 마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사람의 성장 후 모습은 네 가지 원인으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하나는 유전적인 요소입니다. 부모가 가지고 있는 성격, 개성, 생각, 습관, 인격 등이 유전적으로 전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때 좋은 것이 유전되면 참 좋겠지만 나쁜 것이 유전되어서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환경의 요소입니다. 가정의 환경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서운 영향을 준다는 말입니다. 세 번째는 개체의 기본적인 욕구에 의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어머니와 가정의 보살핌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열리듯 유년시에 자라온 환경에 따라 성인이 되면 그 모습이 그대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는 가정의 환경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고넬료의 가장에는 몇 가지 환경적 요소가 있었습니다.
경 건
본문 2절을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 했습니다. 군인이고 관료인 고넬료 집에는 경건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군인이고 이방인이고 로마인인데도 그 집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적 경건이 있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가정에는 이 경건의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이 경건의 요소가 가족들의 정신이나 생각이나 의식이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가정에는 이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가정들에는 이 경건의 모양이 적고 모두 세속적인 요소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아이들이 조금만 크면 TV를 보고 춤부터 배우고 흉내를 냅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이 추는 춤을 흉내부터 냅니다. 그 모습을 보면 전혀 아이답지 않은데도 부모들은 잘한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게 칭찬할 일입니까. 그리고 아이들이 TV에서 총 쏘는 것만 보고 자라서 아이들이 하루 종일 총 들고 다니며 죽이는 흉내만 냅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매일 몇 번씩 죽어야 합니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만 셋을 낳아 키웠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얼마나 요란한지 매일 뒤뜰에서 총 들고 다니며 전쟁놀이를 하며 총을 쏘고 죽이고 죽습니다. 또 한 놈은 엄마에게 와서 따발총을 쏘아댑니다. 그러면 엄마는 총에 맞고 윽하고 쓸어져 다리를 쭉 뻗고 넘어집니다. 그런데 총에 맞은 엄마가 일어나질 않습니다. 그 모습을 본 이웃집 아내가 한창 있어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쫓아 와서 “여보세요, 정말 죽었어요, 아기 엄마 정신 차려요”하고 놀라 깨웁니다. 그러자 이 죽은 엄마가 한 눈을 뜨더니 말합니다. “쉿 조용히 해요,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둬요, 내가 쉴 수 있는 시간은 이 시간뿐이에요.” 오늘 가정에서 아이들이 이렇게 소란스럽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이렇게 자랍니다. 그 결과 아이들이 얼마나 난폭한지 모릅니다.
이 아이들이 왜 이렇게 난폭한가 하면 그 어머니들이 임신했을 때 시끄럽게 살아서 그렇습니다. 타임지가 미국 기혼 여성 1천명을 상대로 조사를 했습니다. 984명이 하루의 45% 넘는 시간을 팝과 재즈 음악을 들으며 임신하고 아이를 낳아 키웠다고 대답했습니다. 요금 젊은 엄마들이 아이를 임신하고 팝이나 째즈같은 광란의 음악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 아이들이 태어나서 조용하겠습니까. 거기다 모두 소 젓을 먹여 키우니 그 아이들이 조용히 자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매가 있습니까. 경건이 있습니까. 절제의 교육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끔찍한 청소년 문제들이 쉴 사이 없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한 어머니가 비탄에 잠겨 울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그 아이가 어렸을 때 우리는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돈벌이로 바빴고 아이는 아이대로 공부하느라 바빴습니다, 가끔 버릇없는 행동을 보일 때도 우리는 벌을 주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옷에서 담배냄새가 났지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의 성적과 품행에 대해서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지적이 있었지만 우리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했습니다, 학교에서 도둑질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화가 나서 아이에게 용돈을 주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찰이 찾아왔습니다, 우리 아이가 강도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를 경찰에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경찰이 우리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을 맥없이 바라보자니 내 인생이 다 끝나버린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범죄자를 길러온 나는 경찰에 끌려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한없이 울었습니다.” 오늘 이런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녀양육에는 지독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냥 놔두면 저절로 크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는 물질도, 정성도, 보살핌도, 공도 들어가야 합니다. 미국 정부가 아이 하나를 낳아 키우는 비용을 산출했는데 중산층 가정에서 아이 하나를 낳아 한살부터 18세 까지 아이를 키우는데 총 비용이 160,140불, 우리 돈으로 1억 6천만 원이 들어간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 비용은 과외비와 학비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까지 합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3억 원도 넘을 것입니다. 장차 돈 모아 잘 살려면 자식 낳지 말아야 합니다. 자식 하나를 양육하는데도 돈도 돈이지만 정성이 들어야 합니다. 화초 하나를 키우는데도 강아지 한 마리를 사육하는데도 얼마나 공이 들어갑니까. 거기에 우리 신앙인의 가정에서는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고넬료 가정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그 가정에 가장 바람직한 요소인 경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절을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가정의 요소입니다. 가정에는 경건이 있어야 합니다.
기 도
2절을 보면 “고넬료가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자기 자신 뿐이 아니고 그 집안 모든 가족과 구성원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기도는 환상을 가지는 삶입니다. 기도 속에는 기대가, 꿈이, 바라는 실상이, 미래에 될 꿈이 들어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준다면 무슨 기도를 합니까. “장차 이 아이가 큰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것이 아이를 향한 기도내용입니다. 그러니까 그 기도가 곧 꿈이고 기대이고 희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꿈이고 비전인 것입니다. 그때 그 기도를 듣고 자란 아이는 큰 꿈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미래를 바라보며 꿈을 부여하고 꿈을 꾸는 삶입니다. 꿈을 가지면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꿈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마음에 꿈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동안은 얼마나 행복할 것입니까. 그에게는 기대가 있습니다. 기다림이 있습니다. 바람이 있습니다. 기다림과 바람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기도가 있는 사람은 꿈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주님의 약속이고 성경의 약속입니다.
어느 며느리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나의 어머니 시어머님, 사람들은 당신을 시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하지만 나는 당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리이다, 나의 사람인 남편의 생명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신 당신, 당신은 그이에게 처음 기도와 찬양을 가르치신 어머니, 당신은 그이에게 처음으로 미소를 가르치신 어머니, 당신은 그이에게 친절과 정직을 처음 가르치신 어머니, 그이가 피곤하며 잠들었을 때 그이는 당신의 팔 안에서 안식을 청했으며, 그이가 넘어졌을 때 그이는 당신의 손안에서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었고, 당신은 그이가 자랄 수 있도록 언제나 그이 곁에 머물러 계셨으며, 당신은 그이가 위를 쳐다보고 살 수 있도록 무릎을 꿇으셨나니, 그이가 내 사랑하는 남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당신의 사랑에 나는 누구보다도 빚진 자이오니 이제 나는 그이와 함께 영원히 이렇게 부르리이다, 우리 어머님“ 이런 꿈을 가지고 살면 참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무섭고 독한 시어머니가 아니고 정말 다정한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꿈이 없으면 정말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시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고넬료에게는 그런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로마군의 장교로 군림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도 유대인들을 구제하는데 힘썼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이 되었고 종들과 노예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그런 기도 즉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곧 꿈입니다. 가정에는 이 꿈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 가족이 이 꿈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응 답
꿈이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고넬료의 기도는 마침내 응답을 받습니다. 3절을 보면 “하루는 제 9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서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부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습니다. 지성이 있는 곳이면 그곳에 감동이 주어지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고넬료가 기도했는데 그냥 형식적으로 기도했겠습니까. 얼마나 진지하게 기도했으면 천사가 찾아와 네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전해주었겠습니까. 꿈을 가지면 언젠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기도는 곧 꿈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꿈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도가 없고 하늘을 바라보는 기대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온통 불화와 갈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불화와 갈등은 꿈이 없고 소망이 없는 곳에 발생합니다. 오늘은 가정에도 직장에도 관계에도 이 갈등이 가득 차 있습니다. 꿈과 기대를 잃어서 그렇습니다. 기도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기도가 없으니 기대할 것이 없고 바라는 것이 없고 미래에 주어질 소망이 없기 때문에 오늘 온갖 불평과 갈등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워야 할 관계들이 아주 껄끄러운 관계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집에서 평생 동안 함께 살아가는 부부는 서로 닮아야 합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영국의 리버풀 대학 연구진이 남녀 11명에게 160쌍의 부부의 사진을 섞어놓고 짝을 찾아내라고 했더니 절반 이상을 골라냈다고 합니다. 한집에서 같은 분위기에서 같이 웃고 같이 울었기 때문에 얼굴이 같이 변화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야 하는데 오늘은 이 관계가 아주 껄끄러운 관계로 자꾸만 전락하고 있어서 문제입니다. 그래서 부부사이에도 온갖 갈등과 불화가 가득한 채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 삶에 재미가 없고 즐거움이 없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참 불행한 일입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 사이게 미움이 자리하고 증오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살아가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 얼마나 미움이 가득하겠습니까.
한 남자가 길을 가다가 장례행렬을 만났습니다. 선두에 상주인 남자가 개 한 마리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많은 남자들이 줄지어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누가 돌아가셨나요?” “우리 마누라가 죽었소.” “저런, 근데 이 개는 무슨 개요?”. “이 개가 내 마누라를 물어 죽였소”. “그렇군요, 그러면 혹시 그 개 좀 빌려줄 수 있겠소.” “그럼 저 사람들 뒤에 서시오.” 참 불행한 관계입니다. 지금 이런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일본에서 나온 통계를 보면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들은 한결같이 일찍 죽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을 먼저 사별한 할머니들은 하나같이 장수하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불행일 입니까.
거기에 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 좋은 관계가 이렇게 끔찍하게 된 데는 기도가 없고 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날그날 삶이 발전되지 못하고 변화되지 못하고 즐거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고넬료의 집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에게 이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 말은 그에게 바라는 꿈이 있었고 바라는 실상이 있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바라는 그 기대와 실상과 꿈이 어떻게 언제 이루어질까를 생각하며 그날그날을 살아갈 때 그의 삶이 얼마나 신선하고 행복했겠습니까. 그러다 어느 날 기도시간에 천사가 와서 그의 기도와 꿈이 이루어졌음을 통고해 주었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응답되었느니라”
그때 고넬료에게 주어진 기쁨이나 행복함이나 즐거움이 얼마나 커겠습니까. 그리고 그 응답의 삶에서 오는 그 충천하는 내적 충만함이 그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가게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고넬료가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하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응답이 더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5절을 보면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에게 가면 그가 네 길을 인도해 주리라 그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앞길을 인도받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인도받고 살아가는 삶을 형통의 삶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은 나의 앞길을 인도하십니다. 그 삶이 최고의 복입니다. 그래서 고넬료의 삶을 성경이 추천해서 자세하게 이렇게 기록해 놓았을 것입니다.
이제 5월입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고 다음 주일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5월은 가정을 생각해 보고 부모를 생각해 보고 자녀들을 생각해 보는 달입니다. 오늘은 이 고넬료의 가정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 가정들을 건실하게 세워 나가는 축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행복한 성도의 가정
행 10장 1~8절 / 정영도목사
<어버이주일>
▣ 주 제 / 성도의 가정-부모
▣ 요 절 / (엡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도 입> 성도는 서방 국가의 성개방 문화와 영향을 입은 이에 사회의 우리 각자의 가정을 지켜야 한다.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다.
우리의 가정을 어떻게 행복한 가정으로 지킬 수 있을까? 신약 성경에 소개된 경건한 한 가정의 모습을 본다. 가장 대표적인 가정으로서 고넬료 가정을 찾을 수 있다. 고넬료 가정을 우리 성도의 모델로 삼아야 하겠다.
