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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이끄시는 만남
행 10:23b-33
23b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30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행 10:23-33 / … 욥바에 있는 신도 몇 사람도 동행하였다. 24) 이튿날 그들이 가이사랴에 도착해 보니 고넬료는 친척과 친구들을 불러 놓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25) 베드로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엎드려 절을 하였다. 26) 베드로가 그것을 만류하며 말하였다. `일어서시오. 나도 역시 사람이오.' 27) 고넬료와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눈 다음 사람들이 모인 방으로 건너간 28) 베드로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도 아시는 대로 내가 이렇게 이방인의 집에 들어오는 것은 유대인의 율법에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는 내게 어떤 사람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환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29) 그래서 여러분이 나를 부르러 보냈을 때 나는 거절하지 않고 이렇게 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무슨 일로 나를 오라고 하셨습니까?' 30) 고넬료가 대답하였다. `나흘 전의 일입니다. 제가 이맘때쯤 오후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제 앞에 눈부시게 빛나는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31) 말하였습니다. `고넬료야, 하나님께서 네 기도를 들어주셨고 네 자선을 기억하고 계시다. 32) 이제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바닷가에 사는 피혁공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는 시몬 베드로를 청하여라.' 33) 그래서 제가 즉시 사람을 보냈던 것인데 선생님께서 잘 와주셨습니다. 지금 저희는 주님 앞에 앉아 주께서 선생님을 통해 저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유대인인 베드로는 이방인인 고넬료를 만나기를 꺼려하지만 성령에 순종하여 가이사랴로 들어갔고, 이방인인 고넬료와 친척,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준비로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 베드로를 대하며 말씀을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을 만나다(23b-29) 베드로와 함께 한 일행은 그 다음날 아침 출발해 둘째날 아침에 가이사랴로 들어갑니다. 이 시간까지 고넬료는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베드로가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도착하자 고넬료는 그의 발 앞에 엎드리어 예를 표합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당시 지배국가인 유대인 베드로에게 엎드리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도 사람이라 말하며 일으켜 세우지만, 여전한 자신의 속내를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직 이방인에 대한 마음의 거리낌이 있었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온 것 조차도 큰 짐으로 여기고 있음을 고넬료에게 밝힙니다. 이런 그가 이곳에 온 것은 그를 향하신 성령님의 강권 때문이었습니다.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30-33) 이런 마음의 짐을 지고 서 있는 베드로에게 고넬료는 자신에게 보여주신 환상과 성령의 명령을 이야기합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여 사람을 보냈고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보내주셨음을 고백합니다. 그 후 이어지는 고넬료의 고백은 말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어찌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우선, 고넬료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의 원어적 의미는 단순히 ‘있다’가 아니라, ‘가까이 있다’, ‘흠모하며 있다’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고자하는 고넬료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입니다. 고넬료는 지금 베드로를 통해서 선포되는 말씀을 취사선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어찌하든지 모든 말씀을 다 들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 하나님 앞에”라는 표현도 동일합니다. 모든 말씀을 다 듣겠다는 신앙의 고백을 넘어 우리 모두가 순종하겠다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말씀 앞에 서 있는 나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적용: 당신 선입견을 넘어서 성령의 이끄심 앞에 서 있음을 고백하는 베드로의 고백을 보며 무엇을 느낍니까? 오늘 당신에게 주시는 말씀 앞에 당신은 어떠한 태도로 서 있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연주가라도 충분한 연습이 이뤄지기 전에는 무대에 올라가는 일이 없습니다. 연주하다가 틀리게 되면 낭패를 맛보기 때문입니다. 연주자뿐만 아니라 신앙과 인생에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준비된 자만이 인생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맛볼 수 있게 됩니다. 준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복을 우리의 복으로 바꾸는 비결입니다.
호크마 주석
=====10:23
베드로가 불러들여 - 방문객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후 그들을 집 안으로 영접한 베드로의 행위는 그 방문객들이 이방인이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의를 지닌다. 즉 베드로가 그들의 말을 신뢰하였다는 뜻과 함께 이방인을 한형제로서 용납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유대인인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시몬의 집으로 영접한 것은 아직 이방인과의접촉이 신학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 비추어 보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아마 베드로는 그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자신이 본 환상의 의미를 깨달았으므로 그렇게 행동한것 같다. 유숙하게 하니라 -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집으로 불러들이고 함께 잠을 자게 한다는 사실은 당시에 매우 반 유대교적 행위로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11:1-3). 그럼에도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베드로는 자신이 경험한 환상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게되어 이제 무할례자인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렸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베드로가그들을 유숙하게 한 것은 그들이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으므로 다시 가이사랴까지가기 위해서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아무튼본절의 핵심은 이방인을 전적으로 용납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다. 욥바 두어 형제 - '두어'로 번역된 부정대명사 '티네스'(* )는 확정되지않고 또한 많지도 않은 수효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런데 11:12에서 여섯 명이 베드로와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갔다고 언급되어 있으므로 본절에서 언급된 형제는 세명이분명하다. 이 표현상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해결할 수 있다. 누가는 본절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기록하고, 11:12은 베드로의 고백의 입장에서 기록되었으므로 베드로의고백 부분에서는 정확한 숫자가 언급되어 그 고백의 사실성을 드러낸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누가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므로 정확한 숫자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한편 욥바에서 세 사람이 베드로를 동행하게 된 이유에 대해 본문에서 명백하게 언급되지 않고 있다. 다만 다음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1) 이방인에게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를 그 세사람이 목격하고 증인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함 (2) 아직도 고넬료가보낸 사람의 신분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베드로가 그들과 동행하게 되어혹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임.
=====10: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 본 구절에서 구체적 도착 시간은 언급되지 않고 욥바로부터 출발한지 이특째 되어가이사랴에 도착했다고 언급되었다. 그런데 30절에 따르면 고넬료가 환상을 체험했던그때와 어느 정도 일치함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오후 3시를 전후해서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것이다.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 이는 고넬료가 환상을 굳게 믿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며 동시에 형제 사랑과 신앙에 대한 강한 열정을 보여준다. 만약 그에게 그 사랑과열정이 없었다면 자기 가족만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친족과 친구들까지 초청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했으며 함께 구원의은혜에 동참하고자 원했다.
=====10:25
베드로가 들어올 때 - 고넬료가 베드로를 맞이한 장소가 고넬료의 집인지 가이사랴로 들어가는 어귀인지구분할 수 없다. 어떤 사본(D)에서는 베드로가 도시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24절의 정황으로 보아 집으로 들어올 때라고 보는 것이 정황으로 보아 집으로 들어올 때라고 보는 것이 문맥상 적절하다(Haenchen).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 고넬료가 베드로를 마중할 때 보여준 자세는 마치 신적인 존재나 로마 황제를 대하는 듯하였다. 이는 당시에 사도들이 지녔던 권위를 보여주며 또한 고넬료의 겸손하고 순수한 성품을 나타낸다. 특히 고넬료가 베드로를 대할 때신적인 권위 앞에서는 것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베드로를 환상 중에 경험한천사의 말과 관계된 사람으로서 특별히 선택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을것이다(5절 참조).
=====10:26
나도 사람이라 - 고넬료의 행위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신적 권위를 사양하며 동등한 사람임을 전제하고 있다. 이 같은 베드로의 행위는 겸손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있으나 한편으로는 사도와 일반 성도는 하나님 앞에 동등한 사람으로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있을 수 없는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고넬료가 로마 군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경배 행위가 로마인들의 황제 숭배와 관련된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간에 대한 신적인 숭배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부정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10: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 누가는 이표현을 통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상당히 호의적이었음을 강조하려 했을것이다. 즉 베드로가 이방인에 대해 지니고 있던 배타적 우월감을 버리고 15절에서 지시한 주의 말씀을 따라 이방인을 한 형제로 용납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편 이 같은 베드로의 행위는, 17절에서 베드로가 자신의 경혐한 환상의 의미에 대해 고심했지만 지금은 그 환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0:28
위법인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 고넬료 집 안에 모여 있는 고넬료의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24절)을 향해 베드로는자신의 방문에 대한 정당성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유대인들의 전통적 관습을 언급하고 있다. 즉 신 7:3, 4규정을 확대 해석하여 모든 이방인과의 교제를 죄악시하고 이방인들이 만들어 낸 물건이나 식품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대했던 유대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베드로 자신의 고넬료집 방문은 유대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위였다. 이러한 사실을 고넬료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베드로는 자신의 행위가 일종의모험임을 강조했다.
=====10:29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 여기서 언급된 '사양치 아니하고'라는 단어 '아난티르레토스'(*)는 직역하면 '반대하는 말을 할 수 없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강조해 준다.
=====10:30
나흘 전 이맘때까지 - 고넬료가 환상을 체험한 날로부터(3절)나흘이 지났음을 밝히고 있는데, 고넬료의하인들이 이틀만에 욥바에 도착하였고(9절) 욥바서 하루를 묵고(23절)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이틀 걸려 도착하였으므로 3박 4일이 지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흘'이란 표현은 타당하다.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 본 구절은 3, 4절에 언급된 천사에 대한 묘사로 70인역 자료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Haenchen). 희고 빛난 옷은 거룩한 천사의 옷으로 자주 묘사된다(1:10;마 28:3;막 16:5;눅 24:4).
=====10:31
들으시고...기억하셨으니 - 4절과 내용상 같다. 다만 4절보다 간략하게 진술되고 있을 뿐이다. 용어상의 차이로 4절에서는 '상달하여'가 사용되었으나 본절에서는 '들으시고'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미상 아무런 차이는 없다.
=====10:32
베드로...우거하느니라 - 이 부분의 헬라어 본문은 세 가지로 읽혀지고 있다. (1) '바닷가'란 말이 생략되었다. (2)'바닷가' 다음에 '와서 너에게 말할 자'(*, 호스파라게노메노스 랄레세이 소이)가 첨가되어 있다. (3) 개역성경과 같은 독법을취한다. 여기서 대부분의 사본들은 2)의 독법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청하라'는 말속에 (2)의 첨가된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누가는 앞의 사건을 간략하게 묘사하고 있으므로 (2)의 독법은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3)의 독법이 가장 무난하다.
=====10:33
하나님 앞에 - 본 구절이 사본에 따라 조금씩 달리 표현되어 있다. (1) '하나님 앞에, 대부분의 사본이 이 독법을 취한다. (2) '주님 앞에', 몇몇 소문자 사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3) '당신 앞에', 서방 사본과 역본이 이 독법을 따른다. (3)의 독법에 따르면 베드로의 권위가 강조되지만 (1)과 (2)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세를 지닌 고넬료의 모습이 강조된다. 특히 '하나님 앞에'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여호와 앞에서'와 함께 자주 사용되어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순종과 경건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구절에서는 '하나님 앞에'가 가장 무난하다.
< 설 교 >
고넬료의 용기
행 10:23-29, 44-48 / 이윤재 목사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중의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용기입니다. 이번 런던에서 열린 올림픽을 보면서 메달 하나 하나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중에 유도 선수 송대남 선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90킬로 남자 결승에서 금메달을 땃는 데 현재 나이가 35살입니다. 35살이면 운동선수로서는 나이가 많은 데 그가 올림픽에 나온 사연이 있습니다. 원래 그는 80킬로 선수였답니다. 그런데 갑자기 80킬로급에 이번에 금메달을 딴 김재범 선수가 나타났습니다. 강력한 우승 후보 김재범 선수가 나오니까 송대남은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운동선수로 평생을 꿈꿔어온 올림픽입니다. 그래서 체급을 10킬로 더 올렸습니다. 남들은 몸무게를 줄이며 운동하는 데 송대남은 몸무게를 늘리면서 까지 힘들게 운동했습니다. 결국 결승 종료 10초를 앞두고 뒤축감아치기로 금메달을 땃습니다(영상).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중 누가 쉽게 시상대까지 올라갔겠습니까? 수없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을 이겨내고 거기 간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용기입니다.
올림픽 이야기 할 때마다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습니다.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때 있었던 장면입니다. 400미터 달리기를 하는 데 150미터 지점에서 한 선수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함께 보실까요?(영상) 주인공의 이름은 데렉입니다. 그가 갑자기 허벅지 근육 파열로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을 딛고 일어섰으니 그를 일으킨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함께 그가 가진 불굴의 용기였습니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뛰어넘는 용기, 그 용기가 그날 금메달 딴 선수보다 그에게 더 많은 박수를 받게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대로 주저 앉고 싶은 순간들이 있습니까? 그때 어떻게 합니까?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용기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고넬료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대로 고넬료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유일한 로마군 장교입니다. 사도행전은 크게 두 인물 이야기를 다룹니다. 1-9장까지 베드로, 11-28장 바울입니다. 그 한 가운데 10장에 고넬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 이전에 로마로 보내어 로마를 복음화하기 위해 준비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도착해서 만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고넬료가 전도한 것입니다. 행10장은 그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당연하다 여기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함께 인간의 철저한 순종과 믿음이 따랐습니다. 한 마디로 용기가 따랐습니다. 용기는 두 사람에게 다 필요했습니다. 고넬료에게도 필요했고 베드로에게도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에게 어떤 용기를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어떤 용기를 주셨습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용기를 주십니까? 말씀을 통해 피곤하고 지친 이 여름에 하늘의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용기
고벨료에게 하나님이 먼저 주신 용기는 하나님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지난 주에 본대로 고넬료는 로마의 군대장교였습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대조직의 기본인 100명을 다스린 장교로, 요즘 말로 하면 소대장입니다.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다시 행10:2을 볼까요? 행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로마 장교인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자신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온 식구와 함께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뿐 아니라 백성들을 구제하는 긍휼의 마음도 가졌습니다. 사실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믿기만 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을 실천했습니다. 더구나 그가 구제한 백성은 피정복국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는 구제하려고 이스라엘에 온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지배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가 구제하지 않는다고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떤 유대인도 로마 장교로부터 구제받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구제했습니다.
구제할 뿐만 아니라 기도했습니다. 그나마 항상 기도했습니다. 어쩌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기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고넬료는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요즘 어떤 교인이 “목사님, 은퇴하고 나니 남는 것이 시간밖에 없어요” 하고 열심히 교회 나옵니다. 은퇴하고 시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아직 현역입니다. 그렇게 매일 새벽기도, 매주 심야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고넬료는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그는 로마사람입니다. 로마사람은 로마정부의 지시를 받고 로마종교를 믿습니다. 그는 말하자면 공인입니다. 그가 혹 이스라엘 종교를 믿고 싶어도 남들 눈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사실 그에게는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로마 장교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돈이 나옵니까? 보너스가 나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계급이 올라갑니까? 살림살이가 나아집니까? 자신의 미래 성공을 무엇이 유익합니까? 그런데도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하나님 믿으라고 강요한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많은 유대인도 로마장교에게 하나님 믿기를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강요해야 했다면 로마장교가 로마 종교를 믿으라고 유대인들에게 강요했을 것입니다. 고넬료의 믿음은 전혀 자발적인 것이고 자신이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보고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철저히 믿은 것도 그가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지만 “이왕 하나님 믿을 바에는 잘 믿어야겠다“ 그것도 그가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첫 번째 용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선택하는 용기입니다. 억지로 믿기를 강요당하는 선택이 아니라 스스로 “이것은 옳은 일이야”하며 결단하는 믿음입니다. 신앙은 선택이라는 사실을 믿습니까? 어쩌다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이것이 옳다“ 믿어야 진짜임을 믿습니까?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은 반드시 자라서 스스로 선택해야 함을 아십니까? 하나님믿는 것도 선택이지만 하나님 잘 믿는 것도 선택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지금 내가 잘못 믿고 있다면 누가 내게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기를 선택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을 아십니까? 이 말은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믿었어도 이 시간 잘 믿기로 선택하면 앞으로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제가 성경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은 후 아담이 첫 번째로 한 일이 무엇인가 하고 보았더니 선택하는 일입니다. 창2:15-17 사이에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두 나무를 지으셨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과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했습니다. 창2:17,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많은 선택할 기회를 주신 가운데 한 가지만 선택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택할 수 있는 좋은 나무는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는 수없는 좋은 선택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해도 하나님은 다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극은 이것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좋은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확률상 그렇게 되기도 어려웠습니다. 말하자면 사과상자에 수 백개의 사과가 있고 그 중에 썩은 사과 하나가 있었는 데 하필 그 많은 사과중에 썩은 사과를 선택한 것입니다. 수많은 좋은 선택의 은혜앞에 한 가지 안 좋은 것을 선택한 아담, 그래서 아담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그것이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성경은 선택의 책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은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있습니다. 그는 여리고의 창녀였습니다. 가난과 운명주의와 패배주의가 그를 눌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스라엘 정탐꾼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숨겨 주어야 하느냐? 신고해야 하느냐? 그는 숨겨주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때 그가 선택한 것은 정탐꾼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수2:11절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아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그는 하늘에도 계시고 땅에도 계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홍해바다를 가르고 나온 능력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선택하자 하나님도 그를 선택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유대인 살몬과 결혼하게 되고 그 몸에서 보아스가 태어나고 보아스는 룻과 결혼해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이스라엘 왕 다윗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결정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선택했습니까? 부모님이 믿으니까 나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선택했습니까? 아내가 가자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나온 것입니까? 스스로 온 것입니까? 선택의 원리가 세 가지입니다. 여호수아의 말입니다. 수24:15,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아를 섬기겠노라“. 첫째 예배할 자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여기서 ”섬기다“는 ”예배하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종교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배자“로 선택해야 합니다. 둘째 ”오늘“ 선택해야 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중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시간은 오늘밖에 없습니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불확실하며 현재만 우리 시간입니다. 오늘 선택해야 합니다. 셋째는 내 가족과 함께 선택해야 합니다. 나 혼자로는 부족합니다. ”나와 내 가족이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합니다. 평생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그 용기가 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앞에 엎드리는 용기
고넬료는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선택했지만 누구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할지는 몰랐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기도중에 말씀하셨습니다. “욥바에 사람을 보내 베드로를 청하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다“. 그래서 세 사람을 급히 보냈습니다. 그래서 종들은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 약 60킬로를 밤새워 걸었습니다. 그리고 무두장이 시몬의 집 지붕에서 기도하고 있는 베드로를 발견하고 그를 모시고 다시 가이사랴로 왔습니다. 그때 고넬료가 어떻게 했는지 보겠습니다. 23절에서 25절입니다. 행10:23-25,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여러분, 고넬료의 모습을 보면 기이하지 않습니까? 고넬료는 이스라엘을 다스리려고 온 로마의 군인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볼 때 대단하지만 사실 로마입장에서 보면 피식민지의 한 종교인에 지나지 않지 않습니까? 세계를 다스리는 나라의 장교와 지중해변의 작은 나라의 종교인이 어찌 같겠습니까? 더구나 베드로는 어부 출신이 아닙니까? 공부를 많이 했습니까? 권력이 있습니까? 그가 가진 자격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자세를 보십시오. 온 일가 친척을 다 모으고 베드로를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간절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신앙은 기다림입니다. 그것도 간절한 기다림입니다. 요7: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신앙은 목마름입니다. 생수는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홍수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넘쳐납니다. 문제는 내가 목마르지 않은 것입니다. 언제나 신앙은 물보다 목마름입니다. 기다리자 드디어 베드로가 나타났습니다. 그때 고넬료가 어떻게 했습니까? 25절,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참 대단합니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지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막상 그런 상황이 오면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33절입니다. 행9: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 데 오셨으니 잘 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앞에 있나이다”. 이 말씀속에 고넬료가 베드로에 대해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 잘 드러납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고넬료가 원했던 것은 베드로를 통해 일어난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간증이 아니었습니다. 고넬료가 원했던 것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나마 보세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 고넬료는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한 모든 말씀을 듣기 원했습니다. 고넬료는 취사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종류의 말씀만을 듣기를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말, 자기 입맛에 맞는 말, 자기 교리와 신학에 맞는 말말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증거된 모든 말씀이 주님이 명하신 말씀이기만 하면 무슨 말씀도 듣겠습니다”. “취사선택하지 않겠습니다”.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버리지 않겠습니다”. “위로의 말씀이든 책망의 말씀이든 잘했다는 말씀이든 못했다는 말씀이든 다 듣겠습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자, 우리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믿음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최고의 신앙적 용기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 거기서 멈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했으면 하나님의 말씀도 선택해야 하는 데 거기까지는 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안 자라는 이유는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습니까? 하면 “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앞에 복종하십니까? 하면 “글쎄요”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격리되어 있습니다. 더 서글픈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목회자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왜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절했습니까? 세상 권력으로 말하자면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절한 것은 베드로의 인격이나 능력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때문입니다. 이것이 카톨릭신학에서는 되는 데 개신교에서는 잘 안됩니다. 물론 개신교 신학에서 목회자는 신자와 하나님사이의 중보자가 아닙니다. 중보자는 예수님이요 목회자는 조력자입니다. 그러나 신자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목회자에게 말씀하는 한 목회자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고넬료가 베드로 개인에게 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했듯이 신자들은 늘 그 마음으로 목회자를 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회자가 권위를 잃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음을 잃습니다. 묻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선택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말씀앞에 복종하는 믿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믿음으로 나아오십시오. 이것이 첫 번째 신앙적 용기입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의 말씀앞에 순종함으로 나아오십시오. 이것이 두 번째 신앙적 용기입니다. 그러나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
지금까지는 고넬료에게 필요한 신앙의 용기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필요한 용기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고넬료입니다. 그러나 고넬료가 하나님께 나와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해 로마로 갔던 은혜의 배후에는 베드로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고넬료 혼자 잘 해서 잘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베드로는 고넬료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우선 욥바의 무두장이의 집으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즈음 욥바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욥바에서 베드로는 여제자 도르가를 살려났습니다. 그가 살아나자 하나님이 또 말씀합니다. “베드로야, 무두장이 시몬의 집으로 가라”. 사실 집을 옮기는 일은 베드로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집이 무두장이 집이라는 것입니다. 무두장이는 요즘으로 말하면 가족제조공입니다. 양이나 소의 사체에서 가죽을 벗겨 그 가족을 염색하고 말려 구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깨름칙했지만 순종해서 그 집을 찾아갑니다. 그 집에 며칠 머무는 데 어느날 하나님의 명령이 또 임합니다. “베드로야, 지붕으로 올라가 기도하라”. 유대인 지붕은 물건을 올려 놓고나 가끔 가족들의 휴식공간으로 쓰입니다. 그러나 한 낮에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행10:9절에 의하면 베드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기도하러 올라간 시간은 제6시입니다. 제6시는 우리 시간으로 12시, 정오입니다. 하루중 가장 더울 때입니다.하나님은 베드로에게 무리한 순종을 계속 요구합니다. 한참 기도하는 데 보자기 하나가 내려옵니다. 무엇인가 보았더니 벌레가 우굴거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잡아 먹으라”. 어떻습니까? 여러분같으면 그렇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쉴새없이 베드로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베드로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순종합니다.
여러분, 고넬료가 예수님 영접하고 로마로 가서 사도 바울이 오기 전 전도했던 위대한 사건의 배후에는 베드로 사도의 눈물겨운 순종이 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고넬료 한 사람의 믿음만 가지고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를 선택하는 용기와 함께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용기가 있어야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언어가 주로 “하라”보다는 “하지 말라”에 있는 줄 알고 하지 않을 것을 안하면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라” 했는 데도 매 순간 “가라”는 말을 또 듣기 바라며 가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기드온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미디안 군대가 처들어오자 기드온을 부릅니다. 삿6:12, “큰 용사여, 여호아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그런데 기도온은 이 말을 “가라”는 말로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증표를 구합니다. 처음에는 바위에 무교병 하나를 올렸습니다. 그랬더니 불이 바위에서 나와 무교병을 살랐습니다. 하나님이 이 기적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을 영을 기도온에게 부어줍니다. 삿6:34, “여호아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도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아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그렇다면 기드온은 떠나야 합니다. 그라나 하나님의 영이 임했는 데도 기드온은 떠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저를 부르셨다면 땅위에 양털을 놓아둘테니 하루는 양털에만 이슬이 맺히게 하시고 다음 날은 반대로 되게 하소서“. 하나님이 끝까지 인내하여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주었지만 기드온은 그때 시간낭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가라고 명하셨는 데 우리는 여전히 안 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를 기드온처럼 불러 미디안과 싸우라 부르시고 성령을 부어주셨건만 우리는 “하나님, 정말 제가 맞아요? 저보고 전도하라고요? 차마 저는 아니시겠지요? 저는 약하고 부족하잖아요? 만일 저를 전도자로 불렀다면 제가 잘 때 천사 셋이 나타나 제 이름을 크게 불러 주세요” 이런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도 기도온이 안가고 짬짬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드디어 큰소리로 말씀합니다. 삿6:14절입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다같이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영적 생활의 초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명령한 것을 또 다시 묻지 마십시오. 또 다시 물으면서 그것을 믿음이라고 기도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라“.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는 기도하면 되지 기도해야 하느냐고 또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용서하라“. 용서는 용서하면 되지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라“. 사랑은 사랑하면 되지 사랑해야 하느냐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하라“, 전도는 전도하면 되지 전도해야 하느냐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기드온의 기도요 시간낭비 기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언제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가 이미 명한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가려는 도피처나 안 하여는 핑계나 게으름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미 선포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우리가 할 일은 사실 기도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가장 나쁜 것은 기도가 순종의 방해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을 막는 것이 아니라 그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용기를 준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사랑안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기도하면 전도를 안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있는 전도자가 되게 합니다.
“아이든의 모험”이란 책이 있습니다. 행동의 중요성, 순종의 아름다움을 끼닫게 닫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모험을 떠나는 아이든이 여행이 시작되는 곳에서 자신과 함께 서 있는 메이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두려워요". "무엇이 두려운가?" 메이븐이 조용한 소리로 물었다. "이 여행이 두렵습니다. 제가 알아야 할 것들을 다 채워졌나요?" 메이븐은 그를 엄한 눈초리로 쳐다 보았다.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그를 야단쳤다. "남아 있는 것은 다 안전하지는 않아. 너를 지켜주는 것은 장소가 아니라 존재야. 그리고 이것만은 확실하다. 가라,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가라. 그러면 그곳에서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한다고 너무 구부정한 자세로 있지 마세요. 순종이 더 중요합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가라. 그러면 그 곳에서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할까요? 묻지 마세요. 이미 명령은 떨어졌습니다. 사랑할까요? 더 이상 기도하며 사랑을 지체하는 일을 하지 마세요. 사랑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라, 미디안에게로. 내가 이미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기드온에게 명령이 이미 떨어졌습니다. 기도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행동하는 시간에 너무 오래 기도하지 마세요. 기도가 행동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의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베드로처럼 순종하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
행 10:23-33 / 김철현 목사
대만의 한 청년이 어떤 처녀를 열정적으로 짝사랑했답니다. 한 번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짝사랑을 하는 처녀에게 편지만 줄기차게 보냈는데 2년 동안 무려 700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것이 기네스북에 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러브레터 사상 세계 최고의 기록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편지를 보냈는데도 이 청년은 그 처녀와 결혼을 하지 못했답니다. 결국 그 편지를 받은 처녀가 누구와 결혼한 지 아십니까? 편지를 전한 우편배달부와 결혼했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감정이 충만하고 매일 그 마음을 글로 전한다 해도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랑이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고 시작 되었지만 그 편지를 전해주려고 본의 아니게 매일 만났던 우편배달부와 정이 들었고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심리학에서 하는 말 가운데 <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이 존크]라는 사람이 사용한 개념인데 무슨 이야기냐 하면 어떤 사람을 자주 보기만 해도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는 가설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특히 사람이란 자주 보면 정이 들고 자꾸 만나다 보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말씀 드린 배달부와 결혼한 처녀의 이야기가 이런 경우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다른 말로는<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라고도 합니다. 1889년 3월 31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프랑스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에펠탑을 건립했습니다. 그런데 탑이 세워지기 전 건립계획과 설계도가 발표되었을 당시 파리의 예술가들과 시민들은 탑 건립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고 합니다. 시민들은 거대한 철제구조물이 고풍스러운 파리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 놓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시인[베들렌]은 흉측한 에펠탑이 보기도 싫다면서 에펠탑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고, [모파상]은 몽소 공원에 세워진 자신의 동상이 에펠탑을 보지 못하게 등을 돌려 세워놓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또한 에펠탑 철거를 위한<300인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지금 에펠탑은 천박한 흉물이 아니라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파리의 명물이 되어 있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매력 있는 구조물이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가만히 보면 파리의 시민들이 눈만 뜨면 장대한 탑을 보아야 했고 보다 보니 정이 들고 점점 에펠탑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에펠탑 효과(Eiffel Tower Effect)>라고 부른답니다.
