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범지기님, 소금사막님, 레도님께서 보만식계를 하고 오셨다.
나도 그때 함께 가려고 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겨 부득이 함께하지 못하고 오늘에야 다녀왔다.
범지기님을 비롯하여 선답자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언제: 2020. 5. 4.(월) 03:41 ~ 21:56
누구랑: 혼자서
어디를: 보문산 - 만인산 - 식장산 - 계족산 56km
밤이라 조용~
차를 법동소류지에 두고 콜택시로 보문오거리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출발 후 1시간. 새벽인데 벌써 땀이 많이 난다. 바람막이를 벗어야하나?
출발 후 2시간. 주변에 안개가 짙다. 오면서 랜턴을 껐더니 이동이 한결 편하다.
오도산 바로 앞. 봉수대가 있었을 법하다. 뾰족한 것이. 오도산이라? 여기쯤 오면 도를 깨쳐야 한다는디...
요기까지 갈 때 이정표가 계속 '금동'이라 되어 있으니 지도 없는 분들은 잘 따라가셔야 알바를 안 합니다.
떡갈봉이란 말을 첨에 들었을 때부터 어쩐지 힘들 것 같더라니... 출발 후 3시간 반.
힘들 땐 앞만 보고 가지 말고 옆도 보고 위도 올려다보면서... 제발 뛰지좀 말고. 나대지도 말고.
아침 햇살에 그 얼마나 싱그러우냐!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른쪽(동쪽)은 침엽수, 왼쪽(서쪽)은 활엽수. 재밌더군요.
요렇게 키 큰 나무들도 있고. 보만식계 전체 구간에서 조망이 확 트인 곳은 몇 군데 없으니까 잘 감안해서 주변과 친해지자구요. 오늘따라 아침에 안개가 자욱하다가 햇살이 드니 한결 청랑하다. 어제 내린 비로 더욱 그러한가?
철쭉도 이제 서서히 져 가고
주변을 둘러보며 걷다가 어느새 안산에 도착. 출발 후 다섯 시간.
안산에서 내려서면 먹치. 원래 먹치가 뭔 뜻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요즘 이 코스를 즐기는 분들이 애용하는 먹거리 보급 장소. 원래는 얌얌님이 요기다 매립을 해 주겠다는 걸 사양하고, 나아가 닭재 보급만 부탁했었는데, 그것도 철수를 간곡히 당부. 그냥 갈 수 있겠다 싶어서.
그런데 내 생각에는 먹치에서 먹거리를 보충해서 짊어지고는 여기 만인산 오르기가 대단히, 몹시, 심하게 힘들 듯. 출발 후 6시간. 날이 더운 탓이었는지 난 다행히 배낭이 여기쯤에 오면서 가벼워져 발걸음도 아직까진 룰루랄라~~ 대신에 속도는 3.4를 끈질지게 고수. 한 걸음도 뛰진 말자구. 나로서는 먼 거리잖아, 하면서.
내가 이번 보만식계를 하면서 가장 신경을 집중한 것이 산행 출발시점 고르기였다. 여기까지 오면서 03시 40분을 선택한 건 '신의 한수'였다고 자부했는데... 배낭이 가벼워진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했는데... 분수도 시원하게 물을 뿜는데... 누가 여기 휴게소가 9시면 문을 연다는 그릇된 정보(범지기님 팀이 얘기해주신 건 아니니 오해 마시고)를 흘리셨나? ㅋㅋ 열긴 열지. 10시 35분에 도착했는데 손님은 11시 반부터 받는다네요. 주변 산책이나 즐기다 오면 좋을 거 같다네요. 그럴 걸 그랬나?
만수산휴게소에서 위로 올라가 보니 호떡을 파네. 이게 웬떡이냐? 호떡이라니께. 하지만... 여기도 손님 안 받아유. 헐 ~~! 그럼 어쩌지? 새벽 2시 반에 휴게소에서 국밥 먹고 지금껏 여기만 믿고 달려왔는디... 여긴 민가도 하나 없는디...
휴게소를 나와 까칠하기 짝이 없는 정기봉을 올라오는데 발이 왜 그렇게 무겁던지... 여기서 정기는 올라오기 전에 본 태조대왕 태실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가 모르겄네. 밥을 못 먹었으니 정기나 먹고 가야지, 싶어 벤치에 벌러덩 입 벌리고 누웠더니 정오의 햇살만 가득. 정기를 확실히 받긴 받은 듯.
마달령이라고도 하고, 이정표에는 머들령이라고 적혔던데... 이때! 얌얌님이 카톡으로, 어디 쯤이세요? 얘기 끝에 점심 못 먹었단 말에, 그럼 닭재로 갈게요. 햐~~ 이 굶주린 영혼을 구원하러 오는구나. 닭재 2시반에서 3시쯤 될까요? 하기에, 요기서 4키로니께 한 시간 10분쯤 걸리겄지, 답신. 여기까지 출발 후 9시간 20분.
마달령에서 닭재를 가려면 넘어야하는 봉우리 두 개 중 하나. 어째 팻말이 이 모양인가? 요기쯤에서 얌얌님에게 오렌지 읍서유? 했드니 오렌지는 읍고 바나나 있슈. 시장 보려고 했다가 보급 철수하란 말에 관두고 집에 있는 거 싸온다고 한다.
이름이 예사롭지 않은. 출발 후 10시간 10분.
그대를 만나기 백 미터 전.
닭재. 14시 10분 도착. 구원의 손.
잠깐! 사진 한 장만 찍고. 여기서 바나나 두 개를 한 입에 베어물었더니 천하에 부러울 게 없네. 얼음물도 두 병 챙기고
서둘러 총총히...
