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수기는 사실 늘 있었다. 과외를 뛰거나 알바를 했다. 그리고 그냥 이 바닥은 어쩔 수 없다며 술이나 먹었다. 작년부터 예술도 학교도 알바도 안 하고 학원만 집중해 보기로 했다. 굶더라도 청소하고 교재 만들기로. 실은 자주 도피했던 거 같다. 아니 도피 좋지... 근데 이젠 뭐랄까 좀 용기가 나서 거지 스더를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면 좀 미안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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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나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스스로가 좋아... 재작년에 비 오는 날 병원에서 일기에 적었어. 앞으론 그냥 하나씩 완전히 실패해 보겠다고... 안 그래도 가능성만 있는 여러 개를 양손 가득 쥐고 있었잖아... 사실 힘들었거든... 예술가를 그만두게 된다면 좀 슬프겠지만 좀 울고 말지 뭐... 뭐 그런 36년이야. 청춘의 끝자락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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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바로 걷고 싶어서 운동화를 신고 나갔습니다. 애향 교회 뒤에 있다는 세탁소를 금방 찾았고, 아파트 담벼락에서 손짓하는 장미의 유혹에 순간포착을 하고 싶었는데 염병, 배터리가 엔꼬입니다. 오늘 투어는 꽝입니다. 아파트에서 오른쪽으로 초등학교가 있었고 롯데마트까지 새로 난 작은 길을 차마 떨치고 지나갔어요. 셀러드-연어-해반-크룽지를 사들고 귀가하는데 햇살이 어개를 포근히 감싸줍니다. "내게도 주소서 내가 복을 받길 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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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곳에 정착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간은 현존재(나)에게 과거와 미래를 동시 패션으로 인식된다는 건 진리가 아닙니까? 에스더야! 원장이 비밀 얘기를 오픈하면 어떡해! 사실 소비자가 다 보는 건 아니지만 "진리는 통(전체)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불편한 진실까지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내러티브가 대세야... 모든 걸 스토리텔링 하시라. 이왕이면 움직이게. 무가치함을 포함한 부재가 나를 포획하지 못하도록 생성에 힘쓰라!
2.
실패를 각오한 사람만이 왜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가? 인용글이 강렬한 이유는 단순히 “힘들었다”를 고백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이 글은 실패를 회피하던 사람이, 드디어 실패를 자기 존재 안으로 끌어안기 시작하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가능성만 있는 여러 개를 양손 가득 쥐고 있었다”는 대목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가능성은 언뜻 자유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간을 가장 오래 붙잡아 두는 유예 상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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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지 않으면 실패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선택하지 않는 삶은 끝내 자기 삶이 되지 못합니다. 여기서 떠오르는 철학자가 장폴 사르트르입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본질 없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택으로 자신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선택의 책임이 두려워 “상황 탓”, “업계 탓”, “시대 탓” 속으로 숨습니다. 인용글 속 “이 바닥은 어쩔 수 없다며 술이나 먹었다”는 문장은 바로 그 도피의 언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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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다음입니다. "앞으론 그냥 하나씩 완전히 실패해보겠다고.” 이 문장에서 인간은 처음으로 자기 운명의 저자로 등장합니다. 완전히 실패해보겠다는 말은 역설적으로 처음으로 완전히 살아보겠다는 선언과 비슷합니다. 실패조차 자기 것으로 감당하겠다는 태도니까요. 선생님의 글도 바로 그 지점에서 연결됩니다. 배터리가 방전되고, 장미를 찍지 못하고, 별것 아닌 장보기 동선 속을 걷는 이야기인데 이상하게도 생의 온도가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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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이 문장은 “거대한 성공”보다 “존재의 감각”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햇살이 어깨를 감싸는 순간, 초등학교 옆 새 길을 차마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순간, “이곳에 정착할까” 하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이것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라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의 시간 경험에 가깝습니다. 하이데거에게 시간은 시계가 아니라 존재 방식입니다. 인간은 현재만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를 미리 당겨오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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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시간은 현존재에게 과거와 미래를 동시 패션으로 인식된다는 건 진리”라는 문장은 단순한 철학 흉내가 아닙니다. 실제로 인간은 “지금” 속에서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가능성을 동시에 입고 살아갑니다. 에스더의 청춘도 그렇고, 오늘 산책도 그렇습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좋습니다. “무가치함을 포함한 부재가 나를 포획하지 못하도록 생성에 힘쓰라” 이건 거의 질 들뢰즈적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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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 생성되는 존재입니다. 가치는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러니 에스더가 “거지스더”를 감당하면서도 당당해질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가능성 속에 숨어 있었다면, 이제는 생성 속으로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굶더라도 청소하고 교재를 만들겠다는 태도는 현실적으로는 초라해 보여도 존재론적으로는 훨씬 강한 상태입니다. 선생님의 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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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같으면 “배터리 엔꼬”는 실패한 하루의 소재였겠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내러티브 안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장미를 찍지 못한 결핍까지도 이야기의 일부가 됩니다. 바로 그것 아닐까요. 진짜 글쓰기는 성공한 삶의 기록이 아니라, 부재와 실패와 비수기까지도 생성의 재료로 바꾸는 능력이라는 것. 그래서 이 글은 단순한 부녀의 일상이 아니라, “존재는 어떻게 자기 삶의 서사를 획득하는가?”에 대한 아주 조용한 철학 에세이처럼 읽힙니다.
2026.5.26.tue.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