그 가정에 하나님의 천사가 방문하며, 그 가정에 주의 성령의 역사가
1. 부모가 경건하게 바로 서는 가정은 행복하다
1) 우리의 부모가 바로 서야, 자식도 바로 설 수 있다.
흔히 수 많은 부모들이 <자식 때문에 속상해>하는 가정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 부모 때문에 자식이 고통하고 견디다 못해서 가출하고 탈선하므로서, 자신도 망치고,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청소년 범죄와 탈선과 가출의 요인을 여러 가지로 들수가 있으나 부모의 탈선과 무관심이라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한 가정의 가장은 건물로 치면 기둥과 같은데, 그 기둥이 썩고 흔들리면 그 가정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가장이 날마나 술에 만취해서 새벽녘에 들어와서 술주정을 하고 떠들고 싸운다면 그런 가정의 자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신은 못된 짓은 골라가면 하면서 자식에게 부모 노릇한다고 이것해라, 저것해라 하면 듣겠는가?
예화> 유명 인사의 아들의 강도짓, 남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잠자던 부부를 흉기로 위협하고 전기줄로 묶은 후에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힌 10대 청소년을 취조하던 수사관이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유명인사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 아들이 타락한 원인은 간단했다. 한 집안에 부모가 살고는 있지만 부모는 별거상태였고, 아버지는 딴 여자를 거느리고 있는가면 어머니 춤바람이 나서 다른 남자를 따라다니는 상태이니 그 자식은 알만하지 않는가?
2) 그러나 부모가 경건하게 하나님을 믿음으로 서 있는 가정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고넬료의 가정을 보자. (1-2절)
① 그는 로마 사람이었다. 로마황제의 명을 따라서 속국인 유대 땅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에게 부속된 로마군의 백부장-중대장이었다 (1절).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갖게 된 것인지 신기할 따름이다. 아마도 그는 유대 땅에 와서 있는 동안에 그는 로마 사람의 우상 종교를 버리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교에 입교한 것 같다. 그는 이 때부터 유대교의 전통을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② 성경은 기록하기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정에 가장인 아버지가 경건하니까 그 온가족이 경건하게 되는 것이다. 고넬료가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니, 그 온 집이 경건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가장이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든든히 서 있으니 온 가정이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고, 자식들의 정서가 안정되고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시 62: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시 62:2)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시 40: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③ 부부간에 둘다 경건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아직도 한쪽이 주님을 알지 못한 가운데 있다면 고난은 많겠으나, 그 한쪽의 믿으로 말미암아 그 한쪽도 구원을 받고, 경건한 사람이 될 줄 믿는다. 반석되신 주님을 부여잡고 흔들리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2. 믿음으로 사는 가정은 행복하다.
고넬료 신앙의 핵심은 무엇인가? 고넬료 가정의 경건의 비밀은 두가지였다. <기도> <구제> 기도-하나님을 향하여, 구제-이웃을 향하여/ 성도 삶의 핵심이다.
성도 여러분의 경건의 비밀이 무엇인가? 여러분 가정의 신앙의 비밀이 무엇인가? <믿습니다!> 가훈,가족사진 콘테스트를 실시한다. 광고를 냈다.
1) 고넬료는 기도하는 가장, 그 가정은 기도하는 가정이었다.
"항상 기도하더니...."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자기꾀로 사는 사람들에 비하면 얼마나 어리석고 약한지 모른다. 이렇게 사악한 세상에서 우리가 짓밟히지 않고, 승리하며, 오히려 세상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그들을 회개시킬 수 있는 비결은 기도뿐이다. 성도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기도뿐이다.
♪♬할 수 있다 하신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나를 바라보시고 능력준다 하시네
기도만이 기도만이 능력이라시네
기도하는 가정은 마귀가 흔들지 못할 것이다.
기도하는 가정은 시험을 이길 수 있다.
기도는 항상, 쉬지 말고 해야 하는데, 쉬면 안된다.
기도를 쉬고 있는 분들, 다시 시작하시라.
기도의 아버지, 기도의 어머니는 반드시 자녀교육에 승리할 것이다.
2)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가정은 행복하다.
고넬료는 로마 백부장인데, 아무래도 큰 부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유대인들을 물질로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이웃을 물질로 도우는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으로 이웃을 생각하고 섬겨야 하겠지만, 또한 물질로도 이웃을 섬기는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 야고보서 기록하기를 구제는 참된 경건이라고 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부모가 어릴 때부터 이웃을 물질로 섬기는 모습을 보고 자라난 자식이 어떻게 장성하여 사회에서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겠는가?
여러분, 그도안에 가정에 형편이 어려워서 구제못한 분들, 이제는 우리의 이웃을 향하여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손을 내밉시다. 그것은 곧 자신과 자신의 후손을 위해서 씨를 뿌리는 것이다
3) 하나님이 받으시는 그 가정은 행복하다 (3-4절). 신통한 가정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
이렇게 사는 경건한 고넬료의 가정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신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하나님께서 <기도>와 <구제>를 열납하셨다. 천사를 보내주셨다. 하나님과 교통과 교제가 있는 성도, 하나님과 기도와 구제로 교통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란다.
3. 그렇다면 우리의 가정은 어떤가?
1) 성도 여러분의 가정은, 가장이 경건함으로 견고한 가정인가?
2) 기도와 구제로 하나님을 향하여, 이웃을 향하여 손을 폄으로서 형통하고 된 가정인가?
3) 이렇게 가정을 지키고, 자녀에게 기도와 구제로 씨를 뿌리는 성도의 자녀는 땅에서 잘되고, 그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한 자녀가 될 것이다. 이렇게 경건한 가정을 지키는 그 성도는 노경이 복되고 복되고 자손이 복될 것이다.
가정이 경건하고 행복해야 교회가 복되고 부흥할 것이다.]
가정이 경건하며 믿음으로 견고하면 그 사회와 국가도 안정되고 부강할 것이다.
예화> 경건한 한 가정
<발리스키>라는 미국의 한 부부의 가정은 10명의 자녀를 키웠는데, 그들 가운데 6명은 선교사가 되어 해외로 나갔고, 4명은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어 선교활동을 도왔습니다. 발라스키 가정의 맏아들인 <랄프>는 부모로부터 강렬한 신앙적 영향을 받았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으며 아름다운 기독교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첫째, 어머니와 아버지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둘째, 그분들은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우리들에게 힘들고 귀찮은 일이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셋째, 아버지는 우리들의 친구가 되어 허물없이 우리를 사랑해주셨지만 결코 가장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가정에서 아버지의 결정은 대법원의 판결과 같았습니다.
넷째, 부모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공평무사하게 대해주셨습니다. 잘못했을 때는 벌을 받 았고, 잘했을 때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다섯, 어머니와 아버지는 언제나 말씀과 삶이 일치 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삶으로 우리들의 가장 이상적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들이 진실로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훗날 다 성장하여 중년이 된 자녀들의 기억 속에 이와같은 인상과 추억이 깊게 남을 수 있다면 그 부모는 경건한 부모로서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큰 진정한 유산이 될 것이다.
고넬료의 환상
행 10장 1~8절 / 김영규목사
사도행전 10장과 11장은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으로 넘어가게 되는 전환점이 되는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전반부(1장-12장)는 유대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는 유대와 사마리아로 퍼져 나갑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지고 부흥하자 박해가 일어났고, 이 박해를 피하여 옮겨간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후반부(13-28장)는 복음이 이방 세계에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이방 전도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바로 이 사도행전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해 주는 사건이 바로 고넬료 전도 사건입니다. 고넬료는 유대 땅에 머물고 있던 이방인입니다. 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은 유대인의 사도였던 베드로 사도입니다. 고넬료 사건은 유대인 신자와 순수 이방인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믿음의 문이 어떻게 이방인에게 열리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사건에서 시작하여 교회 안에 아주 중요한 교리적 논쟁이 발생합니다. 이방인이 할례 없이 교회에 영입될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이 제일차 선교 여행을 마치고 모든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다룬 주제가 바로 이 주제입니다.(행15장) 오늘은 고넬료 전도 내용의 첫 번째 부분으로 고넬료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신앙을 가졌고, 어떻게 예수님을 전해 듣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고넬료
먼저 고넬료에 대해서 말씀드립니다. 고넬료란 이름은 당시 흔했고, 유행했던 이름입니다. 고넬료란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Publius Cornelius Sulla라는 유명한 장군 때문입니다. 그는 BC82년 1만 명의 노예를 해방시킨 인물입니다. 고넬료가 이 장군의 후예인지, 혹은 그 문중 사람인지, 잘 모릅니다. 고넬료 자신이 로마군의 장교였던 만큼 그럴 개연성이 아주 많습니다.
고넬료는 로마군의 장교입니다. 계급은 백부장입니다. 백부장(eJkatontavrch")이란 칭호는 “백명의 우두머리”란 뜻입니다. 백명의 지휘관이니까 별 것 아닌 계급처럼 보입니다만, 로마 군대 조직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장교입니다. 오늘날의 군대 편제로 보면 대위쯤 되는 직위니까 중대장쯤 됩니다. 당시 백부장의 조건은 매우 까다로웠습니다. 어떤 기록에 보면 백부장의 자격을 이렇게 규정합니다. 첫째로 불손하지 말 것, 둘째로 좋은 지도자로 모험적이고 대담할 것, 셋째 확고하고 신중한 마음, 넷째 공격시 납작 움츠리지 말고 제멋대로 공격하지 말 것, 다섯째 적에게 압도당하거나 강한 압박을 받을 때에도 굳게 서서 자기 위치에서 죽을 것 등등. 백부장은 장교로서 상당한 품위를 지녀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약성경에 나오는 백부장은 대부분이 선한 행동과 좋은 평가를 받습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고 병든 하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을 지키던 백부장은 주님을 향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로마로 호송했던 백부장은 풍랑 중에 파선할 위기에서, 혹은 선원들이 바울을 해치려고 할 때에 보호해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아무튼 고넬료는 품위 있는 로마군의 장교입니다.
고넬료가 속한 부대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특별한 부대입니다. 로마군의 편제를 보면 본문에 “부대”(spei'ra ,band)라고 번역한 기본 부대(cohort)가 있습니다. 이런 부대 열 개가 모여서 한 군단(legion)을 이룹니다. 한 개 군단은 3000명에서 6000명으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매 군단에서 열 번째 부대는 예비 병력 형태의 지원군입니다. 본문에 나온 이탈리아 부대가 바로 이런 예비 병력입니다. 로마 제국 안에는 32개의 이탈리아 부대가 있었습니다. 사도시대 당시 팔레스틴에는 다섯 개의 보병 부대가 주둔했는데 그 중 한 개 부대가 이탈리아 부대였습니다. 이 부대의 공식 명칭은 “제일 아우구스타 이탈리아 시민 로마인 부대” (Cohort prima Augusta Italica civium Romanorum)입니다. 고넬료는 로마인으로 구성된 특별한 부대의 지휘관입니다.
