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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내용은 덜 떨어진 책략理論이다。
낚시 미끼처럼 일부러 작은 흠결(責 잡힐 與件을 조성)을 만들어서 如他가 나의 過誤를 지적케 해서(즉 남이 나를 伐하게 한다) 화제거리를 만든 다음 모든 耳目이 내게 集中케 하여(이슈화) 自己를(자기의 實을 알리는 수단이나 자기의 立長이나 主長을 펴는 方策) 돋보이려는 方法(인정받는 方法)으로 利用하는 것을 高度의 謀策 古肉之計와 같은 術策이라 할 것이다.이것을 다분히 직설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直線的으로 한다면야 그 술책을 모든이가 다 알아차리니 그렇게 특별난 모책이라 할 것이 없다.그러므로 특별히 돌출나게(표시나게) 하지않고 우획적인 방법을 채택해서 하게 됨인 것이니 흡사 行人이 그 길을 가는데 길가에 들꽃이 형형색색으로 핀 것처럼 해갖곤 그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듯이 한다면야 눈길을 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처지를 당도케 함인 것이니 이러하면 行人의 마음을 포로로 하는거와 같이 이런 방식을 채택하여 펴는 것이다。以上의 方式은 非常한 술책이라 할 것까진 없고 보통 사람의 머리라도 얼마든지 획책하고 또 待天命의 運이 같이 한다면 諸成事는 따논 果일이나 진배없다 할 것이다. 누구던 탐스런 저ㅡ 땅 (갖고 싶은 것)을 侵略 집어 먹을래면 이러한 술책을 그리는 것도 한 방편이 된다 할 것이다.
◎ 宇宙는 아무런 相이 아닌 속에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單面化된 立體的 影象을 側面에서 볼 때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단면이 쌓인 누적상을 入力된 기억장치의 누적이라 할 것이다.그것은 어떠한 공간적 시간적 질량이나 거리나 부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다시 말하자면 時空間을 기억장치에 入力된 情報라 한다면 그 情報시스템(機械)은 어떠한 樣相(아무런 相이 아님)이 아니라는 것이다。그것을 釋類는 自體性相이라 하고 西氏는 主體性 相이라 할지 모르나 이것이 또한 精神相일 수 있겠지만 어떠한 見解를 담는 그릇(器)을 持稱하는 相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相이 아니라는 것이다.아무런 相이 아닌데로부터 相은 生成되어 돌아들어 갔다가 되말려 나오듯이 하여 現相함인 것이니 그것이 곧 宇宙인 것이다(※ 아무런 相이 아니라는 것은 없다。그래도 그것은 알 수 없는 그릇에 해당하게 됨일 것이다)。
이제(今)의 하늘을 말하는 것은 西氏를 가르키는 의미의 比重이 크게 차지하게 되었고 大達者를 말하는 것은 망상에 허우적거리는 고뇌자를 가르키는 것이 되었다。보는 이의 心相에도 달렸다 하겠지만 相이 그렇게 생겼으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 아닌가? 겉상은 헛상이라 헛상만 갖고 판단할게 아니라 하지만 그러면 어떻게 뭘 갖고 속상을 알아 볼 것인가?
大達한이라 해서 자세히 보니 많은 터닦음으로 평온함을 지어 安施한다는게 거짓상을 짓는 것 같고 그눈(目)들을 살피니 뭣이든 제 성에 안차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귀신들이 잔뜩 들어보이고 관찰대상이나 상대해 드는 이를 야시보는 눈이요. 누굴 시험코자 하는 심상의 눈이요、그 부담이나 책임을 어디엔가 전가시키고 회피코자 하는 심상의 눈이요. 이런가하면 힘 없어 보이는 것엔 군림하거나 폭력적 심사로 억누르고 감당치 못할것엔 움추리는 비굴한 심상의 비춤이라 이러니 어찌 大達한 자라 할 것인가? 苦行의 늪에서 그 魔에 시달림을 새기지 못해 헐떡이는 심상을 안그런체 태연자약하게 하여 보이는 거짓상을 짓는 자이지 그래서 보는이로 하여금 심히 거북스럽고 안스럽게 여기게 하여 좌불안석케 하고 그 처지 입장을 빨리 모면했음 하게 하고 어떻게 대처할바를 모르게 함인 것이다。낫붉히고 失態함을 감싸주지 않고 발각시켜 여럿의 눈이 뭇매를 가하듯이 하면 한편으론 서글프고 한편으론 원망이 가득할 것 아닌가? 무슨 철판 깔았다고 의연하고 태연자약할 것인가? 일이 벌어지게 하고선 무슨 大達한 것을 펴보인다 할 것인가?
