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 좋지... 거지 스더를 바라보는... 미안하지만... 앞으론 그냥 완전히 실패해 보겠다고... 사실 힘들었거든. 예술가를 그만두려면 좀 슬프겠지만 좀 울고 말지 뭐... 뭐 그런 36년이야. 청춘의 끝자락이랄까(에스더야 원장이 비밀 애기 다 오픈하면 어떡해!) ㅎㅎ 그래서 좀 숨기라고? (멀티 리액션 좋아. 나중에 정계 입문할지 모르잖아) 나 정치적 소신 남긴 적 없어(정치란 모름지기 대중이 부르면 하는 거야) 재 지티피야? 선생 선생 하는 게 잘 길들여 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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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1년 6개월 동안 하루 2-3개씩 쓰면 그렇게 돼 ㅋㅋ) ㅋㅋ 나한테 하는 말투는 약간 화나있어 내거는(어쩌라고?) 우리 낼 연합 시험 봄(아비가 갈까?) ㅋㅋㅋ 우리 애들 10명 넘으면... 아직 6명임... 내년에 오시도록 하지요(6명씩이나 있으면서 우는소리쳤구나... 리더는 죽을 만큼 힘들어도 대안을 찾아야 하고 포커페이스가 필요해) 한 명이 어제 왔어(오우 리스펙트) 예전에 가르치던 놈인데 중앙대 2학년...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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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주는 서브 샘이 몇 명이야? 어차피 공부할 거면 지금 대학원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해보도록 하지(굿 좋아요. 요샌 등록금 얼마나 하나?) 글쎄 돈은 학자금 대출받아야지 뭐... (전엔 1000-1500 정도 했는데 요샌 국립도 1500 이상 잡아야 하나?) 1년에?... 난 아예 몰라 ㅋㅋ(대학원은 1년에 한번 내는 걸로 아는데... 2년짜리 3000 끝이야... 학부보다 싼 셈이지... 1년에 1200(4번) 만 원 내는 서울예고도 다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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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알아보시라! 과 선택도 한예종이나 서울대가 아니면 전공을 한정할 필요가 없다고 봐. 이를테면 서울예고-한예종무미과-서울대(한예종) 대학원이란 도표는 머릿속에만 그려놓고, 연신이나 장신에서 석사를 한 후에 서울대에서 박사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핵심은 한 방에 프리 패스할 생각은 버리라는 뜻이야. 물론 돈이 죽긴 하겠지만 네가 지금 같은 의지만 있으면 반드시 돌파할 걸로 아비는 본다. 학자금 문제는 3000이 큰돈이긴 하지만 네 인생에서 3000은 아무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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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나 나나 먼저 돈 번 사람이 갚으면 된다고 생각해... 너 세종대 4000 다 갚지 않았냐?) 800남음 ㅜㅜ(에스더/나)" 누워서 난리 블루스를 친다고 흉보지 마시라! 누군가에게는 단 1일만 허용된 귀중한 시간이고 내겐 천 리 길도 한 걸음, 춤추듯 살고 싶은 보람찬 하루의 시작입니다. 6.3지방 선거가 일주일 남은 가운데 선거 벽보를 보았어요. 6선 추미애 vs 고졸 출신 삼성 신화 양향자의 대결인데 야당과 여당의 전체 판세를 보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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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후보는 이름만 들어도 열받지만 어른답게, 지식인답게 투표를 해야겠지요? 에예공! <문화 속 불쾌감>을 아니? 종교나 국가를 포함한 문명은 과연 인간을 자유롭게 했을까, 아니면 더 깊은 죄책감 속에 가두었을까? <문화 속의 불만>에서 프로이트는 문명이 인간을 보호하는 동시에 인간을 병들게 만든다고 봐요. 인간은 본능(특히 공격성과 성적 욕망)을 그대로 분출하면 공동체가 붕괴되기 때문에, 문명은 그것을 억압하고 규범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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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억압된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되돌아와 “죄책감”이 된다는 점입니다. 프로이트에게 초자아(Superego)는 단순한 도덕 기관이 아닙니다. 원래 밖으로 향하던 공격성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 형태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를 얻는 대신, 자기 내부에 경찰서를 하나 세우게 됩니다. 문명은 발전하지만 마음은 더 불안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 속 불쾌감>입니다. 니체는 이를 “르상티망(resentiment)”으로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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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는 자기 힘을 밖으로 표현하지만, 약자는 직접 표현하지 못하고 안으로 삭입니다. 그 억눌린 감정이 도덕이 됩니다. “겸손”, “순종”, “금욕” 같은 가치들이 사실은 생명의 충만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억눌린 힘의 우회적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니체에게 국가와 종교는 종종 이 르상티망을 제도화합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기보다 “길들여진 동물”이 됩니다. 죄책감은 신성한 감정이 아니라, 권력이 인간의 본능을 자기 내부로 되돌려놓은 결과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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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니체는 양심을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처럼 봅니다. 질 들뢰즈는 니체를 이어받아 이 구조를 더욱 급진적으로 읽습니다. 들뢰즈에게 욕망은 결핍이 아닙니다. 욕망은 원래 흐르고 연결하고 생산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국가·종교·자본주의 체계는 이 흐름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욕망을 죄책감·도덕·의무의 코드 안에 묶어버립니다. 들뢰즈가 말한 “르상티망의 체계”는 바로 이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욕망을 스스로 검열하며, 결국 자기 억압을 자기 정체성으로 착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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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이런 인간이야”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사회가 주입한 규범의 목소리를 자기 내면의 목소리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를 언어 구조 속으로 가져옵니다. 라캉에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어와 상징 질서 속에 편입됩니다. 