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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하지 말고 가라
행 10:17-23a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3a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행 10:17-23 / [베드로와 고넬료의 대면] 베드로는 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하라고 하는 것인지 몰라서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그 집을 찾아내어 대문 밖에 서서 18) 여기가 시몬 베드로가 묵고 있는 집이냐고 물었다. 19) 아직 베드로가 방금 본 환상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너를 찾아왔다. 20) 내려가서 그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가라. 염려하지 말아라. 그들은 내가 보낸 사람들이다.' 21) 베드로가 내려가서 내가 당신들이 찾는 사람이오. 무슨 일로 오셨소?' 하고 물었다. 22) 그러자 그들은 로마군의 장교 고넬료는 선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며 유대인들에게서 존경받고 있다는 것과,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베드로를 청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지시하였다는 경위를 말하였다. 23) 베드로는 그들을 맞아들여 그날 밤을 거기서 묵게 한 뒤 다음날 그들과 함께 길을 떠났다.
베드로의 환상이 마쳐질 때에 맞춰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당도합니다. 성령은 베드로에게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믿음은 의심을 넘어 순종하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17-20) 베드로는 자신이 본 환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아해 하고 있었습니다(17). 이 말의 원어적 의미는 ‘매우 놀라다’, ‘당황하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위기 11장의 말씀과 환상 속의 주님의 말씀이 대치되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기에 그가 당황한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당황스러움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성령은 아주 분명하게 베드로에게 명령하며 순종할 것을 요청합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라는 것입니다(19-20). ‘의심하지 말고’의 원어는 ‘판단하지 말라’는 뜻의 ‘메덴 디아크리노메노스’입니다. 이것은 판단의 거리가 아니라, 순종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은 신앙은 맹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믿음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순종할 때 이해가 주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베드로가 이들을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다(21-23) 성령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기도의 자리에서 내려갑니다. 베드로를 찾는 이들을 통해 고넬료가 자신을 만나 말씀을 들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고넬료의 성품이 어떠하든 우선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로서는 꺼려지는 만남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들을 불러들여 시몬의 집에 유숙하게 합니다(23). 유대인의 전통에 의해 이방인을 부정하게 여기고 있던 베드로입니다. 환상을 통해 먹으라고 주어진 부정한 것조차 거절했던 베드로입니다. 이 일이 무슨 일인지 당황스러운 상황이지만 성령의 강한 음성에 그는 순종하기로 결단합니다. 이해를 넘어서 역사하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했던 베드로이기에 이번에도 순종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은 무엇입니까?
적용: 이성적으로 이해되고, 판단되지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상황에 성령님은 순종을 요청하시기도 합니다. 믿음은 이런 상황 속에서 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오늘 이해를 넘어 말씀에 순종해야 할 상황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언제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비록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식과 지식과 경험에 비춰 볼 때 맞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행하여야 할 일입니다.
호크마 주석
=====10:17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 '의심하더니'로 번역된 '디아포레오'(* )는 본래 출구가 없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태를 의미하며 공동번역은 이 단어를 '어리둥절하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베드로는 환상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못함이 분명하다. 마침 - 이 말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한 시각을 알 수 있는 단서로 베드로가 환상을 본 직후 도착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각이 베드로의 기도 시작 시간인 정오였는지(92절) 아니면 정오가 지난 어느 시간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10:18
우거하느냐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세니제타이'(* )는 '거주하다'는 의미와는 달리 손님으로서 잠시 유숙(留宿)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보아 베드로는 피장 시몬의 집에 오랫동안 머문 것이 아니라 손님의 자격으로 잠시 머무른 것 같다.
=====10:19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 - 이 말은 17절의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베드로는 자신이 보았던 환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깨닫고자 고민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환상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기도하고 있었던 것 같지는않다.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 비록 베드로는 환상 가운데 있지도 않았으며 기도하고 있지 않았으나 성령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이는 성령의 역사가 아무런 제한없이이루어짐을 보여준다. 여기서 누가는 그 음성이 설명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밝히면서 조금 전의 환상과 구분 시키고 있다. 이 같은 묘사는 초기 사도들의 활동이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를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숨은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 베드로를 찾는 이들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라면(17절)두 명이 아니라 두 명의 하인과 한 명의 종졸을 포함해서 모두 세 명이어야 하는데(7절) 여기서는 두 명이라고만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베자사본(D)에서는 숫자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한편 사본 * ,A, C, E에서는 '세 사람'이라고 언급하는데 본문은 바티칸 사본(B)을 따라 두 명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두 명이란 표현은 결코 잘못된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된 두 명은 고넬료의 직접적인 사명을 부여받은 두사람을 가리키며 그들을 호위한 종졸은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10:20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 내려가라는 성령의 지시는 베드로가 기도하기 위해 지붕 위에 올라간 후 아직 내려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한편 성령은 베드로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유없이 무조건 두말하지 말고 그들을 따라가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를 암시한다.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 고넬료로 하여금 하인을 베드로에게 보내도록 지시한이가 4절에서는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들로 묘사된 반면 여기서는 성령으로 언급되었다. 따라서 천사와 성령이 동일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 4절의 천사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로서 묘사되지만 본절의성령은 환상 중이 아니라 음성으로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된다. 따라서 결코 동일한 표현으로 볼 수 없다. 특히 본절에서 '내가'(* , 에고)가 강조됨으로써 그 음성의 주제가 하나님이심을 부각시키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성령'이란 표현이적절하다.
=====10:21
무슨 일로 왔느냐 - 베드로는 성령의 지시에 담긴 의미를 알고 싶은 마음에서 다른 말보다도 제일 먼저그들이 온 목적에 대해서 물었다. 이로 보아 아직도 베드로는 환상과 두사람의 방문이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10:22
의인이요 - 유대인들이 말하는 의인은 율법 준수의 기준에 따라 구분되었다(Lenski). 그런데고넬료는 유대교로 개종한 자도 아니고 더욱이 유대인들을 지배하는 로마의 군인이기에, 그에게 붙여진 의인이라는 말은 매우 파격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인이라는 표현을 유대인들이 고넬료에게 직접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두 하인이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가 비록 유대교로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회당 예배에 참석했다는 전제하에서(2절 주석 참조) 유대인들에 의해 고넬료의 경건한 삶이 인정되었을것이며, 그에 따라 그는 의인으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 베드로와 대면한 고넬료의 하인들은 먼저 자신들을보낸 주인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 소개의 내용 중 유대 온 족속들이 고넬료에게 하고 있는 칭찬을 언급한 것은 베드로가 유대인이므로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관심을 가질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고넬료의 인물됨에 대해서 2절에 언급되었으나 본절과 같은칭찬은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본 구절은 하인들이 베드로를 설득시키기 위해 특별히언급한 이야기로 이해된다.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 계속해서 집중적으로 강조되는 점은 이 모든 일들이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4절에서 언급되었던 '천사'(*, 앙겔로스) 앞에 '거룩한' 명령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지시하다'라는 말에 헬라어 '크레마티조'(* )의 제1부정과거 수동태 '에크레마티스데'(*)가 사용되어 고넬료가 받은 지시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명령이었음을 암시한다.따라서 이방인에 대한 선교는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임을 베드로로 하여금 깨우쳐 주고 있다.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레마타'(* )는 생동감있는 말씀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베드로의 입을 통해 나오는 성령에 감동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이 '말'은 베드로의 설교뿐 아니라 간증이나 예수 사건에 대한베드로의 증언 등을 포괄하고 있다.
=====10:23
베드로가 불러들여 - 방문객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후 그들을 집 안으로 영접한 베드로의 행위는 그 방문객들이 이방인이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즉 베드로가 그들의 말을 신뢰하였다는 뜻과 함께 이방인을 한형제로서 용납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시몬의 집으로 영접한 것은 아직 이방인과의접촉이 신학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 비추어 보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는 그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를 깨달았으므로 그렇게 행동한것 같다. 유숙하게 하니라 -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집으로 불러들이고 함께 잠을 자게 한다는 사실은 당시에 매우 반 유대교적 행위로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11:1-3). 그럼에도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환상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게되어 이제 무할례자인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베드로가그들을 유숙하게 한 것은 그들이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으므로 다시 가이사랴까지가기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무튼본절의 핵심은 이방인을 전적으로 용납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다. 욥바 두어 형제 - '두어'로 번역된 부정대명사 '티네스'(* )는 확정되지않고 또한 많지도 않은 수효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런데 11:12에서 여섯 명이 베드로와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갔다고 언급되어 있으므로 본절에서 언급된 형제는 세명이분명하다. 이 표현상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해결할 수 있다. 누가는 본절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11:12은 베드로의 고백의 입장에서 기록되었으므로 베드로의고백 부분에서는 정확한 숫자가 언급되어 그 고백의 사실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누가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므로 정확한 숫자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한편 욥바에서 세 사람이 베드로를 동행하게 된 이유에 대해 본문에서 명백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다음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1) 이방인에게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그 세사람이 목격하고 증인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함 (2) 아직도 고넬료가보낸 사람의 신분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베드로가 그들과 동행하게 되어혹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임.
