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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들은 염불念佛하는 공부가 제일 좋지 않는가. 염불은 그 무슨 교리를 안 배워도 염불은 할 수가 있는 것이고, 염불하면 그때그때 마음도 재미지고 몸도 개운하고 또는 우리한테 부처님의 가피加被도 있고 또는 선신善神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이러니까 꼭 염불하면 다른 것은 거기에 다 들어간다. 물론 다 들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염불도 역시 염불도 우리가 염불삼매念佛三昧라, 염불삼매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삼매란 우리 맘을 오로지 하나로 모우는 것이 삼매지 않습니까. 삼매도 깊은 삼매 또는 낮은 삼매 그런 삼매의 종류가 많이 있습니다. 헌데 아무튼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우는 공부가 삼매란 말입니다.
삼매나 참선이나 다 같은 뜻입니다. 참선도 이렇게 하다보면 차근차근 우리 마음이 하나로 모아진단 말입니다. 우리 마음은 지금 산란스럽기 때문에 마음을 하나로 모우고 모아야 그래야 그 뭉친 힘, 뭉친 힘으로 해서 우리 근본根本 번뇌煩惱를 다 녹인단 말입니다. 그래가지고서 깨달음이 오는 것인데, 염불도 마땅히 오랫동안 하다보면 그때는 염불삼매에 들어갑니다.
염불삼매에 들어가면 그때는 어떤 것이 있는 고 하면 다른 삼매도 물론 그러나 특히 염불삼매는 그 삼매 가운데서 극락세계極樂世界를 훤히 맛본단 말입니다. 그 우리가 금생에 산체로 극락 갔다 온 사람도 있고 또 여러 가지 그런 말씀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께 그런 것도 역시 그런 염불삼매라든가 그런 것에 대해서 확실한 증거를 다 제시한 그런 경전도 보고 했으면 좋은데 경전을 안 보고서 그냥 덮어 놓고서 암중모색暗中摸索 같이 그렇게 해서 삼매를 좀 얻어 놓으면 그때는 그 극락세계에 갔다 왔다는 그것이 말입니다. 그런 표현들이 아주 그냥 서투런 표현들이 많이 있단 말입니다.
어떤 서투런 표현인가 하면 꼭 이 몸 가지고 간다든가 또는 우리 몸을 어디다 두고 간다든가 이런 말씀들이 사실은 우리 불교적인 의미에서는 굉장히 서투런 표현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비단 염불삼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참선을 하던지 간에 우리가 오로지 마음이 딱 모아지면 정말로 극락세계를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어째서 극락세계를 우리가 보는 것인가. 우리 불자님들 극락세계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이 세계는 이른바 사바세계裟婆世界라고 하지 않습니까. 극락세계 반대말이 사바세계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바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있는데 사바세계와 극락세계가, 사바세계는 여기가 있고 또 어느 한계 저 공중에 높이 올라가면 극락세계가 있다.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지 않겠습니까. 저 공중에 얼마만치 타고 올라가면 그때는 아, 공중에 공해도 없고 좋은데 가서 극락세계가 있지 않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불자님들 깊이깊이 잘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극락세계와 사바세계가 여느 국경이나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그 아까 제가 허두에 우리 마음의 그런 창고, 우리 마음의 보배 곳집을 발굴하라 그런 말씀을 드리지 안했습니까. 우리 마음이 얼마만치 우리 마음의 그런 보배를 얼마만치 파낼 것인가. 우리 마음이 얼마만치 깊을 것인가. 거기에 따라서 똑 같은 세계도 더 흐리게 보이고 더 맑게 보이고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양을 먹을 때도 기분 좋아서 먹을 때와 기분 나빠서 먹을 때와 소화 기능이 다르지 않습니까. 또는 똑 같은 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여건이 자기 마음이 쾌적할 때는 모두가 다 좋게 보이고 말입니다. 우리 마음이 슬플 때는 그렇게 그 영롱한 달빛만 본다 하더라도 눈물이 펑펑 나온단 말입니다. 그러나 또 기분이 좋은 사람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달님이 빵긋이 웃고 또 보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모든 존재라 하는 것은 우리 마음 따라서 그때그때 변동이 된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중생이 사는 사바세계와 극락세계도 우리 마음이 청정해서 성자의 그런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 자리 이대로 다 극락세계로 우리한테 그렇게 투영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디에 가고 오고 사실은 하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꼭 여기 떠나서 날개 타고 어디 가 가지고 날아서 인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 앉아서 염불삼매라든가 참선삼매라든가 삼매에 든다고 생각할 때는 극락세계를 훤히 체험한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대승불법大乘佛法의 돈오법문頓悟法門에 있어서는 사바세계裟婆世界 즉적광토卽寂光土라! 사바즉적광裟婆卽寂光이라!