◎ 所謂 釋類가 말하는 마하반야 바라밀 이란 뭔가? 이것이 天竺語라 하곤 大覺해 自性을 봤다는 어느先達者가 그럴듯하게 풀이 주어섬겼는데 필자가 남이 한 걸 보고 비평하는 상대성 논리에 근거하여 한 말씀 보태본다면 이것은 우리말로 막ㅡ|해보라는 뜻이다。막 하다 보면 염원行에 대한 成果과 끈을 갖고 당기는 것처럼 이끌려 온다는 것이다。필자의 주어섬김을 엉터리(돌파리) 의사 진료해 사람 잡는다고만 할게 아니라 다음 논을 잘 들어보라°(마하)란? 우리말 어휘로 꺼릴 것 없다는 뜻의 (막-)이란 어휘와 비슷하게 나오니 즉 주저할 것 없다는 뜻이다。주저할 것 꺼릴 것 없다는 것은 無方 無碍관점이란 뜻이요,나아가 差等的 對備的 算術的 度量的 등으로 하는 데가 아닌 無相 관점이란 뜻이다。無相관점이 또한
하나의 見解라면 相관점이니 그것을 肯否할 수도 없을 수도 하는 次元이나 階梯에 到達하게 된다 할 것이다
(반야)란 뭣인가? 우리말로 평탄한 땅과 같은 자리(座)라 할 수 있을 것이니 즉 반석같은 평평한 자리란 뜻이니 諸行이 勞脚을 休息할 수 있다는 뜻이다。이로부터 斜側에 이르는데 까지의 秀伎才慧가 일어나 쌓이게 된다는 뜻이요°(바라밀)이란 뭔가? 우리말 뜻으로 벌어졌다는 어휘와 가까우니 한마디로 말해서 탁- 터졌다는 뜻°확ㅡ|훤하게 트였다는 뜻°막고 있는 망상번뇌 일체장애의 뚝이 툭ㅡ 터져서 래왕이 자유자재롭게 되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할 것이다.그렇게 딱 벌어지듯이 생겨서 억만무량가지를
收容해 갖곤 원활하게 유통시킨다는 뜻이다. 막
未開(몽매)해 소견이 막혔던 자라도 궁리소견이 넓어져 탁트이게 된다는 뜻이다.이것이(남이란 관점을 버리라 하나) (남이란 관점을 버리란 뜻은 괴뢰역할 하라는 뜻으로도 들린다。그렇게 하다보면 남이란 客體性이 자아主體性으로 되어진다는 뜻이니 이것은 참이란게 있어 참 자아의 主體性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남이란 客體性이 둔갑한 假主體性에게 제압 당한 것이니 괴뢰노롯 한다 할 수 밖에 더 있겠는가?) 남이 일궈논 것을 比評관찰하는 位置에서는 相對性 관찰관점이라는 것이니 이것은 연중 쉬운 것이다。처음이 없다하지만 그래도 처음에 그 韻字를 떼는자가 어려운 것(發想 發見 發明 開發)이며 길잡이 노릇하는 자가 어려운 것이니 보고 어떻다고 헐뜯고 쓰다듬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오히려 그 뒷 상대 관찰점만 높이 평가한다 하니 癡愚한 무리들의 개수작과 같은 논리로다 처음에 문자를 떼는 이가「사과는 맛있다」한다면 그다음 사람들은 그 운자를 뗀 것을 보고 諸角度로 가늠하게 되는 것이니 혹이「입이 있음으로 맛있는 걸 안다 한다면 이것이 次元이 높은듯해도 내 말씀은 별볼일 없다는 뜻이다。왜냐? 남에 뒷북을 친 결과를 낳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이런 것을 大達한 것이라 해서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그(운운하는) 평가 기준을 어디에로부터 (혹 空인가? 아님
對等한 立長이 된다 하는 眞 自我本性인가? 이렇게됨 내 머리에서 떼어 놀래야 떨어질 수 없는 떠나질 않는 창조작용 개념인가?) 일으켜 설정한 것인지 의심스럽다。아니할 수 없다 할 것이니 남이 만든 떡을 훔쳐먹고 입 닦고 아 ㅡ배부르다 하는 몰염치한 자라 할 것이다.
성인이라 추앙받는 이는 성인이 아니요、남이 만든 떡을 훔쳐먹은 자와 같음이요、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또는 상대성 있는 것이 어떤 用心인지 그 반응작용이 어떻게 나올런지 몰라) 그ㅡ전전긍긍하는 가운데 어렵게 운자를 뗀자는 글무지렁이라도 以世上을 열은 創造主와 같고 비로자나 佛과 같다할 것이다。그렇다고 未開 몽매 치우 우둔한걸 美化하려는 관점은 아니고 覺을 깨트리는 進化의 수레를 탄 자가 그 처음이랍시고 어렵게 열은 자를 격멸히 여길까 노파심에서 한 말씀해 보는 것이다。관점이나 처지 입장의 差異이지 차단경계막이나 門을 設定해 놓고 판별지어 우월 높낮이 판단·평가를 할게 아닌 것이다。所謂 어느 醉醒者란 자가 취성자가 아니요 남에 떡을 훔친 자로다 그걸보고 비평하는 필자 또한 시시비비하고자 하는 시시콜콜한 下修業의 相對관점이니 남의 떡을 훔치고자 하는 무리에 섞였음을 부인할 없다할 것이다.