< 설 교 >
전도를 주관하시는 성령
행 10:17~23 / 이수영 목사
행 10:1부터 11:18까지는 한 가지 사건을 전하는 하나의 긴 이야기입니다. 그 사건은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시작된 복음전도에 있어서 한 중요한 전기를 이루는 사건입니다. 우선 그 의미심장한 사건의 전말부터 살펴봅니다. 살기등등하여 예루살렘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던 사울을 하나님께서 열렬한 복음의 전도자로 바꾸어놓으심으로써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서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있을 때(행9:31)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습니다(행9:32). 룻다는 예루살렘과 욥바 사이에 있는 마을입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여덟 해째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워있던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 그를 낫게 해주고 일어나게 해주었습니다(행9:33-34). 그래서 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오게 되었습니다(행9:35). 그런데 룻다에서 멀지 않은 욥바에서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아주 많이 하던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룻다에 베드로가 와있다는 말을 듣고는 두 사람을 베드로에게 보내어 지체 말고 욥바로 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행9:36-38). 베드로는 욥바로 가서 이미 시체가 되어 다락에 누워있던 다비다를 일으켜 살려냈습니다(행9:39-41). 그래서 욥바에서도 많은 사람이 주를 믿게 되었습니다(행9:42). 베드로는 욥바에 여러 날을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물렀습니다(행9:43).
욥바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큰 항구도시였습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행정수도 텔아비브 근교의 외곽도시 쟈파(Jaffa)가 바로 성경의 욥바입니다. 그런데 그 욥바에서 북쪽으로 50km 정도 떨어진 곳에 가이사랴가 있었습니다. 이 가이사랴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던 빌립보 가이사랴와는 다른 도시입니다. 그 빌립보 가이사랴는 갈릴리 호수의 북쪽에 있는 도시이고 이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헤롯 대왕이 어릴 적 친구였다가 훗날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자기를 유대의 왕으로 세워준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공을 들여 세운 도시입니다. 거기에는 라 하는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고넬료라 하는 백부장이 있었습니다(행10:1). 백부장이란 백 명 정도의 부하를 거느린 장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백부장들은 아주 엄선된 로마군의 장교들이었고 로마제국의 안정된 군사력을 지탱하는 핵심요소였습니다. 가이사랴의 한 백부장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으로서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행10:2).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가이사랴에서 파견근무를 하는 동안 유대교를 알게 되었고 그 유대교의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경건생활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그가 기도하는 시간인 오후 세 시쯤에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오는 것을 밝히 보았고 “고넬료야!” 하고 부르는 음성을 들었습니다(행10:3). 고넬료는 그를 주목하여 보고 두려움 가운데 물었습니다: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행10:4-6). 이 말을 하고 천사가 떠나자 고넬료는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자기가 환상 중에 천사를 본 사실과 그에게서 들은 말을 다 일러주고는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가라고 보냈습니다(행10:8).
그 이튿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정오에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 있었습니다(행10:9). 기도를 마치고 시장해진 베드로는 점심을 먹기를 원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준비하고 있을 때 그는 황홀한 중에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행10:10). 그것은 하늘이 열리며 큰 보자기의 네 귀를 맨 것 같이 보이는 그릇 하나가 땅에 내려와 앉는 것이었습니다(행10:11).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행10:12). 그리고 소리가 들리는데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것이었습니다(행10:13). 베드로는 놀라 대답하기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했습니다(행10:14). 그 보자기 같은 그릇 안에는 깨끗한 것도 있었지만 깨끗하지 못한 것도 함께 들어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율법에 따라 먹어도 되는 것들과 먹지 말아야 할 것들이 섞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정결법에 따르면 깨끗하지 못한 것에 접촉하면 다 더러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 그릇 안에 들어있던 그 어떤 것도 먹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는 것이었습니다(행10:15).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은 곧 하늘로 올려져 갔습니다(행10:16).
베드로는 자기가 본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여 속으로 의아해 하고 있었습니다(본문 17절). 그런데 그때 마침 가이사랴로부터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머물고 있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사람을 부르며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합니까?” 하고 묻고 있었습니다(본문 18절). 베드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자기가 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는데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신 것입니다(본문 19-20절). 이에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묻기를 “내가 바로 당신들이 찾는 사람인데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했습니다(본문 21절). 그들이 대답하기를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는 분인데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씀을 들으려 합니다.” 했습니다(본문 22절). 베드로는 이미 “내가 보낸 사람들이니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는 성령의 말씀을 들었기에 그 사람들과 함께 갈 생각으로 일단 그들을 집으로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고는 이튿날 그들과 함께 가이사랴로 향했습니다(본문 23절).
베드로 일행이 가이사랴에 들어갔을 때 고넬료는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다가 최대의 존경심과 예의를 갖춰 정중히 영접했습니다(행10:24-25). 베드로는 안으로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앞에서 말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여러분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셔서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에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습니다. 무슨 일로 나를 부른 것입니까?”(행10:27-29) 그러자 고넬료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0-33) 이때 비로소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과 자기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찾아오게 된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그것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며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며, 성령께서 명하시면 언어, 종교, 국적, 민족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언하고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 그리고는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인한 화평의 복음과, 그가 예루살렘과 유대인의 모든 땅에서 행하신 일과, 십자가에서의 그의 죽음과 하나님께서 그를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신 일과, 그를 믿음으로 인해 얻는 죄의 용서의 은혜와, 그가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분이심과, 만백성에게 그를 전도하고 증언해야 할 사명을 힘주어 말했습니다(행10:36-43).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그의 말씀을 듣고 있던 모든 사람에게 임했습니다(행10:44).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은 이방인들도 성령을 부어 주심을 받고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행10:45-46). 이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푸는 것을 금하겠는가?” 하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명령했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했습니다(행10:47-48).
가이사랴에서 이방인들에게도 성령께서 임하셨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문은 곧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에게 전해졌습니다(행11:1).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간 베드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로부터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음식을 먹었다고 하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행11:2-3). 베드로는 그들에게 자기가 욥바 시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본 일로부터 시작해서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차례차례 설명했습니다(행11:4-16).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행11:17). 그러자 베드로를 비난하던 자들이 잠잠해졌고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했습니다(행11:18).
이 일은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시작된 복음전도에 있어서 한 중요한 전기를 이루는 사건입니다. 가이사랴에서의 성령강림은 예루살렘에서의 오순절 성령강림에 이은 제2의 성령강림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오순절 성령강림이 유대인의 성령강림사건이라면 이것은 이방인의 성령강림사건인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만 아니라 온 천하 사람들을 차별 없이 구원하시겠다는 뜻을 확실하게 밝히시려고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이방인들도 성령을 받고 믿음을 갖게 되며 구원을 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아니 이제 유대인과 이방이라는 차이와 구별조차 사라지게 되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더 이상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자기들만 깨끗하고 남들은 다 깨끗하지 못하다는 고정관념이 폐기되어야 할 것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민족, 언어, 국적, 종교,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깨끗하게 하신 이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임을 천명하신 것입니다. 보자기 모양의 그릇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가 하늘로 다시 올려져 간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늘나라 백성은 그렇게 남녀노소, 인종, 국적, 언어가 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성결케 하셔서 함께 살게 하시는 나라임을 가르치시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의 뜻이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에게 보이신 환상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로 하여금 낯선 이방인을 따라 이방인의 도시로 가서 이방인에게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울이라는 열렬한 새 전도자를 얻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말씀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된 그 자신도 스스로를 다른 사도들과 차별화하여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닌 베드로를 가이사랴 전도에 투입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도들의 수장이고 가장 권위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하심으로써 예루살렘 교회가 새로 생길 이방인교회와 새 신자들을 같은 형제자매들로 기꺼이 받아들이게 하고 모든 교회의 동질성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하게 하시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인이 유대교에 들어오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와 지켜야 할 법도라고 여겨지는 것이 할례와 음식물에 대한 엄격한 규례였습니다. 베드로의 가이사랴 방문이 그가 성령의 지시에 따라 행했고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 일이었음을 알지 못했던 예루살렘 교인들에게는 베드로가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른 엄청난 스캔들이었을 것입니다. 할레도 받지 않은 사람들 집에 들어가면 그들과 식사를 해야 하고 먹어서는 안 될 깨끗하지 못한 음식을 먹어야 할 것인데 이는 유대인의 기본적인 성결율례를 다 어기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환상 중에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을 잡아먹으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대뜸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던 베드로입니다. 그리고 낯선 이방인들이 찾아와 가이사랴로 가서 이방인 백부장을 만나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당연히 거부했을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셨기에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명령이었기에 그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의 집에 들어갔고 그들과 며칠을 함께 지내며 먹고 마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로 하여금 고정관념과 선입관을 다 벗어버리고 모든 민족 모든 백성을 향해 마음을 열고 발을 달리며 손을 뻗치는 전도에로 내보내시는 성령의 역사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게 하시고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시는 일을 친히 선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성령께서 직접 주관하시는 전도의 사역을 보는 것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이고 주님의 명령이며 성령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에 순응하여 전도에 더욱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 10:17-33 / 김영규 목사
오늘 말씀의 내용은 고넬료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넬료의 마음가짐, 혹은 주님을 영접하는 그의 신앙의 자세입니다. 고넬료는 어떤 마음으로 생전 처음 듣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까? 오늘날 세상에는 수많은 불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여러 번 들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듣는다고 다 영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준비된 사람만이 주님을 영접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고넬료의 신앙적 자세를 살펴보고 본받아야 합니다.