이 효과를 가장 잘 이용하고 하고 있는 현대의 분야가 바로 광고가 아닐까 싶습니다. 똑 같은 광고를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보거나 듣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면서 따라하게 되고 그 물건을 선호하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지요. 희한하게도 15초의 짧은 시간이지만 갓 난 아기들도 텔레비전에 광고가 나오면 주목하는 것을 보면 그 효과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만하지 않습니까?
하여간 그렇습니다. 어떤 대상이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 점차 우호적인 반응을 갖게 됩니다. 혹시 내가 살아가는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먼저 관계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인간관계에 지속적인 만남을 통해서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만큼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낯설거나 하나님이 어색하다면 이거는 보통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지속적인 만남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 봅니다. 만남도 여러 가지입니다. 만나서 정말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하는 속담이 있는데“천생연분에 보리 개떡”이라합니다. 아무리 천한 사람도 다 제 짝이 있어 보리 개떡을 먹을망정 의좋게 산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다 이렇게 만나서 이렇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래보나 저래보나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만났습니다.‘어떻게 저 두 사람이 만나서 부부가 되었을까?’싶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제야 말씀입니다만 우리교회에도 제가 처음 만났을 때 깜짝 놀란 부부가 몇 쌍 있어요. 그런데 지금은 보니까‘역시 저 두 사람은 잘 만났구나.’싶은 사람들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처음에는 제가 세상적인 눈으로 봤습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눈으로 봤더니 그렇게밖에 평가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차차 보는 눈을 바꿨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믿음의 눈으로 봤더니 그렇게 잘 어울리는 부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저 두 사람이 만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할 뻔 했을까’싶은 분들이 여기에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저 평범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면으로만 봤더니 세상에 안 어울리는 어색했던 부부가 영적인 눈으로, 신앙적인 눈으로, 믿음 안에서 봤더니 세상에 더 없는 아름다운 부부로 보이는 신비가 있더란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 안에서의 만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더란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만남도 귀한 만남이 되고 의미 있는 만남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본문을 보면 참으로 어색한 두 사람의 만남이 있습니다. 어쩌면 만나서는 안 될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아니 일생동안 한 번도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사람들 만났습니다. 한 사람은[고넬료]라고 하는 로마 군인인데 지금 이 유대 땅에 와있습니다. 무슨 상황입니까? 로마가 유대를 점령했고[고넬료]는 점령군의 백부장장교로 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지배를 받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이 점령군 장교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어떻게 해서든지 안 만났으면 좋겠고 제발 없어졌으면 좋을 사람 아닙니까?
그리고 또 한 사람은[베드로]라고 하는 점령지의 초라한 어부이자 평민입니다. 사회적 지위로 말한다면[고넬료]와[베드로]는 비교자체가 안 됩니다. 그래서 만날 이유도 없고 어쩌면 한평생 안 만났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됩니다. 당시 유대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종교적 우월감이란 게 있었습니다. 비록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는 어렵지만 종교적으로는 이방사람을 멸시할 만큼 우월감을 가졌습니다.‘비록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고난의 길을 가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너 같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종교적 우월감이 꽉차있었습니다. 자 이렇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오늘 본문에 만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있겠습니까? 당시로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희한한 일이지만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두 사람이 가진 몇 가지의 공통점입니다.
첫째는 두 사람이 다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지만 문제는 로마사람인[고넬료]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행10:1절부터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2절입니다.“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그랬습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이 땅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 정치적 우월감이나 교만을 다 버리고 피점령국가의 종교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것이 공통적이요,
또 하나는 이 두 사람이 다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고넬료]도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고[베드로]도 비록 여행 중에 있지만 시간을 정하고 지붕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끼리는 영으로 통하고 기도를 통하여 만나는 겁니다. 이것을 영적인 교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만나게 해주십니다. 보세요. 이 두 사람이 기도를 했는데 둘 다 하나님이 보낸 천사를 만나서 지시를 받습니다.[고넬료]에게는“욥바라는 곳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라”고 지시하셨고,[베드로]에게는“두 사람이 너를 데리러 오거든 아무소리하지 말고 따라가라.”고 지시합니다. 두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고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공통점은 기도응답 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당시 상황이라면 베드로가 로마사람의 집에, 더구나 로마군인집에 들어가서 숙식한다는 것은 생활풍습과 전통에 따라서 절대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하라는 것입니다. 또[고넬료]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신분이나 위치로 볼 때 무엇이 아쉬워서 베드로 같이 촌티 나는 어부를 자기 집에다가 부르겠습니까? 자기 체면이 있는데...그러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합니다. 이[고넬료]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음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굉장히 체면 따지거든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자식 같다고 생각하면서 순종 잘 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체면이 깎인다나요.. 왜 순종하는 것이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갑니다만 하여간 그렇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오늘[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이 정말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본문25절을 보세요. 베드로가 자기 집에 들어서자마자 넙죽 엎드려서 절을 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인간 베드로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는 모습니다. 베드로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이 사실은 베드로가 엎드린 고넬료를 얼른 일으키면서“나도 사람이라”고 하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이것이<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옳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이고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이고 응답 받은 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고 보니 생전에 만날 일도 없고 만나선 안 될 사람들도 만나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 안에서 만나게 되고 마음을 열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신앙적 인격이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임재의식으로 살고 하나님을 보고 사람을 봅니다. 비록 사람에게 듣고 있어도 하나님께 듣는다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기도응답을 받고 오늘을 살아가는 인격이 신앙적 인격입니다. 손에 쥐는 것을 보고 사는 사람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 사는 사람은 평범한 수준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못 보는 것을 봅니다. 다른 사람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다른 사람이 잡지 못하는 것을 잡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을 너무 추상화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고넬료]의 신앙은 구체화되는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영접하는 것이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베드로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구체적인 신앙의 모습니다. 지금은 이론적으로만 충분히 습득해 놓고 나중에, 나이 많아서 체면이 좀 수그러들면 하는 게 아니라 지금 뭘 해야 되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내가 할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서 있는 사람이 정말 고민해야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다면 구체적이고 아주 현실적인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을 생각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 복 받을 사람
오정호 목사 / 행 10:23~35
신앙(信仰)에는 세 단계가 있습니다. 신앙의 입문단계는 “하나님은 과연 계시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 다음 단계는 “하나님은 과연 일하고 계시는가?”에 초점을 둡니다. 세 번째 단계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을까?”에 초점을 둡니다. 세 번째 질문은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고 삶의 열매를 맺으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목적을 주시고 그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교회가 발견되어 쓰임 받는 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며 마음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몇 가지 해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그 삶을 살피십니다(사도행전 10:4b).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사도행전 10:4b). 고넬료는 로마의 백부장으로서 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사도행전 10:2).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사자인 천사가 나타나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上達)하였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성도들의 삶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요한계시록 5:8, 8:3).
우리가 적어도 끈기 있게 기도의 자리에 있으려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 확신이 우리 마음에 충만하게 될 때 외부적인 조건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앞에서 기도생활을 계속 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의 축복중 하나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불변의 확신을 가지게 될때 주님앞에 겸손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께 기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독백(monolog)이 아니라 대화(dialog)였습니다. 우리의 기도수준이 독백에서 대화 수준으로 올라가려면 하나님의 존재하심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관심을 갖고 계시고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말씀을 통해 기도에 대한 몇 가지 원리를 찾아보겠습니다.
①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관심을 가지시고 들으십니다(시편 116:1,2).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편 116:1,2).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인자하시며 감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영적 존재이시며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의 눈물어린 기도를 들으십니다.
동물세계는 기도가 없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인데도 기도할 줄 모른다는 것은 동물적인 차원에서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존재만이 영적 존재인 하나님과 상통(相通/fellowship)할 수 있습니다. 평생 기도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지수와 기도지수는 비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마음의 소원과 삶의 모습을 주님 앞에 올려드립니다.
② 주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시편 143: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시편 143:1).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기도하는 당사자를 기억하시고 복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도응답의 법칙입니다.
고넬료의 삶의 특징은 기도가 사랑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구제로 나타납니다. 구제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잘못된 기도는 우리 자신에게서만 머무르게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응답이 공유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신 축복이 다른 사람과 나누어지게 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축복된 기도자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서 이 응답을 온 가족들, 이웃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구제가 같이 갔습니다(사도행전 10:2). 기도는 사랑의 표현으로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용하시어 복음 사역을 이루십니다(24-26절).
하나님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복음 사역에서 있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과 복음과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맡겨진 영적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여전히 봉사를 일으키십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발견되어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세 가지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①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사도행전 10: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사도행전 10:2). 고넬료는 하나님을 사모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중하며 높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남들에게 존경받고 대접받았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높였는지는 베드로를 향한 태도와 일가친척을 함께 모아놓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주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태어난 이 땅의 영적 존재라면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인생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그를 책임지시고 하나님의 가장 선하신 길로 인도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는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사무엘상 2:30b).
② 하나님은 하나님께 겸손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25-26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5-26절). 고넬료는 점령군의 지휘관입니다. 베드로는 피식민지의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고넬료는 그의 자존감보다 은혜받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훨씬 컸습니다. 계급장이 은혜 받는 데 장애물이 되면 떼어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 받는 것은 단순할 때 은혜를 받습니다.
워치만 니(Watchman Nee)는 “하나님은 깨어진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깨어진 사람’이란 자아가 파손되어져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살린다는 고백을 받아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야고보서 4:17). 교만과 겸손을 오해해선 안됩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주장하는 것이 교만이고 주님의 방식을 주장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끝까지 자신의 방식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식과 하나님의 방법을 주장하며 따라야 합니다.
③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기 원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24절).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아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24절).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을 독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기를 소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임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느냐는 우리가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과 은혜를 베푸신다면 그것을 우리는 독점할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은 확대 재생산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주신 은혜를 가족들에게 친지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고넬료가 체험했던 하나님을 그 회중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 내려오는 성령강림을 체험했습니다(44절). 복에는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앞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생명의 법을 확산시키려는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올 한 해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질문은 무엇입니까? 과거를 답습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하나님 앞에 발견되어 쓰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간구와 기도에 늘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에게 축복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굳게 확신하며 끈기 있게 기도의 자리를 지키며 삽시다. 하나님을 늘 사모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유통하며 살아감으로 하나님 앞에 늘 쓰임 받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됩시다.
말씀을 듣고자
행 10:24~33 / 이필재 목사
유대 나라가 로마의 침략을 받아 식민이라고 하는 어두운 역사를 보내고 있을 때 지중해 연안의 가이사랴 지방은 로마 군인의 주둔 지역이었습니다. 만약에 경우 있을지도 모르는 유대인의 반란을 감시하고 무력으로 유대인을 다스리기 위해 마련된 로마 군인의 주둔지역으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인 가운데 백부장으로 꽤 계급이 높은 고넬료라는 사람이 유대 나라에 와서 자기의 사명을 다하다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경건하고 기도생활도 아주 열심히 했던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제 구시에는 언제나 기도하는 시간으로 생활했고 또 유대나라 식민지 백성들 중 어려운 사람을 보면 구제 활동을 로마 장교로서 열심히 도와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신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큰 선물을 하나 주셨습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바가 되었으니 지금 사람을 욥바에 보내서 베드로를 너희 집에 심방 오게 하라.” 그래서 급히 부하를 시켜서 천사가 시킨 대로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시간에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이상한 환상을 보았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따리 하나가 내려왔는데 열어보니 우글우글하게 짐승들이 많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짐승들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먹지 않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잡아먹으라 하시니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이런 부정한 동물을 내가 먹은 일이 없나이다.” “내가 깨끗하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대화가 벌어졌습니다. 환상에서 깬 베드로가 ‘이건 하나님이 주신 환상인데,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렇게 애를 쓰고 있을 때 문밖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찾아와 베드로를 만나게 됩니다. 고넬료라 하는 로마 군대 백부장이 자기를 청하는 말을 듣고 베드로는 그때야 자기가 본 환상의 뜻을 깨닫게 되어서 ‘아!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고넬료 집으로 심방 가라는 뜻이다.’ 이렇게 따라가게 됩니다. 사실 베드로와 고넬료는 만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28절에 보면 베드로가 말합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줄 너희도 알거니와”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신앙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만약 이 법을 어기고 난 다음에 내게 어떤 불이익이 닥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 가라고 환상을 주셔서 내가 이렇게 왔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잖아요? 유대 사람들의 이런 문화 때문에 다소 어려움이 있습니다. 주변 나라 국가들이나 세계인의 미움을 사게 된 그들만의 독특한 배타 신앙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들끼리도 교제 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도 안 들어가는 삭개오 집에 왜 선지자가 들어가느냐고 막 성토하잖아요?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을 때 그 여인이 뭐라고 그럽니까? “당신 같은 유대 남자와 우리는 말을 안 하게 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왜 나한테 말을 거나이까?” 말을 안 하게 되어 있는 신앙 문화입니다. 그러니까 고넬료와 베드로는 절대 만나면 안 됩니다. 그런 관계인 것을 피차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가라 해서 왔고 오라고 해서 온 겁니다. 하나님이 중개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만나게 하셨는가? 이 사건은 기독교 역사의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 민족을 벗어나 최초로 이방 세계로 전도 되어지는 역사적 포인트가 바로 여기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고,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나선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전해야 할 전도 대상을 자기 민족 혈통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만 국한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본 환상의 보따리 안에 가득한 그 더러운 짐승들은 베드로 마음속에도 이방 사람들은 전도할 가치도 없는 짐승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환상을 주셔서 “내가 깨끗하게 했다.” 지금 베드로의 마음이 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고넬료의 집안이 모두 모여 베드로를 극진히 모셔 들인 이유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이것이 이유가 됩니다. 그 집 식구들이 이 말씀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있어 하나님이 그것을 아시고 베드로로 하여금 그 집에 심방 가서 설교하게끔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집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고 20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설교 마친 다음에 자신이 변화를 받았습니다. 세계관이 달라졌습니다. 뭐라고 자기가 말합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종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받으신 줄을 깨달았도다.” 이방인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에 놀라니 자기 자신이 놀라고 세계관이 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 그 자리에서 성령을 받고 베드로에게 다 같이 세례 받았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으로서 즉, 이방 세계 최초의 세례인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 거기서부터 생겨졌습니다. 우리가 말씀 가운데 교훈으로 삼을 것은 말씀을 사모했던 고넬료 집안의 신앙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민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충만하게 만들어 가시는데 반드시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는 사람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이 전하여지도록 하셨습니다. “전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 국고를 맡은 국가적 인물이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빌립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빌립이 그에게 가서 설교를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깨닫고 길가에서 자신에게 세례를 달라고, 예수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세례를 받고 자기 본국으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언자가 된 것이 에디오피아 최초의 교회를 창립하게 된 역사적 사건이 되었잖아요? 성령을 보내심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 확장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고넬료가 이방 사람으로는 최초로 역사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전해야 합니다. 그 나머지 일은 성령께서 다 알아서 하심으로 ‘내가 어떻게 이 사람을 예수 믿게 할 것인가?’ 걱정부터 하지 말고 전하기만 하면 그 다음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말씀을 전하는 자와 받는 자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말씀을 받는 고넬료 집안의 모습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24절에 말씀의 전달자가 올 것을 믿고 고넬료는 즉시 일가친척 친구들을 다 자기 집으로 모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심방의 역사적 시초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설교자를 기다리고 있잖아요? 설교를 하고 은혜를 나누고,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신다고 성경에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은 기다리는 자에게 은혜를 줍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우 감동적 순간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내 마음에 그토록 사모했고 원했던 것을 직접 만났을 때입니다. 갈보리교회에 미술가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 미술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한 폭의 값진 그림을 만났을 때는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로 심취합니다. 어떤 때는 ‘내가 볼 때 별로 잘 그린 거 같지 않은데, 저 정도라면 누구든지 다 그릴 수 있을만한 그림인데….’ 그런 것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미술의 가치를 아는 분들은 그런 그림을 하나 만나면 재산을 다 팔아서라도 수십억 원을 들여서라도 사고 싶어 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파리에 처음 갔을 때 거기에 계신 목사님이 “목사님은 파리에서 뭘 제일 보고 싶으세요?” 그러셔서 “밀레가 만종을 그렸던 밭이 있다던데….” “그럼요. 멀지 않아요.” 그래서 함께 갔습니다. 지금도 밭에서 농사를 짓습니다. 밭모퉁이에 밀레가 그린 만종 그림이 그대로 서 있습니다. ‘아! 여기서 밀레가 이 그림을 그렸구나.’ 그러면 밀레네 집에 가서 그가 그린 작품을 구경하고 저도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에 감격적인 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카네기 홀에서 세계적인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회 한번 참석하는 것이 평생소원입니다. 세계적 음악의 대가들이 모여 한번 구경하면 평생소원이 이루어진 듯 합니다. 마음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격해 하는 것 아닙니까? 로스앤젤레스에서 세계 3대 테너가 공연할 때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표를 사서 워싱턴에서부터 와서 평석에 앉아서 관람했습니다. 저도 그날 무지 가고 싶었지만 표를 살 수가 있어야지요.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은 세계적인 대가가 부르는 것을 들으면 얼마나 감격해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지금 베드로의 설교 한편을 듣기를 그렇게 희망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우리 집에 와서 설교 한번 해주셨으면….’ 그걸 아시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물해주시는 겁니다. 환상을 통해서 두 사람의 만남을 이루어주십니다. 위법이지만 만나게 하신 겁니다. 여기 보세요. 베드로가 문 앞에 들어서니까 고넬료가 그 발 앞에 엎드려 절했다고 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를 볼 때는 자기 국민, 즉 식민지 백성 중에 하나입니다. 베드로는 사실상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만 빼버리면 갈릴리 어부 출신에 무식한 소시민에 불가합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이 식민지 백성 앞에서 엎드려 절하고 그분을 모시는 태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럽니까? 베드로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 집에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대접하면 그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너희를 영접하는 사람은 곧 나를 영접함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곧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이다.” 지금 고넬료의 눈에는 베드로가 보이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의 발 앞에 엎드린 겁니다. 얼마나 황송스럽게 엎드렸으면 베드로가 너무나 무안해 잡아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라.” 사람같이 안보고 있는 겁니다. 밭이 준비된 상태입니다. 씨만 뿌리면 당장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을 듯 한 그런 자세와 호기심, 열려진 마음의 자세로 지금 심방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설교를 듣고 “우리 다 세례 주세요.” 그 자리에서 로마인 최초의 세례인이 되는 영광이 그 집에 주어지는 것 아닙니까? 성경에 보면 또 다른 백부장 한 사람이 있죠? 그 사람은 길바닥에서 예수님 앞에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내 하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나이다.” “그러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아니요. 이 자리에서 말씀만 하옵소서. 말씀의 권위로 나을 겁니다.” 그래서 그대로 했잖아요? 그래서 그대로 되었잖아요? 제 목회의 경험인데 교인들이 목사의 말을 가장 잘 듣는 때가 있습니다. 바로 임종할 때입니다. 그때는 거역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라는 대로 하고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아멘, 아멘” 다 그럽니다. 안 그러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베드로 사도의 설교 한 편을 듣고 죽어도 좋다는 그런 심정으로 베드로가 오기를 기다리는 겁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사실 다윗의 사생활은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훌륭한가? 다윗에게는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두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을 그렇게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꿀 송이보다 더 달다고 말한 사람이 이 사람입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성전을 사모하는데 열심입니다. 어느 날 성전 초막 끝에 참새가 집을 지은 것을 보고 그 참새를 부러워하는 겁니다. “너는 얼마나 복이 많아서 하나님의 집에서 사느냐?” 그래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기를 그렇게 희망했었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의 장막을 볼 때마다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감탄사를 발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사모하고 말씀을 사모하는 변함없는 마음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디 여행 가실 때 성경책은 가지고 다니십시오. 성경책 한 장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시고 저녁에 한 장 읽는 것으로 하루를 닫아보세요. 한번 해보세요. 읽는데 한 5~8분 정도면 됩니다. 그렇게 어렵습니까? “나는 예수는 믿지만 성경책은 한 번도 보지 않았습니다.” 하시는 분 한번 손 들어보세요. 그들은 지금 베드로 앞에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33절에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하나님이 오신 것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나는 사람입니다. 제발 이러지 마세요.”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당나귀를 타고 가셨다고 했습니다. 겉옷이 자신의 인격을 말해주는 것인데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벗어 당나귀가 걸을 때마다 발 앞에 갖다 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당나귀가 그것을 부드럽게 밟고 지나가라고 했습니다. 당나귀 위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등에 업고 가는 짐승이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은 것 아닙니까? 말씀의 귀중함에 대해 성경 몇 군데를 기억해 봅시다. “예수님은 40일 금식기도 후에 주리신지라.” 떡이 극도로 필요했던 그 순간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라.”
성령의 역사는 언제 가장 크게 임하셨는가? 두 가지입니다. 기도할 때와 말씀을 들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말씀을 들을 때 가장 강력했습니다. 초대교회가 하루에 3천 명씩 세례 받고 성령 받았다고 했는데, 무엇을 그렇게 했는가? 베드로가 설교한 후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공식적으로 정한 예배 시간은 빠지지 마세요. 다른 시간 조금 줄이세요. 우리 갈보리교회는 프로그램을 많이 계발하는 교회가 아닙니다. 예배 중심의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수요 예배가 되었든 새벽 예배가 되었든 주일 예배가 되었든 내 생활에서 이것만은 열심히 참석하세요. 그러면 신앙생활이 풍성하고 변함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 4절에 보면 “말씀을 들은 자 중에 믿는 자의 수가 많으니 남자가 5천이라.” 하나님의 역사는 말씀 가운데 역사합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가까이 하세요. 기독교 역사가 언제 쇠퇴했는가? 사도들이 설교를 소홀히 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 “예배 모범 가운데 50퍼센트를 설교 시간에 배정하자.” 그래서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잖아요? 만약 “갈보리교회 교우 여러분! 설교 듣지 지루하죠? 다음 주일부터 설교 시간 빼겠습니다. 찬송 한 장 부르고 각자 기도하고 주기도문으로 마칩시다.” ‘이야! 예배 시간 짧아진다! 좋다.’ 그런다면 일 년 안가서 이 교회 없어집니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보세요. 미국 공립학교에서 “아침기도 하라. 그리고 경건회 하라.”고 했습니다. 법적으로 부모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 아이는 예수 안 믿는데 강제성이냐?” 막 투쟁하고 데모하고 그래서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아침 기도 없애자. 경건의 시간 없애자.” 어떻게 됐습니까? 미국 학교에 마귀가 들어가서 학생이 선생을 총으로 쏴죽이고 자기 동료를 수십 명씩 쏴 죽이는데 그게 무슨 학교입니까? 말씀이 끊어지면 그때부터 마귀가 말합니다. “내 말 들어!” 그래서 뭐라고 그럽니까? “아침 기도 빨리 부활시켜라. 학교에서 경건회 빨리 부활시켜라! 왜 그만두느냐? 하나님 말씀을 접어두면 마귀가 그때부터 말한다. 영적으로 보지 못하느냐?” 세상이 이렇게 된 것입니다. 44절에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 성경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설교와 함께 성령이 내려온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초대교회에 큰 문제가 생기죠? 교회가 혼란해지고 헬라파, 히브리파가 싸워 교회가 갈라지거나 없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왜 그렇게 교회가 되었는가? 베드로가 말하지요? 이것은 우리 사도들이 잘못했습니다.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로 일삼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요.” 설교를 안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설교 듣던 사람이 베드로나 요한의 설교를 듣고 만족하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설교는 예수님처럼 해야지 저렇게 설교를 못하고….” 그러니까 “에이! 귀찮다.” 설교를 안 해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마귀가 들어와서 교회를 파산지경으로 몰고 갔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힘 있게 설교를 하니까 그때부터 교회가 부흥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틴 루터가 “교회가 무엇인가? 말씀의 집이다. 교인들은 왜 교회에 와야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예수를 믿지 않는 저와 아주 친한 사람 가운데 한명에게 성경책 한권 사다가 그 사람 몰래 책꽂이에 꽂아놨습니다. 그냥 꽂아놨더니 살아 역사합니다. 그 집이 어떻게 되었느냐? 우리 갈보리교회만큼 교인이 많은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그 교회에서 성경 제일 많이 읽은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여러분, 전도하고 싶으면 성경책을 그냥 한권 주세요. “이거 책이야. 가져!” 살아있습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할 때마다 신랑, 신부에게 주잖아요? “이거 가지고 살아라. 틀림없어. 잘 지키고 살아.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왜? 말씀 속에 다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씀 듣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접하세요. 읽으세요. 그러면 오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어떤 일이 되는가? 고넬료는 이방 사람들 가운데 유대인 혈통을 벗어난 사람 가운데 최초로 세례 받고 예수 믿는 사람이 되는 관문 역할을 했고 베드로는 어떻게 됐습니까? 로마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전도했는데 오늘 로마는 세계 교회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 중앙에 베드로 성당이라는 말씀의 집을 온 세계인의 관심 가운데 세워서 지금 영원하게 되었으며 그는 죽어서도 그 말씀의 집 지하 성당 복판에 그 시신이 지금까지 묻혀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성당입니다. 여러분, 말씀과 가까이 하세요. 말씀과 함께 승리하세요. 이것은 어떤 것도 이기는 능력과 힘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을 소중히 생각하시고 말씀을 잘 들으시고 말씀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세요. 그래서 모두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변함없이 저희들에게 하늘의 음성을 말씀으로 들려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말씀에 가까이 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예배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말씀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승리가 약속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하나님이 기뻐(기억)하시는 생활
행 10장 23~33절 / 김창인목사
오늘은 사도행전 10장 23절에서 33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기억)하시는 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넬료와 그의 가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엮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유대인이 아니라 로마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군 장교로서 부하 100명을 거느리고 가이사랴에 이달랴대라는 부대에 소속된 장교입니다. 로넬료가 언제 어떤 이유에서 유대교로 개종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믿음 생활이 어쩌면 그렇게 경건하고 독실한지 모릅니다.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되고 기억하신 바 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기억에 남는 삶이 있는가 하면 '나는 네가 그렇게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또 그런 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라고 부인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넬료의 인생과 삶이 그렇게 하나님께 상달이 되고 기억하신 바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아 주셨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상달이 되고, 하나님께 기억이 되는 삶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열린 생활 (23-29)
열린 생활이라는 말을 바꾸어서 열린 마음이라고 해도 됩니다. 구역 봉사를 많이 하고 동네에서 이웃들과 어울려 살고 교회에 나와서 어느 기관에 소속되어 일하고 봉사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마음을 닫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노출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까닭에 그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대화가 되지 않고 교통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열어야만 합니다. 열린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교제가 되고 함께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갑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음을 닫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 집에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심방을 가더라도 심방을 거절합니다. 이런 사람은 본인도 괴로울 것입니다. 이런 닫혀진 상태의 사람, 닫혀진 생활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 충만함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교회가 부흥이 되는지 모릅니다. 부흥이 되는데 유대인 자기네들끼리만 믿고 구원 얻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것으로 끝을 냈습니다. 절대로 사마리아나 이방에 복음을 들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훈련시켜 복음을 들고 세계로 내보내려고 의도하신 것인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이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리 민족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우리 민족만의 하나님이요, 자기들만이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은 복음을 전할 대상 즉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기에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속이 상하셨겠습니까? 세계를 향해서 마음 문을 닫고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닫혀진 마음으로 닫혀진 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런 교회는 흩어 놓아야 한다"라고 생각하시고 사울을 통해서 얼마나 교회를 핍박하셨는지 모릅니다. 붙잡히면 옥에 가두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고 재산을 빼앗곤 하니까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흩어져 나가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복음을 들고 나가면서 세계를 향하여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도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 중의 하나인 빌립 집사는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사마리아로 갔습니다. 사마리아에는 누가 살고 있었습니까? 그들은 본래는 유대인인데 앗수르의 식민정책에 의하여 이방인과 혼인을 하는 관계로 피가 섞이는 잡족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마음문을 닫고 말을 하지 않고 대화가 없고 교통이 없었습니다. 그 때 빌립은 그들에게 나아가 마음을 열고 사마리아 사람을 받아들이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마리아가 복음화되고 그 성에 큰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열린 마음, 열린 생활이 이처럼 아름다운 열매로 맺어졌습니다. 그런가하면 가사로 통하는 광야 길로 빨리 가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그가 달려가 보니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큰 권세 있는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의 마차에 올라 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예수를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돌아가 고국 에디오피아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루어진 것인 coptic church가 아닙니까? 열려진 사람 빌립 집사가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이었습니까? 우리 모두 너에게 마음 문을 열고 받아 들여야겠습니다. 우리만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 안됩니다. 즉 너를 정죄하면 안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이웃에게도 회사에 나가서도 전부 마음의 문을 여는 열린 마음, 열린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사마리아에서처럼 아름다운 결과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을 돌아가서 23절에서 29절을 보면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쌔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베드로와 고넬료가 관계된 이야기입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백부장이 기도를 한창 하고 있는데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네 기도를 하나님이 들었고 너의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되어 기억된바 되었으니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욥바라고 하는 곳에 가면 피장 시몬의 집에 베드로가 유하고 있므로 빨리 청해 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의 가정을 위해서 큰 은혜를 준비했으니 빨리 베드로를 청하라는 뜻입니다. 고넬료가 종졸 둘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때보다 3시간전에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늘로부터 큰 보자기가 내려왔습니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네발 가진 짐승들과 나는 새들과 기어다니는 온갖 벌레들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잡아먹어라"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하나님 나는 이렇게 부정한 것을 어려서부터 먹은 일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내가 깨끗하다 하는 것이요, 먹을 수 있어서 먹으라고 하는데 네가 왜 더럽다고 하느냐?"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또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보자기가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세 번을 반복해서 환상이 보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방사람 고넬료가 보낸 종졸 둘이 와서 모셔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 '여기에 무슨 뜻이 있는가?'라고 생각하는 중에 성령이 빨리 따라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비로소 그 보자기 환상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이방인 알기를 짐승 즉 개 돼지나 혹은 벌레같이 더럽게 여겨 상종하면 안되는 줄 알았는데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다 깨끗케 하셨구나, 우리와 다름이 없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이 때부터 이방인에 대해서 닫혀졌던 마음을 활짝 열고 이방인의 부름에 따라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모였던 그 많은 사람들이 예배하는 한 시간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베드로의 닫혀졌던 마음이 열린 결과입니다. 너를 향해서 닫혀졌던 마음을 열고 너를 받아주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결과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열린 마음, 열린 인생, 열린 생활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뉴욕 시장을 지낸 라과디아는 뉴욕 시장을 지내기 전에 직결 재판소 판사를 지냈습니다. 하루는 재판석에 앉았는데 노인 하나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서류를 검토해 보니 노인이 너무 배가 고파서 어느 가게에서 빵을 훔쳐먹었습니다. 그래서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가난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도적질 한 것이 죄임에는 틀림이 없지 않습니까? 이 때 판사가 "당신은 누가 뭐라고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은 벌금 10달러에 해당하는 죄입니다"라고 하면서 10달러 벌금 언도를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지갑을 꺼내어 10달러로 할아버지 벌금을 대신 물어주면서 "이것은 내가 당신의 벌금을 물어주는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니 너무 못 먹고 가난했습니다. 이것을 보니 나는 너무 잘 먹었습니다. 내가 생각해 보니 너무 잘 먹은 죄의 값이 10달러입니다. 그래서 저도 벌금을 내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방청했던 사람들을 돌아봅니다. 여러분들은 이 죄가 없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모자를 벗어서 돌리면서 "지금까지 너무 잘 먹고 살아온 죄가 있다고 생각하거들랑 모자에 돈을 넣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다 돌리고 난 후에 계산해 보니 47달러가 되었습니다. 요즘 47달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때 돈으로 47달러는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그 돈을 할아버지에게 주어서 돌려보냈습니다. 판사는 '너는 죄인이다. 너는 죽일 놈이다'라고 판단을 내린 다음에 '나는 너를 모른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를 향해서 마음 문을 열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사람들의 마음 문이 열렸습니다. 그 열린 마음, 열린 행동, 열린 생활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도 너를 향해 닫혀진 마음, 하나님을 향해 닫혀진 마음이 열린 마음, 열린 사람, 열린 생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구제 생활 (30-32)
루터가 죽을 때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하더니 두 줄을 써 놓고 죽었습니다. 첫 줄에는 "나는 거지다"라고 적었습니다. 루터가 누구의 것을 얻어먹고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거지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줄에는 "이것은 진리다"라고 썼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 제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습니다. 루터가 많은 것을 가지고 살았어도 이 세상에 올 때 가지고 온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죽어 가는 이 순간에 하나도 못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에 내가 가지고 누렸던 것은 전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거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졌다 하는 것은 내 것이 아니요, 내가 먹고 내가 필요로 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라는 것입니다. 내 필요 이상의 것은 절대로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구제를 하려면 네 거리에 나가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구제 받을 사람도 '저기에서 구제하는구나'하고 몰려옵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구제 받을 사람에게 나누어줍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 구제 많이 한다'라고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꼴이 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네가 구제를 많이 한다고 칭찬을 받으면 하나님이 받을 영광이 어디에 있느냐 너는 이미 이 세상에서 받을 상을 다 받았다. 그런 구제는 나는 모른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오른손이 하는 구제를 왼손이 절대로 모르게 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 보시고 은밀하게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구제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제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필요 이상의 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베풀어주면서 절대로 자기 이름을 나타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받을 영광도 없고 하나님이 그런 구제는 보기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고넬료의 구제 생활이 아주 멋진 것이었습니다. 고넬료의 구제 생활은 주님이 기뻐하시고 기억하신바 되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0절에서 32절을 보면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시 기도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느니라 하시기로'라고 하였습니다.