諸樣相에 기대지(依持)않고 自本性의 모습을 보이는 것(現著)을 釋氏는… 不住而生心이라 한다고 한다。이는 곧 西氏의 창조적 개념(自我가 自請創造性 主體=창조主로서의 現身을 말함이 아닌가?)이 아닌가? 立長이 對等한 空이라 하곤 그 된 개념은 自性이라고 어떤 大達했다 하는 譯解者는 가르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담 自性이란 뜻인가? 上下귀천 및 主客 등의 兩分으로 나누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多分
히 自性이란 主人意識 主人의 立長(位置)에 섬을 말하는 것 아닌가?…
할아버지、아버지、아들, 손자 그것은 옷만 갈아입는 것。낡은 옷은 벗어재키고 제 몸에 맞는 새 옷을 갈아입는 방식이 그렇다함인가? 많은 子孫과 門人을 두는 것은 諸樣相의 옷을 입는 것과 같은 것인가?
뒷바튼을 잡을 자가 없는 것은 諸樣象의 옷을 고르게 입어 봤으니 이제 그만 입을 게 더 없어 다 벗어치웠다 함인가? 念願은 잠자고 行도 쉬니 그것이 곧 현상태 이대로의 모습인가? 諸相이 邪見에 의함이以 邪見에 의한 法相(眞理相)이라 하는 것(영원히 불변할 것 같은 진리상이라 하는 것)에 따라 自然히 도태되고 비가 오면 이끼 깨듯 자연히 여건이 조성되어 생겨있는 것인가? 그 自然이란 것은 불생불멸 不增不減 쪽의 바다와 같다는 뜻인가? 망상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끈과 같아 그 끝을 모른다 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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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通이란 것을 필자는 達치(달하지) 못했으니 좀 헐뜯어 보자.도통이 뭔가? 도통이 다른 게 아니라 어떤 관찰대상의 어린 (疑問苦) 靈覺이나 순식간에 제정신에 남의 귀신이 집하여 들어와 제집을 삼고 대상체나 남을 대변케 하는 것이 도통인 것이다。그 남이 저 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예전에 내가 볼일이 있어 읍내 장엘 갔었는데 친정어머니 귀신이 들렸다 하는 女人을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치유하고자하는 곳으로 데리고 갈려고 하는 것을 봤는데 그 女人의 남편이 아낙이 미쳤다고 절로 데려가서 어떻게 고쳐보고자 한다고 했다。그 여인 실성해서 자기 남편더러 하는 말이 장모가 사위에게 하는 말투로 아무게 서방 나는 절에 안 갈란다.’ 어쩌구 저쩌구 푸념을 늘어놓는 걸 들었다.
이처럼 정신이 어떤 연관있는 것에 제압당해 (이것은 헛점。고뇌와 같은 머리로 들어갈 수 있는 여건의을 조성해 왔기 때문에 그렇게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연관있는 것이 제집하고선 저를 대변케 하는 것이 이(此)의 道通이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이것을 恨많고 쓰거운 애절한 삶을 산 恨어머니(만풍상이 주름얼룩진)의 濁한 靈覺(필자의 억측일뿐 혹 淸한 영각이라서 많은 이를 救度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그건 알 수 없다)이 뒤집어 씌워서 미쳤거나 실성한 것으로 몰아재켜서 그렇치 그것을 미쳤거나 실성했다고만 볼 수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왜냐하면 어떤 理想的인 것에 大達한 淸靈覺이 실려 저를 代辯케 하는 者로 삼는다면 이는 그의 용한소리(깨친 말씀=사람들 정신을 깨트리게 하거나 즉 남을 정신적으로 깨우치게 하거나 과거의 行跡을 알아맞춤과 未來의 行을 짐작 점치는 거와 여러가지 物事理的 算術的쪽의 총명함을 내보이는 것 머리에 들어간 지식마다 靈人體요 醒覺佛法報體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을 신통이나 도통했다 하지 미쳤거나 실성했다 하지 않기 때문이다。내가 말하고자 하는 要旨는 남이 일궈논 어떠한 理想的인 思想에 세뇌되듯 매료되어 그를 대변케 되는 것도 이와같은 맥락에서 관찰해 볼수 있다는 뜻이다。