고넬료의 초청
오늘 말씀의 첫 번째 부분은 고넬료가 사도를 초청하는 장면입니다. 고넬료가 환상 중에 천사의 명령을 받은 것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고넬료는 명령대로 곧바로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를 초청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4-15, 17) 복음은 우선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의 사람들이 베드로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베드로는 아직도 자신이 본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하더니”(17) 밖에서 베드로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17-18) 그들은 이방인을 꺼리는 유대인의 전통을 알기 때문에 문 밖에 서서 주인을 찾았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환상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성령께서 베드로의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세)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19-20) 그래도 베드로는 그 사람들에게 자기를 찾아 온 이유를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21) 고넬료의 사람들이 찾아 온 이유를 설명합니다.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22) 이 말씀에 보면 고넬료는 하인들이나 시종들, 혹은 노예들에게까지 존경받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여 가이사랴로 갑니다.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23)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갈 때에 여섯 명의 성도들이 베드로를 수행하여 함께 갔습니다.(행11:12) 당시에는 사도들의 여행에 신자들이 수종들고 동행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습니다.(요삼6, 행15:3, 고전16:11)
고넬료의 영접
본문의 두 번째 장면은 고넬료가 베드로 사도를 영접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복음을 받는 고넬료의 두 가지 모범적인 자세가 나옵니다.
1. 고넬료는 모든 가족들을 모아 놓고 기다렸습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24) 아내와 자녀들은 물론, 친척과 친구들까지 불러 모았습니다. 신앙은 개인의 것이지만, 결코 개인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게 되었을 때 내게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고, 전에 하지 않던 일을 해야 하고, 이런 일들이 주변 사람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전에 하지 않던 기도를 새롭게 시작한다면 주변 사람들도 기도를 하든지 최소한 그런 상황을 용납해야만 합니다. 내가 예배드릴 때, 내가 주일을 지킬 때, 주변 사람들도 그 상황과 마주치게 됩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나의 언행이 변하고, 내 사고방식, 가치관, 생활방식이 변한다면, 그 변화를 인정하든지 않든지 주변 사람들은 그 변화된 상황과 함께 살아가야만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되는 순간부터 가족과 친척 친구들, 주변 사람들이 다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결국은 공동체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믿음의 결단을 할 때에 가족적인 결단을 따라서 하게 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에게 사도 바울은 가족적인 구원을 전했고, 간수장도 똑 같은 결단을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행16:32-33) 가족 구원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고넬료는 처음부터 신앙을 가족과 친척 친구를 비롯한 공동체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너무나 현명한 판단입니다.
2. 고넬료는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25-26)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사람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절을 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절을 받으셨고(막5:22), 사도들은 절을 받지 않았습니다.(행14:13-14) 그렇다고 고넬료가 베드로 사도를 신으로 잘못 알고 절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33절에 보면 고넬료는 주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해 주시는 말씀을 듣겠노라고 합니다. 주님과 베드로 사도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 앞에 절한 것은 극도의 겸손입니다. 고넬료 자신은 로마군의 장교입니다. 점령군의 장교요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피점령지의 시골 어부 출신인 베드로 앞에 굳이 엎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使臣이란 것 한 가지 때문에 엎드린 겁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거추장스러운 신분 때문에 주의 종 앞에 엎드리지 못합니까? 단지 하나님 말씀을 전해준다는 것 하나 때문에 목회자 앞에 무릎 꿇을 수 있습니까? 바로 그런 마음 때문에 고넬료는 축복 받는 신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겸손은 천국의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게 하는 천국인의 마음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29:23)
군대식 복종
세 번째 장면은 고넬료가 말씀을 받는 장면입니다. 여기서는 고넬료의 군인다운 신앙의 특징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1. 사령관의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입니다.
그는 베드로 사도가 무슨 말씀을 전하든지 사령관의 명령처럼 듣겠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 “to listen to everything the Lord has commanded”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상당히 불쾌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28-29) 해석하면 이런 뜻입니다. “나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셔서 왔다. 나를 부른 이유가 뭐냐?”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건방진 말입니다. 감히 점령군 장교에게 일개 어부가 무시하는 듯 한 말을 합니다.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는 내가 네게 왔느니 어서 이유나 말하라는 식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의 말에 개의치 않고 명령을 듣겠다고 합니다. 고넬료가 들으려고 하는 것은 베드의 말이 아니라 사령관이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 고넬료는 지금 베드로의 면전에 있기 전에 총사령관이신 주님 면전에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말만 하고 남의 말은 좀처럼 듣지 않습니다. 특히 좀 안다는 지식인들이 그렇습니다. 자기 이론에 도취되어 하늘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고넬료 역시 지식인입니다. 당시로서는 가장 많이 배운 식자요 문명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최고 사령관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습니다. “고넬료가 이르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30-32) 오늘 우리에게 바로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누가 전하든지 하나님 말씀을 최고 사령관이 내리신 절대 명령으로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열린 귀를 강조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9,23)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 13:9,43, 계2:7,11,17,29, 3:6,13,22) 열린 귀는 열린 마음에서 나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들으려고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열린 마음이고 열린 귀입니다. 열린 귀를 가진 사람은 삶의 결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마음 밭이 있습니다. 길가 밭은 굳어져서 남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는 강퍅한 마음입니다. 돌짝밭은 심지가 깊지 못한 얕은 마음입니다. 가시밭은 염려와 근심에 찌든 마음입니다. 그러나 좋은 밭은 언제 씨를 뿌려도 싹이 나고 자라는 좋은 땅입니다. 여기서 씨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언제 말씀을 뿌려도 받아들이는 마음 밭이 가장 좋은 밭입니다. 수용적인 마음 밭, 긍정적인 마음 밭, 즉 열린 귀가 있는 마음 밭입니다. 이런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이 복음을 받으면 구원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런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믿은 후에도 말씀을 받아서 크게 성장하고, 축복이 쌓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 명령을 사령관의 절대 명령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2. 명령 체계를 존중하는 일입니다.