고넬료가 제 구시 즉 우리 시간으로는 오후 3시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빛난 옷을 입은 사람 즉 천사가 나타났습니다. "고넬료야 네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이 되어 들으심바 되었고, 네 구제 역시 하나님께 상달이 되어 기억하신바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고넬료의 기도 생활, 구제하는 생활이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신바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삶입니까? 그 때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욥바로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여기에서 끝이 나지 않습니다. 계속 읽어보면 베드로를 통해서 가정 예배에 엄청난 은혜가 넘칩니다. 이것은 그의 구제를 은밀히 보시고 은밀히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돈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밀한 중에 베푼 구제,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구제를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서 기억된바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한 중에 보시고 베드로를 청해서 은밀히 엄청난 축복으로 갚아 주었다는 사실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 40년을 할 때 매일 아침에 나가 만나를 거두어서 그것으로 떡을 해 먹고 40년을 살았습니다. 해가 뜨면 만나가 없어집니다. 만나가 주는 교훈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할 때 아침에 나가면 만나가 수북히 쌓여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어디에 가서 돈을 주고 구입한 것입니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면 먹고 주시지 않으면 굶어야만 했습니다. 그 만나가 주는 교훈의 첫째는 우리가 먹고사는 것도 전부 하나님의 덕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밥 세끼를 굶지 않고 먹고사는 것은 전부 하나님이 주셔서 먹고 누리게 하는 덕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둘째는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날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고 절대로 이틀 먹을 것을 거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틀치를 거두러 들인 사람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루동안 먹고 나니 전부 섞어지고 냄새가 나고 벌레가 났습니다.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셋째는 그 날 그 날 거두어서 그 날 그 날 먹었습니다. 즉 그 날의 소득으로 만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이 번다고 한들 하루에 밥을 네끼 먹습니까? 적게 번다고 한들 밥을 두끼 밖에 못 먹습니까? 그 날의 소득으로 만족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적게 벌어도 부자로 사는 것입니다. 부자로 많이 벌어도 그것을 만족하게 여기지 않으면 부자이면서도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 날의 소득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곧 부자인줄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넷째는 계속해서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람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결과는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벌려고 애를 써서 많이 모아 봤자 이 다음에 가면 결과는 똑같아 지고 마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들도 맨손으로 가고, 우리도 맨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세상 물질은 별것이 아니라 결과가 똑같다는 교훈입니다.
다섯째는 만나가 귀하지만 그 만나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이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귀히 여기라는 것이 만나가 주는 교훈입니다. 우리 모두 세상에 사는 동안 많이 거두어서 내 필요 이상의 것으로 오른손이 구제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복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셋째, 예배 생활 (33-)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예배당에 많은 분들이 나와서 함께 예배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여러분 중에서도 그 예배를 받으시며 찾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이 시간에 나와 앉아서 설교하는 목사를 바라보고 있지만 생각은 지금 끝없이 방황하고 있다면 그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이 받음직한 예배를 드리는 그 예배의 생활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시고, 기억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3절을 보면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금강산에 가지 않고 예배당에 예배하러 오셨으니 잘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신을 청한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 즉 무슨 말씀이든지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살아가려고 여기 모였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입니다. 예배를 50분 드리는데 설교는 의례히 있는 순서요, 나는 들어줘야 하는 순서라고 하면서 설교듣기를 악세사리로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일주일 동안은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무슨 말씀을 주시려나'하고 순종을 다짐하며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일주일을 살아갈 때까지가 예배입니다. 마지막 축도를 한다고 해서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예배는 생활에까지 연장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자리에 계셔서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는 모습으로 예배를 받으신다면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의 마음 자세가 전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오늘 저녁에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주님이 이 자리에 오셔서 떡을 떼고, 잔을 나누어주시면서 성찬식을 집례하신다고 생각하시면 지금의 예배 마치고 다른 곳에 놀러 가겠습니까? 오늘 저녁 성찬식을 잊어버리겠습니까? 이런 예배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기억되는 예배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생활은 첫째로 열린 마음, 열린 생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마음을 닫아 놓고, 너를 향해서 닫혀진 마음, 닫혀진 생활을 해 왔다면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이웃을 향해서 마음을 열고 그들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둘째로 구제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내 것 없이 거저로 살아갑니다. 전부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 덕분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내가 필요로 하는 그 이상의 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는 구제하는 생활을 하나님이 기억하셨다가 은밀히 갚아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겠습니다'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지금 이 자리에 계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자세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억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생활이 여러분들의 생활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범 심방의 사례
임덕순목사(한가람교회) / 행 10:24- 33
지금 우리교회는 춘기 대심방중입니다. 심방의 참된 의미와 심방을 받는 바른 자세와 심방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에서 잘 배우시기 바랍니다.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 장교인 고넬료라는 사람이 욥바에 머물고 있던 베드로를 자기 집으로 청하여 심방을 받고 그 자신과 가족과 친구들과 친척들이 모두 예수를 믿게 되고, 성령 충만을 받게 되는 놀라운 일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일이 우리가 지금 진행하고 있는 심방의 모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이번 심방을 받으면서 주님을 만나고 여러분의 문제를 진단받고 처방받고 치료되고 해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심방이 되기를 원합니다.
고넬료는 로마 군인이었고 이스라엘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서 가이사랴 라는 도시에 파견되어 근무 중이었습니다. 그가 주둔하던 가이사랴는 이스라엘 서북쪽의 해안도시로서 로마군대의 사령부가 있었고, 로마에 충성하는 어용 왕 헤롯의 궁전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이사랴는 큰 도시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주둔하던 고넬료는 이스라엘 땅에 와서 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는 유대교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유대인들을 보니 그들은 아주 경건한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씩 금식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고, 구제와 기도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치와 방종으로만 흘러가는 로마사람들에 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은 참으로 경건했습니다. 그래서 고넬료도 유대교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품었고, 유대 백성들을 구제하기 시작해서 그 일을 열심히 했으며,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에서 온 다른 동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물질을 착취하며 억압하는 생활에 익숙했지만, 고넬료는 그 반대로 살았습니다. 로마에서 온 동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비쳤겠지만 고넬료는 그의 소신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제 구시, 즉 낮 열두시 기도시간에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기도하는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서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앞에 상달되었다. 그러니 네가 지금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욥바 해변의 시몬이라고 하는 가죽다루는 사람의 집에 있다.”고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생생하게 말씀하신 천사의 말을 받들어 자기의 신임하는 사람 셋을 골라서 욥바로 보내며 베드로라는 사람을 모시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실제로 가이사랴에서 약 60킬로 남쪽에 있는 조그만 해안도시 욥바라는 곳의 시몬이라는 무두장이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드디어 욥바 시몬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때는 낮 열두시 경이었고 베드로는 시몬의 집 옥상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기도하는 베드로의 눈앞에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왔습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저 안에는 뭐가 담겨 있을까하고 넘겨다보았더니, 거기에는 유대인들이 먹어서는 안된다고 배워왔고 더럽게 여겨왔던 짐승과 어류와 곤충들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섬짓했습니다. 이 더러운 것들이 왜 여기 담겨있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베드로야 잡아먹으라.” 베드로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먹은 적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음성이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그 보자기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베드로는 그 환상 때문에 고민에 사로잡혔습니다. 조금 전 환상이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하는 고민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 문 앞에 와서 “혹시 이 집에 베드로라는 분이 계십니까?”하고 자기를 찾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두 사람이 너를 찾으러왔으니 의심치 말고 따라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려가서 그들을 만났더니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 주인인 백부장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분이어서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받는 분인데, 그분이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서 당신을 청하여 오라고 우리를 보내서 왔으니까 우리와 함께 올라가시지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의 그 환상과 음성을 생각하면서 베드로는 그들을 따라 가이사랴로 올라갔습니다.
그들과 함께 걸어서 이틀만에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의 집에는 고넬료의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집 문 앞에 도착하자, 고넬료가 달려나와서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큰 절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라서 말리고 함께 집에 들어가 거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고넬료에게 묻습니다. “유대인인 내가 이방인인 당신들을 만나는 것이 우리의 법에는 위법이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시기를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고 하셔서, 당신의 초청을 사양하지 않고 왔는데,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고넬료가, “나흘 전에 제 9시 기도를 하다가 천사를 만났으며, 그 천사가 당신이 욥바에 머무는 것을 알려주면서 청하라고 하셔서 내가 즉시 사람들을 당신께 보내었더니 당신이 이렇게 오셨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앞에 있나이다.” 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진심으로 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입을 열어 그들에게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이 모셨던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며 사셨고, 어떻게 죽임을 당하셨으며, 그 후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이요 우리의 구주이시며,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복음을 진실하게 전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 말씀을 듣고 있던 고넬료의 집에 모인 그의 온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도 방언을 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던 베드로가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도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수일을 더 거기 머물며 진리를 가르치고 돌아왔다는 내용이, 본문인 사도행전 10장 전체의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도행전 10장의 내용은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심방 갔던 이야기입니다.
그 심방은 참으로 놀라운 심방이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도로서는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심방을 간 기록이고, 이방인이 처음으로 성령 충만을 받은 기록이고, 복음이 유대인의 담을 넘어 이방인에게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된 사건입니다. 그래서 고넬료 개인에게는 더 없이 축복된 심방이었지만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에 고넬료가 베드로의 심방을 받은 사건은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선교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한 가정이 받은 심방의 모델로서 고넬료 가정의 심방을 연구해 보면서 우리교회가 지금 진행하는 심방의 모범을 삼고자 합니다.
첫째, 간청하여 받은 심방
가이사랴는 헤롯궁과 로마군대의 본부가 있는 대도시였는데, 거기에 비하여 욥바는 가이사랴에서 60킬로미터 정도 남쪽에 있는 초라한 항구였습니다. 서울의 고관이 시골의 어부를 부른다는 것이 흔하고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비록, 천사의 지시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지배국의 고위 장교가 피지배국의 시골사람을 간청하여 자기 집으로 모신다는 것은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옆집에 있는 사람을 남 몰래 청하는 것이 아니라 150리 밖에 있는 사람을, 사절을 보내어 공식으로 초청하였으며, 자기의 가족뿐 아니라 로마에서 온 친구들까지 다 불러들여 공식적으로 만났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비웃음거리가 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고넬료는 베드로를 초청하여 만났습니다. 몇 사람을 초청하는 것도 어려운데, 수십 명의 친구들을 불러 모으고, 거기에 베드로를 청하였다는 것은 보통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요즘 우리 심방은 어떻습니까? 전도사님과 구역장님이 사정을 합니다. 며칟날 집사님네 구역 심방인데 그날 시간을 좀 내서 심방을 받으세요. 그러면 내가 이렇게 저렇게 바빠서 이번에는 심방을 받을 수 없으니까 이해하세요. 이정도만도 감사하지요. 더 심한 핑계로 거절합니다. 별별 이유가 다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보낸 사람을 거절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니라.”
베드로가 제발로 고넬료를 찾아가서 내가 당신에게 드릴 말씀이 있는데 잠시 시간을 좀 내줄 수 있느냐고 사정해서 마지못해 고넬료가 문을 열어주고 방으로 안내해서 심방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까? 자기가 스스로 심방을 받을 준비를 해놓고 정중하게 사람을 보내어 청했습니다. 보낸 사람이 150리를 걸어가서 정중하게 모셔 와서 심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심방을 해 보면, 어떤 가정은 문도 열어주지 않는 가정이 있습니다. 심방 올 시간을 계산해서 미리 도망쳐 버리고 집을 비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심방을 가는 목사님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점심을 얻어먹으러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그 집 비밀을 알아내려고 가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 가족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당면한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을 알게 하고, 구원을 얻고 은혜를 받게 하려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초청해서 받아야 마땅한 일입니다. 앞으로도 심방때 마다 고넬료처럼 초청하는 자세로 심방 받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친구 친척과 함께 받은 심방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해서 만나게 되는 이번 일이 아주 중요한 기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서 만나거나, 자기 가족만 베드로를 만나는 것은 손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말씀이 있어서 당신의 종을 보내신다면, 그 말씀은 나 뿐 아니라 우리 가족 전체가 들어야 하고, 내 친구와 친척들도 다 와서 중요한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족, 친척,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어른들만 모여 심방을 받으려 했습니다. 아니 어른들만 다 모여도 좋은데, 직장에 나가니 다 모일수가 없어서 부인 혼자서, 혹은 남편 혼자서 심방을 받았습니다. 혹시 아이들이 집에 있어도 그 애들은 참여시키지 않고 내보냈습니다. “얘들아 저기 나가서 놀다가 이따 손님들 가시면 돌아와”하면서 돈을 쥐어 내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말씀이 있어서 우리 집에 당신의 종을 보내신다면 그것은 나만 들어선 안 되고 우리가족전체가 들어야 합니다. 가족 전체가 하나님 앞에 찬송해야 하고 함께 기도해야 하고 함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번 심방은 되도록 많은 가족이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말씀 듣는 심방이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이웃도 모으고, 친척도 모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한 방 가득히 모여 예배하는 시간이 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말씀을 갈망하는 심방
베드로가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함께 이틀을 걸어서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때, 주인인 고넬료가 달려 나왔습니다. 고넬료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군대의 고급장교입니다. 베드로는 지배받는 이스라엘 나라의 어부출신입니다. 그 둘이 만납니다. 그런데 놀라운 장면이 벌어집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 앞에 무릎을 꿇어 절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앞에 절을 한 것이 아닙니다.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 절을 한 것입니다. 자기의 신분과 지위를 내버리고, 하나님의 종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고 이렇게 청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라고...
이 말은 놀라운 겸손일 뿐 아니라, 그가 베드로앞에 무릎을 꿇은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그 말씀을 가져오신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무릎 꿇고 말씀을 기다립니다. 모쪼록, 하나님의 말씀을 남김없이 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 마음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런 마음으로 심방을 받아보셨습니까? 그런 분도 많겠지만 아닌 분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심방을 받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듣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목사님에게 그동안 식사대접 한번 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니 이번에 한번 대접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심방을 준비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친교도 아니고 식사 대접도 아닙니다. 목사님이 우리 가정에 마지막으로 주실 말씀을 놓치지 않아야지 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집에 자꾸 우환이 생기니 귀신을 몰아내야겠다. 하나님의 종들이 와서 우리 집에 와서 찬송하면 귀신이 쫓겨나고 우리가정에 새 기운이 불겠지 하는 마음으로 심방을 받으시렵니까? 그것도 좋은 일입니다. 찬송하는 곳에는 악한 귀신이 역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서는 귀신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내 가정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찬송하며 기도하면 마귀가 도망칩니다. 우환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면, 무당을 불러 굿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어서 무조건 복채만 많이 놓으면 좋은 운세를 만들어주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바르게 사는 것을 원하고 가르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심방의 핵심은 그분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심방은 헌금 거두러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심방하는 날, 예배를 위해 준비한 상에 감사헌금 봉투를 올려놓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심방 받았으니 감사해서 감사헌금은 드려야겠지요, 그러나 예배상에 올려놓으면 서로의 마음을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인은 상위에 놓인 헌금봉투를 바라보면서 혹시 헌금이 적지 않을까, 이 헌금을 드린 대신에 뭘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점쟁이 상에 복채를 올려놓고 좋은 운세를 기대하던 옛날의 우상숭배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심방을 받고 감사해서 드리는 헌금은 교회에 와서 정성껏 바쳐야 옳습니다. 헌금준비가 안되어서 심방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만을 듣기 위해서 준비하고, 말씀을 고대하는 심방이 되시기 바랍니다.
고넬료의 경우, 그는 이미 기도와 구제와 선행이 많아서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칭찬이 자자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않고 말씀을 듣기를 얼마나 사모했던지, 천한 유대인 앞에서, 그 많은 자기 동료가 지켜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영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달라고 청했습니다. 말씀에 대한 갈망이 그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심방은 목적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내게, 내 가정에 주시는 말씀을 듣는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서 말씀을 배우는 가정성경학교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정의 형편에 대해서 목사님이 말씀으로 처방하는 기회입니다.
요즘은 약을 하나 사먹어도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병은 몸에만 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나고, 생활에도 병이 납니다. 건강하지 못한 생각, 건강하지 못한 생활은 몸에 난 병보다 더 심각하게 불행을 가져옵니다.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우리의 영혼과 관련이 있습니다. 심지어 육체의 질병도 영혼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하는 말씀도 있거니와, 영혼이 우리의 삶 전반에서 중심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상태는 그 사람의 생각, 사상, 생활과 육체의 건강 등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건강보다 중요한 것이 영의 건강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는 진단을 받고 처방을 받고 약을 먹고 보를 하면서도, 그 육신과 생활의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영혼을 위해서는 진단도 하지 않고 처방도 하지 않고 투약도 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대 심방은 바로 나 자신과 내가정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받고 처방받고 약을 받는 기회입니다. 말씀으로 진단하고, 말씀으로 처방을 하고, 약이 되는 말씀을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과 생활을 바르고 깨끗하게 하는 진리의 말씀이요, 내 길에 빛이요 내 발에 등불입니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내게 주시는 말씀을 받아들일 때 여러분의 삶이 건강하고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중심의 심방이 되시기 바랍니다.
넷째, 그 심방의 결과
고넬료가 심방을 받은 결과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령 충만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심방을 받은 고넬료만 아니라, 심방하러 갔던 베드로가 변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베드로가 처음 깨달았습니다. 이방인을 향하여 복음이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행 10장은 선교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 심방은 베드로가 작정하고 간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준비하고 간 것이 아니라 얼떨결에 따라갔습니다. 가서 어떻게 해야 하겠다. 무엇을 말해야지 하고 준비하고 간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성령에게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심방의 결과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아마 최고의 심방이었을 것입니다.
이 엄청난 결과는 베드로의 준비성 때문이 아니었고, 고넬료의 준비와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심방을 간 베드로보다도 심방을 받은 고넬료의 준비가 더 큰 역할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심방을 잘 준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번 심방이 하나님이 당신의 종을 내 가정에 보내신다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담임목사님이 가지 않고 부목사님이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목사님이 가시거나 시골출신 부목사님이 가시거나 똑같은 태도여야 합니다.
기피하지 말고 기쁨으로 초청해서 받는 심방, 온 가족과 함께 받는 심방, 오직 말씀을 고대하고 말씀으로 나와 내 가정이 처방을 받고 치료와 축복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말씀을 사모하는 심방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심방을 통하여 여러분의 영혼과 육체가 건강해지고 문제가 해결되고 삶이 아름다워지는 복된 심방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와 고넬료
이필재목사 / 행 10:24~38
오늘 말씀 가운데는 두 사람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입니다. 베드로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 나라 공안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조심스럽게 복음을 전하고 있는 갈릴리 사람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사람으로 현역 장교로 유대 나라에 파병된 군인 신분입니다. 유대 나라 중에 가이사랴 지방은 지역적으로 지중해 해변가에 위치한 항구 도시입니다. 로마에서 군인들이 배를 타고 유대 나라로 들어오면 가장 먼저 닿는 장소입니다. 이곳에 로마 군 부대 본부가 있어서 유대 나라 전역을 감시, 감독하는 지휘권이 있는 유대 나라 사람들이 생각할 때 기분이 좋지 아니한 장소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나오는 두 사람은 국적상 원수가 됩니다. 하나는 지배자 중의 한 사람이요 다른 하나는 식민지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고넬료는 현역 장교로서 유대 백성을 감시하는 직분이요 베드로는 평민으로서 감시를 받는 소시민적 사람의 시민입니다. 국적이 다른 원수 관계요 직업의 차이가 큰 두 사람은 거주지도 하나는 북쪽 지역인 가이사랴요 하나는 남쪽 지역인 욥바에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만나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관계이며 만나봤자 피차 감정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하나님의 소개로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은 기독교 역사를 새롭게 하는 역사의 전환점을 만들게 됩니다. 무엇이 그들을 만나게 했으며 무슨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중심이 되겠습니다.
