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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호 목사
주일설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누가복음 18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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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누가복음 18장 1~14절 까지에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두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두 가지 비유는 전부 기도에 대한 비유로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비유에서 말씀 하시는 기도는 평상시 드리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종말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간절히 소망하는 기도에 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임박한 시점이 되어도 사람들은 곧 마지막 날이 올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집을 사고 파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중에, 둘이 잠자다가 하나는 하늘로 데려가고 하나는 남을 것이며, 둘이 맺돌을 돌리다가 하나는 하늘로 데려가거 하나는 남을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는 정말 번쩍이는 빛과 같이 순식 간에 오게 될 것이며 혹은 밤중에 몰래 침입하는 도적같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시간에 급박하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늘 깨어 기도하라고 몇 번씩이나 경고하고 또 경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이 이르면 이를수록 온 세상이 온통 거짓과 불법이 극에 달할 것이고, 여기 저기서 가짜 선지자와 가짜 그리스도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쟁과 기근과 핍박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게 벌어질 겁니다. 믿음의 성도들은 극심한 환란과 핍박을 당할 것이며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보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종말의 시대에 맞이 하게 될 극심한 고난의 때에 성도들에게 닥치게 될 말할 수 없는 낙심과 절망을 이겨내고 믿음을 굳게 붙잡기 위해서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로 승리 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절을 읽어 드립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아멘.
예수님은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낙심하지 말아야 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먼저 말씀해 주셨습니다. 기도는 내 생활의 필요와 상황과 문제들을 해결해 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진짜 기도는 낙심의 마음을 물리치고 끝까지 믿음을 붙잡기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조차도 온갖 유혹과 시험에서 이겨 내시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죽음으로 몰아가는 최고 수준의 낙심과 절망의 마음을 물리치고 끝까지 인내하고 마침내 승리하시기 위해서 기도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기도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끝까지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유일한 무기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 항상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굳이 비유로 말씀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비유를 많이들어 설명 하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천국 복음에 합당한 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말씀을 알아 듣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정말 말씀의 참뜻과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고 강하게 붙잡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은 기도의 중요성 그리고 기도가 가지는 능력을 확실하게 강화 시켜 주시기 위함이 목적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수시로 찾아오는 낙심과 절망의 마음, 그리고 무기력과 떨어지는 자존감이 많은 분들이라면 오늘 말씀이 큰 능력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과 위로의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비유의 말씀이 나오는 2~4절을 읽어 드립니다.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재판장과 과부 두 사람이 나옵니다. 재판장은 엣날이나 지금이나 최고 권력자를 상징합니다. 이에 비교하여 과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약자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성경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객)을 무시하지 말고 잘 대접해 주라는 말씀이 자주 등장합니다. 구약 시대에 과부는 약자중의 약자였습니다.
어떤 사람을 평가 할 때 그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를 살펴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재판장과는 반대로 행하는 사람, 즉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경외하고)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겸손과 사랑의 사람)은 진짜 칭찬 받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재판장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이 재판장이 공정한 재판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이 재판장이라는 인물은, 권력의 자리를 허락하신 하늘의 큰 은혜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자, 그리고 배신의 길을 걷는 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재판장을 등장 시킨 겁니다.
이와는 다르게 과부는 인생 자체가 곤고한 지경에 이른 사람입니다. 낙심과 절망이 매일 매일의 일상이 된 사람입니다, 재물의 빈곤은 말할 것도 없고 주위 사람의 냉대와 무관심에 심한 상처를 받은 사람입니다. 아무도 과부에게 호의를 베풀거나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지 않았습니다.
이 과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게 기도하며 위로를 받는 방법 밖에 없었습니다. 과부에게 있어서 말을 걸어 볼만한 친구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기도하지 않으면 그 과부는 살아 숨쉬는 것조차 힘에 부칠 정도로 인생 자체가 버거웠습니다.