고넬료가 속한 이탈리아 부대가 주둔하던 곳은 가이사랴입니다. 가이사랴는 황제“가이사의 고을”이란 뜻입니다. 가이사랴는 갈멜산 남쪽 지중해안의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입니다. 헤롯대왕이 이 도시를 재건하여 황제 아구스도에게 바치고, Caesarea Sebaste 라고 이름한데서부터 가이사랴가 되었습니다. 가이사랴는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팔레스틴의 수도가 되었고, 로마 총독의 거주지가 있었습니다. 고넬료 당시 가이사랴에는 많지는 않았지만 여러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된 배경은 빌립 집사의 전도활동입니다. 빌립은 가이사랴에 20여년 가까이 거주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8:40) 사도 바울이 세 번째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가이사랴에 들렸는데, 그 때에 빌립의 네 딸이 교회 안의 예언자가 되어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21:8-9) 가이사랴의 그리스도인들과 고넬료가 어떤 친분이나 교제를 나누고 있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고넬료의 종교 생활입니다. 본문은 고넬료의 신앙을 세 가지로 평가합니다. 첫째로,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굳이 신앙 등급을 말한다면 “하나님 경외자”(God fearer)입니다. 그는 경건(eujsebhv", devout))했습니다. 독실하다는 뜻입니다. 유대교에서 신자를 분류할 때에 세 종류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순수한 유대인입니다. 둘째는 이방인으로 유대교에 완전히 동화되어 유대 사회에 연합된 사람입니다. 셋째는 이방인으로 유대교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 사회에 동화되거나 유대 커뮤니티에 연합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회당 예배에 참여하고 유대인이 지키는 도덕이나 윤리적 교훈들을 지켰습니다. 고넬료는 바로 이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고넬료에게 훌륭한 점은 온 집안이(with all his house) 다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점입니다. “eujsebh;" kai; fobouvmeno" to;n qeo;n su;n panti; tw'/ oi[kw/ aujtou',” 요즘에는 가족이라고 해야 몇 명 안 됩니다. 그러나 당시는 상당했습니다. 많은 자녀들, 노예들, 일군들, 장교의 수하에 수종드는 병사들 등등. 그런데 이런 많은 가솔들이 다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다른 것은 강제로 될 수 있지만 신앙은 강제로 될 수 없습니다. 고넬료의 집안 사람들이 경건할 수 있었던 것은 고넬료의 인격과 신앙이 훌륭했던 것을 증명합니다.
둘째로, 고넬료의 구제활동입니다. 고넬료는 많은 유대인을 구제했습니다. 신앙은 행위로써 입증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명령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고넬료는 유대인 쪽에서 보면 점령군의 장교입니다. 被征服民을 함부로 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유대인을 선대함으로 그가 사랑의 실천자임을 보여줬습니다.
셋째로,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항상(diav pantov")이란 말에 대해서 영어 성경은 다양한 말로 번역합니다. prays to God regularly(NIV), continually(NASB), always(ASV), constantly(RSV) 등등. 고넬료는 규칙적으로, 계속, 항상, 일정하게 기도했습니다. 아마 유대인의 기도 규칙을 따랐을 것입니다. 유대인 남자들은 매일 오전 9시, 정오, 오후 3시에 기도했습니다. 고넬료가 그런 생활을 했다면 이방인으로써 대단한 일입니다. 고넬료의 신앙은 마음의 경외심, 이웃을 향한 하나님 계명의 실천,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환상 중에 나타난 천사
다음으로 말씀드릴 것은 고넬료의 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고넬료가 매일처럼 저녁기도 시간에(오후 3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상 중에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환상이란 깨어 있는 시간에 보이는 영상입니다. 꿈은 잠 잘 때 보는 영상물입니다. 대개 꿈에 보는 장면은 희미합니다. 명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시에 보는 환상은 명료합니다. 본문에도 “밝히 보니”라고 했습니다. 고넬료가 분명하게 본 것에 대해서 10장과 11장에 세 차례나 언급합니다.(10:3-8, 30-33, 11:13-15) 고넬료에게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평소 행하는 모든 신앙 생활은 하나님께 상달되고 기억된다는 점입니다. “상달”(ajnabaivnw)이란 말은 제사장적 표현입니다. 구약 레위기에 보면 번제라는 제사가 있습니다. 이 번제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hl;[o”(올라)인데 올라간다는 뜻(ascend)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구제는 하나님께 올리워지는 제물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올리워지면 하나님의 마음에 기억이 됩니다. 어떤 영문 성경에는 “기억”이란 말을 “하나님 앞에 기념 제사”(memorial offering before God, NIV)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행하는 예배, 기도, 남에게 베푼 작은 선행, 언행 하나까지 다 하나님께 올리워지고 기억됩니다. 좋은 것이 기억된다면 나쁜 것도 기억되겠지요? 악행,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거짓, 불경건 등등이 다 기억됩니다. 삶의 자취를 좋게 남겨서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기억되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참고 인내하며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서운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보면 숨은 봉사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일 년, 이 년, 수 십 년이 되도록 말없이 봉사합니다. 저는 마음 깊이 이런 분들의 봉사를 기록해 둡니다. 제가 표현을 잘 하지 않지만 감동의 테이프가 항상 녹화됩니다. 주의 종의 마음에 녹화된다면 하나님의 메모리에는 더 정확하게 녹화될 겁니다. 그러므로 낙심치 말고 인내하면서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성도의 신앙과 행위는 반드시 상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은 항상 상을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 손에는 상이 들려 있습니다. 이런 풍성한 상을 누가 받습니까? 누가 보든지 아니 보든지 인내하면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 상주시기 직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성경이 뭐라고 합니까?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살후3:13)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하나님의 상은 내세에만 주시는 게 아닙니다. 현세에서도 상급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여짜와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막10:28) 이런 질문에 대해서 주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우리의 신앙과 행위는 반드시 보상됩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인내로써 섬기시고 반드시 상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를 청하라
마지막으로 말씀드릴 것은 고넬료에게 주신 구체적인 상급의 내용입니다. 고넬료를 향하신 주님의 명령이 뭡니까? 사도행전 11장 13-14절에 보면 이렇게 그 내용을 밝힙니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행11:13-14) 하나님의 명령은 베드로 사도를 청하여 복음을 들으라는 겁니다. 복음을 듣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복음이 뭡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 구주시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평강을 얻습니다. 예수 믿으면 치료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축복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영혼이 잘 됩니다. 예수 믿으면 범사에 잘 됩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해집니다. 예수 안에 인생의 모든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모든 축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 모든 소식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전해 듣는 것이 지상 최대의 축복입니다. 오늘 이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전해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을 누구에게 전해 듣습니까? 천사가 고넬료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 사도를 청하라! 그에게 복음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직접 고넬료에게 복음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사도를 청하여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질서이며, 은혜의 통로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주의 종들을 수시로 청해야 합니다. 주의 종에게 말씀을 청하는 신자는 주님을 청하는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결정하기 전에 먼저 주의 종을 청하세요.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전해 듣는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내려진 응답이 오늘 우리에게도 내려지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선한 도구로 사용하소서
행 10장 1~8절 / 김삼환목사
우리는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흙 으로 지음 받은 연약한 피조물입니다. 사람은 천사도 될 수도 있고 악마도 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 다. 우리가 선한 사람으로 선하게 쓰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도 속에서 만나야 하고 기도 속에서 그의 은혜를 힘입어야 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은 기도할 때 우리를 가까이 하십니다. 살아 계심을 보여 주시고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적과 선물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 우리에게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기를 심히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태풍이 불어오듯 우리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평생 많은 어려움과 환란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잡고 그의 도우심을 받을 때 이 세상에 약한 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는 능력 있는 그의 손으로 누구든지 일어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나의 힘이 아닌 전능 하신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한국 사람은 해외에서 강도를 제일 많이 만나는 1호라고 합니다. 유럽에서도 한국 사람만 강도를 많 이 만납니다. 미국에서도 한국 사람이 강도를 많이 만납니다. 이번에 말레이시아에서도 교인 한 분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돈을 모두 잃었습니다. 급하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겨우 생명은 건짐을 받았 는데 재산상으로 큰 손해를 입게 된 것입니다. 말레이시아에도 한국 사람이 강도를 만난다는 것입니 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한국 사람은 언제나 현금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 은 현금을 많이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미국 사람은 10불도 카드로 냅니다. 5불짜리도 카드로 냅니 다. 우리는 다 쓰고 주머니에 몇 만원씩, 몇 십 만원씩 가지고 있으니까 그만 강도들이 달려드는 것입 니다. 그 사람들의 문화에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토록 중요한 돈을 갖고 다닙니 까? 은행에 맡기지 않고 당연히 갖고 다니느냐 말입니다. 그래서 강도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 은 맡겨야 합니다. 귀한 것은 맡겨야 합니다. 미국은 돈만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다 맡겨 서 관리하는 컨설팅 회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생이 귀합니까?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 다. 내 힘만 믿고 나가다가는 강도를 만나게 됩니다. 사고를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맡긴 자의 생 명을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 은행에 맡기면 주식시장에도 배당이 많은 그 주식이 항상 그 주가가 올 라가듯이 하나님 앞에 맡긴 인생은 그 주가가 올라가서 더 가치 있는 인생, 능력 있는 인생이 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관리해 주시니까 인간을 위한 거룩한 은행(Bank)은 부도도 없고 만 년을 간다 해 도 머리털 하나도 상함이 없도록 안전하게 지켜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 도합니다. ‘주여, 나의 앞날을 맡깁니다. 자녀도 맡깁니다. 행복도 맡깁니다.’ 교인은 다 맡기는데 하 나님께서 철저하게 해 주시고 이 세상 사람은 어느 것도 하나님께 안 맡기고 자기가 관리하는데 늘 도 적을 당하는 것입니다. 건강에 강도가 들어오고 행복에 강도가 들어와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이유 가 하나님께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인간의 연약함을 압니다. 우리 힘으로는 승리할 수 없 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 하나님은 모든 위기와 어려움, 환란과 광야, 항해에 서 우리를 지켜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기도하면 주님이 가진 능력의 손이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제가 며칠 전 마사이 국립공원, 케냐 국립공원에 관한 것을, 동물의 움직임을 보는데 동물들이 가다가 도 큰 구렁텅이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도 아주 이런 구멍이 있는데 그 곳에 몇 십 미터 밑으로 낭떠러 지가 있는 것입니다. 땅 속에 그런 구멍이 있습니다. 그렇게 가다가 소 떼도 가다가 떨어집니다. 떨어 지면 못 나옵니다. 못 나오고 그만 거기서 썩어 죽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안전한 것 같아도 얼마 나 함정이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또 함정에 빠진다하여도 일으 켜 주십니다. 설령 ‘나는 죽었다’, 이런 함정, ‘나는 어떻게 나오나?’ 이런 천 길, 만 길 절벽에 빠진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 요셉도 함정에서 우리 하나님 건져내셨지 않습니까? 여러분, 모르드 개도 큰 함정에 빠진 저들을 다 일으켜 주신 것처럼 기도하는 모든 성도들을 일으켜 주셔서 이 험한 세상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빠져도 승리하는 기업, 가정, 건강,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한 사람의 기도는 연약하지 않습니다. ‘존 낙스의 기도가 한 사단 힘보다도 크다’고 영국의 여왕이 말했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기 때문에 비가 오지 않 아도 오게 할 수 있고, 전쟁을 멈추게도 할 수 있고, 풍년도 들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못할 일이 없으시기 때문에 이 능력의 손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의 손인 줄로 믿습니다. 야 곱은 아버지를 떠나서, 부모를 떠나서 외롭게 한 순간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큰 일 났습니다. 어디를 가야 할 지 모릅니다. 가도, 가도 끝도 없는 절망의 땅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가는 데 하루는 해가 저 물어 그냥 들에서 잡니다. 외롭게 잠을 자고 있습니다. 나는 어떻게 되나? 심히 앞날에 대해 불안한 가운데 잠을 잤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졌습니다. 환한 빛이 비추어 졌습니다. 하늘로부터 사닥다리가 내려졌습니다.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야곱아, 야곱아! 너 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의 앞날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라, 염려하지 말라.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 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가야할 곳을 가게 하리라. 네가 성공해서 금의환향하여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놀라운 장면을 보았던 것입니다. 사닥다리 의미가 무엇입니까? 네가 이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저 위에까지 올라갈 수 있다. 욕 심을 내지 말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기도하는 삶,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삶 을 살면 너는 승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사람, 힘을 의지하는 사람은 몸에 병 하나만 들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분에게 사업이 부도나면 그 인생은 부도가 납니다. 인생을 의지하는 분에게는 사람이 무 너지면 무너집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던 분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노인들도 70년, 80년대에 서울로 많이 왔습니다.