먼저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공통점을 소유하고 있음이 나타납니다. 공통점은 두 사람이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넬료는 로마 사람이요 직업 군인으로서 유대 나라에 와서 살다가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 생활이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했는지 하나님이 감동하셨다고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이라는 성경은 각 장마다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때마다 인물이 하나씩 소개됩니다. 7장에서는 전체가 스데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8장에는 빌립 집사의 전도하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9장에는 사울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는 성경 기록이 되고 오늘 10장에는 전체가 고넬료라고 하는 로마 장교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공통점은 두 사람이 똑같이 기도 시간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고넬료의 기도시간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평소에 아주 잘하는 사람들도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낮과 밤의 차이가 없어지는 요즘 같은 문화에서는 따로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에 늘 기도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사실 새벽기도 인구도 전체의 5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고넬료는 직업 군인이라서 항상 비상근무를 해야 되는 직업의 어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대개 옛날 군대 사회는 무지스럽고 거칠고 잔인한 것이 통하는 사회가 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고요하게 신앙생활을 잘하고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분위기가 잡혀있는 사회가 아닙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로마 사람으로 식민지 백성을 향해 무력행사를 하기 위해서 현역의 몸으로 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식민지 백성의 종교를 받아들이고 보통 이상의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한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감동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이렇게 나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똑같이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 사람을 기도 속에서 연결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세 번째 공통점은 각자 환상을 보게 됩니다. 고넬료는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노라.” 이런 말을 했는데 이 기도와 구제에서 기도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고 구제는 돈이 필요합니다. 아마 우리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내고 돈을 쓰는 일은 누구나 쉽지 않은 제목입니다. 그 중요한 것을 아주 잘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나도 감동하셔서 지금 이 고넬료에게 큰 축복을 하나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상급으로 고넬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의 내용은 무엇인가? 베드로의 심방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지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시간을 많이 써서 날마다 그 시간에 기도를 하고 돈을 많이 써서 구제를 했는데 어찌나 잘하고 많이 했는지 하나님이 인정하실 만큼 잘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주 큼직할 상급을 내려주실 만합니다. “너 어려운 사람들 구제하느라고 참 돈 많이 썼다. 이제 내가 너에게 큰 재물을 선물해 주겠노라.” 하시든가 고넬로가 군인이니까 “너는 이제 진급을 해서 별을 달고 그 지휘관 생활을 훨씬 잘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겠다.” 이래야 좋을 것 같은데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니 베드로에게 심방을 오라고 청하라.” 이런 상급을 주었습니다. 심방 한번 오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해서 그런 일을 지금 시키고 계신 것인가? 베드로는 사실 그것도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여기 보면 베드로가 좀 배가 고팠다고 했습니다. 뭐 먹고 싶은 상태에서 기도를 하니까 무엇을 잡아먹으라고 하늘에서 보따리 하나가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열어보니까 자기가 일평생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유대인의 부정한 동물이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이런 것은 내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나이다.” 여러분! 예루살렘에 한국 식당이 없습니다. 허가를 안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간 이후에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온 세상에 한국 식당이 지금 어디나 있기 때문에 음식 불편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없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을까봐 허가를 안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먹는 종류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 것들만 가득했는데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그것을 잡아먹으라고 하니까 “나는 이런 부정한 동물을 한 번도 잡아먹은 일이 없나이다. 깨끗하게 살았나이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깨끗하다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두 사람의 기도 중에 환상을 보여주셔서 연결을 시켜주셨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상과 위치가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두 사람이 만날 수 없는 상황을 말해줍니다. 로마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인은 당시 세계 정복자의 권위가 있습니다. 그들의 우월감은 유대 민족 같은 사람들은 형편없는 노예 취급을 합니다. 로마 군인 장교는 정복자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으며 명령할 수 있으며 때로는 약탈도 하고 어떤 때는 부녀자 강탈을 하고 수틀리면 죽여 버립니다. 옛날은 그러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식민지 백성에게 자기 집에 심방 한번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시켰습니다. 고넬료는 즉시 하인을 불러서 그가 있는 욥바로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이라고 했으니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계신 베드로 선생을 빨리 모시고 와라.” 베드로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로마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유대 사람들을 멸시 취급한다면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 로마인들을 멸시합니다. “너희들은 다 부정한 사람들이야.” 유대인들은 다른 종족과 교제를 하는 그 자체가 죄라고 오늘 성경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하는 로마인은 부정한 동물에 속합니다. 멸시 취급합니다. 그런데 ‘내 입안에 넣으라고 하니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런 신학적인 의문을 생각하고 있을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전부 고넬료 이야기를 설명하니까 ‘아! 하나님이 나를 로마인들에게 보낸 것이다.’ 그렇게 환상을 해석하고 따라 나서서 가이사랴 고넬료 로마인의 집을 심방 온 것입니다. 욥바에서 가이사랴까지 35킬로미터 정도입니다. 먼 길로 심방을 갔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의 심방을 맞이하기 위해서 일가친척, 친구들을 자기 집에 다 모아들이고 기다리고 있다가 베드로가 도착하니까 베드로를 보고 하나님을 만난 듯 행동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당신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데 우리가 듣고자 모였나이다.” 행동은 어떻게 합니까? “베드로가 들어오는데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려 절하니” 로마 군대 지휘관이 식민지 백성 앞에 발까지 엎드려 절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목이 뻣뻣한 사람들이 점령군의 군대 지휘관일 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부하 다루듯 합니다. 직업에서 굳어진 행동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 친척 사람들을 다 모아둔 그런 자리에서 갈릴리 어부 출신 유대 식민지인에게 발까지 엎드려 절을 합니다. 자신의 위치를 완전히 평가 절하했습니다. 베드로가 뭐라고 여기 말합니까?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사람 취급을 안 하고 하나님 취급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말했습니다. 고넬료가 초청자로서 이렇게 오시게 된 동기를 전부 설명했습니다. “사실 내가 이 나라에 와서 당신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을 믿고 살다가 감동을 받아서 그동안 기도를 열심히 했고 나름대로 구제활동을 열심히 했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서 복을 주셨는데 바로 베드로 사도의 심방을 받으라는 축복을 주셔서 오늘 이렇게 오시게 되었나이다.” 베드로는 모든 이야기를 듣고 34절에 보면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사실 베드로는 유대니즘이나 내셔널리즘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아브라함의 혈통 후손에게만 전해야지 이방 사람에게는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상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아! 로마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았다고 비로소 발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일장 설교를 했더니 설교 도중에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여서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그 시간에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의 만남이 무슨 역사 창출을 해냈는가? 유대나라 사람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이 8장에 에티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내시이고 10장에 와서 고넬료가 최초의 사람들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유대인의 국수주의 민족관에 사로잡혀서 타민족에게 복음 전할 생각을 절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베드로는 선교 사명을 깨닫고 로마를 향한 눈이 비로소 열리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로마 백부장으로서 세 사람이 예수님과 바람직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발견됩니다. 마태복음 8장에 하인이 병들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와 길에서 만나 간구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도 이만한 믿음을 내가 만나보지 못했다.” 이렇게 칭찬하시고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현장 지휘하던 백부장 지휘관이 그 변하는 초자연적 내용을 보고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늘 성경말씀 고넬료 백부장과 베드로의 만남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환상이 보입니다. 반드시 베드로나 고넬료같이 똑같지 아니하여도 영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장래 일에 대한 역사 비전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전을 보십시오. “나는 꿈이 있다.” 그 꿈이 얼마 안가서 이루어집니다. 이게 기도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도적 관찰입니다. 그 다음에 구제는 하나님의 기억에 남을 만큼 상달되는 힘이 있다는 것이 여기 나타납니다.
어떤 청년 하나가 이민을 와서 살게 되었는데 방송을 들었습니다. “지금 어떤 사람이 신장 이식이 필요한데 기증자가 필요하다.” 이 청년이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내가 왜 이 방송을 듣게 되었는가 나도 선한 일을 한번 해야지.’ 그리고는 병원으로 달려가서 종합 검사를 하고 가능했기 때문에 서슴지 않고 자기 배를 열고 하나를 떼어서 환자에게 주어서 그 환자는 아주 건강하게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기 수술비로 190만원 정도를 지불하고 소리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 가족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사람을 찾아야지요. 찾아보니까 주유소에서 종업으로 일하고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어휴! 어떻게 알았습니까?” “네! 잠간 계세요. 지금은 제가 일이 바쁩니다.” 그리고 그 주유소 가스통에다 “알 필요 없음.” 그리고 어디론가 살아져 버렸습니다. “그의 마음 하나님 기억에 남았으면 됐음.” 이게 구제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제일 큰 상급은 무엇인가? 영적 은혜입니다. 그렇게 많이 기도하고 돈 많이 쓴 것에 대한 상급이 베드로 사도 심방 와서 설교 한번 듣는 것인가?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가? 대단합니다. 만약 고넬료에게 하나님께서 다른 것을 주신다고 하셨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그런 것은 안주셔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대로마의 지휘관이라는 권세도 내게 있고 돈도 내게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적 은혜를 고귀하게 내려주신 것에 대한 감격입니다.” 그 가족들은 로마 사람으로 최초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고넬료는 자기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자기 고국인 로마로 돌아갔고 베드로는 땅 끝까지 전도를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역시 로마로 갔습니다. 역사가 흐르고 또 흘렀습니다. 유대 땅에서 활동하던 두 사람은 로마 땅에서 같이 활동하다가 주어진 자기들의 생을 거기서 둘이 마감했습니다. 그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자라고 또 자라서 마침내 고넬료의 집안 세례로부터 시작한 복음의 전파는 로마를 세계 복음의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세계 교회 중심의 대성당을 건축하고 지하에 자기 무덤을 만들고 안장되어 있습니다. “너희들은 가난한 약소민족 노예 신분들이야! 나는 대로마 점령군의 지방 사령관이다.” 하고 베드로를 보지 않고 하나님같이 보았던 한 이방인의 신앙이 그렇게 잔인하게 핍박을 가하던 대로마를 뒤집어엎는 기초 공사가 되었고, “너희는 부정한 동물이야. 영적으로 야만 족속이야.” 하고 무시하던 베드로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깨달음을 통해서 절대 금물인 이방인에게 과감하게 세례를 준 것이 세계 교회 역사의 변화 지점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매동 갈보리교회가 바로 욥바의 기도실이 되고 가이사랴 기도 장소가 되어서 우리 모두의 만남이 세계 복음화의 기초 역할이 되는 축복이 계속되어 지기를 축원합니다.
교회의 사명
행 10장 23~33절 / 박지온목사
오늘 오후예배 후에 특별히 우리 신년도 우리 처음 건축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이제 발표가 되면서 발효가 되겠습니다 만은 구체적으로 계획이 되어 있고 또 그런 과정에서 이제 너무 장소가 좁다 이래서 교회 모든 성도들과 우리 집사님들이 계속해서 이 건축문제 또 특별히 우리 장로님들이 앞에 서서 논의하는 가운데 구체적으로 좀 방향을 설정해야 될 것 같아서 우리 장로님들하고 이미 건축위원회로 위촉을 받은 집사님들 오늘 오후에 모이게 되겠습니다. 그러면서 다음주가 벌써 성탄절 이브입니다.
저는 벌써 성탄절이 되었나? 제가 이 거리에 나가면서 보면서 번쩍 번쩍 거리기에 뭐 벌써부터 해 놓았느냐? 그랬는데 벌써 그렇게 되었어요. 그리고 다음주 월요일 날이 성탄 축하예배가 되겠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계획은 금년도에는 성탄 축하예배 때 드리는 헌금은 뭐 불우이웃 돕는 문제로 특별히 뭐 우리 불우이웃은 다른 게 있습니까? 연약한 교회들 개척교회들 아마 중심으로 해서 돕는 것으로 아마 그렇게 전액 쓰이도록 그렇게 계획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면서 내가 이번 주에 이렇게 말씀하는 것은 주일날 광고하고 월요일 날 하면 너무 바쁘니까 기도하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되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해야 되겠습니다.
지난주에는 우리 교회행정이라는 것으로 조금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말세가 될수록 어떤 면에서 교회 사명을 자꾸 잃어가고 있다는 이런 느낌 때문에 "교회의 사명"이다 그렇게 제목을 잡았습니다. '교회'라 그럴 때에 여러분들이 보이는 이 교회 건축은 교회당이라 그렇게 해서 사실은 교회라는 의미를 말할 때는 이 교회당 송현 교회당 보이는 건축물 이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말하자면 그 국회의원들이 모여 있다면 뭐가 됩니까? 국회 의사당이 되는 것이죠.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인 여러분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뭐가 됩니까?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원칙 교회는 여러분 개개인이 교회라 신학교에 계명을 보면 그렇습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니 나는 하나님의 전이다" 하나님의 전이다 그 말이 교회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안에 누가 계시기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내가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이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비로소 경건하게 살고 깨끗하게 살고 하는 것은 그 이후에 문제예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 만들고 하나님의 교회가 되었기 때문에 주시는 축복도 그 이후에 문제입니다. 전적으로 교회라는 배경은 여러분 개개인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의 사명이 도대체 뭐냐? 오늘은 개인적인 사명도 사명이지만 오늘은 좀더 높이 넓게 말해서 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이 교회가 도대체 뭘 해야 되느냐? 그 다음에 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도대체 뭘 해야 되느냐? 이렇게 좀 잡아 봤습니다. 방향을...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다 끝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에 고린도서죠.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것은 복이 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 안 하면 뜻이 아닌 것을 근심하면 저주가 됩니다. 망하게 된다고 그랬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것은 조금만 생각하면 여러분 중심에 정말 내가 오늘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속에서 하는 것이냐? 뜻이냐? 그러면 복이 되지만 괜히 쓸데없는 것 가지고 밤잠도 못 자고 근심하고 눈이 퉁퉁 부어 있으면 그 자체로 벌써 망하는 겁니다. 그보다 더 등신 바보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 교인들은 조금만 눈뜨면 진짜 참 할 생각이 있고 할 근심이 있지 아무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막 말로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다가 사업이 망해도 괜찮습니다. 받아합시다. "사업이 망해도 뜻대로 망하면..." 누구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망하면 뭐가 됩니까? 그건 복이 되는 겁니다. 사업이 복을 받고 막 사업이 번창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 밖에 번창하고 복 받았다는 말은 그건 저주와 연결됩니다. 금방!
그래서 참 감사한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안에 서 있다 이 사실 자체가 교회인 나 개인으로도 그 다음에 여러분이 함께 모여서 교회가 하는 모든 계획 속에서라도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안되면 바로 사단의 통로가 된다 그 말입니다. 저주의 통로가 되고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밤잠을 설쳐도 하나님의 뜻대로 설치면 되요. 이제부터 밥을 못 먹는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뜻대로 안 먹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뭐 아무리 무슨 문제가 와도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과 은혜가 되죠. 그때 연말연시에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있을 수 있지만 받아합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자!" 하나님의 뜻대로 나가면 다 이루어집니다. 아파도 하나님 뜻대로 아프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다 그 안에 축복과 은혜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개개인으로 교회를 볼 때 그렇습니다 만은 이제 단체로 여러분들이 모여서 교회라는 곳을 통해서 우리가 볼 때에 점점, 점점 교회가 교회 사명을 잃어 간다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또 한번 받아합시다. "사단은 말세에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뭐합니까?" 발악합니다. 발악! 발악해요. 진짜 그래서 나는 이 말씀을 가만히 묵상하면서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진짜 요즘세상 발악하는 세상이다. 발악합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조만한 희락이 까지 발악을 하더라구요. 지 고집대로 안 그러니까 막 고집 피우고 나는 그 저 지난날에 분명히 나를 좀 보면서 저라는 것은 저게 정상은 아니거든요. 뭔가 불만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하는 소리거든... 애들이 막 고집 피우는 것은 불만이 가득 차 있다는 이야기거든요. 저는 이제 그래서 '아! 기도 많이 해야 되겠다.' 복음이 안 들어가면 어릴 때부터 저게 보통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는 그런 말을 하기도 그렇고 이 시간을 빌어서 우리 며느리에게 진짜 애기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 기도! 흔히 이제 좀 뭐 지대로 크겠지 아닙니다. 진짜 기도해야 됩니다. 왜 영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젓 때입니다. 이 시기입니다. 참 기도해야 됩니다.
여러분 지금 아이를 키우면서 정말 기도해야 됩니다. 그리고 옛날하고 달라 가지고 이제 세상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워낙 이기주의라는 것이 이것이 상대적인 이기주의보다도 뿌리깊게 박혀 있어요. 그래서 지금현재 우리나라도 어려운 것이 집단 이기주의라든가! 개인 이기주의라든가! 이게 엄청나거든요. 그런데 교회 안에 이기주의는 더 큽니다. 믿음가지고 이기주의 나오면 이건 못 말리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제 아들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그래도 나쁘다는 아이는 아니거든요. 제가 볼 때에 모르겠습니다 아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착하다! 그러면 좀 이상하게 들릴 것이고 그런데도 제가 뭘 느끼느냐 하면요. 그래도 우리 때는 일단 뭐 생기면 부모부터 먼저 생각하는 것이 몸에 베여 있어요. 일단 어른들! 이러고 몸에 베여 있는데 나는 가만히 애를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이 아들이 뭔 일이 생긴다! 뭘 한다! 일단 지부터 생각해요. 자기부터... 그리고 자기하고 유익이 되는 것은 뭐 열심을 내어서 하고 밤잠 안 자고 하더라 구요. 그런데 유익이 안 된다! 거들 더도 안 봐요. 이것이 쭉 연속이거든요. 가정생활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나도 조금 걱정이고 저의 집에서 또 걱정이 뭐냐하면 불효라는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벌써 불효 자식들 다 만들어 놨어요. 유교 배경이 아니고 그것은 뭐냐하면 자기 중심으로 완전히 굳어지면 이건 불효하고는 상관없어요. 부모생각 못합니다. 그래서 아마 정말 이런 기준을 교회중심 아니면 한번 잡아 줄 수도 있겠다 싶은데 뭐냐하면 하나님 앞에 십일조 드리고 여러분 정말 참 바로 한다 그러면 부모 앞에 십일조 드려야 합니다. 부모 앞에... 그러니까 우리는 십 일조, 십 이조는 하나님 앞에 하고 선교헌금하고 안 합니까! 그리면 십 삼 조는 부모 앞에 드려야 합니다. 부모 앞에 드리고 그래야 바로 우리가 자식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육적으로도... 왜 그러냐 하면 우리도 모르게 지금 현재 자라오는 세대가 하나 아니면 둘만 컸기 때문에 애들 중심으로 키웠어요. 전부! 그래서 오냐! 오냐! 이렇게 키웠거든요. 그러니까 나만을 위해서 살았고 키워줬고 그랬기 때문에 뭐냐하면 머리 자체가 그리로 돌아가지가 않아요. 이것이 나중에 성장을 해서 엄청난 파장으로 지금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걸 사단이 완전 말세에 통로로 작용을 하더라 구요.
이래서 뭐 그런 문제 뿐 아니고 하여튼 일단 뭐 발악한다는 말 자체가 나는 정말 정치적인 문제나 이런 모든 문제 전반에 걸쳐서 제가 이런 말씀하면 아마 여러분들이 조금 그 연세가 든 분들은 이해가 좀 들 겁니다. 젊은 사람들은 목사님 뭔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왜? 워낙 이기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자기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못 느낍니다. 나는 뭐 부모님 생각한다 생각하는 것은 과자 하나 주는 것 밖에 생각 안 해요. 그 다음에 원천적인 생각이 안 되더라 구요.
제가 우리 아들 들어낸 것은 다른 애들 하면은 허물을 이야기하는 것 같고 내 자식 이야기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내가 평소에 좀 느낀 것을 이야기를 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 불효한다! 뭐 한다! 그런 게 아니고 의식구조 자체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는 정도로 발악을 하느냐 이 세대가 과연 사단이 충만합니다. 충만한데 어느 정도냐?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지금 초등학생이 원조 교재 하는 것 우리가 봤잖아요. 우리 이 뭔가 전도캠프 하면서... 우리가 이 봤거든요.
그러니까 이 수업이 안 됩니다. 그 다음에 어제 핵심에 이야기를 조금 들으니까 그 부산에 직접 교회에 왔어요. 그 애들이 왔는데 이렇게 보니까 초등하교 2학년 자리가 원조교제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돈을 얼마씩 받느냐 하나 앞에 한 사람 당 만원씩 받더라 구요. 그런데 이걸 다 어른이 주선을 해 오더라 구요.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마 제가 그 대략 돌아가는 것 보니까! 최소한 10만원 내지 15만원 받아요. 다른데 소개할 때 받아 가지고 다른 것은 다 띠어먹고 그 다음에 하고는 애한테는 용돈으로 만원을 주고 그것을 시켜요. 시키는데 그 뭔가 이 이야기가 부교역자들이 전도사님들이 한번 찾아가 보니까 저 뭐 PC방에다가 뒤에다가 방을 만들어 가지고 그런 아이들을 여러 사람을 두고 지금 대기 중에 있더라 그래요. 참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느냐? 싶을지 모르지만 사단이 발악하는 겁니다. 그건 사람 마음으로 안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인간이 짐승 가죽을 덮어썼다고 그라지만 그렇게 못하거든요. 그건 완전히 뒤집어 져야 하는 것이지 마음이 그것은...
그래서 오늘 아침에 신문을 가만히 보니까 무슨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 자살 클럽이 있더라 구요. 세상에 별 클럽이 다 있더라 구요. 여러분 클럽 좋아하지 마세요. 그런데 그 자살 클럽이라는 데가 뭘 했느냐 하면 돈을 100만원 줄 테니까 네가 와서 나를 좀 죽여달라! 여러분 자살이라는 것은 그건 진짜 씌어야 합니다. 뭐가 씌어야 합니까? 귀신이 씌어야 합니다. 그것도 그 마음 좋은 귀신이 씌어 가지고는 안 돼요. 독한 귀신이 씌어야 죽지 안 그러면 그건 죽도 못해요. 그러니 죽으려고 하다가 못 죽은 사람 숱하게 많지 않습니까! 나도 씌어서 죽으려 그러다가 보통 귀신이 안 되더라 구요. 하나님의 은혜로 저는 살았습니다. 만은 그래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안 되니까 와서 죽여달라 그럽니다. 100만원을 줄 테니까 내 지갑에 들었다. 와서 죽여달라 그래서 진짜 찾아가서 스물 몇 살이던가 칼로 찔러서... 서울이에요. 죽였어요. 죽이고 돈 100만원 가지고 가다가 붙잡혔어요. 사단이 발악하는 때입니다. 이런 클럽들이 지금 Site를 통해서 또 일어납니다.
어저께 윤성주 목사님이 뭔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 채팅에 자기 컴퓨터에 어떤 여학생이 같이 이제 놀러 갔는데 이 여학생이 자기한테 뽀뽀를 해 주는 겁니다. 이 뭐 너무 놀란 것이죠. 왜냐하면 남자 친구도 아니고 이건 뭐 그냥 여자들이 그냥 하는 뽀뽀 정도가 아니고 아주 깊이 뽀뽀를 하니까 이 뭐 당황한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말세가 갈수록 사단이 발악 하니까 정신이 정상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이걸 가지고 동성 연애라 그럽니다. 지금 급속하게 번지고 있어요. 왜 그 사람 본 마음으로는 그렇게 안 됩니다. 본 마음으로는 남자가 여자를 봐야 좋아지고 여자가 남자를 봐야 좋아지고 안 그렇게 됩니까! 여러분 지금 현재에 여자가 여자보고 좋고 음욕이 불일 듯 일어나고 이러면요. 그건 완전히 미쳤습니다. 그건 저주예요. 성경에 그런 것 없어요. 그런데 지금 현재 그렇게 돌아가고 있거든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자녀들이 따님들이 중고등학생이다 뭐 대학생도 좋습니다. 자꾸 친구 집에 자주 놀러가고 밤잠을 자꾸 자주 자고 오거든 진짜 뽀뽀를 하고 다니는 줄 조사를 해 봐야 됩니다. 못 믿을 세상이에요. 지금!
여러분 소돔이라는 것이 뭐냐하면 호모입니다. 그게 동성연애! 동성! 거기다가 소돔 고모라 멸망이 뭐냐 하면요. 호모로 멸망했어요. 천사가 남자 천사인데, 남자의 모습! 그런데 온 성에 남자 적고 크고 와 가지고 우리가 방해하리라! 그랬거든요. 그건 호모입니다. 하나님께서 멸망 시켜버렸어요. 말세가 그렇게 되리라! 그렇게 말세에 모형들로 보여 줬습니다. 요즘 이상합니다. 미국에는 이런 동성연애자들 정식으로 가정을 허락했어요. 허락을 했어요. 이것도요! 여러분 가정에 부부가 있다면 남자와 여자가 가정이 되고 아이를 낳아야 가정인데, 남자 남자끼리 모아 가지고 결혼했다 그러고 가정이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허락을 했더라 구요. 참 세상이 요지경이라고 하지만은 사단의 발악입니다. 이것이 이건 본 마음가지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까지 이것을 허락했어요. 호모 말하자면 동성연애자를 목사로 세웠습니다. 정식으로 허락했어요. 왜 제가 이런 말씀을 하느냐? 교회가 교회 사명을 이때 바로 못하면요. 여러분 지금 엄청난 사단의 역사 속에 다 휘말려 들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전도와 선교라는 말을 했습니다 만은 지금 이 시기에 우리 교회가 교회 사명 못하면 우리뿐 아니라 뭐냐? 우리 후손들까지 다 죽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자신이 아이들 키우면서 제가 조만한 아이들을 보면서 진짜 기도해야 되겠다. 저거 뭐 지금 나갔다 그럴 때에 그러면 이때에 뭔 문제냐 하면, 정식 기도해야 된다! 그럴 때에 바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여러분 신분문제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영적 싸움에 대한 눈을 확실히 안 열어 놓으면요. 아이들이 흔들려 버린다 말입니다. 이것만되면 문제는 달라지거든요.
그래서 여러분 이 사명을 여러분 통해서 바로 교회를 통해서 우리 가정 교회를 통해서 교회니까 가정을 통해서 사실 가정 그러니까 가정은 교회니까 통해서 구체적으로 일을 이루어 나가야 말세에 방주 역할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이 안에 우리 안에 우리 가정에 자라온 아이들 들어오는 아이들 완전 승리할 수 있도록... 이것이 바로 여러분과 저를 세우신 하나님의 사명입니다. 내가 뭘 하겠냐? 그럴지 모르지만 받아합시다. "나와 같은 사람은 이 땅에 딱 나 혼자 한 사람 뿐이다." 여러분들도 얼마나 귀하게 여기겠어요.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중요한 분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 중요하다 그런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되고요.
그래서 오늘 이런 개인적인 부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좀 더 구체적으로 넓게 말해서 이렇게 해 봅시다. 그러면 이런 교회의 사명을 말할 때에 여러분 우리 교회에 들어온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냐? 그래서 우리 교회에 와서 이 단체적으로 모이는데 교회라는 곳에는 지금 어떻게 이 사명을 감당해야 될 것이냐? 어떤 사람인가 먼저 분석을 해야 될게 아닙니까? 그래서 먼저 제가 이 교회에서 여러분 다 오신 분들을 분석을 해서 느낀 것은 이미 저희교회에 왔다 그럴 때는 확실해요. 받아합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기 안 믿는 사람 한번 손들어 보세요. 없을 줄 뻔히 알아요. 내가! 왜? 다 알아요.
그래서 나 개인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다 이렇게 해서 신분으로 벌써 불신자의 신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다 되었어요. 되었는데 문제는 뭐냐하면, 거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비롯해서 다 같이 그 불신자의 상태에 머물러 있더라 이겁니다. 이러니까 여기서 나오는 것이 뭐냐? 머물러 있다 그것으로 끝나면 괜찮은데 거기에 머물러 있으니까 제2차 적인 문제가 와요. 그게 뭐냐? 사단이 여러분들을 다 속여 버립니다. 속이고 있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뭐냐 하면 말씀 듣고 하나님의 진리 속으로 따라가고 그것보다도 사단에게 거의 잘 속는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이걸 알아야 합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그래서 나는 뭐 믿고 그러는데... 아닙니다. 여러분 상태에 머물러 있어요. 신분은 분명 하나님의 자녀인데 불신자의 상태에 있어요. 사단이 지배하고 사단의 지배에서 못 벗어나면, 그걸 가지고 로마서에는 뭐라 그랬냐? 받아합시다. "사단의 종노릇한다" 끝나는 겁니다. 마귀의 종노릇합니다. 그러니 종은 아니에요. 왜 하나님의 자녀인데 신분은 그런데 마귀에 종노릇하니까! 어떤 상태에 있느냐? 마귀에 종노릇하니까! 상태가 어떠냐? 마귀의 종이나 비슷해요. 그래서 세상 사람과 비슷한 생각하고 세상 사람과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거의 생활 속에서 계속 속고 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어려운 문제예요. 이 문제가 바로 여러분과 제게 지금 현재에 들어온 많은 교인들이 갖고 있는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사단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사단이 딱 하나 하는 것이 있어요. 여러 가지 안 합니다. 거짓말해서 속이는 겁니다. 사단의 주특기가 아니고 사단의 본격적인 이것 하나밖에 안 합니다. 거짓말! 그래서 여러분 광명의 천사인체 해 가지고 웃고 들어와서 속이고 그 다음 뿔 달고 들어와서 속이고 그 다음에 위협하면서 속이고 최선을 다해서 별 짓을 다 하면서 여러분을 속입니다. 속이면서 뭘 못하느냐? 예수님은 그리스도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게 만드는 겁니다. 그걸 잊어버리게 만들어요.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도 말씀을 강조했습니다 만은 아침에 일어 날 때마다 침상에서 기지개 펴면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렇게 한번씩 외칠 필요가 꼭 있다 싶어요. 이것이 안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배경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이것이 안 되면 또 속이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실이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속이게 되니까 오는 것이 뭐냐하면 바로 그런 문제예요. 오는 것이 사단이 속이고 불신자의 상태에 빠져 버리니까 영적 문제가 부닥쳐 버리거든요. 영적 문제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예수 믿는다! 안 믿는다! 이전에 영적 문제라는 것은 사단이 없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사단의 존재에 대해서 별로 느낌이 없어요.
지금 이게 현재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 전도하면서 기존 교회가 부딪힌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 제일 컸습니다. 우리가 사단, 사단 한다고 우리가 저 이단이다! 그랬거든요. 사단 결박한다고 뭐 이상한 소리한다고 그랬거든요. 여러분 정말 사단 결박하는 것은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보면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뭘 줬습니까? 권세 주었어요. 제어라는 말이 그걸 좀 심각하게 말하면 결박이고 안 그러면 제한 시켜 버린다. 그런 이야기거든요. 원수의 모든 능력이라 그랬습니다. 모든 능력을 제어할 뭡니까? 권세를 우리에게 힘을 주었다. 능력을 주었다! 그 말이 아닙니다. 권세를 주었습니다. 보통 능력은 힘 자랑이지만 권세는 이것은 인격과 연관된 문제죠.
그래서 우리는 이 권세를 가지고 이 권세를 믿으면 믿을수록 모든 사단의 세력에서부터 우리는 그 사단의 속임에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권세를 받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사실을 완전히 복음 속에서 깔아야 되는데 그런데 영적 문제 그럴 때에 이걸 자꾸 놓쳐버려요. 사단이 없다 생각합니다. 세상에 밝은 세상에 무슨 사단이 있어! 그러면 여고괴담은 뭐할 라고 보노! 나는 새삼 놀라는 것은 인터넷에 들어가면요. 그런 뭐 뱀파이어라든지 뭐 이상한 것 다 나옵니다. 공포! 그게 전부 무슨 배경입니까? 사단의 배경이더라구요. 이상하게 그걸 또 좋아해요.
