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는 한국 조선산업의 발상지이자, 오늘날 세계 제1의 조선 강국을 이끈 견인차였다. 1887년 일본 다나카 조선소가 영도에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산업이 발달했다. 광복 이후 1960~70년대는 조선 수리업의 전성기였다. 대평동과 남항동 해안가에 자리 잡은 조선소에서는 '깡깡이 소리'가 마치 새 시대를 여는 건설의 망치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부산에 가서 깡깡이질이나 하여 보세"라는 노랫가락이 전해 올 정도로 영도는 귀환동포, 피란민, 이농민에겐 새 삶을 개척할 신세계에 다름 아니었다.
깡깡이 소리는 항해를 마치고 수리를 위해 조선소 독(dock)에 올라온 선박에 붙은 조개류와 녹 등을 쇠망치로 제거할 때 나는 소리를 일컫는다. 수리조선소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이지만 기술이 없는 사람도 할 수 있어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깡깡이질'이었다. 하지만 저임금에다 중노동이어서 남자들은 기피하기 일쑤여서 '깡깡이 아지매'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깡깡이 소리에 청력을 잃기도 했던 억척스러운 깡깡이 아지매들의 애환은 부산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대목이 되었다.
영도구가 곧 펴내는 '보물섬 영도 이야기 스토리텔링 100선'에는 흥미진진한 영도 역사가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조선소와 깡깡이 아지매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영도의 해녀' 편을 뒤적이면 '영도로 이주한 제주 해녀는 150여 명, 물질을 계속하는 사람은 20~30여 명이다(…). 이들의 근면성은 이후 '깡깡이 아지매'와 '자갈치 아지매'로 이어진다'고 기록했다. 부산으로 흘러들어 온 뿌리 뽑힌 민초 가운데 여성이라면 자연스럽게 조선소의 노동자로, 시장바닥의 장사치로 자리 잡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나아가 대평동 1·2가 수리조선소가 밀집해 있던 깡깡이 마을이 예술촌으로 거듭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부산시가 도시재생사업의 하나인 '예술상상마을 조성사업'으로 영도 대평동 일원 '영도 깡깡이 대풍포 예술촌'을 선정했다. 2017년까지 35억 원을 투입해 예술가를 위한 예술점방, 예술창작공간, 마을커뮤니티센터와 민박촌 등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깡깡이 소리는 이제 잦아들었지만, 한 시대를 살다간 고단했던 부산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나마 되새길 수 있어 반가울 따름이다. 임성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