고넬료가 한 말을 잘 분석해 보면 군대식 명령 체계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3절을 보세요.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 “Now we are all here in the presence of God to listen to everything the Lord has commanded you to tell us.”(NIV) 사령관은 주님이십니다. 주께서!(oJ kuvrio" = the Lord) 그리고 그 사령관의 명령을 전달하는 지휘관은 베드로 사도입니다. “the Lord has commanded you to tell us.”(NIV) 사령관이신 주님이 존중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명령을 전달하는 베드로의 지위도 존중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 체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보면 하나님 명령은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해서 백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 명령 체계를 무시하면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십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과 재혼했을 때 그 누이 미리암이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로 말미암아 미리암에게 문둥병의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명령 불복죄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세우신 지휘관을 비방한 것만 가지고도 그렇게 처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체계를 멸시할 때에 하나님은 가장 크게 진노하십니다. 신약 시대에 보면 주님의 말씀이 사도들에 의해서 전달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목회자에 의해서 말씀이 양들에게 전달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24:45) 집은 교회이고, 집주인은 주님이시고 그 집 사람들은 성도들입니다. 양식은 말씀이고 이 말씀을 때를 따라 나눠 둘 종은 바로 목사들입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명령 체계입니다. 목사는 사령관이신 주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 위치를 성도들이 존중해야만 주님의 명령이 실행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사회 전반에도 똑 같이 적용됩니다. 가정에서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하나님 명령을 전달하는 지휘관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하나님의 명령이 전달되는 가정의 지휘관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권력도 마찬가집니다. 성경은 권세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 국가 권력도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지휘 계통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부모가 자녀만 못한 수도 있습니다. 부모는 배우지 못했어도 피땀 흘려 자식을 공부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부모가 자기만 못하다고 명령에 불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세상적으로는 잠깐 잘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휘 계통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똑똑해서 남편을 무시하고 가장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받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명령체계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장로들보다 덜 똑똑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명령에 불복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체계를 무시하고 은혜가 임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하고, 그가 전하는 말씀을 총사령관의 절대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만 받은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다 함께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시에 그 주변이 함께 구원을 받고, 함께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내 신앙이 고넬료와 같은 군대식 복종으로 일시에 큰 축복으로 이어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편견을 넘어
사도행전 10:9-23 / 김상복 목사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육시더라.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가니라. 사도행전 10:9-23
우리 모두에게는 편견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작은 편견들이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고 또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온전하지 못해서 여러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편견에서 해방을 받아 좀 더 자유롭게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도전해주십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방색, 지방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함경도 사람은 어떻다든지, 평안도 사람은 성질이 급하다든지 그런 것이지요. 저는 평안도 사람인데도 하나도 안 급합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사람이 어떻다는 편견, ‘서울깍쟁이’라고 서울 사람들에 대한 편견도 있어요. 요새 서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전국에서 서울로 올라오지 않습니까?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비행기로 1시간이면 끝인 이 작은 나라가 지방색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던 과거가 있습니다. 이런 편견은 건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진보주의자가 어떠니, 보수주의자가 어떠니 하는 정치적 편견도 있고, 강자 앞에서는 꼼짝 못하면서 약자는 무시하는 편견도 있습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도 많습니다. 우리 민족은 다른 나라 사람들과 같이 살아본 경험이 없는 단일민족이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입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후하지만 비(非)서구인에 대해서는 상당한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중국 동포들이나 북한에서 온 사람들에 대해서도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또 얼마나 심했습니까?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해도 아침에 눈먼 사람을 보면 재주 없다고 침을 탁 뱉었습니다. 몸이 불편해서 뒤뚱뒤뚱 거리면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곤 했어요. 또 기업에 대한 편견, 노동자에 대한 편견, 교회는 교회대로 다른 교단에 대한 편견이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를 부산에서 다녔습니다. 그 당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이 “경건한 사람들은 예배드릴 때 엘리야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기도한 것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절대로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면 안 됩니다. 서울에는 의자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자유주의자들이 있어요.”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는데, 어느 교회를 다녀야 할지 몰라 남대문에 있는 한 교회에 그냥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딱 들어가니 교인들이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 겁니다. ‘아, 이런 사람과 내가 어떻게 함께 예배를 드리나?’ 저는 그날 예배를 못 드렸습니다. 편견이었지요. 그 후에 제가 미국에 갔다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을 때 부산에 갔는데, 예전의 그 교회에서 저를 위한 환영회를 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들어섰더니 의자가 쫙 놓여있었어요. 편견 때문에 사람들을 힘들고 불편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성에 대한 편견도 있지요. 딸아이가 트럭을 가지고 놀면 “야, 여자애가 무슨 트럭이야?”하고 인형 같은 것을 주지요. 요즘은 동일한 기회만 주어지면 여자도 남자처럼 못 할 일이 없지 않습니까? 제가 딸 셋을 키우면서 늘 했던 말이 “너희들은 남자 되는 것 빼고는 못 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학교에서 남학생들을 다 젖히고 학생회장을 하더라고요.
편견이란 무엇인가? 편견은 사실을 잘 알지 못한 채 좋지 않은 행동이나 과격한 판단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보기도 전에, 만나기도 전에 마음으로 결정하고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제인 오스틴이 쓴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은 남녀 사이의 편견의 문제를, ‘종달새를 죽여라’(To Kill A Mockingbird)는 흑인에 관한 편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그밖에도 이념적 편견, 철학적 편견, 애정문제에 관한 편견 등, 편견은 여러 분야에 여러 모양으로 존재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이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 책임이 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편견에서 자유롭기를 원하십니다.
왜 편견이 생깁니까? 과거에 겪은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나머지를 다 어둡게 보는 편견이 생길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문화 때문에 나도 모르게 생긴 편견도 있습니다. 혼혈인들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편견도 그 한 예입니다. 문화적, 사회적 편견으로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많은 아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신앙인들과 교회에도 편견이 있습니다. 다른 교단과 교류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 잘 믿는 교단이기 때문에 다른 교단과는 교류를 안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교단의 총회장이 다른 교단의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만 한 번해도 교계 신문에 대서특필합니다. 마땅한 일이 뉴스거리가 되는 것은 우리의 편견이 얼마나 큰지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편견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려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요 유대인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방인을 싫어했습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유대 민족인데, 이방인은 상대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가이사랴 동네에 이태리 사람이 있었는데 로마군인이었습니다. 유대 사람은 이태리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상대를 하지 않는데, 게다가 군인이라면 이스라엘의 정복자니까 그 사람들이 만나자 한다고 베드로가 만나주겠어요? 베드로는 이방사람들과 같이 점심을 잘 먹다가 유대사람이 오니까 일어나서 싹 도망갔습니다. 자기가 이방인과 밥 먹는 것을 유대사람들에게 안 보이려고 한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 사도에게 혼이 났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유대인만 사랑하십니까?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런 행동은 하지 마십시오!” 사도바울이 아주 잘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편견을 없애주시려고 오늘 이 성경구절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루에도 세 번씩 기도하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편견이 있었어요. 여러분 역시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혹시 베드로처럼 어떤 편견이 있는지 찾아보시고, 있다면 지금 그 편견을 이곳에 내려놓고 가십시오. 놓았다가 다시 집어가지 마시고 그냥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고 가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가 기도하기 위해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그 때가 12시이고 배가 고파 아래층에서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지붕에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비몽사몽간에 환상에 빠졌습니다. 하늘에서부터 큰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거기 보니까 별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네 발 가진 온갖 짐승들과 곤충, 벌레, 뱀, 그리고 조류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베드로는 ‘아니, 왜 이런 것들이 나타날까?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생각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베드로야, 손을 뻗어 그것들을 잡아먹어라.”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베드로의 반응이 “하나님, 절대로 먹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속되고 깨끗하지 못한 것들을 제가 전혀 먹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절대로 먹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먹으라고 하셨는데도 속되고 더러운 것들이라고 안 먹어요. 여러분, 그 속되고 더러운 것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신 것들입니다. 그리고 “참, 좋다!” 하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발 달린 짐승들을 창조하시고는 “참 좋다”, 벌레들을 창조하시고는 “참 좋다!”, 공중의 새를 창조하시고도 “참 좋다!”고 하셨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아름다우신 하나님,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좋다고 하신 생물들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아무리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해도 저는 이 속되고 더러운 것들은 안 먹습니다. 내가 더럽다고 하면 더러운 겁니다. 절대로 안 먹어요.”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편견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모든 것은 좋습니다. 다만 내가 싫어할 뿐입니다.
우리 집 식구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뱀입니다. 우리 집에는 저 외에는 여자밖에 없으니까 TV에 뱀이 나오면 다들 눈을 가립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가정에서 우리 가족을 식사에 초대해서 예배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그 집에 갔습니다. 식당에 들어서니 길이가 한 2m 정도 되어 보이는 굵은 뱀이 바닥에 척 늘어져 있는 겁니다. 우리 아이들과 제 아내가 기겁을 해서 기절할 뻔 했어요. 그 뱀은 그 집의 애완용 뱀이었어요. 뱀 껍질이 착착 벗겨지는데도 그것이 그렇게 멋있는가 봐요. 우리 식구들이 어쩔 줄 몰라 하기에 제가 주인에게 살짝 “우리 식구들은 뱀 알레르기가 있으니까 잠깐 다른 곳에 치웠다가 데리고 오면 어떨까요?” 말하고는 겨우 점심을 먹었습니다. 우리는 싫어하지만 그 집에서는 만지고 장난치고, 최고로 귀여운 동물이었어요. 이것도 동물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입니다. 과거의 좋지 않은 경험으로 생긴 편견이지요.