요즘은 옛날 같지 않아서... 하기는 제가 어릴 때도 이야기를 무슨 이야기를 좋아했느냐 하면, 공포이야기! 그래서 뭐 학교 이야기를 하면서 그러면서 밤중쯤 되어서 하얀 소복을 입고 문을 빼꼼히 열면서 그러면서 조용한 복도에서 '또박, 또박, 또박, 또박 와!' 그러면 깜짝 놀라고 안 그랬습니까! 지금 사단의 배경이 그것입니다. 하나도 좋을 것이 없어요. 무슨 문제 말하고 싶으냐? 분명히 사단은 존재한다는 정도가 아니고 공중 권세를 잡고 세상을 뭐라 그랬습니까? 지배한다고 그랬어요. 이 사실을 인정을 안 하려 그럽니다. 여러분 조금만 잊어 버리면 여기에 들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사단이 뭐하다 구요. 종노릇하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속아 버립니다. 자꾸 속아 버려요. 이렇게 되니까 뭐가 오느냐 하면요. 이렇게 되면 생각이 바로 될 수 없죠. 정신 문제가 자연적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정신 문제가 나오면, 이렇게 되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신다. 이렇게 해서 분명히 이 사실을 알아야 하고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면 여러분 누가 함께 합니까?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느냐! 여러분이 하나님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누가 함께 합니까? 귀신이 함께 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여기 와서 앉아 가지고 별로 뭐 아무렇지도 않고 보기에는 똑 같은 것 같아도 우리는 보이진 않는 비밀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
그리고 지금 밖에 막 쫓아다니는 것 같고 활발하게 웃고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분명히 웃는 것 같지만 웃는 속에 누가 함께 합니까? 귀신이 역사 합니다. 그게 불신자의 상태요. 그런데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로 성령이 함께 하시는데도 뭔가 귀신과 동행하는 그런 상태 속에서 못 빠져나왔다 이겁니다. 그러니 자꾸 속는 겁니다. 막 염려에 빠지고 걱정에 빠지고 근심에 빠지고 염려 걱정 근심은 벌써 여러분과 저의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를 바로 조금만 이해 해 버리면요. 역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이것이 딱 바탕이 안 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모든 것들이 헤 깔리게 됩니다.
제가 모처럼 뭐 자주는 못 갔습니다. 그래서 좀 이야기가 있어 가지고 잠깐 백세를 만나서 가 있는 동안에 그 옛날에 6.25 때에 피난 가던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는 제 장조카보다 한 살 적고 제가 한 살 많거든요. 8살 때인가 아마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 어려웠던 것이 밥 먹을 때에 배가 고프니까! 그때는 먹을 것이 별로 없었고 하니까! 꽁보리밥 이 보리쌀을 삶아 가지고 여름이니까 밥을 갖다 놓으면 지금도 나 참 그 신기하다기보다도 뭐 이상한 것보다도 감사한 것은 조카라는 그런 배경에서 삼촌이라는 항렬 때문에 그러는지 한번도 대드는 법이 없더라 구요. 조카가 싸움도 안 걸고 내가 어지간히 건드려도 맞고있지 그냥 한번 대들지도 않아요.
그런데 문제는 밥 때마다 문제네! 밥 때마다 뭐가 문제냐 하면요. 밥을 딱 퍼놓으면 분명히 조카 밥하고 내 밥하고 똑같이 펍니다. 퍼는데 보면 조카 밥이 많아요. 확실히 많아 보여요. 이건 뭐 틀림없이 보이는데 뭐 내 밥은 분명히 적어요. 그러면 이렇게 바꾸어 놓아요. 바꾸어 놓고 보면 또 저쪽에 것이 많아 보여요. 그러면 또 바꿔! 이렇게 해 가지고 보통 서너 번은 바꾸네 그렇다 그러면 애들은 어지간하면 막 붙잡고 뭐 안 바꾸려 그러고 그럴 것 아닙니까! 가만히 보고 있어요. 그 이야기를 하고 나니 참 우습습니다 만은 바로 밥그릇을 서너 번 정도 바꿀 정도면 돌았습니다. 정상이 아닙니다.
왜 제가 이런 말하느냐 하면, 바탕이 벌써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얻게 되면, 생각과 마음이 흔들려 버려요. 그러니까 생각하는 것이 정상이 안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생긴다. 헷갈려 버리는 겁니다. 더 사랑하는 것이 사업이나 일이나 직장이나 더 사랑하는 것이 생겼다! 헷갈려 버립니다. 판단이 정확하게 안 나오는 겁니다. 정신 문제가 뭐 별것인줄 압니까? 그게 다 정신문제예요. 사단이 그로 통해서 통로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망하는 사람은 다른 게 아니에요. 생각이 정상이 아니니까 망하는 겁니다. 정신인 것 같은데도 그게 사단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딱 붙잡지 않으면 사업과 직장생활이 어렵게 되느냐? 여기 다 나옵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데 잘 한 것 같아도 정상인 것 같아도 뭐냐하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조용히 먼저 근본적으로 이 문제가 복음 안에서 여러분이 바로 되어 있으면 일이 되도록 되어 있어요. 뭐 돈을 벌인다! 생각만 정상이면 저절로 돈은 법니다. 마음만 정상이 되면 돈 법니다. 사기 아무리 치려고 덤벼도 마음만 정상이 되어 있으면 절대로 그 사람에게 사기 못 칩니다. 내게 사단이 틈탈 수 있는 통로가 생기면요. 대번 들어와 버리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되어야 되는 그 일이 뭐냐? 복음 이 외에는 그런 게 없다니 까요. 그러니까 오직 복음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복음 사랑해야 되고 그리스도로 그것이 바로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 무슨 사건이 생길 때에 그리스도! 그리스도! 그리스도! 이것이 확실히 되면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안 되면 자기도 모르게 판단을 잘 한다고 해도 헷갈려 버린다니 까요. 정상인데도 헷갈리는 것 같아요. 이런 문제가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육신 적인 문제에 고통이 오고요. 그래서 여러분 망하는 것이 특별히 교회 행정이 망하는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우연히 하나님이 망하게 하겠어요. 자기 자녀들 어렵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듭니까! 하나님이 우연하게 만든 게 아닙니다. 뜻이 있고 계획이 있어요. 그건 망할 이유가 있고요. 어려워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어떤 면에서 나는 이 사실을 긍정하면서부터 마음이 편해지더라 구요. 내가 아픈 것은 이유가 있다. 이것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문제 있다! 문제 있을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 우리의 눈을 딱 뜨고 잡아 버리면요, 하나님이 정말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신다!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육신의 부모는 너를 버릴지 몰라도 나는 절대로 너를 버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누가 끊습니까! 나 자신도, 환란도, 핍박도, 기근도, 모든 것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끊을 자가 없다! 그랬는데... 그래서 당신의 자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을 보내기까지 하셨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성탄이라는 것은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면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에게 주신 그 역사가 바로 성탄 아닙니까! 이 엄청난 축복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신 역사거든요. 이렇게 되니까 뭐냐하면 생활이 엉망이 되죠. 문제가 그러니 여러 가지 문제가 전부 나오는 겁니다. 불신자의 여섯 가지 상태 속에서 내가 빠져 나왔다! 그래도 아닙니다. 분명히 신분은 빠져 나왔는데, 그 상태에서 못 빠져 나왔다! 자꾸 속게 되는 겁니다. 받아 합시다. "속지만 않으면 만사 형통이다"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데 여러분 속지만 않으면 만사형통입니다. 자꾸 속이니까 여러분 문제가 생기죠.
그러면 또 문제는 뭐냐하면, 교회에 올 때에 제가 이 교회를 가만히 보면서 어떨 때는 제가 속으로 참 뭐 저런 게 있나! 욕을 하다가도 맞다! 교회에 모인 사람이 주로 어떤 사람이 모이냐? 건강한 사람이 모인 다기보다도 주로 많은 경우 상처 가진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그래서 구역, 구역이 이제 권찰 님들이 신년도에 새로 구역을 편성하고 뭐 이렇게 하고 그럴 때에 아마 좀 구역 편성하는데는 늘 이제 좀 좋은 구역, 좋은 어떤 구역을 맡으려고 생각하고 그런 분들이 안 있습니까! 또 옛날에 내가 하던 것도 지속하고 싶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만은, 일단 여러분 구역 맡으면서 구역 안에서도 여러분 느껴야 될 것이 우리 구역 원들 참 좋다! 그건 다 거짓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구역을 맡아서 보면서 느끼는 것은 구역 안에 모든 사람들 다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데 배경이 뭐냐? 상처를 다 가지고 있어요. 가정, 가정 다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야 됩니다. 구체적으로 ...
그래서 이 상처가 있기 때문에 상처를 통해서 상한 감정이 전부 다 있습니다. 이 상처 통해서 감정이 상해 있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건드려지면 이상하게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교회 나올 때에 건강하고 상처가 없고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별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예수께서 뭐라 그랬냐 하면요. 한번 받아합시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고..." 의사가 필요 없다는 말이죠. 병든 자에게 라야 뭐가 필요합니까? 상처가 있기 때문에 주님이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교회 나왔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가 좀 이해가 되어야 되겠어요.
그래서 저는 그 시간이 갈수록 뭘 좀 느끼느냐 하면, 문제는 이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또 상처를 건드려 놓으면 더 발악을 하니까 될 수 있으면 이 상처를 고쳐 줄 수 있어야 되는데 그 고쳐 줄 수 있는 길이 뭐냐? 아무리 생각해도 길이 없어요. 다른 길이 없어요. 그게 뭡니까?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스도 듣고, 그리스도 영접하고,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게 될 때에 뭐가 오느냐 하면, 치료가 되니까! 첫 번째 나오는 증세가 뭐가 됩니까? 평안이라 그랬습니다. 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첫 번째 물어보신 것이 너희에게 뭐가 있을 지어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 그랬습니다. 오늘 평강이 없으면요. 정말 평강을 얻을 때까지 기도 하시고요. 얻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로,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오신 그 분을 마음에 모십시오.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라는 말은 뭡니까? 이름입니다. 여러분 예수 탄생! 예수 이름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직분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쉽게 예를 든다면 박 지 온이라는 것은 이름입니다. 그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어진 거죠. 내 이름입니다. 그런데 목사! 그러면 뭡니까? 직분입니다. 그런데 직분은 어떤 수준을 요구합니다. 이름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아요. 내 아들 딱 낳으면 필요한 이름지어 줘 버리잖아요. 그러면 어릴 때부터 받잖아요. 그러면 이런 뭐 수준이 필요하지 않아요. 직분은 필요해요. 목사의 직분을 얻기 위해서도 10년 간 공부를 해야 목사가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그리스도의 직분을 얻기 위해서 받기 위해서 뭘 하셔야 되느냐? 인간으로 오셔야 되고 인간으로 오셔서 여러분과 저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서 뭘 해야 됩니까? 피 흘려야 돼요. 그래서 피 흘리시면서 그 직분을 구체적으로 성취시킵니다. 다 이루었다. 여러분 너무 아름다운 이야기예요. 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나마 사막다니" 어찌해서 나를 버리십니까! 그러면서 죽음 직전에 다 이루었다! 참 너무 감사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모든 죄악을 다 해결하시고 인생의 문제 다 해결하시고 우리 하나님 앞에 자녀로 이제 주님의 이름만 부르면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이 축복된 이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믿으면 됩니다. 믿으면 됩니다! 그리스도 누구든지 그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주신다. 그랬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믿는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누구로 역사 합니까? 성령으로 역사 해 주신다. 그랬습니다.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확실히 내 안에 여러분 안에 계시는 사실을 인식할 때마다 뭐가 되느냐? 생활이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생활이 정상이 돼요. 생활이 바로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안 되어 졌을 때는 어디서든지, 가정에서든지, 교회에서든지 상처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상처 나왔다! 감정이 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감정 상하면 상한 감정을 통해서 뭡니까? 사단의 통로가 되게 되어 있어요. 뭐든지 그것을 걸고 들어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상한 감정을 통해서 뭡니까? 싸움이 되기도 하고, 시기의 통로가 되기도 하고, 분쟁이 되기도 하고 이게 초대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이런 모든 문제들!
여러분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에 이 땅에 오직 하나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느냐? 나 같은 사람 둘도 안 만들었어요. 나에게 주신 사명은 딱 한 사람뿐입니다. 내가 너 같을 수 없고 네가 나 같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입니다. 시기 할 것도 없고 분쟁할 것도 없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를 내 인생을 주권 적으로 인도하십니다. 믿으면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다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걸 이해만 조그만 해도 응답 받게 되어 있어요. 나는 왜 이러냐? 내 팔자는 왜 이러냐? 내 팔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속에 참 계획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여기에 다 모든 계획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안 될 때에 뭐냐하면, 이것이 안 될 때에 흔히 어디에 빠지느냐? 또 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과거를 들추어보면요. 정말 평탄한 과거가 아니더라 구요. 뭐 나부터 시작해서 모든 사람들이 거의 과거 상처 많습니다. 과거문제! 그래서 저는 과거 문제는 여러분 지금 이라도 과거에 붙잡혀 있는 순간마다 누가 역사 합니까? 사단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삽니까? 현재입니다. 바로 지금! 그런데 현재의 누구로? 하나님의 자녀로 그렇게 되면서 미래에 영원한 축복과 행복 속에 설 수 있는 그 자리에 우리가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매일수록 뭡니까? 이것은 통로가 되는 겁니다. 상처가 되고 통로가 됩니다. 그러니 과거를 생각하면 이 가는 사람 많습니다. 여기서 못 벗어나면 그게 전부 통로가 돼요.
제가 인터넷에 들어가서 그 무협지라는 그 중국에 중국 소설 중에 주로 무협지 아닙니까! 중국 소설에 무협지를 딱 가보니까! 중국 소설이 상당히 재미가 있어요. 이 뭔가 SF해 가지고 뭐 날아다니고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더라 구요. 그리고 그것도 칼싸움하면요, 막 공중에 올라가 가지고 날아 가지고 칼싸움하고 그 다음에 물 위로 막 뛰어 다니면서 칼싸움하고 그게 처음에는 신비롭다가도 참 허망하다 싶은 생각이 나더라 구요. 그런데 그 중국 무협지의 배경이 전부 과거와 얽혀 있습니다. 뭐냐? 원수 갚는 것! 부모의 원수를 내가 갚는다. 할아버지 원수를 내가 갚는다. 전부 이것이 무협지에 전부 흐르는 맥이더라 구요.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어릴 때부터 막 고생을 하고 팔려 나가고 그래가지고는 막 참 생명을 걸고 칼싸움 연습해 가지고 그래가지고 어느 날 또 막 부모 원수를 갚고 그 자식이 또 원수 갚는다고 또 막 무예 연습을 해 가지고 또 막 원수를 갚고 과거에 그래서 중국이 완전 사단 놀이터가 된 것이 바로 그겁니다.
그 중국의 상징이 용 아닙니까! 옛 뱀 곧 용 계시록에 말한 것처럼 사단의 상징입니다. 맞다! 과거에 매여 있는 이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과거의 상처에서 떠나지 못하는 이상 이것은 사단의 통로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사단의 종노릇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과거는 이상할 수 있습니다. 과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과거는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과거는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지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누가 됩니까? 자녀입니다. 그러면 어디 갑니까? 앞으로 미래에 찬란한 하나님의 축복과 그 은혜의 역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나에게 누가? 성령이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게 되어야 되요. 그래서 과거는 죄악이요. 과거는 어렵고 과거는 힘들지라도 지금 하나님 앞에 서면...
그래서 옛날에 우리 이게 안 되었을 때는 뭐 이상한 짓! 말하자면 기생 라합같은 사람은 절대로 우리 교회에 들어오지도 못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들어오십시오. 과거! 그래서 그 제가 유행가지만은 늘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과거를 묻지 말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안 묻겠다 그랬는데 지가 자꾸 묻습니까! 그렇잖아요. 하나님이 안 묻겠다 그랬는데 내가 너희 말을 내 등뒤에 던져 버렸다! 죄의 과거는 등뒤에 던져 버렸다!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다 잊어 버렸다. 그러면 자꾸 지가 생각하려고 그럽니까? 지가 누군지 압니까? 지가 자꾸 생각하려 그러고 이래서 갈등하고 상처받고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내 과거 때문에... 아닙니다. 다 주님께서 잊어버렸습니다. 지금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지금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무슨 문제냐? 문제만 생기면, 사건만 생기면, 일만 생기면 우리가 잘 알잖아요.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가지고 와 버리면 되요. 성령의 인도 속으로 가지고 와 버리면 되요. 기도 속으로 가지고 와 버리면 된다고 그랬습니다. 이제 너무 쉽습니다. 그리고 받아 합시다. "내가 할 일은 모든 문제를..." 어디로 가지고 와요? 하나님의 계획 속으로 가지고 와 버리면 내 할 일 끝났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 해결하시기 위해서 엄청난 희생을 하나님이 치렀어요. 생명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부르짖을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모실 때마다 내 안에 모든 과거의 문제 염려 걱정 근심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되고 누구로 말미암아 예수로 말미암아 참 평안과 안식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누려지는 만큼 누려지는 만큼 여러분 흔들리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이해가 되어 지는 만큼 여기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게 되어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와 볼 때에 정말 중요한 분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말씀을 사모하는 분들이 있어요. 정말 교회에 왔는데 이상하게 그 사람은 교회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참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고넬료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이탈리아 특수부대입니다. 로마에서부터 보낸, 정부로부터 보낸 말하자면 집행관 자격으로 어떤 면에서 이 소수의 백 부장이지만은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그런 자격의 군대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 이 박 지 온 목사도 그렇게 여러분도 그렇잖아요. 박 지 온 목사가 뭐 이상한 사람이다. 그렇게 이야기 안 하잖아요. 그냥 박 목사! 그러고 대구의 박 목사 그렇잖아요. 그래도 그렇습니다. 이해 할 사람은 하고 못할 사람 못하고... 그런데 안 기부장관이 중수부 장관이 와 가지고 무릎을 박 목사한테 딱 꿇었다. 보통 일이 아니에요. 이것도 있을 수 없고 이게 힘든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한 광경이 오늘 벌어 졌어요. 이탈리아의 특수부대 백 부장이지만 특수부대 장교입니다. 갈릴리 어부인 베드로 앞에 무릎을 딱 꿇고 모든 가족들, 그 다음에 모든 친척들 다 모아 놓고 우리가 당신을 모신 것은 당신 발 앞에 엎드린 것은 당신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그랬습니다. 이걸 가지고 제자라 그럽니다.
왜 하나님께서 여기 10장에 상세히 고넬료 가정에 개심 하는 과정을, 회개하는 과정을 상세히 그려 놓았느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에서부터 복음이 이방으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고넬료가 하게 됩니다. 그 가정에서... 그래서 베드로도 너무 놀라 가지고 뭐냐하면, 도저히 이건 베드로 의식 속에도 유대나라 사람에게만 복음이 있지 이방인에게는 안 간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게 유대나라에 큰 잘못이거든요. 세계에서 대 제사장의 나라로 세웠는데... 그래서 전 세계 복음화 하라고 세웠는데 그들 유대인들이 우리만 복음 받지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개, 돼지처럼 그 사람들은 영혼도 없다 그런 생각까지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도 이상해서 베드로가 너무 놀라서 무릎을 딱 꿇으니까! 뭐라 그랬냐 하면요. 28절 말씀에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백 부장으로 와 있으니까 유대풍습을 알죠.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행 10:29)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베드로도 참 답답하죠. 무슨 일은 무슨 일! 세계복음화지! 미안합니다 만은... 뭔 일이냐 하면, 베드로가 왜 율법의식에 잡혀 가지고 지난주에 말한 것처럼 율법 의식에 잡혀 가지고 이게 안 열리는 겁니다. 아! 하나님이 불렀구나! 맞다, 세계복음화!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먹는 것도 죄거든요. 그러니 개, 돼지하고 먹으면 안 되잖아요. 여러분들이 개하고 돼지하고 먹으면 됩니까? 하기야 요즘에는 뭐 개하고 돼지하고 먹더라 만은 애완용으로 불러놓고 같이 먹고 같이 잠자고 하더라 만은, 그러나 진짜 사람은 안 그럽니다. 그건 가짜 사람이겠죠...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또 오해하지 마시고 무슨 이야기냐 하면, 베드로가 그런 의식 구조에서 못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이방인이라고 해서 그런 시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불렀다 이 말이에요. 이 자리에 불렀다. 세계 복음화 하기 위해 이 자리에 불렀다. 여기에 베드로가 쭉 눈뜨기 시작하면서 이제 세계복음화에 문을 여는 겁니다. 문을 열면서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그 의식가지고 안 되니까 누구를 세웠습니까? 바울을 대치했습니다. 그게 여기 나옵니다. 바울을 부르면서 내가 이방인을 위해서 고난받고 핍박받는 나의 뭡니까? 택한 그릇이라 그랬습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여러분과 저 참 중요합니다. 엄청난 세계복음화에서 나를 위해서 이 땅에서 복음전하는 이 일을 위해서 핍박받고 어려움 받는 이 일에 택한 나의 뭐라고요? 받아합시다. "그릇이다!" 믿습니까! 이 엄청난 축복 속에 세워졌거든요. 이 은혜를 붙잡고 우리가 복음 속에서 확실히 섰다 무너질 일이 없습니다. 이 넘어질 리가 없죠. 이런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말씀이 사모가 됩니다. 그래서 말씀 사모가 된다는 것은 이게 축복 중에 축복이에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 이런 사람들은 교회도 많고 지금 신자도 많습니다. 그리고 모든 책들이 얼마나 좋은 책들이 나옵니까! 책도 많고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은 아무나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받아합시다. "복음을 사랑하는 자라야. 복음을 가진 자라야!" 그들을 만날 때에 뭐가 나옵니까? 역사가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무나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점 잘 붙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 마지막 시기에 중요한 자리라는 것을 아무나 예수 믿자! 가자! 이렇게 오는 사람하고 다릅니다. 정말 제자는 복음을 가진 자와 만나야 역사가 터지기 시작합니다. 복음을 가진 자와 만나야 눈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가진 자를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복음을 가진 자는 들어가면 돼요. 갈급 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때에 안 들어갔다 그게 죄악 중에 죄악이라 그랬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전도고 선교라 그랬습니다.
이때에 성령께서 제가 지난주에 설명을 했습니다. 이것을 거역하고 전도와 선교를 거역하는 사람은 성령 회방 죄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오는 시간도 죄 사함을 못 받지만 영원히 하나님 앞에도 죄 사함을 못 받는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그런데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았다 할 지라도 상급 받는 일에는 해당이 안 된다 그랬어요. 왜? 바울이 여러분과 저를 놓고 나의 면류관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진짜 하나님 앞에 상급은 전도의 열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상급이라 그랬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과 제게 엄청난 이 축복과 은혜의 자리에 세웠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남은 생애 많지 않지만 생을 걸고 해야될 일입니다.
생을 걸고 정말 여러분들이 이제 건축문제 나오고 모든 문제 나옵니다. 모든 건축문제, 이런 문제 다른 게 아닙니다. 이런 갈급한 영혼들이 모여서 세계를 살릴 수 있고 한국을 살릴 수 있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일에 쓰임 받는 일이지 다른 문제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메시지 준비하고 그러기에 너무 좁으니까 그렇게 한다. 그런 배경이지 다른 일이 아닙니다. 만약에 옛날처럼 그런 어떤 생각으로 우리가 뭘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건축문제 오늘 논의하겠습니다 만은 구체적으로 정말 이문제 위해서 여러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뭐 속으로 계획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야 되겠습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구체적인 은총과 역사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것이 안 될 때에 뭐가 나오느냐? 시험이 오고 갈등이 오고 문제가 오거든요. 그런데 여러분 염려와 걱정과 근심은 빌립보서 4장에 5절 6절 말씀처럼 이것은 다 기도의 제목입니다. 이제부터 이렇게 되면 밤에 잠이 안 옵니까! 문제가 있어서 기도제목입니다. 응답하시려고... 그 다음에 또 더 큰 문제입니다. 핍박과 또 더 어려운 문제가 왔다. 그럴 때는 여러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에서 쭉 보면 하나님께서 축복 주실 때에 축복을 주셔도 그건 경상도 사투리로는 축복을 징길 수 있어야 되거든. 징긴다는 말이 뭔 말인지 압니까? 그건 진짜 여러분 이것은 사투리를 일부러 썼어요. 진짜 실감나게 축복을 징길 수 있어야 복을 받아도 복이 됩니다. 축복을 유지한다는 말로 쓰면 좀 약한 것 같아요. 축복을 징긴다는 말은 유지한다는 말과 비슷한 말인데요. 축복을 내가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이런 어떤 인격이 되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요셉, 그 다음에 다윗 그냥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축복을 총리로서 세계를 안을 수 있도록 그 인격을 만들기까지 엄청난 핍박과 어려움이 다가왔습니다. 그게 준비되고 난 후에 축복을 주었을 때에 얼마든지 징길 수 있다. 하루아침에 총리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습니까! 힘이 없습니까! 받아 합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언제나 같은 이 말 가지고 많은 위로 받습니다. 어이구, 내가 되겠나? 또 그런 것 또 맡겼나! 아래께 공문 받고는, 또 이걸 나한테 맡겨 놓았나! 제가 원치는 않지만 사람이 그렇게 없다 그러면서 또 뭘 맡겨요. 그래서 내가 지금 현재 건강문제로 할 수 있나? 그러다가 주여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배고픔에도 처할 줄 알고 그 다음 배부름에도 처할 줄 알고 가난한데도 처할 줄 알고 부자한테도 처할 줄 알고 모든 일에 내가 적응을 했다 말하자면 연단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13절에 하는 말이 받아합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강조해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할렐루야!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양향모목사 / 행 10:24-29
저와 여러분이 오늘 여기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일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가를 알고 바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기 때문에 오늘 여기 이 시간은 정말로 귀한 시간이고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여기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은 잘 안하시지만 오늘 특별히 여러분에게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여기 오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시옵소서. 라고 예배를 시작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일로 나를 부르고 왜 나에게 예배를 드리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려봤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사도가 고넬료에게 한 말입니다. 베드로사도가 고넬료의 초청을 받아서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고넬료에게 물었던 말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설교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이 말씀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질문이라면 뭐라고 대답할까 한번 생각하시면서 설교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본문 24-26절을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욥바에 있던 베드로사도가 북쪽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고넬료가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놓고 베드로사도를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 베드로가 도착을 하니까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리어 절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를 일으켜 세우면서 나도 사람인데 신에게 대하는 것처럼 절을 하느냐고 하면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여기 절을 한다는 단어는 때로는 예배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는 단어로 신적인 존재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에 황제는 신적인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황제나 하나님께 예의를 표할 때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이런 절을 한 것은 베드로를 신적인 존재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를 신으로 대하지는 않았겠지만 신이 보낸 사자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예우를 했습니다. 베드로가 그 사실을 알고 절을 하는 고넬료를 얼른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똑 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넬료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정예부대의 백부장이었고 베드로는 피지배국의 이름 없는 한 사람일뿐이었습니다. 인사를 하려면 베드로가 먼저 인사를 해야 할 사람이었고 백부장 고넬료는 인사를 받아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사를 받아야 할 고넬료가 아주 공손하게 신을 대하듯 절을 한 것은 베드로 사도에게 그럴 대접을 받을만한 귀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에게 없는 특별한 것이 베드로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 특별한 것을 얻기 위해서 예의를 갖추고 맞이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메시야가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었고 그 메시야를 만났고 그 메시야에게서 진리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가이사랴에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그 가이샤라는 오늘 본문의 가이사랴와 다른 가이사랴 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고백을 했고 여기는 도시와 다른 가이사랴입니다.