적광토란 말 이것은 극락세계란 뜻입니다.
사바세계는 아까 말씀드린 봐 우리가 사는 세계란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 이것이 극락세계와 그런 국경이나 한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 우주라는 것은,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천지 우주라는 것은 본래로 극락세계입니다. 본래로 적광토라, 적광토 이것은 청정淸淨한 광명토光明土란 뜻입니다.
그 안락만 있고 행복만 있고 영원적인 그런 아주 그야말로 조금도 고통이 없는 사무친 그런 행복스런 세계가 극락세계 아닙니까. 그런데 극락세계가 그 우리 세계 떠나서 저 어디 공간에 올라가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극락세계라는 것은 무변무량無邊無量의 세계입니다. 끝도 갓도 없는 세계란 말입니다. 끝도 갓도 없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세계도 그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십시오. 우리 세계도 극락세계에 다 포함해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보배는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극락세계에 가서 보배를 우리가 얻어오는 것도 아닌 것이고, 어느 신통자재神通自在한 도인들한테 타가지고 오는 것도 아닌 것이고 우리 스스로 마음의 곳집 우리 스스로 마음의 보배 그 보배 문만 열러 놓으면 언제 어느 곳이나 모두가 다 극락세계 아님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극락세계를 우리가 감견感見이라, 느낄 감感자, 볼 견見자, 우리가 평소에 없는 것을 느껴서 보는 것보고 감견 그럽니다. 그런데 삼매에 들면 극락세계를 우리가 스스로 감견 한단 말입니다. 느끼고 보고 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서 삼매에 딱 든 그대로 이 몸 그대로 이 몸을 어디 공중 까지 솟아 올라가서 어디에다 맡기고 가고 그럴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참선으로 하나 염불로 하나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 삼매에 들면 그때는 참선參禪 염불念佛 주문呪文이나 다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삼매에 든다는 것은 우리 마음이 무념무상無念無想 상태에 든단 말입니다. 우리 생각은 그래저래 잡스러운 생각들 때문에 항시 산란스러우니까.
우리가 물을 본다 하더라도 명경지수明鏡止水라, 밝을 명明자, 거울 경鏡자, 티끌이 없는 그런 밝은 거울이나 또 그칠 지止자, 물 수水자, 파동이 치지 않는 그런 잔잔한 물이나 이렇게 되어야 이제 만상萬象이 거기에 비춰오지 않습니까. 바다 물에서 파동이 치면 그냥 여러 가지 모양도 이그러져 온단 말입니다. 그와 똑 같이 우리 마음도 산란스런 마음에서는 바른 것이 비춰올 수가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잔잔하니 우리 마음을 모아서 우리 마음을 모우기 위해서는 우선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됩니다.
도덕적인 계행戒行이 없으면 되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도 시라불청정尸羅不淸淨 삼매불현전三昧不現前이라! 계행이 청정해야 그래야 인제 삼매가 나온단 말입니다. 우리들은 아무런 준비 없이 삼매를 얻을 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준비가 필요하단 말입니다. 준비가 필요한 것은 이것은 세간적으로 도덕을 철저히 지켜야 됩니다.
부부간에도 아주 절조를 지켜서 정말로 절조 있는 내외간이 되어야 할 것이고, 또는 나이 자신 어른들한테는 우리가 공경해서 받들어야 할 것이고, 또는 본래 진리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남한테 많이 베풀어야 한단 말입니다. 베풀 것이 없으면 그때는 말로 베풀면 됩니다. 부드러운 말, 또는 유연스러운 말, 자비로운 말, 이런 것은 말로 베푸는 것입니다. 또는 표정으로 베푼다, 우리 얼굴로 베푼단 말입니다.
그 업장이 많은 사람들은 얼굴도 찌푸리고 그냥 보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항시 명량한 사람은 다시 보고 싶고 또 보고 싶고 한단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얼굴로 보시布施 하는 것입니다. 마음 보시라, 마음 보시도 돈 안 드리고 하는 보시입니다. 마음으로 그 사람의 행복을 우리가 기원 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의 행복을 기원 할 것인가 자기와 그 사람과 딴 사람이 아니 단 말입니다.
