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화는 전업주부의 하루 일과를 남편 기태의 옷을 다리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결혼한 지 한 2년 후부터 서인가 남편의 옷을 다릴 적마다 남의 논에 떨어진 이삭 줍듯, 기태의 바지 주머니, 혹은 상의 겉주머니에 남겨진 돈을 살짝살짝 가져보는 재미에 폭 빠져 지내게 되었다. 옷에서 나오는 천 원짜리 지폐 두, 세 장 또 가끔은 오천 원짜리도 한 장, 아주 재수 좋은 날엔 만 원 권 지폐도 어쩌다 나오곤 했다.
수재형의 기태는 두뇌의 명석함과는 달리 건망증이 몹시도 심해 이 남겨진 돈에 대해서는 자신은 주머니에 그런 것을 남겨 놓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듯 돈의 행방에 대해 물어본 적도
궁금해 한 적도 찾으려 한 적도 없었다.
오랜만에 만 원 권 지폐 몇 장이라도 주운 날이면 석화의 가슴은 콩당콩당 두 방망이질을 해 그래도 이건 액수가 좀 크니 기태에게 건네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도 해보지만 그래서 몇 날 몇 일을 남편의 눈치 살살 살피며 요리조리 머리 써봐도 기태는 흘린 이 돈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태도였다. ‘에따, 모르겠다, 여보 고맙수. 아, 건망증이 백해무익한 것만은 아니군.’ 룰루라라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의아해하는 기태를 바라보며 석화는 애써 웃음을 참느라 쓸데없는 너스레를 떨었다.
석화는 이렇게 억수로 신바람 나는 날엔 큰 맘 먹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도 사 먹이며 ‘엄마는 옷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해 입으면서 너희들에게만은 이토록 비싼 피자를 그것도 큰 것으로 사 주는 것이니 이 다음 엄마 늙으면 잘 좀 거두어 주라.’ 한 마디 던지며 온갖 생색의 말과 함께 혼자만의 기분 괜찮은 비밀을 맘껏 즐기는 것이었다. 물론 그 날 저녁 식탁 위에 꽁치 몇 마리 더 올려놓는 것도 알뜰하게 잊지 않으면서............
건망증이 뇌의 이상과 관련이 있는지 몇 달을 두통에 시달리던 기태는 병세가 점점 악화되더니 급기야 병원으로부터 뇌종양 선고를 받았다. 의사에게서 선고를 받은 지 불과 7개월만에 사랑스러운 가족을 뒤로한 채 사신의 영접을 받으며 석화의 곁을 떠나갔다. 파란 힘줄이 내비치는 가녀린 하얀 손으로 그의 처남 석진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며 남겨진 자의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몰아쉬던 가쁜 숨을 마지막으로, 살고파 몸부림쳤던 세상과의 작별을 고했다.
남편과 급작스럽게 영원한 이별을 맞은 석화는 슬픔과 황망함을 가눌 길 없어 남동생 석진에게서 삼오제때 건네 받은 편지를 열흘 후에나 열어보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인!
내 옷 주머니에서 돈이 곧잘 나왔던 것이 당신에겐
향기로운 비밀이 되기를 바랐오.
하지만 아침에 만원짜리 지폐를 모르는 척 흘리고 간 날
저녁 식탁엔 어김없이 내가 좋아하는 꽁치가 푸짐하게 차려 있어
나 또한 얼마나 행복해 했었는지 당신은 아마 모를거요.
이젠 알았겠지만........
아이들은 피자도 실컷 먹었다지?
그러지 말고 당신에게나 요긴하게 쓸 일이지.
그건 당신을 위해 내가 남겨놓고 싶었던 내 자그마한
그러나 변치 않을 사랑의 표시였는걸!!!
창문 너머 고운 단풍나무 사이로 얼비치는 높은 하늘은 온통 물바다로 변해 석화의 가슴 위에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