다른 도시인 가이사랴이지만 가이가랴에서 고백한 그 신앙고백이 생각나는 도시에서 그 신앙고백의 주인공인 베드로를 만나게 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록 베드로가 그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유대인으로서 그것도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고 쫓겨 다니는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고넬료가 이렇게 간절히 그를 만나고자 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에게 절을 하는 고넬료에게 “나도 사람이라”라고 하면서 일으켜 세운 것에서 또 하나의 교훈을 받습니다.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복음은 베드로의 것이 아닙니다. 그가 매우 소중한 것을 가지고 전해주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베드로를 아주 귀한 존재로 여기고 교황을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하면서 특별한 영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일부 개신교 목사들도 예수님의 복음을 가지고 자신이 높은 자리에서 영광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람일뿐입니다. 그 누구도 사람 위에 군림해서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본문 28절에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간청에 의해서 고넬료의 집에 오긴 했지만 사실은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만나고 교제하는 것은 유대인 법에 의하면 불법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들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월감 때문에 이방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만나는 것이 금지되었거나 교제하는 것이 금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교제할 때 조심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만날 때 조심을 했습니다. 특별히 초청을 받아서 함께 식사를 하는 일에 대해서는 각별히 조심을 했습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 중에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들이 많았습니다. 고기를 먹을 때는 하나님께서 부정하게 여기는 고기도 있었고 이방인의 제사에 쓰인 고기도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으로서 먹으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불법을 행할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온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보여주신 환상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부정한 짐승들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사람이 속되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신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과 섞여서 사는 것을 별로 좋아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나가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키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가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속화 되어서 세상 사람들처럼 불법을 행하면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세상 사람들과 함께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거기가 우리가 복음을 전할 전도지요 선교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직 거기서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조심을 할 것은 우리가 세속화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을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사탄의 종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으려고 대기 중인 사람들이고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큰 상을 받을 날을 기다리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신분이 다르고 목적지가 다르고 사는 원리가 다른 사람들을 따라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요 해서는 안 될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일모레 죽을 세상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긴다고 거기서 뭘 부러워하고 따라하고 그럽니까. 그런 것은 사실 별 것도 아닙니다. 허무한 인생들이 어쩔 수 없어서 마시고 취하고 정신을 잃고 싶어 하는 불쌍한 짓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된 것은 기적적인 일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우리 가운데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 차원이 다른 하늘에 계시고 우리 스스로는 찾아가 만날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저 먼 이스라엘 나라 백성들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우리들은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난 죄인들의 자손이며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에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저주받은 인생이요 비참한 인생에 불과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신분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칙을 깨뜨리고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한 신분을 가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부러워할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29절에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에게 묻는 말입니다. 내가 불법을 무릎 쓰고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고넬료가 뭘 잘 모르고 엉뚱한 것을 알려고 하거나 요구하려 한 것은 아닌가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앉은뱅이가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3:6) 라고 하면서 고쳐준 일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고 묻는 것은 아마 그 앉은뱅이가 금전적인 도움을 받을까하고 베드로를 바라본 것처럼 고넬료도 이 세상의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초청한 것이 아닌가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사실 고넬료는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를 부를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 사는데 있어서는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무엇을 부탁할 그런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돈이 많아도 고넬료가 더 많고 권력이 있어도 고넬료가 더 큰 권력을 가졌고 힘이 있어도 고넬료가 더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베드로를 굳이 청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고넬료는 그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순종하여 초청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뭔가 다른 하나님의 뜻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베드로를 초청하라고 하신 줄 알고 초청을 하였습니다.
고넬료도 이방인이었지만 이미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10:2)라고 한 것처럼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구제도 많이 했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그를 인정하시고 기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갖출 것을 다 갖추고 하나님께서도 인정할만한 선한 일을 하는 그에게도 그 외에 필요한 것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을 비롯하여 세상 만민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에 관한 소식입니다. 사람들을 죄에서 사망에서 구원해 주실 메시야 구세주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 메시야 되시는 분 즉 그리스도가 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베드로는 그 예수님의 제자요 그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할 임무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메시야에 관한 소식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기 위해서 초청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초청하여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고넬료와 같이 세상에서 출세를 하고 갖출 것을 다 갖춘 사람이라고 해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구제를 많이 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이외에 그 어떤 종교행위나 선행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왜 하나님을 부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며 여기 모였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세상의 출세보다 종교적인 고행이나 그 어떤 선행보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소중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하나님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은혜 받기 위한 두 가지 준비
행 10장 24절 / 김남준목사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10장은 신약 전체를 통털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 하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다름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복음이 전파되는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방인들이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서도 유대인들만 예수님께 나아와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구원의 역사는 구약시대부터 이방인들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 10장이 신약 전체에서 기념비적인 장이 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다음에 성령에 의해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강력한 부흥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복음의 도에 굴복해서 주님을 영접하는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고 10장은 그러한 복음의 불붙는 불길이 이방인들의 사회를 향해서 본격적으로 번져 가는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의 질서
우리들이 분명히 아는 사실 하나는 10장 바로 앞에는 바울이 빛으로 나타난 그리스도를 만나고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를 통해서 이방 선교의 새 장을 열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의 목회자였으며 사도들 중의 우두머리였던 베드로를 통해서 이방 선교의 장을 여셨다는 사실이 우리들에게는 매우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이방 선교를 위해 계속 사역을 했습니까?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문만 열어주고 열어 놓은 문으로는 사도 바울이 나가서 선교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질서를 보게됩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에 의해 이방 선교의 새 장이 열렸다면 아마 교회는 상당한 혼란을 겪어야했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분명히 소명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열 두 제자도 아니었고 열 두 제자와는 별도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사도로 세움을 받았기 때문에 이방 선교를 위해서 애쓰는 사도 바울과 유다를 중심으로 하고 있는 기존의 사도들 사이에 상당한 갈등들이 생겼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선교의 문을 열어주는 데에 베드로를 사용하심으로 그가 돌아와서 자기도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정말 율법으로 따지자면 이방인들과 함께 사귀는 것이 옳지 않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계시를 보여 주셔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끔 문을 여셨다는 소식을 권위 있게 그들에게 전해 줌으로써 이방선교에 대해서 예루살렘교회가 도장을 찍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 집회가 이방인들을 위한 첫 번째 사경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순절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경험한 것과 똑같은 성령의 강력한 부으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경회가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사경회였고 그래서 고넬료의 가정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성령의 강력한 부어주심을 경험함으로서 캄캄한 이방 선교의 역사에 찬란한 불길이 당겨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을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사경회
고넬료의 가정에서 있었던 사경회의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첫째는 집회를 인도하는 베드로가 기도 중에 집회를 시작했고, 그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 또한 기도로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기도시간에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방인 선교의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먹을 수 없는 짐승, 곤충 같은 것들만 가득 있는데 그것을 먹으라는 소리만 세 번 들리고 사라졌으니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데 왜 이해를 못했을까요? 그것은 그의 사고가 편견으로 가득 차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이 전파될 수 없고 이 복음은 오직 유대인들만의 것이라는 것과 그들에게는 구원이 있을 리 없고 성령의 부어주심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다는 일이라는 편견이 꽉 차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을까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은 희랍어 성경에서 '예루살렘에서도 온 유다에서도 사마리아에서도 그리고 또한 땅 끝에서도' 라는 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가 예루살렘이든 유다이든 사마리아이든 땅 끝이든 지금 있는 그 곳에서 주님의 증인이 되라는 뜻인 것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사실을 말씀해주셨지만 너무나 두터운 편견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는 들렸어도 이해 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같은 시간에 부흥회에 참석할 고넬료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짝지어 주신 것입니다. 고넬료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욥바로 내려가면 거기 베드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청하여 사경회를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고넬료가 제 구시에 기도할 때에 환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시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기도하기로 정해 놓은 기도 시간을 따라서 기도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앞서 베드로가 기도한 시간이 6시라고 한 것을 감안해 볼 때 세 시간 이상 계속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그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한 사람이 인도하고, 기도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로 준비하는 ‘마음’
그러면 이제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곳에 그냥 은혜를 주실 수도 있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를 바라시는가? 우리는 흔히 우리가 마음의 빗장을 잠그고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면 일방적으로 마음의 문을 여시고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물론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는 이 말씀은 신앙의 인격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신앙이 인격적이라는 것과 기도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인격의 자리는 마음인데 이 마음에는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의지 즉 지,정.의가 있어 그것들을 움직이는 중심 사령부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을 통해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이해를 통해서 마음으로 내려가고 마음에서 변화가 일어나서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여서 인생을 변화시키기에 이릅니다. 마음이 바로 변화의 통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머리로 들어가서 마음으로, 마음에서 인격으로, 인격에서 삶으로 옮겨가며 한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핏 길을 따라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마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 메시야이고 이 복음을 너희에게 전한다." 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할 때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준비되지 않는 마음의 길을 내기 위해서 온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가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기보다는 그들의 마음을 깊이 회개케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음성을 듣고 자신들의 마음의 잘못된 것을 고치고 삶을 고치면서 메시야를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게끔 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는 준비된 마음을 타고 흘러 들어옵니다. 기도하던 사람에 의해서 인도된, 기도한 사람이 참여한, 그 사경회에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가 부어지는 것은 오래도록 기도하면서 마음의 밭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드러운 밭으로 기경되었기 때문입니다. 집중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영혼의 상태가 좋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아이처럼 사모한다고 하더라도 심겨지는 말씀보다는 놓치고 흘러가는 말씀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듣기 위해 기도하기 시작 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던 마음의 많은 패역과 굴곡, 거친 마음, 하나님을 향한 반항심, 이런 것들이 다 그 기도의 눈물을 통해서 무너뜨려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높은 교만은 낮아지고 주저앉아 절망하는 마음들은 절절히 돋우어지면서 평평한 땅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떠오르면 자신의 마음 어느 구석에든지 안 비치는 곳이 없이 하나님 앞에 준비된 마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인격적’기도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것은 종교적인 요행수를 바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기도가 한계에 도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식이 깊고 풍부하게 살아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는 하나님께 드릴 말씀도 많아지기 마련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나를 인식하는 인격적인 관계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한 자식이 아버지에 대한 인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아버지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만 요구하게 된다면 얼마나 비인격적인 관계가 되겠습니까? 이처럼 비인격적인 기도에는 향기가 없습니다. 그것은 청구서만 하나님께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인격적인 기도는 입으로만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타내야겠다는 목표 하나만을 아뢰는 것도 아닙니다. 인격적인 기도에는 자기 비추임이 있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가를 깊이 깨닫게 해줍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 기도 제목을 통해 나 자신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며 나의 필요만 채우는 기도제목이 아닌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갈망하며 내가 정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인지를 풍성한 말씀의 빛에 비추어 보게 됩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의 기도가 풍성하고 인격적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나게 만드십니다. 공부를 할 때 예습을 하고 가면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게되기 때문에 어디에 더 집중해야 될지를 알고 그것에 대해 손들고 질문할 수가 있는 것처럼 신앙에 있어서도 여러분들이 깊이 기도하기 전까지는 여러분들에게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 잘 모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그것이 절대로 필요 없는 것 일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을 하십시오. 이런 것들을 부수고 또 새로운 인식이 깨어나게끔 만들어 주는 중요한 수단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면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흘리는 그 눈물은 설교를 잘 들을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준비케 합니다.
'열린’사경회
두 번째로 이 고넬료의 가정에 은혜가 넘친 것은 고넬료가 사람들을 다 초청했기 때문입니다. 24절에 보면 "이튿날 가이샤랴에 들어가니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라고 기록한 것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일가와 친구들을 모두 모은 열린 사경회였으며 그리고 또 하나는 기다리던 사경회 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선 두 번째로 이 사건의 특징은 고넬료 한 사람만의 사경회가 아니였다는 것입니다. 기도한 사람은 고넬료 한 사람이었지만 그런데 고넬료가 데리고 온 사람들 모두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기도를 한 사람이 그 사람들을 인도해서 데리고 오면 그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렇게 인생에 벼랑 끝에 섰다가 주님을 만난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위기가 변하여서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벼랑의 끝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지금 그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며 함께 나와 하나님을 만나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에게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생 자체를 새로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서에 보면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사람들은 별과 같이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눈을 들어서 우리의 주위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일가, 우리의 친척 그리고 우리의 친한 친구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말하기를 "그런 사람들이 불쌍하지 않느냐! 만약에 불쌍하지 않다면 당신이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넬료는 집회를 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다음에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일가와 친구들을 다 모았습니다. 여기는 그 이야기가 나오니 않지만 고넬료는 성령의 지시를 받아 시몬 베드로를 초청하는 이 사경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것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을 달래고 구슬려서 어떻게 하든지 이 축복된 자리에 참여 시켜야 하겠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이었던 일가와 친구들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정말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이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는 인생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동안 우리의 일가 우리의 친척, 우리의 친구, 우리의 직장의 동료,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내게도 그 피묻은 복음을 들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우리의 귀에 들려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물붓듯 성령의 은혜를 부으시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사람들을 가득 채워서 이 피묻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기다린’사경회
마지막으로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기대를 가지고 고대하는 마음을 가진 사경회였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듣기에 앞서, 이 시간들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원하는가하는 생각들을 먼저 정리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기대를 가질 수 있습니다. "아, 내 힘으로 몸부림쳤지만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이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주님의 음성만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좋다. 그리고 주님이 말씀만 주시면 순종할 각오가 되어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환경도 열어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것보다도 주님이 우리를 만나기를 더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고대하는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오늘도 길을 열어주시며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가족과 이웃의 영혼을 책임지라
행 10장 24~33절 / 김영대목사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이 유태인을 마구 학살하고 있을 때, 독일에 한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부러울 것 없는 중견사업가로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유태인 학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사업가는 그 장면을 목격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태인은 마땅히 죽어야 할 민족으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노인, 아이, 남자, 여자, 부모와 자식 가릴 것 없이 가스실로 들어가 울부짖으며 죽는 모습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말이 600만 명이지, 부천시 전체 인구가 대략 100만 명 정도 되는데, 부천에 있는 모든 어른과 어린아이를 합한 것의 여섯 배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입니다.
발가벗겨져 가스실로 들어간 유태인 어머니와 아버지들은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가스를 덜 먹도록 부둥켜안고 애쓰다가 쓰러져 가는 처절한 모습을 보고는 그는 어떻게 하든지 힘닿는 대로 죽음의 수렁에 있는 유태인을 구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 당시 독일인 관리들이 타락해 있었기 때문에, 돈만 주면 가스실로 갈 유태인들을 구해 내어 다른 곳으로 피신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몇 년 동안 그가 구해낸 유태인 숫자가 천백 명이 넘었습니다. 이렇게 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구해낸 후, 그는 마침내 빈털털이 무일푼이 됩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그의 모든 재산을 다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 돈을 다 털어 유태인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기 위해 기차를 태워서 떠나 보낸 후, 그는 선로에 앉아 하염없이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리고 일어나 선로를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무심코 자기의 손목에 차여있는 시계와 손가락에 끼어있는 금반지를 보게 됩니다. 그는 소리를 지릅니다. "내가 이것을 왜 끼고 있지? 이 시계와 반지를 팔았더라면 몇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이것을 내가 왜 끼고 있지?…"하며 탄식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쉰들러(Schindler)입니다.
수년 전에 스필버그를 통해서 영화로 제작되어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깊은 감동을 안겨 주었던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란 영화를 기억하실 줄 압니다. 이 영화는 이런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쉰들러가 구해준 유태인들과 그 후손들이 현재 약 6,000명이 되어서, 자신들을 'Schindler's Jews(쉰들러의 유태인들)이라고 부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스카 쉰들러! 그는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 정부의 초청을 받아서 유태인들의 큰 환영을 받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태인 학살 기념관과 박물관에 기념 식수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수도 텔아비브의 '영웅의 공원'에는 그를 기리는 글을 담은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글귀의 마지막에는 이 오스카 쉰들러를 추억하면서 유태인들이 이런 말을 새겨 놓았습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바로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이야기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한 영혼의 가치는 그냥 한 명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에게는 온 세상보다도 큰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씀으로서 한 영혼의 가치와 귀중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의 귀중성을 아시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그 영혼을 건져 구원하라는 중요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어 가는 영혼들을 사망의 길에서 구해 내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는 평화로운 나라입니다. 물론 지금도 의문사 문제가 사회의 이슈이고, 가끔은 억울하게 죽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예외적인 일일 뿐 모두가 평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육적으로 보는 시각일 뿐, 영적으로 본다면 지금도 히틀러 당시에 죽어갔던 수많은 유태인들처럼 사망의 길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입니다. 우리 나라 인구의 4/3이 지옥 유황불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들의 영혼을 안타깝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 믿고 사망의 길에서 벗어난 저와 여러분에게 그들의 영혼을 살리는 일을 부탁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영혼을 살리는 쉰들러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며 여러분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한 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내가 구원한, 혹은 구원해야 할 '쉰들러리스트'와 같은 명단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대가를 지불하고 구해낸 혹은 구해 내야 할 영혼의 명단을 가지고 있는가? 쉰들러는 자기 재산을 다 없애며 구해낸 천여 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그 후손들이 6천 명에 이르고 있는데, 내가 구원한 영혼의 리스트에는 과연 누가 쓰여 있는가? 또 몇 명이나 쓰여 있는가? 나로 인해 하나님을 만나 새 삶을 시작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오늘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한 영혼을 귀중히 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9월 11일은 미국 뉴욕에서 테러사건이 일어난 지 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일주년을 맞은 날 미국에서는, 사건이 일어났던 세계무역센터 현장에서 대통령도 참석한 기념행사가 있었습니다. 그 기념식에서 일년 전 그 날에 희생당한 2,801명의 이름을 한 명씩 낱낱이 부르며 기념식을 치렀습니다. 2,801명이나 되는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만 대통령 이하 모든 참석자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한결같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아! 이런 것들이 국민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미국의 전통을 말해주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런 마음가짐과 풍토가 미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갖게 하고 미국을 세계최강국으로 만들어 가는 기초가 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이 이런 전통과 가치관을 미국 자국민들에게만 적용시킬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국민들에게도 적용시켜 나간다면 온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나라가 될 터이지만, 아직 미국은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국의 국민만이라도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풍토는 우리의 형편에서는 여간 부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명을 귀히 여기는 전통이 아직은 확실하게 세워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자 그대로 국민 한사람의 가치를 천하보다 귀중히 여기는 가치관과 전통은 우리 나라를 세계강국으로 끌어올리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만, 그 점에서 우리는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나라가 그런 수준에 있을지라도 교회만큼은 달라야합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다. 어린아이 한 명이라도 실족케 하면 맷돌을 메고 바닷물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이점에서 교회는 생명존중과 인권존중에 있어서 온 국민이 따를 귀감이 되어야합니다. 교회에서조차 한 생명, 한 영혼을 소홀히 여기게 된다면 이 나라와 사회는 희망이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오랜 시간 기도하며 준비해 왔던 이웃초청주일이 3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부르셨고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말씀과 함께 저와 여러분을 이 세상에 파송하셨습니다.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죽어 가는 영혼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성도가 얼마나 됩니까? 죽은 영혼들의 탄식 소리를 들으며 하나님의 아픈 마음에 동감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얼마나 됩니까? 내 자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내 사랑하는 남편이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나를 낳아주신 부모와 일가와 친구들이 불타는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혼을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성도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영적인 대 각성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당시 완악한 세대를 책망하시면서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마11: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불신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만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먼저 믿은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영혼 사랑하라는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주의 종들을 통해 때로는 피를 불고, 때로는 애곡을 하는데도 별 반응이 없는 완악한 세대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전도합시다. 한 영혼이라도 주께로 인도합시다!"라고 외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완악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들,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 영혼은 불타는 지옥에 떨어져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며, 또한 그 피 값을 하나님께서는 전하지 않은 우리에게서 찾으신다고 엄하게 경고하셨지만 거기에 대하여 무감각한 우리가 된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귀감이 될 만한 사람은 누구일까를 생각해 보니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 고넬료였습니다. 고넬료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이스라엘에 파견된 로마군대의 백부장입니다.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의 최정예 부대에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린 장교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떤 경위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행10장 2절을 보면 "그는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2절)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군대의 지휘관으로서 자기나라의 종교도 아닌 유대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로마 군대의 지휘관으로 로마 황제 이외의 신을 믿는다는 것은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보여져 잘못하면 자신의 신변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고넬료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으며 구제의 사람이었습니다.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이것을 보면 그는 신앙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고넬료가 기도 중에 하나님의 사자로부터 "지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여 말씀을 들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고넬료는 의심하지 않고 곧 바로 세 사람의 종들을 욥바에 보냅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가 올 것을 확신하고 가족뿐만 아니라 일가친척과 친구들을 자기의 집으로 불러모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척, 이웃 친구들까지 함께 말씀을 듣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고넬료에게는 가족이 친구가 이웃이 함께 구원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고, 함께 은혜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들을 자기의 집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영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모든 가족들이 구원받도록 먼저 믿은 사람이 가족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나만의 구원으로 끝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나의 집이 함께 구원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홍수로 이 세상을 심판하셨는데 그때도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야! 네 온 집이 방주로 들어가라." 하나님은 노아만이 아니라 노아의 온 가족이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두가 비웃는 상황이었지만 노아의 온 가족은 함께 방주를 만들었고 온 가족이 방주 속으로 들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나만이 아니라 나의 가족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 예수 믿고 거듭났다면 제일 먼저 가족의 구원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 사랑하는 부모,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 없는 천국을 생각해 보세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습니까?
고넬료는 베드로를 자기 집으로 초청한 후에 식구들뿐만 아니라 일가와 친척, 가까운 이웃과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자기의 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결국 그들 모두가 베드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성령이 그들에게 임했고, 세례를 받고 구원에 동참케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번 추석에도 많은 손님이 여러분의 댁에 방문하신 가정도 있고 또 방문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초대하고 방문하는 일!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노력과 희생과 수고가 뒤따라야 합니다. 희생이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의 식사는 누가 준비합니까? 설거지는 누가 합니다. 시장은 누가 봐옵니까? 잠은 어디서 잡니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먹고 노는 일에 안 불러주면 섭섭하게 생각을 하면서도 이런 생명을 살리는 예배에 초청하면 얼마나 이 핑계 저 핑계 대는지 모릅니다. 때로는 자존심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넬료는 그들이 함께 구원받기를 원했고 은혜 받기를 강하게 원했기에 그들을 자기의 집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웃초청주일에 여러분의 가족과 일가와 가까운 친척들을 고넬료처럼 초청하십시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희생과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전쟁이기에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구원받아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며 찬양하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답고 행복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이웃초청주일을 사모하며 준비하십시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 가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정중히 그들을 초청하십시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10월 둘째 주일은 우리가 오랜 시간동안 기도하며 준비해온 이웃초청주일입니다. 앞으로 남은 이 기간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중요한 기간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기만 하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것에 대한 영적인 각성을 하고 고넬료처럼 우리 가족과 주변의 일가와 가까운 이웃과 친구들을 초청합시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고넬료가 초청하지 않았다면 그들 스스로 복음을 듣기 위해 찾아 왔겠습니까?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예수를 어떻게 믿었겠습니까?
성도여러분! 이 쉰들러의 생명에 대한 사랑과, 구해내지 못한 영혼에 대한 탄식 소리를 여러분은 듣고 계십니까? 쉰들러가 아우쉬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어 가는 유대인들의 아픔과 고통을 보고 인간으로서 그냥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전 재산과 삶을 드려 그들을 구원해 냈듯이, 우리의 영적인 눈을 떠서 지옥 유황불 속으로 달려가는 영혼들을 보고 우리의 모든 자원과 힘을 기울여 가족과 친척과 이웃과 친구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이 교회로 인도함 받고, 복음이 증거될 때에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날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들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성령께서 참으로 놀라운 일을 우리 가운데 행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10월 둘째 주일! 우리 가족의 인가귀도가 이루어지고, 친구들이 구원받고, 이웃들이 천국의 한 식구가 되는 놀라운 일들이 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잘 하였습니다
행 10장 24~35절 / 백장흠목사
사람이 산다는 것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 내가 만난 사람은 잘 만났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행복합니다.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한 마디로 만남의 문제였습니다. 만나서는 안될 사람을 만났기에 불행하게 사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지금 사는 이들이 나에게 참 잘 만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내가 교회를 잘 만났다, 목사님을 잘 만났다, 그런 생각이 들면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교회를 옮겨서 찾아보아도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가 없고 목회자를 잘 만나지 못했다면 신앙생활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들의 만남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선교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만남이었습니다. 이들의 만남은 우연히 아니었습니다. 이익을 위하여 만난 만남도 아닙니다. 기도 가운데서 성령의 인도를 받고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귀한 만남을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가 만났는데 고넬료가 “잘 하였나이다” 라고 칭찬을 합니다. 본문을 상고하면서 칭찬 듣는 베드로도 훌륭하고 칭찬하는 고넬료도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칭찬만 잘해도 인간관계에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좋은 부모가 되려고 하면 자녀를 칭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뇌 의학 분야에 권위자로 알려진 오시마 박사는 아이의 두뇌는 9살까지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칭찬 듣고 자란 아이가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꾸중만 듣고 자란 아이는 얌전하고 순수한 심성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칭찬은 에너지로 변하게 합니다. 칭찬을 들으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칭찬은 삶을 넉넉하게 해주고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칭찬의 법칙을 7:3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장점을 7 단점은 3으로 볼 수 있을 때 칭찬이 가능합니다.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Lucky seven(7)을 말합니다. 무지개 색깔이 7색입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도 7입니다. 대부분 시험점수도 70점 이상이면 합격이라고 합니다. 듣는 것도 7이라면 말하는 것은 3이면 좋다고 합니다. 꾸중도 3이면 칭찬은 7번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내가 세 가지 수고를 하면 일곱 가지 축복을 주신다는 것도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그런데 칭찬할 것이 전혀 없다는데 문제입니다. 칭찬하고 싶은 데 칭찬할 것이 없다. 그래서 못합니다. 베드로에게 고넬료가 칭찬하는데 이유가 있었습니다. 칭찬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칭찬 들을 수 있는 일을 많이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칭찬 듣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잘 하였나이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나도 사람이라 말하였습니다.(25절)
이 말을 잘하였습니다. 기도 중에 성령의 인도를 받고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납니다. 고넬료도 기도 중에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본 고넬료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발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절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뭐라 하였습니까? “나도 사람이라.” 엎드려 절하려는 고넬료가 나도 사람이라. 그러면서 그런 행위를 막는 베드로, 다 같이 겸손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왜 교만해집니까? 나는 당신보다 낫다는 생각을 가질 때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집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입니다.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엄청난 소유자가 되었어도 사람입니다. 하늘의 신비한 은혜를 체험하고 영적인 은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사람입니다. 영적인 은사가 있다고 자신은 보통사람보다 위에 있다고 교만하다가 마귀가 들어가 이단 노릇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나도 사람이다.’ 이 말을 잘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문제가 발생되는 것은 욕심과 교만이라고 봅니다.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처신하는 것이 욕심입니다. 그리고 자기자신을 모르는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가진 것으로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안다고 교만할 이유가 없습니다. 특별히 조심할 것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예수 오래 믿었다고 다른 사람이 받지 아니한 은사가 있다고 교만하면 그때부터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왜?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친다고 하셨습니다. 왜 분열이 되고 혼란이 옵니까? 잘난 사람들만 살기 때문입니다.
19세에 장원급제를 하고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은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지역의 유명한 스승 한 분을 찾아가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이 고을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 최고로 삼아야 할 좌우명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오. 그때, 스승은 말하기를 그건 어렵지 않소. 나쁜 일은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이 말을 듣고 군수 맹사성이 화를 냅니다. 그 같은 말은 삼척동자도 아는 거 아닙니까? 스승이 말합니다. 다 알지요. 문제는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는 거만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고 합니다. 스승이 말하기를 오셨으니 차나 한 잔 드시고 가시지요. 못 이기는 척하고 자리에 앉습니다. 차를 잔에 붓는데 계속 붓습니다. 스승님, 잔이 넘칩니다.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 붓습니다. 화를 냅니다. 잔이 넘치잖아요. 그때 스승이 말합니다. 찻물이 넘치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침으로 인품을 버리는 것은 모르시오. 이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일어서서 나가려다가 문지방에 세게 부딪쳤습니다. 그때 스승이 하는 말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겸손의 교훈입니다.