주로 80년 대 시골 노인들이 서울로 많이 왔습니다. 그 부모님 들은 60년대에 50년대, 70년대 아이들 고생해서 공부시켜 서울 와서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사업하다 가 사업이 부도가 납니다. 어려움이 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붙들려가고 숨어 지냅니다. 빚쟁이들이 집으로 몰려옵니다. 그래서 이 노인들이 내 아들, 저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아들에게 모두 다 팔 아 가지고 바치는데 저 아들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노인들이 90년대, 2000 년대에 와서 자살하고 많은 노인들이 생명을 끊는 것은 바로 자녀들이 나의 부주였는데 자녀들 의지 하고 한양 왔다가 자녀들 길이 막히니까 생명을 끊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 의지하면, 자 식 의지하고 길이 막히면 다 주변의 길이 다 막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어떤 길이 막혀도 우리는 승리할 수 있고 어떤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의지하는 성도는 일어납니다.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성도의 축복이 바로 기도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위기가 와도 하나님은 거 기서 건져 주십니다. 요나서 2장 2절에 보면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룁사오니 여 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스올이 뭐냐? 하면 음부라는 것입니다. 음부는 스올, 우리말로 하면 ‘땅 깊은 곳’ 이라는 뜻입니다. 아 주 지옥이라는 뜻입니다. 지옥이라는 지하의 깊은 낭떠러지라는 것입니다. 요나도 하루아침에 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내가 스올에서 부르짖는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원통하고 나 살려 달 라고 스올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건져 주셨습니다. 이사야 38장에 보면 히스기야도 45 세 때 이스라엘의 이 훌륭한 왕이 병들었습니다. 그도 그렇게 말하기를 ‘하나님! 나는 지금 스올에 있 습니다. 음부에서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울며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매어 달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히 스기야도 음부에서 건져 주시고, 요나도 스올에서 건져 주시고, 지옥에서 다 건지시는 하나님이신 줄 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못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기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오늘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은 로마 사람입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사령관으로 지금 가이샤랴, 이스라 엘의 수도에 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큰 가이샤랴라고 하는 큰 도시에 와서 이스라엘의 치안과 모든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입니다.
자기 나라는 세계를 통치하고 유대인의 땅은 자기들이 지배 하는 이 가난한 민족, 불쌍한 민족이어도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고 믿음 의 생활을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들의 하나님은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은 장엄하지만 인간 의 손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자기들이 만든 신은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섬기는 야훼 하나님은 창조자 하나님, 볼 수도 없는 전능하신 하 나님이십니다. 그는 그 하나님을 영접하고 자기는 로마의 시민이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접하 여 항상 기도하고 그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 한 사람의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역사를 하게 하느냐? 하면 기독교 역사에 A.D 와 B.C를 나누는 이 엄청난 분수령이 고넬료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입니 다. 고넬료 한 사람이 받아들임으로 이방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이 천년 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이스 라엘 땅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이 구름이 오대 양, 육대 주, 온 세계로 번져 나간 관문이 바로 이 고넬 료입니다. 고넬료 하나가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 문을 열게 됨으로 말미암아 그 기도의 문 이 가정의 문을 열고, 오늘 10장 보면 그 가정이 구원함을 얻고, 그 부대가 구원함을 얻고 로마 전체 온 세계에 주의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기도하는 한 사람, 여러분으로 말미암 아 여러분 가정에 축복과 기적이 임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모 든 어려움이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남편을 위하여, 건강을 위하여, 아니 무엇을 위해서라도 하나 님 앞에 아뢰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해 한 번 금식해 보셨습니까? 자녀들을 위하여 한 번 영적으로 다이어트 해 보셨습니까? 자녀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서원하며 기도해 본 일이 있습니까? 오늘 여기에 나오 는 고넬료와 같이 하나님의 응답이 반드시 올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는 사람,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생수의 강이 만나지는 것입니다.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 주시리라’고 성경은 말 씀하고 있습니다. 지하수를 파내려 가면 한 3미터, 5미터 정도만 파내려가도 지하수가 나옵니다. 그러 나 그 지하수는 건수입니다. 어디에 고인물이 나옵니다. 하루정도 가다가 안 나옵니다. 8미터, 10미 터 가도 나옵니다. 그것도 건수입니다. 2, 3일 나오다가 뚝 끊어집니다. 지하수도 지상으로 있는 강줄 기처럼 이 냇가도 강줄기가 있습니다. 지하의 수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쫙 열려 있습니다. 거기까지 열려 있습니다. 낙심하면 안 됩니다. 항상 기도하여 조급하게 뭐 여기라도 좋다. 이런 식으로 기도하 면 안 됩니다. 너무 배고픈 분은 라면 하나라도 좋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곡물의 창고를 만나기 전에는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남의 집에 있어서 월세라도 사는 분은 ‘주여, 전세라도 주옵소서.’ 그 러면 안 됩니다. 끝까지 기도해서 경제적으로 자유함을 얻을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저도 이전에 있 던 교회에서 교회에서는 나가라고 그러고 나갈 데는 없으니까 하일동 목욕탕 바로 이 옆에 하일동이 라고 있습니다. 지금 강일동인데 목욕탕 요 옆에 목표를 정해놓고 공연히 남의 목욕탕을 매일 돌면서 너무 어려우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계속 매일 목욕탕을 도 는 것입니다. 여리고식이라고 돌면 주신다고 그래서 빙빙 돌며 기도했습니다. 목욕탕 주인은 뭔지도 모르고 웬 사람 자꾸 와서 도나? 아! 몇 년 기도해도 안 주십니다. 그 목욕탕이 한 30평 정도 되는데 ‘아, 이것만 주시면 너무 감사하겠다’고 그래도 안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4년 정도 기도해도 안 되 어서 그 옆에 양계장이 있었습니다. 닭 먹이는 집에 또 그 집에 가서 또 도는 것입니다. ‘아버지, 양계 장. 이만하면 저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주여, 저 여기만 와도 소원이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안 이루어주십니다. 도무지 4년, 5년 기도해도 안 이루어주십니다. 시골에서도 풍북교회 있을 때 문방 구를 차려 놓고 교회 앞에 길이 있기 때문에 중, 고등학생이 많이 다녀 문방구를 차려서 ‘주여, 문방구 도 좋사오니 문방구를 차려서 늘 연필, 문방구 사장이나 되게 하옵소서.’
그런데 그것도 안 되는 것입 니다. 하나님이 다 길을 막으셨습니다. 너는 앞을 향하여 생수의 근원 되는 강을 만나서 자자손손 강 같은 은혜를 받아야지 몇 년 하다가 또 어렵고 이런 길에서 너는 머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꾸준하 게 낙심하지 말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저를 명일동으로 인도해 주셔서 이 놀라운 은혜를 받게 하 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머물지 말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여 뒤돌아서는 일이 없기를 바 랍니다. ‘안 되는가 보다. 이렇게라도 살아야 되겠다.’는 이런 좁은 마음을 버리고 오늘 고넬료가 기도 하는 것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기도하느냐? 항상 기도하더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열매를 맺기까지 낙심하지 말고 기도의 제목이 넘치게 이루어지기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기도의 용장들이 되 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기도하면 일어납니다. 살아납니다. 승리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떠나고 모 든 문이 다 닫혀도 기도하면 열려질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인 한 분이 교통사고로 입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서 ‘집사님! 힘내세요.’ 엉엉 울고 ‘목 사님! 저는 머리하나 믿고 살았는데 저는 대학에서 일등을 하고 공부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머리로 믿 고 살았는데 머리가 교통사고가 났으니 나는 어떻게 삽니까?’ 라고 말합니다. 제가 너무도 우스워서 교인이 머리 믿고 사는 교인이 어디 있느냐? 교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지 이 머리보다 더 큰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 믿으면 못 살게 어디 있느냐? 라고 당신은 이 머리로 먹고 사느냐? 라고 말했 습니다. 교인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교인은 머리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지식이 우 상이 되어 내 지식으로 잘 산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지식만 어려우면 자기는 먹고사는 밥줄 을 지식에다, 어떤 분은 건강에다 묶어 놓은 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일등하나 꼴찌 하나 건강하나 병드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먹여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 지가 되셔서 기도할 때마다 응답 받는 성도들 되기를 바랍니다. 유명한 콘스탄틴 노플의 대주교인 크 리소스톰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교회사에 보면 유명한 분이 있습니다. 이 크리소스톰은 참으로 믿음 이 있어서 믿음을 지키니까 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콘스탄틴의 황제가 직접 심문을 했습니 다. ‘너 그렇게 하나님을 믿을 테냐?’ 고 ‘그럼 내가 귀향을 보내겠다.’ 그러니까 크리소스톰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어디나 계십니다. 저는 여기서도 하나님 함께 하시고 저기서도 함께 하시고 나는 어디 가나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귀향 가면 귀향 생활이지만 우리 성도 는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님 모신 곳이 천국인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 뭐라고 그랬습니까? 내가 죽 여 버리겠다고 그러니까 크리소스톰이 말하기를 ‘예수 믿고 죽는 순교자가 제일 큰 축복입니다.’ ‘너 는 독방에 집어넣어 버리겠다. 아주 유명한 죄수들만 독방에 갖다 놓겠다.’ 그러니까 ‘저는 그런 시간 주시면 정말 기도 전심전력하고 말씀 읽고 정말 하나님 가까이 하는 삶 사는 게 소원입니다.’ ‘그러면 재산 빼앗아 버리겠다.’고 그러니까 ‘나의 재산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성 도는 마귀가 틈 탈 길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으면 더 좋습니다. 여러분, 성도는 혼자 있을 때 얼마나 영적으로 건강해지고 새로워지게 되는 것인가를 경 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있으면 있는 대로 감사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감사하고, 성경에 나오는 데로 비천에 처할 줄 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성도는, 기도하는 성도는 항상 승리하고 매이지 않고 예수의 이름으로 늘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면 마귀 사탄이 우리를 넘어 뜨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마귀가 너를 넘어뜨리지 못하도록 깨어 기 도하라 기도하면 마귀는 우리를 공격할 지라도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간다고 말하고 있습니 다. 이 세상에 악한 세력, 원수마귀가 우리 삶의 배후에 얼마나 많은 공격을 합니까? 그러나 기도하 는 성도는 주님이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비행기 가운데 군인이 사용하는 비행기의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F-15기, F-16기, 뭐 벤텀기, 그 다음 장로님 그 다음 뭐가 있습니까? 하여튼 그 런 것 있지 않습니까? 요즘 최근에 들어온, 얼마 전에 신문을 보니까 우리나라도 스텔스기가 15대 들 어왔습니다. 스텔스기는 한 대의 값이 얼마나 비싼지 15억에서 25억 정도 한다고 말합니다. 15억 불에 서 25억 불. 그래 몇 조씩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한 대만 해도 한강 다리 열 개를 놓을 수 있는 이 엄청 난 가격이 바로 스텔스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굉장한 것입니다. 다른 F-15, 16기가 대단해도 뭐 몇 천 만 불, 1억 불이면 다 천하에 비행기를 모두 사는데 이것은 한 대가 15억불 되니까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이 비행기가 왜 비싼 가격인가? 공중에 있는 모든 비행기는 레이더에 잡 힙니다. 땅에서 이 레이더에 모두 어디에 있는 가를 잡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성가대에 조종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조종사 출신도 많습니다. 