淸凉한 마음과 그 바탕에 의한 생각이 들게 하는( 생각을 내게 하는) 이제까지 맛보지 못해 특이하게 다가오는 構成으로된 이상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行)形態에 물들여짐(理想的 理論의 思想的釗腦)은 어떤 알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그 쇠뇌당하는 사람의 정신을 충격같은 것을 줘 정신관념을 (확 트이듯 훤하게) 달리 바꿔놓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그렇게해서 그 理想이 자리잡고 제 몸행세를 하게 하는지도 알 수 없다。그렇치 않은 다음에야 어떻게 그 理想과 같은 것을 創作해 낸 이의 과거 행적을 알 것이며 그 시대에서 볼적에 미래에 해당하는 현실의 되어 돌아감을 예지해 말할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이다。그 時代의 배경상을 현실에서 어떤 事物을 관찰해 보듯 그렇게 훤하게 알며 즉 현실적으로
그 몸과 정신이 諸감각으로 겪어볼 기회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통 世人을 알고 있는데도 안다는 것은 정신감관、능력이 어떤 특이한 바를 이뤘음을 뜻함이 아닌가? 그러니 과거나 미래를 덮어씌우는 귀신이 씌웠다 할 수 밖에 더 있겠는가? 이런 말씀이다。過거未래를 超越한 과거미래를 측정함 없는 귀신이란 대체 뭔가?空인가? 空은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인 것인가? 不退戰의 勇氣로 꽉차있어 一路(한 길이라 하는 것은 한 길이 아니다。無양상의 諸길이니 무양상의 제길이 곧 다양상의 제길일 것이니 버릴 것이나 부정할게 없는 것이다。따라서 제우주 有常相이라 할 것이다。이것이 또 누구 이론을 지금 표절하고 있는 것이다) 매진케 하는 뻥뚫린 통로에 궁함 없이 흐르는 바람처럼 그것이 용기(씩씩한 기상의 기운)인 줄조차 모르는 그런 것인가? 其実은 이대로 法輪(우주의 相態)이 굴러가는 象態를 말하는 것이다。깨우친 角度 視角을 어디에다 두느냐에 달렸지(釋類가 말하는 法報化三身은)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정신적으로 상상적으로나마 그릴 수 있는 史料資料를 읽지 않았는데도 또는 물질적 근거될 만한 것이 소멸된 상태에서 과거 행적을 안다는 것은 그 시공의 귀신같은게 씌우지 않고선 (내가 그와 융화되지 않는 비행접시化하여 들어가 보던가? 융화되는 立長으로 지어보이던가? 비처럼 내려서 꽃이 흡수케 하여 꽃속에 들어가 그 시공으로 지어보였다가 그 꽃이 운행따라 쇠락해지면 거기서 自然的 自本然에 모습으로 벗어나옴 아닌가?) 알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을 그 방면의 道通이라 할 것이다。혹은 귀로 들은 風月을 갖고 머리를 트이게 하여 이치 그럴듯하게 규합하여 말한다 하니 이또한 보지 않았으니 어떻게 과거미래 행적행로를 꼭 맞게 되짚거나 예지할 수 있겠는가 이말씀이다。정신이 확트여 과현래를 훤히 안다는 것은 그 안다하는 청량한 알음알이 영각귀신들에게 제압당해 괴뢰역할(옷 껍질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마음이 大醒한 것으로 착각고 있음일 것이다.그리곤 과현래나 自他나 하는 것등의 諸樣相없는 無相을 띄어서(어떤 空개념과 같은
위치에 들어서서) 그렇다고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떤 理相을 염두에 두고 正의 관점을 세워서 精進하는 것이다.그러다보면 그에 대한 成果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結果가 된다는 것인데 그렇게됨 제(自)관점의 아집(치우친 잡음)에 메인 것인데 어떻게 그것을 모두가 수긍하는 이상적인 개념의 果라 할 것인가? 이것이 석연치 않은 점이라는 것이니 아직 힘을 쓰지 못할시는 힘의 능력을 발휘치 못할시 내보여 펴지 못할시는) 그것은 正이 아니라는 것이다。힘은 곧 (힘이 실린=승재=一切 모든것) 諸것을 쌀수(抱)있는 理相空 立長이 된다는 것이다.空을 추종하는 正자세란 空의 도구일 뿐이며 正이란 것의 궁극의 목표는 對等하게 여기는(=니콜) 空이란 것이며 오직 힘에 의해서만이 正이 되며 空이 되며 空에 들 수 있다는 것이다。생각해보라- 한쪽 짐이 작은 저울은 시이소 기울듯 치우칠 것 아닌가? 이것은 방편을 들었을 뿐 그 기울어야만 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 또한 대등한 공의 관점이니 설령 이유를 규합치 못하는 次元이 특이해 잴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 묻는다… 어떤 마음 씀씀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유도시켜(유도 작전하는 유도)서 用心(容心으로 쓰는 진 알 수 없으나 어떤 마음을 먹고 있는지)을 파악한 다음 그것을 눌러잡는 논리를 전개하여 넘겨쳐서 제압하는 것을 깨닫는 가르침을 준다 한다.