부처님 법은 항시 기본적인 근원적인데서 우리가 출발해야 됩니다. 남한테 베풀 때도 저 사람이 지금 곤란스러우니까 이제 내가 베풀어야 되겠다. 이렇게 베푸는 것은 범속한 사람들이 베푸는 것이고, 불교 신앙을 갖은 사람들이 베푸는 것은 저 사람과 나와 절대로 본래로 둘이 아니다. 그 본래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새삼스럽게 지금 지어서가 아니라 본래 그대로 본래 생긴 대로가 본래 둘이 아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 법은 이것은 자기 마음을 자기 범부심凡夫心을 온전히 비우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을 온전히 비운다고 생각할 때는 그 보다도 더 행복스럽고 그 보다도 더 축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것은 금생에 지금 자기 남어 있는 몇 십년 인생을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고, 또는 금생으로 해서 우리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이 세속적인 사람들 그 좋지 못한 견해 가운데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무엇인가 하면 끊을 단斷자, 단견斷見이라.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 인생은 금생뿐인 것이지 과거도 없고 또는 미래도 없다. 금생에 우연히 태어났다. 이 세상은 한번 일생 이것은 한번 뿐이다. 이것 보고 단견 그럽니다. 그러나 분명히 과거도 있고 미래도 있단 말입니다.
비록 과거나 미래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냥 끊임없이 과거도 이와 같은 몸으로 태어났고, 또 미래도 이와 같은 몸으로 태어날 것은 아닙니다. 과거세에 지은 업業 따라서 그 업에 맞추어서 업에 비례해서 금생에 이와 같은 몸을 받았고, 또 금생에 자기가 어떻게 행동을 했는가, 금생에 업 따라서 또 미래에 있어서 그 업에 맞추어서 업에 비례해서 또 우리가 미래 몸을 받는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 몸이나 또는 금생 몸이나 또는 내생 몸이나 같은 몸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보고 같다고 하는 나뿐 견해 이것보고 상견常見 그래요. 항상 상常자, 상견이라, 우리 중생들은 보통 단견 상견을 갖습니다. 우리 인간은 꼭 금생뿐이다. 금생뿐인데 아무렇게나 살면 어쩌는 것인가. 남의 등을 치나 남한테 기분 나쁘게 하나 금생에 잘 살면 그만이 아닌가, 이런 투는 그 단견입니다.
그러나 비록 전생과 내생이 있다 하더라도 전생과 내생이 똑 같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인들 가운데서 아까 말씀마따나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모든 것이 다 무상하다. 무상하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참 진리입니다. 어느 것도 무상의 굴레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일체 존재는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투었습니다. 다 그렇습니다. 이른바 인연생멸因緣生滅의 법이란 말입니다. 산이요, 냇이요, 또는 제아무리 강도가 강한 다이아몬드요, 모두가 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모양을 나툰 것이기 때문에 어느 순간도 그대로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 거시적인 두두러진 현상만 보기 때문에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그렇게 생각이 안 되겠지요, 자주 만나면 오늘이나 내일이나 똑 같이 늙지도 않고 같다고 생각할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한 몇 십 년만에 만나면 상당히 변모가 되어서 처음에는 잘 몰라본단 말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그런 속임수 때문에 그러는 것이지 사실은 어떠한 것이나 어느 순간 찰나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 순간 찰나찰나 변화해서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변화해서 마지않기 때문에 아무리 집착해 봐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친구지 간에 아주 친한 친구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느 때 인연이 다 하면 그냥 헤어질 수 밖에는 없단 말입니다. 그럴 때 무상無常의 도리를 모르면 저 사람은 꼭 나만을 좋아해야 할 것인데 저 사람은 왜 그러는고 이러나, 그러나 인연이 금생에 만날 인연이 다 하면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죽을 수도 있는 것이고 또 달리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도 더 좋아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럴 때 무상을 안다고 생각 할 때는 아, 당연히 그러는 것을 내가 새삼스럽게 무어 그럴 필요가 있을 것인가. 그냥 체념이 온단 말입니다. 그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런 아집이라, 나라는 고집 나라는 것이 이것이 본래本來 없는 것인데 이른바 무아無我인 것인데, 부처님 공부 하면서 무아를 모르면 부처님 공부 했다는 보람이 없습니다. 없을 무無자, 나 아我자, 말입니다. 정말로 참 무아인 것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우리가 도를 통하기 위해서 본래 무아가 아닌데 억지로 아, 무아를 공부해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본래로 무아란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와 같이 지금 형상을 현상적으로 모양을 나툰 것이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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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마음을 한곳으로 모으다 보면 염불삼매에 드는 군요.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큰스님 말씀은 언제 어디서 들어도 좋습니다 다음생에도 또 들었으면 좋겠 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우리 마음에 삼매에 들면 그때는 참선參禪 염불念佛 주문呪文이나 다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_()_