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씨 새끼트라!
운보 김기창(1914~2001)은 화
가로서도 알려져 있지만 청각장
애로 인한 고통을 이겨낸 의지의 인물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7살 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
열로 청신경이 마비돼 후천성 청
각장애인이 되었다.
어려서 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
을 보여 이당 김은호 화백에게 그림을 배우고, 1931년 조선미
술 전람회에서 '판상도무(板上跳舞)'라는 작품으로 입선하자 귀
먹고 말못하는 18살 소년이 입선
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해방 후 동료 화가인 우향 박래현
과 결혼한 뒤부터 그의 삶과 예술
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에게서 입으로 말하는
'口話法'을 배우기 시작했고, 우
향의 작품에서도 크게 영향을 받
았다.
야생마의 움직임이 격정적인 구
도로 나타나는 대작 '군마도'와 전통 가면극을 작품화한 '탈춤' 등의 연작으로 힘찬 운필을 구사
한 것도 이때였다. 이밖에 1천여 마리의 참새 떼가 양편에서 날아
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담은 '군작'은 운보의 스케일을 유감없
이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러다가 평생의 반려였던 우향
이 1976년에 타계하자 말할 수 없는 실의에 빠진 그는 미친듯이 그림을 그리며 충북 청원에 운보
의 집을 세우고 그 옆에 운향미술
관과 도예전시관 그리고 운보공
방 등을 조성했다.
그 무렵 운보화백과 청송교도소
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다.
재소자 교화를 위해 30여년간 전
국을 두루 다니며 사형수의 대부
가 된 삼중 스님이란 분이 있었는
데, 어느날 청송교도소를 찾아간 스님에게 교도소장이 재소자들
의 정서를 순화시키려는 뜻에서 유명화가들, 그 중에서도 운보화
백의 그림을 꼭 기부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 뜻에 공감한 삼중 스님은 전혀 만난 적이 없었던 운보화백의 아
들에게 전화를 걸어 그림을 기부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며칠 뒤 기부하겠다는 전
화가 왔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운
보화백 자신이 직접 청송교도소
로 그림을 가지고 가겠다는 것이
었다.
유명한 화가들이 기부한 그림을
기념하는 행사는 재소자들 수백
명이 도열한 청송교도소 앞마당
에서 열렸다.
간단한 식순에 맞춰 삼중 스님이 금강경 법문을 끝내고 자리에 돌
아오자 옆에 앉은 운보화백이 ‘나
또 하마띠 타고 시타.(나도 한마
디 하고 싶다)’고 청했다.
행사 식순에 없던 갑작스런 그의 제안에 삼중 스님은 그의 손을 잡
고 연단에 올라갔다.
그런데 운보화백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가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
다.
“벼씨 새끼트라!(병신새끼들아!)”
1981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설립된 청송교도소는 ‘빠삐용 요
새’라는 별칭처럼 고질적인 전과
자와 흉악한 범죄자, 그리고 억울
하게 잡혀 온 시국사범들이 섞여 있어서 그들이 뿜어 내는 드센 기
운에 보통 사람들은 잔뜩 겁을 먹
고 주눅이 드는 곳이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운보는 오히
려 호통을 쳐가면서 강연을 이어
나갔다.
"병신은 나다.
내가 벙어리이니 내가 병신 머저
리다.
그렇지만 나는 몸은 병신이지만 정신만은 건강하다.
그런데 당신들은 몸은 건강하나 정신은 병신이다.
그래서 내가 욕을 한 것이다.
나는 몸은 병신이지만 뼈를 깎는 노력으로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나는 타고난 재주나 조건을 믿지 않았다.
내 재주를 갈고 닦아서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했다.
그런데 왜 건강한 몸으로 이런 무
시무시한 교도소에 들어와 이 지
옥에서 죽을 고생들을 하느냐?"
그런데 이상하게도 모두들 고개
를 숙이더니 숙연하게 듣고 있는 게 아닌가?
알아 듣기 쉽지 않았지만 피를 토
하듯 터져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
는 재소자들과 교도관, 그리고 행
사에 참가한 사람들 모두에게 깊
은 울림을 주었다.
행사를 끝낸 후 운보화백은 자신
과 같은 처지인 벙어리 재소자를 만나 보겠다고 우겨서 청각장애 재소자의 감방에 들어가게 되었
다.
감방 안에 들어 선 운보화백은 벙
어리 재소자를 꽉 껴안더니 볼을 비비면서 울었다.
‘병신된 것도 서러운데 왜 이런
생지옥에서 이리 서럽게 살고 있
느냐?’
울음 속에 전혀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서로 주고받았다.
볼을 서로 비비면서 우는 통에 삼
중스님의 눈에서도 눈물이 저절
로 나왔다.
통곡으로 변해 서로 엉켜진 몸 타
래를 풀어내는 데 한참 걸렸다.
말보다 뜨거운 가슴과 몸으로 진
실을 전달했던 운보화백. 그가 청
송교도소 앞마당에서 내지른 ‘벼
씨 새끼트라!’라는 호통소리가 가
슴을 찡하게 한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갇혀서 살았
던 우리들의 행실을 보면 운보화
백은 뭐라고 호통을 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