밀려오는 낙심과 절망은 과부를 죽음의 벼랑 끝으로 몰아 부첬고, 과부는 살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기도 했고, 죽을 만큼 소리치면서 기도했기에 과부는 죽지 않고 버텨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권력의 최상층에 있는 재판장과 사회의 최하층의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과부는 민원인이었고, 재판장은 민원 청구 내용을 해결해줄 사람이었습니다. 과부는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는 민원 내용을 들고 자주 재판장을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요즘 같은 공무원 사회라면 한 두 번도 아니고 계속 동일한 내용의 민원을 반복적으로 제기한다면, 그가 악성 민원자가 아닌 이상 민원을 묻어 두거니 처리를 지연 시키면 즉시 징계를 받을 겁니다.
재판장은 과부의 민원을 조속히 해결해 줄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회적 약자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었다면 다른 어떤 민원보다 더 적극적이고 친절하게 민원해결을 위해 나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장은 자주 찾아오는 과부의 민원을 귀찮아 했습니다. 모른체 했습니다. 의례 저러려니 하고 무시했습니다. 무대응으로 반응하면 제풀에 지쳐서 그만 두겠지라는 생각도 했을 겁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평소의 태도를 보아서 이 재판장은 짜증이 나서 민원내용은 거들떠 보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 예상이 맞다면 그 재판장은 돈을 많이 갖다주는 불법한 재판, 대접을 많이 받는 불의 재판에 관심이 집중 되어서 돈도 없고 행색은 초라한 과부의 민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을 겁니다.
진짜 나쁜 사람들은 약자에게 무언가를 공정하게 해 줄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안해 주거나, 엉뚱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정치인 집단에서 보이는 행태입니다. 통제 받지 않는 권력은 부패한다는 말은 정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 시대에도 복잡한 민원은 몇 년이나 해결이 안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아는 사람을 통하거나 뒷돈 거래가 이루어지는 민원은 초고속으로 진행되는 일들이 비일비재 합니다. 사람이 있고, 자리가 있고, 권력이 있는 한 이러한 행태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이런 불의한 재판장이 갑자기 심경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과부가 찾아와도 너무 자주 찾아왔고 이 과부의 민원이 많은 사람에게도 다 알려졌습니다. 그냥 무시하고 덮어 두기에는 너무 일이 커졌습니다. 재판장의 마음에는 이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나를 찾아와서 나를 번거롭게 할 것 같으니, 빨리 원한을 해결해 주는 것이 낫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재판장이 마음을 돌이킨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 했기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그럼 재판장이 사람을 상대하는 마음이 겸손해지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바뀌어서 인가요? 아닙니다.
그의 마음은 전혀 바꾸지 않았습니다. 단지 과부가 찾아오는 것이 귀찮아서 빨리 떨구어 버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주위의 시선이 자신을 나쁜 재판장으로 볼까봐서 빨리 해결해 주는 척 선심을 쓰려던 것이었습니다.
재판장과 과부, 이 두사람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재판장은 권력과 돈이 많습니다. 찾아오는 사람, 청탁하는 사람, 돈 주는 사람, 밥 사주는 사람 등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많았습니다. 그는 앉아만 있어도, 말 한마디만 하여도 세상이 다 내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사람을 무시하는 것, 약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에 대한 일말의 양심 자체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에게는 아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좋사오니, 여기가 좋사오니” 라고 배룰 두드리면서 있는 그대로가 자신의 삶을 평안하게 누리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에게도 아주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다 가졌다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기도의 필요성을 완전하게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기도 없는 삶을 사는 것이 그에게 최대 약점이었습니다. 그는 낙심과 절망의 마음이라는 것을 별로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부르짖으며 기도에 힘쓸 생각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육체와 인생은 평안으로 부요함으로 세상 부러울 것 없는 것 같았지만, 그의 영혼과 삶의 열매는 심하게 부패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재판장은 자신의 삶이 기도 없는 삶, 하나님 없는 삶, 멸망으로 가는 삶 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채 자연스럽게 흘러흘러 인생의 시간을 허비하고 즐기면서 심판대 앞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과부는 어떻습니까? 그는 재판장과는 정 반대의 삶을 살았지만 그에게 있어 최대의 강점은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이였습니다. 과부에게 있어서 기도는 곧 삶의 수단이자,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고, 아무 것도 없는 빈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그의 인생은 금대접에 쌓아진 기도의 분량, 기도의 예물이 가득쌓여 있었습니다.