성령님은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들어놓았는데 네가 왜 속되다, 더럽다고 하는가? 네가 창조자냐?”하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먹어라!” “못 먹습니다.” “먹어!” “못 먹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도 딱 버티고 안 먹는다는 겁니다. 그러는 동안 환상에서 깨서 그것들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어요. 그러자 베드로의 마음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아, 이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여러분도 종종 꿈을 꾸거나 환상을 보고는 혼란스럽거나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런 때 어떻게 하십니까? 김상복 목사한테 전화하잖아요. 제가 그런 전화상담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직접 여기까지 찾아와 제게 이야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더러 해석해달라고 하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어떤 때는 들어보면 개꿈인 경우도 있고, 어떤 때는 제가 영적으로 생각해보려고 하고, 다른 이야기도 다 물어서 제 의견을 말해줄 때도 있습니다.
베드로도 환상을 보고 도대체 무슨 뜻인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우리는 저 가이사랴에 사는 고넬료라는 로마 군인이 보낸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고넬료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여기 와서 당신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그 환상을 보지 않았다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방인이요, 정복자인 로마 군인이 부르는데 유대인인 그가 왜 가겠습니까? 그런데 드디어 베드로가 편견에서 해방을 받기 시작하고, 편견에서 자유로, 아가페로 돌아서는 첫 발자국을 디딘 이야기가 바로 오늘 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고넬료에 대해서 그저 이방인, 로마 군인으로만 알면 편견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그는 의인이었습니다.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22절). 이방인이요 군인이요 정복자라 할지라도 그 속에 의로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셋째,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유대인들 사이에서 칭찬을 받았습니다. 넷째, 천사와도 교류하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복음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22절).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하고 만나보지도 않았고 대화도 해보지 않았는데 무조건 싫다, 좋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편견입니다. 사실 만나보면 고넬료처럼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속에 어떤 종류의 편견들이 있든지 이 편견을 제거시키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무조건 맞아주시고 사랑해주시고 품어주시는 것처럼 여러분도 편견 없이 다른 사람들을 만남으로써 여러분의 인생을 즐기게 되기를 원합니다.
링컨 대통령 시절, 남북전쟁이 끝나고 남부 출신의 로버트 리라는 장군이 워싱턴에 있는 아주 잘 지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도 시간이 되자 그 장군은 앞으로 나와 흑인 옆에 앉아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던 남부에서 온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습니다. “우리 남부의 최고 사령관인 장군께서 어떻게 흑인 옆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까?” 장군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형제여, 십자가 앞의 모든 지면은 다 똑같습니다.” 편견에서 해방 받은 장군입니다. 이런 지도자들이 사회 곳곳에 있을 때 그 사회는 새로운 사회, 편견 없는 사회, 공평한 사회, 아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로버트 리 장군과 같은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부부가 고속도로에서 차를 몰고 가는데 그만 타이어가 펑크 났습니다. 그래서 차를 세우고 지나가는 차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많은 차들이 쌩쌩 지나가는데 좀 도와 달라고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저기서 터덜터덜 거리면서 폐차장에서나 볼만한 낡은 차가 한 대 다가와서 섰습니다. 그 차에서 거지처럼 옷을 입은 사람이 한 명 나와 묻습니다. “차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부부가 사정 이야기를 하자 “나에게 도구가 있으니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자기 차에서 잭을 가지고와 다 고쳐주었습니다. 도움을 받은 부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허름한 자동차에서 내린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지나갔지만 이 허름한 사람은 차를 세우고 와서 도와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를 다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고,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건강한 사람도 있고 병든 사람도 있고, 피부 색깔도 다르지만, 모두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편견으로부터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으로 우리의 손을 펴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1955년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 흑인 가수가 처음으로 섰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리아 앤더슨이지요. 그녀는 얼마나 멋진 음성을 가졌습니까. 공연을 마치자마자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이 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세계 정상에 우뚝 설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마리아 앤더슨은 대답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나는 나의 시선을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때마다 주님께서 나를 향하여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어려운 일들을 모두 이기고 흑인 오페라 가수로서 최초로 뉴욕 무대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편견 없이 다 동일하게 사랑하십니다.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 모두에게 천국을 값없이 은혜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와 같은 사랑이 있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마음이 편안합니다. 얼마든지 어려움을 견뎌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편견으로부터 해방을 받고, 모든 사람을 하나님처럼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편견을 당할 때에도 그 모든 것을 아시고 “내가 너를 영원히 사랑하느니라.”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음성을 듣고 이겨나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 누리에 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양향모목사 / 행 10:17-23
고넬료와 베드로가 만나는 장면을 계속해서 보고 계십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이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전해지는 중요한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만남이 우연히 지나가다가 만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이 믿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가운데, 즉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치밀하게 진행하시는 역사 속에서 특별하게 이루어져나가고 있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사자를 보내셔서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초청하여 만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고넬료는 그 말을 듣고 바로 하인들을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욥바로 보냈습니다. 이튿날 고넬료의 하인들이 욥바에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집에 도착할 무렵에 베드로에게도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환상을 보여 주시면서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를 만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서부터 시작을 합니다. 베드로가 본 그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이 그 집에 찾아왔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집에 하룻밤 함께 자게하고 그 다음날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방인인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나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됩니다. 이 사건은 복음전파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주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 두 사람이 만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성경에 기록하도록 하신 특별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만 특별한 하나님의 개입으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다 특별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이후에 변화된 신분은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개 사탄의 종의 신분이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강 적당히 우연히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있어야 하고 선택받은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만나야 되고 복음을 들었을 때 복음을 믿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과정들이 그냥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역사하시지 않으시면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그 역사적인 사건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부모님을 만났거나 아내나 남편이나 친구나 이웃이나 나를 예수님께 인도한 그 사람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게 한 그 일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신앙을 지키며 살게 해주시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런 일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바른 신앙을 가르쳐주는 교회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바른 진리의 길을 안내하는 목회자나 성도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을 더 강하게 해 주는 일들이 어떤 일인지를 살펴보면서 그런 일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건강이 제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육신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이 건강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좀 더 출세하고 좀 더 잘사는 것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을 강하게 해주는 것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신앙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나라에서 살게 하는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특별한 일들을 살펴보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특별한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특별한 일에 대처하는 방법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본문 17절에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9절에는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을 보여주며 일어나 잡아먹으라고 하신 환상을 보고 속으로 의아해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환상이 무슨 뜻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경험에 의하면 사실 그 정도의 환상은 그렇게 특별한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런 저런 기적적인 일들을 많이 체험했기 때문에 그런 정도의 음성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기적들을 보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듣고 배웠던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많은 기적들을 직접 보았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특별하게 모든 사람에게 임하시는 모습도 보았고 그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일어나는 기적적인도 보았습니다. 그 성령님께서 베드로 자신을 통하여 불치병의 환자도 고치시고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런 엄청난 일들을 지난 몇 년 사이에 체험했던 베드로에게 지금 본 환상정도는 무시하고 넘어 갈만도 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환상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일이라고 생각하여 그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을 하고 실천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도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을 모두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신앙과 연관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하신 뜻을 가지고 주신 일이 아닌가를 의심해 보고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하고 그 뜻을 따라 살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의아해 하더니
여기 의아해 했다는 말은 매우 당황스럽고 어쩔 줄을 모르고 의심이 갔다는 말입니다. 황홀한 중에 환상을 보여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생각을 했지만 평소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좀 그 뜻을 달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일까 라고 의심을 하게 되었고 당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율법에 분명히 금지된 일을 하라고 하시니까 당황스럽기도 하고 의심이 들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이 구약성경의 율법과 배치되는 장면들을 만납니다. 그럴 때 당황하게 되고 복음에 대한 의심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복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율법은 복음으로 인도하는 몽학성생이고 복음이 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2) 생각할 때에
환상을 보고 처음에는 당황하고 의심이 갔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인 것을 알았을 때 그가 취한 행동은 그 환상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환상을 보여주셨다면 그 환상 속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이고 그 환상을 보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3) 우리에게도 있는 특별한 일
이런 특별한 환상이나 사건이 비단 고넬료가 예수님을 믿을 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의 위기나 찬스를 만날 때도 이런 특별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라고 지나쳐버리지만 우리 삶속에도 이런 특별한 신호가 있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특별한 일을 만날 때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찬스인지 아니면 사탄이 우리에게 신앙의 위기를 초래할 목적으로 주는 유혹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때로는 사탄의 유혹이 하나님을 가장하여 우리 앞에 나타날 때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감별하는 방법은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더욱 신앙생활을 더 잘하게 하려는 것인지 또는 다른 사람을 전도하도록 하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떠나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믿음생활을 떠나게 하는 그 어떤 일도 좋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복음을 향하고 있는 일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것인지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강하게 할 찬스를 주셨는데 그것을 생각도 해보지 않고 지나쳐버린다면 후회할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환상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처럼 확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을 무시하고 사는 사람은 바른 신앙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성경 말씀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나에게 주신 더 확실한 환상은 설교 말씀입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매주 나 자신을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듣지 않고서 신앙을 유지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설교가 나에게 주신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는 성공적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과거에 알고 있던 알량한 성경지식 가지고 설교를 듣지 않고 사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수시로 해 주시는 말씀을 듣지 않고 살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시고 설교를 들으시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을 놓치고 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본문 20절에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보고 그 환상이 하나님의 뜻인지 의심도 해보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라고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그렇게 어려운 일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다 준비해 두신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실천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아왔습니다. 찾아와서 찾아온 이유를 설명합니다. 자신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찾아왔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베드로를 만나고자 하는 고넬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깡패두목이 만나달라고 초청한 것도 아닙니다. 악한 권력자가 만나달라고 초청을 한 것도 아닙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이 논쟁하면서 따지기 위해서나 질책하기 위해서 초청한 것도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온 유대사람들이 칭찬하는 사람이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고 베드로를 초청했다는데 가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초청한대로 가서 만나면 됩니다.