까막눈이 뭘 알겠나만, 저 능선이 내가 오늘 보문산서부터 주욱 한 바퀴 타고 온 건가? 조망이 처음으로 트인 듯.
뒤로 보이는 것이 만인산이 아닌가 싶다. 명덕봉 올라가면 조망이 좀더 트일까? 하며 비탈을 숨가쁘게 기어오르고
하지만 여전히 조망은 없고, 여기 봉우리 이름들에 물씬 배어있는 유교식 이름들... 보문, 지봉, 정기, 명지, 명덕 등. 우암 송시열의 학풍 영향인가? 트랭글과 오룩스를 번갈아 봐가며 이제 드디어 식장산이구나, 하며 능선을 살펴보니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여기서 5.5키로니까 원을 크게 돌겠구나, 싶다.
생각처럼 큰 원을 그리며 돌다가 오늘 산행 중 몇 안 되는 조망터도 지나고. 출발 후 12시간도 지나
저어기 올려다 보이는구먼. 지금까지 봉우리들이 별루 힘도 못쓰고 정상을 내줘 왔으니 이제 웬만하면 식장산도 좀 그러시지. 속으로 요렇게 시건방을 떨면서 ~~
산줄기가 둘러쳐져 있으니 깊은 골짜기가 나고, 비탈이 급하니 자연스레 바람이 시원하다. 이 시원한 바람이 아니었으면 오늘 산행에서 나는 고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생큐, 바람.
식장산 아래. 오늘 최고의 조망터. 산줄기의 근육이 보인다.
식장산을 그대로 치고 굳이 끝까지 올라가 봤더니 ... 정면에 이런게 가로막고 있네. 비켜!
소리쳐봐야 안 비키니 내가 돌아가는 수밖에. 왼쪽으로 돌아가자 거기에 정상석이 있다. 저기보다는 낮을 거 같은디... 산 이름에 밥 식자가 들어있는 산들이 몇 있다. 예전에 배고픈 이 땅의 민중들에게 산은 먹거리를 아낌없이 내어주었을 것이고, 지금도 산이 그런 사람들을 품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름의 산 아래에 살면 실제로 얻을 게 많다. 출발 후 13시간.
식장산을 돌아나오며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흘낏 뒤돌아보니 안내표지가 있더군요.
식장산을 내려오자 요렇게 잘 생긴 조망터가 있다. 대전의 야경을 관조하기에 그만이겠다.
그래서 나도 올라가 보니 대청호 방면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세천유원지까지가 4.5km나 되는데 '주변 안내도'가 있는 표지판 바로 옆에 산으로 해서 가는 지름길이 있으니 잘 찾아야 한다. 산길이 포장도로와 만나고 나서도 2km 이상은 걸어내려가야 한다.
드디어 세천유원지. 15시간만에 밥이란 걸 먹어보는구나.
세천에서 마지막 구간을 찾아 올라가는 길에 장승마을도 지나고
갈고개도 지나고 ...
저녁 7시가 지나 날이 저물기 시작한다. 헤드랜턴을 밝히니 날벌레들이 날아든다. 그래도 시내는 평화로워 보인다.
이 코스가 대전 근교에 나 있고 대전 둘레길이다 보니 시내에 가까울수록 여러 가지 편의 시설들이 있고 시민들이 운동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기도 하다. 시골에 사는 나로서는 부러운 장면이다.
고봉산. 대전 둘레산에도 유명한 계족산성이나 보문산성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성터가 많이 남아있다. 성의 유래는 백제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세천에서 5키로 지점, 여기서 계족산까지는 4키로. 이 부분에서 그동안 아껴두었던 힘을 쓰면서 빠르게 이동하려고 했다. 그러나 야간이어서 길을 찾아야 하는(뻔히 나 있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어려움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세천에서 계족산 사이에서 트랭글이 세 번이나 꺼졌다. 짜아증. 더 깊은 산을 다닐 때에도 멀쩡하던 놈이.
갈 길은 바빠도 대전의 야경 한 장은 간직하고 가야지. 출발 후 16시간.
드디어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 계족산에 올라섰다. 계족산 오르막 마지막 구간이 내 생각과 달리 제법 까칠했다.
차를 둔 법동소류지로 내려가려고 길을 찾는데 에이스 클럽의 소전님이 올라오신다고 한다. 트랭글을 보니 길이 여러 갈래여서 서로 엇갈리지 않으려면 여기서 기다리는 게 낫겠다. 15분 이상 서성거렸다.
날머리로 나와 주신 소전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첫댓글 최곱니다~
얌얌님 아니셨음 못해낼 위기였어요. 갖고간 게 고작 물 4병(2L)에 쵸코바 3개 뿐이었는데... 구원의 바나나와 얼음물. 잊지 못할 것 같네요.
완주축하드리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새벽에 출발할 생각! 아주 좋았어요. ^^
와! 대단하십니다. 부럽기도하고.. 수고많으셨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엊그제 다녀왔는데 벌써 남에 일 같어유. 주말 대간에서 뵈유~~
와!!
고생하셨습니다-^^
완주를 축하드립니다~
네, 저도유. ~~
걸으면서 하아 ~ 사막님께서 여길 어떻게 그리 깔끔허게 넘으셨지 하고 여러번 감탄.
박수를 보내유.
고생 하셨습니다.
수도권 5산 종주 보다 거리는 더 머네요~~~난이도는 5산이 높겠지만...
저도 장거리 산행의 묘미를 맘껏 누렸었는데...족막염이 도져서
방콕하느라..근력도 많이 저하된 듯 하고...
예전에 지리산 태극종주를 언제 했었는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암튼 늘 건강하시고요 행복하세요~~ * ^^ *
얼른 회복하셔서 산행을 다시 즐기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