느끼는 정도는 달랐지만 낙심과 절망은 재판장이나 과부 두 사람에게 다 찾아왔습니다. 재판장은 그 낙심과 절망을 권력과 돈으로 눌러버리고 마치 자기에게는 낙심 절망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이 살았습니다. 재판자의 삶의 현장은 멋지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기도 없음으로 자신의 영혼이 낙심과 절망을 넘어서 멸망으로 무너져 간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참으로 뷸쌍한 인생입니다.
반면에 과부는 견딜수 없는 배고픔과 외로움과 차별에서 오는 낙심과 절망이 숨통을 조여왔습니다. 매일, 매 순간이 그저 눈물과 상처 뿐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기도하지 않았다면 스스로 목숨을 버렸어도 수 백, 수천 번은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는 재판장을 찾아가 호소 했던 것처럼, 자주, 매일 같이, 매 순간 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함으로 육체의 낙심과 절망을 이겨 내고, 영혼이 날마다 소성케 되는 소망의 삶을 살았습니다. 기도 습관이 곧 과부의 삶 자체였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의 대부분은 재판장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많은 돈, 힘 있는 권력, 우러러 보는 높은 자리를 마다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기도를 삭제시켜 버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고, 사람을 무시하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부의 심정으로 살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낙심과 절망은 내 남은 인생의 시간속에서 무지막지하게 공격해 올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낙심과 절망을 이기기 위해 항상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낙심과 상처는 아물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절망과 포기의 마음이 뿌리 뽑힐 때까지 쥐고 흔들어 댈 겁니다.
오늘 내일 당장 굷어 죽을 걱정은 없으니 우리는 적어도 과부 보다는 덜 비참한 인생 아닙니까? 그러면 과부의 심정을 해아려서 나도 부르짖는 기도의 습관으로 살아야겠다는 각성이 일어나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순간 순간은 곧 죽은 시간 이라는 절막한 심정이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기도에 진심이 되는 마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실 때 , 전심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시고, 한 두 마디를 하더라도 정말 진심으로, 정말 진실한 마음으로, 성령이 주시는 감동에 의해 뚜렷하게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정말 진실한 믿음의 마음을 담아 나의 왕, 나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의 이름을 진지하게 부르시면서 기도를 마치십시오.
이렇게 진심을 드리는 기도를 과부와 같이 자주 하시고, 습관처럼 하시고, 즐겨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인생에서 낙심이 다 무엇이냐, 절망이 다 무엇이냐, 나에게는 원한도 없고, 저주도 없고, 불평도 없다, 나에게는 오직 감사와 찬양과 영광과 승리만 있을 뿐이다 라고 선포하는 담대한 기도의 용사가 될 줄로 믿습니다.
비유를 말씀 하신 예수님은 이 비유에 대해서 해석을 해 주시면서 우리에게 생각해 볼 질문 한 가지를 던지십니다. 6~8절을 읽어 드립니다.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이 한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재판장은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 재판장이 그렇게 해 주려고 한 것이 잘 한 일이라고 칭찬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은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았고, 여전히 사람을 무시하는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과부가 귀찮아서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런 불의한 재판장도 원한을 풀어 달라는 요구(기도)를 들어 주려고 했는데, 하물며 선하시고 공의로운 여호와 하나님이 부르짖는 자의 기도를 들어주지 아니하겠느냐? 그러한 기도에 오래 참으시겠느냐? 항상 기도하는데 집중해라, 그리하면 어떤 낙심, 어떤 절망도 다 풀어 주실 것을 믿으라고 하신 겁니다.
