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현 고가 철거 도중에 콘크리트 상판이 붕괴했고 4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MB 때 고가란 고가를 다 철거했어요. 내가 아는 한 하얏트 길과 아현 고가 둘 남았었는데 이번에 아현 고가 철거하는 중에 사고가 난 겁니다. 아내의 웨딩드레스를 이곳에서 맞췄고 만리동-충정로-굴레방 다리는 꼬마 에스더와 10년 넘게 들락거리던 곳인데 내 소중한 추억이 붕괴된 느낌입니다. 글쎄 무궁화 호가 1분 전, KTX가 5분 전에 통과했다는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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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사랑은 누구도 못 말립니다. 좋은 직업과 재산을 물려주려고 갖은 편법을 저지릅니다. 필자도 이런 세태의 영향을 받아 자녀 교육에 열을 올렸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진리라고 믿었을 땐 믿음을 상속하고 싶어서 에스더/예주로 이름을 지었는데, 지금은 남은 시간 종잣돈을 물려 주려는 게 버킷리스트입니다. 당신은 새끼들에게 무엇을 물려주고 싶은가요? 공주야! 야곱이 유산 상속을 얘기하고 있다. 나온 김에 아비도 유언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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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평생 기록한 온라인 카페를 너희에게 물려준다. <네이버>는 에스더에게, <다음>은 예주에게 준다. 아비가 갑자기 죽거나, 운신할 수 없을 때가 오거든 너희가 상속하기 바란다. 후대에도 가보로 물려주기를 기대한다. 지금 야곱은 늙어서 눈이 어둡다. 그는 눈이 어두운 이삭을 속여 자기 욕심을 채울 만큼 영혼의 눈도 어두웠던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는 요셉의 장자 므낫세가 아니라 차자 에브라임이 더 큰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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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치우친 마음을 따라서 결정하지 않았다. Book of Genesis 48장의 야곱은 죽음을 앞둔 노인입니다. 눈은 어두워졌고 몸은 쇠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영혼의 눈은 젊은 시절보다 더 밝아졌습니다. 젊은 야곱은 눈먼 아버지 Isaac를 속이며 장자의 복을 빼앗았지만, 늙은 야곱은 이제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계산보다 깊다는 사실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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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의 눈은 흐려졌으나 약속을 보는 눈은 오히려 선명해졌습니다. 본문의 긴장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Joseph은 장자 므낫세에게 오른손 축복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상식이고 질서이며 당시 세계의 법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손을 엇바꾸어 차자 에브라임 위에 오른손을 얹습니다. 인간의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를 따른 것입니다. 젊은 날 야곱은 자기 욕망으로 축복을 움켜쥐려 했지만, 늙은 야곱은 축복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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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내 뜻을 관철하는 힘이 아니라, 내 무지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신비에 맡기는 태도라는 것을 그는 평생의 실패 끝에 배운 것입니다. 이 장면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뒤집힌 선택”의 반복이기도 합니다. Isaac이 Ishmael보다, Jacob이 Esau보다, Joseph이 르우벤보다 앞섰듯, 이번에도 에브라임이 앞세워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동 권리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것은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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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꾸 혈통·능력·장자권·스펙으로 세상을 정리하려 하지만, 하나님은 늘 그 질서를 비틀어 약한 자와 늦은 자를 통해 당신의 길을 만드십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야곱이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유산입니다. 그는 당장 누릴 수 있는 현실을 준 것이 아닙니다. 세겜 땅은 아직 손에 없습니다. 400년 후에야 현실이 될 약속입니다. 즉 야곱은 “실체”보다 “약속”을 물려주고 있습니다. 눈앞의 애굽 문명에 뿌리내리지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본향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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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신앙의 유산은 부동산이나 권력이 아니라, “어디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성입니다. “아비가 평생 기록한 온라인 카페를 너희에게 물려준다.” 옛 족장들이 제단과 기둥을 세웠다면, 아비는 평생 포트폴리오 한 편 기록하며 시간을 견디고 살았다. 이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반백 년 동안 약속을 따라 흔들리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선 흔적이다. 살아보니 돈도 필요하고 나침판도 필요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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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는 유산 상속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아비가 유산을 상속해 줄 것이지만 살아보니 더 소중한 건 나침판이더라. Martin Heidegger 식으로 말하면 인간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다. 그래서 유언은 단순한 재산 분배가 아니라 “내 삶의 마지막 해석”이라고 본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기억은 과거의 저장이 아니라 현재를 움직이는 지속(durée)이다. 야곱은 죽기 직전에도 미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약속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그 약속이 현재를 살아가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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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야곱의 축복은 "애굽에서 잘 먹고 잘 살아라”가 아니라, “너희는 여기서 끝나는 존재가 아니다. 약속이 있다” 그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약속을 따라 달려온 나의 반백년은, 과연 행복이었는가? 상처 많고 험악한 세월이었지만, 하나님이 끝까지 나를 붙들고 계셨다고 고백할 수 있는가? 염병.
2026.5.28.thu.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