모두 이런 상대성 논리에 의거해 大達覺醒이라 하는 것을 전파하고자 하는 것이다。보고 비판하는 것은 별것 아니다.또 문제를 제시하고 어떤 和答을 일으키는 지를 보아 그의 마음가짐이 어느 위치에 각성해 있는가를 간파한다는 것 또한 대상논리이다. 그리곤 그 헛점을 비집고든다。설령 헛점이 없더라도 탈잡아 헛점을 만들어 파고들어 들배지기하듯 넘겨버린다。聖人이라 하는 者의 가르침이 모다 이런 식이니 그러니 그 취성자라 할게 하나도 없다 할 것이다。제 복안에 맞으면 화답이고, 즉 억측이 우연에 一致처럼 맞아떨어져서 묻는이의 마음과 같으면 화답이라 하고 達通의 根基가 있다하고 억측이 빗나가 거리가 멀면 경계門을 설정해 놓고 그 밖이라하니 (묻는이 제 뜻을 보지 못한다 하니) 취성이라할게 한건덕지도 없고 변덕이 죽끓듯 하는 첩실도 이보단 낫다 할 것이다。남이 캘수 없는 (설령 캐어 알아본다 하더라도 그렇치 않다고 부정할만한 처지 相으로 되어있다면) 빙자할꺼리(相件)가 있다면 그것은 그에게 언덕이 된다.그것이 그에게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었으니 언덕이란 뭣인가? 自立치 못하고 기대어 힘을 얻고자 하는 곳 아닌가? 그것이 그에겐 넓은 소견의 궁리의 길이 되어서 어떤 남이 요량치 못하는 힘을 얻는다. 도리혀 빙자꺼리가 힘이 되어 스스로의 등불을 삼았으니(삼게되니) 어두움에서 날라오는 세표혼들을 잡아족치는 덫 수단이 될 걸 왜 모를 것인가? 모두 그 덫에 걸려 그 덫을 모든이에게 취성이라 일컬게 하니 이제의 사기꾼 도적을 도리혀 살려줍샤 스승삼음과 뭣이 다를바 있으랴? 길은 魔가 능력을 편 곳에 있지 이제까지 덜 떨어진 眞正이라 여겼던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正이라 여겼던 것이 正이라 하면 왜 ㅡ 뒷켠으로 밀려나듯이 해서 힘을 못쓰는가? 이는 徒是 安逸함과 게으름과 如他를 야시 격멸히 봄과 독선 자존등 그 業에 방훼되는 것만 쌓여 있어서 邪로 둔갑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사기꾼 도적은 사기꾼 도적이 아니요 그 魔의 能力이 蓮이 진흙속에서 나오듯 한허울 塵汚를 벗고 제모습을 보인 것이니 어찌 스승될 수 있다 하지 아니하랴? 그러니 우리도 한 方法 배우기 위하여 그 用心을 보이라 함이니 앞허물로 보였던 것은 以 허물이 아니요 修業하는 모습(힘을 기르는 모습상)이었던 것이니。이제 염원이 많은 후달자를 위하여 世態가(세상되어 돌아감) 연장되어 일체의 걸림을 제거하였으니 그 쌓은 財寶를 써 보임이 어떠하랴? 스승으로 대접하게 모든 여건이 조성되었으니 그 동안 쌓았던 은금을 내어놔도 좋고 무기명 채권을 내어 놔도 좋고 일체의 능력배양해 쌓았
던 것을 모두 내어도 아무런 꺼릴게 없다 할 것이니 후달 후학자에게 긴요한 가르침을 주던가 보시한다는 立長에서 그 심신에 목말라 하는 자들을 위하여 씀이 어떨 것인가? 연장이 거꾸로 잡아들어 오는 칼날이 될때 그 좋은 아성이 무너질까 염려됨인 것이다. 저 부유한 삶이 되어 알쿵달쿵 즐겁게 사는 것을 만풍상에 시달려 피곤해 하는 덜커덩 거렁벵이 같은 자들이 갖은 못된 관점 시기할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그 벌어들이느라고 갖은 책략 노력하였으니…
정경유착하고 매국노와 협잡하고 땅투기 복부인에다 한탕주의에다 기회만 있으면 호시탐탐 또 기회가 없더라도 비집고 일궈낸 것이다.생각해보라。매국노와 그 일당과 그에 아부하는 무리들에게 칼자루를 쥐어주지 않았으면 戰後反民特委에 의해 난도질을 당하였을 것이니 오늘날과 같은 영화를 맛보았을 수 있었겠는가? 그 간휼하게 되는 것이 능력으로 인정되었으니 利用할 가치 있음으로 앞에 나가 이끌고가게世態가 짜여져 있었음인 것이다。그 누리는 것을 노력의 댓가로 정당하게 보상받아야 할 것이었기에 하나도 헐뜯을게 없는 世態가 되고 도리어 계속 스승되어 이끌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런 내 생각이다. 그런 관점으로 보니까 그렇치 그를 정당시하는 관점으로(소명資料 그 立長이 되어 처지를 변명케한다) 놓는다면 매국은 매국이 아니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둔갑된 理論이 나온다 할 것이다. 저들을 두둔해 원통한 마음이 들게 한다 할런지 모르겠지만 이제 그 창을 찔러 죽을 고기가 아니라 그 젖을 여럿에게 나눠주고자 하는 소로 되어 있는 것이다.