겸손하면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습니다. 자기주장을 심하게 하면 부딪칩니다. 왜 서로 대결합니까? 교만해서 그렇습니다. 겸손하면 정직합니다. 남을 속이거나 불편하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대로 진실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하면 자신을 비웁니다. 부족하다고 생각하기에 배우려고 합니다. 빈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편안합니다. 겸손하면 받아 드립니다. 내 것만이 제일이다. 그렇게 거부하지 않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나는 당신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면 교만입니다. 너보다 잘생겼다. 이것이 분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나는 너보다 더 많이 안다. 이때는 교만입니다. 수영하다가 물속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려고 하면 언제 구해주어야 하는지 아십니까? 자기 힘으로 헤엄치려고 하는 이는 그대로 놔두어야 합니다. 붙잡으면 구조하려는 사람까지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나의 힘으로는 못하겠습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그대로 인정할 때 도와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도시에 러시아워 시간에 대형트럭이 지하도로로 진입하였는데 차가 너무 많은 짐을 실어서 지하 위에 닿았습니다. 경찰이 동원되고 다른 차량에 끌려 내려가려 해도 꼼짝도 안 합니다. 이때 이것을 본 소년이 가까이 와서 아저씨 제가 차를 빼내는 방법을 알려드릴까요? 됐다 꼬마야. 어른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저리 가라 다 친다. 밀치면서 하는 말, 아저씨 타이어 공기를 빼면 될 거에요. 그때에 아이의 말을 듣고 타이어의 공기를 빼니까 차가 나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공기를 빼듯이 힘을 빼세요. 자세를 낮추세요. 막힌 것이 나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교만은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대접받으려 하고 존경 받으려고 합니다. 베드로는 나도 사람이다. 당신에게 그런 인사를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사람을 보고 엎드려 절합니다. 모두 잘하는 것입니다.
2. 율법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28절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절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고 말합니다. 잘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법이 왜 있어야 합니까? 나 자신을 위하여 법이 있는 것입니다. 급한 시간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는 분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신호등이 너무 많다. 신호등은 남의 길을 막는 것이 아닙니다. 안전하게 가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성경이 법입니다. 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다. 지키지 않으면 법이 아닙니다. 법의 기능이 있습니다
법이란,
1) 자신을 보게 하는 거울입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잘 지킨 사람이 있을 까요? 없습니다. 율법을 통하여 자신을 보게 하시기 위함으로 주셨습니다.
2)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않으면 심판이라는 경고를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사람이 아무렇게나 살게 되기에 무질서한 사회가 됩니다.
3)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뜻대로 살아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모세 시대나 예수님 시대만해도 법이 철저하였습니다. 법으로 이방인과의 교제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 율법을 초월하여 베드로는 고넬료를 만납니다. 하나님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법을 따르는 것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동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 여자 중학교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41명이 숨지고 50명이 부상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왜 법 때문이었습니다. 중학교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는데 남자 소방대원들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 법 때문입니다. 화재현장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종교 경찰과 비행방지선도위원들이 막았습니다. 여학생들이 살려 달라는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교내에 가까이 가면 범죄가 되기에 못 들어갔습니다. 이슬람 윤리법에 의하면 13-17세의 여학생은 베일을 써야 하고 베일을 쓰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죽어가는 여학생들을 구해주지 못한 것입니다. 남자가 교내에 들어가는 것이 죄라는 법 때문이었습니다. 들어가서 신속하게 구명활동을 했더라면 구했을 터인데 법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법대로 하면 선민인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 고넬료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고넬료를 찾아왔습니다. 이는 법을 초월한 것입니다. 법이 제한하고 고통을 주기 위하여 사용되는 것은 “죄 중에 죄”입니다. 우리는 육체건강을 위하여 신경을 쓰는 것 같이 영적인 면 거룩하게 사는 것에 대하여 영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법을 어기면 그도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현실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법대로 살면 손해 본다는 의식입니다. 적당하게 위반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고 알고 있습니다. 법은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병든 자도 고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법이란 우리자신을 보호하여 주기 위하여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법보다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순종하였습니다.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이것이 삶의 가치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법보다는 사랑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율법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우선으로 알고 실천하는 것 이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3.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잘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잘하였다는 말입니까?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선민은 이방인을 같은 수준에 놓고 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으로 장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사는 곳에 차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별이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차별화로 인하여 덕을 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잘못 하고 있는 3대 차별이 있습니다.
1) 인종 차별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도 있습니다. 그리스어에서 나온 “제노포비아(Xenophobia)”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노(Xeno)’는 ‘낯선 혹은 이방인’이라는 뜻이고, ‘포비아(Phobia)’는 ‘싫어함, 혐오’라는 뜻인데 합성어로 ‘제노포비아’ 즉 ‘외국인, 혐오증’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인이 보는 외국인에 대한 슬로건이 있습니다. ‘뒤통수를 바로 보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국인들은 낯선 사람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는 지역감정입니다. 이것을 병이라고 봅니다. 이미 망국병은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지역감정을 부추기면서 덕을 본 사람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상적인 사람이 보면 이것은 병입니다. 정치하려고 만나게 됩니다.
2) 성 차별입니다.
직장 여성 81%가 여자로 태어난 것에 불만을 가졌다는 통계가 발표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른데 비하여 많다는 것입니다. 선견심으로 미리 말하기 때문입니다.
선입감에 여인은 능력에서부터 격멸의 단어가 사용됩니다. 암탉이 울면 날도 새지 아니한다. 암탉이 울어야 수입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적다고 무시 하였는데 온 것입니다.
3) 나이로 차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세대차의 갈등이라는 것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젊은이들이 버릇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과거처럼 무엇을 가르치려 합니다. 20대와 30대는 코드가 맞지 아니한다고 불평을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감정세대입니다.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50-60대는 이해해달라고 합니다. 감동을 주지 못하면서 이해시키려 합니다. 젊은 시대는 문화적 욕구인데 50대 이상의 사람들은 경제적 욕구 세대입니다. 그들이 일하는 목적은 다 먹고 살자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해도 밥 먹고 합시다. 그럽니다. 젊은이들은 밥은 굶더라도 문화적 삶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고부간에도 갈등이 있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시금치를 먹지 않고 교회에서는 시편을 읽지 않는다는 유머가 있지요. 시어머니가 반갑지 않다는 것입니다. 갈등이라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잘했습니다. 이방인과 선민이라는 갈등과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념의 장벽이 있습니다. 60년간이나 이 장벽으로 우리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한 민족끼리 선을 그어 놓고 총뿌리를 겨냥하고 있는 곳은 지구상에 한반도 밖에 없습니다. 그로 인하여 좌파 우파 그러면서 갈등을 갖는 나라 이 장벽을 무너뜨리는 이가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예수 믿는다고 예수 사랑을 노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교파간에 갈등 아니 한 교회에서 예수 믿으면서 직분 자들 간에 가지고 있는 갈등의 장벽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기억하고 다짐할 것이 있습니다. 벽을 쌓지 말자.(아멘) 베드로는 하루 밤에 길고 긴 장벽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우리는 장벽을 무너뜨리는 잘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 파당을 짓고 상대를 비난하고 반대하려고 하는 것은 장벽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사에 죄인이 됩니다. 장벽을 무너뜨리는 주역이 됩시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1)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일은 우연히 아닙니다. 기도 중에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질문을 해야 대답하는 것이 보통 상식입니다. 하나님께 자꾸 물어야 합니다.
2) 찾아왔습니다.
자꾸 만나야 합니다. 너는 나하고 맞지 않아. 너는 틀렸어. 그때 장벽은 높아집니다. 관심을 가지고 만나주어야 합니다.
3) 좋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선입관념이나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너는 이방인, 나는 선민 어떻게 하나 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편협 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손주들이 생각하기를 우리 할머니는 나만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어린 손주의 잘못된 생각입니다. 할머니는 나만 아니라 다른 손주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선민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만 사랑하고 저 사람은 사랑하지 아니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장벽이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미워하고 적대관계를 맺는 것은 하나님께 죄짓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4) 함께 벽을 무너뜨리려고 해야 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에게도 문제가 있다, 같이 노력하자 이런 다짐이 있어야 장벽이 무너집니다.
5) 문제를 사람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경제적인 이해관계로 사람을 잃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건을 가지고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사랑하려고 해야 합니다. 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서는 모든 것이 풀려집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도 잘 살아야 합니다. 바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잘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믿으면 잘 믿는 것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잘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1) 겸손함을 갖는 것입니다. 나도 사람이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2) 법을 주장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3) 기도하며 장벽을 무너뜨리는 큰 일을 하며 살아감으로 잘 하였나이다 칭찬을 들으면서 주님을 섬기다가 축복과 상급을 받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성도의 행복
송기성목사 / 행 10:30~35
C.S.루이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신성한 행복의 필수 요소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성한 행복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행복의 필요 요소는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결코 불행해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고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도 칭찬해 주고 존중해 줍니다. 바로 그런 사람 중에 하나가 고넬료입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하고 있는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 곧 로마의 장교였습니다. 그의 이름 ‘고넬료’는‘뿔’이라는 뜻입니다. ‘뿔’은 ‘능력’과 ‘권력’을 상징합니다. 그는 그의 이름처럼 권력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께서 기억해 주시는 사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해 주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베드로에게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Now we are all here in the presence of God.)라고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in the presence of God)라는 의식과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구제를 기억하십니다.
고넬료,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었습니다 (행10:2).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행10:2)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항상’(constantly)이란 ‘언제나’, ‘끊임없이’, ‘빈번하게’, ‘변함없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막강한 권력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기까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할 뿐만 아니라‘백성을 많이 구제하는’(행10:2)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중히 하였습니다.
어느 날 제9시 곧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고넬료는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환상 중에 하나님의 천사가 들어와 ‘고넬료야’(Cornelius!)라며 그의 이름을 부르고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 되었다’(행10:4)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천사는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행10:31)라며 사람을 욥바로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하였습니다. 고넬료의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구제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와 구제는 반드시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고넬료의 신성한 행복, 그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할 뿐만 아니라 백성을 많이 구제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림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며 사람들을 많이 구제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때 우리도 고넬료처럼 하나님 앞에 있는 성도로서 신성한 행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시리아 난민 참상이 날로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터키 남부 해변으로 떠밀려온 시라아 어린이 에일란 쿠르디(3)의 시신이 터키 여기자 테미르의 카메라에 담겨 온 세상에 그 처참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녀는 CNN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쿠르디를 본 순간 겁에 질려 얼어붙었다”면서 “시신이 어린아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고 슬펐지만 이 비극을 빨리 세상에 알리는 것이 최선이었다”고 전했습니다. 쿠르디 가족 등 난민 6명이 탄 고무보트는 터기를 떠난 지 1시간 만에 뒤집혀 쿠르디와 엄마와 형(5)도 숨졌습니다. 사실 쿠르디 가족은 캐나다에 있는 가족을 후견인으로 내세워 지난 6월 캐나다에 난민 신청을 했다가 거부당했습니다. 쿠르디의 얼굴을 모래사장에 대고 엎드려 죽어 있는 사진은 ‘인류애가 사라져 버렸다’는 제목으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갔습니다.
헝가리의 페트라 라슬로 카메라 여기자는 헝가리로 넘어가다 난민을 단속하는 헝가리 경찰을 피해 아들을 안고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난민의 발을 걸어 땅바닥에 넘어뜨렸습니다. 그녀는 도망가는 난민 아이들을 발로 차기도 했습니다. 정말 인류애가 사라져 버린 비정하고 잔인한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따뜻한 인류애를 행동으로 보여 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난민들에게 음식과 옷을 제공하며 자기 집으로 오라며 환영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기 장난감을 난민 어린이들을 위해 내놓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유하 시필레(53) 핀란드 총리는 자신의 집을 내놓아 난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기업인 출신인 유하 시필레 총리는 인터뷰에서 “우리가 난민문제 해결을 위해 각자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면서 “모든 일을 사회에 맡기기는 쉽지만 한계가 있는 만큼 더 많은 시민이 스스로 행동할수록 상황은 더 나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불쌍한 사람의 발을 걸고, 걷어차며 넘어뜨리는 사람도 있고, 그와 반대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그들을 일으켜 주고 품어 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두 명의 카메라 여기자,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함께 슬퍼하며 인간애를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꿈과 희망이 있습니다. 반면에 발을 걸고, 걷어차며 넘으뜨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좌절과 절망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기도만이 아니라 기도와 구제입니다. 기도와 구제, 거기에는 신성한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고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 그의 신성한 행복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in the presence of God)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살아가는데서 비롯되는 행복인 줄 믿습니다.
야고보서1:27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경건은 하나님께 기도드릴 뿐만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며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며 사람들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의 구제를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며 신성한 행복을 누리게 해주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하나님 앞에 있는 자로서의 삶, 곧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며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구제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신성한 행복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받으십니다.
고넬료, 그가 주둔하고 있는 가이사랴 지역은 사마리아 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개 취급하였습니다. 인종적으로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멸시하였던 것입니다. 고넬료는 사마리아 사람은 아니었지만 사마리아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과의 거리가 먼 경건치 않은 사람으로 판단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10:2에 사도 누가는 그를 가리켜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경건한’(유세베스)이란 ‘독실한 신앙을 가진’, 또는 ‘바른 예배를 드리는’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바른 예배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고넬료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한 것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경건한 부하 한 명과 하인 두 명은 베드로에게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그를 칭찬하더니 그가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행10:22)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넬료의 부하와 하인들이 본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의를 행하는 의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이르렀을 때 이미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고 있던 고넬료는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10:33)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이사랴의 오순절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그토록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경청하는 고넬료의 모습을 통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그래서 그는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행10:34~35)라고 하였습니다. 고넬료의 신성한 행복, 그것은 바로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림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때 우리도 고넬료처럼 하나님 앞에 있는 성도로서 신성한 행복을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지미 카터(91) 전 미국 대통령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8월 20일 최근에 피부암의 일종인 흑색종이 뇌로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에모리대 병원에서 그는 방사선 치료를 받았으며 항암1회분도 투여 받았습니다. 의료진은 그가 고령임에도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완치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부모와 남동생, 그리고 두 명의 누이 등 가족 5명이 암으로 사망했다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내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잦은 해외 출장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3주 이상 조지아 주의 마라나타 침례교회에 출석해 봉사활동을 해온 그는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봉사활동은 매 주 할 것”이라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앞으로 살 날이 몇 주밖에 안 남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놀랍게도 아주 편안했어요. 항암치료를 받더라도 이번 주 주일학교 봉사활동은 빠지지 않을 겁니다.” 아멘!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재임 당시에 그의 인기는 별로 높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재선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보다도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며 많은 백성을 구제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암 투병, 심신의 고통 중에서도 유머와 웃는 낯을 잃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 그에게는 신성한 행복이 있습니다. 그의 신성한 행복은 그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in the presence of God)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을 살아온데서 비롯된 행복인 줄 믿습니다.
시편128편 1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 곧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며, 부부관계와 자녀양육과 건강장수와 자손번성의 복이 있습니다(시128: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며 신성한 행복을 누리게 해주십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하나님 앞에 있는 자로서의 삶,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신성한 행복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구분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종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착하고 게으른 종’이고, 다른 하나는 ‘악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종은 ‘착하고 충성된 종’일 뿐입니다. ‘착하고 게으른 종’이나 ‘악하고 충성된 종’이나 ‘악하고 게으른 종’은 결코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신성한 행복도 누릴 수 없습니다.
경건한 사람의 기도와 구제는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제하는 사람의 선행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다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통해서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에게 신성한 행복을 누리게 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착하고 게으른 종이나, 악하고 게으른 종이나, 악하고 충성된 종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신성한 행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진정한 감사
행 10장 24~35절 / 박지온목사
오늘 광고에 오늘 저녁예배가 오후예배가 은퇴 장로 우리 권사 은퇴 예배로 드리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또 추수감사 이럴 때에 상당히 저로서는 굉장히 좀 감회가 깊어요. 진짜 여러 가지로 많은 감사들이 있습니다 만은, 여러분과 제가 오랜 시간동안이지만은 그러나 그동안 점점, 점점 참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그래서 우리 복음 전할 수 있는 자리에서 감사를 드릴 수 있도록 인도하심을 늘 감사를 하고 개인적으로는 한 1년 반 계속 질병 속에 낙심 아닌 낙심으로 굉장히 그 사단의 공격 속에 있다가 하나님의 인도를 통해서 건강을 회복하게 되고 추수 감사를 드린다니까 참 감사한 마음이 있고요. 또 벌써 우리 교회가 은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장로님이 나오고 또 권사님이 나올 수 있도록 그동안 벌써 역사가 가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그러면서 그 역사 속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간다는 사실이 참 너무 감사한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 그래서 제가 우리 장로님이 나오셔서 기도하실 때 제가 속으로 저 고별기도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장로님도 보시니까 고별기도라고 생각하시고 그러시는지 모르지만 고래고래 기도하시더라 구요. 너무 감사하고...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당회하고 또 뭔가 의논이 되어서 장로님들이 은퇴하시면 뭔가 계실 곳이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아마 의논을 해서 교육관 별실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은퇴 장로님 계실 쇼파 하고 거기에 또 피곤하면 주무시라고 침대도 있습니다. 이제 좀 마련해 놓고, 그러면서 이제 우리 교회에서 다른 교회에서 오신 분들도 연세 많은 분들도 있고 이런 분들이 좀 멀리서 오시기 때문에... 그 동안 뭐 당회나 우리교회에 좀 쉬시려 그래도 좀 쉬기 힘들고 이렇게 해서 우리 장로님이 그 교육관 별실에 대장이 되셔 가지고 다른데서 오신 교인들하고 같이 쉬기도 하고 또 말씀도 같이 나누기도 하고... 혼자 계시면 그렇잖아요. 다른데서 오실 분들은, 쉬실 분들은... 그래서 좀 쉬셨으면, 우리 장로님하고 좀 좋은 대화도 나누시고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당회에서 그렇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거기 우리 송현교회 커피숍을 만들 작정입니다. 그래서 커피도 나누고 거기도 그렇게 계획을 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님들 은퇴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교회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좋은 하나님의 인도를 또 측면에서 또 먼저 된 자로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그렇게 환경을 만들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장로님도 장로님이지만은 권사님들은 은퇴 안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권사님들은 더욱 힘을 내시고 장로님은 은퇴하셨지만 아직 은퇴 안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 이제 일본에 내일 모레 내일 아마 오후쯤 되어서... 모레 제가 출발하도록 계획을 했습니다. 일본 간다는 마음을 갖고 일본 가겠다는 메시지가 나갈 정도로 이제 건강이 회복된 것 너무 감사하고 선교 답사 차 그랬습니다. 만은 선교는 이미 우리 선교 위원회에서 벌써 구체적으로 공식 배경이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만은 우리 명단이 나오고 아직 교회 발표가 안 되었기 때문에 누구, 누구다 그렇게 아직 안 되었습니다 만은 잠정적으로 벌써 우리 선교 위원회 준비가 되어서 이미 벌써 일본에 들어갔다가 나오시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적인 어떤 선교차원이 아니고 우리 총회적으로 그런 차원에서 교회는 이미 다 준비되고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총회에서 몇몇 분들이 날짜가 정해져 가지고 중요한 어떤 선교차원에 임원도 있고 이렇게 해 가지고 모아서 이제 답사를 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총회 몇 분들하고 류 목사님하고 구체적으로 갔다가 목요일까지 금요일 날 제가 돌아오게 됩니다. 위해서 많이 기도해 주시고 사실은 총회도 여러분과 제가 정말 총회를 이끌어 가야할 그런 중요한 우리 위치입니다. 그저 뭐 이끌어 간다고 해서 특별히 뭘 한다 그런걸 떠나서 참 기도해야 됩니다. 정말 우리 총회가 전도할 수 있도록... 이 시대에 왜 전도가 오해되고 너무 문제들이 급증하고 있는 이때입니다. 이때에 기도 이외에는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좀 집중해서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그런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믿고 제가 용감하게 떠납니다. 주님께서 역사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한번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주님의 인도를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산업과 생업과 또 위에 정치에 하나님이 성령으로 인도하셔서 흑암 권세 꺾고 참 주의 종들과 함께 승리하는 축복과 은혜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연약하지만 오늘도 주의 말씀 앞에 세우셨사오니 영육간에 새 힘 얻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말씀이 성취되는 놀라운 사실을 보게 하시며 오늘도 우리에게 참 감사가 주님 앞에 참 주님 앞에 서 있는 축복된 감사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흑암 권세가 꺾이고 성령의 역사 하심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축복의 감사함으로 역사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오늘도 모인 자들에게 있게 하시고 또 국문으로 학창으로 직장으로 나가있는 자들에게 주의 말씀이 함께 하시며 멀리 외국에도 나가 있는 주의 종들에게도 함께 하시되 우리의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주의 축복된 은혜의 약속이 계속해서 전달 되도록 역사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우리 교회 주변에 있는 동네로 또한 복음의 증거가 이루어지게 되겠는데 하나님 하나님이 계획하신 줄 믿습니다. 응답하셔서 약속하신 자를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축복된 역사가 체험되는 은혜를 주의 종들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성령으로 오늘도 주의 종들의 입술을 주장하시고 말씀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저녁에 오실 강사 분이 소개가 안되었습니다. 이일향 목사님이 오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마 특별히 은퇴는 또 연세 많은 분이 하셔야 되지 않나 싶어서 그렇게 초청을 했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기도록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4장은 말세에 대한 예언이 쭉 나옵니다. 그래서 말세에 대한 예언이 그대로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제가 전에는 신문을 보다가 집어 던지기도 하고 뭐 참 너무 답답해 가지고 그런걸 더러 했습니다 만은 요즘은 물론 저도 모르는 바는 아니지 만은 맞다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너무 절실하고 그래 가지고 우상으로 빠지고 문제로 빠졌을 때에 이런 필요가 안 나오면 그리스도께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시대이지만은 여러분들이 다 전도로 말씀이 준비 되어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여러분 준비되어야 붙여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과 저의 지금 된다 안 된다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복음으로 말씀으로 준비되어 있느냐 마지막 때에 주님이 원하시는 그 날에 여러분이 서 있고 제가 서 있어야 됩니다. 이게 지금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죠. 그래서 말세에 여러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만은 그 중에 마지막 부분에 제가 이렇게 한번 보았습니다. 24장 33절에 보면 앞에 쭉 말세에 대한 문제가 예언되고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지금 곧 와 있어요. 34절에"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말씀대로 다 되어져야 됩니다. 다 이루리라 35절에 뭐라 그랬냐하면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뭐라 그랬어요, 내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대로 성취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면서 중요한 힌트를 주었어요. 말세에 문제를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누구만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러면서 힌트를 뭘 주었느냐 "(마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그랬습니다. 말세에 힌트를 준 것이 뭡니까? 노아의 때처럼 된다. 노아의 때를 말세 때에 대표적인 모델로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노아 때의 특징을 한가지 딱 집었어요.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38절에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마 24: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절대로 그 사람들이 주님이 오시고 이 영적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이렇게 엄청난 결과가 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그랬습니다. "(마 24: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깨닫는 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말씀 깨닫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이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은혜와 축복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아 때! 노아 때의 특징이 뭐냐 하면요. 먹고 마시고 이랬거든요. 그래서 먹고 마신다는 말이 여러분 그냥 밥 먹고 우리가 그냥 살기 위해서 먹고 마신다. 이런 문제를 여기 말한 것은 아닙니다. 뭐냐 하면요. 말세가 될수록 뭐냐 하면요. 먹는 문화가 발전됩니다. 먹는 문화가 그래서 제가 이 음식에 너무 맛이 없어 가지고 어디가면 음식이 맛이 있을까 싶어서 심지어는 어디 가느냐 하면, 어느 골짜기 가니까 칼국수라는 게 있더라 구요.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은 골짝, 골짝 경치 좋은데 어딜 가든 하여튼 경치 좋은 데는 전부 음식점이라! 그래서 새삼 느낀 것은 여러분 음식점이 옆에 편리하기 때문에 간다. 그 말이 아닙니다. 일부러 뭐냐 그런 음식을 먹으려고 전부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는 것이 말세에 지금 현재의 문화입니다. 그래서 좋은 음식 뭐 먹을 수 있는 음식 전부 이 근처에 있는 게 아니에요. 심지어는 저 산꼭대기까지 전부 그래서 말세가 될수록 뭐냐 음식문화입니다. 점점 발전하게 되고...
그 다음에 말세가 될수록 뭐가 나오느냐 시집가고 장가간다! 시집가고 장가가야 일이 되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고 무질서한 남녀관계를 말합니다. 결국 말세에 특징이 뭐냐 하면요. 음란한 세대가 온다 그게 말세의 특징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될 수 있는 배경이 뭐냐? 노아 때처럼 노아 때에 일어났던 것처럼 되어진다.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노아 때에 왜 그렇게 이상하게 되었느냐? 그래서 하나님이 도저히 그냥 간과이 둘 수가 없어 가지고 뭘 했습니까 노아 때에 무엇으로 심판했어요! 물로 심판해버렸어요. 완전히 다 잠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밖에 될 수 없었던 노아 때의 배경이 참 중요합니다. 그래서 노아 때에 그렇게 했던 그 배경이 뭐냐하면 네피림 시대라 그랬습니다. 네피림 시대!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인정을 해야 됩니다. 네피림 시대라 그러는데 어저께 우리 그 목사님 메시지 핵심 중에서 뭐라 그랬냐 하면요. 주석 중에서 전부 찾아봐도 네피림이라는 단어 해석은 있어도 네피림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한군데도 없더라. 너무 놀라운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저도 같이 동의를 합니다. 네피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해석이 안 되어 있어요. 뭔가 단어 해석은 나와요. '네피림'이라는 것이 '나팔'이라는 동사에서 이게 뭐냐?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런 말입니다. 하늘에서 떨어졌다! 이 동사에서 '네피림'이라는 것은 명사화 된 겁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 떨어진 자!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물어봅시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뭡니까? 떨어진 자가 누구입니까? 천사입니다. 원래는, 원래는 천사가 하나님과 같이 높이 올라 가다가 떨어져버렸거든요. 그러니 그게 뭐냐하면 이 땅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져서 어디에 왔습니까! 땅을 지배하게 되었어요. 그러니까 공중권세 잡은 자, 세상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은 말세는 세상에 누가 역사 합니까? 전체세상 모든 문화와 권세를 누가 쥐고 있느냐?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이 말세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어요. 왜? 그들 속에 붙잡혀 가지고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완전 에베소서 2장 2절에 뭐라 그랬습니까! 1절에 보면 허물과 죄로 죽어 버렸고 그 다음에 2절에 보면 공중권세 잡은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뭐냐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역사하는 영이라. 사단의 역사입니다. 완전히 거기에 빠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지금 현재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노아 때도 그랬던 것처럼 사단의 역사가 이 땅을 딱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직 인정이 안 돼요. 이게 지금 안 들어오고, 여러분도 이게 안 들어오고 있어요. 그래서 이 사실이 배경이 되면서 뭐가 오느냐? 타락이 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음란은 뭡니까? 역기서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전부 사단의 배경입니다.
여러분 이상하게 뭔가 이상하게 남자를 보고 음욕이 불일 듯이 일어난다. 그것은 사단이 주는 마음이지 성령이 절대로 그렇게 안 해요. 자기 부인을 옆에 놔두고 이상하게 막 다른 여자보고 음욕이 불일 듯 일어난다. 그것은 누구의 역사입니까! 사단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그렇게 안 합니다. 완전히 사단의 역사예요. 그래서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사실을 여러분 개개인이 이걸 인정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사실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주신 이름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여러분과 제게 구체적으로 확인이 안 되면 오늘 제목이 추수 감사다. 진정한 감사 제목을 잡았습니다. 이게 나올 수가 없어요. 우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오늘 뭐 조건이 이상해서, 조건이 좋아져서 좀 돈을 벌어서 감사한다. 그 말이 아닙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범사에 감사하자!" 이 말이 범사에 감사하자! 말로 그러는 게 아니고 눈만 뜨면 '주여 감사합니다. 어찌 내가 이 자리에 섰습니까!' 이게 와야지 됩니다.