재판장은 여전히 불의 했지만, 자주 귀찮을 정도로 기도를 멈추지 않았던 과부가 마침내 싸움에서 이긴 겁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언제나 기도하는 자의 편에서 이기도록 결정해 주십니다. 그래서 기도는 항상 실패가 없고, 기도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이 있는 겁니다. 자,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의문을 제시합니다.
8절을 다시 읽어 드립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우리 주님은 시시 때때로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 하여 주셔서 우리 마음에 원한처럼 맺혀 있는 낙심, 절망, 아픔, 상처, 괴로움 들을 다 처리해 주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런데 마지막 말씀으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기도하여 낙심과 절망을 물리 치라고 하셨고, 그 말씀 대로 행하는 사람이 분명 있었을 터인데, 우리 주님이 다시 오는 그날에 세상에 그럴 만한 믿음이 있는 자(기도를 쉬지 않고 부르짖는 자)가 과연 남아 있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문자처럼 종말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단 한사람도 없는 시대가 오는 것일까요?
문자만으로 해석하면 참 당황 스런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신 말씀을 읽으면 마치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노아의 심판 때에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창 6:5-6)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 만큼 종말의 시대에는 믿음은 고사하고 죄와 악함만이 가득한 포악하고 추악한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세상에서 믿음을 살펴 볼만한 사람이 한 사람도 찾아 볼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쯤 재림의 주님이 오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서 “낙심하지 말도록 항상 기도하여라”라는 권면의 말씀과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는 탄식어린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 주시면서 서로 비교해 보도록, 그리고 판단하고 선택해 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믿음 없는 자들이 아니라 믿음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려고 나름대로 열심을 다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한탄하신 악과 죄가 가득한 종말의 때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항상 깨어 기도하며 낙심과 절망을 이기는 소망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우리 자신의 믿음을 지켜 가고 성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 시대는 항상 깨어 기도하기를 부르짖으며 자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과부와 같은 절박한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희귀한 세상입니다. 이 말은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경고하신 우리 주님이 곧 오실 재림과 시기와 때가 곧 임박했다는 증거입니다. 긴장감 있는 신앙, 내 믿음을 빼앗기지 않는 신앙, 그리고 죽기살기로 매달리며 부르지는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 재판장과 과부 비유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신앙의 긴장감을 새롭게 하고 수시로 우리 마음을 무너트리려 밀려 오는 낙심과 절망을 기꺼이 기도로 물리 칠 수 있는 은혜와 능력으로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죄와 악이 세상을 점점 지배하는 이 종말의 때에 우리에게는 너무다도 소중한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붙들고, 매달리고, 절대 놓치지 않도록 굳게 붙잡는 믿음 강화의 능력으로로 역사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과부의 심정으로 기도의 자리를 구별하여 만드시고 부르짖는 기도를 꼭 실천 하십시오. 절박한 기도, 부르짖는 기도는 결코 하나님이 외면 하시지 않습니다. 불의한 재판장과 같이 눈치와 요령으로 재빠르게 살아가려는 세상의 처세술은 다 끊어버리십시오. 그렇게 사는 사람들과도 단절하십시오. 그런 사람 만날 시간에 1초 라도 더 기도하는 것이 내가 살길입니다.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오늘 설교의 제목이, 내 인생의 심판자이신 우리 주님이 연약하고 불안한 내 믿음 위에 선포한 마지막 종말의 권면이라고 생각하시고, 오직 예수, 오직 기도, 오직 순종의 삶을 살아가시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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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는 권면의 말씀으로 저희들의 연약한 믿음을 일깨워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깨어 기도의 자리를 지켜 갇 룻 있도록 성령 하나님 동행 하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옵소서. 믿음의 주인이시오 우리를 온전케 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