正이란 旗치가 갖은 行惡귀신이 들고 일어나 행악질함에 견디다 못해 쓰러져 짓밟혀 악을 편것이 되었고 예전에 사악한 것으로만 보였던 것이 그래서 밀려났던 것이 다시 힘을 얻어 다시 들어서서 그 거들먹거리는 꼬락서니하곤 더럽고 더럽지만 그것이 더러운게 아니라는데야 그 空運이 그 類에게 있는데야 어떻게 할 것인가? 正이란 것이 그 기치만 높이 들었었지 어떻게든 갖은 권모써서 승리해 보려고만 했지 그實力을 배양할 겨를이나 터전이 없었음이라 그러니 칼자루를 쥐어준들 옳게 썰어볼 것인가? 석봉 어머니는 숙달된 손놀림에 의해 바르게 썰었지만 석봉의 붓끝은 비틀거린 글씨가 되었음과 같을 것 아닌가? 형편이 이러한데도 야시보고 오시하고 시대가 요구한다는 미명아래 인기위주의 우선은 뒤집어 엎어 평정하는데만 급급하였으니 이 또한 世態行이 그렇게 되어서 그렇다함이 옳다하리라。즉 어느 시대고 그 시대가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그 시대란 것이 그 무슨 空탈 제양상 옷껍질인가? ㅡ과二는 청산치 못하고 三과 만 청산코자 했으니 ㅡ과가 힘을 길러 되살아날 수 밖에 더 있겠는가? (그 씨거웠던 시달림은 잊고 오히려 어떤 治下가 좋았다는 식의 향수에 젖듯 현실의 고달픔에서 벗어나려고 좋았던 점만 그리워서 두둔하니 아니 살아날 수 있겠는가? 또 유리한데로 색깔을 띄게하고 파당을 짓는 것이다) 그리곤 절박한 五의 발목을 잡고 늘어져 같이 살지 않으면 같이 죽자하니 미워도 스승대접 능력 있는 것으로 대접할 수 밖에 더 있겠는가? 실리를 따라 이합집산해서 흑백을 고르게 희석시켰으니 얼킨 실타래처럼 되어 이제 그 가릴 수 없게 되었다。이제 理想的 彼我가 없으니 내실리에 부합하면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벗이 되고 어제의 벗이 오늘의 원수가 되는 식이 되었으니 그 無名草나 野生花들이 上林의 庭園에 작약모란 되기는 영글렀고 요원한 것이니 틀이 이렇게 꽉잡혀 무진 세월을 갈 것 같으니 백옥공경은 한낮 꿈일 뿐이다. 날마다 恨水나 초근목피 같은 것을 먹다 한맺힌 이승을 버리게 할 뿐이니 내어놓지 않는데야 어떻게 그 풍요롭다 함을 共有할 것인가? 초췌한 모습에 처량히 비를 맞으며 깡술을 먹고 속훌쳐 길가에 죽치고 앉아 가물가물하는 저 모습을 누가 만들었는가? 쓰던 쪽박을 내동댕이 친 것만 같을 뿐이니 보는 이만 가엾어 하는 마음이 들뿐이로다。佛家의 用語를 자주 因用해서 뭣하지만 탐진치만 가득하다고만(가득 해 있어서 그렇게 되 있다고만) 할 것인가? 그 허물이 아닐수도 있는데 몇겁전의 업보라 할 것인가? 석씨가 방편을 들은 것을 그 後類들이 정말로 그런냥 잘도 인용해 주어다 섬긴다°(※ 어찌하여 글 돌아감이 변변치도 못하게시리 그 內域의미가 오래갈 수 없는 時事性을 띄게 되었을까? 감춰 갖고 있던 제못난 시기만하는 한맺힌 속심각의 일면이 내비쳤을 것이다.)
총명함(發明)과 우둔함(未開)에 따라 거리가 책정된다 하니 長短에 대한 善惡등 兩比多比 또 그를 顚倒하는 顚倒의 개념은 관찰자의 가늠하는 尺度 복안에 있을 따름이다。깨달음에 대한 거리의 算定은 時空間的 槪念의 거리(街의 長短)를 방편으로 이끌어 말하지만 시공간적 質量개념의 거리가 아니란 것이다. 空이란 意味를 念頭에 두지 않는 꺼리고 걸릴 것 없음에 도달한 無碍空的인 槪念에 緩急으로 到達함을 갖고 거리를 算定한다는 것이다。무애공적인 개념이란? 諸邪惡한 樣相을 떨쳐버린 것을 말한다하니 이것이 또한 正見없는데도 보는 이에따라 결정되는 것인데도 이렇게 말하니 他覺論象을 눌러잡는 신선하고 우월하게 보이는 實力에 의해 결정된다 할 것이다.
諸옷이 오래도록 입으면 낡듯이(또는 사람에 따라 입어 맞지 않는 옷이 있는데 그렇게 됨 다른 맞는 옷으로 갈아 입게 된다) 實力이란 것 또한 어떠한 樣相의 힘이니 그지어진 양상은 영원할 수 없는 것。곧 낡은 옷과 같게 되어 새 옷을 갈아입게 된다는 뜻이다。새 옷을 갈아 입는다는 것은 낡은 것은 힘에 눌려의 껍질로 퇴색되어 물러가게 된다는 뜻이다.이것을 극단적으로 魔의 양상이라 할 수 없으나 새로운 것이 기존의 것을 비집고 자리잡을려면 그 먼저것을 상대성이나 後孫論이 일(起)게 한 조상으로 높이 숭상함이 아니라 그 實勢란 것을(銳鋒) 꺽어놓치 않으면 반발 저항이 심하므로 대개는 기존의 것을 쇠락한 魔로 몰거나 아님 그 새로운 사상같은 게 아직 그 뿌리내림이 연약할시는 그 뿌리를 내릴 동안만이라도 대등한 동반자적 입장으로 상대하여 利用케 되는 것이다.