이런 일을 사람의 힘으로 하려면 엄청 어렵고 까다로운 일입니다. 오랫동안 준비를 하고 여러 사람들을 동원하고 힘들게 진행을 해야 될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다 준비를 하시고 게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그렇게 어렵고 힘이 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놓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내 마음대로 살려고 하니까 힘이 들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힘이 들 일이 없습니다.
일부 특별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주의 일을 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고 고난을 당하고 순교를 하면서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부득불 그런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어렵게 예수님을 믿게 하시지 않습니다. 쉽게 행복하게 오히려 이 세상의 복도 받아가면서 신앙생활도 하고 좋은 일도 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때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되는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그것이 멍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쉽고 가벼워서 마음이 쉼을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능력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받게 되는 영원한 세상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의심하지 말고 순종하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설교가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의심하지 말고 말씀을 따라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주변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을 해 보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아셨으면 의심하지 말고 실천에 옮겨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성경을 통해서 설교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면서 우리에게 찬스를 주셨을 때 놓치지 말고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귀한 뜻을 실천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만남 좋은 관계
행 10장 17~23절 / 백장흠목사
사람은 만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태어날 때 처음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입니다. 이것은 혈연의 만남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이 혈연으로 만난 분입니다. 성장하면 선생님을 만납니다. 병이 생기면 의사를 만나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성장하면 배우자를 만나게 됩니다. 만남에 있어 중요한 게 있습니다. 좋은 만남인가? 잘못된 만남인가? 만남을 통하여 영향을 받게 됩니다.
어떤 종교를 만나는가? 에 따라 영원토록 축복인가? 아닌가? 결정이 나기 때문입니다. 만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의 복이 있어야 합니다.” 환자가 의사를 잘 만나면 죽음 직전에서도 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대로 잘못 만나면 살 환자가 죽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만남의 복” 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선생님을 잘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장하면서 좋은 친구를 만나야 합니다.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소탈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속됨을 고칠 수 있고 통달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편벽됨을 깨뜨릴 수 있고 박식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속됨을 고칠 수 있고 나의 고루함을 고칠 수 있고 차분한 친구를 만나면 나의 경망스러움을 다스릴 수 있고 욕심 없이 깨끗하게 사는 친구를 만나면 사치스러워지려는 나의 허영심을 깨끗이 씻어낼 수 있다고 신흠은 『숨어 사는 선비의 즐거움』이라는 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성년이 되면 배우자와 배필을 잘 만나야 합니다. 리브가는 이삭을 잘 만났습니다. 신약에서 마리아는 요셉을 잘 만났습니다. 이들이 만약 다른 사람들과 같은 남자를 만났더라면 유명한 여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 일본의 여자신학교 기숙사에 복면 강도가 침입하여 모든 것을 털어 가려 합니다. 믿음 좋은 여학생 한 명이 그 도둑의 짐 속에 자기가 아끼는 작은 성경 한 권을 넣었습니다. 여학생이 어느 날 유명한 목회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의 서재를 정리하다가 눈에 익은 성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아끼던 성경책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남편이 들어왔을 때 물었습니다. 도대체 이 성경이 무슨 성경이냐고? 남편 되는 이는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내가 청년시절 도적질하러 어느 여학교기숙사에 들어갔다가 이 성경을 갖고 오게 되었는데 이것을 읽다가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회개하여 목사가 되었고 당신을 만나게 되었다고 내가 변화된 것은 이 성경 덕이라구요. 그때 아내가 말합니다. 이 성경책은 내 것이랍니다. 내가 당신이 도적질하러 왔을 때 짐 속에 넣어 두었다고 이후에 부부는 훌륭한 주의 사역자가 되었답니다.
만남가운데는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피차 이익을 위하여 만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사업상의 만남, 국가 원수들이 양국의 이익을 위해서 만나는 만남 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영적인 만남의 한 장면을 살펴보게 됩니다. 곧 이방인으로 경건하고 구제에 힘쓰는 고넬료와 예수의 제자 베드로와의 만남입니다. 고넬료가 평신도라면 베드로는 영적 지도자입니다. 교회는 좋은 지도자를 만나야 합니다. 지도자는 좋은 신앙의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평신도와 평신도들도 같이 잘 만나야 합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만남의 장소입니다. 서로가 처음부터 좋은 만남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남 속에서 행복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만남가운데서 상처받는 이들이 치유를 받습니다. 위로를 받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만남가운데서 인간관계가 형성됩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고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들은,
1. 기도 중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만난 만남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0:3절에 제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제구시는 우리 시간으로 오후 3시경이고 기도의 시간입니다. 5절을 보시면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하인 둘과 부하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욥바에 보냅니다.(7절과 8절) 베드로도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때가 제6시였다고 하였습니다. 9절 6시는 낮 12시입니다. 정오의 기도시간입니다. 본문20절에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이렇게 기도 중에 만난 것입니다.
사람의 만난 중에는 우연히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나는 사람 어떤 Meeting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도 있습니다. 또 Meeting은 Meeting인데 소개받고 만나는 Meeting도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군에서 만난 사람도 있습니다. 전우라고 하지요. 그런데 군대에서 만난 사람이 친해지는 경우는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를 인카운터(encounter)라고 말합니다.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라는 말입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만나는 만남도 있습니다. 이들은 거래가 끝나면 만남도 끝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가 함께 만나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성도가 한 공간 안에서 함께 자리에 앉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만남은 영적인 만남입니다. 이것이 스페셜 인카운터(Special encounter)의 만남입니다. 서로 돕고 도움을 받는 만남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좋은 만남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만남가운데서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는 즉, 성도의 이상적인 교통이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같이 있다고 대화를 웃으면서 하였다고 좋은 관계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장례식 날 할머니는 침울한 표정으로 걸어갔고 아들이 관을 들고 나가다가 잘못해서 쿵 하고 벽에 부딪혔습니다. 그러자 관 안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 관을 열어보니 할아버지가 살아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은총이라고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 후에 할아버지는 10년을 더 살았습니다. 10년 후 다시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아들들이 관을 들고 장례식장을 빠져 나가는데 옆에서 할머니가 초조한 얼굴로 소리칩니다. 얘들아 벽 조심해. 왜 또 살아날 까봐. 부부가 같이 살아도 스페셜 인카운터가 안 되는 이들이 많다는거지요. 우리 성도님들이 함께 만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가운데서 만남의 관계가 되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예수 사랑으로 말씀 안에서 예수의 피로 맺어진 형제와 자매의 관계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옛말로 현인이 있고 소인이 있다는데 우리는 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요즘 말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 있고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옛 사람들이 말하는 현인은 인재입니다.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소인이고 어떤 사람이 현인인가요? 소인은 잔꾀가 많지만 큰 지혜가 없다고 합니다. 작은 이익에는 밝아 이익을 열심히 챙기는데 그로 인하여 큰 이익을 놓치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랍니다. 허풍이 심해 말로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말과 속이 다릅니다.