제가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갈 때에 도 747 점보기도 조종석에 많이 들어 가봤습니다. 거기에는 하늘 비행기 위에 있는 하늘에 뜬 비행기는 다 잡히는 것입니다. 전부 다 보입니다. 비행기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압니다. 그래서 레이더에 땅에 있지만 중국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까지 우리나라가 다 아는 것입니다. 미국은 뭐 세계 비행기가 뜨는 걸 다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레이더입니다. 그런데 레이더가 비행기 있는 곳을 쏘는 것입니다. 레이더로 쏘면 거기에서 거리를 레이더가 알아서 거리와 높이가 얼마나 넘는지, 스피드는 얼마인지 이것을 다 알아서 다시 돌아와서 이것이 계산되어 미사일을 쏘면 쑥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렵 습니다. 그런데 참 놀라운 것은 모든 비행기가 레이더에 잡히는데 안 잡히는 것은 스텔스기입니다. 안 잡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쏘아도 모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섭습니까? 비행기가 오는 걸 알아야 되는데 이걸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에 있느냐? 거기에 페인트로 코팅을 너무 전체를 잘 해서 쏴도 그냥 흡수를 다해 버리고 안돌려 받는 거예요. 놀랍습니다. 이 스텔스기가 그렇게 가치가 있다 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가 성도를 공격 안 하는 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공격을 해도 성도를 공격하 면 하나님께서 흡수해 버리는 것입니다. ‘아멘’ 한 마디에 그만 다 흡수가 되어버리고 마귀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귀가 IQ가 높아서 ‘성도가 왜 이 세상을 안전하게 사느냐?’ 마귀가 설령 공격을 해도 마귀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모릅니다. 우리를 알 수가 없습니다. 넘어뜨릴 길을 찾을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절절히 기도하라고 합니다. 기도하는 나라가 위대한 나라입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과학자 가 모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약한 자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사 람은 하나님께서 약하게 만드셨습니다. 약한 것을 아는 것이 오히려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한 평생 기도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좋은 것을 주 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잡힌바가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는 가정은 생 기는 열매가 많습니다. 가을에 시골 가서 고구마를 캘 때 한 줄기만 들면 고구마가 주렁주렁 주먹크 기 만한 것이 다 따라 올라갑니다. 저는 고구마를 저희 집에서 몇 십 가마니를 캐기 때문에 고구마 캘 때가 그렇게 기쁩니다. 다 따라 올라옵니다. 기도의 줄 하나만 잡아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예레미야 33장에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내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 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응답하겠다.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겠다. 기도하면 큰 일 할 줄로 믿습니다. 크게 쓰임 받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갑니다. 마귀의 유혹과 시험을 물리치시고 기도의 손을 모아서 새벽제단을 놓지 않고 새 벽을 깨우는 우리 모든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존 번연이 지은 <천로역정>은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책입니다. 세계 5대 문학전집에 들어가는 것이 이 천로역정인 것입니다. 이 책은 꼭 보셔야 합니다. 교인이 예수를 믿고 가는 길에 유혹이 많습 니다. 자꾸 옆길로 빠지고, 뒤를 돌아보게 되고, 시험 들게 되는 것을 모두 극복하여 끝까지 승리하는 것이 천로역정의 핵심이에요. 한 번은 천로역정에서 성도가 가는데 어떤 성도들이 가다가 뒤로 돌아 옵니다. ‘아이고, 당신들 누구냐?’고 그러니까 ‘나는 지금 천국으로 가고 있다.’ ‘아이고, 못 가겠습니 다.’ 가니까 앞에 사자가 있습니다. 사자가 지금 삼키려고 해서 도망하고 있습니다. 같이 갑시다. 가 면 죽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말합니다. ‘죽어도 좋습니다.’ 우리 하나님 우리 를 지키십니다. 다니엘도 사자굴속에서 살아나는데 사자가 뭐 있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갑니다. 그 사람은 뒤로 돌아갑니다. 예수님 믿다가 불안하다고 돌아서고 걱정이 있어 돌아서고 유혹받아 곁길 로 빠지고 낙심해서 무너지고 이렇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라 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나가니까 정말 사자가 있습니다. 어흥~그럽니다. 사자 우는 소리가 호랑이와 다릅니다. 사자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여! 하고 통과했습니다. 그렇게 보니까 자기가 능력이 있어 빠져 나온 줄 알았는데 가보니까 사자가 묶여 있습니다. 다리가 다 묶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 믿고 가는 길에 성도를 위협하는 환난, 핍박이 있지만 마귀도 다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묶였습니다. 겁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사자는 사자인데 묶인 사자입니다. 오늘 우 리가 앞으로 두려워서 가다가 뒤돌아서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많은 사람들 참된 진리를 모른 체 주님 곁을 떠나갔지만 내가 만난 주님은 참 사랑이었고 진리였고 소망이었소 난 주님이 좋아요 난 주님이 좋아요♪ 할렐루야! 많은 사람들이 돌아갑니다. 우리 교인들 은 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주를 사랑한다면 베드로 고백처럼 난 주님을 사랑한다오♪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환난과 핍박이 많습니다. 예수 믿어 만약에 매 맞는 일이 있다 면 그것은 영광입니다. 저는 많이 맞았습니다. 수 백 번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영광입니다. 축 복입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사자든 호랑이든, 어떤 맹수든지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갈 때 주님께 서 여러분을 소원의 항구로 인도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를 귀히 여깁니다. 축복 받은 성도일수록 기도 의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기도를 우습게 알면 우스운 인생이 됩니다. 기도를 경홀히 여기면 경홀 한 인생이 된다고 말합니다. 기도의 기회를 놓치면 인생의 귀중한 기회를 다 놓치는 것입니다. 기도 를 뒤로 미루면 인생은 밀려납니다.
자꾸 새로운 시대에 밀려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가 갖고 논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개와 같이 옆길로 갑니다. 자기는 바른 길로 가는 것 같은데 하나님 앞에 엉뚱한 옆길로 빠져나간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를 귀한 자로 만들어 놓습니다. 모든 장애물을 넘어가게 합니다. 기도의 훈련이 안 된 사람들은 총 없는 군인과 같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삶을 경건한 삶으로 인도하여 주고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기도에 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면 온종일 승리하고 한 주일을 기도로 아버지 전에 다녀가면 한 주 동안 승리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은 주일날을 주말이라고 말합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마지막을 7일이라고 그럽니다. 성경 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주일이 첫째 날입니다. 안식 후 첫날이라고 주일이 첫날입니 다. 주일과 월, 화 그 다음 한 주일 내내 하나님이 이 첫 날 기도하고 예배드림으로 한 주일간 복을 주 시고 안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성도들, 한 주일의 축복이 주님으로부터 성령으로 도장이 찍힌 줄로 믿습니다. 할 일 많은 세상에 좋은 일 많이 하게 하십니다. 저는 10월 1일부터 3일까지 광주기독병원 100주년 집회 초청을 받아서 가게 되었습니다. 광주는 기독 교가 들어왔을 때는 아주 제일 적은 도시, 적은 마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광 주가 발전해서 광주시와 전체 광주지역 연합으로 집회를 한다고 저를 초청해 주었습니다. 우리나라 복음이 전해지면서 병원을 먼저 세웠습니다. 세브란스는 120년 되었고, 그 다음에 전주 예수병원이 110년, 그 다음 대구 동산병원이 105년쯤, 그 다음 광주 기독병원이 금년으로 100년입니다. 안동성소 병원은 97년입니다. 이 병원이 선교사가 와서 제일 오래 세운 병원입니다.
광주는 원래 목포와는 비교 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주와도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병원이 들어서고 선교사들이 이곳에 오면서 서양 학교들이 들어오게 되고 이쪽으로 몰리면서 광주가 저렇게 발전했다는 것입니다. 이효 계 장로님, 광주시장 한 번 하셨죠? 전라남도 도지사도 하셨고 숭실대학교 총장님이신데 마침 오늘 3 부 예배에 잘 오셨습니다. 우리가 전라도라고 말할 때 전라도를 어디라고 그러는 줄 아십니까? 광주 가 아니라 전주와 나주를 합쳐서 전라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경상도는 어디입니까? 경주와 상주를 합해서 경상도라고 말합니다. 강원도는 강릉과 원주를 합해서 강원도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입니다. 나주가 그렇게 그 때 벌써 10여 만 명이 살았다고 그러니까 얼 마나 큰 도시였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광주가 저렇게 유명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 광주를 선교의 베이스 캠프로 정해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입니다. 광주에서 선교사들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모릅니 다. 이번에 원장님 오셔서 직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대 원장이신 월슨이라고 하는 분은 1900년대 초반부입니다. 이 분은 2대 원장인데 1920년대 그 때 와서 말을 타고 지나가는데 어디 여자 한 분이 ‘날 살려 주세요 날 살려 주세요.’ 그래서 보니까 길 가에 한 30대 여자가 쓰러져 있는데 보니까 나환 자라고 말하더랍니다. 그래서 자기 말 위에 올려 태워서 광주시내로 데려와 병원에다 그 당시 나환자 는 멀리 갖다 버리는데 이 분이 시내 안에 자기 집에 데려다가 치료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광주시에 세상에 저 사람이 천사 아닌가? 어떻게 저럴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다 고름 닦아 주고 그 옆에 같 이 함께 자면서 다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광주 전라도에 있는 나환자는 다 몰려들어 가지고 금 방 백 명, 이 백 명, 오백 명, 육백 명까지 올라갔더랍니다. 광주 기독병원이 수 백 명의 나환자를 돌보 다가 육백 명이 되니까 광주시민들이 일어나서 이 도시를 다 나환자로 만들려고 하냐? 고 해서 옮긴 곳이 지금 애양원입니다. 여수 애양원으로 나환자들만 섬을 옮겨서 그 곳에 선교사들이 가서 나환자 들을 집까지 돌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세 번째로 오신 브란트라고 하는 선교사 님들은 6․25 전쟁 전에 오셨습니다. 우리나라 폐결핵 환자가 얼마나 많은지 결핵환자가 얼마나 많습니 까? 가난한 결핵환자를 데려다가 다 치료해 줍니다. 결핵 환자만 몇 백 명이 모인 것입니다. 이 브란 트 선교사는 결핵환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결핵환자가 피를 토하면 토하다가 어떤 분은 이 피는 엉킨다고합니다. 여기 막히면 안 된다고 합니다. 올라오다가 막힌 것이 있으면 다 토하다가, 토하다가 힘이 없어 여기 막히면 안 되는데 손으로 다 그것을 꺼내주고 어떤 한 분은 이 원장님이 직 접 이야기하는데 혀를 밀어서 그 피를 꺼내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 서 이 분은 결국 30대에 돌아가셨습니다. 병들어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얼마나 선교사들 이 그렇게 돌아가셨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광주에서는 선교사들을 그렇게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오 늘 모두 이 분들은 최고의 인류대학에 나와서 미국에서 최고로 잘 살던 사람이 의사가 되어서 이 나라 에 자원했습니다. 자기 자녀들도 여기 와서 죽고, 아이들 여기 와서 풍토병으로 일찍이 죽은 아이들도 너무 많고 자기도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하 나님 앞에 축복은 받되 삶은 항상 남을 섬기고 낮아지고 고넬료와 같이 선한 일 많이 하는데 일생을 바치고 남은 생애 미련 없이 이 세상에 약한 자의 친구 되어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이렇게 살아가는 정말 고넬료와 같은 성도되기를 바랍니다.
이방인 고넬료
행 10장 1~8절 / 박기완목사
오늘 본문은 고넬료라는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입니다.
고넬료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전파되었으나 고넬료를 기점으로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유대인에게만'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적용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백성이요 다른 이방나라 사람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 심지어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러므로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베드로는 모든 교회의 대표 지도자들이 모인 예루살렘 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최초로 예루살렘 회의가 열리게 된 것은 바로 고넬료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찬성과 반대의 극렬한 토의가 있었습니다.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베드로는 회의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증거 했습니다.