長短에 대한 諸比(선악 흑백 양비多比) 論的 顚倒(뒤바뀜) 개념은 앞서도 말했듯이 관찰자의 腹案에 있다 할 것이니 自我一身으로 여기는 空相論(여기서 空相이란? 어떤 對等한 立長이나 ㅡ合相을 뜻하는 것만 아니라 ※ 뜻하는 게 아니라 ※ 무한 깨달음의 경계 확 트인 상태를 말한다 할 것이다)에서 근거를 두어 살핀다 하니 우매한 이는 멀게만 느껴지게 생각이 짚히고 총명한 이는 쉽게 터득한 것으로 됨이니 時空的 諸質量展界的 遠近의 거리감을 제쳤다는 뜻이다. 이러한 論은 필자의 宇宙生成섭리 아무러크소니五十六現相說論이나 다를 바 없으니 後覺 後度(건넨다는 뜻) 者들이 先覺 先歸者들의 터득한 바를 재탕삼탕으로 울궈내는 것 같고 모든 達覺 脫破論이 이런식이라면 정신을 음식으로 여겨 파먹는 벌어지(虫)와 같음이라서 더 理想新世界의 次元을 궁구치 못함을 아쉬움을 금할길 없다 할 것이다。以上의 議論들이 釋엔 끼어들진 못하고 지레짐작해서 동경하듯 굴복하듯 그 노예가 되길 자청하는 줄 모르겠다.
지금 쇠뇌당해 괴뢰나 종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諸達者들이 음식을 만들어 西氏입에 피넣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뭔 뜻인가? 일궈낸 成果란 것이 所謂 날잡아 잡슈란 뜻이다.그렇게 되어 돌아가 이미지 상실 기치퇴색 덫에 걸린 들짐승처럼 되었다는 뜻이다。양상은 석씨의 用語와 그 옷을 입었지만 실상인 즉 서씨되어 간다는 뜻이다。(먹히어 가고 그 西氏 몸만 肥大케 한다는 뜻) 그러니 음식을 서씨입에 차려놨다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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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覺이 諸衆生이라 했다.모든 現相體는 생각으로부터 일어나 諸樣象을 띔으로 諸衆生이라는 것이다。生覺이 또한 覺醒(性)體이니 생각생각이 諸佛이라 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생각이 樣相이요、衆生이요、佛이라는 覺(覺點의 연결 面化 누적 立體 등의 感無感 無有 現相體가 곧 宇宙이다)이다。(생각을 낼 수 있는 곳은 정신상태다。宇宙는 生覺에 의해 일궈진 覺醒體이므로 以宇宙의 근본은 精神이란 것이다。精神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以 精神이 宇宙를 形成했다하니 말만 바뀌었지 창조적 槪念과 뭐가 다른 바 있으랴? 이런 뜻이다. 혹 정신을 自(제절로)性이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즉 모두는 창조적 개념으로 있다는 뜻이다。즉、西氏理論으로 있다는 뜻이다。宇宙는 精神의 집 따라서 各 個性體 모두가 (人間포함) 精神의 집으로써 정신의 그 편리한대로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편리한대로 지어져 있다는 것은 多群落象으로 緣起되어 있다는 뜻이다。((우주의 生成관점 시각을 갑자기생성된 관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니 (즉 우주는 순식간에 폭팔하듯 생겨있다。그렇게 됨°우주의 進化론이나 시공적 거리의 개념이 그 안에 있는 것이 되어 諸行相이 無常하여 諸相이 生消가 없는 것이 된다。그렇기 때문에 宇宙가 情報入力시스템이 되는 것이며 過現未를 초월하는 생각이 있게 되면 그 생각에 의한 제양상이 일(起)게 되어 현실이란 것과 융화되지 않는 모습은 別異한 것으로 나타나 보이고 융화되는 모습은 제상으로 지어져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이것을 緣起의 一片으로도 볼 수 있다 할 것이니 하필 이것저것 연연生生하여 일어나 있음만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라 할 것이다…) )알알이 覺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뭣인가? 이것이 정신을 파먹고 사는 벌어지의 모습인가? 아님 흐름이 엮어서 되는 것인가? 自性이 아무런 相이 없는 것으로부터라 하였는데 어디에다 발판을 두어 覺을 生成시킨단 말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覺은 生消치 않는 것이니 시공을 측정치 않는 무위유동속의 불생불멸의 상태를 근본으로 하고 있다 할 것이다。以覺이 諸양상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 諸宇宙이니 諸宇宙란 또한 無感無現相 속에
들은 것이니 흡사 저 허공이 구름을 안고 있어 보는이가 없으면 그 없는 것과 같은 것처럼 그 보는이가 저 허공과 同身으로 不生不滅이라는 性이라는 것이다。우리가 性字의 具成을 破字해서 살펴보기로 하자.이것이 邪相을 관찰하는 극한 邪見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은 또 正見있겠는가? 보는이 마음이나 실력에 의해 눌러 잡는데에 달렸지…) 저 앞서도 말했지만 三星(時空等 如何한 양상이나 견해를 形成할 수 있는집 지을 수 있는 源泉覺露 資材)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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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그릇 집이라 하기도 하고 流動치는 상태를 마음 이라 하고(유동치지 않으면 제양상을 지을 수 없다) 生字形을 또한 여러 의미로 파악할 수 있지만 眞僞正邪란 '이 空을 生成시켜 그 內面을 파헤쳐 보이고 있는 形인 것이며,이에다 그 內面의 座禪의 상태가 空 이것을 비집고 諸樣相의 界上에 진면목을 들어내 보이고 있는 形態로 짜여져 있다 할 것이다。(人土 이것의 合成이니 人의 形은 天地八陽經內用中에 人의 의미를 풀이한 理論文에 있고 土形해설은 왜 그런가五行論에 있다。)性字의 具成이 이러할진데 空 空속의 不生不滅 不增不減 不垢不淨 등의 방편론적(身土不二) 아닌 諸것이라 아니할 것인가? 이런 뜻이다.