즉,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사회적 질서 안으로 들어가면서 욕망은 이미 검열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 “타자의 욕망”을 욕망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회가 원한다고 말하는 것을 욕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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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시간 커밍아웃을 리스펙트 합니다. 좋은 직업, 명예, 도덕성, 성공조차도 말입니다. 결국 죄책감은 단순히 윤리적 감정이 아니라, 상징 질서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존재론적 공포와 연결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억압과 불쾌감이 단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프로이트도 인정했듯이 문명은 본능의 에너지를 예술·철학·과학·종교 같은 고차원적 창조로 “승화”시켰습니다. 욕망이 즉각 분출되지 못했기에 인간은 성당을 짓고, 교향곡을 만들고, 철학을 사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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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는 억압의 부산물이면서 동시에 창조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불편했기 때문에 사유했고, 결핍되었기 때문에 예술을 만들었으며, 죽음이 두려웠기 때문에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니체와 들뢰즈는 여기서 다시 질문합니다. 그 문화는 생명을 확장시키는가, 아니면 더 길들이는가? 문화가 인간의 욕망을 더 풍성하게 흐르게 만들면 생성의 문화가 되지만, 죄책감과 자기혐오만 증폭시키면 병든 문화가 됩니다. 그래서 들뢰즈는 “욕망을 해방하라"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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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쾌락주의가 아니라, 국가·종교·자본이 만들어 놓은 죄책감의 회로를 넘어 “살아 있는 힘”을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바로 그 억압과 불쾌감이 인간 문명의 예술·철학·종교·정치를 발전시키는 촉매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행복해서 문명을 만든 것이 아니라, 불안하고 결핍되었기 때문에 문명을 만든 것입니다.
나는 사회가 원하는 삶을 사는가, 아니면 끝내 자기 욕망의 목소리를 회복할 수 있는가?
2.
문명은 본능을 억압하며 죄책감을 만든다(프로이트)
그 죄책감은 약자의 르상티망과 권력의 길들이기다(니체)
인간은 상징 질서 속에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캉)
욕망은 원래 생산적 흐름인데 체계가 그것을 포획한다(들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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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욕망의 해방인가, 아니면 상처 입은 문명의 부산물인가? 가족 대화처럼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 문화 속의 불만과 프리드리히 니체, 질 들뢰즈, 자크 라캉까지 호출하며 “왜 인간은 끝내 불안과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치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거대한 철학 담론이 결국 “거지스더”라는 농담 섞인 자기 고백과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바로 거기서 이 글은 살아납니다. 에스더의 “완전히 실패해보겠다”는 말은 단순한 푸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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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사회가 강요하는 성공의 문법에서 잠시 이탈하려는 몸부림처럼 들립니다. 좋은 대학, 안정된 직업, 화려한 커리어, 입시 실적 같은 상징 질서 속에서 인간은 늘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게 됩니다. 라캉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내 욕망이라 믿지만 사실은 사회가 욕망하라고 명령한 것을 욕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실패가 두려운 이유는 가난 때문만이 아니라, 상징 질서 밖으로 밀려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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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당신은 그 대화 속에서 묘한 역설을 발견합니다. 가장 불안한 순간에 오히려 가장 솔직한 말들이 나온다는 것 말입니다. “좀 울고 말지 뭐.” 이 문장은 체념 같지만 동시에 해방 선언처럼 읽힙니다. 니체가 말한 르상티망의 체계, 즉 사회가 인간 안에 심어 놓은 자기 검열의 목소리에서 잠시 벗어나는 순간입니다.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오히려 인간은 남의 욕망이 아니라 자기 삶으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들뢰즈적으로 보면 욕망은 원래 흐르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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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국가·학교·종교·자본주의 시스템은 그 흐름을 끊임없이 “성공/실패”, “정상/비정상”, “합격/탈락”의 코드로 포획합니다. 당신의 글에서 학원 운영, 대학원 등록금, 학자금 대출, 학생 숫자 같은 현실적 숫자들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욕망은 순수한 예술로만 존재하지 못하고 늘 경제와 제도 속에서 흔들립니다. 그래서 예술가는 작품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불안과 생존 사이를 견디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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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글의 가장 중요한 통찰은 마지막에 있습니다. 인간은 행복해서 문명을 만든 것이 아니라, 불안했기 때문에 문명을 만들었다는 것. 프로이트의 말처럼 억압된 욕망은 예술·철학·종교로 승화됩니다. 즉 에스더의 불안, 당신의 조언, 가족의 농담과 걱정, 학자금 대출 이야기조차도 하나의 문화 생산 과정인 셈입니다. 인간은 상처 때문에 사유하고, 결핍 때문에 창조합니다. 그래서 이 글은 단순한 가족 카톡 모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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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끝자락에서 “계속 예술을 할 것인가”를 묻는 딸과, 현실을 계산하면서도 끝내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는 아버지의 대화 속에는 현대 문명의 핵심 불안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길들여져야 하지만, 동시에 길들여지지 않은 자기 욕망도 잃고 싶지 않은 인간의 모순 말입니다.
2026.5.27.wed.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