부정한 짐승들을 가득 담은 보자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것을 먹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고... 그것은 곧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증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실제로 고넬료의 가족들이 베드로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이는 곧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도행전 10:47∼48절 말씀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그랬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만 구원이 있다는 복음의 편협적인 우월성과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만 택하셨다는 선민사상으로 인하여 그들은 자만심과 우월감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을 기점으로 복음이 온 이방인들에게와 땅 끝까지 전파되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구원의 감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당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온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으심과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부활 이후에 사십 일을 더 유하시다가 승천하셨는데... 바로 이 당시의 유대 나라는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는 군대를 유대 땅에 파견하여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 군대의 조직을 보면, 한 군단이 6천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1개의 군단은 대대 단위로 나뉘어져서 1개 대대는 600명의 군사들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1개 대대는 100명씩 여섯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바로 고넬료는 이달리야대라는 군대의 장교로서 백 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백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대 땅에서 지내면서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이방인이었지만 믿음을 받아들여 경건한 신앙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고넬료의 신앙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1.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오늘 본문 1∼2절 말씀에 보면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랬습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대의 백부장이었기 때문에 사실 그가 개종을 해서 하나님을 믿기에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문화는 12가지의 우상신화가 있었습니다. 제우스,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아폴론, 아르테미스, 데메테르,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아레스, 디오니소스, 포세이돈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황제를 숭배했으며, 황제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처형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황제라는 말은 왕을 초월하는 개념으로 하늘의 신과 동등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임금을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신으로 섬긴 것입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청나라까지 임금을 황제라고 불렀고, 일본은 천황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늘에 와서는 상징적인 존재에 불과하지만 일본에서는 아직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 있을 때 기독교가 가장 많은 핍박을 받게 된 이유도... 바로 기됵교의 유일신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천황이 있는데 또 다른 신이 있으면 안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말로 다할 수 없는 핍박과 고문이 있었고... 이로 인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자로서 예수를 믿기에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잘못하면 자기의 직책에서 파면은 물론이고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예의가 바르고 비굴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서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신앙적인 모범의 사람이었습니다.
2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했는데, 경외라는 단어는 신에게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당시에 모든 로마 사람들은 황제를 신으로 섬기고 있었지만 고넬료는 하나님을 로마의 황제보다도 더 높은 위치에... 더 크고 높은 보좌에 계신 분으로 알고 그 하나님을 섬겼던 것입니다.
참으로 신앙은 자기의 신분이나 환경을 초월하여 갖아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계산해 보고 난 다음에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제대로 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2. 구제에 힘쓰는 자
뿐만 아니라, 2절 말씀에 보면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에게는 정복자로서의 권위적인 태도가 아니라 그들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것도 많이 구제했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말씀으로 가난한 자들과 불쌍한 자들을 도울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진정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고넬료처럼 구제하는 일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6:3∼4절에 보면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그랬습니다.
진정한 구제는... 구제한 사람은 없는데 받은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누가 구제했는지는 모르지만 구제 받은 사람들은 많은 거예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드러내지 아니하고 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3.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자
계속해서 고넬료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 2∼3절 말씀에 보면 고넬료는 제 9시에 기도 시간을 항상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하여 기도해 왔습니다.
제 3시, 제 6시, 제 9시입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말하면 오전 9시, 12시, 오후 3시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이방인이면서도 경건한 유대인들과 같이 시간을 정하여 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기에 힘썼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기도가 아니요, 어떤 대가를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총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도 하루에 세 번... 고국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사도 바울도 규칙적으로 기도하기에 힘쓰다가 옷감 장사를 하는 루디아를 만나게 되었는데 루디아는 자기 집에 유하면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강권하므로... 루디아의 집에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그 루디아로 인하여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행16:14∼15).
성경에 보면,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주의 나라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으며, 큰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규칙적인 기도의 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결정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 보지 않고 듣지는 않지만... 고넬료는 기도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지 않고 듣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보고 계셨고 듣고 계셨습니다. 고넬료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고넬료를 위하여 놀라운 계획을 세우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4.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구원받은 자
오늘 본문 3절 이하에 보면 고넬료가 시간을 정하여 놓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던 어느 날... 기도 중에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고넬료야!" 하고 불렀습니다.
고넬료가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사가 말하기를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랬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베드로 사도를 불러와서 복음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복음의 메시지를 통하여 진정한 구원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절에 보면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천사는 말하기를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데리고 오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는 잘 한 일이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가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며 경건하기 때문에... 그만하면 족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에게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고넬료가 경건하고 기도하고 구제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서 그것이 상달이 되었지만... 그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청해서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를 좀더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도 고넬료와 같은 신앙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구제에 힘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신앙심을 가진 사람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께 상달이 되고 기억하신 바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자들에게 고넬료에게 말씀하신 것과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베드로를 청하여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베드로 대신에 저를 보내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넬료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고 구제하는 일로서 다 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굳이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해서 그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고넬료의 행함으로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고넬료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앙이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노력을 다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고넬료는 그렇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몰랐기 때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던 것입니다.
그냥 열심히... 부지런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이러면 신앙생활이 잘 될꺼야... 이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실꺼야..."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고넬료는 자기 나름대로 온 마음을 다해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가 한 것이지 하나님이 그 속에 오셔서 하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도를 해도 내가 기도하는 것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구제를 해도 내가 하는 구제와 주님의 마음으로 구제하는 것이 다릅니다.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냐 아니면 내 마음에서 나온 것이냐... 만일 내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고넬료는 자기의 생각을 따라서 하나님을 잘 섬긴 것 같았는데... 결국 하나님의 마음과 달랐습니다.
베드로가 와서 전한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고넬료야! 더 열심히 기도해라... 더 많이 구제해라... 더 열심히 전도해라" 그랬습니까?....
베드로는 고넬료가 상상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증거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으며... 장사된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는 복음의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넬료의 모든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고... 고넬료가 죽어야 하는 죽음을 대신 담당하셨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말하기를 기독교는 너무 고집이 세다고 말합니다.
다른 종교를 보면 서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협력하려고 하는데... 기독교는 자기들만이 진리라고 말하면서 전혀 타협하지 않는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길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 혼합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4:12절 말씀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그랬습니다.
다른 구원의 길이 없는데 어떻게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 값을 대신 갚아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그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로 마음에 영접하기만 하면 그 즉시 그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5:24절 말씀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증거하기를 시간을 정하여 열심히 기도하고 많이 구제하는 것도 좋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님 때문에 죄사함을 받으며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0:43∼44절 말씀입니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할 때에 성령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비로소... 온 집의 사람들과 더불어 구원을 받게 되었고 새롭게 변화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내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까지는 자기가 마음 중심의 왕좌에 앉아서 자기의 생각과 방법대로...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지만... 이제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로는 예수님을 마음 중심의 왕좌에 모셔들이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예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순종하고 따르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주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항복하여... 여러분의 왕좌에 예수님을 앉히기 전까지 여러분에게는 절대 평안이 없고 행복이 없고 쉼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 여러분의 인생을 온전히 맡기고 믿음으로 달려간다면 인생의 모든 삶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고, 어떤 문제가 있고,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도... 그것은 여러분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주님의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얼마나 은혜롭겠습니까?...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주님은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8∼30절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하는 것과 주님이 하시는 것이 비교가 되겠습니까?... 비교가 안됩니다.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이 시간에도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에 주인이 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주인이 되시는 그 때... 주님은 여러분을 흥하게 하고 복되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고넬료는 이제까지 자기가 해 왔던 신앙의 모습들을 다 버리고... 예수님의 성령을 마음에 모셔서 자기의 주관과 방법이 아니라 이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삶에 행복이 넘치고 은혜가 넘치고 승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경건에 붙잡혀 사는 사람
행 10장 1~8절 / 김철현목사