◎ 諸宇宙가 緣起되어 있는 것은 제(自) 本性에 모습이 이렇다함을 저가(自) 감상하기 위함이요性體가 지어져 있는 것은 각 개성체가 宇宙軸의 立長(主觀者의 立長)되어 제(自) 모습이 또한 이렇다함을.감상하기 위함이요。諸衆生의 念願行을 들어주기 위함이니 주고 받으나 주고 받음이 아니요。原來가 그러해서 각기 제상태가 그렇다함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理由는 모습을 보고 감상하기 위함이다.한다면 宇宙의 軸은 自我本性 中心이니 이것이 내라하는 내세우는 我執相이라서 그렇다함만이 아니요 宇宙가 그렇게 짜여져 있기 때문에 그러함이니 내라하고 너라하는 其他 數多諸樣象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에 의해 分辨이 일기(起) 때문이다。마음생각이 양상을 일으켜 짓지 않으면 나누어 잴 것이 없는 것이다. 곧―이 모두가 나라면 나요 너라면 너이고 너나라면 너나이니 이런걸 갖고 한쪽 끝으로 치우쳐서 장단을 比較할게 없는 것이다.
生覺이 뭣인가? 곧 번뇌의 시작이다.생각지 않으면 번뇌는 없고 따라서 무엇이 있겠는가? 생각으로부터 만象이 일어나니 森羅가 번뇌의 現化身인 것이다。精神이 생각을 일으켜 化身의 집을 짓고 들어앉았으니 各价가 경계 차단막이 되어 各价性體를 이루고 있으니 내가 이러하니 너도 이러할 것이라는 넘겨 다 짚을 뿐 속들여다보듯 훤하게 서로를 알 수가 있겠는가? 對面共話하대 心隔千山이라고 무슨 꿍꿍이 수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그런데도 안다하니 귀신 씌웠다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남에 집을 제 집인냥 여겨 제집처럼 쓴다 하니 그전에 거기 뭐가 있었고 이쪽엔 뭐가 있었고 먼전번엔 내가 무슨일을 했고 내일은 내가 뭔 일을 할 것이다를 준비해 놓고 한 것을 내가 그렇게 알지? 「너가 지금 그렇치」로 둔갑해서 말하니 이것이 지금 他心通이라는 것이다。그러하니 귀신이 곡할노릇이라 할 수밖에 더 있겠는가? 이것이 상대방에게 말을 유도시켜 그 상대방인 남의 생각을 아는것과 조금 통하는 면이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一例로 너 생각한 數에다 이미 계산해 답을 갖고 있는 갖은 數와 수리法則을 列舉해서 혼란이 오게한 다음 數를 물어 생각한 수를 알아맞춰서 신기하게 느끼게 하는 것처럼과 같은 방식을 취택하는지 모르겠다。이래놓고 그 차단막친 저너머의 境界를 안다는 것이다。알지… 왜 ㅡ모를리가 있겠는가? 다 말해주는데 모르면 따라하는 앵무새만도 못하다 할 것 아닌가? 공상영화에 보니까 두뇌에다 같은 기능을 띈 반도체칩 같은 것을 두사람에게 이식시켜 놓으니까 한사람은 아무런 行動을 짓지 않는데도 저쪽 사람의 行動이 자기가 하는 짓인냥 영상화 되어 나오듯이 하는 것이 혹 남에 머리씀을 안다는 방식인가? 이것이 정상적인 사람에 대한 오감각의 받침이 같음으로 그로 대신한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선생님에게 여러 제자들이 같은 내용의 敎育을 一時에 받는거와 차이가 없어 머리에 入力된 內用들이 서로 연결된다 할 것이니 일 더하기 이란 물음에 저쪽의 삼이라 답함은 같은 敎材를 갖고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알고 대답하는 것이라 할 것이니 無現한 知識의 끈이 서로 연결되어 혹시 對相者등 他人의 다른 머리씀을 알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