현인은 1) 언행이 정확하고 사리에 밝으며 공명정대하고 사리사욕이 없는 사람입니다. 2) 은혜를 베풀 줄 아나 보답을 바라지 아니하며 성정이 충직하고 온화하며 겉모습이 소박하고 점잖은 사람입니다. 3) 일 처리가 능숙하고 곤경 속에서 반드시 방안을 찾아내고 자신이 계획한대로 일을 해내는 사람입니다. 4) 귀한 자리에 있어도 근검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예의 바르고 교만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덕행을 쌓는 사람입니다. 5) 속세에 있으면서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안락한 생활을 하나 사치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 서로가 현인이 되고 믿음의 사람이 되어 좋은 관계를 맺어가는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복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에 있어서 좋은 만남이 있기를 기대하십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고 만나는 만남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병원에 가시는 분이 의사를 잘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가셔야 합니다. 좋은 의사 내 병을 바로 알고 진단하여 처방할 수 있는 분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만나야 합니다. 혼기를 맞게 되는 이들이 기도하고 만나야 합니다. 아니 만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2.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은 모든 것을 초월 하였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입니다. 베드로는 선민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수준을 정해 놓고 끼리끼리 만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관계는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오늘은 국제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종이나 종교를 초월하여 관계를 맺어야 살아남는 시대입니다. 국가간에 좋은 관계를 맺으면 외교를 잘하는 것이 됩니다. 서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차이가 있다, 이것을 초월해야 합니다. 도로가 막히면 미국사람들은 교통경찰관이 제일 먼저 달려와 수신호로 길을 열어주는데 일본에서는 신호등 기술자가 와서 신호등을 상황에 맞게 조작한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뻥튀기 아줌마가 제일 먼저 나타난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보는 관점을 봐줄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함께 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은 건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자신의 삶의 질을 높여주고 행복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을 기쁘게 만듭니다.
관계를 바로 맺기 위하여 중요한 요소가 개인차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다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나와 다르더라도 틀림(Wrong)이 아니라 다름(Different)을 인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와 다르면 그 사람이 나쁘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나와 다른데 그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고 인정해 주려고 하면 관계가 나빠지지는 않습니다.
세대간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기술문명에 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치관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미래보다 현실적입니다. 집은 셋집에 살아도 자가용은 좋은 차를 타려고 합니다.
세대 간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고 노인들은 캄캄한 어른들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가정에서 왜 갈등이 생깁니까?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아무 것도 모르고 예의 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젊은이가 나이 드신 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인들은 같이 있어주고 말을 많이 해주면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못 합니다. 자기와 같이 분주하게 사는 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바쁜데 시어머니가 이해하시겠지 생각합니다. 기대는 맞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답니다.
부부가 그렇게 사랑하는 데 왜 부부싸움을 합니까? 서로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정적이고 남자는 지적입니다. 여자는 감동을 주는 말이 필요합니다. 남자는 그러면 간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일 중심입니다. 업무 중심입니다. 밖에서 전화가 와도 남자는 집안 별일 없어. 나에게 연락주기로 한 친구가 연락이 오면 잘 기록해놔. 전화를 끊습니다. 여자가 듣고 싶은 말은 업무가 아닙니다. 내가 자꾸 당신이 보고 싶어져서 전화하는 거야. 당신 집안일 하느라고 수고가 많았지. 내가 알아 당신이 너무 수고하고 잘한다는 것 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거든 당신 오늘 수고 많이 하였는데 몸은 괜찮아? 나 당신이 좋아하는 것 사가지고 가려고 그러는데 뭐가 좋아. 생선이야 갈비야. 당신 보고 싶어. 사랑해. 다분히 감정적입니다.
여자는 과거에 의지해서 살고 남자는 미래에 이끌려 산다고 합니다. 말할 때에도 여자는 떠오른 말을 하고 남자는 마음에 먹은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고 여자는 아는 것도 모르는 척 한답니다. 쉽게 말하면 허풍을 떤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자는 이해하고 받아 주어야 합니다. 서로 인정해 주고 받아줄 때 금실 좋은 부부가 됩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부부가 서로 알고 이해하면 되는 일입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통하여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기술을 사용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대체효과”라고 합니다. 내향적인 사람과 외향적인 사람, 성질이 급한 사람과 느린 사람은 여유 있게 천천히 사는 사람이 서로 보완하면 더 효과적이라는 말입니다.
좋은 만남을 위하여 남녀노소 모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대처해 나가야 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는 서로가 많은 차이점이 있지만 초월하고 만남으로 좋은 관계를 만들었습니다.
3. 고정관념과 편견이 없는 만남이었습니다.
베드로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짐승은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이 고정관념으로 자리매김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적이었습니다. 레위기 11장에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파괴시키고 잡아먹으라 하십니다. 사람이 갖는 생각은 무서운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생각이라도 마음속에 한 번 붙어있으면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편견이 무엇입니까?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실제로 경험하기 전에 또는 사실적 근거 없이 갖는 좋은 혹은 좋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역에 대한 편견(충청도 사람은 말이 느리기 때문에 행동도 느리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나다나엘의 편견이었습니다. 사람의 외모에 대한편견(광대뼈가 나온 사람은 팔자가 드세다. 그렇지 않습니다. 더 잘 살아요.) 결혼하지 아니한 사람에 대한 편견, 장애인에 대한 편견, 학벌에 대한 편견, 심하면 종교적인 편견 이런 것 때문에 만남을 꺼리고 관계를 좋게 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편견 때문에 진주와 같은 좋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변할 수 없는 편견을 오래 가지고 있으면 이것이 고정관념이 됩니다. 어린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때 당한 상처가 남자는 다 나쁘다. 남자는 나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이다. 그런 생각이 그녀를 사로잡았습니다. 결혼을 회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낚시를 하는데 큰 고기를 잡으면 물속에 고기를 놓아줍니다. 누가 물었습니다. 왜 큰 고기를 물속에 놓아줍니까? 오늘은 재수가 참 없는 날이군요. 자꾸 큰 고기만 잡히니 말입니다. 우리 집 후라이팬이 작거든요. 큰 것은 후라이팬에 맞지 않아서 그래요. 이것이 고정관념입니다. 후라이팬을 큰 것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찻잔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담으니까 뜨겁습니다. 그래서 찻잔을 두껍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손잡이를 만들면 됩니다. 생각이 바뀌어야 모든 것이 바뀌게 됩니다. 고정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선민인 나는 이방인 고넬료와 내가 왜 만나나? 그럴 수 없어 이 마음을 버렸습니다. 이유 없이 누군가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편견이고 고정관념입니다.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상대방이 아무리 잘해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좋은 만남이나 좋은 관계 맺고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속히 고정관념을 깨뜨리세요. 사람에게 한계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아닌 사고의 한계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나는 못해. 그건 인간이 할 수 없어. 암에 걸리면 죽는 거야. 이것이 심리적 한계입니다. 우리 집안의 수명은 단명이야. 나도 일찍 죽을 거야. 우리 집안에서는 백만장자가 나온 일이 없어. 이것도 마음의 고정관념입니다. 이것을 벗어나야 행복해집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느 기업에서 직원을 채용하는데 이런 문제를 출제하였답니다. 눈 바람이 몰아치던 날 밤 당신이 차를 몰고 Bus 주차장을 지나가는데 정류장에는 세 명이 추위에 떨면서 Bus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명은 병세가 심각해 보이는 노인이고 다른 한 명은 전에 내 생명을 구해준 의사입니다. 다른 한 명은 내가 꿈속에 그리던 여인이었습니다. 자기 차에 태울 수 있는 인원은 한 명입니다. 문제는 당신은 누구를 태우겠는가? 이 문제를 놓고 대부분 사람들은 고민할 것입니다. 중병에 걸린 노인을 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생명을 구해준 의사에게 보은의 순간인데 어쩌라는 거냐. 아니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났는데 절호의 찬스가 아닌가? 고민할 것입니다. 지원자 200명 중에 그 회사에 채용된 한 사람이 있는 그가 말하기를 차에서 내려 열쇠를 의사에게 주면서 이 노인을 속이 병원에 실고 가서 치유해 주라 하고 자신은 꿈에 그리던 여인과 함께 Bus를 기다리겠다. 이 얼마나 멋진 대답입니까? 실제 이렇게 해야지요. 문제는 무엇입니까? 차에서 내리는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에서 내려오라는 교훈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좋은 만남이었습니다. 내가 좋은 만남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여야 합니다. 차이를 인정하세요. 그리고 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리고 누구와도 좋은 만남과 관계를 만들어 행복하고 유익한 삶을 살아가는 복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 10장 17~33절 / 김영규목사
말씀의 내용은 고넬료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넬료의 마음가짐, 혹은 주님을 영접하는 그의 신앙의 자세입니다. 고넬료는 어떤 마음으로 생전 처음 듣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까? 오늘날 세상에는 수많은 불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여러 번 들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듣는다고 다 영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준비된 사람만이 주님을 영접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고넬료의 신앙적 자세를 살펴보고 본받아야 합니다.