여러 가지 병에 시달리던 중년 남자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깜짝 놀란 아내가 황급히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도착하자마자 부인에게 절대로 들어오면 안 된다는 주의와 함께 방문을 닫았습니다. 1분이 지나자 의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와 부인에게 펜치를 갖다달라고 합니다. 부인은 서둘러 펜치를 찾아 의사에게 갖다 주었고 들어간 지 5분이 지나 의사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다시 나오며 드라이버랑 망치도 갖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무슨 큰 병인가 싶어 걱정하며 연장들을 챙겨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또 5분이 지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의사가 문밖으로 나오며 톱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아내가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방안으로 달려 들어가며 도대체 무슨 병이냐고, 죽을병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의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부인 진료 가방이 안 열려요!"하며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또 있습니다. 이리 저리 진료를 마친 뒤 하루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 했다는 의사의 말에 부인이 무슨 중한 병이라도 되는 줄 알고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사 왈"그게 아니라 제 말은 하루만 늦게 왔어도 남편의 병이 다 나아 버릴 뻔했다 이겁니다."하더랍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면 때로는 본질적인 것은 놓치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논쟁하거나 고민하거나 갈등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사실 처음부터 본질 적인 문제를 인정하고 생각했더라면 아무 것도 아닐 수가 있는데 괜히 비본질적인 것을 가지고 빙빙 돌다가 정작 핵심은 잃어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분야에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종교에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심각합니다.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도 이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한다는 말 자체가 월권입니다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제도적인 문제로 한 사람의 신앙을 판단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사람의 신앙의 본질을 어디에다 두는 것이 맞습니까? 교회 다닌 햇수가 그의 신앙을 말해줍니까? 아니면 그 직분이 그 기준입니까? 학력입니까? 출신성분입니까? 외모입니까? 재력입니까? 이 모든 것들은 모두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것들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것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신앙적 경건의 모습입니다.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신앙하는 자세가 어떠한가, 또한 실제적인 생활 속에서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한가가 본질적인 경건의 문제입니다. 물론 이 경건이라는 말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의 신앙의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성품과 인격에서부터 순종과 헌신, 말과 행동까지를 포함한 신앙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신앙 생활하는 우리 모두에게 요구되어지는 참모습이 경건이라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경건하게 살았다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원래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사람이었습니다. 즉 신앙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서 신앙을 받아들였고 뿐만 아니라 신앙의 그 형식만 가지고 산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신앙의 내용까지도 갖추고 살았던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의 정확한 신분은 로마 사람 백부장이었는데 그의 신분이 어쩌면 예수를 믿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예수를 믿은 겁니다. 그는 가이샤라를 점령한 군인이요, 아쉬울 게 없는 부자요, 이방인인데 이 사람이 예수를 믿고 경건하게 살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나 당시 정황으로나 특이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 사실 앞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특별히 경건이 과연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서 생각해봅니다. 오늘 이 사람은 로마 사람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당당한 로마 군인이요. 문화적으로는 헬라 철학에 도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종교적으로는 피지배계급인 점령지에 사는 그 나라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대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보면 참 어렵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기 시작한데는 눈물 나는 이야기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어렵게 예수 믿기 시작해서 죽을 때까지 믿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을 보면 정말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는 반면에 가만히 보면 정말 조그마한 것이거나 또 별것도 아닌 것을 극복하지 못해서 예수 못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내가 명색이 그래도 사회에서는 인지도가 있는데 교회 나가서 젊은 사람들 뒤에 서서 따라가게 생겼느냐'고...'내가 세상을 살아도 한참을 더 살았는데 교회 나가서 젊은 목사가 하는 설교나 듣게 생겼냐'고...어떤 사람은 부인이 집사인데'이제 나가서 예수 믿기 시작하면 마누라 치마꼬리 붙잡고 따라 다니는 것 같아서'못간데요. 그러면서 장로 시켜 주면 나가겠답니다. 별것도 아닌 자존심 때문에 예수 못 믿는 참 답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에 그까짓 자존심이 문제입니까? 그 시각으로 오늘 성경을 보면 로마 군인이 점령지에 와서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참 어려운 겁니다. 고로 로마 군인 고넬료가 여기서 그 피지배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경건하게 살았다는 것은 대단히 크게 평가해야 되는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했든지 이미 오랜 전부터 믿었든지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내 체면이나 내 자존심 따위는 접어 두어야합니다. 교회 안에는 누구든지 봉사자요, 헌신자의 모습으로 서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장관도 안내자요, 사장도 봉사자입니다.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만 대통령에 당선 된 이명박 당선인도 장로님인 걸 모르는 분이 없을 텐데 이 분은 대그룹 사장 시절 때도 교회에서 주차 관리 하셨지 않습니까? 장로가 되기 전부터 된 이후에도 한결같이 봉사자의 모습으로 섰을 때에 하나님이 높여 주셨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고넬료라는 군대장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일에 그의 직책이 명예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정말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부분이 성경에 나오는데 2절입니다."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하는 부분입니다. 얼마나 부럽습니까? 아마 오랫동안 교회 나오면서도 혼자 와서 예배드리는 분들이 참으로 부러운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은 자기가 믿고 귀한 신앙이기 때문에 온 친척, 온 집으로 더불어 믿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올 해 여러분의 신앙 목표도 가정을 인도하고, 자녀들을 인도하고, 친척을 인도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경건한 생활을 하는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이 사람의 신앙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경에"항상 기도했다."그랬습니다. '항상'이라는 말에는 일상적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신앙 생활하는 우리들을 가만히 보면 병들면 기도하고, 실패하면 기도하고, 억울하면 기도하고, 꼭 기도할 때가 따로 있거든요. 그러나 이것은 옳은 경건이 아닙니다. 경건은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이 있건 없건 항상 기도하는 것이 경건의 습관입니다. 그러니 고넬료가 항상 시간을 따라서 온 집으로 더불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특별기도 열심히 하는 것 보다 온 집으로 더불어 항상 하나님 앞에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 기뻐하시고 바라는 경건의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 그의 경건의 모습을"구제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신앙이 생활화되면서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정복자로서 그 약소민족에 속한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비참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권력자가 피지배자의 형편을 돌아보는 그런 마음을 가졌고 나은 자가 못한 자의 아픔을 헤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대단히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경건한 자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오늘 성경말씀 속에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부분은"내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했다."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구제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한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신바 된다는데 놀라운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정성껏 하는 일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구체적인 기도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욥바에 있는 시몬을 데려 오라"그럽니다. 순종합니다. 주시는 말씀에 대한 순종, 이것이 경건입니다. 그 다음에는 영접하는 모습을 보세요. 온 집으로 더불어 꿇어 엎드리고 정성껏 절을 합니다. 베드로는 초라한 갈릴리 어부입니다. 고넬료는 군대장입니다. 그리고 같이 있는 사람들도 장교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 앞에 절하듯 깍듯이 하니까 베드로가 민망해서 일으키면서"나도 사람이요."할 정도로 얼마나 진실하고 경건했던가를 말해주는 겁니다. 그뿐 아니라 모두가 함께 얘기합니다."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말씀을 듣기 위하여 우리가 다 여기 있습니다."베드로 앞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는 신앙적으로 하나님 앞에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래서 큰 역사가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장면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라는 사람을 본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 것입니다. 여기에 경건의 모습이 있습니다. 예배의 경건이 있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경건이 있었습니다. 큰 역사가 나타나고 마침내 고넬료의 가족이 다 세례를 받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들은 로마로 돌아가서 교회를 세우는 하나의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일꾼이 됩니다. 너무너무 귀한 일 아닙니까? 그는 귀족 의식이나 계급의식이나 자존심이나 자기 명예를 다 포기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영접하면서 하나님 앞에 있는 그 말씀을 듣는 복음적 경건이 있었기에 이방사람으로서 온 가족이 구원을 받는 첫 번 열매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소중하게 쓰여 지는 자가 됩니다. 오늘 우리들도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이 놀라운 경건의 능력을 가진다면 내가 변하는 역사, 교회가 달라지는 역사, 하나님의 나라가 넓혀지는 역사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의 신앙 속에서 우리의 경건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봅시다. 그리고 경건의 모양뿐만이 아니라 진정한 경건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보며 얼마나<경건에 붙잡혀 살아가는 나>인지를 깊이 생각함으로 남에게 보이는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는 경건의 능력을 소유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인의 웰빙의 삶
행 10장 1~8절 / 이정익목사
여러분은 “웰빙”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요즘 부쩍 웰빙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well being" 이라는 말은 “잘 사는 것”, “잘 사는 삶”, “뜻있고 행복을 이루는 삶”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쩍 삶의 질을 높이자, 삶을 누리자, 삶을 즐기자 라는 풍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민족의 삶의 형태는 일하고 돈을 모으는데 주력해 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일 잘하기로 알아주는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이 지독하다고 말했는데 한국인은 더 지독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미국에 이민간 분들이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할 때는 일거리를 한 아름 가지고 집에 와서 밤새 일하고 아침에 출근하는 민족이 우리민족입니다. 우리민족은 이렇게 지독한 면이 있는 민족입니다. 그렇게 일하고 수고해서 오늘 이 나라가 이정도 살게 되었고 국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으기는 했는데 막상 돈을 모으고 보니까 그 돈을 사용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죽도록 일만 했지 삶을 누리고 향유하는 방법은 몰랐습니다. 그저 열심히 일하고 돈을 모으면 되는 줄 알고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다가 이제 와서 사람들이 사람이 사는 것이 그게 아니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일만하고 돈만 벌로 모으다 보니까 미처 모르던 삶의 뜻을 알게 되었고 이렇게 사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오늘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좋은 깨달음입니다.
사람은 삶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을 향유하고 고상하게 즐기고 누리고 즐겁게 꾸밀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원하신 것은 그렇게 일만하고 모으고 움켜쥐고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행복하고 뜻을 찾아가며 살아가는 삶을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웰빙”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새삼스럽게 사람들이 웰빙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웰빙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오늘 웰빙을 발견한 것은 참 다행스런 일인데 요즘 사람들이 웰빙의 삶의 내용을 생각해 낸 것을 보면 참 한심합니다. 요즘 주 5일 근무제가 실시되면서 시간이 생기고 여유가 주어지니까 사람들이 고안해 낸 사람이 잘 사는 방법을 보면 이런 것입니다. 산속에 집을 짓고, 별장을 짓고, 주말에는 그곳으로 놀러가고, 먹을거리를 고를 때는 농약치지 않은 유기농작물을 골라 먹고, 수입 물품은 먹지 말고 순 우리 것을 골라 먹고, 여유와 휴식을 누리는 삶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사람들이 찾아낸 웰빙의 내용입니다.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이 고작 발견해 낸 웰빙의 삶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여가를 즐기고 삶을 향유하고 누리는 가장 좋은 모범을 이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합니다. 보여주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고작 생각해 낸 것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어야 할 진정한 웰빙의 삶의 행복함, 즐김, 향유, 누리는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공해 야채나 사다 먹고 산속에 집을 지어놓고 주말에 놀러나 가고 불가마에 가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는 것이 아니고 진정 우리 그리스도인은 또 다른 차원의 삶에서 얻어지는 이 웰빙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 보면 이 웰빙의 삶을 아주 잘 이루며 살았던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고넬료입니다. 그는 로마 군인이고 주둔군 장교이고 관리자 입니다. 지배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짤막하게 그의 삶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웰빙의 내용을 다 포함하고 있는 진실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또 3절을 보면 “하루는 제 구시쯤에 기도하는데 환상 중에 천사가 나타나 고넬료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고넬료가 두려워하여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으니 천사가 대답하기를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정도면 진정 웰빙의 삶입니다. 이것이 웰빙입니다. 이것이 이 땅에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웰빙의 삶을 살려면 몇 가지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삶의 의미를 내 집에서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고넬료는 “온 집으로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했습니다. 여기 “온집”이라는 말은 내 가족, 종, 노예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넬료에게는 가족 말고도 노예도, 종도, 부하들도 있었습니다. 그 모두가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 정도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누려야 할 웰빙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넬료는 이방사람인데도 벌써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이 세상의 가장 좋은 웰빙은 내 집에서 찾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점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행복함, 즐거움, 재미하면 자꾸만 어디를 가야만 얻어지는 줄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내 집이 삭막해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혼하면 수십 가지 불편한 점이 따릅니다. 그런데 왜 결혼을 하느냐 하면 결혼을 안 하면 결혼해서 얻는 기쁨조차도 경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가정이 없는 사람은 가정에서 주어지는 가정의 소중함이나 즐거움 그리고 행복함을 모릅니다. 결혼 안한 사람은 결혼해서 주어지는 행복함이나 즐거움을 모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으면 기쁨 보다는 수고가 더 많습니다. 아이를 낳아 걸을 때까지 수고가 얼마입니까.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늘 보초를 서야 합니다. 아이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또 아이가 초등학교에 가서 고등학교를 졸업 때까지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래야 아이가 학교에서 일등을 하고 대학에 갈 수 있습니다. 또 대학교 보내면 끝납니까. 결혼할 때까지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 때가 되면 엄마를 무시합니다.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혼할 때 엉뚱한 아이를 데리고 와서 결혼하겠다고 우깁니다. 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겨우 결혼을 시켜놓으니까 그 다음에는 사네 안사네 하고 싸웁니다. 싸우면서도 애는 낳아 놓습니다. 그러면 그 손자를 키워주어야 합니다. 얼핏 보면 그런 불행을 왜 자초하느냐 하고 말하는데 그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정신이 병들은 정신입니다.
그 삶에서 삶의 뜻이나 의미나 깊음이 다 들어있다는 점을 모르면 인생에서 얻어지는 진정한 기쁨이나 행복이나 즐거움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삶은 인간이 수십 세기 동안 이어온 사명의 삶입니다. 그 삶에서 진정한 기쁨이나 즐거움이나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비로소 웰빙의 삶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웰빙은 가정에서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고넬료는 가정부터 웰빙의 천국으로 가꾸고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하나는 “자족하는 웰빙”이어야 합니다.
이 자족함의 삶이 참 좋은 삶의 요소입니다. 고넬료는 성경을 보면 “그는 경건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경건“이라는 말은 헬라말로 ”유세베스“라는 말인데 그 뜻은 당시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했을 때 사람들이 지니는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금욕주의에 버금가는 무욕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고넬료는 로마군인인데도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경건한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이나 즐거움이나 누림은 자족하는 마음에서 얻어집니다. 어느 것에서도 자족하게 되면 행복해지고 즐거울 수 있습니다. 자족은 80평 아파트에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큰 아파트를 가지면 더 큰 아파트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라는 우상에게 붙잡히게 됩니다. 20평 아파트에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최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에서 삶의 질이 나오고 행복의 강도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웰빙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불행하게도 자족의 지혜가 없는 시대입니다. 탄산음료를 마시면 갈증이 더 심해지듯이 사람들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마음의 갈증은 강해집니다. 가지면 더 갖고 싶고 누리면 더 누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의 바다는 끝이 없습니다.