여러분이 부족해서 돈 몇 푼 하나님 앞에 돈 몇 푼 그러니 이상합니다 만은 우리가 정성껏 한다 그래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몇 푼입니다. 왜 천지 만물이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수억을 낸들 하나님께는 몇 푼입니다. 그걸 받고 그게 하나님께 도움이 된다.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범사에 감사할 때에 우리에게 몇 푼 안 되지만 그때에 하나님 앞에 '주여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 앞에 적지만 드립니다.' 이게 비로소 뭡니까? 감사하는 축복의 이게 통로가 되는 겁니다. 통로가 되는 것이지 근본적인 감사가 나오지 않는 상태에서 뭔가 추수 감사다! 그래 가지고 돈 내려 그러면요. 여러분도 모르게 '아이고 아깝다. 뺐기는 심정이다.' 그렇게 됩니다. 그것은 감사가 아니고 뺐기는 것이지. 그것은 교회에 뺐기는 겁니다. 감사가 안되면 그것은 절대 축복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 앞에 헌금할 때는 하나님께서 뭐라 그랬습니까? 인색한 마음으로 하지 말라! '정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게 뭐냐! 이 바탕에 안 깔리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어저께 윤성주 목사님이 강단에서 자기가 노이로제에 걸렸을 때에 노이로제라 그러면 여러분 더러운 병 아닙니까! 그때에 막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뭐냐하면 제일 확실한 구절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이걸 주로 외웠어요. 말씀의 능력이 힘이 있습니다. 이 사실이 회복되면... 그런데 그 사실이 회복되면 그 전에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회복될 수 있도록 나가 수 있는 배경이 중요한 겁니다. 그게 뭐냐하면 구체적으로 이겁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 땅을 지배하고 사단이 말세를 지배하고 사단이 그랬기 때문에 사단의 역사가 뭡니까? 한번 받아합시다. "사단은 거짓말쟁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래서 여러분 그 신문 한번 보세요. 신문의 모든 문제 일어나는 문제 이 땅에 있는 모든 문제, 공무원의 모든 비리의 문제, 검찰의 비리의 문제, 모든 기업들이 비리의 문제, 모든 문제들이 뭐냐하면, 한 마디로 요약하면 뭡니까? 거짓말입니다. 다른 게 없어요. 전부 거짓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제가 지금 사로잡혀 가지고 잘못 우리도 속아 들어가는 것이 뭡니까? 거짓말입니다. 나도 모르게 왜 거짓말 잘하게 되는 사람은 결국은 뭡니까? 사단의 인도를 받기 때문에 망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업도 뭔가 우리가 기업의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자! 물론 감사 많이 한다고 받는 것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배경이 여러분 벌써 한다 그럴 때는 달라지겠지 만은 돈 몇 푼 냈다 그래가지고 1년 동안 다 되었다. 그 말이 아닙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진정한 감사가 근본적으로 터져 나와야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여러분 감사 얼마 안 될지 모르지만 여러분 거기에 1000원도 좋고 2000원도 좋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할 때에 그때 뭐냐,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이게 하나님의 전부 은혜로 통하는 겁니다.
이것이 안 되게 되면요. 낸 다는 그 자체가 가증하다 그랬어요. 그래서 여러분 말라기서 보면요. 하나님께서 뭐라 그랬냐 하면요. 이제 너희들이 내는 습관적으로 어떤 하나의 형식적으로 내는 번재와 모든 재물들 귀찮다. 가지고 가라 보기다 싫다 그랬습니다. 왜 하나님이 없어서가 아니거든요. 여러분 중심입니다. 진짜 하나님 앞에 여러분들이 무엇으로 감사할 수 있는 배경이 되느냐? 이것이 중요하거든요. 그 감사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뭐냐 하면요. 사단이 이 땅을 다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는 것이 뭐냐 하면 타락이거든요. 그래서 음란이다. 이것이 타락 아닙니까! 음란이라는 것은 그것은 우리가 막연하게 세상이 음란스럽구나! 그 말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남편이 타락하고 자식이 타락하고 부인이 타락합니다. 이게 음란입니다. 그래서 오는 것이 가정이 깨지거든요. 점점 깨집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래서 오는 것이 뭡니까? 자녀들이 갈팡질팡합니다. 몇 일 전에도 신문에 나왔습니다. 원조교재 하는 아이들 붙잡아 가지고 배경을 봤더니만 벌써 구속을 해 가지고 아이를 아마 원조 교제하다가 붙잡혀 가지고 구체적으로 실형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 그라든가 그런데 신문에 나왔더라 구요. 제가 대강 훑어 봤는데 그 배경을 조사해 봤는데 어떤 경우냐? 가정이 깨져버렸어요. 이러니 가정에서 살 때가 없으니 그냥 돌아다니는 겁니다. 돌아다니다가 뭐가 있어야 되거든요. 돈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딸아이들이 어떻게 했냐 하면요. 원조교재 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인터넷에서 만나 가지고 돈을 얼마씩 받고 몸을 팔았던 겁니다. 그래서 다 잡혔어요. 배경이 그겁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는 배경이 뭐냐? 악한 사단의 역사입니다. 이걸 가지고 네피림 시대! 하늘에서 떨어진 자가 그 짓을 하는 겁니다. 이걸 지금 현재 여러분과 제가 인정해야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빠져 나올 수 있는 길이 다른 길이 없다니 까요. 오직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떠난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을 만나야 되고 그래서 죄와 저주에 빠진 저들이 죄에서부터 해방되고 참 평안과 안식이 와져야 됩니다. 이게 와져야 돼요. 그때부터 재앙이 변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과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때부터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고싶다 안 오고 싶다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리에 불렀던 겁니다. 그때부터 여러분이 넘어지는 것 같아도 넘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승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보면 지난날에 어렵다! 어렵다싶어도 모든 것들을 지금 여러분과 제게 전부 축복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 속에 신분이 바꾸어지면서 하나님이 완전히 책임지는 겁니다. 이때부터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 때부터 뭐냐 그때부터 오늘 이걸 구체적으로 좀 설명하겠습니다 만은 뭐 어디 있었느냐 마음이 다른 사람의 말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앞에 세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그 베드로가 갔을 때에 고넬료가 축복 받는 고넬료 아닙니까! 이방인을 전도하는 중요한 답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고넬료가 어떻게 했느냐?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머리 숙여 절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냐? 그게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이 말씀 앞에 서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이 이해가 안 되면 우리가 이 땅에 재난과 재앙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 참된 축복이 뭐냐? 참된 감사가 뭐냐? 자유 얻어야 돼요. 해방 받아야 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 완전히 묶여 있던 자리에서 개개인이 해방 받고 그 다음에 해방 받게 될 때에 거기에서부터 참 자유가 나옵니다. 그때부터 범사에 감사 참 감사하구나! 참 기쁘구나! 이것이 나오도록 되어 있어요. 이것이 안 되게 될 때는 구체적이 회복이 안 되더라 구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말만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금 여러분 기도할 때에 남편 위해서 자식 위해서 또 이 시대나 대구 지역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우리가 뭘 기도합니까? 네피림 시대! 주여 흑암의 권세와 타락하게 하는 이 악한 사단의 세력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히 결박시켜 주시옵소서. 꺾어 주시옵소서. 그때부터 뭐가 나오느냐? 여러분과 제게 특징이 하나 생깁니다. 말씀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천지는 없어져도 뭐만 안 없어집니까! 말씀은 다 성취되어야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안 없어집니다. 그리고 개개인에게 뭐가 지금 깨달아 지느냐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편 1편에 보면서 복 있는 사람음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요. 복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악인의 꾀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악인'이라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악하다!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시편 기록에는 구약 시편에는 악인이라 그랬어요. 하나님 떠난 자들... 그런데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다. 그 말은 뭐냐 하면요. 참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말에 세상사람들이 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뭐냐 오직 말씀만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축복이 이루어 져야 돼요.
그렇게 되면 뭐라 그라느냐? 저는 바로 시냇가에 뭐라 그랬습니까? 심은 나무라 그랬습니다. 다된 것 아닙니까? 여러분과 저는 시냇가에 심어졌습니다. 복음으로 신분 바꾸어졌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버렸습니다. 절대 망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망할 수 없는데 망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받아합시다. "시냇가에 심겨져도" 과실을 어떻게 맺어요.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습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돼요. 여러분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복음 받았습니다. 참 자유 얻었습니다. 모든 문제 해결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해결되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참 열매맺고 진정한 감사가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하는 과정에서 뭐가 나옵니까? 시절을 쫓아 그랬습니다.
여러분 그 시절이 어떤 시절입니까! 우선 우리나라는 이걸 참 이해하기 좋아요. 사계절이 너무 뚜렷해 가지고 봄, 여름, 가을, 겨울입니다. 언제 열매 맺습니까! 겨울을 지나서 그 삭풍이 부는 겨울을 지나서 그 다음에 봄꽃이 피어져서 그 다음 언제입니까! 여름 이제 과일이 성장해 가죠. 그런데 착각하기 쉬워요. 여름에 과일이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지금 현재 감이 많이 보이잖아요. 감이 지금 잎이 다 떨어지고 지금 나무에 붙어 가지고 빨갛게 열려 있는 것 이게 진짜 열매입니다. 그런데 여름에 빨갛게 익었다. 그건 뭡니까? 벌레 먹은 겁니다. 여러분 진짜 잘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아셔야합니다. 참 우리가 심겨졌다. 벌써 끝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완전 보장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능히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믿습니까!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과일이 있기까지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시더라 구요.
그래서 쉽게 말해서 여러분 예수 믿게 되면요. 뭐 저런 게 있느냐 싶을지 모르지만 복음 되었다 반드시 되게 되어 있습니다. 낙심할 것 없어요. 뭐 이건 복음 속에 있다. 남편이 어떻다, 자식이 어떻다 반드시 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는 게 아닙니다. 누가 합니까?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도 말씀했습니다 만은 이제 또 우리 기존 재직 회에서 뭐 받고 하니까 겁을 내는데, 여러분 기도제목 잡아서 내가 못하고 있으면, 그러면 누가 합니까? 내가 하려고 그럴 때는 무엇으로 빠집니까? 종교로 빠집니다. 애쓰면 애쓸수록 더 어렵게 돼요.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나는 무능하오나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제목 삼으세요.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주께서 구체적으로 놀라운 역사와 축복이 개인적으로 성취되어 이루어 나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러분 감사할 때에 솔직히 말해서 내가 몇 푼 드렸는데 우리는 정성을 다해서 다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몇 푼입니다. 그것은 몇 푼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먼지 같아요. 그런 하나님 앞에 정말 여러분과 제가 감사하는 감사를 크게 보시고 축복할 수 있는 통로가 뭐가 되어 있느냐 이 배경이 이해되어야 됩니다. 진정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 그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의 행동, 우리의 감사하는 모든 것이 무엇으로 크게 보입니다.
여러분 우리 애기 부모들 있잖아요. 아이 부모들이 저 밖에 나가서 아이들이 열심히 놉니다. 노는데 어쩌면 묘하게도 자기애가 우는 소리를요. 잘 듣습니다. 후닥닥 뛰어나가더라 구요. 보니까! 우리는 보통 듣잖아요. 그런데 왜 나가냐 싶었더니만 자기애가 운다 이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 여러분과 저의 모든 문제 우리 하나님 너무 잘 압니다. 울어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때그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러분과 제게 필요한 모든 것을 뭡니까! 준비시켜 놓을 것입니다. 기도응답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여기서 다 해결되잖아요.
그래서 오늘도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나의 모든 문제 해결자구나! 진짜구나! 이 누림이 바로 감사 자체입니다. 이것이 이루어 져야 됩니다. 이 사실이 실제가 되어야 되고 이 사실 속에 성령이 여러분과 제게 사실로 역사할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금 더 나가서 이미 예수 믿고 있는데 이미 벌써 예수 믿었는데 이게 금방 잘 안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잘 안 되는 사람들을 향해서 묵은 디이라 그랬어요. 묵은 디이라 그러니까 혹시 어떤 사람은 나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르지 만은 예수 믿고 3년만 넘었다! 다 묵은 디이입니다. 예수 믿고 10년 이상 되었다. 그건 묵은 디이 중에 묵은 디이입니다. 벌써 예수 믿었다. 어떤 면에서 1년만에도 묵은 디이로 빠진 사람이 있더라 구요. 여러분 은혜를 받으면 말씀이 날마다 새로워지게 됩니다. 새생명이 들어가면요. 이게 안 들어가면 묵은 디이로 빠지는 겁니다. 여러분 강단의 메시지가 임할 때에 날마다 뭔가 맛이 있어야 이게 새로워지죠. 이게 진짜 축복입니다. 안 그러면 묵은 디이로 빠져요.
제가 밥맛이 없어 보니까요. 밥 갖다놓고 참 진짜 짜증나더라구요. 그런데 밥맛은 한 2주 전부터 이 밥맛을 회복하니까요. 밥을 매끼마다 앉아서 먹을 때마다 새로운 맛입니다. 새로운 맛! 똑같은 밥이에요. 그런데 나한테는 새로운 맛이에요. 그래서 2주간만 잘 먹었더니만, 우리 어저께 강사목사님들이 모여서 어저께 토요일 날 모여서 박 목사 얼굴이 통통하다 그러더라 구요. 진짜 통통해 졌어요. 왜? kg수가 불었는데... 왜 그러냐 밥맛이 새로워지니까! 여러분 정말 우리가 감사회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정말 생명력이 회복되고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따라서 밥맛이 회복됩니다. 말씀의 맛이 회복됩니다. 주일날이 그리워집니다. 이날 말씀이 이상하게 정말 그냥 메시지가 붙잡혀지고 이 메시지가 한 주간 동안 기도 제목이 되어 버리고 이것이 안 되면요. 주일날 앉아 있다는 게 참 괴롭습니다. 오늘 다행히 눈감고 있는 분들이 없어요. 맛이 회복되는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이 날 막 눈이 감겨지고 이러면요. 진짜 고통스럽습니다. 나는 그것을 그렇게 비유하고 싶어요. 밥이 맛이 없을 때에 밥상 머리에 앉은 내 심정 나는 눈감고 앉아 있으면 저 사람도 내 심정과 같구나 그렇게 느낄 겁니다. 그런데 건강이 회복되니까 뭐냐 건강이 회복되고 나니 밥맛이요, 앉아 가지고 배가 불러서 못 먹지 밥맛이 없어서 못 먹는 게 아니거든요. 그리고 너무 배가 부르면 곤란하잖아요. 그러니 절제를 하는 겁니다. 요즘 몇 일간은 절제를 합니다. 반찬 그 맛이 없는 반찬이 이상하게 확 바뀌어 가지고 아무거나 먹어도 맛이 있는 겁니다. 똑 같은 여자의 솜씨인데 왜 그러냐 우리가 신앙이 회복되고 감사가 회복되고 참으로 사단의 역사가 깨지게 되면 신앙생활 하는 자체가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저절로 되어져버립니다. 기뻐 옵니다. 감사가 옵니다. 찬양이 옵니다. 그런데 뭐 십일조 해라! 감사해라! 그 말이 아닙니다.
나는 이 새삼스럽게 이 추수감사 참 얼마나 감사합니까! 들녘에는 하나님께서 그 동안 태풍이 불어 왔죠. 폭풍이 불어 왔죠. 그 다음 홍수도 왔죠. 그러나 농부의 손으로 심겨졌던 옥토에 심은 농사는 여러분 대풍이더라 구요. 나는 그걸 보면서 지난번에 제가 잠깐 좀 기도하는 문제 때문에 갖다 오려고 기도원에 갔다 왔습니다. 가는 길에 제가 쭉 돌아서 제가 사과밭에 들어가서, 요새 싱싱한 사과가 있는가 싶어서 조금 들어가서, 요즘 사과가 좀 그렇더라 구요. 사오면서 물어 봤습니다. 사과 농사가 어떠냐니까 대풍이래요. 아주 잘 되었데요. 다른 데는 몰라도 우리는 대풍이다. 그 다음에 나락 농사는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그것도 아주 잘 되었다 그래요.
그러니 제가 얼마나 감사한지 맞다. 하나님의 손에 심겨진, 옥토에 심겨진 사과나무와 같다. 태풍이 불어도 가뭄이 불어도 홍수가 져도 결국은 뭡니까! 시절을 쫓아 대풍이 됩니다. 여러분과 제가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문제 저런 문제를 다 들고 올 수 있습니다. 뭐 제가 교인들 보면서 이런 문제 저런 문제 다 들고 올 수 있습니다. 그때마다 주의 손에 잡힌 자들 주님께서 옥토에 심은 자들 결국 뭘 만듭니까 대풍년을 만들어서 추수 때에 풍성한 곡간에 여러분과 저를 추수해 드린다고 하나님이 약속했습니다. 그 배경과 그 축복이 궁극적으로 여러분과 제게 뭡니까 약속이 되어져 있어요.
그래서 여기에 속게 되는 배경이 왜 속느냐? 받아 합시다. "본질적으로 속는 속성 때문에..."이 말이 좀 이해하기가 곤란합니다 만은, 여러분과 제가 본질적으로 뭡니까? 진노의 자녀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이 본질적으로 누구의 손에서 나왔습니까? 사단의 손에 배경이 되어 있어요. 그러면 사단은 누구냐? 사단은 누구냐 그럴 때에 요한복음 8장 44절, 거짓말의 아비입니다. 그러니 입만 열면 거짓말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늘 거짓말에 속았던 속성이 여러분과 저의 습관입니다. 그래서 지금 축복이 약속이 되어져도 말씀을 믿는 것보다 누구를 더 믿습니까? 사단의 말을 믿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자꾸 속아 집니다. 자꾸 넘어져요. 받아합시다. "사단에게 속지 말자!" 사단이 속이는 중요한 것이 뭔지 압니까? 환경으로 그 다음에 의식주로 이런 것으로 자꾸 속입니다. 여러분 잘 산다. 못 산다. 잠시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도 답답해 가지고 누가복음 16장에 말씀했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들었던 겁니다. 너무 답답해서 여러분 잠시잠깐 이 땅에 행복을 누리는 것. 백 번, 천 번 누려도 영생을 잃어버리면 분하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거지 일생에 이 땅에 있을 때에 못 사는 것 같이 보여도 영생을 소유했다! 진짜 부자다! 그 이야기가 16장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잠시 잠깐의 고통에 혹은 의식주문제 때문에 속지 마세요. 정말 속지 마세요. 사단은 여러분들을 속입니다. 왜 영원한 생명 놓치고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놓치기 위해서...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를 앞에 두고 뭐라 그랬습니까? 내가 결단코 속지 않으리라! 이 땅에 대우받고 못 받는 것에 대해서 내가 속지 않는다. 여러분과 제가 정말 이 사실이 바로 되어 버리면요. 그 다음에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때부터 모든 문제는 뭐라고요. 기도 제목입니다. 여러분 사업하다 보면 잠시간 어려울 수도 있고요. 힘들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제로 삼고 낙심해 버리면 사단의 통로가 됩니다. 그것을 문제로 삼고 기도할 때에 누가 역사 합니까? 성령께서 낙심하게 되고 또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연적으로 낙심만 나오면 반대로 뭐가 나오는지 압니까? 낙심만 안 하면 받아합시다. "낙심만 안 하면 감사가 나온다."
저는 그 제가 개인적으로 질병에 한번 시달려 보면서 자꾸 문제가 낙심의 문제더라 구요. 낙심의 문제! 자꾸 낙심이 나와요. 그런데 어느 순간 막 그냥 뭐 우리 집에서도 옆에서 많이 역할을 했지만, 당신이 진짜 평신도 보다 못하다 그러고 이렇게 막 내 핀잔을 많이 받았습니다. 왜 자꾸 낙심을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가지고 제가 지난달에 별 소리를 다 했습니다. 내어놓아 버릴까! 안 된다. 치워 버릴까! 넘겨줘야 되겠다. 별 소리를 다 했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어느 날 '주여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나님이 여기도 하나님의 계획이 있지 않느냐!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고 그때부터 달라지더라 구요. 뭐냐하면 감사가 나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번에도 말씀했죠.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뜻이라 구요!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러면 뭐가 됩니까! 그 날에 열매가 맺혀집니다. 시절을 쫓아 열매가 나옵니다. 일본가게 되었다는 이 발표를 하고 개인적으로 이 말이 광고가 나갈 때에 뒤에서 참 내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 벌써 그렇게 치료가 되어 버렸어요. 진전이 되었어요. 낙심만 하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꾸 속아요. 여기서 신자들이 속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한 개 더 속는 것은 말씀의 눈이 안 뜨여지게 되면 받아합시다. "스스로 속는다." 말씀에 눈이 안 뜨여지게 되면 스스로 속아요. 이게 상당히 참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요. 중요한 것이 갈라디아서에 그렇게 말씀을 했어요. 갈라디아서 6장 6절부터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여러분 이 말이 무슨 말이냐? 목사 자리를 주라! 그 배경이 아니거든요. 여러분 목사에게 막 잘해주려 그러고, 제가 건강이 안 좋을 때에 여러분 모든 교인들이 전심을 다해서 여러모로 도왔습니다. 그 배경이 뭡니까? 저를 도와 가지고 나올 것이 뭡니까? 아무것도 없잖아요. 뭡니까? 목사에게는 말씀이 나와요. 그래서 목사님이 건강해져서 말씀 잡을 수 있도록... 이 문제거든요. 다른 게 아닙니다. 그래서 진짜 좋은 것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말씀! 이 말씀 증거 할 때에 여러분들이 말씀 위에 섰다! 이것이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 가장 중요한 배경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감정 속에 있다면 누가 이말 하면 이리 넘어가고, 저말하면 저리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이 있다 그러면 절대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말씀의 확신 가지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안 되면 자꾸 흔들리게 돼요. 다른 사람 말에 이리하라 그러면 이러고, 저리하라 그러면 저러고 그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래서 강단에 섰을 때에 말씀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하면 그것은 여러분 안 믿어야 되죠. 또 그렇다 그러면 강단에 설 자격이 없어요. 강단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뭡니까? 말씀입니다.
여러분 말씀 위에 든든히 세우면 모든 것의 끝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을 드러내는 사건과 일에 완벽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너희를 뭡니까? 온전하게 만들리라. 축복으로 인도하십니다.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여러분 메시지 때마다 들리게 되어 있어요. 이 너무 감사하죠. 이런 문제로 여러분 구체적으로 나오죠. 그래서 뭐라 그랬냐 하면요. 초대교회에 보면 사도행전에서 모든 성도들이 누구로? 항상 사도들로 더불어 사도들과 같이 사도들로 인해서 이게 뭡니까! 말씀을 통해서 말씀으로 더불어 말씀을 믿어 그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뭐라 그랬습니까? 사도들이 바빠지니까! 모든 집사를 세우면서 말씀했습니다. 우리 사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자들에게 당신들은 말씀과 뭐로 기도만 전무해 주시오! 그렇게 부탁했습니다.
지금 우리 다락방 전도 총회도 진짜 이 전도를 깨달은 사람에게 말씀과 기도만 전무해 주십시오. 아마 이런 때가 된 것 같아서 그런 문제를 조금 강조하고 싶어요. 말씀과 기도만 전무해라. 그 다음에 모든 행정문제는 다 뭔가 그걸 할 수 있도록 뒷받침, 도와 주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 문제가 이제 중요한 문제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저를 도운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도 내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흔들리지 않는 말씀! 성취된 말씀! 응답된 말씀! 그 말씀이 바로 약속된 것이죠.
그래서 7절에 보면 요것이 안될 때 뭐냐하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여러분 말씀으로 내가 말씀으로 서 있느냐? 말씀으로 내 인생을 심고 살았느냐? 그건 말씀으로 거두어집니다. 열매가 옵니다. 그런데 말씀이 아닌 다른 것에 내 인생에 심었다. 다 흔들립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존교회나 지금 우리교회가 자꾸 주의하고 염려하는 것이 그거 아닙니까? 말세에 뭐가 떠납니까? 말씀이 희미해져요. 자꾸 그래서 지금 어떤 때입니까 New Age시대가 와 가지고 전부... 대구에서도 했습니다.
뭔가 불교 그 다음에 뭐 유교 그 다음에 뭐 기독교 천주교 이래가지고 뭡니까? 같이 합동으로 모여서 가지고 이것이요 말세의 종교운동입니다. 복음을 떠났을 때 나오는 자연적인 문제입니다. 여러분 진짜 눈떠야 됩니다. 오직 이 땅에서 구원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적은 누구 이외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한 분도 없습니다. 성경의 선언입니다. 그런데 뭘 이걸 받아 이 문제가 희미해져 버리면 다 종교로 빠지게 되어 있어요. 다른 사람이 뭐라 그라던 지 여러분과 저는 말씀 위에 서 있습니다. 이게 안 되면요. 우상이 급증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대구에 우상이 급증한다. 자연스러운 추세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도 우상이 급증하더라 구요. 그 무슨 점쟁이들 미국에 있겠냐? 아닙니다.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잖아요. 말세에 하나님이 벌써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급증합니다.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 말씀 이외에 다른 것 믿고 다른 것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지 그것은 우리가 말씀 그럴 때에는 누가? 하나님의 역사! 바로 이걸 이해를 해야 되거든요. 그래서 8절 말씀에 뭐냐?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해서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뭘 거둡니까? 영생을 거두리라" 말씀이 임했을 때에 말씀으로 인도하여 나가는 누가? 성령께서 여러분과 저를 인도해 나갈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금요일 날 말씀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누구 손에 붙잡혔어요.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어요. 뭐 혹시 잘못 되어서 이상한 곳에 갔다. 괜찮습니다. 뭐 잘못 되어서 이상한 곳에 갔다.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으로 인도 안하고 정말 성령의 인도 못 받는 사람들은 꼭 들어야 될 말씀을 못 듣더라 구요. 그게 이상하죠. 그래서 제가 그런 어떤 감정을 가지고 설교하는데는 참 드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이 사람이 들었으면 이번 설교는 좋을 뻔했다. 좋겠다 하는 심정으로 메시지를 할 때는 항상 그 사람은 없어요. 이상하게 꼭 그 사람은 없더라 구요. 그게 나는 뭔 역사냐? 그게 보통 사람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제가 이 사람이 들으면 좋겠다 하고 했는데 듣는 것은 엉뚱한 사람이 들어요. 그리고 또 어떤 경우에는 교회를 향해서 질책이 나갈 때가 있어요. 그런데 정말 꾸중을 들어야 될 사람은 하나도 없어! 그래서 제가 하고 나오면 그런 일이 어쩌다가 보면 있어요. 그런데 집에 들어가면 여보 오늘 들어야 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데 고함을 지른 건 딴 사람한테 고함을 지르는데, 뭐 그런 설교를 했냐고...
여러분 참 그 들을 필요가 없는 것 같아도 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게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듣지를 못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 하면요.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 붙들어 놓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지, 어디 빠지든지. 잘못된 것 같이 들어간 것 같아도 이젠 누구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누구만 바라보면 됩니까? 오직 여러분들이 이것만 잊지 않으면 돼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 부르고 하나님 바라보게 되면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인도하십니다. 남편과 아내, 자식들! 여러분 누구한테 맡길 겁니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여기서 다 끝났습니다. 이때부터 뭐가 오느냐!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때에 정말 내가 뭔가 하나의 계기로 삼아서 주여 너무 감사합니다. 헌금을 했다. 추수할 때에 추수 감사헌금을 했다. 정말 하나님께서 크게 보십니다. 그때에...
여러분 우는 것도 크게 보이지만은 웃음도 크게 드립니다. 기뻐하는 것도 크게 들립니다. 나는 여기서도요. 내가 할아버지라도 한 다리 벌써 넘어가 버렸잖아요. 희락이 음성을 대강 알아들어요. 틀려서 탈이지만... 뭔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 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기억 정도가 아닙니다. 모든 문제를 다 아시고 있습니다. 완벽하게 책임지시고 이때부터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뭐라 그라느냐? 온전하여 지게 된다. 약속했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오늘 여러분이 정말 내가 부족하고 적지만 하나님 앞에 드린다. 이것이 엄청난 하늘의 영광과 잔치가 되어집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감사라는 것이 배경입니다. 오늘 사단에서부터 해방된 진짜 행방 된 기쁨 여러분 해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밖에 뿐입니다. 해방되진 않는 한 우리는 노예입니다.
그래서 흔히 그런 생각을 해요. 하나님이 또 여러분과 저를 예수 그리스도 피로 사 가지고 노예로 삼고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데 아닙니다. 하나님은 노예로 삼기 위해서 예수 피로 여러분과 저를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저를 뭐하기 위해서 자유하게 하기 위함이라. 할렐루야! 자유인입니까! 진짜 자유인입니까? 감사도 자유롭게 하게 됩니다. 진짜 자유롭게 내 마음에 하나님이 감사하라 그러면 감사한다. 추수감사니까 감사하라 그러니까 감사한다. 그 말이 아닙니다. 주여 정말 내게 자유 주셨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정말 감사할 수 있는 진정한 감사가 되어 지도록 오늘도 주의 이름 높입니다. 영광을 주께 돌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감사와 찬양이 여러분에게 구체적으로 축복으로 임해 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은 우리를 구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하심과 위로 충만 교통하심이 모인 무리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