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 벌초 걸음
연일 날씨가 흐려 비가 오는 구월 초순 주말이다. 올해는 지난봄에 낀 윤이월로 추석이 늦게 든 편이다. 엊그제 칠월 백중이었으니 이달 말 추석이 다가온다. 우리 집안은 음력 팔월 초하루 이전 선산 벌초를 끝내는데 올해는 예년보다 이른 이번 주말 벌초를 시행했다. 날이 밝아오는 미명에 행장을 차려 현관을 나서 같은 생활권에 사는 작은형님과 조카와 함께 고향 의령을 향했다.
우리 집안에선 몇 해 전 코로나가 닥쳤던 봄에 벽화산 정상부와 벽화산성 고조와 증조의 산소를 숙부님 산소 가까이 옮겨왔다. 해마다 먼 길에 무성한 숲을 헤쳐가 벌초와 성묘를 다녀오기가 힘들고 번거로워서다. 고향을 지키는 큰형님은 선대 산소를 옮겨옴과 동시에 기제사도 줄여 봄날 통합한 시제로 모신다. 형제 조카들이 한 자리 모여 조상 음덕을 기리고 벌초 때 다시 본다.
올여름은 벌초 이전 지난 칠월에 고조 증조와 숙부님 산소를 한 차례 살폈던 적 있다. 전에도 몇 차례 그랬는데 멧돼지가 산소 봉분을 파헤쳐 놓아 난감한 현장을 확인하고 수습책을 의논했던 걸음이었다. 멧돼지가 먹잇감으로 삼는 지렁이나 굼벵이를 찾느라고 숙부님 산소를 심하게 뭉개 놓았더랬다. 굴삭기는 동원하지 않고 인력으로 복원시키고 울타리를 보완할 구상을 해 놓았다.
고향 집에 닿으니 두 조카가 먼저 와 연장을 챙기고 있었다. 경운기와 승용차에 벌초 도구와 벌초 후 잔을 올린 간소란 제수를 챙겨 산소로 이동했다. 경운기와 차량은 마을을 돌아 대봉 감나무가 자라는 산언덕으로 올라갔다. 벌초는 두 구역으로 나뉘었는데 조부와 부모님 산소와 고조 증조에 이은 숙부 산소다. 나는 조카들과 조부와 부모님 산소를 맡고 두 형님은 숙부 산소로 갔다.
두 분 형님은 아랫녘 산소에서 멧돼지 퇴치 울타리를 설치하고 나는 조카들을 데리고 조부와 부모님 산소 벌초 임무를 수행했다. 내가 앞장서서 가면서 낫으로 산소 가는 길을 덮쳐 자란 나뭇가지를 자르고 뒤이어 큰조카는 예초기로 풀을 깎으면서 올라갔다. 산소 양지 켠 조생종 밤은 알밤이 되어 떨어져도 밤새 멧돼지가 시식해 밤톨이 남아 있을 리 없고 밤송이와 껍데기만 보였다.
나는 낫으로 봉분 둘레와 축대 주변 예초기가 닿을 수 없는 자리의 풀을 잘랐다. 큰 조카는 예초기를 짊어지고 작은 조카들은 톱으로 산소 주변을 침범하는 나무를 지르거나 갈퀴로 잘라둔 풀을 긁어 치웠다. 그새 울산에 사는 작은형님과 대구에 사는 동갑내기 사촌 형님이 조카를 대동해 올라왔다. 형님 두 분은 숙부 산소 울타리를 치러 가고 나는 조카들과 벌초 작업을 계속했다.
벌초가 마무리될 즈음 나는 산소 주변 멧돼지 시식 이후 떨어진 밤을 주웠더니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청년에서 장년으로 접어든 조카들은 체력 좋아 벌초는 어려움이 없어 내가 수월했다. 풀이 무성했던 봉분과 주변 일대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상석에 잔을 쳐 절을 하면서 자손이 다녀감을 아뢰었다. 아래쪽 고조 증조와 숙부님 산소로 내려가니 형님들은 울타리를 두르고 있었다.
숙부님 산소에도 멧돼지가 접근하면 자동 감지되어 경보음이 울리는 장치를 해두었는데도 무용지물이라 이번에는 아예 철망을 둘러쳤다. 큰형님이 멧돼지가 허물어 놓은 봉분의 흙은 먼저 채워 놓고 벌초는 해 두어 울타리만 두르면 되었다. 조카들과 힘을 합쳐 산소 주변을 에워싼 울타리 조성을 마무리 짓고 상석에 잔을 올려 추석이 다가옴을 아뢰고 연장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형수님 두 분은 아우네 집으로 가져갈 몇 가지 푸성귀를 챙겨 놓고 대가족의 점심상 차림에 분주했다. 마당에 야외용 돗자리를 펴고 삶은 돼지고기 수육을 먼저 들고 이어 나온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내년부터는 벌초 후 읍내 식당을 찾아 점심을 먹고 식대는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계산하기로 했다. 귀로에 금을 치른 쌀과 고춧가루 말도고 고향 흙내음이 물씬한 푸성귀를 안고 왔다. 23.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