지금 새 아파트가 나오면서 삶의 방식이 편리해지도록 자꾸만 노력하는데 이러다 마침내는 모든 전자기기들을 다 떼어내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삶의 방식을 더 편리하도록 자꾸만 연구합니다. 그래서 밖에서 핸드폰 하나 가지고 불도 때고 끄고 문도 잠그고 열고 커튼도 열고 닫고 가스 불도 켰다 껐다 그렇습니다. 삶의 방식이 이렇게 자꾸만 편리해 지다보면 사람들은 더 움직이지 않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모든 질병들 때문에 시달린 나머지 큰 재앙이 이 땅에 발생할 것입니다. 자동은 때로 큰 재앙을 불러옵니다. 자동화가 멈추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엄청난 재앙에 직면하게 되는 날이 오고 말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큰 것이나 깨달은 것처럼 이제는 움직이고 살자 하고 모든 자동화를 수동으로 바꾸자 하고 요란 떨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웰빙은 그런 삶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웰빙은 자족하는 마음에서 얻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점을 세상에 알려주어야 합니다. 생각 없이 덩달아 뛰지 말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웰빙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만들고 수고하고 이루고 살아가는 삶에서 얻어집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지정하신 삶의 원리입니다. 고넬료는 경건했다고 했습니다. 근면하고 부지런하고 섬세하고 삶에 뜻이 들어있는 사람을 살았습니다.
세 번째는 “나눔으로 풍성한 삶을 누리는 삶에서” 웰빙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고넬료는 “구제하며 늘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구제가 하늘에 상달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구제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셨습니다. 그것도 세상에서 나누고 베풀고 기도하는 내 모습이 하늘에서 보시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장 강하고 선하고 효과 있는 웰빙의 삶이 아닙니까.
나눔의 삶은 성경이 태초부터 명령하신 가장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삶의 형태가 나누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고 내 후손들에게, 학생에게, 젊은이에게, 자녀들에게 이 나눔의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눔의 삶으로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진 사람의 책임감“이라는 말이고 ”특권층의 솔선수범“이라는 말입니다. 가진 사람은 나눌 때 가장 행복함이 주어지고 즐거움과 기쁨과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배운 사람은 솔선수범하는 삶을 살아갈 때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헌금하고 선교비 내고 봉헌하고 나누고 베풀 때가 가장 성숙한 면모가 나타날 때입니다. 나누는 삶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웰빙을 아는 사람이 나누고 봉헌하고 헌금하고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기업인은 절대로 큰 회사를 만들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회사는 정도껏 키워서 나머지 힘을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회사가 커지고 공적인 단계에 접어들게 되면 사장이 마음대로 번 돈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도껏 키워서 번 돈으로 선교헌금을 마음껏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왜 회사를 하고 돈을 버는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선교헌금하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즐거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웰빙의 삶입니다.
네 번째는 “삶의 정체성을 이룸으로” 웰빙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 고넬료는 신앙생활 하기 참 어려운 여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선 그는 로마인이고 로마 군인이고 이방인입니다. 조건으로 보아 독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기가 참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의 삶의 내용이 하나님의 뜻에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는 삶의 중심을 이루어 살았습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행복하게 해 주는 삶의 요소였습니다. 그의 삶에는 중심이 있고 철학이 있고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삶이 웰빙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함과 즐거움은 헌신의 삶을 살아갈 때 주어집니다. 내가 사는 이유가 분명해야 행복이 주어집니다.
노아 부부는 타락한 그 시대와 비 타협했습니다. 외롭지만 그것을 감수하면서 고고히 자신의 신앙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는 그 삶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둘이 같은 뜻으로 신앙인생을 이루며 살아갔습니다. 그 삶에서 희생도 주어지고 불안정이라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그 부부는 그 삶에서 자신들이 살아야 할 삶의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낳아 양육함으로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고뇌가 있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특수한 삶의 내용임을 그대로 받아들여 충실하게 감당해 냈습니다. 고넬료는 군인이었지만 진정한 신앙을 구현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행한 그의 신앙이 하늘에서도 알아줄 만큼 신앙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모두 힘든 일이지만 그것이 내가 할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 일을 마다하지 않고 아주 만족한 마음으로 그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삶에 웰빙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웰빙의 삶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참 위대한 발견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생각해 낸 웰빙의 내용은 고작해서 주말여행이나 다니고 산속에 집을 지어놓고 주말에 놀러나 가고 농약치지 않은 채소나 골라 먹고 불가마 찜질방이나 가서 늘어지게 잠이나 자는 것을 웰빙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야말로 참 유치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한 웰빙은 정신적이고 사회적이고 영적이어야 합니다. 그 내용이 충족되어야 진정한 웰빙이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룬 사람이 유대인도 아니고 사도도 아닌 이방인이요 군인이요 로마인인 고넬료였습니다. 이 고넬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웰빙의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웰빙의 삶은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에서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오늘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각 없이 살면 철없는 신앙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진정한 웰빙의 삶을 살아갈 때입니다.
신앙과 삶
행 10장 1~8절 / 김경년목사
어떤 교회에서 선교를 위한 여전도회 바자회가 있었습니다. 참고로 우리교회도 5월에 선교 바자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이렇게 광고를 했답니다.
“이번에 선교바자회를 위하여 여선교회 회원들은 다음주일까지 가정에서 쓸모없는 물건이나, 1년이 지나도 한번도 쓰지 않는 것이나, 장롱이나 구석에 쌓여있는 것들을 다 교회로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 주일에 여전도회 회원들이 자기 집에서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모두 다 한 가지씩 가지고 왔는데 놀랍게도 자기 남편을 데리고 왔답니다. 자기 집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을 해보니 남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그 교회 목사님 사모님도 목사님을 가지고 왔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 성도들의 가정에는 쓸모없는 남편이 한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두 귀한 분,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쓸모 있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난시간까지 은혜를 받았던 사도행전을 보면 대부분 가장 귀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사도행전 7장에서는 최초의 순교자요 평신도였던 스데반이 나오고, 8장에서는 빌립 집사가 등장하고, 9장에서는 기독교 역사를 바꿔놓은 바울이 등장하고, 오늘 읽은 10장에서는 고넬료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을 8절까지 봉독했으나 사실은 10장 전체에서 고넬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고넬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인가를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넬료는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 1절 말씀입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1)먼저 고넬료는 이탈리아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복음이란 유대인 안에서만 증거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당시 세계 최고의 시민권을 자랑하는 로마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2)또한 고넬료는 로마인 정도가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지배하던 로마군대의 100부장, 즉 100명의 정예군사를 지휘하는 장교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일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복음안에 사는 신앙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고넬료의 신앙은?
본문2절 상반절에 기록되었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1)경건한 신앙입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라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여기서 ‘경건’이란 ‘유세베이아’라고 하는데 ‘유’라는 말은 ‘좋다’ 혹은 ‘잘한다’는 의미이고, ‘세베이아’는 ‘예배’,‘경배’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의 뜻은 ‘예배를 좋아한다’ 또는 ‘예배를 잘 드린다’ 라는 말입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으며, 특별히 군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군인은 매우 바쁘고 고단한 직업입니다. 그런데 그는 결코 예배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온 식구들과 함께 예배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그의 신앙은 항상 규칙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 3절 말씀입니다.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여기서 ‘제9시’란 유대인의 기도 시간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합니다. 제3시,제6시,제9시 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시간으로는 오전9시,12시,3시입니다. 고넬료는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만 되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좋은 전통이 있습니다. 바로 새벽기도입니다. 새벽기도는 우리에게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도록 돕는 한국교회의 좋은 전통입니다.
고넬료가 규칙적으로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던 어느날 환상을 보게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사의 음성을 듣습니다.
“너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바가 되었다”
여러분, 우리가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도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도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인 기도를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9절에 보면 베드로는 제육시에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루에 두시간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고, 특별히 긴박한 일이 생기면 하루에 3시간씩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며, 꿈을 갖게 됩니다. 내가 알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찬송가 480장 1절)
기도하는 이시간 주께 무릎꿇고
우리 구세주 앞에 다나옵니다.
믿음으로 나가면 주가 보살피사
크신 은사를 주네 거기 기쁨있네.
(후렴)
기도 시간에 복을 주시네.
곤한 내 마음 속에 기쁨 충만하네.
기도시간에 복을 주십니다. 기도시간에 환상을 보게 하십니다. 기도시간에 기적을 주십니다. 기도 시간에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넬료도 기도 시간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기도시간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기도의 짝을 맺어주십니다. 말씀에도 짝이 있듯이 기도에도 짝을 맺어 주십니다. 고넬료와 베드로를 짝지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짝을 맺어 주십니다. 즉 응답해 주십니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고넬료의 신앙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의 삶을 살펴봅시다.
고넬료의 삶은 구제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본문 2절 하반절에 고넬료는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 고 했습니다. 또한 본문 4절 하반절에 “그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으로서 군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백성을 많이 구제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많은 군인들이 약탈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를 보이는 모습입니다. 고넬료도 충분히 더 많이 빼앗고, 더 많은 것을 모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고 난 후 참된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구제는 신앙인의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결론의 메시지를 깨닫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고, 또 하나님이 기억하신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제 무엇인가 엄청난 축복이 임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고넬료는 군인으로서 사실 기도하기 매우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이었으나 기도를 규칙적으로 드렸고, 군인으로서 그렇게 넉넉하지 않는 생활비 중에서 많은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에 물질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대가로 무엇인가 확실한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예를들면 로마의 백부장에서 더 높은 지위로 계급을 승진시켜 주시든지, 아니면 물질의 복을 왕창 부으셔서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주셔야 하는데, 오늘 말씀의 응답은 전혀 예상을 빗나가는 말씀입니다.
본문 5절입니다.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놀라운 깨달음을 주는 말씀입니다.
고넬료에게 주신 응답은 욥바에 사람을 보내서 사도 베드로를 청하라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있는 곳에서 35킬로 떨어진 항구에 있는 욥바에 사람을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거기가서 베드로를 청하여 심방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그시간에 베드로는 무엇을하고 있었습니까?
사도행전10장9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는 그때 지붕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상을 봅니다. 거기서 이상한 보자기에 쌓인 동물들을 잡아먹으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먹을 수 없다고 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깨끗하게 했으니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 환상을 보는데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왔습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깨닫습니다. 지금까지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택하지 않은 줄로 알고 유대인에게만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베드로의 편견이 깨어집니다. 베드로의 좁은 안목이 넓은 안목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기도하면 사람이 대범해지고, 기도하면 사람이 편견이 깨어집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서 가보니, 벌써 고넬료는 온 친척과 가족들을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24절) 이것이 은혜받는 자세입니다. 먼저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의 종을 청하여 놓고 먼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들어오자 고넬료는 백부장의 신분으로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25절)
이것은 놀라운 겸손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겸손입니다. 역시 기도하는 사람은 엎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높은 지위와 신분을 떠나서 먼저 인간의 됨됨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넬료의 인격이요, 사람됨됨이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말을 들어봅시다.
본문28-29절 입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베드로가 이렇게 말할 때 고넬료는 환상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말하고 본문 33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주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것이 주의 종의 설교를 듣는 성도의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고넬료는 그런 자세로 설교를 듣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그 말씀을 듣다가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고, 세례를 받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참된 복은 영적인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넬료가 만약, 백부장의 신분에서 더 높은 계급으로 승진을 했다던가, 아니면 더 많은 물질적인 복을 받았다고 하면 고넬료는 더 이상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가장 귀한 영적인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가장 귀한 복을 응답으로 주셨습니다.
기도하고 구제하고, 하나님을 경건하게 잘 믿는 자에게 주시는 참된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 추구하고 갈망해야 하는 복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직장에서 승진하고, 물질적인 복을 더 많이 받고, 모든 것이 만사형통하게 되는 것만이 진정한 복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신령하고, 영적인 복을 더욱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의 종들의 말씀을 통하여 더 큰 은사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더 넓은 세계로, 더 깊은 은혜를 우리가 받아서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참된 신앙인으로 경건하게 살면서, 주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살 때, 하나님은 또다른 차원의 영적인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참된 복을 받아서 누리며 살아가는 시대앞에 쓰임받는 종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