고넬료의 초청
오늘 말씀의 첫 번째 부분은 고넬료가 사도를 초청하는 장면입니다. 고넬료가 환상 중에 천사의 명령을 받은 것은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고넬료는 명령대로 곧바로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를 초청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4-15, 17) 복음은 우선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의 사람들이 베드로의 숙소에 도착했을 때, 베드로는 아직도 자신이 본 환상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하더니”(17) 밖에서 베드로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17-18) 그들은 이방인을 꺼리는 유대인의 전통을 알기 때문에 문 밖에 서서 주인을 찾았습니다. 베드로는 아직도 환상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성령께서 베드로의 마음에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세)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19-20) 그래도 베드로는 그 사람들에게 자기를 찾아 온 이유를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21) 고넬료의 사람들이 찾아 온 이유를 설명합니다.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22) 이 말씀에 보면 고넬료는 하인들이나 시종들, 혹은 노예들에게까지 존경받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베드로는 고넬료의 초청에 응하여 가이사랴로 갑니다.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23)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갈 때에 여섯 명의 성도들이 베드로를 수행하여 함께 갔습니다.(행11:12) 당시에는 사도들의 여행에 신자들이 수종들고 동행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 있었습니다.(요삼6, 행15:3, 고전16:11)
고넬료의 영접
본문의 두 번째 장면은 고넬료가 베드로 사도를 영접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복음을 받는 고넬료의 두 가지 모범적인 자세가 나옵니다.
첫째로, 고넬료는 모든 가족들을 모아 놓고 기다렸습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24) 아내와 자녀들은 물론, 친척과 친구들까지 불러 모았습니다. 신앙은 개인의 것이지만, 결코 개인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게 되었을 때 내게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고, 전에 하지 않던 일을 해야 하고, 이런 일들이 주변 사람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전에 하지 않던 기도를 새롭게 시작한다면 주변 사람들도 기도를 하든지 최소한 그런 상황을 용납해야만 합니다. 내가 예배드릴 때, 내가 주일을 지킬 때, 주변 사람들도 그 상황과 마주치게 됩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나의 언행이 변하고, 내 사고방식, 가치관, 생활방식이 변한다면, 그 변화를 인정하든지 않든지 주변 사람들은 그 변화된 상황과 함께 살아가야만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게 되는 순간부터 가족과 친척 친구들, 주변 사람들이 다 그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결국은 공동체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믿음의 결단을 할 때에 가족적인 결단을 따라서 하게 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에게 사도 바울은 가족적인 구원을 전했고, 간수장도 똑 같은 결단을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행16:32-33) 가족 구원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고넬료는 처음부터 신앙을 가족과 친척 친구를 비롯한 공동체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너무나 현명한 판단입니다.
둘째로, 고넬료는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25-26)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사람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절을 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절을 받으셨고(막5:22), 사도들은 절을 받지 않았습니다.(행14:13-14) 그렇다고 고넬료가 베드로 사도를 신으로 잘못 알고 절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33절에 보면 고넬료는 주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해 주시는 말씀을 듣겠노라고 합니다. 주님과 베드로 사도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 앞에 절한 것은 극도의 겸손입니다. 고넬료 자신은 로마군의 장교입니다. 점령군의 장교요 로마 시민권자입니다. 피점령지의 시골 어부 출신인 베드로 앞에 굳이 엎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使臣이란 것 한 가지 때문에 엎드린 겁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거추장스러운 신분 때문에 주의 종 앞에 엎드리지 못합니까? 단지 하나님 말씀을 전해준다는 것 하나 때문에 목회자 앞에 무릎 꿇을 수 있습니까? 바로 그런 마음 때문에 고넬료는 축복 받는 신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겸손은 천국의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게 하는 천국인의 마음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5-6)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29:23)
군대식 복종
세 번째 장면은 고넬료가 말씀을 받는 장면입니다. 여기서는 고넬료의 군인다운 신앙의 특징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사령관의 명령에 대한 절대 복종입니다. 그는 베드로 사도가 무슨 말씀을 전하든지 사령관의 명령처럼 듣겠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 “to listen to everything the Lord has commanded”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상당히 불쾌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28-29) 해석하면 이런 뜻입니다. “나는 유대인이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은 금지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셔서 왔다. 나를 부른 이유가 뭐냐?”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건방진 말입니다. 감히 점령군 장교에게 일개 어부가 무시하는 듯 한 말을 합니다.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는 내가 네게 왔느니 어서 이유나 말하라는 식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의 말에 개의치 않고 명령을 듣겠다고 합니다. 고넬료가 들으려고 하는 것은 베드의 말이 아니라 사령관이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 고넬료는 지금 베드로의 면전에 있기 전에 총사령관이신 주님 면전에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말만 하고 남의 말은 좀처럼 듣지 않습니다. 특히 좀 안다는 지식인들이 그렇습니다. 자기 이론에 도취되어 하늘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고넬료 역시 지식인입니다. 당시로서는 가장 많이 배운 식자요 문명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최고 사령관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습니다. “고넬료가 이르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30-32) 오늘 우리에게 바로 이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누가 전하든지 하나님 말씀을 최고 사령관이 내리신 절대 명령으로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열린 귀를 강조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9,23)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 13:9,43, 계2:7,11,17,29, 3:6,13,22) 열린 귀는 열린 마음에서 나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들으려고 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열린 마음이고 열린 귀입니다. 열린 귀를 가진 사람은 삶의 결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마음 밭이 있습니다. 길가 밭은 굳어져서 남의 말을 절대로 듣지 않는 강퍅한 마음입니다. 돌짝밭은 심지가 깊지 못한 얕은 마음입니다. 가시밭은 염려와 근심에 찌든 마음입니다. 그러나 좋은 밭은 언제 씨를 뿌려도 싹이 나고 자라는 좋은 땅입니다. 여기서 씨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언제 말씀을 뿌려도 받아들이는 마음 밭이 가장 좋은 밭입니다. 수용적인 마음 밭, 긍정적인 마음 밭, 즉 열린 귀가 있는 마음 밭입니다. 이런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이 복음을 받으면 구원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런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믿은 후에도 말씀을 받아서 크게 성장하고, 축복이 쌓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 명령을 사령관의 절대 명령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명령 체계를 존중하는 일입니다. 고넬료가 한 말을 잘 분석해 보면 군대식 명령 체계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3절을 보세요.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3) “Now we are all here in the presence of God to listen to everything the Lord has commanded you to tell us.”(NIV) 사령관은 주님이십니다. 주께서!(oJ kuvrio" = the Lord) 그리고 그 사령관의 명령을 전달하는 지휘관은 베드로 사도입니다. “the Lord has commanded you to tell us.”(NIV) 사령관이신 주님이 존중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명령을 전달하는 베드로의 지위도 존중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명령 체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보면 하나님 명령은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해서 백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 명령 체계를 무시하면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십니다. 모세가 구스 여인과 재혼했을 때 그 누이 미리암이 비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로 말미암아 미리암에게 문둥병의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명령 불복죄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세우신 지휘관을 비방한 것만 가지고도 그렇게 처벌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체계를 멸시할 때에 하나님은 가장 크게 진노하십니다. 신약 시대에 보면 주님의 말씀이 사도들에 의해서 전달되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목회자에 의해서 말씀이 양들에게 전달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마24:45) 집은 교회이고, 집주인은 주님이시고 그 집 사람들은 성도들입니다. 양식은 말씀이고 이 말씀을 때를 따라 나눠 둘 종은 바로 목사들입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명령 체계입니다. 목사는 사령관이신 주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 위치를 성도들이 존중해야만 주님의 명령이 실행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사회 전반에도 똑 같이 적용됩니다. 가정에서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하나님 명령을 전달하는 지휘관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편은 하나님의 명령이 전달되는 가정의 지휘관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권력도 마찬가집니다. 성경은 권세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 국가 권력도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지휘 계통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부모가 자녀만 못한 수도 있습니다. 부모는 배우지 못했어도 피땀 흘려 자식을 공부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부모가 자기만 못하다고 명령에 불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세상적으로는 잠깐 잘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휘 계통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똑똑해서 남편을 무시하고 가장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받기 힘듭니다. 하나님의 명령체계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목사가 장로들보다 덜 똑똑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명령에 불복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체계를 무시하고 은혜가 임하는 경우는 없기 때문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하고, 그가 전하는 말씀을 총사령관의 절대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만 받은 것이 아니라, 온 가족이 다 함께 받았습니다. 그래서 일시에 그 주변이 함께 구원을 받고, 함께 축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내 신앙이 고넬료와 같은 군대식 복종으로 일시에 큰 축복으로 이어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